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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스니아 정치 체제와 국가의 유래
    2016년 10월 12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총선과 함께 대통령 선거를 치루었다. 선거 이후, 부정 선거 시비와 개표 지연 등 여러 혼전들이 발생했고, 마침내 공화국을 대표하는 각 민족 계파별 3명의 대통령과 더불어 보스니아 전체를 대표하는 의원 42명, 그리고 각 체제별 의원들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 의원 98명, 스르브스카 공화국 의원 83명을 각각 선출했다. 선거 결과, 보스니아를 대표하는 3인 대통령으로는 세르비아계인 믈라덴 이바니치(Mladen Ivanić), 크로아티아계 드라간 쵸비치(Dragan Čović)와 보스니아계인 바키르 이제트베고비치(Bakir Izetbegović)가 당선되었고, 2016년 10월 17일 수도인 사라예보에서 취임식을 치렀다. 보스니아의 경우, 전쟁 이후 데이턴 협정에서 명시된 대통령 선거의 원칙에 따르자면, 3개 민족계파를 각각 대표하는 3명의 대통령이 향후 4년 동안 대통령 위원회를 구성하게 되며, 절대적으로 다수 득표한 대통령을 시작으로 각 대통령들이 8개월씩 번갈아가며 한 사람씩 의장 대통령을 맡아 통치하도록 되어 있다. 이번에 최고 득표로 당선되어 11월 17일부터 정상 업무를 수행하게 된 세르비아계 믈라딘 이바니치 대통령의 첫 해외 순방지는 대한민국이 되었다. 그는 2016년 11월 20일, 보수 민주 정당 연합체인 국제민주연합(IDU) 당수 회의가 열리는 대한민국을 방문하였고, 당시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와 면담하기도 했다. 보스니아는 한 연방국가에 2개의 체제라는 독특한 행정 체계와 함께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정치 형태를 갖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보스니아 정치 형태의 기반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3년 8개월간 지속된 보스니아 내전을 종결시킨 ‘데이턴 합의안(Dayton Agreement, 1955년 10월)’에 기인하고 있다. 이 합의 안에 따라 보스니아는 세르비아계가 장악한 49%의 스르브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과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계드리 연합한 51% 영토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Federation of Bosnia and Herzegovina)’으로 분할된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에 대한 역사적 기원으로 보자면, 테오도시우스(Flavius Theodosius, 347~395, 재위 : 379~395) 황제의 사망과 더불어 395년 로마 제국은 그의 아들들에 의해 동과 서로 분리되었고, 보스니아는 동, 서 로마 제국의 경계선이 되어야 했다. 이후 이 선은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한 서로마 제국 지역을 대표하며 성장한 카톨릭과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중심으로 동로마 제국 지역을 대표하며 성장한 정교까지 종교 및 문화적 분리선까지 되었다. 수도인 사라예보와 제2 도시 바냐루카가 포함된 보스니아 지역 명칭은 국토를 가로지르는 보스나(Bosna) 강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헤르체고비나(Herzegovina)라는 지명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사라예보로 침공해오기 이전, 이 지역의 영주였던 부크취치 코사챠(Stjepan Vukčić Kosača, 1404~1466, 재임 1435~1466, ‘스트예판 헤르제그로’도 불린다)가 지배하던 영지를 지칭하는 단어인 헤르제그(Herzeg)라는 명칭에서 유래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실제, 중세시대 보스니아 지역은 세르비아 독립 정교회를 세운 인물이자 세르비아 민족 성인인 성 사바의 헤르제그(Herzeg of Saint Sava)지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하에서 행정 구역중 하나인 헤르체고비나 구역(Herzegovina Sanjak)으로 명명되어지면서 오늘날까지 그 명칭이 이어지고 있다. 17세기 말에 들어와, 보스니아 지역은 다시 한 번 종교, 문화적 분할에 놓여져야 했다. 1683년 제2차 비엔나 전투에서 패배한 오스만투르크는 이 전투 이후로 서유럽의 수호자로 등장한 합스부르크 제국과 더불어 양 제국 간의 국경선을 재설정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조약을 맺게 된다. 이 조약이 바로 1699년에 체결된 카를로브치 조약(Treaty of Karlowitz)이며, 조약에 따라 크로아티아는 서유럽 카톨릭 문화권의 지평선이라 불렸고, 보스니아는 오스만투르크의 유럽 최전선이자 유럽 내 이슬람 문화권의 지평선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렇게 현재까지 이어 온 보스니아에는 국가에 각 민족 계파를 대표하는 대통령 3명과 내각이 존재하는 것 이 외에도, 보스니아는 각 2개의 체제 안에 또 다른 대통령들과 지방 내각들을 두고 있다. 실제로 2014년 11월, 세르비아계의 스르브스카 공화국에는 밀로라드 도딕(Milorad Dodik) 대통령이 당선되었고,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계 연합체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에는 지브코 부디미르(Živko Budimir) 대통령이 자리하면서 다시 한 번 분열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보스니아가 값이 비싼 정치적 비용들을 치르면서까지 복잡한 정치 조직을 지니고 있는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보스니아 내전과 같은 쓰라린 경험을 다시는 겪지 않겠다는 보스니아 지역 민족들의 고육책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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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슬로바키아 로베르토 피초 총리의 저격 사건, 그 배후는?
    슬로바키아의 로베트르 피초 총리가 어제 15일 총 여러 발을 맞아 매우 위중한 상태로 병원에 옮겨져 수술을 받았다. 각 소식통에 의하면 세 발 가운데 한 발이 명중되었다고 하고, 어떤 소식통에 의하면 다섯 발 중에 한 발, 혹은 여러 발 등으로 전해져 확실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초반에는 매우 위독하다 하였지만 수술이 잘 되면서 다행히 지금은 생명을 위협받는 상태는 아닌 것으로 전해졌다. 로베르트 피초 총리는 수도인 브라티슬라바 동북쪽으로 150㎞ 떨어진 핸들로바 지역에서 발생했다. 슬로바키아 정부는 이 지역에 있는 ‘문화의 집’에서 각료 회의를 열었으며 회의 후 피초 총리가 지지자들을 만나던 중 피격을 당했다. 각종 SNS를 통해 퍼진 현장 영상을 확인해 보면 경호 요원이 총에 맞은 피초 총리를 차량에 급히 태워 이동하고,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사건 용의자가 경찰에 제압되었다고 한다. 피초 총리는 차량 이송 중 위중하다는 구급대원의 판단에 따라 헬기로 옮겨졌다. 구급대는 피초 총리를 인근 도시인 반스카 비스트리카 병원으로 옮겼고, 수 시간에 걸친 응급수술이 진행됐다. 당초 피초 총리의 상태가 위중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마침 토마스 타라바 슬로바키아 부총리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피초 총리의 수술이 다행히 잘 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현재는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은 아니다”라고 전했다. 이를 두고 슬로바키아 정부는 이번 사건을 정치적 동기에 의한 암살 기도로 규정하고 친서방, 친유럽파로 구성된 야당의 행위를 의심했지만 뚜렷한 증거도 없는데다 총리에 반대하며 반(反) 정부 시위를 열어오던 야권은 피격 소식을 접한 뒤 이날 밤 예정됐던 브라타슬라바에서의 시위 일정을 취소했다. 야당이 시위 일정을 취소한 이유는 여당으로부터 총리 저격의 배후라는 의심과 더불어 정치적 보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인 측면이고 만약 시위를 계속했더라면 오히려 정치적으로 여당의 지지세가 강화되는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것에서 다소 현명한 처세를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범인은 사설 보안업체에서 쇼핑몰 보안업무를 하던 사람으로 시집 3권을 출간한 슬로바키아 작가 협회 회원인 유라이 친툴라(Juraj Cintula)로 밝혀졌다. 우선 그는 제1 야당인 친서방 성향의 진보 슬로바키아 소속은 아닌것으로 밝혀졌다. 서방언론에는 8년 전 친러 단체에서 활동한 적이 있던 친러시아 파라 했지만 이는 석연치 않다. 현재 극도의 친러 행보를 보이고 있는 피초 총리에게 친러주의자가 그를 피격했을리는 없기 때문이다. 서방이 그의 피초 총리 저격에 대한 이유에 대해 "Nesúhlasím s politikou vlády. (나는 현 정부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라는 BBC의 인터뷰 발언을 보고 피초의 친러 행위보다는 개인적 감정에 의해 벌인 일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8년 전에 친러 활동을 한 것과 현재 그의 행위는 별개라고 보고 있다. 그렇게 따지면 젤렌스키도 2019년 대통령 선거 공약에서 러시아와 화해해 우크라이나를 안정시키겠다고 내세웠을 정도로 친러 인사로 구분되었었고 우크라이나의 꽤나 많은 정치인들이 친러 정당 1세대, 2세대를 구성하고 있었다. 물론 전쟁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그렇기에 피초 총리를 저격한 친툴라의 8년 전 친러 행각과 현 행위는 상관이 없다고 본다. 다만 그는 작년 10월 세 번째 총리 임기를 시작했을 때, EU 정상회의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500억 유로 규모 장기 지원 패키지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하면서 EU와 엇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고질적인 부패 등을 이유로 추가 지원에 반대하면서 자국은 더 이상 우크라이나를 군사적으로 지원하지 않을 것이며 인도적 지원에 집중할 것이라 했다. 게다가 중국에서 열린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상 포럼을 계기로 푸틴 대통령과 회동하기도 했다. EU의 재정, 군사적 지원은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는 우크라이나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긴 했지만 전황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추가 지원금을 포함하는 EU의 2024~2027년 예산안이 통과되려면 27개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찬성해야 하는데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와 슬로바키아의 피초 총리가 계속 반대를 고수해 만장일치가 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피초는 우크라이나가 종전을 위해 러시아에 영토를 양도해야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 같은 점에 대해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입장에서는 불만일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피초는 올해 초, 우크라이나 서부 우즈호로드에서 데니스 슈미칼 우크라이나 총리와 회동을 가지면서 우크라이나의 EU 가입과 지원 안을 찬성하겠다고 밝혔지만 총격을 당하기 전까지 이에 대해 묵묵부답으로 일관해왔다. 게다가 하리코프 전선까지 밀린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EU의 지원이 절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원안 통과를 약속해놓고 아직까지 지키지 않은 피초 총리에 대한 원한 또한 대단하다. 그래서 여러 정황상 이번 피초 총리 피격의 배후에는 EU나 나토, 미국보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러시아 모스크바 크로쿠스 홀 테러에도 우크라이나가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고 (현재도 수사 중에 있다.) 여러 정황상, 친러 성향의 피초 총리에 대해, EU의 지원안 끌어내겠다는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않은 괘씸죄, 그리고 그동안 피초 총리가 해온 친러 발언도 있기 때문에 과거에 친러주의자였다가 변심한 시인 친툴라의 손에 어느 정도 돈을 주고 총을 쥐어 주며 이 같은 사건을 벌일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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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바이칼 호수에 대한 이야기
