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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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고의 민주화 시위의 실패로 인해 1993년 1월 25일에 경찰이 수도의 시위에 발포한 후 22~50명이 사망하며 토고의 정치적 위기는 다시 고조되었고, 1월 29일에 군인 중 1명이 민간인에게 살해되자 이에 분개한 군인들은 바로 다음 날에 거리를 약탈하며 최소 6명의 민간인을 살해했다. 이와 같은 군인들의 학살에 로메 인구의 절반인 최소 30만 명이 가나와 베냉으로 피신했고, 8월 25일에는 토고 역사상 최초의 다당제 대통령 선거를 열었으나 대부분의 야당이 선거를 보이콧을 선언하면서 야당 후보는 단 2명 만 나왔고, 냐싱베는 36.12%의 저조한 투표율 속에서도 96.42%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참고로 이 투표에서 유효 득표수 합산이 총 득표수보다 1만 명 이상 많게 잡히는 등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많아 이 선거 역시 부정 선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같은 해에 유럽과 미국, 프랑스는 독재와 인권 탄압을 이유로 토고에 대한 원조를 중단했지만 그럼에도 냐싱베와 프랑스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는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과 절친이었고 친프랑스 기조를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이다. 다만 미테랑과의 사이는 좋지 않았는데 이전에 있었던 비행기 사고 또한 미테랑과 정보부가 조장한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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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토고 의회, 사진출처 : PUNCH Most Widely Read Newspaper, AFP 통신

 

이후 토고의 언론 탄압은 1996년에 들어 정점을 맞이하게 된다. 1월 17일 야당 신문인 차우조의 편지(The Letter of Tchaoudjo)의 국장 무다시루 카탁파우 투레(Moudassirou Katakpaou Toure)를 '국가 원수 명예 훼손' 혐의로 징역 5년, 벌금 1만 달러, 신문 무기한 정간을 선고했다. 더불어 6월 19일에는 또 다른 야당 신문 민주당 트리뷴(The Tribune of Democrats)의 발행이사 에릭 로슨(Eric Lawson)을 제복을 입은 미확인 특공대에 대한 살인을 비난하는 기사를 실었다는 이유로 민중의 증오를 선동하고 페이크 뉴스를 조장한 혐의로 궐석재판에서 징역 5년, 벌금 6천 달러와 신문 6개월 정간을 선고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언론 탄압은 2년 뒤에 있을 대통령 선거를 정조준하여 언론을 장악하겠다는 장기적인 대선 빌드업을 위한 조치였는데 예상대로 1998년 6월 21에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냐싱베는 5명의 야당 후보와 맞붙어 52.08%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이 때 냐싱베 정권의 언론 활용은 냐싱베에 대한 우상화, 그리고 상대 후보에 대한 극심한 네거티브로 이어져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획기적인 언론 장악으로 재선에 성공한 캐이스로 꼽히고 있다. 


이 선거에서 아쉽게 2위를 차지한 측은 무려 34.18%의 득표율을 기록한 길크리스트 올림피오(Gilchrist Olympio, 1936~ ?)이다. 그는 전임 토고 대통령이자 토고의 독립 후, 초대 대통령이 되어 만만치 않은 독재를 행한 실바누스 올림피오의 아들이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독재자지만 아들인 길크리스트는 민주주의자로 부친과 정반대 성향을 지닌 인물이다. 그는 오랫동안 프랑스에 머물다가 토고로 돌아와 불법이던 야당 활동을 했다. 야당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는 길크리스트는 궐석 재판에서 2차례 사형 선고를 받기도 했지만 1992년 2월 1일에 평소 친분이 두터운 미테랑의 지원을 받아 야당 연합인 변화를 위한 연합(UFC)를 설립했다. 

 

이어 5월 5일에 길크리스트의 호송대가 냐싱베의 아들인 포르 냐싱베(Faure Gnassingbé)가 지휘한 특공대의 공격을 받아 12명이 죽고 본인도 중상을 입어 프랑스에서 1년간 치료를 받았다. 이처럼 정치 테러를 당하고도 프랑스의 미테랑의 지지를 받은 이유는 토고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고 있는 국유화된 인산염 광산을 재확보하기 위해서인데 현재 인산염은 모로코가 아프리카에서 부동의 생산력 1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모로코가 부각되기 이전에는 서아프리카에서 토고가 가장 많은 인산염을 채굴하고 있었다. 


