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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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자 인도차이나의 운명은 바뀌게 된다.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전체를 식민 지배하고 있었으며, 라오스를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라오스는 루앙프라방 괴뢰 왕국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게 제압되고 수도인 파리가 점령되자, 인도차이나는 비어있는 영토가 되었다. 

 

이 때 시기에 맞춰 라오스와 베트남, 캄보디아는 각각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선포하려 하였다. 우선 합법적으로 인도차이나의 주인은 독일이 프랑스 남부에 세운 비시 프랑스였으나, 하지만 비시 프랑스는 나치의 괴뢰 정권이었고 식민지에까지 간섭할 정도의 강한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인도차이나의 주인이 되지 못했다. 라오스는 비시 프랑스의 지배를 잠시 받게 되었지만 누바인붕(Nubainvung)이라는 인물이 라오스 백성들을 선동하여 프랑스 식민 본부를 급습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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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1953년 5월 4일 루앙프라방에서 프랑스 장군 살란(Salan)과 시사방 바타나(Sisavang Vatthana) 왕자, 사진출처 : Noske, J.D의 "French Laos 1953"

 

우선 1940년 루앙프라방 왕인 운 캄은 누바인붕에게 보호를 요청했고 이는 받아들여졌다. 누바인붕은 루앙프라방에 입성하여 프랑스가 장악하고 있는 지역과 전투를 벌여 메콩 강 동부 지역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1940년 7월, 누바인붕은 프랑스의 아편 제조 회사인 무앙싸이를 공격하여 장악했다. 라오스는 이후, 8월에는 루앙남사, 폰사반, 방비엥까지 병합했다.

 

라오스는 여기서도 두 영역으로 나눠졌는데, 형식적으로 루앙프라방 군주가 다스리는 간접 지배 영역과 나머지 지역인 직접 지배 영역으로 나눠졌다. 이어 누바인붕은 비엔티안으로 진격했다. 비엔티안에는 비시 프랑스 군 약 7만 명이 수비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 군 7만 명이면 많은 숫자였다. 게다가 라오스와 비엔티안 지역은 산지라서 지형도 좋지 않고, 땅도 심히 척박해서 농사지을 수 있는 영토가 전체 영토의 3%에 불과했다. 


무엇보다도 메콩 강 자체가 군함이 통과하기엔 수면이 낮아서 추후 중국을 장악하려 군을 출동하는 것에도 난제가 있었고 이 7만의 군사도 철수가 예정 중이었다. 비엔티안에는 시내를 중심으로 몇몇 요새들이 설립되긴 했지만, 도시 내부를 제외하고는 방어시설은 전무하여 외적 뿐 아니라 라오스 독립군을 방어할 수 있는 시설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비엔티안의 경우, 방어 지역은 도시 내로 국한되었으며, 군인들은 도시 내 요새에서 방어에 치중해야 했다. 

 

그러나 이 지역을 지키는 7만의 프랑스 군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지 오래였고 대개 아편 산업에만 몰두하던 자들이었다. 그리고 프랑스는 베트남인들을 라오스로 이주시켜 라오스를 다스리게 했기 때문에 민중들의 베트남에 대한 적개심도 대단했다. 파죽지세로 남하한 누바인붕은 비엔티안의 요새를 붕괴시켰다. 결국 패배한 프랑스 군은 그대로 비엔티안을 버리고 태국으로 철군하였으며 통치 세력인 베트남인들은 대거 처형되었다.


그러나 라오스의 독립은 잠시, 같은 해 10월, 일본군이 라오스와의 국경을 넘었다. 누바인붕의 라오스는 일본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일본 또한 인도 정복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라오스와의 전투를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라오스는 일본군에게 버마와 인도로 가는 통로를 내주게 된다. 그러나 일본은 라오스를 점령하여 실질적으로 통치했고, 누바인붕은 일본의 통치에 협력했지만 망명정부 자유 프랑스는 일본에 대항에 민족정신을 부추기게 된다.

 

프랑스는 라오 족 쇄신운동을 지원하고 1942년 첫 라오어 신문이 발행되도록 도와주었으며, 프랑스가 지휘하는 첫 라오 족 보병부대를 창설했다. 1944년 말,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해방되면서 지도자 샤를 드골이 더욱 상실했던 식민지들을 회복하기에 관심을 쏟았다. 일본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1945년 3월 인도차이나 반도의 모든 프랑스 인들을 집단수용하고, 괴뢰 왕국인 루앙프라방 왕국의 시사방 봉에게 독립을 강요하게 된다. 


그러나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자 라오스는 대혼란에 빠지게 된다. 독립파와 복귀파가 대립하였던 것이다. 누바인붕은 일본이 철수하자 각 라오스 독립 운동 단체들과 내전을 벌이게 된다. 라오스에 각지에 진주한 독립 운동 단체들은 프랑스 샤를 드골 정부의 지원을 받아 비엔티안으로 진군을 개시했다.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버리고 간 무기들로 무장한 누바인붕의 군사들은 각지의 독립 운동 단체들과 곳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루앙프라방으로 진군하여 도시를 점령하고 루앙프라방 왕궁 등을 불태웠다. 이어 참파삭과 팍세에서 올라온 독립군과 루앙프라방을 점령한 독립군, 그리고 북베트남에서 건너온 프랑스 군, 방콕에서 출발한 태국군까지 비엔티안으로 진군했다. 누바인붕과 시사방 봉은 비엔티안의 요새들을 보수하고 이들 독립군, 프랑스, 태국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중과부족으로 인해 요새가 함락되고 누바인붕은 마침내 자결함으로써 생을 마감했다. 그러면서 라오스에 남은 일본의 잔재는 사라졌다.  


라오스가 공산화되면서 프랑스 및 일본에 협력했던 인사들에 대해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누바인붕(Nubainvung)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주도한 영웅이 아니라 일본에게 부역한 부역자로 낙인 찍혀 그에 대한 흔적 및 말살 작업이 이루어져 지금은 라오스에서 그 이름조차 거론하면 안 되는 금기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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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근현대사에서 그 이름이 금기어가 된 라오스의 영웅 누바인붕(Nubainv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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