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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2001년에 촬영된 오사마 빈 라덴(왼쪽)과 아이만 알 자와히리(오른쪽), 사진출처 : War On Rocks, AL-QAEDA IS BEING HOLLOWED TO ITS CORE

 

세속적 성향의 아랍 민족주의와 이슬람 원리주의는 서로 간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들은 수십 년 동안 서로 충돌해 왔다. 서로가 추구하고 있던 가치관과 지향점이 전혀 다를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두 세속적 성향의 무슬림 계파들의 충돌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지역에 가장 큰 위협적인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실제로 아랍 지역의 모든 공화국들은 한결같이 이러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중동의 맹주로 군림해왔던 이집트의 사례를 보면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가 이끄는 자유장교단의 쿠데타 이후 집권한 군부독재 정권은 아랍민족주의를 내세우면서 시리아, 리비아 등과 아랍연합국가 건설을 추진하였으며, 실제로 1958년 시리아와 이집트는 통일아랍공화국이라는 국가연합을 형성하였으나, 1961년 시리아가 이러한 아랍 민족주의의 성향과 맞지 않아 먼저 이탈하면서 무너졌다. 리비아, 수단 등과는 논의 단계에서 무산되어 결국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들은 샤리아 신정국가 건설을 주장하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수십 년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이에 무슬림 형제단 등으로 대표되는 북아프리카 일대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1981년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을 암살하는 것으로 테러 행위를 자행하면서 아랍 민족주의 세력의 탄압에 응답하는 중동의 화약고와 같은 상황이었다. 이후 사다트의 후임자로 당시 부통령이였던 호스니 무바라크였다. 
 
무바라크도 이집트를 통치하는 내내 이슬람 원리주의자에 대한 탄압 정책을 고수하면서 적어도 이집트 국내에서만큼은 이들의 활동을 최대한 억제했다. 그리고 이는 이라크를 통치하고 있던 사담 후세인의 바트당 정권과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도 마찬가지로 이슬람 원리주의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이들을 강력하게 탄압했다. 
 
그러나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조지 부시 정권이 테러의 배후로 이러한 아랍의 독재 국가들을 지목한 것은 아랍 지역과 국제 정세에 무지한 대다수 미국인들을 상대로 무책임한 선동과 언론을 이용하여 이슬람에게 과도한 적개심을 품게했다. 


사실 우리 대한민국 국내에서도 아랍 민족주의와 이슬람 극단주의인 원리주의, 혹은 근본주의 등을 명확하게 구분해서 보도하는 언론이 거의 없었고, 일반인은 아랍과 이슬람에 대해 더욱 무지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필자는 기억한다. 당시 미국은 아랍 민족주의도 이슬람 원리주의자와 동일한 이념과 사상을 가진 자들로 오인하고 있었기에 미국의 목적은 리디아의 카다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이집트의 무바라크 모두 알 카에다와 같은 편인 위험한 자들로 판단했다. 

 

그러나 알 카에다가 처음부터 미국과 악연인 관계가 아니다. 오사마 빈 라덴이나 압둘라 아잠, 모두 소련과 싸우기 위해 미국의 지원과 더불어 대화 테이블에도 나란히 앉았던 긴밀한 관계였었다. 이러한 알 카에다가 언제부터 반미, 반유대주의를 표방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았지만, 대체로 제1차 걸프 전쟁 당시, 다국적군과 더불어 이라크를 폭격했고 그로 인해 대다수 원리주의 무슬림들의 기지들이 미군과 다국적군의 공격을 받은 사건이 터지면서 그 이후부터 알 카에다의 적개심은 미국과 서부 유럽을 비롯한 다국적 국가로 보게 되었다. 


이들 원리주의 세력들은 소련이 아닌 미국과 다국적 국가들을 적대국으로 규정하고 이라크, 예멘, 북아프리카, 차드, 수단, 필리핀, 태국 등 이슬람권이나 혹은 이슬람과 타문화권이 충돌하는 지역 위주로 전 세계에 다양하게 단체들을 설립하기 시작한다. 이와 더불어 서구에서도 알 카에다와 연결된 다국적 테러리스트들이 곳곳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유럽 곳곳이 테러의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들은 인터넷을 이용해 폭탄제조법, 검문통과법 등을 익히며 테러를 시도하는 훈련을 했고 이는 큰 문제로 자리잡게 되었다. 게다가 이와 같은 위험성을 일찌기 눈치채고 미국과 서방 세계에 경고를 했던 인물들이 있었다. 그는 판지시르의 사자라 불리는 아흐마드 샤 마수드와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당시 수장이었다. 두 사람은 알카에다와 탈레반이 서로 연계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과 그들이 구상하고 있는 테러계획 등을 미국에 경고했지만 미국은 이를 무시했다. 


1990년대 이후, 제1차 걸프전쟁이 종료된 다음 알 카에다는 미국을 상대로 지하드를 선포하고 테러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먼저 1997년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 대사관에 폭탄 테러를 가했으며, 이에 빌 클린턴 정부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알 카에다의 거점으로 간주되던 아프가니스탄의 훈련기지와 수단의 제약 공장에 토마호크 미사일 공격을 가함으로써 미국과 알 카에다의 갈등은 극단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수단의 제약 공장과 알 카에다 간에 실제로 어떠한 연결점이 있었는지에 대해 현재도 논란이 되고 있다. 게다가 이 제약공장이 남수단 쪽의 거의 유일한 제약 공장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남수단 아이들에게 필요한 백신과 의약품에 대한 보급을 끊어버렸다는 비난까지 이어지면서 클린턴 정부는 위기에 몰리게 된다. 그리고 당시애 클린턴과 르윈스키의 섹스스캔들을 덮기 위한 폭격이라는 음모론까지 나타나면서 클린턴의 입지가 점차 좁아지게 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프가니스탄의 마수드, 카르자이 등이 경고를 했었지만 미국은 알 카에다에 대한 초기 대응을 확실하게 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이유는 먼저 원리주의자들을 매우 쉽게 보았으며 미국이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지원한 무기로 미국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안이한 대처가 문제였다. 그리고 1990년대에는 오직 미국을 상대로 한 테러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인 것도 존재했다. 

 

오히려 아랍 민족주의 정부들을 향한 무수히 많은 테러를 저질렀고 여기에 미국과 연관된 몇 건의 테러가 자행되었던 것이었다. 이어 아프리카 소말리아 파병이 모가디슈 전투에서 참담하게 실패했기 때문에 알 샤바브에게 군사적으로 토벌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국제적인 군사 개입에 대단한 부담감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독자적으로 알 카에다를 토벌하기에는 미국 입장에서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미국이 알 카에다에 대한 초기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이슬람 내부 국가의 내전에서 미국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가한 일은 그 전까지 계속 있어 왔던 사건이었기 때문에 알 카에다를 초기에 진압하는 것이 아니라,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아랍 국가 정부를 지원하여 아랍 국가들이 알아서 진압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매우 소극적인 대응을 했었던 것이다. 이는 제1차 걸프전쟁에서도 나타나게 된다. 

 

사담 후세인이 무조건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영토에 다국적군을 단 군대도 배치시키지 않았다. 이는 전쟁에 대해 염증을 느끼는 미국의 중산층들이 보수주의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공화당에 더 이상 투표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빌 클린턴이 물러난 직후, 공화당의 입장에서는 그 다음 대선도 생각해야 했다. 

 

그렇기에 미국의 국내외 사정으로 볼 때 집중해서 알 카에다를 제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안일한 대처들은 미국에 돌이킬 수 없는 9.11 참사를 불러오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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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11 테러, 그 이후 23년, 알 카에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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