    부리야트 공화국을 둘러싸고 있는 ‘바이칼’은 부리야트 어로 ‘풍부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반면 부리야트가 존재하는 ‘시베리아’는 알타이어로 ‘잠자는 땅’이라 한다. 그러나 부리아트어로 시베리아는 ‘신(神)들의 마을’이 된다. 중국의 고서(古書)들은 모두 북방 민족들을 천손(天孫)이라 하는데 부모(父母)인 하늘(天)과 자손(孫)들은 샤먼(巫)들을 통하여 서로의 의사를 소통할 수 있었다. 특히 부리야트의 무(巫, 샤머니즘)의 의식은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북방민족의 전통 의식과 거의 같다. 부리야트의 샤먼과 무당들은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모시고 그 세계를 9단계로 나누고 있다. 아래는 지옥세계로 7단계로 나누어져 ‘7’은 좋지 않은 숫자이고, ‘9’는 최상의 길수로 나타난다. 역시 북방 민족들도 9를 최상의 숫자로 삼는데,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 같은 문화권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부리야트 인을 설명하며 바이칼 호수를 파악할 수밖에 없는데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바이칼은 부리야트 어로 ‘풍요로운 호수’, ‘부유한 호수’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바이칼 지역은 부리야트 이 외에도 퉁구스계 에벤키 족, 에벤 족, 타타르 족, 코사크 족 등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 종족 중 타타르 족은 몽골계통의 민족으로 몽골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정복한 이후 바이칼 지역에 널리 흩어져 거주하고 있다. 코사크 인들은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에 거주하며 비교적 최근에 들어온 민족이다. 러시아 인들이 시베리아를 정복하기 시작하면서 코사크 인들이 바이칼 지역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부리야트와 이전 퉁구스계 민족들과 함께 바이칼 호 인근에서 혼혈하여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한민족과 유사한 혈통, 언어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양민종은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 ‘바이’가 샤먼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지배적인 것으로 언급하면서 ‘샤먼의 호수’라는 뜻도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풍요로운 호수’나 ‘무속의 호수’로 지칭한 것을 볼 때 바이칼 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크고, 가장 깊고 차가운 담수호로 1996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바이칼 호수와 그 주변에는 약 2,600여 종의 동, 식물이 있다. 이 중 80%가 다른 지역에는 없는 세계에서 희귀한 동, 식물들이고, 그 토종의 비율 또한 세계 생태계 중에서 가장 높아 생태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류의 경우 52종 중 27종이 바이칼 호수에서만 서식하는 연어과의 어류인 오물(Omul)과 같은 고유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바이칼 호수에는 22개의 섬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섬이 ‘바이칼의 심장’이라 불리는 알혼 섬이다. 알혼 섬은 전체의 윤곽이 바이칼 호수와 같으며 그 상징도 흰 독수리로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는 알혼 섬의 상징이 바이칼에 서식한 흰 독수리로 연해주와 극동 지역에 서식하는 흰 독수리와 같다. 게다가 알혼 섬의 ‘샤먼 바위’는 아시아의 9대 성소(聖所)들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 바위는 돌 사원, 부르칸 봉, 동굴 봉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이 바위에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신비한 동굴이 있어서 동굴 안에서 샤머니즘 의식을 거행하였는데, 불교가 유래된 이후에는 부처의 상이 놓여 있다. 바이칼 호수에서 앙가라 강이 흘러나가는 지점에 있는 ‘샤먼바위’를 둘러싸고 바이칼 호수와 앙가라 강에 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전설에 의하면 아버지 바이칼은 335개의 아들 강과 외동딸 앙가라를 두었는데 그들은 모두 아버지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그래서 아버지 바이칼은 물이 매우 풍부하다. 그런데 외동딸 앙가라가 예니세이 강을 사랑하여 아버지의 물을 연인에게 퍼주기 시작했다. 이에 화가 난 아버지 바이칼은 외동딸 앙가라에게 큰 바위를 던져 저주했다. 그것이 ‘샤먼바위’라 불리는 두 개의 큰 바위로 나타난다. 앙가라의 수원(水原)에 위치하여 그 시작으로 간주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전설에는 또 다른 전설도 존재하고 있다. 바이칼에게는 외동딸 앙가라가 있었는데 앙가라는 예니세이와 사랑에 빠져 그와 도망치기로 결심하였다. 바이칼이 그 사실을 알고 앙가라의 수원에 돌을 던져 그 길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앙가라는 고집을 부렸고, 아버지 바이칼은 딸을 추격하라고 조카 이르쿠트(Irkut)를 보냈지만 그는 앙가라를 불쌍하게 생각하여 바이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앙가라는 예니세이와 만나서 계속 흘러가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335개의 강이 바이칼 호로 물길을 대주고 있다. 하지만 물이 빠져나가는 곳은 오직 앙가라 강 뿐으로 나타난다. 앙가라 강은 시베리아의 예니세이 강과 만나 북극해로 흘러간다. 그러한 강의 유속으로 인하여 이러한 전설이 생겨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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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6
  • 몰도바의 숨겨진 복병 "가가우지아 공화국"
    동유럽의 몰도바 남부에 위치한 자치 지역이 하나 있다. 이 지역을 흔히 가가우지아(Gagauzia)라고 하는 곳이다. 이 지역은 1,832km²의 면적을 갖고 있으며 크기는 제주도(1,846km²)보다 약간 작다. 이들 인구의 83% 정도가 투르크계 출신인 가가우즈 인이며 다른 투르크계 민족들이 무슬림들인 반면에 이들은 정교도인들이다. 가가우즈 인들이 사용하는 가가우즈어 또한 터키어와 거의 비슷해서 터키어만 하는 사람이라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터키의 공영방송인 TRT가 가가우지아에서도 공식적으로 송출되고 있다. 따라서 나의 경우, 터키어와 러시아어 모두 되기 때문에 어떤 언어를 선택해도 어려움은 없다. 그리고 가가우즈어 또한 우랄-알타이어 특성을 갖고 있어 한국어와는 어순이 같다는 장점 또한 존재한다. 현재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달리 가가우지아는 독립을 선언하지는 않았고 몰도바 정부로부터 자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에 명목상이나 실질적으로나 몰도바 내의 자치 국가로 자리하고 있다. 가가우지아의 인구의 80% 이상이 가가우즈인이지만, 도시에 사는 가가우즈인들은 일상 생활에서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가가우지아 공화국의 수도인 콤라트(Komrat)에서도 러시아어가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이에 따라 일상에서 가가우즈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가가우지아 전체 인구의 54.2% 정도로 나타난다. 러시아어는 전체 인구의 40.3%가 사용하고, 불가리아어는 1.6%, 루마니아어는 1% 정도가 사용하고 있다. 원래 가가우즈 지역에는 몰다비아인으로 알려진 루마니아계 민족들과 루테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몽골-타타르계의 크림 칸국이 침공하여 약탈을 당했고 이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이 지역이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대거 황폐화되었다. 18세기 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 지역을 합병하면서 인구를 보충했다. 로마노프 제국은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전쟁에서 가가우즈 지역을 전초 기지로 삼는다는 명목 하에 노가이 칸국의 노가이족 12만여 명을 정착시켰다. 그리고 이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유르트를 전부 불살러버렸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의해 강제로 이주된 노가이족들은 투르크계 민족으로, 4세기 훈족과 더불어 유라시아를 왕래하며 거주하던 다양한 유목 종족들이 혼합되어 형성된 민족이다. 4~8세기 동안에는 불가르족, 하자르 족과 같은 종족들이 노가이인과 합류했고 9~11세기에는 페체네그족, 11~13세기에는 킵차크-쿠만족이라 불리는 폴로베츠 종족이 노가이 민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은 노가이인의 출현에는 투르크계 민족들의 이합집산의 영향이 컸지만, 13세기 중엽 킵차크 칸국이 세워진 이후 몽골-타타르 족과 그로 인한 몽골 문화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노가이인들이 16세기에 서쪽 우랄 강 하류로 이주하기 전까지 자신들을 ‘만기트(Mangit)’라고도 불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본래 만기트는 몽골계 부족으로 킵차크 칸국의 동쪽에 주로 거주했다가 그곳의 투크르계 종족과 혼합되었다. 노가이(Nogai)라는 명칭은 사실 민족 이름보다는 킵차크 칸국의 분열 이후 세워진 노가이 칸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노가이는 킵차크 칸국의 사령관이자 모든 행정을 관리하는 직위에 있었던 인물로 킵차크 칸국의 칸(Khan)을 승인하거나 퇴위시킬 정도의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노가이는 유럽 국가들로 원정을 나갔으며 비잔틴 제국,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을 정복하면서 약탈했다. 노가이는 킵차크 칸국과는 별개로 도나우 강에서 돈 강까지의 영토를 직접적으로 관할했다. 이 중에서 우랄 강과 카자흐스탄 서북부에 위치한 엠바 강 사이의 영토들이 15세기 킵차크 칸국에서 분리된 노가이 칸국의 토대가 되었다. 노가이라는 민족명칭은 노가이라는 인물과 더불어 노가이 칸국으로부터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써 투르크-몽골(Turco-Mongol) 혼합체가 나타났는데 14세기의 차가타이 칸국과 킵차크 칸국이 투르크화 되었다. 이것이 노가이 칸국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들 노가이 칸국의 지배 계급은 투르크어를 사용하고 이슬람교를 믿으며 대부분 투르크화 되었다. 이들이 러시아에 정복을 당했고 정착한지 수십년 후 19세기 초 노가이인들이 대거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 탈주하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 지역에 불가리아인 난민들과 조지아인들을 비롯한 각종 민족들을 다시 가가우즈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원래 노가이족이 살던 비옥한 평야 지역들은 우크라이나의 선조로 알려진 코사크인들과 독일계 러시아인들이 정착해 농사를 지으며 옥토로 탈바꿈 되었으며, 해당 지역의 노가이인들은 오늘날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지아인이 되었다. 불가리아인 난민들은 자국의 영토인 트라키아 지방이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치하에 있었는데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오스만투르크에 독립하기 위해 봉기를 했던적이 있었다. 따라서 이를 진압하기 위해 오스만투르크 제국 내 비정규군들이 불가리아를 약탈하면서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내로 피신했으며 인도적인 차원으로 러시아는 이를 받아들여 가가우지아로 이동시켰다. 이들은 가가우지아에 살면서 노가이와 함께 같은 종족으로 동화되어 갔고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이 되었다. 이들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들은 본래 불가리아 제국의 옛 수도인 벨리코 토르노브 일대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학설이 21개가 있을 만큼 불가리아계 민족들의 출처에 대해 논란에 쌓여 있다. 오늘날 가가우지아인들 중 불가리아계, 루마니아계는 자신들이 13세기 발칸 반도에 정착한 셀주크투르크의 이젯딘 케이카부스 2세(Izzeddin Keykavus II 1236~1276)가 이끄는 오우즈 투르크인들과 그리스인의 혼혈 투르코폴레스의 후손으로 여기고 있다. 다만 이들 중 일부는 1307년 케이카부스 2세의 아들인 에세 할릴이 케이카부스가 이끌고 온 투르크인들을 이끌고 다시 아니톨리아의 다른 무슬림 투르크인들에게 귀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다만 이들을 두고 페체네그인이나 쿠만족 후손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 제2 불가리아 제국 시절에는 쿠만족의 상당수가 불가리아 군에 합류했던 적도 있었기에 그와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불가리아에서 오늘날의 가가우지아 일대와 부자크로 이주해오기 전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들은 자신들을 히리스티얀(Hiristiyan, Christian) 불가르, 하슬리(Hasli) 불가르 (True Bulgars), 에스키(Eski) 불가르 (Old Bulgars)로 칭했다 하며 당시 가가우지아라는 말은 일종의 비하적인 의미가 담긴 별칭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지역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러시아에서 루마니아로 넘어갔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에 속하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트란스니스트리아와 유사하게 몰도바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루마니아계 몰도바인들 사이에서 몰도바를 루마니아에 병합하자거나 루마니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가우지아 인들은 이와 같은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심각하게 생각했다. 1990년 콤라트에서 가가우지아인들은 자치 공화국을 선언했으나 몰도바 정부는 인정하지 않았고, 이어서 1991년 가가우지아는 독립을 선언한다. 몰도바가 독립한 이후, 1994년 몰도바에서 민족주의자들이 물러나고 정권이 바뀌게 되자 몰도바 정부는 가가우지아인들의 자치권을 부여하기로 약속했으며 가가우지아는 몰도바에서 자치 지역이 되었다. 2014년에 2월 한 주민투표에서 관세 동맹과의 결속 강화에 98.4%가 지지했고 EU와의 더 밀접한 결속에 대해서는 97.2%가 반대했다. EU와 결속에 대해 반대가 압도적이었던 이유는 루마니아가 EU에 속해 있고 몰도바 정부가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시도하기 있기 때문에 이러한 통일 과정이 EU의 중재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루마니아는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다. 그렇다보니 루마니아와 몰도바가 통일되었을 때, 가가우즈의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몰도바가 가가우지아인들의 처우까지 봐달라고 할 이유 또한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루마니아-몰도바의 통일에 대해 러시아가 개입하여 통일을 무산시켜 주기를 원하고 있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몰도바-루마니아가 통합될 시 가가우지아가 독립할 권리에 대해서 98.9%가 찬성했다. 즉, 두 나라가 통일되면 가가우즈는 독립 국가를 세우고 독립하겠다는 것이다. 실제 선거에서도 친러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지역으로 가가우즈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함께 러시아에 속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 또한 98%로 절대적이다. 그리고 2014년 총선에서는 친러파인 사회당과 공산당이 합쳐서 70% 가까이 득표하기도 하면서 가가우즈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더불어 몰도바 배후에서 친서방주의를 위협하는 큰 존재로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가가우즈가 독립할 경우 몰도바, 혹은 통일된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내륙국이나 비연속국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경제적으로 지금보다 더욱 낙후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2022년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남부와 동부를 장악하고 있는 러시아가 남부 몰도바 지역의 영토를 교환 내지는 몰도바로부터 매입하여 단절된 국토를 붙이려고 할 가능성도 열려 있는 편이다. 어쩌면 몰도바나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보다 더 다급한 지역은 가자우즈 자치공화국일 가능성도 매우 커지고 있으며 오데사가 아주 중요한 지정학적, 전략적 요충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남부를 장악하고 오데사를 점령하게 된다면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즈, 도나우 습지 일대까지 영역화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특히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즈와 도나우 습지 지역은 러시아가 흑해 북안을 완전히 장악하고 서안으로 진출해 친 EU 및 나토 성향의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 대한 견제가 가능한 곳이다. 오데사의 운명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가가우즈 공화국의 판세가 결정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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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6
