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2(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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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훈센 캄보디아 총리와 차기 총리로 낙점된 훈센의 장남 훈 마넷(오른쪽). 사진출처 : 크메르타임즈

2023년 7월 26일, 캄보디아의 훈 센 총리가 만 39년의 집권을 끝내고 퇴진했다.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오래 집권한 훈 센은 동남아시아 현대사에 있어 역사적으로 한 획을 그었던 거물급 위인이다. 그는 크메르루주와 폴 포트로 인해 "킬링필드"로 초토화되었던 캄보디아를 현재의 위치까지 일으켜 세운 공로가 있는 인물이다. 


이러한 훈 센을 평가하자면 명과 암이 확실한 인물이다. 훈 센은 베트남과 가까운 메콩강 일대의 캄퐁참 지역 출신이다. 그 또한 크메르루주 출신으로 중공 베이징으로 망명해 그곳에서 철저히 사상 교육받았다. 그러나 크메르루주가 킬링필드라는 초유의 악행을 저지르자 그는 점차 크메르루주를 멀리했다. 


결정적으로 그는 베트남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변경지대 자국민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자 크메르루주의 명령을 거부하고 1977년 베트남으로 도주했다. 이후 베트남에서 게릴라 훈련을 하며 반 크메르루주 군대를 양성하면서 베트남 공산정부와 함께했다. 


베트남군이 1978년 12월 캄보디아를 침공하자 베트남과 함께 크메르루주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도움을 주게 되었고 그는 베트남의 후원을 받아 캄보디아의 실세로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1985년 만 32세의 나이로 캄보디아의 총리가 되어 현재까지 캄보디아를 이끌어 왔다. 


그리고 1997년 7월에는 쿠데타를 일으켜 노로돔 시아누크 왕의 아들이자 원내 1당 주석인 노로돔 라나리드 제1 수상을 축출하고 절대 권력자가 된다. 캄보디아를 철권 통치하게 된 훈 센의 공적은 현재 캄보디아를 있게 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킬링필드"로 인해 지식인들이 모두 학살당하고 국가의 인재 풀이 말라 국가로서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던 국가가 캄보디아였다. 


당시 외신에서는 이러다가 캄보디아가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에 흡수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닌지 우려 섞인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훈 센은 베트남과는 다른 독자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채택하면서 "킬링필드"로 인해 초토화된 캄보디아를 정상화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두고 힘을 쏟았다.


"킬링필드"의 여파는 엄청났다. 우선 인재들이 없었기 때문에 캄보디아를 이끌어 갈 인재들을 키워내는데 엄청난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그 충격적인 여파는 킬링필드로부터 40년이 지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훈 센은 캄보디아라는 국가를 정상으로 돌리기 위한 노력, 각종 정책, 외교, 동남아시아에서 최악의 경제난에 직면했다.


캄보디아를 현재 그나마 국가다운 모습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훈센 총리가 39년을 집권하면서 해 놓은 그의 최대 공로라 할 수 있다. 훈 센 총리가 아니었으면, 그의 결단에 따라 "독재"를 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캄보디아는 없었을 것으로 본다. 물론 장기 집권에 따른 부작용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2001년 토지법이 개정되면서 농민이 경작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 5년 이상 아무런 분쟁이 없으면 소유권을 인정하도록 하고 있지만 결국 농민들은 토지들을 국가 소유로 빼앗겨야 했다. 캄보디아는 지난 10년간 연간 7% 이상의 고속 성장을 거듭해왔지만 임금 인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의류공장 노동자의 월급은 80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2013년 12월 말부터 80달러인 최저임금을 2배 수준인 160달러로 올려달라고 요구하며 파업을 벌인 의류 노동자들에게 무장경찰과 공수여단을 투입해 진압하면서 최소 5명이 사망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2013년 1월 5일에는 야당이 수개월째 시위장소로 수도 프놈펜 시내 위치한 자유공원을 사용했다. 


훈 센 수상의 큰아들 훈 마넷 중장의 부대원들로 추정되는 오토바이 헬멧을 쓴 사람들에 의해서 강제로 철거되었다. 야당에 대한 무차별적인 탄압은 캄보디아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결과를 낳았다. 2013년 7월 치러진 캄보디아 총선에서는 투표용지에 여러 차례 표기하지 못하도록 지워지지 않는 잉크를 도입했다. 


잉크가 라임주스 같은 액체에 쉽게 지워지는 등 표 조작 의혹이 생기면서 부정선거의 의혹을 받기도 했다. 2015년에는 자기 아들 세 명을 당내 고위직으로 승진시켰는데 훈 센 수상의 이 같은 조치에 자신의 권력을 승계하려 한다는 비난이 나오고 있다. 당시에도 차기 권력자는 장남인 훈 마넷이 세습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태였다. 


훈 센은 정책 홍보와 이미지 관리에 페이스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동시에 반정부 목소리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최근 7개월 사이에 캄보디아 당국이 온라인상의 글을 문제 삼아 최소 7명을 체포했으며 적어도 23명이 반정부적 글 내용으로 인해 공개적인 위협을 받고 있다. 


2015년 8월에는 한 야당 의원이 페이스북에 과거 캄보디아와 베트남의 국경선 합의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가 훈 센 수상의 지시로 체포했다. 또 제1야당인 캄보디아 구국당(CNRP)의 삼랭시 주석에게 입국 금지 조치했다.


이러한 조치로 2016년 11월 27일에는 유엔 인권기구와 갈등을 빚으면서 캄보디아 정부는 내정불간섭을 약속하지 않으면 유엔 인권사무소를 폐쇄하겠다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더불어 훈 센의 외교 성향은 친중·반미 성향을 띄고 있다. 


옆에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더 유용한 우호국인 베트남과도 관계가 깊다. 훈 센의 친중 경향은 장남 훈 마넷에게 세습하기 위해서라는 측면이 지배적이었지만 훈 센 일가의 강건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중국 정부의 협력은 필수적인 요소다. 


그 결과 캄보디아는 거의 경제적인 부분으로 볼 때 중국의 반식민지나 마찬가지인 형태가 되어 가고 있다. 문제는 이번에 권력을 승계받은 훈 마넷 역시 친중 행보로 진행하고 있다. 훈 마넷은 최근 베이징에 방문하면서 중국의 당 인사들과 여러 협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중국 자본과 중국으로부터 막대한 차관을 빌렸다. 캄보디아는 2005년에 석유와 천연 가스매장이 확인되었으며, 상업적인 채굴은 2011년부터 개시가 되었는데 여기에 입찰하는 기업은 모두 중국 기업이다. 그리고 2020년부터는 산유국이 될 전망이지만 상당수의 이익이 중국으로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훈 마넷 시대의 캄보디아는 훈 센 총리 시절과 비교하여 지금보다 더 발전할 수 있을까? 문제는 훈 마넷은 군 경험은 풍부하나 정치 경험이 일천 하여 경제적인 부분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낸 적도 없다. 훈 센은 훈 마넷을 차기 권력자로 점찍고 2015년부터 그를 데리고 다니면서 후계자수업을 했다. 


하지만 아직은 뭔가 보여준 것이 없다. 다만 훈 센보다 더 친중에 가까운 인사이기에 아마도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이전보다 더 심화할 가능성이 높다. 훈 마넷 정권의 미래는 현상 유지 아니면 훈 센 때보다 떨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예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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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훈 센 총리의 퇴진과 훈 마넷 정권에 대한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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