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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 연금 개혁안 반대 시위에 대한 단상
    요즘 프랑스 파리는 연금 개혁안 때문에 2~3월 보통 난리가 아니다. 정년을 62세에서 64세로 늦추는 내용을 골자로 한 마크롱 프랑스 정부의 연금 개혁 법안이 성립 직전까지 왔다고 한다. 야당이 제출한 엘리자베스 보른 총리 불신임안은 모두 부결되었지만 정부가 하원 표결을 불신임하는 헌법 특별조항(49조 8항)을 발동하는 강경책까지 사용하였기 때문에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풍파가 예상되고 있다. 당시 프랑스 하원에서 야당이 17일에 제출한 총리 불신임안 두 건이 모두 부결되면서 정부가 제출한 연금 개혁안은 의회를 통과하는 효력을 지니게 되었다. 물론 총리 불신임안이 가결되면 내각이 총사퇴해야 했지만,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셈이다. 다만, 헌법위원회의의 검토를 거쳐야 하는 절차가 남아지만 법안의 조항이 헌법에 부합하지 않으면 거부할 권한이 있다해도 대체로 승인하는 편이기 때문에 연금개혁안 또한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야당 의원들은 헌법위원회의 검토를 요청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프랑스 극우정당인 국민연합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마린 르펜 등이 헌법위원회 검토를 요구 중에 엤다. 2022년 마크롱이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한 뒤 임명한 보른 총리는 하원 표결을 건너 뛰는 헌법 특별조항을 소환한 것이 것이 이번이 총 11번째의 일이다. 물론 이에 대한 법적인 문제는 없지만 정부가 의회를 건너 뛰고 우회적으로 추진하는 정책이 전체 국민들의 지지와 야당의 지지까지 받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현재 여소야대 구도에서 마크롱 정부가 연금 개혁을 지지한 우파 공화당을 제외하고 나머지 야당과 치열한 갈등을 벌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아직 마크롱 대통령의 임기가 4년이나 남은 상황에서 향후 의회의 동의가 필요한 정책을 추진할 때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의회가 향후 정부의 정책 추진에 제동을 걸게 되면 시간은 물론 정치적, 사회적 비용이 따를 것으로 보여 원활한 국정 운영은 쉽지 않다. 이에 극좌 성향을 가진 마틸데 파노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 당" 의원은 정부를 붕괴시키고 개혁을 중단시키기 위해 단 9표가 부족했다. 프랑스인들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을 대변할 정부는 이미 죽었고 더는 정당성이 없다고 비판했다. 한편 정부가 연금 개혁안을 올해 1월 10일에 발표한 한 이후인 지난 1월 19일부터 두 달 동안 8차례 전국적인 단위로 시위 및 파업이 이어지고 있다. 총리 불신임안이 부결된 20일에는 프랑스 각지에서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 나오면서 양상은 더욱 심각하게 변해갔다. 여기에 환경 미화 노동자들이 파업해 쓰레기가 거리에 쌓여 있으며 시위 때 쓰레기통에 불이 붙어 불 타는 일도 속출하고 있다. 더불어 환경 노조는 23일에도 전국 규모 시위를 벌였으며 과잉 진압으로 현재 논란이 심화되는 중이다. 뉴욕타임스에 의하면 20일 표결이 끝난 뒤에도 시위가 잦아들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면서 프랑스 앞에 깊은 불확실성 시기가 놓여 있고 침묵을 지키는 마크롱 대통령이 어떻게 권위를 재확인할 수 있을지 불분명하다고 전했다. 여론도 사실 좋지 않은 편이다. 여론 조사 기관인 엘라브가 18~19일 18살 이상 프랑스인 1,10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 과반인 69%가 정부가 하원 투표를 건너 뛰고 법안 통과를 시도하는 것을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금 개혁 법안 최종안이 통과된다는 것을 가정할 때 정년은 2030년까지 현행 62세에서 64세로 늘어난다. 연금을 100% 받기 위해 기여해야 하는 기간은 2027년까지 기존 42년에서 43년으로 늘어나게 된다. 64세에 연금을 100% 받기 위해서는 43년 동안 노동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 67세까지 일해야 한다. 노동 기간이 늘어나는 대신 올해 9월부터 최저 연금 상한선이 최저 임금의 85%로 10% 올라간다. 다만, 취업을 일찍한 경우 조기퇴직이 가능하다. 워킹맘에게는 최대 5% 연금 보너스가 지급되는 절충안을 만들었지만 그게 현실로 가능할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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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1
  • 프랑스 절대왕정의 신분체제이자 유럽 중근세 시대의 봉건제를 대표하는 이름, 앙시엥 레짐(Ancien Régime) 이야기
    앙시엥 레짐(Ancien Régime)은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기 이전의 프랑스 왕국의 국가 체제를 통칭하는 단어로 나타난다. 앙시엥 레짐(Ancien Régime)은 프랑스어로 ‘옛 체제’를 뜻하고 있다. 그러나 앙시앵 레짐을 단순히 중세 유럽에 유행했던 봉건제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프랑스의 앙시앵 레짐은 오랫동안 봉건제 아래에서 왕권과 귀족권의 대립이 지속되었다. 그러한 대립의 결과가 관습법과 성문법으로 나타나 지속적으로 누적되어 형성되어진 사회구조를 통칭하기도 했다. 프랑스는 1789년 혁명을 거치면서 앙시앵 레짐의 모든 것을 부정하였으며 의회 중심의 국가로 재편되면서 민주주의 첫 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왕정복고(The Restoration)'가 이루어지고 대혁명 당시에 이루어졌던 '제도 개선(System improvement)'은 점차 무위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는 당시 부르주아에서 신흥귀족으로 변모한 자들이 프랑스에서 돈과 권력을 아직도 가지고 있었고 이와 같이 축적된 힘이 혁명을 무위로 돌아가게 했던 이유가 됐다. 앙시엥 레짐을 신분제도로 본다면 기본적으로 왕과 왕의 가족 아래에 크게 3개의 신분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왕을 정점으로 하는 이 신분제는 내부를 들여다 보면 신분끼리 완전히 이해관계가 일치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에서 크게 알려진 것은 특권층 신분과 피지배층 신분의 갈등이라는 구도로 보여지지만, 실상은 그보다 훨씬 복잡했다. 앙시앵 레짐의 특권층이 전복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특권층들부터가 분열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부분으로 인해 프랑스 내에서도 특권 폐지 외에 귀족과 성직자 계급의 전면적인 숙청에는 반대하는 주장들이 상당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자코뱅 당이 몰락한 이유가 이러한 부분인데 정작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 1758~1794) 본인은 이런 숙청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다수의 특권층들이 살아남을 수 있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일례로 20세기 프랑스 공화국의 과학자로 알려진 루이 드 브로이(Louis de Broglie, 1892~1987)는 공작 작위를 갖고 있었으며 특권만 없었을 뿐이지 재산도 매우 많았고, 귀족 작위 및 칭호도 허가되었던 것을 들 수 있다. 반면 이러한 특권 폐지 외에 귀족과 성직자 계급의 전면적인 숙청에는 반대하는 자들은 주로 내세울 것이 없는 하급 귀족이나 시골 혹은 소도시 성당의 하위 성직자들이 많았다. 이들 대부분은 평민 취급을 받아 특권을 가질 만한 것이 없었던 데다 갈수록 상층부가 견고해지면서 오히려 특권이 없어지는 것이 쉽게 출세를 하는 발판인 상황이 되다 보니 대체로 혁명에 협조적이었다. 후일 프랑스 황제가 되는 나폴레옹은 지중해 코르시카 섬의 이탈리아계 귀족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을 바탕으로 한 절대왕정은 루이 14세 때 전성기를 누렸으나, 루이 15세, 루이 16세를 거치면서 점점 허울만 남은 상태로 변해갔다. 근본적으로는 재정 악화로 인해 프랑스 왕가의 절대적인 세력이 약화된 것이 그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특히 대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루이 16세가 즉위하기도 전에 프랑스의 절반에 해당되는 지역의 징세권은 세리들에게 넘어가 있었고 왕권은 상당부분 약화된 상태였다. 이에 대한 일례로 태양왕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을 '귀족들을 순화하는 장소'로 사용했지만, 루이 16세 시대에는 오히려 '귀족들이 권력을 논하는 장소'로 변화했으며, 루이 14세가 사망하자마자 그의 사법권을 충실히 집행했던 파리 고등법원과 기타 여러 지방 법원들은 다시 귀족들의 세력 하에 들어왔다. 1789년 혁명 전야 때는 절대왕정 자체가 이미 이름 뿐인 개념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루이 16세 또한 나라를 변혁할 의지와 능력이 없었다. 이와 같이 부르봉 왕조가 루이 16세를 중심으로 단합하지 못하고, 왕가의 주요 인물들이 서로 간의 권력과 부의 욕심으로 인해 분열해 있었다. 이러한 부분으로 인해 프랑스 왕실의 힘이 더욱 약화되었다. 혁명 이후, 왕정이 복고되었을 때 루이 18세와 샤를 10세는 은근히 절대왕정에 대한 야심을 갖고 있었으며, 루이 13세의 자손으로 왕가의 인척인 오를레앙 공은 이전부터 왕위를 노리고 왕가의 권위를 낮추는 반(反) 왕실 활동을 후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혁명이 일어났을 때 혁명을 지원하여 왕정을 전복시키는데 크게 일조했다. 이런 부르봉 가문과 오를레앙 가문의 대립은 무려 프랑스 제3공화국 수립에도 도움을 주었을 정도로 오랫동안 고질적으로 이어지면서 프랑스 상류층의 대표적인 라이벌로 자리잡게 되었다. 앙시엥 레짐의 제1계층은 성직자와 수도자 계층으로 약 13만 명에 달했다. 대체로 프랑스 국왕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지만 카톨릭이라는 종교적 특성상 교황의 신하라는 이중적인 면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교황이 중세 시대와는 달리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론 프랑스 국왕의 신하나 다름 없었다. 이러한 제1계층의 숫자는 당시 프랑스 전 국민의 0.8%~1% 미만에 불과했지만 경작 가능 토지의 10%를 차지하고 있었고, 교회의 십일조와 수도원의 토지까지 합쳐서 여러 수입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면세 계급에 해당되기 때문에 대단한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제1계층 모두가 기득권층은 아니었고 일선에 있는 성직자들과 고위 성직자, 그리고 고위 성직자 중에서도 상황에 따라 재물 축적 및 정계 및 군대에 진출함에 따라 각자의 이해관계가 다르기도 했다. 물론 고위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하위 성직자 및 수도자들끼리도 계층이 갈려 대주교와 주교, 수도원장이나 수녀원장과 같은 고위급 성직자 및 수도자들은 귀족 가문에서 주로 충당되었고, 주요 직위들도 귀족 출신이 독점하게 된다. 이와 같이 프랑스 내의 큰 성당들과 수도원이 귀족 출신의 명의로 되어 있었고 혜택도 많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고위 성직자들은 귀족들이 서로 이해관계가 일치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에 지방의 작은 본당이나 시골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당시에 농민 및 시민들과 직접적으로 만나면서 현실에 대해서 크게 인식하고 있었고, 신분도 귀족과 먼 계층들이 많았다. 따라서 교회의 자금도 일괄적으로 거두어가서 재분배하는 형태였는데, 최소 단위 교구나 본당에는 자금이 내려오지 않은 데다 내려오더라도 매우 적은 금액이었다. 그래서 일반 백성들과 접촉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하위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고위 성직자 및 수도자들과 철저히 이해관계가 달랐다. 실제 프랑스는 카톨릭 국가였지만, 이 당시에는 프랑스 교회가 교황이 있는 로마 교회에 완전히 종속되어서는 안 되고 어느 정도 독립적인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갈리아 교회주의가 상당히 인정을 받고 있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에서 이단심문은 자주 나타나는 행사가 아니었으며 교황이 내린 결정 사항도 우선적으로 프랑스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만 적용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종교적 통제를 지지한 루이 14세는 어디까지나 프랑스 교회를 자신이 더 통제하기를 원했을 뿐, 프랑스 카톨릭의 분립을 원하지 않았다. 실제로 프랑스는 로마 이단 심문관의 집행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오히려 독자적인 종교재판소를 소유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교황도 가장 강력하면서 신앙심이 깊은 카톨릭교도의 국왕들은 필수적으로 가까이 해야만 하는 강력한 동맹이었기 때문에 이는 암묵적으로 유지되기도 했다. 이전에는 스페인 국왕이 가장 강력하면서 신앙심이 깊은 카톨릭 군주로서 교황을 지켜주는 우방의 역할을 했지만 루이 14세의 집권 이후 프랑스가 스페인을 뛰어넘어 유럽의 최강국이 되면서 스페인 국왕이 하던 역할을 프랑스 국왕이 대신 하게 되었다. 심지어 18세기에 이르러서는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였던 필리프가 스페인의 왕이 되었고 필리프의 아들들은 스페인 뿐만 아니라 교황령 남부의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의 왕까지 되었기 때문에 교황은 더더욱 프랑스의 왕을 멀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갈리아 교회주의는 종교에 관심 없던 나폴레옹이 집권하게 되면서 대부분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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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1