  • 인종학(Ethnology)과 분류와 다윈 진화론의 후생적 사고로 만들어낸 우생론(Eugenics theory)의 단면
    인종학(Ethnology)은 서양 제국주의에서 태생된 학문이다. 흔히 이러한 인종학(Ethnology)을 두고 인류학의 파생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본래 생물학(Biology)에서 포유류 인간의 신체 외형에 따른 연구를 위해 따로 분리된 학문이다. 본래 서구 과학에서 인종을 분류하려는 사고는 계몽주의 시기인 17~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인종을 누구보다도 체계적으로 분류하려고 했으며, 분류된 인종을 두고 신체적인 특징이나 습성 등을 두고 생물학적인 부분과 의학적인 두 가지 개체로 나누어 파악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인종적인 부분을 19세기에 들어 좀 더 과학적으로 파악해보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졌는데 영국의 생물학자인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가 인체측정사진(Anthropometric photography)을 통해 분석하여 인종별로 위계화하고자 했다. 다윈 진화론의 신봉자이자 저명한 인류학자, 생물학자였던 헉슬리는 당시 지배적인 사고였던 ‘인종주의 사상’에 철저하게 경도되어 있었고 다윈처럼 인간은 진화의 최종적인 단계에 위치한다고 생각했다. 헉슬리는 인간 내부에서도 진화는 계속된다고 믿고 있었다. 즉 인간내부에서 흑인종은 가장 덜 진화해 침팬지에 가까우며 백인종은 가장 많이 진화해 침팬지에서 가장 멀어졌다고 주장했다. 이에 프랑스 인류학자 에두야르 티에송(Edouard Thiesson)이 1844년 브라질 원주민을 두고 인종학적 연구를 진행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 인류학자 루이스 아가시즈(Louis Agassiz)가 1850년 미국에 이주해온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들이 피부가 왜 검은지에 대해 피부를 색소를 구성하는 멜라닌의 촉진 변화 등을 연구하기도 했다. 호주의 애버리진(Aborigine)의 경우, 오스트랄로이드, 오스트로네시아 계통에 속하는 종족으로 약간 곱슬머리에 얼굴이나 몸에 털이 많은 점은 코카소이드 계통을 닮았다. 1688년 호주 북서부 해안을 탐사한 영국인 윌리엄 댐피어의 수기에 의하면 ‘그곳에는 사람과 비슷한 유인원들이 살고 있다.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키우지도 않고 자연이 제공 하는 먹이를 찾아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다니는 동물과 비슷한 존재들이 있을 뿐이다’ 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댐피어의 이러한 보고서는『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을 쓴 찰스 다윈 에게도 영향을 주어, 다윈은 인종 간의 우열을 가리면서 백인을 가장 우수한 인종으로 분류한 반면 애버리진을 가장 열등한 종족으로 분류하였다. 찰스 다윈 진화론의 배경에 우생론(Eugenics theory)이 깔려 있다는 것인데 다윈은 이 외에도 동물의 성장 변화에 고생물 변이성에 주목하면서 애버리진의 원형을 오랑우탄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뇌용량 CC의 크기에 따라 인류의 진화 정도를 책정하게 되었다. 애버리진은 세계의 어느 종족보다도 초기 인류에 가까운 모습에 속한다. 원숭이나 고릴라처럼 얼굴의 이마 부분이 툭 튀어나온 특징으로 인해 진화가 덜 된 듯한 느낌을 갖고 있다. 초기의 영국인들은 이들을 인간으로 분류하는 것조차 주저해서 원숭이류 중 가장 많이 진화한 유인원인 오랑우탄 정도로 취급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원인들이 결집되어 다윈의 진화론(Evolution theory)이 탄생하는 배경이 된다. 당시에는 그러한 인종분류가 우생론(Eugenics theory)을 위해 이용되는 용도였다면 1950년 이후 제국주의 시대가 종말을 향해 치달을 때쯤에는 "현생의 모든 인종뿐만 아니라 과거의 사람의 자연군(自然群)을 포함하여 그의 형성 시기·지역·이동·분화 등을 조사하고 상호간의 신체적 특징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사전적인 의미로 정의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인종학의 학문이 위와 같은 사전적인 정의에 한하여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매우 좋은 학술적 연구가 인종학이라는 학문이다. 그러나 인종학에서 파생된 우생론(Eugenics theory)이라는 것 자체가 인종학의 사전적 정의와 학문적 본질을 흐리게 만들고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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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5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내부 갈등이 잦은 이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유럽 내 종교와 문화의 대표적인 모자이크 지역으로 분류되어 복잡한 구조를 지니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는 보스니아를 중심으로 지난 2,000년 동안 이어진 종교, 문화적 분할의 역사와 더불어 보스니아가 자리하고 있는 지역이 발칸의 중심지로 지정학적 가치가 높다. 특히 터키와 서유럽을 왕래하는 통로에 있어 그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기에 디나르알프스라는 거대한 산악 지대에 있음에도 많은 외침을 받은 배경으로부터 기인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발칸 유럽 자체가 종교적으로는 카톨릭과 정교, 이슬람 등의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고 이에 따른 문화들이 유입되어 현존하고 있기 때문에 통상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Mosaic of Religion and Culture)’ 지역이라 불리고 있다. 실제로, 종교와 문화적인 분할에 따른 역사적인 격변으로 볼 때 보스니아는 이탈리아로부터 넘어온 카톨릭과 다수의 세르비아인들이 불가리아 제국으로부터 이어 받은 정교, 그리고 오스만투르크로 인해 개종된 세르비아계 무슬림의 종교 이슬람이라는 세계 3대 종교들이 복잡하게 얽혀져 있다. 이처럼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에 속하면서도 가장 복잡하고 혼재된 모자이크 중의 모자이크 지역(Mosaic area within a mosaic)이 된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수많은 외침을 당했고 다양한 국가들의 지배를 받았으며 동, 서로마를 연결하는 연결 고리의 역할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지정학적 배경은 그 수도인 사라예보에도 이슬람을 믿는 보슈냐크인들 외에도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인, 카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인 그리고 그 외로 비록 소수이지만 유태인들이 남아 있어 서로 복잡하게 혼재되었고 이들 함께 거주하면서 ‘유럽의 예루살렘’이라는 별칭까지도 얻었다. 사실 세계적인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 지역이라는 특성에서 볼 때 보스니아의 국제 지정학적 중요성은 냉전 시대 이후 펼쳐질 세계 질서의 특징이라는 내용을 주제로 <문명의 충돌(Clash of Civilizations)>을 집필한 사무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 1927~2008)의 저서 속 주장에도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다. 1989년에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인해 상징되는 냉전의 종결 이후 새롭게 변화해가는 국제 질서와 그 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세계 현대사적 충돌과 갈등들을 지켜 본 헌팅턴은 전 세계를 약 8개의 문명권, 서구, 라틴 아메리카, 이슬람, 중국, 인도, 정교, 일본과 아프리카로 분류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명권들 간의 충돌로 볼 때 여러 국제적 분쟁을 일으키고 있으며, 냉전 시대 이후, 국제적인 무력 충돌의 주요 요인 또한 바로 이와 같은 문화와 종교적인 차이에서 기인된다고 언급했다. 또한 헌팅턴은 자신의 저서에서 주요 문명 간 충돌의 대표적 사례로 ‘팔레스타인-가자와 이스라엘’ 지역과 더불어 ‘보스니아를 둘러싼 구 유고’ 지역을 들기도 했다. 그러나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라는 별칭과는 다르게, 다른 모자이크 지역에서 나타나지 않은 대립과 반목은 보스니아와 주 거주민들인 남슬라브계 민족들에게 고통과 어려움을 안겨 주고 있는 것이 현실인 상황이다. 보스니아의 내전 이후, 보스니아 내 민족들은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 국가인 그들의 현실을 서로 인정하고 민족들 간의 화해와 통합이라는 과제를 이룩하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해왔다. 하지만 지금도 이와 같은 갈등 양상은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갈등의 근원은 종교를 정신적 지주로 두고 그에 기인한 민족주의적인 불씨가 아직 남아 있어서 그렇다. 그에 대표적인 부분은 보스니아 내전이 종결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 한 국가 안에 3개의 큰 민족이 각각의 민족 교과서로 역사를 배우고 있다는 것에 있다. 실질적으로 보스니아는 세르비아계가 중심인 스르브스카에서 가르치는 역사 교과서와 헤르체고비나의 크로아티아계가 중심인 곳에서 가르치는 역사 교과서, 보스니아가 가르치는 사라예보의 각 학교들의 역사 교과서는 그 민족적 출발선에서부터 판이하게 다르다. 참고로 보스니아는 중세 시대 때 세르비아 네마니치 왕조의 지배를 받았던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있지만 스르브스카에는 이를 사실로 가르친다. 이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최근 보스니아의 교육 현실을 집중 조명한 크리스찬 사이언스 모니터(CSM)라는 단체가 그 원인을 보스니아의 분할된 교육 체계에서 찾고 있다. 내전이 종식된 이후 보스니아의 교육 정책은 각 체제별 지역 정부에 맡겨졌다. 이는 현재 보스니아에 지역별로 10개가 넘는 교육부가 존재하고 있으며 통합되지 않고 있기에 저마다 가르치는 교과서들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과정에서 3개 민족의 정치 지도자들은 각자의 민족적 특성과 향후 생성될 정치적인 분할에 맞추어 커리큘럼을 구성해 왔다. 따라서 각 민족이 자율적으로 펴낸 교과서를 통해 젊은이들을 교육하라고 지침을 내리는 실정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역사 수업 또한 이러한 민족 정부의 커리큘럼에 들어가 있다. 따라서 역사적인 기록을 중시하는 역사학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민족주의를 선동하는 정치가들은 역사서를 통해 때로는 사실과 다르게 자신들을 전쟁의 희생을 당한 피해자로 묘사하고 또 다른 민족을 침략자인 것으로 기술해 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대화가 불통이고 갈등을 심화시키는 것을 당연시하게 여기고 있다. 또한 자 민족에게 불리하거나, 국제적으로 논란이 될 수 있는 역사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하고 단순히 개요만 가르치며 근원적인 물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편파적인 역사 의식들이 다반사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에 있다. 이에 따른 한 국가 내의 서로 다른 역사 인식을 갖게 되는 혼란들은 서로 다른 상이한 역사를 배우고 있는 젊은 세대들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비뚤어진 역사인식은 오히려 남슬라브 청년들의 극우 민족주의적 색체를 강화시킨다. 다른 역사적 가치관에 따른 민족 간 화해와 조화로운 관계로의 진출은 더욱 더 어려운 과제로 남겨지고 있으며 체트니치와 우스타샤와 같은 극단적인 네오나치들을 꾸준히 양산해낸다. 용서와 화해라는 과제보다 끝없는 적대와 공격 만을 안겨주고 있는 이처럼 잘못된 역사 교육은 보스니아가 앞으로도 문화, 종교 간을 초월, 국가 내 모든 민족을 통솔하는 통합된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그러니 스르브스카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독립 시위가 일어나고 있으며 이같은 민족적 분열을 이용해 선전선동하는 정치인들 또한 문제다. 이는 비단 보스니아만의 문제는 아니다. 역사적으로 상호 간의 용서와 화해 없이 국가와 민족 통합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철지난 이념 논쟁을 앞세워 좌우 대립, 정치 정당 대립, 지역 대립, 남녀노소 갈등 등은 상호 간의 이해가 부족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거의 없다시피하기 때문에 작은 국가 안에서도 통합이 어렵다. 상호 간의 이해가 있어야 화해와 용서가 가능한데 이러한 이해조차 하지 않으려 하고 서로 간의 주장만을 내세우며 귀를 막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국민들의 이해 인식의 부족은 통합과 안정, 화해라는 대목의 평범한 진리가 통하지 않는다는 깨닫게 한다. 이러한 보스니아의 현실을 보며 우리 대한민국도 보스니아와 다를게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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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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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심이 천심인 것은 흐름 때문이다!
