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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2022년 10월 31일, 시진핑(習近平)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베이징에서 응우옌 푸 쫑(Nguyen Phu Trong)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에게 중화인민공화국 우호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사진출처 : 신화통신

 

중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중국과 한국의 관계와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유럽의 나라들이 다른 나라들과 동맹 및 연합의 방식을 통하여 생존을 도모했고 결혼 외교로 동군연합을 이루어 자신들의 체제를 공고히 했다. 그러나 그에 비해 동아시아 국가들은 중국과의 관계를 통해 생존의 길을 찾는 도리 밖에 없었다. 

 

그만큼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힘은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베트남과 한국과 같이 중국과의 국경을 마주하면서 서로 간의 이해관계가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경우에는 중국과의 관계가 더욱 중요했다. 동아시아에서 최강대국인 중국과 베트남, 그리고 한국 사이에서는 노골적인 갑을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공을 통해 동아시아만의 특수한 외교적 관계가 수립되었다. 이는 현대 국제 정치에서 언급하고 있는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 정책이 유럽에서 작동하고 있었다면, 동아시아에서는 대국인 중국에게 편승’(Bandwagon) 하는 정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한국과 베트남이 중국과 완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조공 관계를 유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전근대 시대 한국은 1,0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통일된 왕조를 유지했다. 하지만 베트남은 939년 중국에게서 독립한 이래, 분열과 통일을 거듭해왔다. 그러는 와중에도 중국으로부터의 외침 역시 적지 않았다. 
 
한국사에서 후삼국 시대와 고려 시대 초기를 맞이하던 때 베트남은 독립왕조를 수립했고 1010년에 이공온에 의해 이 왕조가 건국되어 북베트남을 통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과의 관계가 평화적으로 유지되지 않아 몇 차례에 걸쳐 중국과 큰 분쟁을 겪어야 했다. 그래서 베트남과 중국의 관계는 한편으로는 조공 관계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베트남 사람들이 ‘북거’(北拒: 북을 막는다) 관계라며 명칭을 부르기도 했다. 
 
그러면서 뒤에는 중국 정부의 암묵적인 용인 속에서 베트남의 통일 왕조들은 황제(皇帝)를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베트남은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 사대와 자주라는 양면성을 갖고 있는 외교력과 정치력, 군사력을 갖고 있으면서 인도차이나 지역 내에서는 최강국이었다. 


물론 이는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중국의 또 다른 주변국인 캄보디아나 라오스에 비해 베트남은 상대적으로 우월한 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차단해야 했고 이들에게 늘 조공을 받았다. 따라서 이들에게도 영향력이 쏟아질까 우려하여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항상 조공 체제 안에서 안주하지 않았다. 

 

특히 19세기 초 소수 민족인 만주족 정권이었던 청나라에 대해서는 대등한 관계를 선포했고 떠이선의 농민군이 건륭제 시기의 청나라 군을 격파함으로써 스스로가 중국(中國)임을 내세우기도 했다. 이처럼 표면적으로 볼 때 시간이 지나 공산주의 국가가 된 중공과 베트남의 공산주의자 호치민 사이에는 이념적 동질성을 바탕으로 하는 우호적 관계가 유지되었다. 

 

양국 간의 우호적 관계는 중국의 국공내전 시기(1945~1949)에 돋보였으며 국민당의 공세를 피해 중국 공산당의 남광둥(南廣東)이 이끄는 1연대가 베트남으로 피신하는 등 호치민이 중공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와 같이 중공의 적극적인 도움을 준 것을 통해 호치민의 군대가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 군에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는 사실(1953~1954)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이는 당시 중공이 프랑스군을 이길 수 있도록 베트민에게 무상 지원을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을 보면 베트남이 독립하는데 있어 중공의 도움 덕택에 베트남의 독립 또한 가능했던 것이다.

 

중공으로서는 1953년 한반도에서 정전 협정이 체결되자 군사적 원조를 베트남에 집중시킬 수 있었다. 중공의 주위에 위치한 한반도, 대만 그리고 인도차이나에서 모두 미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던 프랑스의 세력을 봉쇄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더불어 호치민으로서는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공의 호의적 원조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이처럼 양국 사이의 우호적 관계는 1954년의 제네바 협의에서부터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호치민은 중공의 도움을 받아 디엔비엔푸에서의 승리한 것을 바탕으로 베트남을 통일하고 프랑스를 몰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중공의 입장은 달랐다. 