  • Generation Z: Navigating a New World
    Previous generations reveled in tales of their student years, reliving love stories that didn't go as planned, laughing about regrettable tattoos, and reminiscing about late-night adventures that defined their youth. But what will Generation Z, born into a world of unprecedented challenges and rapid technological change, remember from these formal years. Stephen Bartlett, a 31-year-old British entrepreneur and podcaster, shares a poignant reflection on his Gen Z experience. His student years were overshadowed by the coronavirus pandemic, which confined him to his room, turned university meals into solitary events, and transformed short walks into the highlight of his social life. For many in Generation Z, crucial milestones such as their student years and the brief window of carefree living before entering the workforce were marked by isolation and disruption. One might assume that these hardships forged a generation of hyper-resilient individuals ready to tackle the world's challenges. However, Bartlett argues that this isn't necessarily the case. In a recent article in The Economist, Generation Z is described as the “least resilient” generation. Bartlett echoes this sentiment, noting that he and his peers are often viewed as sensitive, socially awkward, and prone to hiding behind screens. Critics suggest that frequent job changes, absenteeism, and mental health issues are now common among Gen Z, attributing these trends to a deeper malaise. The Struggles and Criticisms of Gen Z Bartlett paints a somber picture of his generation, describing how many struggle to integrate into the adult world. The intense focus on academic success often leaves them ill-prepared for real-world problem-solving and critical thinking. The emphasis on university education saddles many with debt for degrees that may not align with their career paths, discouraging risk-taking and unconventional career choices. Moreover, Bartlett points out that Gen Z is often uncomfortable with discomfort. Raised in a culture that tends to invalidate differing viewpoints, many lack exposure to healthy dialogue, which is essential for developing resilience and the ability to respectfully disagree. Moreover, Bartlett points out that Gen Z is often uncomfortable with discomfort. Raised in a culture that tends to invalidate differing viewpoints, many lack exposure to healthy dialogue, which is essential for developing resilience and the ability to respectfully disagree. The heightened focus on mental health, while important, can sometimes create a sense of fragility. Bartlett acknowledges that mental health awareness is crucial, but he warns that the constant analysis of emotions can lead to an overwhelming sense of vulnerability. The perpetual engagement with social media exacerbates this issue, fostering a desire for instant gratification and eroding attention spans. This constant digital presence has real-world implications. For instance, job applications have become gamified, which can diminish the seriousness with which they are approached. This shift affects work culture, reducing the ability to persist through challenging tasks or endure less satisfying roles. Adapting to Modern Challenges The result, Bartlett argues, is a generation unaccustomed to discomfort, lacking perseverance, and unprepared for life's inevitable challenges. Adding to this is an ongoing anti-establishment sentiment that portrays society as fundamentally flawed and oppressive. Social media and around-the-clock influencers distort perceptions of reality, exacerbating these feelings. Fifty years ago, generational divides were defined by differences in culture, music, and fashion. Today, technology and a paradoxical overload of information have deepened these divides, altering how we live, think, and interact. In this landscape, truth has become subjective, and independent thought seems restricted. Society appears more divided and uncivilized, with individuals increasingly distant from one another, avoiding meaningful interactions. Yet, there is hope. If Generation Z can cultivate the resilience and determination necessary for modern life, they may navigate these challenges successfully. Embracing discomfort, fostering critical thinking, and learning to engage constructively with differing viewpoints will be crucial. By doing so, perhaps we can ensure that the next generation will have a brighter, more connected future to look forward to, with stories of resilience and triumph to t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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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0
  • Mystery of the Pyramids Unveiled: The Hidden River of the Sahara
    The Enigma of the Pyramids' Location Discovery of the Lost River The Role of the Ahramat River Unearthing the Past The River's Disappearance A New Chapter in Egypt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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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0
  • 조지아가 주목한 트란스니스트리아
    트란스니스트리아는 정식 국명으로 '트란스니스트리아 몰도바 공화국'이다. 이 뜻은 드네스트르 강 건너의 땅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트란스니스트리아(Transnistria)로 불린다. 이 국가는 동유럽에 있는 미승인국으로 1991년부터 사실상 독립 상태에 있으며 독립국가임을 자칭하고 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특수군사작전을 감행하면서 몰도바 역시 국내 사정이 우크라이나와 비슷하기 때문에 크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 있다. 특히 러시아를 지원하고 있는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이 안보 회의 중 몰도바를 침공하려는 계획이 담긴 듯한 지도를 공개하여 논란이 커졌다. 따라서 몰도바의 대통령 마이아 산두는 몰도바를 루마니아에 병합시키자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면서 트란스니스트리아는 위기를 겪게 된다. 몰도바와 루마니아는 사실상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같은 민족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19세기 초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속국이었던 몰다비아 공국의 동쪽 절반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 할양되면서 서로 다른 나라가 된 것으로 보인다. 몰도바를 루마니아에 병합해야 한다는 주장은 현재도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하여 위기감이 고조된 것이 우크라이나와의 국경 근처인 드네스트르 강 동쪽에 사는 러시아-슬라브계 주민들이었다. 특히 몰도바인들도 트란스니스트리아 지역에 사는 사람은 러시아어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에 동참했다. 2021년의 대선에서는 현 대통령인 바딤 크라스노셀스키(Вадим Красносельский)와 다른 무소속 후보인 세르게이 핀자르(Сергей Пынзарь) 후보 단 두 후보만 나섰다. 지난 총선과 마찬가지로 35.3%의 낮은 투표율이 나왔으나 25%는 넘기면서 유효한 대선으로 인정이 되었다. 현 대통령인 크라스노셀스키 대통령이 75%이상의 득표율을 획득하며 2선에 성공하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세가 불안정한 국가인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몰도바,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려는 입장을 표명하는데 반해 국방부는 러시아에 대해 과도한 의존도를 보이고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작전이 러시아의 계획과 달리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자 러시아는 트란스니스트리아 국방부로 하여금 가짜 깃발 작전을 벌여 트란스니스트리아에 주둔한 러시아군을 동원하기도 했다. 현재 트란스니스트리아에는 약 1,500명의 러시아군이 주둔하고 있다. 그런데 트란스니스트리아의 자치의회는 지난 28일 특별회의를 열고 22만 명의 러시아 시민이 거주하고 있는 트란스니스트리아를 몰도바의 점증하는 압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러시아와 합병에 나서달라고 요청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지난 1월 몰도바 정부가 트란스니스트리아 지역과의 거래에 관세를 도입하며 경제적 압박을 가했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도중에 트란스니스트리아와의 국경을 봉쇄했다.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를 거쳐 이 지역으로 가는 송유관도 막았다. 이에 따라 트란스니스트리아를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사실상 몰도바 뿐이다.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몰도바가 교역품에 과세하면 트란스니스트리아 GDP의 10%에 이르는 비용이 더 생긴다며 반발하고 있다. 트란스니스트리아가 러시아와 합병론이 부상하자 가장 긴장하는 나라가 있다. 바로 조지아다. 조지아는 압하지야 자치공화국과 남오세티아 자치공화국이 러시아와 마주하고 있다. 이들 국가들 또한 러시아계 주민이 80% 이상 되는 미승인 자치공화국이며 러시아와 이미 두 차례 남오세티아 전쟁을 벌인 바 있다. 트란스니스트리아가 주민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러시아와 합병하게 된다면 그 영향은 압하지야와 남오세이타에 미칠 것이며이 자치공화국들 또한 러시아와 합병론을 주장하게 될 것은 불문가지이다. 조지아는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아에 대한 영유권과 영토주권을 주장하고 있지만 돈바스처럼 러시아에 합병되기라도 한다면 조지아의 영토는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터키와 러시아의 압박을 받아 국가가 소멸될 위기에 놓이기 때문이다. 최근 조지아는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예의주시하며 보고 있다. 그만큼 국가의 생존이 걸린 문제니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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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0