    민심은 천심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에 포함된 숨겨진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사실 공허한 언명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 우리가 이 의미를 왜곡해서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면,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것이 될 것이다. 사실 민심이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단숨에 민심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기 어렵다. 만일 이를 알아차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히 탁월한 혜안을 지닌 소유자일 것이다. 『맹자』의 이른바 이루장구(離婁章句) 상편의 구절들을 보자. “걸왕과 주왕이 천하를 잃은 것은 그 백성을 잃었기 때문이며, 그 백성을 잃은 것은 그들의 마음을 잃었기 때문이다. 천하를 얻는 데는 길이 있는데, 그 백성을 얻으면 이에 천하를 얻게 된다. 또 그 백성을 얻는 데는 길이 있는데, 그들의 마음을 얻으면 이에 백성을 얻게 된다.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데는 길이 있는데, 그들이 바라는 것은 모아주고 그들이 싫어하는 것은 그들에게 행하지 않으면 된다.”(桀紂之失天下也, 失其民也, 失其民者, 失其心也, 得天下有道, 得其民, 斯得天下矣, 得其民有道, 得其心, 斯得民矣. 得其心有道, 所欲與之聚之, 所惡勿施爾也). 걸왕은 중국 하(夏)나라의 마지막 군주로 포악하고 사치스러웠다고 알려져 있는데, 특히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술잔치를 뜻하는 주지육림(酒池肉林)으로도 원성(怨聲)이 높았다. 더욱이 걸왕은 충신들의 간언(諫言)이나 진언(眞言)을 전혀 듣지 않았으며, 결국 은(殷)나라의 태조인 탕(湯)왕에 의해 추방되었고, 하나라는 멸망했다. 은나라의 마지막 군주였던 주왕도 걸왕과 마찬가지로 폭군이었는데, 특히 주왕은 사람을 숯불에 태워 죽이는 형벌인 포락지형(炮烙之刑)으로 악명이 높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주왕은 현재 중국의 허난성 신샹시의 행정구역인 목야(牧野) 지역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서주(西周)의 무왕에게 패배했으며, 은나라는 멸망했다. 걸왕은 도주 중에 살해당했으며, 주왕은 목야전투의 패배로 자결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게 보면 민심으로부터 멀어진 왕은 물러날 수밖에 없으며, 이와 반대로 민심을 등에 업은 사람은 기존의 왕을 몰아내고 천하를 얻을 수 있는 명분을 갖게 된다. 그런데 맹자의 진술에서 천심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더욱이 이 진술은 천하를 얻는 방법이 민심임을 말하고 있을 뿐이며, 그 민심이 천심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를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은 바로 도(道)와 연관된다. 맹자에 의하면, 도는 천도(天道)와 인도(人道)로 구별된다. 그런데 이러한 구별은 순수한 마음의 진실이라는 뜻을 갖는 성(誠)에 근거한다. 맹자에 의하면, “성 그 자체는 하늘의 도이고, 성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도다. 지극히 정성스러운데도 남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경우는 없고, 정성스럽지 않은 데도 남을 감동시키는 경우는 없다.”(是故, 誠者, 天之道也, 思誠者, 人之道也. 至誠而不動者, 未之有也, 不誠, 未有能動者也). 종합해 보자면, 민심이 천심으로 된다는 것은 순수한 마음의 진실을 정성스럽게 추구하는 인간이 이를 도리(道理)로서 남을 감동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왕도 마찬가지로 그렇다! 이렇게 한다면, 왕이 백성을 감동시키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와 반대로 폭군의 경우에는 마치 자신이 천심을 아는 것처럼 자의적으로 통치행위를 하는 경우도 많다. 이것은 왕이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천심을 이용하는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민심과 동떨어진 천심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천심은 단지 가상에 지나지 않는데, 그 까닭은 아무도 천심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심이 천심이지, 천심이 민심은 아니다. 필자는 민심에 흐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흐름이 수시로 변화하기는 하지만, 방향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실로 민심의 흐름에 역행하는 일이다. 특히, 그 흐름이 좋지 않을 경우에, 이를 바꾸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흐름 자체를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다. 지도자가 그 흐름 자체를 바꾸려고 하다 보면, 무리수를 두기 마련이다. 이때는 지도자가 시간을 두고 기다리는 것이 현명하다. 물론 지도자는 그 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이 바뀔 타이밍을 간파해야 한다. 바로 그 타이밍을 놓치면 그 누구도 흐름을 바꿀 수 없다. 민심이 움직인다는 사실은 어떤 원인이 명확하게 있었기 때문이지, 아무런 원인 없이 민심은 움직이는 법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 민심의 움직임을 이용해서 사익을 취득하려는 사람들도 등장한다는 점이다. 지도자가 민심에 눈을 감으면, 그 주변에 누구든 이제부터 서서히 각자의 목소리를 내면서 존재감을 나타낸다. 때로는 그런 사람들이 민심을 자신들의 주변으로 모여들게 한다. 그렇게 되면 기존 지도자의 정치적 입지는 좁아지기 마련이고, 민심을 돌릴 만한 카드도 별로 없게 되고 만다. 더욱이 그렇게 되면 한편으로 기존 가신그룹도 서로 각자도생(各自圖生)으로 분열된다. 다른 한편으로, 정치권에서 한동안 밀려났던 사람들도 움직인다. 그들은 새로운 지도자감을 암중모색(暗中摸索)한다. 이때 그 지도자는 기존 지도자와 차별성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민심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채기는 어렵다. 그 때문에 우리는 어떤 결과를 갖고 민심이 무엇이었는지를 단지 유추할 뿐이다. 그런데 현명한 사람은 그 흐름을 타고 적어도 민심의 방향을 판단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그는 민심을 주시하면서 그 흐름이 언제까지 지속할 것인지도 볼 것이다. 이와 반대로, 우둔한 사람은 민심의 흐름보단 세상에 떠도는 잡담 혹은 여담에 관심사를 갖는데, 이는 민심의 방향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심의 흐름이란 반드시 결정적인 원인에 근거해야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종종 가장 별것도 아닌 것이 일정한 흐름을 타면, 다른 어떤 것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경우도 생기기 마련이다. 아주 우연적이고 예외적인 경우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그런 상황도 완전히 배제될 수 없다. 흐름이 중요한 것은 민심이 설령 일정하게 형성되더라도 흐름을 타지 못하면, 금방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의미는 민심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는 뜻이다. 한편으로 이것은 지도자가 뭔가를 하려는데 민심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지도자가 아니라 민심 그 자체가 스스로 전혀 움직이지 않으려는 것이기도 하다. 전자는 지도자의 결단만 있으면 별문제는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는 지도자가 민심을 적극적으로 완전히 수용하기보다 그저 형식적 수준에서 그치거나 아니면 수용하는 듯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경우다. 이것은 민심이 확실한 입장을 요구하는데, 지도자는 오히려 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하면 신뢰는 무너지고 만다. 그러나 후자는 그렇지 않다! 즉 민심이 움직여야 하는데 좀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것은 이미 민심이 흐름을 타고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이다. 전자는 아직 반전의 기회가 남아 있긴 하다. 이와 반대로, 후자는 아무런 기회조차 사라지고 정해진 방향에 맞추어 갈 뿐이다. 백약이 무효인 것이다. 이때는 상황이 끝나기만을 우리가 기다릴 수 있을 뿐, 아무것도 사실상 할 수 없다. 민심에서 흐름이 중요하다. 지도자는 당연히 민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현명한 지도자라면 민심을 한순간이라도 놓쳐서는 안 되고, 민심이 과연 무엇인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민심이 천심인 것은 자의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민심을 모르거나 왜곡하는 사림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진정으로 민심이 천심임을 아는 사람은 스스로 겸손해야 하고, 민심에 관해 언제나 낮은 자세로 임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민심이 흐름이 어떤 것인지가 언젠가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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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 원래부터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던 고대 그리스 아테네
    아테네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애초부터 민주주의가 실행되었던 국가가 아니었다. 아테네의 중심은 아레오파고스(Areopagos)이다. 아레오파고스에서는 329명의 위원들을 중심으로 공동통치의 사회를 이룩해냈다. 여기에서 9명의 아르콘(Archon)을 뽑는데 이들이 사실상 아테네을 이끌어가는 지도층이었다. 이들 9명의 아르콘들은 국가의 위기가 생겼을 때 서로 의견을 통합하곤 했는데 임기가 1년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의미없는 직책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르곤은 그리스어로 "지배하다" 라는 뜻을 가진 동사 아르크(ἀρχ)에서 파생된 분사다. 여기에는 1명만 지칭되는 단수형으로 흔히 여기지는데 ἄρχοντες (아르콘테스)는 여러 명을 한꺼번에 지칭하는 복수형이다. 따라서 지배자로 음역될 수 있는데 고대 마케도니아어로는 "의미없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도 하니 1년 밖에 없는 임기에 329명이 돌아가면서 지배층이 되는 시스템에 대한 비꼬는 뜻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이러한 폐해의 결정적인 부분은 아테네에서 발생한 총체적 난국으로 대표되고 있는데 아티카 일대는 농경지와 수자원의 만성적인 부족에 시달렸으며, 그나마 남은 농경지는 일부 지주에게 집중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아테네는 만성적인 식량부족과 심각한 경제양극화를 겪는다. 평민들은 소출의 1/6을 지주에게 바쳤고,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어 토지를 갖지 못한 자들은 날품팔이로 연명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불안정은 많은 인구의 이동을 초래하였고, 아티카 일대는 외부인구의 유입으로 인해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하게 되면서 아테네의 빈민층은 크게 증가했다. 빈민들은 토지는 물론이고 심지어 가족이나 자신의 신체를 담보로 대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채무를 갚을 경제력은 애초부터 없었고, 귀족과의 빈부격차가 심화됨에 따라 두 계층이 서로 반목하는 상태로 나타난다. 게다가 귀족들끼리도 대단한 내부분열이 존재했다. 당시 9명의 아르콘 중 하나인 메가클레스는 고리 대금으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못갚은 시민들을 노예를 부리거나 경지들에 투자하여 자신의 땅으로 만들고 그 영지를 살라미스 해안가까지 늘려갔던 것이다. 이는 즉, 당시 그리스에서 부동산 개념과 투기의 개념이 최초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부분이다. B.C 632년 올림푸스 제전에서 우승하고 월계관을 수여받은 킬론은 메가클레스가 이에 시셈하여 그의 땅을 막대한 돈을 주고 사들였으며 졸지에 집을 잃은 킬론의 자신의 친구들을 이끌고 아크로폴리스와 아레오파고스를 장악하려 했다. 그는 두 지역을 장악하고 참주에 등극하여 부정부패를 일삼고 있던 메가클레스를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알아차린 메가클레스는 킬론을 제거하기 하기 위해 킬론과 킬론의 친구들을 아크로폴리스 신전으로 끌어들였다. 이 과정에서 메가클레스 일파들은 중대한 신성모독죄를 범했는데, 그들은 아테나 신전에 들어와 있었던 킬론 일파에게 복수의 여신들 신전 앞에서 재판받으라고 설득해놓고는 킬론 일당이 아테나 신전에서 복수의 여신 신전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척살해버렸던 것이다. 당시 신전에서 누군가를 살해하는 것은 명백한 신성모독이었다. 그 결과로 인해 킬론의 남은 세력들은 메가클레스와 그의 일파를 "저주받은 자들"이라고 비난했고 이에 메가클레스에게 땅과 재산을 잃은 시민들이 킬론의 편을 들어 메가클레스를 비난하는 시위를 일으키는 등 아테네는 중대한 사회적 갈등으로 내흥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 솔론이라는 거물이 나타나서 오늘날 아테네의 민주정이라 말하는 대대적인 개혁을 일으키는데 데모크라티아(Δημοκρατία)의 원조가 된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대한민국에 솔론과 같은 영웅은 과연 탄생할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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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 독일 언론의 과도한 김민재 흔들기를 보며 이 또한 독일 내에서 만연해진 인종차별의 일환일까?