인산염은 식량생산에 있어 필수적인 비료이다. 두류(豆類)나 유채, 밀. 면화. 감자류나 오이류 및 과일나무 등은 모두 인을 좋아하는 작물에 속하기 때문에 인산 비료를 시용하면 비교적 좋은 비료 효과를 낼 수 있다. 바게뜨로 유명한 프랑스는 토고에 인산염을 의존해 왔다. 토고의 인산염으로 가공된 비료로 프랑스 내 토지에서 밀을 생산하고 그것으로 프랑스의 제과업은 눈부신 발전을 이뤄왔다. 프랑스의 바게뜨가 맛있고 세계 3대 요리에 프랑스 요리가 손꼽히는 이유 또한 토고의 인산염 비료 덕분이었다. 

 

프랑스가 지금도 토고를 놓지 못하는 이유는 토고의 인산염 비료로 인한 먹거리 생산량 때문이다. 한편 야당에서는 올림피오가 실제 당선자라며 프랑스에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했다.이에 이 선거 이후 냐싱베는 수백 명의 반대파들을 처형하고는 그 시신을 바다에 유기하는 잔혹성을 보여줬는데, 1999년 5월에 국제 앰네스티가 이를 폭로하자 냐싱베는 이것이 국제 앰네스티가 정부에 대해 제기한 조사와 혐의는 토고 내 야당 단체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며 2명의 야당 국회의원을 앰네스티와 연관되었다는 이유로 체포한 것을 넘어 무려 국제 앰네스티를 정부 차원에서 고소하기도 했다.


국제기구를 정부 차원에서 고소한 국가원수는 냐싱베가 처음이자 유일한 사례로 알려져 있다. 북한의 김정일, 김정은 부자와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조차도 북한과 에리트레아의 인권 탄압을 지적한 국제기구를 정부 명의로 맹비난한 적은 있어도 정부 명의로 고소까지 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로메에서 연 기자 회견에서 앰네스티의 보고서를 두고 대부분이 조작일 것이라고 주장하며 냐싱베의 고소가 옳았다고 주장하며 냐싱베를 적극 지지했다. 이후 냐싱베는 이미 2003년을 마지막으로 물러냐아 하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퇴진 시기 직전인 2002년 12월 30일에 또 다시 개헌을 자행해 대통령직을 이어 나갔다. 

 

당시 토고의 헌법은 5년 임기 2번으로 대통령 임기를 정해놨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군부를 앞세워 개헌한 최악의 민주주의 유린행위를 저질렀다. 더불어 대통령의 연령 제한을 45세가 아닌 35세로 낮춰 놓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가 급사할 경우 아들인 포르 냐싱베(Faure Gnassingbé)에게 권력을 세습시키기 위한 결정으로 판단했다. 당시 포르 냐싱베는 아버지의 재정 고문관으로서 아버지가 해외에 은닉한 재산을 관리했고, 헌법 개정 당시 만 36세였기 때문이었다.


냐싱베는 2003년 6월 1일에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57.79%로 당선되었지만, 이 역시 야당 UFC가 실제 당선자는 71%를 차지한 엠마누엘 밥-아키타니(Emmanuel Bob-Akitani, 1930~2011)이고, 냐싱베는 단 10%만 득표했다고 주장하며 다시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했다. 그와 더불어 2000년부터 2001년까지는 아프리카 단결 기구(OAU) 의장을 역임했으며, 말년에는 자신이 독재자라는 이미지를 개선시키기 위해 2002년부터 시작된 코트디부아르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코트디부아르 정부와 반군의 중재를 시도하는 등 아프리카 지역의 평화 이니셔티브에 참여하기 시작했지만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냐싱베는 2005년 2월 5일에 고향에서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 보잉 707 전용기를 타고 프랑스로 응급 치료를 하러 가던 도중 튀니지의 튀니스로부터 남쪽으로 250km 떨어진 지역에서 69세를 일기로 급사했는데, 그가 사망할 때 그보다 더 오래 집권한 아프리카 독재자는 없었다고 한다. 냐싱베의 사망 직후 토고 정부는 국가 비상 사태를 선포했고, 2005년 4월 24일에 아들인 포르 냐싱베가 60%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많은 사람들의 예상대로 만 38세라는 젊은 나이로 토고의 차기 대통령직으로 선출되었다.