  •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가 분리된 이유 (下편)
    코소보 전쟁 이후, 유고슬라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정권이 실각하면서 주카노비치는 세르비아와의 분리독립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세르비아 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일 마르크화를 사용하기 시작한 주카노비치는 이 때부터 집단 서방의 지지를 적극적으로 이끌어 낸다. 독일의 헬무트 콜 총리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된 주카노비치는 독일에게 내주면 안 될 것을 내주게 된다. 이는 몬테네그로의 확실한 수입원인 관광 산업이었다. 헤르체그 노비, 코토르, 티바트, 부드바와 같은 아드리아 해안가의 도시들은 예로부터 휴양도시로 유명했다. 실제로 사회주의 시기부터 여름 휴양지로 유명했었는데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었던 요시프 티토의 휴양지도 몬테네그로에 존재했을 정도였다. 워낙 몬테네그로의 경제력이 처참했던 탓에 독일의 지원금을 받지 않으면 국가 경제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베오그라드 연방 정부에 새로운 지원금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였기에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두 개의 연방으로 분리되어 있었던 몬테네그로는 경제적인 독립화를 선언했다. 이 때 독일과 프랑스의 수많은 투자자들이 몬테네그로에 유입되었고 두 국가의 검은 돈, 탈세의 창구로 이용되기 시작한다. 현재 유럽에서 몰타와 키프로스가 갖고 있었던 탈세 창구의 위치를 90년에서 2000년대 후반까지 몬테네그로가 갖고 있었던 셈이다. 연방 내 경제적 독립에 성공한 주카노비치는 이내 정치적으로 완전한 독립을 계획하게 된다. 특히 독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몬테네그로 사회민주당(Социјалдемократска партија Црне Горе)은 주카노비치가 당수로 활동하면서 해안가 4개 도시인 헤르체그 노비, 코토르, 티바트, 부드바의 개혁파들을 중심으로 독일의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으며 몬테네그로 정국을 주도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새로운 대통령이 된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Војислав Коштуница)는 연방 유지를 강력하게 주장하며 몬테네그로의 정치적 독립을 반대했다. 그러나 독일과 집단 서방, 미국은 주카노비치와 몬테네그로 사민당을 적극 지지하며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구성된 신(新)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대해 적극적으로 분할하기에 나선다. 한편 신 유고 연방은 밀로셰비치가 물러나게 되면서 몬테네그로 독립에 대해 세르비아 사회는 오히려 반대하는 모양새에 들어갔고, 잘못하면 몬테네그로 국민들의 지지를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 몰리자 사민당은 독일 및, 미국과의 협정을 통해 독립을 잠시 유보하고 세르비아 공화국과 타협해 세르비아와 국가 연합을 구성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베오그라드 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이에 따라 2003년에 유고슬라비아는 헌법을 개정하였고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국가 연합'으로 국호를 바꾸게 된다. 당시 부총리에 재직했던 자르코 라크체비치(Жарко Ракчевић)는 세르비아와 연합을 반대했던 인물이지만 베오그라드 협정이 체결되자 스스로 부총리 직위를 사임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외교적 노선은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 세르비아는 친러 성향으로 친러를 고수하고 몬테네그로는 친서방주의를 고수했다. 게다가 지속적으로 독일의 지원을 받은 몬테네그로는 코소보 전쟁에서 파괴된 세르비아보다 경제력에서 훨씬 우월한 상태였고 세르비아는 전후복구를 몬테네그로가 받은 서방의 자금으로 했기 때문에 몬테네그로 내 국민들의 불만을 폭발하기 직전까지 몰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몬테네그로 내 정정마저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몬테네그로는 독일 및집단 서방과의 협상을 통해 2006년과 2009년 두 차례에 걸쳐 독립에 대한 국민의 의견을 묻는 국민투표를 결정하게 된다. 대신 집단 서방은 주카노비치에게 최소 찬성의 55%는 넘겨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고 마침내 2006년 5월 21일에 헌법에 따라 몬테네그로에서는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시행되었다. 이 투표에서 몬테네그로는 55.5%의 찬성을 얻었고 결국 미국과 집단 서방이 이를 승인함으로써 마침내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와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헌법은 무효화 되었으며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고 주카노비치의 총리 지위는 계속 유지되었다. 이에 대해 세르비아 내에서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약속한 대로 세르비아에서도 몬테네그로의 독립을 받아들이고, 더불어 자치공화국으로서의 헌법을 독립국 헌법으로 개정하여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이로써 유고슬라비아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신(新) 유고슬라비아가 해체 된 것은 사실상 그 배경에는 집단 서방이 있었고 독일이 그 배후에 있었다. 게다가 신 유고 연방 내 악화된 경제 상황은 두 나라의 분리로 이어졌다. 주카노비치는 헬무트 콜-게르하르트 슈뢰더-앙겔라 메르켈로 이어지는 독일 정계와 친분을 유지했고 몬테네그로 독립에 최종적으로 싸인한 인물 또한 당시 신임 총리였던 메르켈이었다. 결국 유고슬라비아를 분할해서 쪼개는데 성공한 집단 서방은 2008년 코소보도 분할하는데 성공하여 세르비아는 국가 생존마저 위험해지는 상황까지 맞이한다. 그러나 세르비아의 배경에는 여전히 러시아가 있었고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세르비아는 진작에서 멸망하고 남았을 국가였다.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는 상호 간에 주권국가로 갈라서게 되었지만 그 외에 모든 부분은 상호 협력하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20

실시간 칼럼 기사

  • An Officer's Heart-Wrenching Goodbye: Mourning the Loss of His Beloved Horse
    A few days ago, tragedy struck in the heart of Houston, Texas, casting a shadow over the bustling city streets. The scene was harrowing: a majestic police horse, once proud and towering, now lay dying amid the road. As she was affectionately known, Charlotte had been a stalwart companion to her rider, patrolling the urban thoroughfares with unwavering dedication. The bond between horse and rider transcended mere duty; a deep, mutual affection fueled their partnership. Together, they navigated the complexities of law enforcement, relying on each other's instincts and prowess. Charlotte's remarkable speed and agility had aided in countless apprehensions, thwarted criminals, and brought a sense of safety to the community. But fate can be cruel, as evidenced by that fateful day's sudden turn of events. The sharp sound of hooves striking asphalt reverberated through the air, signaling danger. A truck laden with cement careened into their path with startling force, shattering the tranquility of their patrol. In an instant, both horse and rider were hurled aside, grievously wounded by the brutal impact. Summoning every ounce of strength, the injured officer alerted authorities to the accident scene. Despite his own pain, his thoughts were solely on his fallen companion, Charlotte, who lay crippled and fading before him. With tender strokes and whispered words of solace, he sought to ease her passing, offering comfort in her final moments. Blood mingled with tears as he cradled her head in his arms, disregarding his own injuries in his grief. The once vibrant eyes of the noble steed now dimmed, yet she still held an unspoken connection with her devoted rider. As her labored breaths grew faint, a flicker of her leg signaled her departure from this world. The officer's anguish was palpable as he bid farewell to his faithful friend; his tears were a testament to the depth of their bond. In a poignant tribute, the Houston Police Department honored Charlotte's service and loyalty, acknowledging her unwavering commitment to duty. For four years, she had served with distinction, whether chasing down criminals or bringing joy to children on the streets. Though her physical presence may be gone, Charlotte's spirit lives on in the hearts of all who knew her. She leaves a legacy of courage, loyalty, and unwavering dedication—a testament to the profound bond between man and beast. In the annals of law enforcement, her memory will endure, a shining example of the noble spirit that defines the Houston Police Department.
    • 칼럼
    • Thoughts Of Seraphine
    2024-04-16
  • 조선이 근대화 되었을 마지막 기회