    독일 언론에서 계속 김민재를 흔들고 있다. 독일 대표팀 출신의 안토니오 뤼디거와 스왑딜이나 인터 밀란 이적설 등 루머가 계속 나오고 있다. 게다가 최근의 부진에 대한 과도한 비난 몰이에 이어 이제는 토마스 투헬 감독과의 불화설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영국이나 스페인도 이처럼 과도하게 선수를 흔들지 않는다. 시즌 내내 김민재의 기량에 의구심을 제기해온 독일 언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혹평을 쏟아내고 있는 실정이다. 독일 빌트, TZ ,키커 등은 하이덴하임 전 이후 일제히 김민재에게 출전 선수 중 최저 평점인 6점을 부여했다. 특히 키커는 지난 7일 아예 김민재에 대한 특집 기사까지 내면서 작심하여 비판했다. 김민재가 유럽 진출 이후 터키와 이탈리아 무대를 평정했던 지난 2년 동안의 활약에 비하여 최상의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김민재에게만 지나치게 가혹한 독일 언론의 편파적인 태도라는 것에 있다. 김민재는 뮌헨 입단 이후 주축 선수들의 부상과 백업 수비수가 부족한 팀 내 사정에 따라 '혹사' 논란이 나올 만큼 전반기 내내 거의 모든 경기에서 휴식없이 풀타임을 소화했다. 김민재는 비시즌 기초군사훈련 일정을 소화하느라 쉴 틈이 없었고, 소속팀 일정 중에 국가대표팀 소집을 위하여 장거리 이동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뮌헨은 올시즌 무관 위기에 몰리며 고전하고 있는 실정이다. 포칼컵에서는 이미 조기에 탈락했고, 리그에서는 레버쿠젠의 우승이 거의 확정적이라 2위 수성도 장담하기 어렵다. 유일한 희망은 8강까지 진출한 유럽 챔피언스리그만이 남았는데 여기서도 경기력이 좋지 못해 우승후보들과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 의문일 정도다. 이는 김민재만의 부진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약화된 선수단 스쿼드와 구단의 부실한 선수 영입, 투헬 감독의 전술 운용 문제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문제들이 겹쳐서 일어난 상황이었다. 하지만 독일 언론들은 분데스리가에 처음 입성한 김민재의 헌신이나 공헌도는 철저히 무시하고, 몇몇 부진했던 장면만 부각시켜 혹독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 이유는 유색 인종에 대한 독일의 혹독한 평가와 인종차별성 요소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현재 독일을 구성하고 있는 총 인구의 4분의 1은 이민 배경을 가진 이민자들로 되어 있다. 내부 집단을 구성하는 토착 독일인들과 외부 집단을 구성하는 외국인을 포함한 이민자들 사이에는 민족, 문화, 종교 등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내부집단을 중심으로 한 사회구조적인 면에서 차별화 생성되는 것은 어쩌고 보면 당연한 일일수도 있다. 이는 내부집단과 외부집단의 다른 점, 이러한 차이들에 대한 인식 속에 어느 새 고정관념이 자리하게 되는 일명 고착화(Adhesion)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회구조적인 차별은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를 일으킬 수 있는 사회적 기폭제가 되기도 한다. 나치 시기와 비교할 때 많이 완화되었지만 현재에도 독일에서는 보이지 않는 측면에서 인종차별이 만연해 왔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베르사유 조약에서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 독일인들의 자존심에 스크레치가 났던 상황, 이 모든 잘못된 형태를 자국의 문제에서 찾지 않고 외부로 돌려 그 책임을 전가하고자 했다. 특히 독일처럼 냉철하고 원리원칙을 강조하는 국민성과 시스템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런 특성 가진 국가의 국민들은 자존심이 강하고 원리원칙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그리고 이를 지키지 않은 외부인을 매우 경멸한다. 뭔가 자기만의 선을 그어 놓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매우 미개하다 여기며 이를 무시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다양성은 그저 무늬만 존재한다. 필자는 학술적인 부분에서 학술회의, 혹은 연구차 독일을 많이 왕래했다. 유럽에서 주로 행해지는 국제 학술회의, EU권 내 학술회의는 프랑스나 독일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독일에 많은 친구와 학자들과 사귀고 소통했다. 지금도 소통하는 독일 친구들도 많다. 그러면서 이 친구들의 행동, 민족성 등을 하나하나 겪어보니 사람으로써 혹은 친구로써 배울 점이 많고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인간답다 여겨진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공명정대, 원리원칙 등등 온갖 좋은 수식어는 다 갖고 있고 실제로도 그렇다. 그건 인정하지만 이들에게서 인간적인 정(情)은 느껴진적이 없었다. 속칭 말해서 바늘을 찔러도 피 한 방울도 안 나오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확한 말이다. 그리고 또 다른 특징은 자기가 그어 놓은 원리원칙과 공명정대의 측면에서 그 범주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지능이 낮은 인종으로 취급하거나 무시하기 일쑤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에서 인종차별이 안 날수 없는 일이다. 다양한 문화와의 소통은 해야 한다는 것은 공감하지만 상대 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자신들이 추구하는 원칙에 벗어난다면 이 또한 용납을 못하기 때문이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필자에게 물어본다. 일본은 여태까지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과 타국에 입힌 피해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데 독일은 사과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독일이 훨씬 개념있지 않느냐고 하는데 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맞는 말이다. 그러나 독일인들을 보면 개개인적으로 이중적인 면이 많다. 고집스러울 정도 억지스러운 면도 있으며 국제적으로 유대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정치, 경제력 등으로 볼 때 이들에게 사과를 하더라도 매우 표면적이다. 필자가 폴란드 아우슈비츠에서 독일의 정치인들이 꽃다발 놓고 추모하고 있는 장면을 본적이 있는데 진심으로 추모하는 사람은 몇 없고 그저 고개만 숙이고 숙인 고개 사이에서 살짝 비웃음이 흘러나오는 것을 목격한 바 있어 소름이 끼친적이 있었다. 그저 국제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표면적으로 사과는 하지만 과연 그 사과가 진심인지는 그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6~70년대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 시절 때, 광부와 간호사들이 독일에 와서 일했을 때, 이들도 대놓고 언론에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인종차별을 상당히 경험했다. 독일인 동료들은 키 작고 힘 약한 동양인을 무시하기 일쑤였고 이러한 어려움에 대처하기 위해 파독 광부들은 몇 차례 불법파업을 하면서 독일인과 동등한 임금, 체구에 맞는 노동분야, 외국인 혐오 금지 등을 요구했다고 한다. 착취적이고 불공평한 노동 관행과 제도에 맞서 많은 광부들은 정기적으로 유급병가제도를 역으로 이용했다. 결국 1979·1980년 파독 광부들은 집단적 인권운동에서 ‘한국 광부의 임시 고용계획에 관한 협정’의 해체를 요구해 이를 성공적으로 관철시켰고, 마지막까지 광부로서 일하던 800여명은 자유로운 직장 선택과 체류 허가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후 40여 년이 지난 2022년 6월부터 11월까지 독일 통합 및 이주 연구 센터 DeZIM는 독일 내 21,000명 이상의 사람을 대상으로 독일에서의 인종차별 경험을 조사했다고 한다. 결과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인종차별을 가장 많이 경험한 인종은 흑인으로 흑인의 54%가 인종차별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성별 비율로는 흑인 여성의 19%가 반복적인 위협이나 괴롭힘과 같은 인종차별을 경험한적이 있다고 답했으며 남성은 18%로 조사되었다. 또한 지속해서 미묘한 차별을 경험하고 있다고 답한 흑인 남성은 37%, 여성은 20%였으며 백인에 비해 남성은 4배, 여성은 5배 더 많은 인종차별을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종 차별을 당하는 이유에는 연령, 장애 및 만성질환 여부, 언어 능력 미숙, 독일식 이름이 아닌 경우, 종교, 피부색, 성별, 성적 취향, 계층, 소득 등 다양하다. 2021년 6월 9일 35세 대한민국 남성이 베를린 지하철 역에서 4명의 신원 미상의 남성으로부터 외국인 혐오 및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동양인을 대상으로 한 인종차별 또는 혐오성 범죄가 계속 발생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주 독일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공지까지 내려왔었다. 이러한 것들로 볼 때 김민재에 대한 독일 언론의 혹독한 평가는 어쩌고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자국 선수들보다 잘 하는 한국 선수는 차범근 하나로 족하며 독일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바이에른 뮌헨에서 동양인 선수가 잘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투헬 감독이 뮌헨을 떠날 때, 김민재 선수 또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로 이적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토트넘에서 손흥민과 함께 김민재 선수가 뛴다면 필자는 더 이상 바랄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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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 시대의 변화 앞에서 길을 잃은 기업들의 이야기
    기업들은 변화의 바람 앞에 서 있을 때,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진화해야 한다. 변화를 인식하고 이에 적응하는 것은 생존과 성장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이러한 교훈을 담은 사례들은 다가오는 변화에 대비하고, 기업의 미래를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데 중요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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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6
  • 진정한 가치의 발견: 사회적 가치를 높이는 삶의 방식
    명품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말고 명품인간이 되자"는 물질적인 풍요나 외적인 가치에 집착하기보다는 내적인 가치와 인성을 중요시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말은 사람들이 자신의 품성과 인격을 개발하고 향상시키는 것이 물질적 소유물을 과시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명품인간이 되는 것은 자신과 타인에 대한 존중, 정직, 책임감 등의 덕목을 갖추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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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6
  • 조선이 근대화 되었을 마지막 기회