권력 세습에 성공한 포르 냐싱베는 유년 시절 프랑스의 파리 도핀 대학교와 미국의 조지 워싱턴 대학교 등지에서 공부를 한 뒤 아버지의 재정 고문관으로 일했는데, 주요 업무는 외국에 있는 가족 재산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36세에 집권 여당 국회의원에 선출되었고, 이후 통신 장관과 광산 장관까지 맡아 아버지의 측근이 되며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져 나갔다. 아버지는 아들이 정계에 진출하자 토고의 헌법까지 고쳐 가면서 아들이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대통령 출마 자격을 40살에서 35살로 바꿔 놓는 불법적인 헌법 개정을 했다. 

 

그리고 아버지 냐싱베 에야데마가 2005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그는 몇 시간 만에 군부의 지원과 자크 시라크 대통령의 지지를 바탕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그러나 시민과 야당 의원들은 대통령이 사망했을 때 60일 안에 대선을 치를 것을 규정한 헌법을 지킬 것을 요구했고,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와 아프리카 연합 등도 토고의 민주화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자 그는 3주 만에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 2005년 4월 24일 대선을 치렀다. 그러나 투표 집계 결과 그의 지지율 60%로 집계되었고 당선이 확정되자 야당이 대규모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시위를 벌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포르 냐싱베는 군부를 동원해 이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여 1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국제 앰네스티는 2005년 선거 과정에서 고문, 강간, 살인 등이 발생해 최소 400여 명이 사망했으며, 투표함이 탈취되기도 했다고 발표했다. 또한, 야당 진영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취임식을 열어 국가 개발과 복지, 평화와 국민통합에 집중하겠다며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토고의 주민 2만여 명은 냐싱베 가문의 잔혹한 독재를 피해 인근 국가로 피난을 떠난 상태였다고 한다. 

 

포르 냐싱베는 취임 후 야당의 정치활동 확대, 반정부 인사 석방 등 유화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계속 선거에 당선되면서 장기집권을 이어가고 있 있다. 냐싱베의 과제 중 하나가 과거사 청산인데, 2005년 대선 이후 그는 야당 측과 ‘평화협정’을 맺으며 ‘진실과 화해를 위한 위원회’ 설치에 합의했다. 이것은 아버지 통치기간 중에 벌어진 인권 침해 등에 대해 밝히겠다는 건데, 2006년 출범한 이 위원회는 현재까지도 공식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자신의 아버지를 단죄하면 자신의 정치 생명이 그만큼 깎일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프랑스가 니제르와 말리, 부르키나파소에서 철수하고 프랑스의 패권이 서아프리카 큰 위협을 받게 되자 친프랑스에 속하는 토고 정부도 이제 프랑스의 입김에서 자유로워지자는 시민들과 야당이 조금씩 힘을 얻고 있다. 현재 토고에는 약 300여 명의 프랑스군이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와의 전쟁을 이유로 주둔하고 있는데 토고민주연합당(UTD), 민주정의연합(UJD)  등의 야당은 포르 냐싱베 정권의 퇴진과 프랑스 군의 철수를 요구하고 있다. 게다가 토고 내에서 야당의 세력이 커지면서 포르 냐싱베도 이전처럼 안정적인 선거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니제르와 말리, 부르키나파소에서의 프랑스군 철수 및 이들 국가들의 반프랑스 연합 및 반미 세력까지 형성됨에 따라 토고에서도 그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토고민주연합당(UTD)의 경우, 니제르처럼 러시아의 지원을 받자는 당내 입김도 강화되고 있는 실정이라 한다. 즉, 토고에서도 친러파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친프랑스 정파인 냐싱베 가문을 축출하면 러시아의 지원도 받으면서 진정한 주권을 가진 국가로 새 출발 할 것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토고의 총선은 4월 말로 미뤄졌지만 서아프리카의 대표적인 친프랑스 독재 국가로 남아 있던 토고에도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이는 매우 반가운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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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프리카 토고의 총선과 냐싱베 가문의 이야기, 냐싱베 에야데마의 재집권 말년, 포르 냐싱베(Faure Gnassingbé)의 집권과 현 총선 (下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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