    소현세자 이후, 조선은 근대화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당시의 세계는 소현세자의 시대에서 100여 년이 지난 상태로 그 때와는 많은 부분에서 달라져 있었다. 18세기 후반기로 치닫고 있을 때 서양에서는 영국이 산업혁명에 성공해 근대화를 이루었고 절대왕정에서 의회정치가 강화되어 왕은 정치적 실권에서 멀어지고 입헌군주, 상징적인 존재로 밀려나고 의회 정치로 인한 민주화를 추구하게 된다. 한편 미국이 독립에 성공했고 영국은 아메리카를 잃었어도 대영제국의 확장 정책을 지속하여 이전에 최대 영토를 이루었던 몽골 제국을 뛰어넘으려 하고 있었다. 이러한 제국주의의 가속화로 마침내 모든 세계의 패권이 동양에서 서양으로 넘어가게 된다. 프랑스는 절대왕정 체제에서 대혁명이 발발하여 혼란이 발생하던 시기였고 독일이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일약 강대국으로 성장했으며 오스트리아 또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를 중심으로 여전히 강세를 이루고 있었으며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예카테리나 대제의 개혁으로 최전성기를 달리면서 최고의 궤도에 올라서고 있었다. 이에 반해 오스만투르크는 러시아에게 전쟁에서 연달아 패배하고 급격히 쇠퇴했다. 이제 육상교통보다 바다를 이용한 해운교통이 발달함으로써 그동안 육상교통을 오스만투르크의 아성은 한없이 추락했다. 그리고 아시아의 3대 제국을 이루었던 인도의 무굴제국도 아우랑제브의 종교 분리와 차별 정책으로 인해 힌두교와 이슬람교 간의 내흥은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무굴제국은 내부에서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청나라 또한 건륭제 말기에 접어들면서 부정축재로 재산을 쌓아둔 간신들과 귀족들의 폭리가 절정을 이루면서 내부에서 이미 썩어들어가고 있었던 실정이었다. 일본은 쇄국정책의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아시아는 점차 세력을 잃어가고 세계의 중심에 유럽이 올라서면서 전체적인 힘의 판도가 유럽과 미국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숙종과 영조 시대에 문화적 중흥기를 이룬다. 그리고 문화적인 중흥기를 이루고 경제력으로도 청나라에 그리 뒤쳐지지 않을 정도로 왜란과 호란 이전의 상태로 완전한 회복기를 갖고 있었다. 그와 별개로 정치적으로는 노론과 소론의, 벽파와 시파 및 남인 등 지독한 당쟁에 시달렸는데 이는 숙종이 왕권강화를 위해 당쟁을 적절히 이용하여 신하들을 견제하면서 왕으로써의 정치적 권위를 높였다. 한편 영조는 탕평책을 쓰면서 당쟁을 정치권력 쟁취의 도구에서 국가적인 이익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환기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는 영조가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임으로써 실패하게 된다. 그로 인해 오히려 왕권은 서서히 추락하고 당쟁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뒤를 계승한 정조는 자신을 즉위시키는데 도움을 준 외척 홍국영을 실각시킨 후 탕평책을 바탕으로 직접 정치를 이끌었다. 그러나 집권 초기 반대파에 둘러싸여 있던 정조에게는 친위세력이 없었다. 정조는 자신의 뜻에 따를 문신을 육성하기 위하여 규장각을 설치하는 한편 군영을 개혁하여 국왕의 병권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규장각은 내각과 외각으로 확대 개편하였고, 남인에 속한 채제공을 규장각 제학으로 임명하면서 남인을 중용하였다. 남인에 대한 중용은 이미 세력이 비대해진 노론의 두 파인 시파와 벽파를 정치적으로 적절히 견제함과 더불어 남인을 자신의 친위 세력으로 삼아 개혁을 순탄히 이끌고자 하는 뜻에 있었다. 마침내 채제공은 이후 우의정에 임명되어 정조의 최측근이 되어 정조가 개혁하는 작업에 선봉장이 된다. 정조는 없는 군사는 도태시키고 낭비되는 군량은 줄여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여 새롭게 장용영을 세우는 대신 기존의 5군영에서 수어청과 총융청의 폐지를 관철시키는 한편, 군영의 장군 임명은 병조판서를 통해 임금이 재가하도록 하여 군 인사권에 대한 국왕의 통제권을 강화하였다. 정조는〈병학통〉을 직접 지어 군사 훈련을 중요시 하였고, 정기적인 훈련을 감독하는 한편 직접 군사를 지휘하기도 하였으며 화포와 화승총 등의 화기들에 관심을 보여 이를 보강했다. 훈련을 위해 규장각 검서인 이덕무, 박제가와 장용영 장교인 백동수에게 훈련교본인 <무예도보통지>를 간행하도록 했다. 그리고 청나라를 왕래한 상인들과 실학자들의 의견을 듣고 서양 문물, 특히 군사 무기에 대한 관심을 쏟으면서 서양 무기들을 수입해 군을 강화하려고 했다. 정조는 여러 법제를 개혁하여 당시 사회에 대두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육의전 상인에게 주어졌던 독점권을 폐지하여 독점권을 통해 내부에서 뇌물로 청탁하려 행위를 차단하였고, 격쟁과 신문고를 운영하여 백성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려 하는 한편 당시 사회 문제인 도망간 노비에 체포와 형벌을 담당한 추쇄관 파견을 중지하여 노비의 인권을 위해 그들에게 땅을 경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노비 개혁은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 선포보다 무려 60년이 빨랐고 러시아 알렉산드르 2세의 농노해방령보다 무려 70년이 빨랐던 대개혁이었다. 그러면서 양반에 비해 차별을 받던 서얼과 중인의 문제도 개선하고자 하였다. 인사 문제에 있어서도 특정 지역에 편중되는 기존의 과거 제도를 고쳐 함경도 지역과 같이 그동안 무관만을 선발하던 곳에서도 문관을 선발하면서 다양한 인재들을 등용하였다. 그렇게 선발된 인재들이 박제가나 홍대용, 유득공, 박지원, 정약용 등의 실학자들이다. 정조는 아버지 장조(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새롭게 성을 축조하였다. 1792년(정조 16년) 초여름, 정조는 정약용에게 성을 축조하는데 유용한 도구를 개발하라고 지시하여 거중기를 고안하게 하였다. 정조는 정약용에게 참고할 자료로 청나라 강희제 때 편찬한 백과사전인 <도서집성>과 독일 출신의 선교사 요하네스 테렌츠(Johann Terrenz)가 지은 물리학의 원리와 도르래의 이용을 설명한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전달하면서 서양의 과학기술 및 물리학의 기술도 받아들이도록 했다. 그렇게하여 우리의 기술과 서양의 과학기술을 접목해 만든 성이 바로 수원 화성이다. 정조 시대인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사무역인 후시(後市) 무역이 개시 무역보다 규모가 커졌다. 무역상인들은 교역품의 시세 차익으로 이익을 얻었는데 품목에 따라 10~20배에 이르는 차액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서양 문물이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고 정조는 서양 문물에 대해 적극 수용했다. 특히 지구본, 자명종, 망원경 등은 이 때 본격적으로 조선 왕궁에서 사용이 되었다. 정조는 40세 이후 시력이 나빠지자 안경을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정조실록>에 의하면 "정조 52권, 23년 7월 10일(병인) 1번째기사 / 차대 때 임업의 상소문에서 수교를 어긴 것 등에 대해 이르다 - 상이 이르기를,“나의 시력이 점점 이전보다 못해져서 경전의 문자는 안경이 아니면 알아보기가 어렵지만 안경은 2백 년 이후 처음 있는 물건이므로 이것을 쓰고 조정에서 국사를 처결한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것이다.……" 라는 기록이 있는것으로 보아 정조가 안경을 쓴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서양 문물 수용에 적극적이었지만 카톨릭은 조선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탄압했지만 순조나 헌종, 고종 때처럼 심하지 않았다. 이러한 정조의 개혁에 정적인 노론 세력은 계속하여 제동을 걸었다. 게다가 역대 조선의 왕들 중, 가장 많은 암살 위협을 받았고 정조가 사망했을 때 정조의 죽음에 대해 독살설까지 재기될 정도로 집중 견제를 받았다. 연훈방을 써서 수은에 중독되어 죽었다는 것인데 이 방법을 주선한 자들이 심환지와 이시수였고 그들은 정조의 정적이었던 노론의 벽파라는 것과 정순왕후가 정조를 독대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정조가 사망하였다는 것 등이 독살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정조가 죽은지 1년 뒤, 정조가 아끼던 인재들은 신유박해 때 카톨릭 신자들과 함께 숙청되었고 정조의 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만약 정조가 철저히 정적을 숙청하여 그의 재임기간도 늘렸다면 조선은 무너져 가는 청나라와 쇄국정책으로 뒤쳐져 있는 일본의 에도막부를 제치고 선진국으로 올라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침공해오는 서양열강들에게서 조선은 아시아에 유일한 강대국으로 칭송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동안 잡아왔던 당쟁의 기득권 층으로 인해 정조의 개혁은 허무하게 끝났고 이후 조선은 강대국으로 올라설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렸고 이 정조의 개혁이 실질적으로 조선이 근대화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물론 이후 대원군, 명성황후 등이 개혁해보려 시도했고 김옥균 등의 개화파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개혁해보려 했지만 이미 많이 늦어버렸고 결국은 병탄의 치욕을 당하여 35년간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15
  • 서아프리카 토고의 총선과 냐싱베 가문의 이야기, 냐싱베 에야데마의 재집권 말년, 포르 냐싱베(Faure Gnassingbé)의 집권과 현 총선 (下편)
    토고의 민주화 시위의 실패로 인해 1993년 1월 25일에 경찰이 수도의 시위에 발포한 후 22~50명이 사망하며 토고의 정치적 위기는 다시 고조되었고, 1월 29일에 군인 중 1명이 민간인에게 살해되자 이에 분개한 군인들은 바로 다음 날에 거리를 약탈하며 최소 6명의 민간인을 살해했다. 이와 같은 군인들의 학살에 로메 인구의 절반인 최소 30만 명이 가나와 베냉으로 피신했고, 8월 25일에는 토고 역사상 최초의 다당제 대통령 선거를 열었으나 대부분의 야당이 선거를 보이콧을 선언하면서 야당 후보는 단 2명 만 나왔고, 냐싱베는 36.12%의 저조한 투표율 속에서도 96.42%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참고로 이 투표에서 유효 득표수 합산이 총 득표수보다 1만 명 이상 많게 잡히는 등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많아 이 선거 역시 부정 선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같은 해에 유럽과 미국, 프랑스는 독재와 인권 탄압을 이유로 토고에 대한 원조를 중단했지만 그럼에도 냐싱베와 프랑스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는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과 절친이었고 친프랑스 기조를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이다. 다만 미테랑과의 사이는 좋지 않았는데 이전에 있었던 비행기 사고 또한 미테랑과 정보부가 조장한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토고의 언론 탄압은 1996년에 들어 정점을 맞이하게 된다. 1월 17일 야당 신문인 차우조의 편지(The Letter of Tchaoudjo)의 국장 무다시루 카탁파우 투레(Moudassirou Katakpaou Toure)를 '국가 원수 명예 훼손' 혐의로 징역 5년, 벌금 1만 달러, 신문 무기한 정간을 선고했다. 더불어 6월 19일에는 또 다른 야당 신문 민주당 트리뷴(The Tribune of Democrats)의 발행이사 에릭 로슨(Eric Lawson)을 제복을 입은 미확인 특공대에 대한 살인을 비난하는 기사를 실었다는 이유로 민중의 증오를 선동하고 페이크 뉴스를 조장한 혐의로 궐석재판에서 징역 5년, 벌금 6천 달러와 신문 6개월 정간을 선고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언론 탄압은 2년 뒤에 있을 대통령 선거를 정조준하여 언론을 장악하겠다는 장기적인 대선 빌드업을 위한 조치였는데 예상대로 1998년 6월 21에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냐싱베는 5명의 야당 후보와 맞붙어 52.08%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이 때 냐싱베 정권의 언론 활용은 냐싱베에 대한 우상화, 그리고 상대 후보에 대한 극심한 네거티브로 이어져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획기적인 언론 장악으로 재선에 성공한 캐이스로 꼽히고 있다. 이 선거에서 아쉽게 2위를 차지한 측은 무려 34.18%의 득표율을 기록한 길크리스트 올림피오(Gilchrist Olympio, 1936~ ?)이다. 그는 전임 토고 대통령이자 토고의 독립 후, 초대 대통령이 되어 만만치 않은 독재를 행한 실바누스 올림피오의 아들이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독재자지만 아들인 길크리스트는 민주주의자로 부친과 정반대 성향을 지닌 인물이다. 그는 오랫동안 프랑스에 머물다가 토고로 돌아와 불법이던 야당 활동을 했다. 야당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는 길크리스트는 궐석 재판에서 2차례 사형 선고를 받기도 했지만 1992년 2월 1일에 평소 친분이 두터운 미테랑의 지원을 받아 야당 연합인 변화를 위한 연합(UFC)를 설립했다. 이어 5월 5일에 길크리스트의 호송대가 냐싱베의 아들인 포르 냐싱베(Faure Gnassingbé)가 지휘한 특공대의 공격을 받아 12명이 죽고 본인도 중상을 입어 프랑스에서 1년간 치료를 받았다. 이처럼 정치 테러를 당하고도 프랑스의 미테랑의 지지를 받은 이유는 토고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고 있는 국유화된 인산염 광산을 재확보하기 위해서인데 현재 인산염은 모로코가 아프리카에서 부동의 생산력 1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모로코가 부각되기 이전에는 서아프리카에서 토고가 가장 많은 인산염을 채굴하고 있었다. 