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1(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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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 이후, 조선은 근대화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당시의 세계는 소현세자의 시대에서 100여 년이 지난 상태로 그 때와는 많은 부분에서 달라져 있었다. 18세기 후반기로 치닫고 있을 때 서양에서는 영국이 산업혁명에 성공해 근대화를 이루었고 절대왕정에서 의회정치가 강화되어 왕은 정치적 실권에서 멀어지고 입헌군주, 상징적인 존재로 밀려나고 의회 정치로 인한 민주화를 추구하게 된다. 한편 미국이 독립에 성공했고 영국은 아메리카를 잃었어도 대영제국의 확장 정책을 지속하여 이전에 최대 영토를 이루었던 몽골 제국을 뛰어넘으려 하고 있었다. 이러한 제국주의의 가속화로 마침내 모든 세계의 패권이 동양에서 서양으로 넘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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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정조대왕(1752~1800, 재위 : 1776~1800)의 어진, 사진출처 : 파이넨셜 뉴스, 최경식 기자

 

프랑스는 절대왕정 체제에서 대혁명이 발발하여 혼란이 발생하던 시기였고 독일이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일약 강대국으로 성장했으며 오스트리아 또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를 중심으로 여전히 강세를 이루고 있었으며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예카테리나 대제의 개혁으로 최전성기를 달리면서 최고의 궤도에 올라서고 있었다. 이에 반해 오스만투르크는 러시아에게 전쟁에서 연달아 패배하고 급격히 쇠퇴했다. 이제 육상교통보다 바다를 이용한 해운교통이 발달함으로써 그동안 육상교통을 오스만투르크의 아성은 한없이 추락했다. 그리고 아시아의 3대 제국을 이루었던 인도의 무굴제국도 아우랑제브의 종교 분리와 차별 정책으로 인해 힌두교와 이슬람교 간의 내흥은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무굴제국은 내부에서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청나라 또한 건륭제 말기에 접어들면서 부정축재로 재산을 쌓아둔 간신들과 귀족들의 폭리가 절정을 이루면서 내부에서 이미 썩어들어가고 있었던 실정이었다. 일본은 쇄국정책의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아시아는 점차 세력을 잃어가고 세계의 중심에 유럽이 올라서면서 전체적인 힘의 판도가 유럽과 미국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숙종과 영조 시대에 문화적 중흥기를 이룬다. 그리고 문화적인 중흥기를 이루고 경제력으로도 청나라에 그리 뒤쳐지지 않을 정도로 왜란과 호란 이전의 상태로 완전한 회복기를 갖고 있었다. 그와 별개로 정치적으로는 노론과 소론의, 벽파와 시파 및 남인 등 지독한 당쟁에 시달렸는데 이는 숙종이 왕권강화를 위해 당쟁을 적절히 이용하여 신하들을 견제하면서 왕으로써의 정치적 권위를 높였다. 한편 영조는 탕평책을 쓰면서 당쟁을 정치권력 쟁취의 도구에서 국가적인 이익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환기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는 영조가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임으로써 실패하게 된다. 그로 인해 오히려 왕권은 서서히 추락하고 당쟁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뒤를 계승한 정조는 자신을 즉위시키는데 도움을 준 외척 홍국영을 실각시킨 후 탕평책을 바탕으로 직접 정치를 이끌었다. 그러나 집권 초기 반대파에 둘러싸여 있던 정조에게는 친위세력이 없었다. 정조는 자신의 뜻에 따를 문신을 육성하기 위하여 규장각을 설치하는 한편 군영을 개혁하여 국왕의 병권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규장각은 내각과 외각으로 확대 개편하였고, 남인에 속한 채제공을 규장각 제학으로 임명하면서 남인을 중용하였다. 남인에 대한 중용은 이미 세력이 비대해진 노론의 두 파인 시파와 벽파를 정치적으로 적절히 견제함과 더불어 남인을 자신의 친위 세력으로 삼아 개혁을 순탄히 이끌고자 하는 뜻에 있었다. 마침내 채제공은 이후 우의정에 임명되어 정조의 최측근이 되어 정조가 개혁하는 작업에 선봉장이 된다. 


정조는 없는 군사는 도태시키고 낭비되는 군량은 줄여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여 새롭게 장용영을 세우는 대신 기존의 5군영에서 수어청과 총융청의 폐지를 관철시키는 한편, 군영의 장군 임명은 병조판서를 통해 임금이 재가하도록 하여 군 인사권에 대한 국왕의 통제권을 강화하였다. 정조는〈병학통〉을 직접 지어 군사 훈련을 중요시 하였고, 정기적인 훈련을 감독하는 한편 직접 군사를 지휘하기도 하였으며 화포와 화승총 등의 화기들에 관심을 보여 이를 보강했다. 훈련을 위해 규장각 검서인 이덕무, 박제가와 장용영 장교인 백동수에게 훈련교본인 <무예도보통지>를 간행하도록 했다. 그리고 청나라를 왕래한 상인들과 실학자들의 의견을 듣고 서양 문물, 특히 군사 무기에 대한 관심을 쏟으면서 서양 무기들을 수입해 군을 강화하려고 했다. 