비록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민이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줬지만 국내에서 한국 전쟁으로 인해 미루어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수행을 위하여 베트남에서의 전쟁이 오랜 기간 계속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게다가 중공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또 다른 인도차이나 국가인 라오스에 대한 베트남의 우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호치민은 중국의 입장을 받아들여 17도선을 중심으로 한 베트남의 분단과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독립 인정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였고 중공 또한 호치민이 프랑스를 몰아내고 독립하는 것을 승인해야 했다. 그러자 베트남 사람들의 뿌리 깊은 중화주의에 대한 반발 심리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1950년대 말 남베트남의 게릴라들인 베트콩들이 응오딘지엠 정권에 반대하는 무장 투쟁을 진행하면서 이에 대한 필요성을 역설할 때도 북베트남 정부와 중공 정부 사이의 갈등이 다시 나타나게 된다. 중국은 1950년대 후반까지도 베트남의 통일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다. 

 

토지개혁과 프랑스와의 독립전쟁에 얼룩진 인프라들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중공의 원조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북베트남은 응오딘지엠 정부에 대한 무장투쟁이 필요하다는 남베트남 공산주의자들, 일명 베트콩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1959년에 가서야 북베트남 정부는 남베트남 반 정부 세력의 무력투쟁 방침을 승인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는 중공의 사회주의 노선이 변화한 것도 아주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즉 1950년대 중반까지 중공은 베트남 문제에 대해서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해 왔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 소련과 중공의 동맹이 결렬되고 두 나라 간의 갈등이 본격화되면서 후방에 자신들의 편을 하나라도 만들기 위해 베트남과 라오스에 적극적인 정책으로 노선을 전환했다. 이는 중공 후방에 있던 베트남과 라오스에 소련의 영향력을 차단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1960년 남베트남에서 민족해방전선이 결성되자 중공은 국제적으로 가장 먼저 이를 승인하면서 통일 전쟁을 갑자기 지지하게 된다. 

 

이 또한 호치민이 소련이 아닌 중공에 의지하게 만들려는 다분히 계획적인 승인이었다. 더불어 양국 관계의 전환점이 된 또 다른 사건이 이 시점에서 발생하게 된다. 라오스 문제의 해결을 위해 1961년 5월에 개최된 제네바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중공과 북베트남은 미국 뿐만 아니라 소련과도 대척점에 서서 라오스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당시 소련의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미국과의 유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라오스 문제에 대한 미국 대통령 존 케네디의 입장을 지지했다. 그러나 중공과 북베트남은 라오스의 사회주의 애국전선을 지지하면서 소련의 변화된 정책 기류에 항거했다. 그러나 중공과 베트남은 서로 손을 잡았지만 이미 동상이몽(同床異夢)을 하고 있던 관계였다. 

 

중공은 라오스에 대한 북베트남의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제어하면서 중공의 주도권을 확보하고자 했다. 반면, 북베트남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지원하기 위해 라오스 내의 루트를 확보에 힘썼다. 동시에 북베트남이 주도하는 ‘인도차이나 연방’ 형성의 가능성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중공과 다른 속셈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베트남과 중공 사이에 일시적으로 손을 잡았지만 그 관계성에 있어 아슬아슬했던 관계는 1962년 미국 존 케네디 행정부가 베트남에 대한 대규모 지원 결정으로 수면 아래 잠복했다. 호치민은 1962년 중공을 방문해 대규모 지원을 요청하고, 모택동은 이를 승인했다. 당시 모택동은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 실패로 실권을 거의 내려놓고 상하이로 내려가 있던 시기였다.


하지만 모택동은 주은래를 통해 북베트남과 라오스에 대한 강경 정책은 계속되었다. 특히 소련이 이에 북베트남에 대한 보복 조치로 1963년 북베트남한테 채무 상환을 요구했다. 그리고 1964년 소련의 지원이 급감하며 퇴로가 없어진 북베트남은 중공과 더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후 미국 린든 존슨 행정부에 의한 대규모 파병은 베트남과 중공이 서로 협력하여 미국에 대항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한편 미국이 북베트남 폭격을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던 통킹만 사건이 발생하기 한 달 전인 1964년 7월 주은래는 하노이에서 북베트남 및 라오스 애국전선 지도부와 동시 회담을 했다. 