인산염은 식량생산에 있어 필수적인 비료이다. 두류(豆類)나 유채, 밀. 면화. 감자류나 오이류 및 과일나무 등은 모두 인을 좋아하는 작물에 속하기 때문에 인산 비료를 시용하면 비교적 좋은 비료 효과를 낼 수 있다. 바게뜨로 유명한 프랑스는 토고에 인산염을 의존해 왔다. 토고의 인산염으로 가공된 비료로 프랑스 내 토지에서 밀을 생산하고 그것으로 프랑스의 제과업은 눈부신 발전을 이뤄왔다. 프랑스의 바게뜨가 맛있고 세계 3대 요리에 프랑스 요리가 손꼽히는 이유 또한 토고의 인산염 비료 덕분이었다. 프랑스가 지금도 토고를 놓지 못하는 이유는 토고의 인산염 비료로 인한 먹거리 생산량 때문이다. 한편 야당에서는 올림피오가 실제 당선자라며 프랑스에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했다.이에 이 선거 이후 냐싱베는 수백 명의 반대파들을 처형하고는 그 시신을 바다에 유기하는 잔혹성을 보여줬는데, 1999년 5월에 국제 앰네스티가 이를 폭로하자 냐싱베는 이것이 국제 앰네스티가 정부에 대해 제기한 조사와 혐의는 토고 내 야당 단체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며 2명의 야당 국회의원을 앰네스티와 연관되었다는 이유로 체포한 것을 넘어 무려 국제 앰네스티를 정부 차원에서 고소하기도 했다. 국제기구를 정부 차원에서 고소한 국가원수는 냐싱베가 처음이자 유일한 사례로 알려져 있다. 북한의 김정일, 김정은 부자와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조차도 북한과 에리트레아의 인권 탄압을 지적한 국제기구를 정부 명의로 맹비난한 적은 있어도 정부 명의로 고소까지 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로메에서 연 기자 회견에서 앰네스티의 보고서를 두고 대부분이 조작일 것이라고 주장하며 냐싱베의 고소가 옳았다고 주장하며 냐싱베를 적극 지지했다. 이후 냐싱베는 이미 2003년을 마지막으로 물러냐아 하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퇴진 시기 직전인 2002년 12월 30일에 또 다시 개헌을 자행해 대통령직을 이어 나갔다. 당시 토고의 헌법은 5년 임기 2번으로 대통령 임기를 정해놨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군부를 앞세워 개헌한 최악의 민주주의 유린행위를 저질렀다. 더불어 대통령의 연령 제한을 45세가 아닌 35세로 낮춰 놓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가 급사할 경우 아들인 포르 냐싱베(Faure Gnassingbé)에게 권력을 세습시키기 위한 결정으로 판단했다. 당시 포르 냐싱베는 아버지의 재정 고문관으로서 아버지가 해외에 은닉한 재산을 관리했고, 헌법 개정 당시 만 36세였기 때문이었다. 냐싱베는 2003년 6월 1일에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57.79%로 당선되었지만, 이 역시 야당 UFC가 실제 당선자는 71%를 차지한 엠마누엘 밥-아키타니(Emmanuel Bob-Akitani, 1930~2011)이고, 냐싱베는 단 10%만 득표했다고 주장하며 다시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했다. 그와 더불어 2000년부터 2001년까지는 아프리카 단결 기구(OAU) 의장을 역임했으며, 말년에는 자신이 독재자라는 이미지를 개선시키기 위해 2002년부터 시작된 코트디부아르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코트디부아르 정부와 반군의 중재를 시도하는 등 아프리카 지역의 평화 이니셔티브에 참여하기 시작했지만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냐싱베는 2005년 2월 5일에 고향에서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 보잉 707 전용기를 타고 프랑스로 응급 치료를 하러 가던 도중 튀니지의 튀니스로부터 남쪽으로 250km 떨어진 지역에서 69세를 일기로 급사했는데, 그가 사망할 때 그보다 더 오래 집권한 아프리카 독재자는 없었다고 한다. 냐싱베의 사망 직후 토고 정부는 국가 비상 사태를 선포했고, 2005년 4월 24일에 아들인 포르 냐싱베가 60%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많은 사람들의 예상대로 만 38세라는 젊은 나이로 토고의 차기 대통령직으로 선출되었다. 권력 세습에 성공한 포르 냐싱베는 유년 시절 프랑스의 파리 도핀 대학교와 미국의 조지 워싱턴 대학교 등지에서 공부를 한 뒤 아버지의 재정 고문관으로 일했는데, 주요 업무는 외국에 있는 가족 재산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36세에 집권 여당 국회의원에 선출되었고, 이후 통신 장관과 광산 장관까지 맡아 아버지의 측근이 되며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져 나갔다. 아버지는 아들이 정계에 진출하자 토고의 헌법까지 고쳐 가면서 아들이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대통령 출마 자격을 40살에서 35살로 바꿔 놓는 불법적인 헌법 개정을 했다. 그리고 아버지 냐싱베 에야데마가 2005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그는 몇 시간 만에 군부의 지원과 자크 시라크 대통령의 지지를 바탕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그러나 시민과 야당 의원들은 대통령이 사망했을 때 60일 안에 대선을 치를 것을 규정한 헌법을 지킬 것을 요구했고,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와 아프리카 연합 등도 토고의 민주화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자 그는 3주 만에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 2005년 4월 24일 대선을 치렀다. 그러나 투표 집계 결과 그의 지지율 60%로 집계되었고 당선이 확정되자 야당이 대규모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시위를 벌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포르 냐싱베는 군부를 동원해 이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여 1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국제 앰네스티는 2005년 선거 과정에서 고문, 강간, 살인 등이 발생해 최소 400여 명이 사망했으며, 투표함이 탈취되기도 했다고 발표했다. 또한, 야당 진영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취임식을 열어 국가 개발과 복지, 평화와 국민통합에 집중하겠다며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토고의 주민 2만여 명은 냐싱베 가문의 잔혹한 독재를 피해 인근 국가로 피난을 떠난 상태였다고 한다. 포르 냐싱베는 취임 후 야당의 정치활동 확대, 반정부 인사 석방 등 유화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계속 선거에 당선되면서 장기집권을 이어가고 있 있다. 냐싱베의 과제 중 하나가 과거사 청산인데, 2005년 대선 이후 그는 야당 측과 ‘평화협정’을 맺으며 ‘진실과 화해를 위한 위원회’ 설치에 합의했다. 이것은 아버지 통치기간 중에 벌어진 인권 침해 등에 대해 밝히겠다는 건데, 2006년 출범한 이 위원회는 현재까지도 공식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자신의 아버지를 단죄하면 자신의 정치 생명이 그만큼 깎일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프랑스가 니제르와 말리, 부르키나파소에서 철수하고 프랑스의 패권이 서아프리카 큰 위협을 받게 되자 친프랑스에 속하는 토고 정부도 이제 프랑스의 입김에서 자유로워지자는 시민들과 야당이 조금씩 힘을 얻고 있다. 현재 토고에는 약 300여 명의 프랑스군이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와의 전쟁을 이유로 주둔하고 있는데 토고민주연합당(UTD), 민주정의연합(UJD) 등의 야당은 포르 냐싱베 정권의 퇴진과 프랑스 군의 철수를 요구하고 있다. 게다가 토고 내에서 야당의 세력이 커지면서 포르 냐싱베도 이전처럼 안정적인 선거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니제르와 말리, 부르키나파소에서의 프랑스군 철수 및 이들 국가들의 반프랑스 연합 및 반미 세력까지 형성됨에 따라 토고에서도 그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토고민주연합당(UTD)의 경우, 니제르처럼 러시아의 지원을 받자는 당내 입김도 강화되고 있는 실정이라 한다. 즉, 토고에서도 친러파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친프랑스 정파인 냐싱베 가문을 축출하면 러시아의 지원도 받으면서 진정한 주권을 가진 국가로 새 출발 할 것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토고의 총선은 4월 말로 미뤄졌지만 서아프리카의 대표적인 친프랑스 독재 국가로 남아 있던 토고에도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이는 매우 반가운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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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조선은 벌써 17세기 당시 근대화에 성공했을까?
    위화도 반란으로 사대주의의 온상이 된 나라 조선도 일찍 근대화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병자호란이 벌어지던 1630년대의 세계는 대항해시대의 절정에 이르던 시대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지중해 지역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 오스만투르크, 아랍 세계 등과의 교역과 군사적 대결을 통해 그들로부터 우수한 문화를 받아들였다. 게다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는 일찍이 이슬람 선진문명이 지배하고 있었기에 그들을 레콩키스타 (국토회복운동)을 통해 몰아내고 그들의 발전된 문화와 문명을 흡수했으며 군사적 무기의 개편으로 화약과 화승총, 화포 등의 화기를 갖춘 신형 강국이 되었다. 본래 화약은 몽골제국의 서진으로 인해 전래된 것인데 이를 사용하는 방법을 가장 먼저 익힌 것은 다름 아닌 영국이었다. 이는 프랑스와 백년전쟁 당시, 화포와 화승총이 최초로 등장하여 프랑스 중세 시대 중장기병대를 쓸어버린 것이다. 영국은 화약을 사용하는 총과 화포를 자신들의 용도에 맞게 개발했지만 비가 오는 날에는 화기들이 작동하지 않는 등, 상당한 애를 먹었었다. 그리고 이후, 그러한 기술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에게 넘어오게 되었고 화약이 오스만투르크, 아랍 세계로부터 들어오게 되자 영국식 총포를 자신들에게 맞게 개량해 무장하게 되면서 일약 신생 강국으로 떠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함선 건조법, 나침반, 망원경 등이 아랍 세계를 통해 들어와 유럽인들에 맞게 개량되면서 이들은 바다로 나갈 기회를 찾게 되었고 때마침 오스만투르크로 인해 동방과 교역이 어렵게 되고 전체적으로 경제 물가가 심한 인플레를 겪에 되면서 그에 대한 자구책으로 스스로 동방과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나타난 인물이 해상왕 엔리케, 콜롬부스, 바스코 다 가마, 마젤란 등이었으며 이들은 해상항로를 개발하고 아메리카를 정복해 식민지화 했으며 마젤란의 세계일주 성공으로 인도로 가는 항해의 길을 열게 된다. 그리고 포르투갈과 합병함으로써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길까지 확보하면서 스페인은 일약 세계제국으로 성장한다. 그 이후, 영국과 네덜란드가 나타나면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조금씩 쇠퇴하게 되고 두 나라는 인도와 인도네시아 지역에 동인도회사를 세우게 되는데 이 시기가 묘하게 병자호란이 발생한 시기와 맞먹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명나라와 청나라는 광저우, 영파 등 몇 개의 항구를 개항하여 이들 서양인들과 교역에 나서게 되었고 서양의 신(新) 문물이 중국에 유행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은 진작에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와 군사 무기 교역을 통해 조총과 화포를 받아들인 바 있으며 조선을 제외한 동북아시아 국가들이 서양 문물이 전래되어 이미 유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1636년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치욕적으로 패배하면서 동생인 봉림대군과 함께 볼모로 청나라의 심양으로 끌려갔다. 청나라로 간 소현세자는 고관들과 접촉하면서 친분을 쌓으며 인맥을 쌓아나갔고 그를 통해 얻은 고급 정보를 몰래 인조에게 알려줘서 대비하게 하기도 했다. 인질로 있으면서도 세자비 강빈의 권유로 심양 근처에 농장을 만들어 끌려온 조선인들을 노예시장에서 구출해냈고 농장에서 일하게 하는 등의 성과를 보였다. 여기서 얻은 곡물로 장사를 하니 세자의 거처가 마치 시장과도 같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상당한 재물을 얻어 청나라 관료들과의 교류와 심양관 운영에 사용되었다. 1644년(인조 22년) 음력 9월 명나라 정벌을 위해 나선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을 따라 베이징에 70여 일을 머물면서, 독일인 신부 아담 샬 등의 예수회 선교사와 친하게 지냈으며, 그들을 통해 로마 카톨릭과 서양 문물을 접하였다. 당시 세자가 신문물(新文物)을 조선에 전하기를 열망하는 포부에 대해 직접 아담 샬에게 보낸 서신에 나타나 있다. 삼전도에서 치욕을 당한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세자의 태도를 친청(親淸) 행위라고 크게 비난하였고, 1645년 음력 2월에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아버지 인조는 카톨릭과 서양 과학을 들여와 조선을 발전시키고자 한 세자를 감시하고 박대했다. 그리고 서양문물을 정착시키려 한 소현세자를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들이 정치적으로 매우 불편하게 여겼을 것이다. 국왕인 인조조차 소현세자를 멀리했고 부자간의 불화가 절정으로 치닫는 1645년 소현세자는 원인 모를 병으로 갑자기 사망하게 된다. 이를 두고 소현세자 독살설이 재기되기도 했는데 여러 정황 근거들로 볼 때 독살설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으로 생각된다. 소현세자가 죽은 뒤, 인조는 자신의 며느리인 강빈마저도 누명을 씌워 죽이고 소현세자의 소생들을 유배보낸 뒤 죽게했으며 그 가솔들과 후예들의 씨를 말렸다. 인조는 본인이 죽을 때까지 단 한번도 소현세자의 무덤을 찾은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비정한 왕이었던 것이다. 서양문물의 발전을 목도하고 이를 들여와 개혁하려던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조선은 벌써 17세기에 근대화에 성공했을 것이고 일제강점기라는 치욕과 6.25 사변이라는 아픔도 없었을 것이며 일본을 따돌리고 지금쯤 동북아시아 최강국이자 선진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조선은 소현세자가 죽음으로써 일찍 근대화되어 역으로 탈아입구(脫亞入歐) 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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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4