    소현세자 이후, 조선은 근대화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당시의 세계는 소현세자의 시대에서 100여 년이 지난 상태로 그 때와는 많은 부분에서 달라져 있었다. 18세기 후반기로 치닫고 있을 때 서양에서는 영국이 산업혁명에 성공해 근대화를 이루었고 절대왕정에서 의회정치가 강화되어 왕은 정치적 실권에서 멀어지고 입헌군주, 상징적인 존재로 밀려나고 의회 정치로 인한 민주화를 추구하게 된다. 한편 미국이 독립에 성공했고 영국은 아메리카를 잃었어도 대영제국의 확장 정책을 지속하여 이전에 최대 영토를 이루었던 몽골 제국을 뛰어넘으려 하고 있었다. 이러한 제국주의의 가속화로 마침내 모든 세계의 패권이 동양에서 서양으로 넘어가게 된다. 프랑스는 절대왕정 체제에서 대혁명이 발발하여 혼란이 발생하던 시기였고 독일이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일약 강대국으로 성장했으며 오스트리아 또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를 중심으로 여전히 강세를 이루고 있었으며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예카테리나 대제의 개혁으로 최전성기를 달리면서 최고의 궤도에 올라서고 있었다. 이에 반해 오스만투르크는 러시아에게 전쟁에서 연달아 패배하고 급격히 쇠퇴했다. 이제 육상교통보다 바다를 이용한 해운교통이 발달함으로써 그동안 육상교통을 오스만투르크의 아성은 한없이 추락했다. 그리고 아시아의 3대 제국을 이루었던 인도의 무굴제국도 아우랑제브의 종교 분리와 차별 정책으로 인해 힌두교와 이슬람교 간의 내흥은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무굴제국은 내부에서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청나라 또한 건륭제 말기에 접어들면서 부정축재로 재산을 쌓아둔 간신들과 귀족들의 폭리가 절정을 이루면서 내부에서 이미 썩어들어가고 있었던 실정이었다. 일본은 쇄국정책의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아시아는 점차 세력을 잃어가고 세계의 중심에 유럽이 올라서면서 전체적인 힘의 판도가 유럽과 미국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숙종과 영조 시대에 문화적 중흥기를 이룬다. 그리고 문화적인 중흥기를 이루고 경제력으로도 청나라에 그리 뒤쳐지지 않을 정도로 왜란과 호란 이전의 상태로 완전한 회복기를 갖고 있었다. 그와 별개로 정치적으로는 노론과 소론의, 벽파와 시파 및 남인 등 지독한 당쟁에 시달렸는데 이는 숙종이 왕권강화를 위해 당쟁을 적절히 이용하여 신하들을 견제하면서 왕으로써의 정치적 권위를 높였다. 한편 영조는 탕평책을 쓰면서 당쟁을 정치권력 쟁취의 도구에서 국가적인 이익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환기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는 영조가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임으로써 실패하게 된다. 그로 인해 오히려 왕권은 서서히 추락하고 당쟁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뒤를 계승한 정조는 자신을 즉위시키는데 도움을 준 외척 홍국영을 실각시킨 후 탕평책을 바탕으로 직접 정치를 이끌었다. 그러나 집권 초기 반대파에 둘러싸여 있던 정조에게는 친위세력이 없었다. 정조는 자신의 뜻에 따를 문신을 육성하기 위하여 규장각을 설치하는 한편 군영을 개혁하여 국왕의 병권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규장각은 내각과 외각으로 확대 개편하였고, 남인에 속한 채제공을 규장각 제학으로 임명하면서 남인을 중용하였다. 남인에 대한 중용은 이미 세력이 비대해진 노론의 두 파인 시파와 벽파를 정치적으로 적절히 견제함과 더불어 남인을 자신의 친위 세력으로 삼아 개혁을 순탄히 이끌고자 하는 뜻에 있었다. 마침내 채제공은 이후 우의정에 임명되어 정조의 최측근이 되어 정조가 개혁하는 작업에 선봉장이 된다. 정조는 없는 군사는 도태시키고 낭비되는 군량은 줄여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여 새롭게 장용영을 세우는 대신 기존의 5군영에서 수어청과 총융청의 폐지를 관철시키는 한편, 군영의 장군 임명은 병조판서를 통해 임금이 재가하도록 하여 군 인사권에 대한 국왕의 통제권을 강화하였다. 정조는〈병학통〉을 직접 지어 군사 훈련을 중요시 하였고, 정기적인 훈련을 감독하는 한편 직접 군사를 지휘하기도 하였으며 화포와 화승총 등의 화기들에 관심을 보여 이를 보강했다. 훈련을 위해 규장각 검서인 이덕무, 박제가와 장용영 장교인 백동수에게 훈련교본인 <무예도보통지>를 간행하도록 했다. 그리고 청나라를 왕래한 상인들과 실학자들의 의견을 듣고 서양 문물, 특히 군사 무기에 대한 관심을 쏟으면서 서양 무기들을 수입해 군을 강화하려고 했다. 정조는 여러 법제를 개혁하여 당시 사회에 대두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육의전 상인에게 주어졌던 독점권을 폐지하여 독점권을 통해 내부에서 뇌물로 청탁하려 행위를 차단하였고, 격쟁과 신문고를 운영하여 백성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려 하는 한편 당시 사회 문제인 도망간 노비에 체포와 형벌을 담당한 추쇄관 파견을 중지하여 노비의 인권을 위해 그들에게 땅을 경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노비 개혁은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 선포보다 무려 60년이 빨랐고 러시아 알렉산드르 2세의 농노해방령보다 무려 70년이 빨랐던 대개혁이었다. 그러면서 양반에 비해 차별을 받던 서얼과 중인의 문제도 개선하고자 하였다. 인사 문제에 있어서도 특정 지역에 편중되는 기존의 과거 제도를 고쳐 함경도 지역과 같이 그동안 무관만을 선발하던 곳에서도 문관을 선발하면서 다양한 인재들을 등용하였다. 그렇게 선발된 인재들이 박제가나 홍대용, 유득공, 박지원, 정약용 등의 실학자들이다. 정조는 아버지 장조(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새롭게 성을 축조하였다. 1792년(정조 16년) 초여름, 정조는 정약용에게 성을 축조하는데 유용한 도구를 개발하라고 지시하여 거중기를 고안하게 하였다. 정조는 정약용에게 참고할 자료로 청나라 강희제 때 편찬한 백과사전인 <도서집성>과 독일 출신의 선교사 요하네스 테렌츠(Johann Terrenz)가 지은 물리학의 원리와 도르래의 이용을 설명한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전달하면서 서양의 과학기술 및 물리학의 기술도 받아들이도록 했다. 그렇게하여 우리의 기술과 서양의 과학기술을 접목해 만든 성이 바로 수원 화성이다. 정조 시대인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사무역인 후시(後市) 무역이 개시 무역보다 규모가 커졌다. 무역상인들은 교역품의 시세 차익으로 이익을 얻었는데 품목에 따라 10~20배에 이르는 차액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서양 문물이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고 정조는 서양 문물에 대해 적극 수용했다. 특히 지구본, 자명종, 망원경 등은 이 때 본격적으로 조선 왕궁에서 사용이 되었다. 정조는 40세 이후 시력이 나빠지자 안경을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정조실록>에 의하면 "정조 52권, 23년 7월 10일(병인) 1번째기사 / 차대 때 임업의 상소문에서 수교를 어긴 것 등에 대해 이르다 - 상이 이르기를,“나의 시력이 점점 이전보다 못해져서 경전의 문자는 안경이 아니면 알아보기가 어렵지만 안경은 2백 년 이후 처음 있는 물건이므로 이것을 쓰고 조정에서 국사를 처결한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것이다.……" 라는 기록이 있는것으로 보아 정조가 안경을 쓴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서양 문물 수용에 적극적이었지만 카톨릭은 조선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탄압했지만 순조나 헌종, 고종 때처럼 심하지 않았다. 이러한 정조의 개혁에 정적인 노론 세력은 계속하여 제동을 걸었다. 게다가 역대 조선의 왕들 중, 가장 많은 암살 위협을 받았고 정조가 사망했을 때 정조의 죽음에 대해 독살설까지 재기될 정도로 집중 견제를 받았다. 연훈방을 써서 수은에 중독되어 죽었다는 것인데 이 방법을 주선한 자들이 심환지와 이시수였고 그들은 정조의 정적이었던 노론의 벽파라는 것과 정순왕후가 정조를 독대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정조가 사망하였다는 것 등이 독살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정조가 죽은지 1년 뒤, 정조가 아끼던 인재들은 신유박해 때 카톨릭 신자들과 함께 숙청되었고 정조의 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만약 정조가 철저히 정적을 숙청하여 그의 재임기간도 늘렸다면 조선은 무너져 가는 청나라와 쇄국정책으로 뒤쳐져 있는 일본의 에도막부를 제치고 선진국으로 올라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침공해오는 서양열강들에게서 조선은 아시아에 유일한 강대국으로 칭송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동안 잡아왔던 당쟁의 기득권 층으로 인해 정조의 개혁은 허무하게 끝났고 이후 조선은 강대국으로 올라설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렸고 이 정조의 개혁이 실질적으로 조선이 근대화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물론 이후 대원군, 명성황후 등이 개혁해보려 시도했고 김옥균 등의 개화파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개혁해보려 했지만 이미 많이 늦어버렸고 결국은 병탄의 치욕을 당하여 35년간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15
  • 서아프리카 토고의 총선과 냐싱베 가문의 이야기, 냐싱베 에야데마의 재집권 말년, 포르 냐싱베(Faure Gnassingbé)의 집권과 현 총선 (下편)
    토고의 민주화 시위의 실패로 인해 1993년 1월 25일에 경찰이 수도의 시위에 발포한 후 22~50명이 사망하며 토고의 정치적 위기는 다시 고조되었고, 1월 29일에 군인 중 1명이 민간인에게 살해되자 이에 분개한 군인들은 바로 다음 날에 거리를 약탈하며 최소 6명의 민간인을 살해했다. 이와 같은 군인들의 학살에 로메 인구의 절반인 최소 30만 명이 가나와 베냉으로 피신했고, 8월 25일에는 토고 역사상 최초의 다당제 대통령 선거를 열었으나 대부분의 야당이 선거를 보이콧을 선언하면서 야당 후보는 단 2명 만 나왔고, 냐싱베는 36.12%의 저조한 투표율 속에서도 96.42%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참고로 이 투표에서 유효 득표수 합산이 총 득표수보다 1만 명 이상 많게 잡히는 등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많아 이 선거 역시 부정 선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같은 해에 유럽과 미국, 프랑스는 독재와 인권 탄압을 이유로 토고에 대한 원조를 중단했지만 그럼에도 냐싱베와 프랑스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는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과 절친이었고 친프랑스 기조를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이다. 다만 미테랑과의 사이는 좋지 않았는데 이전에 있었던 비행기 사고 또한 미테랑과 정보부가 조장한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토고의 언론 탄압은 1996년에 들어 정점을 맞이하게 된다. 1월 17일 야당 신문인 차우조의 편지(The Letter of Tchaoudjo)의 국장 무다시루 카탁파우 투레(Moudassirou Katakpaou Toure)를 '국가 원수 명예 훼손' 혐의로 징역 5년, 벌금 1만 달러, 신문 무기한 정간을 선고했다. 더불어 6월 19일에는 또 다른 야당 신문 민주당 트리뷴(The Tribune of Democrats)의 발행이사 에릭 로슨(Eric Lawson)을 제복을 입은 미확인 특공대에 대한 살인을 비난하는 기사를 실었다는 이유로 민중의 증오를 선동하고 페이크 뉴스를 조장한 혐의로 궐석재판에서 징역 5년, 벌금 6천 달러와 신문 6개월 정간을 선고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언론 탄압은 2년 뒤에 있을 대통령 선거를 정조준하여 언론을 장악하겠다는 장기적인 대선 빌드업을 위한 조치였는데 예상대로 1998년 6월 21에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냐싱베는 5명의 야당 후보와 맞붙어 52.08%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이 때 냐싱베 정권의 언론 활용은 냐싱베에 대한 우상화, 그리고 상대 후보에 대한 극심한 네거티브로 이어져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획기적인 언론 장악으로 재선에 성공한 캐이스로 꼽히고 있다. 이 선거에서 아쉽게 2위를 차지한 측은 무려 34.18%의 득표율을 기록한 길크리스트 올림피오(Gilchrist Olympio, 1936~ ?)이다. 그는 전임 토고 대통령이자 토고의 독립 후, 초대 대통령이 되어 만만치 않은 독재를 행한 실바누스 올림피오의 아들이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독재자지만 아들인 길크리스트는 민주주의자로 부친과 정반대 성향을 지닌 인물이다. 그는 오랫동안 프랑스에 머물다가 토고로 돌아와 불법이던 야당 활동을 했다. 야당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는 길크리스트는 궐석 재판에서 2차례 사형 선고를 받기도 했지만 1992년 2월 1일에 평소 친분이 두터운 미테랑의 지원을 받아 야당 연합인 변화를 위한 연합(UFC)를 설립했다. 이어 5월 5일에 길크리스트의 호송대가 냐싱베의 아들인 포르 냐싱베(Faure Gnassingbé)가 지휘한 특공대의 공격을 받아 12명이 죽고 본인도 중상을 입어 프랑스에서 1년간 치료를 받았다. 이처럼 정치 테러를 당하고도 프랑스의 미테랑의 지지를 받은 이유는 토고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고 있는 국유화된 인산염 광산을 재확보하기 위해서인데 현재 인산염은 모로코가 아프리카에서 부동의 생산력 1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모로코가 부각되기 이전에는 서아프리카에서 토고가 가장 많은 인산염을 채굴하고 있었다. 인산염은 식량생산에 있어 필수적인 비료이다. 두류(豆類)나 유채, 밀. 면화. 감자류나 오이류 및 과일나무 등은 모두 인을 좋아하는 작물에 속하기 때문에 인산 비료를 시용하면 비교적 좋은 비료 효과를 낼 수 있다. 바게뜨로 유명한 프랑스는 토고에 인산염을 의존해 왔다. 토고의 인산염으로 가공된 비료로 프랑스 내 토지에서 밀을 생산하고 그것으로 프랑스의 제과업은 눈부신 발전을 이뤄왔다. 프랑스의 바게뜨가 맛있고 세계 3대 요리에 프랑스 요리가 손꼽히는 이유 또한 토고의 인산염 비료 덕분이었다. 프랑스가 지금도 토고를 놓지 못하는 이유는 토고의 인산염 비료로 인한 먹거리 생산량 때문이다. 한편 야당에서는 올림피오가 실제 당선자라며 프랑스에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했다.이에 이 선거 이후 냐싱베는 수백 명의 반대파들을 처형하고는 그 시신을 바다에 유기하는 잔혹성을 보여줬는데, 1999년 5월에 국제 앰네스티가 이를 폭로하자 냐싱베는 이것이 국제 앰네스티가 정부에 대해 제기한 조사와 혐의는 토고 내 야당 단체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며 2명의 야당 국회의원을 앰네스티와 연관되었다는 이유로 체포한 것을 넘어 무려 국제 앰네스티를 정부 차원에서 고소하기도 했다. 국제기구를 정부 차원에서 고소한 국가원수는 냐싱베가 처음이자 유일한 사례로 알려져 있다. 북한의 김정일, 김정은 부자와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조차도 북한과 에리트레아의 인권 탄압을 지적한 국제기구를 정부 명의로 맹비난한 적은 있어도 정부 명의로 고소까지 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로메에서 연 기자 회견에서 앰네스티의 보고서를 두고 대부분이 조작일 것이라고 주장하며 냐싱베의 고소가 옳았다고 주장하며 냐싱베를 적극 지지했다. 