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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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사진이다.(사진=픽사베이)

 

개인은 어리석을 수가 있지만, 국민은 현명했다. 22대 총선에 대한 개인적인 소감이다. 국민의 선택은 끝났다. 공은 정치권으로 넘어갔다. 이제는 정치권이 국민의 선택을 어떻게 현실 정치에 접목시키느냐만 남아있다. 정치가 국민을 실망시키지 않기를 희망한다. 지난 21대 총선에서도 국민은 지금의 야당에 많은 표를 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 당시에 야당을 이끈 사람이 누구였는지 기억하기도 싫다. 그들은 민생을 챙기기보다는 그들끼리의 이권 챙기기에만 몰두한 느낌이 들었다. 이후에 벌어진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은 또 다른 선택을 했다. 불과 0.6%의 차이이지만 새로운 정권이 탄생했다. 지난 대선을 돌이켜보면 2.6%를 획득한 심상정 후보는 현 정부의 흑기사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번 총선에서 그를 정치권에서 사라지게 만든 것을 봐도 국민은 현명했다.


나는 지난 대선 때 윤석열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분명히 새로운 독재 정권이 탄생하리라 예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집권한 지 2년이 지난 현 정부는 검찰 독재와 민주주의 파괴를 일삼고 있다. 그들에게 사법부의 한 축인 검찰은 정권의 애완견에 불과했다. 사법부가 대통령의 애완견으로 전락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견제와 감시라는 민주주의의 축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자기 식구는 감싸고, 정치적인 적은 퇴장시키게 만드는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꿈꾸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매수당한 심판이 경기를 운영하는 축구 경기를 보는 것과 다름이 없다. 매수당한 심판은 주력 선수를 퇴장까지 시킨다. 심판을 매수 한 편을 응원하는 축구팬들에게 심판의 매수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들은 그러한 심판에게 열열한 환호의 박수를 보낸다. 그렇게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이 민주주의의 핵심이기는 하지만, 세계 곳곳에서 삼권분립의 상호 견제와 균형의 축이 무너지고 있다. 미국의 정치 현실도 견제와 균형은 사라지고 극심한 양극화의 벽만 높아지고 있다. 우리의 정치 현실도 양극화를 벗어났다고 평가하기 어려우나, 그래도 미국 국민들 보다는 현명했던 것 같다. 조국혁신당에 대한 전국적인 지지도 때문이다. 조국혁신당은 신생 정당임에도 불구하고 불과 2개월 만에 전국적으로 24%의 지지를 얻었다. 대구, 경북 지역에서도 15% 전후의 지지율을 얻었다. 조국혁신당과 민주당 지지율을 합치면 대구, 경북 지역에서 야권은 30% 전후의 표를 얻었다. 이에 비해 광주, 전남지역에서의 국힘당은 10% 전후의 표를 얻었을 것이다. 한국의 정치 지형이 좌우로 나누어져 있는 것은 분명한 현실이지만, 조국혁신당의 활약에 따라 양당의 구조에 변화가 있기를 기대한다.


물론 일부 여당의 지지자들은 조국에게 죄인의 프레임을 가져다 씌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죄를 결정하는 것은 사법부의 몫이지만, 사법부가 정치적으로 펀파적인 판결을 내릴 경우는 그 자체가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파손한다. 우리 사법부가 현 정권에 매수당했는지 여부는 판단할 수 없지만, 그들의 판결을 쉽게 수긍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은 것도 현실이다. 사법부의 독립성은 또 다른 문제이다. 여기서는 이번 선거에서 중도의 표심이 국민의 현명한 판단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언급하고자 한다. 국힘당과 민주당 양당에 모두 희망을 잃어버린 많은 국민이 조국혁신당을 선택했다고 보인다. 중도 보수와 중도 진보의 결집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들의 표심이 전체적으로는 국민의 현명한 선택을 결정했다. 그들은 현 정부의 검찰 독재도 싫었지만, 그렇다고 입법부의 폭력도 원하지 않았다.


정치에서의 양극화는 민주주의의 붕괴를 초래한다. 민주주의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는 타협과 견제, 상호 인정과 권력 남용을 억제하는 길밖에 없다. 이를 위해서는 건전한 중도의 가치가 필요하다. 중도의 가치는 회색으로 비난받아야 할 가치가 아니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건전한 보수와 건전한 진보 그 전체가 중도일 것이다. 그들은 서로 소통할 수 있기에 상호 인정을 전제로 한다. 우리의 역사에서는 건전한 보수와 건전한 진보의 가치가 한 번도 진지하게 논의된 적이 없었다. 해방 이후 민주주의가 실시되었지만, 이승만 집권 시기에는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적 대립이 앞섰다면, 그 이후 박정희 집권 시기에는 독재와 민주화의 대립으로 점철되었다. 이러한 현대의 역사 속에서 중도의 가치는 설 자리가 없었다. 중도의 가치는 보수의 아버지라 불리는 버크에서 찾아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버크는 평등을 앞세운 교조주의적인 급진적 개혁을 반대했다. 프랑스 혁명에서 보여준 자코뱅당에 대한 거부였다. 버크의 관심사는 자유와 정의였다. 버크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이어져 온 전통적인 자유를 존중했다. 그는 자유주의자였으며, 한편으로는 귀족정치가 자연스럽다고 보았다. 버크가 말하는 귀족은 다음과 같다. “만약 귀족정치가 마지막 극단에 이르러 혈통의 경쟁이 된다면, 신이여! 귀족정치를 금하시라. 내게 할 일이 있다면 나는 나의 운명을 가난한 자, 지위가 낮은 자, 미약한 사람들과 함께하겠다.” 버크가 말하는 귀족은 공동체 의식에 대한 사명감이 높은 사람이었다. 신의 섭리가 구현된 역사적 지혜를 존중했기에 버크의 보수주의는 자유주의이면서 동시에 귀족정치를 지향했던 것이다. 하지만 버크도 그 당시의 귀족과 달리 개인의 욕심만은 앞세우는 오늘날의 기득권을 보았으면, 자신의 주장을 번복하였을 것이다.


러셀 커크가 쓴 <보수의 정신>에서 “보수적인 인간은 무질서와 어둠보다는 영원히 지속되는 그 무엇들을 더 기쁘게 생각하는 그런 소박한 사람들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의 보수는 중도의 다른 말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그 책에서 언급된 보수주의의 10대 원칙 중 마지막 세 가지 원칙을 짧게 언급하고자 한다. “보수주의자는 자발적인 공동체를 지지하고 강제적인 집산주의에는 반대한다.” 국민이 중심인 사회를 지향하고, 민주주의의 재앙인 독재를 반대한다는 말이다. “보수주의자는 인간의 격정과 권력을 신중하게 자제해야 할 필요를 인지한다.” 이 말은 정부의 권위와 개인의 자유 사이의 건강한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보수주의자는 영속성과 변화를 반드시 인정하고 조화시켜야 한다.” 보수주의자 역시 변화를 인정하지만, 합리적이고 온건한 변화를 희망한다는 것이다. 보수의 정신과 중도의 정신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조국혁신당이 중도의 깃발을 앞세운 민주주의를 향한 예인선이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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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향한 예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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