  • 이란의 이스라엘 공격에 대한 경과와 대응
    이란이 사상 처음으로 이스라엘에 대해 직접 공격을 감행했다. 어제 밤 이스라엘에 대한 보복 공격으로 드론과 순항, 탄도미사일 등을 동원한 공습을 전격적으로 개시했다. 친(親) 이란 무장 세력인 헤즈볼라와 후티 반군도 공격에 가세했다. 이러한 공격은 지난 1일 이스라엘이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주재 이란 영사관을 폭격하여 IRGC 고위급 지휘관 등을 제거한 지 12일 만에 일이다. 이슬람 혁명 수비대(IRGC)는시리아 주재 자국 영사관을 공격과 더불어 가자 지구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진실의 약속 작전(Operation True Promise)을 개시했다. 수십 대의 드론과 순항미사일 등을 이용해 이스라엘 영토에 있는 특정 목표물을 타격할 것이라 공공연히 언급했다. 1979년 혁명으로 이란에 이슬람 공화국이 들어선 이후, 이스라엘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은 처음 있는 일이다. 헤즈볼라는 이스라엘 북부 골란고원에 로켓을 발사하고, 예멘의 후티 반군은 이스라엘 항구를 향해 여러 대의 드론을 날려 이란을 지원했다. 이스라엘은 미국, 영국, 요르단 등과 함께 날아오는 드론을 요격했고, 이에 따라 이스라엘 전역에서 대피 경보와 폭발음이 들렸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이란은 13일 밤부터 14일 새벽까지 약 6시간에 걸쳐 공격을 진행했다. 이스라엘군은 13일 오후 11시께 이란의 공격을 인지했고, 미사일과 드론이 수 시간에 걸쳐 날아와 이스라엘 영토에는 14일 오전 2시께 도착했다. 이후 이스라엘군은 이날 오전 5시에 이란의 공습이 끝난 것으로 보고 대피 명령을 해제했다. 오늘 새벽 터키에서 속보로 나온 이란의 이스라엘 공격을 종합해 보자면 Son verilere göre İran, İsrail’e 185 İHA, 110 karadan karaya füze ve 36 seyir füzesi gönderdi. (최신 자료에 따르면 이란은 이스라엘에 드론 185기, 지대지 미사일 110기, 순항미사일 36기를 보냈다.)고 한다. 즉, 총 얼마의 공격용 무기들이 출격했는지 알 수 있다. 다만 샤헤드 드론 같은 경우, 이스라엘의 아이언돔에 의해 방어가 성공했을 것으로 보인다. 상당수의 드론이 이스라엘에 당도하기 전에 미국과 영국에게 잡혔고 이스라엘에 도착한 드론들 또한 아이언돔의 수비망에 걸려 요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기사들도 이미 터키에 나왔다. IDF 다니엘 하기라 소장은 자신의 트위터에 "방공 전투기는 방어 시스템을 통해 전략적 파트너 국가와 함께 심장부로 건너기 전에 대부분의 발사를 성공적으로 요격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1,800㎞ 거리에서 발사된 이란의 드론이 어느 지역, 어디까지 도달하여 공격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전해왔다. 이란은 이스라엘 남부 네게브 사막의 공군기지가 타격했다. 메흐르 통신에 의하면 7발의 미사일이 네게브의 라몬 공군기지를 타격했다고 전했다. 2024년 4월 14일 오전 11시, 이란의 공습이 일단락되자 이스라엘은 대피령을 해제하였다. 이스라엘은 발사체 중 99%를 격추시켰다고 했지만 대부분이 드론이었고 이란의 탄도미사일들은 이스라엘 방공시스템들을 뚫고 피해를 입혔다. 이스라엘의 발표에 의하면 미사일 소수가 이스라엘을 타격해 소녀 1명이 다치고 이스라엘 남부에 있는 군기지에 가벼운 손상을 입혔다고 했지만 핵심 공격의 목표는 민간인 시설이 아닌 군 시설이다. 현재까지 이스라엘의 군 시설이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 정확한 보도가 올라오고 있지 않다. 이스라엘, 레바논, 이라크가 영공을 폐쇄하는 동안 시리아와 요르단은 방공 시스템에 경보를 발령했고 이들 중동 국가들 대부분은 자국 상공을 가로질러 이스라엘 향해 가는 공격 무기들을 모른척 했다. 이게 앞으로 이스라엘과 이란의 사이에서 어떤 작용으로 발생할지 변수로 남아 있다. 한편 집단 서방은 이란에 대한 비난에 나섰다. 리시 수낙 영국 총리는 이란의 공격을 “무모하다(Pervasız)”고 비난했으며 이스라엘과 이 지역 파트너들의 안보에 기여할 것이라 언급했다. 다만 이스라엘이 이란에 대한 보복에 참여할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집단 서방은 이란을 비난했지만 확전에 대해 매우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집단 서방은 4월 1일에 발생한 다마스쿠스 이란 대사관 폭격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을 아무도 비난하지 않았다. 이는 명백한 유엔 헌장 위반에다 주권 국가에 대한 침공이나 다름 없는 국제법으로도 위법 행위다. 당시 이스라엘의 이란 영사관 폭격을 규탄한 국가는 가장 낮은 수준의 대응 조치인 '언론 성명(Press Statement)'을 통해서라도 공식 비난했던 러시아였다. 이란은 이스라엘에 최대 규모의 "보복"을 공언했다. 이란이 이스라엘에 보복하겠다 공언한 이후, 이스라엘 주제 외국 대사관, 주재원들에게 대피령이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큰 공격이 있을 것임은 이스라엘 측이 모를리는 없다. 대놓고 보복을 공언하면서 거의 2주 동안을 타국 대사관과 주재원들의 철수, 이스라엘이 방어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준 셈이다. 만약에 이란이 대놓고 공언하지 않거나 지난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처럼 기습적으로 감행했을 때는 아이언돔도 쓸모 없었을 확률이 높다. 즉, 이란은 자국이 쏜 공격 물체 상당수가 이미 요격당할 것을 인지한 상태에서 최소한의 보복을 노렸을 것이다. 이란으로서는 최소한의 체면을 세우면서도 더 이상의 확전을 자제한 것이다. 만약 이스라엘이 반격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일단락될 가능성이 크지만 결국 이스라엘은 강력한 보복이 뒤따를 것이라며 이란에 보복할 것임을 시사했다. 바이든은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게 이란에 대한 직접 공격은 하지 말 것을 경고하며 확전 저지 의지를 피력했다. 터키에서도 CNN’in haberine göre Biden, Netenyahu’ya İran’a karşı yapılacak bir misilleme saldırısında ABD’nin İsrail’i desteklemeyeceğini söyledi. (CNN에 따르면 바이든은 네타냐후에게 미국은 이란에 대한 보복 공격에서 이스라엘을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즉, 이대로 종결짓자는 얘기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그대로 종결할 수 있을까? 이스라엘의 대응에 따라 확전과 3차 세계대전의 시나리오가 쓰여질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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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4
  • 민주주의를 향한 예인선
    개인은 어리석을 수가 있지만, 국민은 현명했다. 22대 총선에 대한 개인적인 소감이다. 국민의 선택은 끝났다. 공은 정치권으로 넘어갔다. 이제는 정치권이 국민의 선택을 어떻게 현실 정치에 접목시키느냐만 남아있다. 정치가 국민을 실망시키지 않기를 희망한다. 지난 21대 총선에서도 국민은 지금의 야당에 많은 표를 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 당시에 야당을 이끈 사람이 누구였는지 기억하기도 싫다. 그들은 민생을 챙기기보다는 그들끼리의 이권 챙기기에만 몰두한 느낌이 들었다. 이후에 벌어진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은 또 다른 선택을 했다. 불과 0.6%의 차이이지만 새로운 정권이 탄생했다. 지난 대선을 돌이켜보면 2.6%를 획득한 심상정 후보는 현 정부의 흑기사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번 총선에서 그를 정치권에서 사라지게 만든 것을 봐도 국민은 현명했다. 나는 지난 대선 때 윤석열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분명히 새로운 독재 정권이 탄생하리라 예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집권한 지 2년이 지난 현 정부는 검찰 독재와 민주주의 파괴를 일삼고 있다. 그들에게 사법부의 한 축인 검찰은 정권의 애완견에 불과했다. 사법부가 대통령의 애완견으로 전락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견제와 감시라는 민주주의의 축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자기 식구는 감싸고, 정치적인 적은 퇴장시키게 만드는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꿈꾸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매수당한 심판이 경기를 운영하는 축구 경기를 보는 것과 다름이 없다. 매수당한 심판은 주력 선수를 퇴장까지 시킨다. 심판을 매수 한 편을 응원하는 축구팬들에게 심판의 매수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들은 그러한 심판에게 열열한 환호의 박수를 보낸다. 그렇게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이 민주주의의 핵심이기는 하지만, 세계 곳곳에서 삼권분립의 상호 견제와 균형의 축이 무너지고 있다. 미국의 정치 현실도 견제와 균형은 사라지고 극심한 양극화의 벽만 높아지고 있다. 우리의 정치 현실도 양극화를 벗어났다고 평가하기 어려우나, 그래도 미국 국민들 보다는 현명했던 것 같다. 조국혁신당에 대한 전국적인 지지도 때문이다. 조국혁신당은 신생 정당임에도 불구하고 불과 2개월 만에 전국적으로 24%의 지지를 얻었다. 대구, 경북 지역에서도 15% 전후의 지지율을 얻었다. 조국혁신당과 민주당 지지율을 합치면 대구, 경북 지역에서 야권은 30% 전후의 표를 얻었다. 이에 비해 광주, 전남지역에서의 국힘당은 10% 전후의 표를 얻었을 것이다. 한국의 정치 지형이 좌우로 나누어져 있는 것은 분명한 현실이지만, 조국혁신당의 활약에 따라 양당의 구조에 변화가 있기를 기대한다. 물론 일부 여당의 지지자들은 조국에게 죄인의 프레임을 가져다 씌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죄를 결정하는 것은 사법부의 몫이지만, 사법부가 정치적으로 펀파적인 판결을 내릴 경우는 그 자체가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파손한다. 우리 사법부가 현 정권에 매수당했는지 여부는 판단할 수 없지만, 그들의 판결을 쉽게 수긍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은 것도 현실이다. 사법부의 독립성은 또 다른 문제이다. 여기서는 이번 선거에서 중도의 표심이 국민의 현명한 판단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언급하고자 한다. 국힘당과 민주당 양당에 모두 희망을 잃어버린 많은 국민이 조국혁신당을 선택했다고 보인다. 중도 보수와 중도 진보의 결집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들의 표심이 전체적으로는 국민의 현명한 선택을 결정했다. 그들은 현 정부의 검찰 독재도 싫었지만, 그렇다고 입법부의 폭력도 원하지 않았다. 정치에서의 양극화는 민주주의의 붕괴를 초래한다. 민주주의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는 타협과 견제, 상호 인정과 권력 남용을 억제하는 길밖에 없다. 이를 위해서는 건전한 중도의 가치가 필요하다. 중도의 가치는 회색으로 비난받아야 할 가치가 아니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건전한 보수와 건전한 진보 그 전체가 중도일 것이다. 그들은 서로 소통할 수 있기에 상호 인정을 전제로 한다. 우리의 역사에서는 건전한 보수와 건전한 진보의 가치가 한 번도 진지하게 논의된 적이 없었다. 해방 이후 민주주의가 실시되었지만, 이승만 집권 시기에는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적 대립이 앞섰다면, 그 이후 박정희 집권 시기에는 독재와 민주화의 대립으로 점철되었다. 이러한 현대의 역사 속에서 중도의 가치는 설 자리가 없었다. 