 

이 회담에서 중공은 동남아시아 인민들의 투쟁을 지원하기 위하여 어떠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하게 피력했다. 한편 중공은 미국이 북진해 올 경우 육군을 파병해서 북베트남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중공의 적극적인 지원 약속을 고려한다면 린든 존슨 행정부가 예상했던 중공이 베트남 전쟁에 공식적으로 개입할 때 대응에 대한 트라우마는 단지 트라우마가 아니라 현실화될 가능성이 매우 컸던 것이다.  

 

실제로 중공의 경우, 미국의 롤백(Rollback) 정책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1965년부터 고사포 부대와 함께 철도 건설, 도로 보수 등을 위해 30만 명이 넘는 병력을 북베트남에 파병했다. 


1967년에는 약 17만 명의 병력이 북베트남에 주둔하면서 치안을 담당했고 혹시나 모를 미군의 북침을 대비했다. 물론 이들은 후방을 지원하는 역할도 감행했고, 북베트남 본토를 지켜주는 역할도 했다. 그에 비해 직접 남베트남 및 미군과 마주하여 전투를 벌이는 전선 현장은 북베트남 군인들이 담당했다. 

 

그래서 지금도 베트남의 역사학자들은 베트남 전쟁 당시 중국의 지원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북베트남 군과 함께 전장에 나서지 않았다는 것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는 학자들도 많다. 그러나 중공이 북베트남의 후방과 본토를 봐주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안정적인 전투 수행이 가능했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더불어 미군 또한 중공을 자극시키지 않게 하는 선에서 북위 17도선 이북으로 올라가려 하지 않았다. 결국 미군은 북베트남 군 본군과 남베트남 일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민족해방전선 게릴라 부대인 베트콩과 싸워야 했던 것이다. 

 

역사에서 만약이란 없지만 미국의 적극적인 전략이 없었다면 중국과 베트남이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가까운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에 있다. 


이는 현재도 마찬가지다. 유럽과 미국이 러시아를 압박해 대러 제재를 하게 되자 중공과 협력하여 이에 대항하게 된 것과 아주 유사한 상황이다. 우크라이나를 통해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고 옐친과 구두로라도 약속했던 나토가 동진을 하지 않았다면 우크라이나에서의 비극은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요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상황과 국제적으로 움직이는 현황들을 보면서 베트남 전쟁과의 유사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요즘들어 베트남 전쟁에 관한 기록들과 과정들, 그 주변 국가들의 상황 및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에 대한 국제적인 이해관계 등을 예로 보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결국 베트남 전쟁과 비슷한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 

 

요즘 바이든이 젤렌스키를 만나러 키예프에 갔다는 이야기가 있고 그것이 페이크 뉴스라는 견해도 있지만 만났던 안 만났던 상관없다. 어차피 전세 뒤집는건 이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가 전세 뒤집을 수 있는 골든타임은 다 지나갔고 전세 뒤집는 것은 이제 세 가지 방법 밖에 없다. 


첫 번째, 나토군이 직접 참전하는 것이고 두 번째, 핵 무장한 나토 국가가 우크라이나에 핵을 빌려주는 것이며 세 번째, 터키 에르도안 탄핵시켜 몰아내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열어 흑해를 통해 오데사항으로 나토 함대들이 진입하는 것이다. 

 

첫 번째의 경우, 어느 누구도 고양이 목에 방울 달려 하지 않을테고 피 묻히기 싫을테니 참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두 번째의 경우, 핵을 빌려주는 순간 러시아가 먼저 쏴버리면 끝이다. 세 번째의 경우가 가장 유력한데 에르도안을 극렬히 흔들어서 터키에 색깔 혁명 일으켜 그를 축출하는 것이고 현 대지진에 대한 대처 능력 등, 여러 모로 에르도안에게 좋지 않은 분위기에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에르도안 그렇게 쉽게 물러날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우크라이나는 골든타임 다 지나가서 미국이 언제 호흡기 떼나 그것만 기다리고 있는 꼴이고 프리퀀드 윈드, 사이공 탈출 작전이 재현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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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국과 베트남의 관계, 베트남 전쟁 이후 동맹과 지원, 갈등의 연속인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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