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2(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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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1926년 난창(南昌)에 도착한 미하일 보로딘 사진출처 : Wikipedia, Бородин, Михаил Маркович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사를 볼 때 이 두 나라는 진심어린 마음으로 서로에게 다가간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청나라 때는 러시아와 청나라는 적국이면서도 청나라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영토를 빼앗아 간 나라였고 청나라가 무너진 후, 중화민국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1913년에 최초로 수교를 맺었다. 


이후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로마노프 제국이 붕괴됐다. 그리고 러시아 임시정부에 이어 소비에트 볼셰비키 연방이 세워지자 수장인 블라디미르 레닌은 제3 세계의 민족주의를 지원함으로써 고립을 벗어나려고 했다.


이와 같은 제3 세계 민족주의 대한 지원은 쑨원이 내세운 국공합작 노선과 일치한 것으로 보인다. 쑨원은 공산당에 대해서도 매우 유화적인 인물로 유명했으며 공산당을 포용하려 했다. 


이는 쑨원이 공산당 자체에 대해 잘 몰랐던 부분도 있지만 삼민주의(三民主義)를 내세워 국공 통합을 실현하려 했고 민족주의(民族主義), 민권주의(民權主義), 민생주의(民生主義)를 함께 발현시킬 수 있는 파트너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런 이유 때문에 중공 전국 쑨원 기념관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소련은 이러한 쑨원의 정책에 대대적인 환영 의사를 밝히고 군사고문 등을 내전 상황에 놓여 있던 중국에 파견했다. 이 관계는 장개석 통치 때까지 지속된다. 중국 공산당에게는 코민테른을 통한 당대당을 지원하는 한편 국민당에는 군사고문 등을 파견했다. 


이와 같은 양다리 외교 작업을 한 이유는 당시 분열 중인 중국보다는 일본의 세력이 더 위협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1918년에서 1923년 사이에 적백 내전의 혼란기 당시 일본이 바이칼을 통해 중앙아시아를 넘보려 했고 백군을 지원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와 사할린을 점령하고 연해주를 휩쓸었던 전력이 있었다. 


겨우 러시아 전토를 적화에 성공한 소련은 이같이 동아시아에서 위세를 부리는 일본을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민당의 장개석이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로 국공합작을 깨고 국민당 내 공산당원들을 숙청하면서 소련과의 관계는 냉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당과의 관계는 파쇄하지 않았다. 이러한 양각 관계에 있어 중심이 되어 축을 유지한 인물이 바로 미하일 마로코비치 보르딘(Михаил Маркович Бородин, 1884~1951)이었다. 


미하일 보르딘은 1884년 7월 9일 오늘날의 벨라루스에 해당하는 러시아 서부 비텝스크 주의 야노비치라는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유대인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유태인으로 3세에 아버지를 따라 라트비아로 이주하여 유년기를 보내다 러시아의 중등학교에 입학했다.


16세의 어린 나이에 공산당 사상에 감명받아 라트비아 사회민주당에 참여하며 혁명가 활동을 시작했게 된다. 물론 보르딘은 벨라루스 출신의 라트비아 유대인 출신이라는 같은 볼셰비키 내에서 차별받긴 했다. 각종 지하 공작에 참여했고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에 레닌을 만나 발트 지역에서 공산 활동에 대해 훈장을 수여 받기도 했다. 


그는 이후, 러시아 제국 내의 경찰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체포되었지만 이내 석방된 후,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이주하여 10년 이상 시카고와 보스턴에서 생활하여 미국 내 좌익활동을 이끌게 된다. 이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여 미국 사회당에 가입했고 미국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다 러시아 혁명의 완수 이후 1918년 7월 모스크바에 귀국하게 된다. 


영국과 미국에서의 체류 경험으로 인해 영어에 능통한 보르딘은 레닌의 저작물을 영어로 번역하여 해외에 전파했고 중국으로 파견 후에는 국민당에 협력하면서 쑨원 등과 영어로 소통하기도 했다.