이후 냐싱베는 이미 2003년을 마지막으로 물러냐아 하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퇴진 시기 직전인 2002년 12월 30일에 또 다시 개헌을 자행해 대통령직을 이어 나갔다. 당시 토고의 헌법은 5년 임기 2번으로 대통령 임기를 정해놨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군부를 앞세워 개헌한 최악의 민주주의 유린행위를 저질렀다. 더불어 대통령의 연령 제한을 45세가 아닌 35세로 낮춰 놓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가 급사할 경우 아들인 포르 냐싱베(Faure Gnassingbé)에게 권력을 세습시키기 위한 결정으로 판단했다. 당시 포르 냐싱베는 아버지의 재정 고문관으로서 아버지가 해외에 은닉한 재산을 관리했고, 헌법 개정 당시 만 36세였기 때문이었다. 냐싱베는 2003년 6월 1일에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57.79%로 당선되었지만, 이 역시 야당 UFC가 실제 당선자는 71%를 차지한 엠마누엘 밥-아키타니(Emmanuel Bob-Akitani, 1930~2011)이고, 냐싱베는 단 10%만 득표했다고 주장하며 다시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했다. 그와 더불어 2000년부터 2001년까지는 아프리카 단결 기구(OAU) 의장을 역임했으며, 말년에는 자신이 독재자라는 이미지를 개선시키기 위해 2002년부터 시작된 코트디부아르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코트디부아르 정부와 반군의 중재를 시도하는 등 아프리카 지역의 평화 이니셔티브에 참여하기 시작했지만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냐싱베는 2005년 2월 5일에 고향에서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 보잉 707 전용기를 타고 프랑스로 응급 치료를 하러 가던 도중 튀니지의 튀니스로부터 남쪽으로 250km 떨어진 지역에서 69세를 일기로 급사했는데, 그가 사망할 때 그보다 더 오래 집권한 아프리카 독재자는 없었다고 한다. 냐싱베의 사망 직후 토고 정부는 국가 비상 사태를 선포했고, 2005년 4월 24일에 아들인 포르 냐싱베가 60%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많은 사람들의 예상대로 만 38세라는 젊은 나이로 토고의 차기 대통령직으로 선출되었다. 권력 세습에 성공한 포르 냐싱베는 유년 시절 프랑스의 파리 도핀 대학교와 미국의 조지 워싱턴 대학교 등지에서 공부를 한 뒤 아버지의 재정 고문관으로 일했는데, 주요 업무는 외국에 있는 가족 재산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36세에 집권 여당 국회의원에 선출되었고, 이후 통신 장관과 광산 장관까지 맡아 아버지의 측근이 되며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져 나갔다. 아버지는 아들이 정계에 진출하자 토고의 헌법까지 고쳐 가면서 아들이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대통령 출마 자격을 40살에서 35살로 바꿔 놓는 불법적인 헌법 개정을 했다. 그리고 아버지 냐싱베 에야데마가 2005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그는 몇 시간 만에 군부의 지원과 자크 시라크 대통령의 지지를 바탕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그러나 시민과 야당 의원들은 대통령이 사망했을 때 60일 안에 대선을 치를 것을 규정한 헌법을 지킬 것을 요구했고,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와 아프리카 연합 등도 토고의 민주화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자 그는 3주 만에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 2005년 4월 24일 대선을 치렀다. 그러나 투표 집계 결과 그의 지지율 60%로 집계되었고 당선이 확정되자 야당이 대규모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시위를 벌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포르 냐싱베는 군부를 동원해 이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여 1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국제 앰네스티는 2005년 선거 과정에서 고문, 강간, 살인 등이 발생해 최소 400여 명이 사망했으며, 투표함이 탈취되기도 했다고 발표했다. 또한, 야당 진영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취임식을 열어 국가 개발과 복지, 평화와 국민통합에 집중하겠다며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토고의 주민 2만여 명은 냐싱베 가문의 잔혹한 독재를 피해 인근 국가로 피난을 떠난 상태였다고 한다. 포르 냐싱베는 취임 후 야당의 정치활동 확대, 반정부 인사 석방 등 유화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계속 선거에 당선되면서 장기집권을 이어가고 있 있다. 냐싱베의 과제 중 하나가 과거사 청산인데, 2005년 대선 이후 그는 야당 측과 ‘평화협정’을 맺으며 ‘진실과 화해를 위한 위원회’ 설치에 합의했다. 이것은 아버지 통치기간 중에 벌어진 인권 침해 등에 대해 밝히겠다는 건데, 2006년 출범한 이 위원회는 현재까지도 공식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자신의 아버지를 단죄하면 자신의 정치 생명이 그만큼 깎일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프랑스가 니제르와 말리, 부르키나파소에서 철수하고 프랑스의 패권이 서아프리카 큰 위협을 받게 되자 친프랑스에 속하는 토고 정부도 이제 프랑스의 입김에서 자유로워지자는 시민들과 야당이 조금씩 힘을 얻고 있다. 현재 토고에는 약 300여 명의 프랑스군이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와의 전쟁을 이유로 주둔하고 있는데 토고민주연합당(UTD), 민주정의연합(UJD) 등의 야당은 포르 냐싱베 정권의 퇴진과 프랑스 군의 철수를 요구하고 있다. 게다가 토고 내에서 야당의 세력이 커지면서 포르 냐싱베도 이전처럼 안정적인 선거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니제르와 말리, 부르키나파소에서의 프랑스군 철수 및 이들 국가들의 반프랑스 연합 및 반미 세력까지 형성됨에 따라 토고에서도 그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토고민주연합당(UTD)의 경우, 니제르처럼 러시아의 지원을 받자는 당내 입김도 강화되고 있는 실정이라 한다. 즉, 토고에서도 친러파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친프랑스 정파인 냐싱베 가문을 축출하면 러시아의 지원도 받으면서 진정한 주권을 가진 국가로 새 출발 할 것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토고의 총선은 4월 말로 미뤄졌지만 서아프리카의 대표적인 친프랑스 독재 국가로 남아 있던 토고에도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이는 매우 반가운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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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조선은 벌써 17세기 당시 근대화에 성공했을까?
    위화도 반란으로 사대주의의 온상이 된 나라 조선도 일찍 근대화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병자호란이 벌어지던 1630년대의 세계는 대항해시대의 절정에 이르던 시대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지중해 지역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 오스만투르크, 아랍 세계 등과의 교역과 군사적 대결을 통해 그들로부터 우수한 문화를 받아들였다. 게다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는 일찍이 이슬람 선진문명이 지배하고 있었기에 그들을 레콩키스타 (국토회복운동)을 통해 몰아내고 그들의 발전된 문화와 문명을 흡수했으며 군사적 무기의 개편으로 화약과 화승총, 화포 등의 화기를 갖춘 신형 강국이 되었다. 본래 화약은 몽골제국의 서진으로 인해 전래된 것인데 이를 사용하는 방법을 가장 먼저 익힌 것은 다름 아닌 영국이었다. 이는 프랑스와 백년전쟁 당시, 화포와 화승총이 최초로 등장하여 프랑스 중세 시대 중장기병대를 쓸어버린 것이다. 영국은 화약을 사용하는 총과 화포를 자신들의 용도에 맞게 개발했지만 비가 오는 날에는 화기들이 작동하지 않는 등, 상당한 애를 먹었었다. 그리고 이후, 그러한 기술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에게 넘어오게 되었고 화약이 오스만투르크, 아랍 세계로부터 들어오게 되자 영국식 총포를 자신들에게 맞게 개량해 무장하게 되면서 일약 신생 강국으로 떠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함선 건조법, 나침반, 망원경 등이 아랍 세계를 통해 들어와 유럽인들에 맞게 개량되면서 이들은 바다로 나갈 기회를 찾게 되었고 때마침 오스만투르크로 인해 동방과 교역이 어렵게 되고 전체적으로 경제 물가가 심한 인플레를 겪에 되면서 그에 대한 자구책으로 스스로 동방과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나타난 인물이 해상왕 엔리케, 콜롬부스, 바스코 다 가마, 마젤란 등이었으며 이들은 해상항로를 개발하고 아메리카를 정복해 식민지화 했으며 마젤란의 세계일주 성공으로 인도로 가는 항해의 길을 열게 된다. 그리고 포르투갈과 합병함으로써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길까지 확보하면서 스페인은 일약 세계제국으로 성장한다. 그 이후, 영국과 네덜란드가 나타나면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조금씩 쇠퇴하게 되고 두 나라는 인도와 인도네시아 지역에 동인도회사를 세우게 되는데 이 시기가 묘하게 병자호란이 발생한 시기와 맞먹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명나라와 청나라는 광저우, 영파 등 몇 개의 항구를 개항하여 이들 서양인들과 교역에 나서게 되었고 서양의 신(新) 문물이 중국에 유행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은 진작에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와 군사 무기 교역을 통해 조총과 화포를 받아들인 바 있으며 조선을 제외한 동북아시아 국가들이 서양 문물이 전래되어 이미 유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1636년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치욕적으로 패배하면서 동생인 봉림대군과 함께 볼모로 청나라의 심양으로 끌려갔다. 청나라로 간 소현세자는 고관들과 접촉하면서 친분을 쌓으며 인맥을 쌓아나갔고 그를 통해 얻은 고급 정보를 몰래 인조에게 알려줘서 대비하게 하기도 했다. 인질로 있으면서도 세자비 강빈의 권유로 심양 근처에 농장을 만들어 끌려온 조선인들을 노예시장에서 구출해냈고 농장에서 일하게 하는 등의 성과를 보였다. 여기서 얻은 곡물로 장사를 하니 세자의 거처가 마치 시장과도 같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상당한 재물을 얻어 청나라 관료들과의 교류와 심양관 운영에 사용되었다. 1644년(인조 22년) 음력 9월 명나라 정벌을 위해 나선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을 따라 베이징에 70여 일을 머물면서, 독일인 신부 아담 샬 등의 예수회 선교사와 친하게 지냈으며, 그들을 통해 로마 카톨릭과 서양 문물을 접하였다. 당시 세자가 신문물(新文物)을 조선에 전하기를 열망하는 포부에 대해 직접 아담 샬에게 보낸 서신에 나타나 있다. 삼전도에서 치욕을 당한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세자의 태도를 친청(親淸) 행위라고 크게 비난하였고, 1645년 음력 2월에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아버지 인조는 카톨릭과 서양 과학을 들여와 조선을 발전시키고자 한 세자를 감시하고 박대했다. 그리고 서양문물을 정착시키려 한 소현세자를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들이 정치적으로 매우 불편하게 여겼을 것이다. 국왕인 인조조차 소현세자를 멀리했고 부자간의 불화가 절정으로 치닫는 1645년 소현세자는 원인 모를 병으로 갑자기 사망하게 된다. 이를 두고 소현세자 독살설이 재기되기도 했는데 여러 정황 근거들로 볼 때 독살설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으로 생각된다. 소현세자가 죽은 뒤, 인조는 자신의 며느리인 강빈마저도 누명을 씌워 죽이고 소현세자의 소생들을 유배보낸 뒤 죽게했으며 그 가솔들과 후예들의 씨를 말렸다. 인조는 본인이 죽을 때까지 단 한번도 소현세자의 무덤을 찾은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비정한 왕이었던 것이다. 서양문물의 발전을 목도하고 이를 들여와 개혁하려던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조선은 벌써 17세기에 근대화에 성공했을 것이고 일제강점기라는 치욕과 6.25 사변이라는 아픔도 없었을 것이며 일본을 따돌리고 지금쯤 동북아시아 최강국이자 선진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조선은 소현세자가 죽음으로써 일찍 근대화되어 역으로 탈아입구(脫亞入歐) 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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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4
  • 이란의 이스라엘 공격에 대한 경과와 대응