중도의 가치는 보수의 아버지라 불리는 버크에서 찾아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버크는 평등을 앞세운 교조주의적인 급진적 개혁을 반대했다. 프랑스 혁명에서 보여준 자코뱅당에 대한 거부였다. 버크의 관심사는 자유와 정의였다. 버크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이어져 온 전통적인 자유를 존중했다. 그는 자유주의자였으며, 한편으로는 귀족정치가 자연스럽다고 보았다. 버크가 말하는 귀족은 다음과 같다. “만약 귀족정치가 마지막 극단에 이르러 혈통의 경쟁이 된다면, 신이여! 귀족정치를 금하시라. 내게 할 일이 있다면 나는 나의 운명을 가난한 자, 지위가 낮은 자, 미약한 사람들과 함께하겠다.” 버크가 말하는 귀족은 공동체 의식에 대한 사명감이 높은 사람이었다. 신의 섭리가 구현된 역사적 지혜를 존중했기에 버크의 보수주의는 자유주의이면서 동시에 귀족정치를 지향했던 것이다. 하지만 버크도 그 당시의 귀족과 달리 개인의 욕심만은 앞세우는 오늘날의 기득권을 보았으면, 자신의 주장을 번복하였을 것이다. 러셀 커크가 쓴 <보수의 정신>에서 “보수적인 인간은 무질서와 어둠보다는 영원히 지속되는 그 무엇들을 더 기쁘게 생각하는 그런 소박한 사람들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의 보수는 중도의 다른 말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그 책에서 언급된 보수주의의 10대 원칙 중 마지막 세 가지 원칙을 짧게 언급하고자 한다. “보수주의자는 자발적인 공동체를 지지하고 강제적인 집산주의에는 반대한다.” 국민이 중심인 사회를 지향하고, 민주주의의 재앙인 독재를 반대한다는 말이다. “보수주의자는 인간의 격정과 권력을 신중하게 자제해야 할 필요를 인지한다.” 이 말은 정부의 권위와 개인의 자유 사이의 건강한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보수주의자는 영속성과 변화를 반드시 인정하고 조화시켜야 한다.” 보수주의자 역시 변화를 인정하지만, 합리적이고 온건한 변화를 희망한다는 것이다. 보수의 정신과 중도의 정신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조국혁신당이 중도의 깃발을 앞세운 민주주의를 향한 예인선이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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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4
  • 서아프리카 토고의 총선과 냐싱베 가문의 이야기, 냐싱베 에야데마(Gnassingbé Eyadéma, 1967~2005)의 독재화, 토고의 민주화 실패 (中편)
    에티엔에서 냐싱베로 개명한 이후, 그는 국민들에게 아프리카식으로 이름을 개명할 것을 권유했으며 냐싱베 자신에 대한 비판을 전혀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토고를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들도 식당에서 냐싱베의 이름을 말하지 말라는 주의를 받을 정도로 냐싱베와 정부에 대한 비판을 강하게 통제했다. 그러나 냐싱베는 1974년 1월 24일에 발생한 비행기 사고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는 사고 2주 전, 중요한 인산염 광산 회사를 국유화 하였기 때문에 프랑스 측이 광석을 착취하지 못하게 된 것을 마음에 안 들어했던 프랑스 정부가 꾸민 음모이자 그로 인한 사고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사고로부터 거의 5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 추락사고의 명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물론 그의 측근들이 사고를 조사하여 사고의 원인이 기체 결함이라 발표하자 냐싱베는 기체 결함이 분명히 프랑스 정보부가 자신을 제거하기 위한 사보타주일 것이라 주장했다. 프랑스 정부는 이에 반발했다. 물론 정황이야 그렇다쳐도 프랑스 정보부가 기체 결함에 관여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 사고 이후 토고 대통령의 전용기는 걸프스트림 II로 교체되었으나, 이 기체도 불과 1년을 넘기지 못하고 12월 26일에 충돌 사고가 발생해 승무원 3명이 사망했다. 참고로 사고 기종에 탑승한 승객 3명은 전원 생존했으며, 이들 중 냐싱베는 이 전용기에 타고 있지 않아 목숨을 건졌다. 이후에 프랑스 언론 측이 밝힌 바에 따르면 1월 24일 사고로 생존한 사람은 냐싱베 1명만이 아니었는데, 냐싱베의 친구이자 사고기의 동승자였던 프랑수아 루(François Roux) 목사는 2013년까지 생존해 있었다고 한다. 이는, 냐싱베가 자신을 신격화하기 위해 사고기 탑승자 수까지 6명에서 5명으로 축소해가며 사고 정보를 일부러 잘못 전달한 측면이 강하다. 한편 사고 이전 국유화 한 인산염 광산 회사는 수익성이 좋아 매우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어 국가 개발을 위한 세입을 증가시켰고, 주변국과 비교하면 정치 상황도 그나마 안정적이었기때문에 1970년대에 토고는 1960년에 73달러였던 GDP가 1970년에 116달러로 급속히 상승하면서 언젠가는 '서아프리카의 스위스'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냐싱베 정부의 잘못된 관리와 막대한 부정부패로 인해 토고의 경제 사정은 더욱 피폐해지게 된다. 이는 1980년에 1인당 GDP 400달러로 정점을 맞이했지만 1984년에 토고의 1인당 GDP는 4년 만에 222달러로 급속히 추락했고, 이후에도 토고의 경제는 성장과 폭락을 거듭하며 그가 사망한 2005년 시점에는 1인당 GDP가 399달러를 기록하게 된다. 물론 화폐 가치 변동을 고려하면 실질 경제 수준은 오히려 독립했을 당시에 별반 다를 것이 없게 된 셈이다. 그리거 1980년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독재에 대해 개를 죽이려는 사람은 먼저 개가 분노했다고 비난한다며 토고는 번영하고 생존할 수 있으며 토고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토고 정부를 부러워한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자신 비판하는 사람들은 올림피오의 자식들이라며 비난했고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미 토고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냐싱베는 토고 인구의 80%를 차지하고 있던 소작농들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소수의 교육받은 엘리트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즉, 대다수의 국민들의 당시 토고의 문맹률이 87%에 달하는 상황이었기에 정부가 하는 일에 대다수가 관심이 없었던데다 그나마 프랑스에 유학을 다녀온 나머지 엘리트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긴 했지만 냐싱베 정권에 저항할 토대는 그때까지만 해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냐싱베의 주장에 의하면 외부에서 보는 것 같이 억압적인 정권을 이끌고 있었다면 왜 냐싱베의 지지를 반대하는 자들은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국민들에게 가지 않고 용병들에게러 가는지 되물으며 폭압적인 독재정권이 아니라고 전면 부인한 바가 있었다. 실제로 냐싱베는 1977년에 토고의 망명자들이 용병을 동원하여 자신을 전복시키려 한다는 것을 영국 MI6로부터 정보를 접수한 미국 대사로부터 전해들어서 알고 있는 상황에서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 말미에 저와 같은 인터뷰를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이와 같은 정부 전복 계획은 실행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지막지한 독재는 그에 대한 전격적인 우상화로 이어졌다. 냐싱베는 자이르의 모부투 세세 세코(Mobutu Sese Seko)를 모델로 하여 자신을 우상화 했는데 모부투 세세 세코(Mobutu Sese Seko)는 북한의 김일성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기에 그의 우상화를 모델로 하여 자신을 신(神)으로 만들었다. 냐싱베도 이러한 모부투 세코의 영향을 받아 자신에 대한 우상화를 강화했다. 대표적인 것이 대부분의 상점에 자신의 초상화를 장식하게 하고는 15초마다 자신의 이름이 사라졌다가 다시 빛나는 손목시계를 만들어 판매한 부분이다. 또한 토고의 라디오 방송국은 냐싱베가 토고를 통치하도록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다는 식의 노래를 방송 시작과 후마다 송출해야 했고, 그가 순행할 때에는 무려 1,000여 명의 무희들이 그를 수행하며 노래와 춤을 제공하고 수도 로메에는 냐싱배의 거대 동상까지 세워졌다. 여기에 매일 수도 로메의 시민들은 하루에 냐싱베가 대통령궁과 관저를 4차례 왕래하는 동안, 길 위에서 박수를 쳐서 그를 환영해야 했고, 박수를 치지 않거나 박수를 빨리 멈추게 되면 경찰에 체포되거나 심할 경우, 고문을 당해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냐싱베는 여러 차례 자신을 향한 암살 시도에서 살아 남아 '불멸의 인간' 이미지를 만들어 선동하는데 적극 활용했으며 자신의 경호원이 자신을 암살하려던 시도가 실패하자 자신을 수술한 외과의사가 제거한 총알을 부적으로 가지고 다니기까지 했다. 냐싱베가 암살 시도에서 살아 남은 날들은 모두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의 향연'이라 묘사되어 그 날은 토고의 국경일이 되었을 정도이다. 이러한 전횡에 참을 수 없었던 프랑스 유학생과 엘리트 지식인들, 깨어 있는 로메 시민들을 중심으로 1990년 10월부터 시민혁명이 시작된다. 1990년 10월 10일, 토고의 수도 로메에서 토고 역사상 최대의 반정부 시위가 열리게 된다. 이 때 냐싱베는 시위의 조건을 받아들여 정치적 다원주의를 원칙으로 한 새로운 헌법 초안을 만드는 것에 승인했고, 그에 따라 1990년 12월 13일에는 토고 내 최초의 야당인 토고민주동맹(ADT)이 창립되었다. 사실 이전에도 토고에는 야당이 존재하긴 했다. 민주주의를 위한 토고 운동(MTD)과 아프리카 민족 민주 협약(CDPA)이 있었지만 사실 있으나 마나한 야당이나 다름 없었다. 냐싱베는 시간을 질질 끌면서 통합 야당에 대한 승인에 사인하지 않았으며 1991년 1월에는 정치적 망명자들을 사면하는 꼼수까지 부리면서 야당 승인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을 돌리고자 했다. 그러나 3월 1일~4월 30일 동안 시민들은 냐싱베의 꼼수를 파악하고 로메에서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파업과 폭력 시위가 지속적 발생하게 된다. 이에 냐싱베는 군대를 동원해 시위대들을 곤봉으로 구타하거나 최루탄 투척, 실탄 발포 등을 통해 여러 명을 살해하면서 혁명을 저지시키고자 했다. 결국 이를 보다 못한 프랑스와 집단 서방은 냐싱베에게 민주주의를 요구했고 4월 10일에 프랑수아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 프랑스 대통령의 압력으로 인해 결국 냐싱베는 다당제를 승인하게 된다. 같은 해, 5월에 시민들은 냐싱베의 사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냐싱베는 1967년부터 역임한 국방부 장관 직에서 사임하게 된다. 냐싱베는 같은 해, 6월 12일에 국민회의 개최를 인정했으며 7월 8일에 시작된 국민회의는 1991년 8월 27일에 조셉 코쿠 코피고(Joseph Kokou Koffigoh, 1948~ ?)를 총리로 추대하고 냐싱베는 형식적인 대통령으로 격하되었다. 당시 냐싱베는 코피고를 총리로 추대할 때 국민회의를 군대로 포위하여 즉각 반발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코피고의 총리 추대를 인정했다. 그러나 국민회의는 얼마 안 가지 않은 상태에서 내부적으로 분열하고 코피고가 야권의 단결 대신 공기업 사장직에 자신의 지지자 외의 친구들을 임명하여 자신의 권력만 추구하였기 때문에 정계는 극도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같은 해, 11월 26일에 코피고가 이끄는 과도 정부인 공화국 고등평의회(HCR)가 토고인민연합당(RPT)의 존속을 금지하자 이에 반발한 군인들은 이틀 뒤에 코피고의 퇴진과 냐싱베가 임명하는 새 총리 임명, HCR 해산과 모든 결정 무효화, RPT 합법화를 요구했다. 냐싱베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던 군부는 코피고에게 도시를 초토화 시키겠다고 위협했고, 군부 쿠데타를 우려하여 이에 굴복한 코피고는 나싱베의 지지자들을 정부에 포함시키겠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냐싱베는 자신의 군대 및 군부보다 많은 로메 시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에 군대를 파견할 것을 요구했고, 이에 프랑스는 하루 뒤인 11월 29일에 토고에 거주하던 3,000명의 프랑스인을 보호하기 위해 300명의 프랑스 군을 이웃 국가인 베냉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12월 3일, 군 부에서 먼저 움직여 의회 관저를 탱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군인들로 포위한 후 최소 17명, 최대 200명을 살해했다. 이러한 살육과정에서 대통령 경호 사령관이자 냐싱베의 이복 형이 절명했다. 이 군부 쿠데타의 배후는 냐싱베가 있었고, 냐싱베는 이를 통해 코피고의 이전 정부를 대체할 새로운 과도 정부를 구성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한다. 그리고 12월 31일에 개각을 발표하며 다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이렇게 토고의 민주화는 짧게 막을 내렸다. - 내일 下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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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4
  • 터키-이라크의 화해 및 합작으로 이라크 영내의 PKK 집단을 일소할 것인가?