보르딘은 코민테른이 창설되자 그는 1차 대표 회의에 참여했으며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고 미주 지역에 파견되어 정치와 재무 업무를 담당했다고 한다. 멕시코에서도 브란트바인이란 가명을 쓰고 멕시코 공산당을 창설하고 이를 지원하기도 했으며, 인도 공산당원인 마헨드라나트 로이와 알게 되면서 인도 공산당의 창설에도 기여했다. 보르딘은 로이에게 소련에 가서 2차 코민테른 대표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추천했고, 1921년에는 오스만투르크로 가서 터키 독립전쟁을 지원하면서 빨치산 양성에 힘을 쏟기도 했다. 


1922년에는 조지 브라운이란 가명을 쓰며 영국에서 영국 공산당을 조직하는 혁명 활동을 전개하다가 1922년 8월에 체포되어 글래스고에서 복역했으면 6개월 후 석방되어 영국에서 추방되었다. 보르딘은 미국, 멕시코, 스페인, 독일, 영국, 터키 등에서 혁명 활동을 후원하여 코민테른의 해외 요원으로서 많은 경험을 쌓았고 최정예 해외 요원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마침 이때 중화민국의 쑨원은 천중밍이 영풍함 사건 등, 제1, 2차 호법 운동 등의 쿠데타 이후 해외 화교의 후원 이외에도 각종 재정 수입과 자체 군사력의 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이에 쑨원은 유일하게 자신들을 지원할 만한 국가와 세력을 찾게 되었고 열강 중 하나인 소련은 그와 맞는 파트너라 판단하여 소련과의 제휴에 집중하게 되었다. 


1922년 12월 20일 쑨원은 중국 주재 소련 전권대표인 아돌프 요페(Адольф Иоффе, 1883~1927)에게 무기, 화기, 기술,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며 소련 정부에서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어느 분야에서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문의하게 된다. 그리고 12월 말에 10만 명의 군대로 사천과 감숙에서 외몽골로 진입해 베이징을 탈환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게 되면서 무기, 장비, 고문단의 파견을 요청하게 된다. 


1923년 2월에도 쑨원은 소련 정부의 원조에 대해 요청했다. 소련 역시 동방 전략의 일환으로서 쑨원을 지원 결정하면서 양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게다가 중화민국을 어느 정도 지원하면 막강한 일본을 상대로 소련 인민이 피를 흘릴 이유도 없게 된다. 


여러 문제를 숙고한 끝에 1923년 3월 소련 정부는 쑨원에게 가능한 모든 원조 제공을 결정해 200만 루블의 현금과 일본제 소총 8천 정, 기관총 15정, 대포 4문, 장갑차 2대, 훈련원 1명을 중국의 통일과 민족 독립의 쟁취를 명목으로 파견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물론 쑨원은 이 제의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8월 16일 장개석 등을 소련에 파견하여 3개월간 소련을 방문하게 했고 1923년 여름부터는 소련의 군사 고문단이 파견되었다. 이에 중화민국에서 활동할 수 있는 최정예 요원이 필요한 스탈린에게 1923년 7월 31일 레프 카라한(Лев Карахан, 1889~1937)에게서 보로딘을 소개받게 된다. 


이에 정치국원들과의 회의를 통해 8월 2일에 이를 비준하여 보로딘을 쑨원의 정치고문으로 임명하여 파견하게 된다. 이 외에도 보로딘은 베이징 주재 소련 전권대표 카라한과 협조하여 임무를 수행하고 모스크바와 서신 왕래를 하며 매월 1회 정기적으로 업무 보고를 한다는 것 등을 결정받고 중국에 대해 구할 수 있는 모든 자료와 코민테른의 대외 정책을 숙지하면서 중국으로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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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은 러시아와 대만 (중화민국)이 수교 맺은지 110년째 되는 해, 두 나라의 역사적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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