    이란이 사상 처음으로 이스라엘에 대해 직접 공격을 감행했다. 어제 밤 이스라엘에 대한 보복 공격으로 드론과 순항, 탄도미사일 등을 동원한 공습을 전격적으로 개시했다. 친(親) 이란 무장 세력인 헤즈볼라와 후티 반군도 공격에 가세했다. 이러한 공격은 지난 1일 이스라엘이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주재 이란 영사관을 폭격하여 IRGC 고위급 지휘관 등을 제거한 지 12일 만에 일이다. 이슬람 혁명 수비대(IRGC)는시리아 주재 자국 영사관을 공격과 더불어 가자 지구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진실의 약속 작전(Operation True Promise)을 개시했다. 수십 대의 드론과 순항미사일 등을 이용해 이스라엘 영토에 있는 특정 목표물을 타격할 것이라 공공연히 언급했다. 1979년 혁명으로 이란에 이슬람 공화국이 들어선 이후, 이스라엘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은 처음 있는 일이다. 헤즈볼라는 이스라엘 북부 골란고원에 로켓을 발사하고, 예멘의 후티 반군은 이스라엘 항구를 향해 여러 대의 드론을 날려 이란을 지원했다. 이스라엘은 미국, 영국, 요르단 등과 함께 날아오는 드론을 요격했고, 이에 따라 이스라엘 전역에서 대피 경보와 폭발음이 들렸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이란은 13일 밤부터 14일 새벽까지 약 6시간에 걸쳐 공격을 진행했다. 이스라엘군은 13일 오후 11시께 이란의 공격을 인지했고, 미사일과 드론이 수 시간에 걸쳐 날아와 이스라엘 영토에는 14일 오전 2시께 도착했다. 이후 이스라엘군은 이날 오전 5시에 이란의 공습이 끝난 것으로 보고 대피 명령을 해제했다. 오늘 새벽 터키에서 속보로 나온 이란의 이스라엘 공격을 종합해 보자면 Son verilere göre İran, İsrail’e 185 İHA, 110 karadan karaya füze ve 36 seyir füzesi gönderdi. (최신 자료에 따르면 이란은 이스라엘에 드론 185기, 지대지 미사일 110기, 순항미사일 36기를 보냈다.)고 한다. 즉, 총 얼마의 공격용 무기들이 출격했는지 알 수 있다. 다만 샤헤드 드론 같은 경우, 이스라엘의 아이언돔에 의해 방어가 성공했을 것으로 보인다. 상당수의 드론이 이스라엘에 당도하기 전에 미국과 영국에게 잡혔고 이스라엘에 도착한 드론들 또한 아이언돔의 수비망에 걸려 요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기사들도 이미 터키에 나왔다. IDF 다니엘 하기라 소장은 자신의 트위터에 "방공 전투기는 방어 시스템을 통해 전략적 파트너 국가와 함께 심장부로 건너기 전에 대부분의 발사를 성공적으로 요격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1,800㎞ 거리에서 발사된 이란의 드론이 어느 지역, 어디까지 도달하여 공격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전해왔다. 이란은 이스라엘 남부 네게브 사막의 공군기지가 타격했다. 메흐르 통신에 의하면 7발의 미사일이 네게브의 라몬 공군기지를 타격했다고 전했다. 2024년 4월 14일 오전 11시, 이란의 공습이 일단락되자 이스라엘은 대피령을 해제하였다. 이스라엘은 발사체 중 99%를 격추시켰다고 했지만 대부분이 드론이었고 이란의 탄도미사일들은 이스라엘 방공시스템들을 뚫고 피해를 입혔다. 이스라엘의 발표에 의하면 미사일 소수가 이스라엘을 타격해 소녀 1명이 다치고 이스라엘 남부에 있는 군기지에 가벼운 손상을 입혔다고 했지만 핵심 공격의 목표는 민간인 시설이 아닌 군 시설이다. 현재까지 이스라엘의 군 시설이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 정확한 보도가 올라오고 있지 않다. 이스라엘, 레바논, 이라크가 영공을 폐쇄하는 동안 시리아와 요르단은 방공 시스템에 경보를 발령했고 이들 중동 국가들 대부분은 자국 상공을 가로질러 이스라엘 향해 가는 공격 무기들을 모른척 했다. 이게 앞으로 이스라엘과 이란의 사이에서 어떤 작용으로 발생할지 변수로 남아 있다. 한편 집단 서방은 이란에 대한 비난에 나섰다. 리시 수낙 영국 총리는 이란의 공격을 “무모하다(Pervasız)”고 비난했으며 이스라엘과 이 지역 파트너들의 안보에 기여할 것이라 언급했다. 다만 이스라엘이 이란에 대한 보복에 참여할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집단 서방은 이란을 비난했지만 확전에 대해 매우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집단 서방은 4월 1일에 발생한 다마스쿠스 이란 대사관 폭격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을 아무도 비난하지 않았다. 이는 명백한 유엔 헌장 위반에다 주권 국가에 대한 침공이나 다름 없는 국제법으로도 위법 행위다. 당시 이스라엘의 이란 영사관 폭격을 규탄한 국가는 가장 낮은 수준의 대응 조치인 '언론 성명(Press Statement)'을 통해서라도 공식 비난했던 러시아였다. 이란은 이스라엘에 최대 규모의 "보복"을 공언했다. 이란이 이스라엘에 보복하겠다 공언한 이후, 이스라엘 주제 외국 대사관, 주재원들에게 대피령이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큰 공격이 있을 것임은 이스라엘 측이 모를리는 없다. 대놓고 보복을 공언하면서 거의 2주 동안을 타국 대사관과 주재원들의 철수, 이스라엘이 방어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준 셈이다. 만약에 이란이 대놓고 공언하지 않거나 지난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처럼 기습적으로 감행했을 때는 아이언돔도 쓸모 없었을 확률이 높다. 즉, 이란은 자국이 쏜 공격 물체 상당수가 이미 요격당할 것을 인지한 상태에서 최소한의 보복을 노렸을 것이다. 이란으로서는 최소한의 체면을 세우면서도 더 이상의 확전을 자제한 것이다. 만약 이스라엘이 반격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일단락될 가능성이 크지만 결국 이스라엘은 강력한 보복이 뒤따를 것이라며 이란에 보복할 것임을 시사했다. 바이든은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게 이란에 대한 직접 공격은 하지 말 것을 경고하며 확전 저지 의지를 피력했다. 터키에서도 CNN’in haberine göre Biden, Netenyahu’ya İran’a karşı yapılacak bir misilleme saldırısında ABD’nin İsrail’i desteklemeyeceğini söyledi. (CNN에 따르면 바이든은 네타냐후에게 미국은 이란에 대한 보복 공격에서 이스라엘을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즉, 이대로 종결짓자는 얘기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그대로 종결할 수 있을까? 이스라엘의 대응에 따라 확전과 3차 세계대전의 시나리오가 쓰여질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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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4
  • 민주주의를 향한 예인선
    개인은 어리석을 수가 있지만, 국민은 현명했다. 22대 총선에 대한 개인적인 소감이다. 국민의 선택은 끝났다. 공은 정치권으로 넘어갔다. 이제는 정치권이 국민의 선택을 어떻게 현실 정치에 접목시키느냐만 남아있다. 정치가 국민을 실망시키지 않기를 희망한다. 지난 21대 총선에서도 국민은 지금의 야당에 많은 표를 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 당시에 야당을 이끈 사람이 누구였는지 기억하기도 싫다. 그들은 민생을 챙기기보다는 그들끼리의 이권 챙기기에만 몰두한 느낌이 들었다. 이후에 벌어진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은 또 다른 선택을 했다. 불과 0.6%의 차이이지만 새로운 정권이 탄생했다. 지난 대선을 돌이켜보면 2.6%를 획득한 심상정 후보는 현 정부의 흑기사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번 총선에서 그를 정치권에서 사라지게 만든 것을 봐도 국민은 현명했다. 나는 지난 대선 때 윤석열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분명히 새로운 독재 정권이 탄생하리라 예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집권한 지 2년이 지난 현 정부는 검찰 독재와 민주주의 파괴를 일삼고 있다. 그들에게 사법부의 한 축인 검찰은 정권의 애완견에 불과했다. 사법부가 대통령의 애완견으로 전락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견제와 감시라는 민주주의의 축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자기 식구는 감싸고, 정치적인 적은 퇴장시키게 만드는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꿈꾸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매수당한 심판이 경기를 운영하는 축구 경기를 보는 것과 다름이 없다. 매수당한 심판은 주력 선수를 퇴장까지 시킨다. 심판을 매수 한 편을 응원하는 축구팬들에게 심판의 매수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들은 그러한 심판에게 열열한 환호의 박수를 보낸다. 그렇게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이 민주주의의 핵심이기는 하지만, 세계 곳곳에서 삼권분립의 상호 견제와 균형의 축이 무너지고 있다. 미국의 정치 현실도 견제와 균형은 사라지고 극심한 양극화의 벽만 높아지고 있다. 우리의 정치 현실도 양극화를 벗어났다고 평가하기 어려우나, 그래도 미국 국민들 보다는 현명했던 것 같다. 조국혁신당에 대한 전국적인 지지도 때문이다. 조국혁신당은 신생 정당임에도 불구하고 불과 2개월 만에 전국적으로 24%의 지지를 얻었다. 대구, 경북 지역에서도 15% 전후의 지지율을 얻었다. 조국혁신당과 민주당 지지율을 합치면 대구, 경북 지역에서 야권은 30% 전후의 표를 얻었다. 이에 비해 광주, 전남지역에서의 국힘당은 10% 전후의 표를 얻었을 것이다. 한국의 정치 지형이 좌우로 나누어져 있는 것은 분명한 현실이지만, 조국혁신당의 활약에 따라 양당의 구조에 변화가 있기를 기대한다. 물론 일부 여당의 지지자들은 조국에게 죄인의 프레임을 가져다 씌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죄를 결정하는 것은 사법부의 몫이지만, 사법부가 정치적으로 펀파적인 판결을 내릴 경우는 그 자체가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파손한다. 우리 사법부가 현 정권에 매수당했는지 여부는 판단할 수 없지만, 그들의 판결을 쉽게 수긍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은 것도 현실이다. 사법부의 독립성은 또 다른 문제이다. 여기서는 이번 선거에서 중도의 표심이 국민의 현명한 판단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언급하고자 한다. 국힘당과 민주당 양당에 모두 희망을 잃어버린 많은 국민이 조국혁신당을 선택했다고 보인다. 중도 보수와 중도 진보의 결집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들의 표심이 전체적으로는 국민의 현명한 선택을 결정했다. 그들은 현 정부의 검찰 독재도 싫었지만, 그렇다고 입법부의 폭력도 원하지 않았다. 정치에서의 양극화는 민주주의의 붕괴를 초래한다. 민주주의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는 타협과 견제, 상호 인정과 권력 남용을 억제하는 길밖에 없다. 이를 위해서는 건전한 중도의 가치가 필요하다. 중도의 가치는 회색으로 비난받아야 할 가치가 아니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건전한 보수와 건전한 진보 그 전체가 중도일 것이다. 그들은 서로 소통할 수 있기에 상호 인정을 전제로 한다. 우리의 역사에서는 건전한 보수와 건전한 진보의 가치가 한 번도 진지하게 논의된 적이 없었다. 해방 이후 민주주의가 실시되었지만, 이승만 집권 시기에는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적 대립이 앞섰다면, 그 이후 박정희 집권 시기에는 독재와 민주화의 대립으로 점철되었다. 이러한 현대의 역사 속에서 중도의 가치는 설 자리가 없었다. 중도의 가치는 보수의 아버지라 불리는 버크에서 찾아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버크는 평등을 앞세운 교조주의적인 급진적 개혁을 반대했다. 프랑스 혁명에서 보여준 자코뱅당에 대한 거부였다. 버크의 관심사는 자유와 정의였다. 버크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이어져 온 전통적인 자유를 존중했다. 그는 자유주의자였으며, 한편으로는 귀족정치가 자연스럽다고 보았다. 버크가 말하는 귀족은 다음과 같다. “만약 귀족정치가 마지막 극단에 이르러 혈통의 경쟁이 된다면, 신이여! 귀족정치를 금하시라. 내게 할 일이 있다면 나는 나의 운명을 가난한 자, 지위가 낮은 자, 미약한 사람들과 함께하겠다.” 버크가 말하는 귀족은 공동체 의식에 대한 사명감이 높은 사람이었다. 신의 섭리가 구현된 역사적 지혜를 존중했기에 버크의 보수주의는 자유주의이면서 동시에 귀족정치를 지향했던 것이다. 하지만 버크도 그 당시의 귀족과 달리 개인의 욕심만은 앞세우는 오늘날의 기득권을 보았으면, 자신의 주장을 번복하였을 것이다. 러셀 커크가 쓴 <보수의 정신>에서 “보수적인 인간은 무질서와 어둠보다는 영원히 지속되는 그 무엇들을 더 기쁘게 생각하는 그런 소박한 사람들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의 보수는 중도의 다른 말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그 책에서 언급된 보수주의의 10대 원칙 중 마지막 세 가지 원칙을 짧게 언급하고자 한다. “보수주의자는 자발적인 공동체를 지지하고 강제적인 집산주의에는 반대한다.” 국민이 중심인 사회를 지향하고, 민주주의의 재앙인 독재를 반대한다는 말이다. “보수주의자는 인간의 격정과 권력을 신중하게 자제해야 할 필요를 인지한다.” 이 말은 정부의 권위와 개인의 자유 사이의 건강한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보수주의자는 영속성과 변화를 반드시 인정하고 조화시켜야 한다.” 보수주의자 역시 변화를 인정하지만, 합리적이고 온건한 변화를 희망한다는 것이다. 보수의 정신과 중도의 정신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조국혁신당이 중도의 깃발을 앞세운 민주주의를 향한 예인선이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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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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