    올해 1월, 야사르 귈레르 국방장관이 직접 지휘한 터키군이 드론을 띄워 아무다, 카미실리, 카하타니야 등 3곳의 대형 변전소들을 공습했고 45명의 손실을 입게 했다. 그리고 그에 맞춰 이라크의 푸아드 후세인 외무장관은 하칸 피단 터키 외무장관과 면담한 뒤 공동 성명을 통해 "PKK는 양국에 안보 위협이며 PKK의 존재는 이라크 헌법 위반"이라는 입장을 내면서 적대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표시했다. 한편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2024년 여름 내로 PKK의 이라크 내 주둔 상황을 끝내겠다고 발표하여 대규모 군사작전을 벌이겠다고 했다. 현재 터키와 이라크가 화해를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인다. 터키는 이라크와 PKK를 격멸하기 위해 공동 작전 센터를 설립하기로 합의에 도달했다. 어제 터키 국방부와 기자회견에서 PKK 조직과 싸우기 위해 바그다드와 '공동작전센터' 설립을 제안했고, 이라크는 회의에서 이 제안에 '긍정적으로' 반응했다고 밝혔다. 이 협정은 하칸 피단(Hakan Fidan) 외무부 장관, 야샤르 귈레르(Yaşar Güler) 국방부 장관, 국가정보기구(MİT) 이브라힘 칼린(Ibrahim Kalın) 국장 등 터키의 고위 관리들로 구성된 대표단이 서명했다. 이들은 대테러 · 안보 · 군사분야 투쟁을 주제로 바그다드를 방문한 뒤 화합을 논의하기 위해 서명했다. 회의에서는 라마단 이후로 예정된 에르도안 대통령의 바그다드 방문 준비 방안도 논의됐다. 물론 아직 공동작전센터 설치와 운영 방식 등 세부적인 사항은 정해지지 않았고 이를 위해 양측 간 치열한 협상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터키는 PKK 조직에 맞서 이라크 영토 내에서 더 크고 포괄적인 군사 작전을 조직할 계획에 있다. 이와 같은 이라크 영내 작전을 합법화하기 위해 그들은 공동 국경을 보호하기 위해 체결된 이라크와 이란이 체결한 협정과 유사한 보안 협정 초안을 준비하고 있다. 한편 이라크와 이란은 국경의 보안 조치를 강화하고 보호하기 위해 1년 전인 2023년 3월 19일에 보안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의 목표는 국경에서 이란에 대해 반란을 기도하는 쿠르드 극단주의 세력을 제거하고, 절대적인 안정을 보장하며 이라크 쿠르드족 자치정부(KRG) 주민들이 이란의 미사일 공격을 받는 것을 방지하는 협정이다.아마도 이라크와 터키 간의 공통적인 경제 관계와 양국의 이익, 특히 바그다드가 터키 영토를 통해 유럽에 설립할 계획인 바스라 항구를 연결하는 개발 통로로 인해 양측이 안보를 강화하기 위한 협력을 더욱 강화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더불어 이라크의 물 부족 현상이 심각한데 물에 대한 분배 보장 요구까지 더해 안보와 경제 문제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협정도 체결될 수 있다. 이에 터키 전략 연구 센터의 무타즈 무히 압둘하미드(Mutaz Muhyi Abdulhamid) 전무이사가 논평하기를 바그다드가 경제 프로젝트를 실행하기 위해 이라크 영토 내에서 의 존재를 중단하길 원했다. 이는 안보, 경제 문제 및 PKK에게 물이 공유되는 것을 규제하는 협정이 곧 서명될 것임을 의미한다. 압둘 하미드 이사는 특히 PKK를 '테러 조직'으로 분류하고 있어 이 문제에 대한 이라크의 심각성을 강조했다. 이는 이라크 영토 내에서 PKK의 존재를 종식시키고 싶어하는 것이다. 압둘 하미드 이사는 PKK를 추적하는 과정에 있어 술라이마니 지역으로 확산된 PKK를 추적하기 위해 조직화된 정보 연구의 형태로 수행된다고 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이라크가 터키와 화해한 이유는 이라크와 PKK는 자유 시리아 군(SDF)과 함께 시리아에 있는데, PKK와 협력하는 것이 메우 위험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라 한다. 압둘 하미드 이사는 PKK가 산과 계곡, 동굴이 아닌 도시에 침투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은 다에쉬와 같은 테러 세력들에 의해 이용될 수 있는 위험이 제기되고 있다고 하였다. 터키와 이라크가 안보, 정보, 경제, 물 공유 등의 사안에 대해 협정을 체결할 것으로 보고 있는 압둘 하미드 이사는 터키와 이라크의 관계가 이라크에 있어 경제 분야 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이익이 된다고 강조했다. 압둘 하미드는 도로 개발 프로젝트에 있어서도 이라크는 터키의 지원이 필요하며 터키는 이 프로젝트 참여에 관심이 있다고 언급하면서 도로 개발이 진행될 북부 지역의 안보 문제로 인해 프로젝트 시행에 몇 가지 걸림돌이 있다고 했다. 압둘 하미드는 거대 기업들이 도로 건설에 참여할 것이며 터키와 이라크는 이들 기업과 터키의 노동자들이 피케이케이로부터 보호받기를 희망한다고 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독립언론인 샤라크 알 아와사트(Sharq al-Awsat)가 보도한 뉴스에 의하면 압둘 하미드는 고위 관리들을 포함한 터키 대표단의 방문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해 논의했고 피케이케이에 대한 제거 의지를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라크 측 일부 관계자들은 PKK 제거 합동작전센터의 설립으로 인해 터키가 이라크와 체결한 안보 협정을 이유로 향후 이라크 영내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법적인 정당화로 이 센터를 이용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표명했다. 알 무스탄시리야 대학의 정치학 교수인 이삼 알 페일리(Isam al-Feyli)는 합동작전센터의 설립으로 인해 터키군이 이라크 영토에서 더 많은 군사 기지를 건설하고 군사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제공할 것이라 보면서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페일리 교수는 이 문제에 대해 "합동작전센터의 설립은 터키가 약 32년 동안 이라크 영토에 주둔한 것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특히 터키는 이라크 영토에 1992년부터 공식적으로 군사 기지를 설립했으며 현재에도 이라크 영토 기지에 83명의 군 병력이 있는 것이 문제" 라고 했다. 페일리 교수는 터키가 이라크 주둔의 합법성을 확립하기를 원했다면서 무함마드 시아 알 수다니(Mohammed Shia' Al Sudani) 정부가 터키의 이라크 영토 주둔과 수행하는 군사 작전에 대해 시간 제한을 설정해야 한다고 했다. 더불어 페일리 교수는 “이번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바그다드에 작전 사실을 통보한다는 조항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고 말했다. 페일리 교수는 터키가 겪고 있는 문제 중 하나가 이라크 영토 내 군대 주둔이 합법적이지 않다는 점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합동작전센터로 인해 터키는 이라크가 유엔에서 자국의 주권을 침해했다며 비난하는 것을 막고 싶어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회담 의제는 터키 및 이라크 문제에 관련된 전문팀이 구성되어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터키 측이 협상 잠재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터키 협상 팀에는 하칸 피단 외무장관이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그리고 터키의 정보국인 MİT 회장인 이브라힘 칼린(Ibrahim Kalın)이 참석할 예정이기 때문에 이라크 정부도 이 문제에 대해 천천히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페일리 교수는 1984년 터키와 이라크 사이에 국경 안보 및 협력 협정이 체결되어 두 국가 간의 관계가 형성되었음을 상기시키면서 협정의 틀 내에서 터키가 조직한 작전 기간이 일주일을 초과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작전을 벌이는 지역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이라크의 영토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라크 정부에게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수자원 몫을 보장하고 발언권을 갖는 공동 협정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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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4-14
  • Rising Ocean Temperatures: A Global Concern for Climate Stability
    In the wake of unprecedentedly high temperatures recorded in March, scientists are issuing dire warnings regarding the significant warming of the world's oceans, expressing grave concerns over its potentially catastrophic implications for global climate dynamics. The latest data from the European Observatory Copernicus reveals that ocean temperatures surged to an all-time high in March, averaging 21.07 degrees Celsius at sea level, excluding polar regions. Over the past year, this relentless escalation in oceanic warmth poses imminent threats to marine ecosystems. It exacerbates atmospheric moisture levels, leading to heightened volatility in weather patterns characterized by intense winds and torrential rainfall. Vidar Helgesen, executive secretary of UNESCO's Intergovernmental Oceanographic Commission, acknowledges the alarming pace of these changes and emphasizes the urgent imperative to address oceanic warming. Speaking at the Ocean Decade Conference in Barcelona, attended by 1,500 scientists and representatives from various states and organizations, Helgesen underscores the pressing need for enhanced real-time monitoring and research efforts. Experts highlight the pivotal role of oceans in mitigating the impacts of human-induced climate change, having absorbed approximately 90% of the excess heat generated since the onset of the industrial era. Yet, there are growing concerns regarding the ocean's capacity to sustain this absorption indefinitely, as Cristina Gonthaleth Arro, a researcher at the Institute of Marine Sciences in Barcelona, warns. A recent report indicates that oceans absorbed a staggering amount of heat in 2023, equivalent to the energy required to boil water in "billions of Olympic-sized swimming pools." As the Ocean Decade (2021-2030) unfolds, a primary objective is to deepen our understanding of ocean warming and its intricate ramifications to mitigate its effects. However, significant gaps persist in our comprehension of oceanic processes, with only a quarter of the world's seabed mapped. Holgesen stresses the need to expand mapping efforts and directly monitor climate-induced changes. The World Meteorological Organization reports that over 90% of the world's oceans experienced heatwaves in 2023, impacting climate and ecosystems across diverse geographical regions. Jean-Pierre Gattuso, an expert at the French National Centre for Scientific Research (CNRS), warns that current trajectories of ocean warming pose profound questions for scientists, raising doubts about the extent to which we may have underestimated the impending challenges of global warming.
    • 칼럼
    • Thoughts Of Seraphine
    2024-04-13
  • Tragic Knife Attack Unfolds in Sydney Shopping Center: Seven Dead, Eight Injured
    The knife attack at a Sydney shopping center has tragically resulted in seven fatalities and eight individuals sustaining injuries. Among those injured are a baby and others in critical condition, necessitating their immediate hospitalization. Initially reported as four casualties, the death toll has regrettably risen to seven, with the assailant also deceased. Authorities, in a statement, disclosed that the perpetrator was fatally shot by law enforcement, and while investigations are ongoing, the possibility of a terrorist motive remains under scrutiny. The assailant's actions unfolded within the confines of the Bondi Junction Westfield shopping center, where he initially entered around 3:10 p.m. local time, departed briefly, then returned ten minutes later to commence the stabbing spree. Law enforcement officials have assured the public that the assailant acted alone, alleviating concerns of further immediate threats to safety. Nevertheless, caution is advised, and individuals are urged to steer clear of the area as law enforcement operations continue. Prime Minister Anthony Albanese conveyed the nation's collective sympathies, emphasizing solidarity with those impacted and their families. Videos circulating online depict scenes of chaos as terrified individuals flee the mall, with a swarm of police and emergency vehicles converging on the scene. Reports from witnesses within the mall describe harrowing moments of lockdown, echoing the sound of gunfire and witnessing injured individuals lying on the ground.
    • 칼럼
    • Thoughts Of Seraphine
    2024-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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