정조는 여러 법제를 개혁하여 당시 사회에 대두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육의전 상인에게 주어졌던 독점권을 폐지하여 독점권을 통해 내부에서 뇌물로 청탁하려 행위를 차단하였고, 격쟁과 신문고를 운영하여 백성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려 하는 한편 당시 사회 문제인 도망간 노비에 체포와 형벌을 담당한 추쇄관 파견을 중지하여 노비의 인권을 위해 그들에게 땅을 경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노비 개혁은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 선포보다 무려 60년이 빨랐고 러시아 알렉산드르 2세의 농노해방령보다 무려 70년이 빨랐던 대개혁이었다. 그러면서 양반에 비해 차별을 받던 서얼과 중인의 문제도 개선하고자 하였다. 인사 문제에 있어서도 특정 지역에 편중되는 기존의 과거 제도를 고쳐 함경도 지역과 같이 그동안 무관만을 선발하던 곳에서도 문관을 선발하면서 다양한 인재들을 등용하였다. 그렇게 선발된 인재들이 박제가나 홍대용, 유득공, 박지원, 정약용 등의 실학자들이다. 


정조는 아버지 장조(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새롭게 성을 축조하였다. 1792년(정조 16년) 초여름, 정조는 정약용에게 성을 축조하는데 유용한 도구를 개발하라고 지시하여 거중기를 고안하게 하였다. 정조는 정약용에게 참고할 자료로 청나라 강희제 때 편찬한 백과사전인 <도서집성>과 독일 출신의 선교사 요하네스 테렌츠(Johann Terrenz)가 지은 물리학의 원리와 도르래의 이용을 설명한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전달하면서 서양의 과학기술 및 물리학의 기술도 받아들이도록 했다. 그렇게하여 우리의 기술과 서양의 과학기술을 접목해 만든 성이 바로 수원 화성이다. 정조 시대인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사무역인 후시(後市) 무역이 개시 무역보다 규모가 커졌다. 무역상인들은 교역품의 시세 차익으로 이익을 얻었는데 품목에 따라 10~20배에 이르는 차액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서양 문물이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고 정조는 서양 문물에 대해 적극 수용했다.


특히 지구본, 자명종, 망원경 등은 이 때 본격적으로 조선 왕궁에서 사용이 되었다. 정조는 40세 이후 시력이 나빠지자 안경을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정조실록>에 의하면 "정조 52권, 23년 7월 10일(병인) 1번째기사 / 차대 때 임업의 상소문에서 수교를 어긴 것 등에 대해 이르다 - 상이 이르기를,“나의 시력이 점점 이전보다 못해져서 경전의 문자는 안경이 아니면 알아보기가 어렵지만 안경은 2백 년 이후 처음 있는 물건이므로 이것을 쓰고 조정에서 국사를 처결한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것이다.……" 라는 기록이 있는것으로 보아 정조가 안경을 쓴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서양 문물 수용에 적극적이었지만 카톨릭은 조선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탄압했지만 순조나 헌종, 고종 때처럼 심하지 않았다.


이러한 정조의 개혁에 정적인 노론 세력은 계속하여 제동을 걸었다. 게다가 역대 조선의 왕들 중, 가장 많은 암살 위협을 받았고 정조가 사망했을 때 정조의 죽음에 대해 독살설까지 재기될 정도로 집중 견제를 받았다. 연훈방을 써서 수은에 중독되어 죽었다는 것인데 이 방법을 주선한 자들이 심환지와 이시수였고 그들은 정조의 정적이었던 노론의 벽파라는 것과 정순왕후가 정조를 독대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정조가 사망하였다는 것 등이 독살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정조가 죽은지 1년 뒤, 정조가 아끼던 인재들은 신유박해 때 카톨릭 신자들과 함께 숙청되었고 정조의 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만약 정조가 철저히 정적을 숙청하여 그의 재임기간도 늘렸다면 조선은 무너져 가는 청나라와 쇄국정책으로 뒤쳐져 있는 일본의 에도막부를 제치고 선진국으로 올라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침공해오는 서양열강들에게서 조선은 아시아에 유일한 강대국으로 칭송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동안 잡아왔던 당쟁의 기득권 층으로 인해 정조의 개혁은 허무하게 끝났고 이후 조선은 강대국으로 올라설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렸고 이 정조의 개혁이 실질적으로 조선이 근대화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물론 이후 대원군, 명성황후 등이 개혁해보려 시도했고 김옥균 등의 개화파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개혁해보려 했지만 이미 많이 늦어버렸고 결국은 병탄의 치욕을 당하여 35년간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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