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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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 반란으로 사대주의의 온상이 된 나라 조선도 일찍 근대화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병자호란이 벌어지던 1630년대의 세계는 대항해시대의 절정에 이르던 시대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지중해 지역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 오스만투르크, 아랍 세계 등과의 교역과 군사적 대결을 통해 그들로부터 우수한 문화를 받아들였다. 게다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는 일찍이 이슬람 선진문명이 지배하고 있었기에 그들을 레콩키스타 (국토회복운동)을 통해 몰아내고 그들의 발전된 문화와 문명을 흡수했으며 군사적 무기의 개편으로 화약과 화승총, 화포 등의 화기를 갖춘 신형 강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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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그림 = 정서용, 사진출처 : 뉴스 속의 한국사, https://newsteacher.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2/25/2017122500131.html

 

본래 화약은 몽골제국의 서진으로 인해 전래된 것인데 이를 사용하는 방법을 가장 먼저 익힌 것은 다름 아닌 영국이었다. 이는 프랑스와 백년전쟁 당시, 화포와 화승총이 최초로 등장하여 프랑스 중세 시대 중장기병대를 쓸어버린 것이다. 영국은 화약을 사용하는 총과 화포를 자신들의 용도에 맞게 개발했지만 비가 오는 날에는 화기들이 작동하지 않는 등, 상당한 애를 먹었었다. 그리고 이후, 그러한 기술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에게 넘어오게 되었고 화약이 오스만투르크, 아랍 세계로부터 들어오게 되자 영국식 총포를 자신들에게 맞게 개량해 무장하게 되면서 일약 신생 강국으로 떠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함선 건조법, 나침반, 망원경 등이 아랍 세계를 통해 들어와 유럽인들에 맞게 개량되면서 이들은 바다로 나갈 기회를 찾게 되었고 때마침 오스만투르크로 인해 동방과 교역이 어렵게 되고 전체적으로 경제 물가가 심한 인플레를 겪에 되면서 그에 대한 자구책으로 스스로 동방과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나타난 인물이 해상왕 엔리케, 콜롬부스, 바스코 다 가마, 마젤란 등이었으며 이들은 해상항로를 개발하고 아메리카를 정복해 식민지화 했으며 마젤란의 세계일주 성공으로 인도로 가는 항해의 길을 열게 된다. 그리고 포르투갈과 합병함으로써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길까지 확보하면서 스페인은 일약 세계제국으로 성장한다. 그 이후, 영국과 네덜란드가 나타나면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조금씩 쇠퇴하게 되고 두 나라는 인도와 인도네시아 지역에 동인도회사를 세우게 되는데 이 시기가 묘하게 병자호란이 발생한 시기와 맞먹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명나라와 청나라는 광저우, 영파 등 몇 개의 항구를 개항하여 이들 서양인들과 교역에 나서게 되었고 서양의 신(新) 문물이 중국에 유행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은 진작에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와 군사 무기 교역을 통해 조총과 화포를 받아들인 바 있으며 조선을 제외한 동북아시아 국가들이 서양 문물이 전래되어 이미 유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1636년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치욕적으로 패배하면서 동생인 봉림대군과 함께 볼모로 청나라의 심양으로 끌려갔다. 


청나라로 간 소현세자는 고관들과 접촉하면서 친분을 쌓으며 인맥을 쌓아나갔고 그를 통해 얻은 고급 정보를 몰래 인조에게 알려줘서 대비하게 하기도 했다. 인질로 있으면서도 세자비 강빈의 권유로 심양 근처에 농장을 만들어 끌려온 조선인들을 노예시장에서 구출해냈고 농장에서 일하게 하는 등의 성과를 보였다. 여기서 얻은 곡물로 장사를 하니 세자의 거처가 마치 시장과도 같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상당한 재물을 얻어 청나라 관료들과의 교류와 심양관 운영에 사용되었다. 1644년(인조 22년) 음력 9월 명나라 정벌을 위해 나선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을 따라 베이징에 70여 일을 머물면서, 독일인 신부 아담 샬 등의 예수회 선교사와 친하게 지냈으며, 그들을 통해 로마 카톨릭과 서양 문물을 접하였다. 당시 세자가 신문물(新文物)을 조선에 전하기를 열망하는 포부에 대해 직접 아담 샬에게 보낸 서신에 나타나 있다.


삼전도에서 치욕을 당한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세자의 태도를 친청(親淸) 행위라고 크게 비난하였고, 1645년 음력 2월에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아버지 인조는 카톨릭과 서양 과학을 들여와 조선을 발전시키고자 한 세자를 감시하고 박대했다. 그리고 서양문물을 정착시키려 한 소현세자를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들이 정치적으로 매우 불편하게 여겼을 것이다. 국왕인 인조조차 소현세자를 멀리했고 부자간의 불화가 절정으로 치닫는 1645년 소현세자는 원인 모를 병으로 갑자기 사망하게 된다. 이를 두고 소현세자 독살설이 재기되기도 했는데 여러 정황 근거들로 볼 때 독살설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으로 생각된다. 소현세자가 죽은 뒤, 인조는 자신의 며느리인 강빈마저도 누명을 씌워 죽이고 소현세자의 소생들을 유배보낸 뒤 죽게했으며 그 가솔들과 후예들의 씨를 말렸다. 인조는 본인이 죽을 때까지 단 한번도 소현세자의 무덤을 찾은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비정한 왕이었던 것이다. 


서양문물의 발전을 목도하고 이를 들여와 개혁하려던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조선은 벌써 17세기에 근대화에 성공했을 것이고 일제강점기라는 치욕과 6.25 사변이라는 아픔도 없었을 것이며 일본을 따돌리고 지금쯤 동북아시아 최강국이자 선진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조선은 소현세자가 죽음으로써 일찍 근대화되어 역으로 탈아입구(脫亞入歐) 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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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조선은 벌써 17세기 당시 근대화에 성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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