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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년 의대 정원 증원 논의…정부·여야·의료계 협의체 구성 가능성 제기
    대통령실이 2026년도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안을 고집하지 않으며 협의 과정을 통해 조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이는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가 제안한 '여야 의정 협의체' 구성 제안에 대한 긍정적 반응으로 해석된다. 정부는 의대 정원 증원과 관련된 논의에 열린 자세로 임할 것을 강조하며 의료계와의 대화 재개를 촉구했다. 6일 대통령실은 정부가 발표한 의대 정원 증원이 2,000명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며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여권 고위 관계자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2,000명 증원을 고집한다는 것은 가짜뉴스"라며 "합리적 추계가 있다면 열린 마음으로 논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의료계가 대화에 응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정부와 의료계, 야당이 함께 논의에 참여한다면 환영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이날 긴급 현안 관련 브리핑을 열고, 필수 의료체계 개선을 위한 여야 의정 협의체 구성을 제안했다. 그는 "응급의료체계에 대한 국민의 불안이 큰 상황에서 여야와 의료계가 협력해 의료개혁이 국민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논의할 필요가 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국민과 의료 현장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의대 정원 증원 문제를 포함한 의료 개혁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의료계를 향해 대화에 복귀해 과학적 수요 예측에 기반한 증원 규모를 논의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국회 원내 대책 회의에서 "당과 정부는 여전히 의료계가 논의에 참여하기를 기다리고 있다"라며, 증원 규모에 대한 유연한 논의를 이어가자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면서 의료계가 증원 반대만을 고집하지 말고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증원 문제에 대해 논의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정부와 여당은 이번 의대 정원 증원 논의에서 '제로베이스' 원칙을 강조하며 과학적 데이터에 기반한 적정 규모를 협의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거듭 밝혔다. 또한 의료계가 대화 테이블에 참여한다면 열린 자세로 원점에서 모든 가능성을 검토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당내에서 제기된 보건복지부 장·차관 경질론에 대해 추경호 원내대표는 "지금은 의료 개혁 추진이 흔들림 없이 진행되어야 한다"라며 인사 문제를 논의할 시점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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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6
  • 김건희 여사의 총선 공천 개입 의혹…정치권 논란 가열
    김건희 여사가 지난 총선 당시 국민의힘 공천 과정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언론 보도로 드러나면서 정치권이 큰 혼란에 빠졌다. 야당은 이를 "국정농단"으로 규정하며 김건희 특검법을 다시 발의하는 등 강력한 대응에 나서며 여당 내부도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국민의힘과 대통령실은 "신빙성 없는 허위 의혹"이라며 일축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은 9월 5일 김 여사의 총선 개입 의혹을 특검 수사 대상으로 포함하는 내용의 김건희 특검법을 재발의했다. 민주당은 이미 지난 5월 김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 등을 수사 대상으로 하는 특검법을 발의한 상태이며 이번 추가 발의는 김 여사의 공천 개입 의혹을 직접 수사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민주당 김승원 의원은 "국민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라며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는 당 정책조정회의에서 "김 여사가 국민의힘 5선 의원에게 지역구를 옮겨 출마하기를 요청하고 대통령과 맞춤형 지역공약을 제안했다"라며 "이와 관련된 텔레그램 메시지와 이를 확인한 국회의원들이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이러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김 여사의 당무 개입, 선거 개입, 그리고 국정농단의 증거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박 원내대표는 또 윤석열 대통령이 총선 당시 지역별 민생 토론회에서 쏟아낸 공약들이 공직선거법 위반의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조승래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의혹이 사실이라면 이는 '여사 공화국'이라는 비판을 입증하는 증거"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또한 대통령실, 검찰, 정부 모두 이러한 의혹을 숨기려고 했다는 점에서 공범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조국혁신당 역시 김 여사 의혹에 동참했다. 김보협 수석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김건희 여사가 공천에 개입했다면 이는 명백한 국정농단이자 중대 범죄"라며 비판했다. 당시 총선을 지휘했던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에게도 이와 관련된 해명을 요구했다. 여권 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김웅 전 국민의힘 의원은 CBS 라디오 방송에서 "만약 김 여사가 실제로 문자를 보냈다면 이는 선거법 위반"이라며 "사람들 사이에서는 '드디어 터질 것이 터졌다.'라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여사로부터 텔레그램을 받았다고 자랑한 사람도 있었고, 실제로 공천된 사람도 있었다"라며 이러한 소문이 공공연히 돌았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국민의힘은 강력하게 반박했다. 국민의힘은 공식 입장을 통해 "해당 의혹 보도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허위 보도"라며 "총선 공천은 당내 공천관리위원회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외부 인사의 개입은 전혀 없었다"라고 밝혔다. 또한 당은 허위 보도에 대해 법적 조치를 검토 중이라고 덧붙였다. 대통령실 역시 해당 의혹에 대해 "사실무근"이라며 "김 여사가 공천에 개입할 이유도 없고 공천은 당 공천관리위원회의 결정 사항"이라고 반박했다. 또한 공천에서 배제된 인사가 김 여사와 관련된 논란을 통해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보도와 관련된 언론사는 김 여사가 김영선 전 의원에게 텔레그램을 통해 출마를 요청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그러나 김 전 의원은 이를 강하게 부인하며 "김 여사와 총선 공천 관련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없다"라고 밝혔다. 이처럼 김건희 여사의 공천 개입 의혹을 둘러싼 정치권의 논란은 야당과 여당, 그리고 대통령실 간의 첨예한 대립으로 확대되고 있다. 향후 특검 도입 여부와 의혹 수사의 진행에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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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6
  • 더불어민주당, 의료대란대책특별대책위원회 출범: "정부의 의료개혁 실책 짚어낼 것"
    더불어민주당은 8월 29일 '의료대란대책특별대책위원회(의료대란특위)'를 구성하고, 정부의 의료개혁 실책을 지적하고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오전 국회에서 열린 출범식에서 민주당은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의정 갈등이 의료 공백을 넘어 대란으로 악화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출범식에는 민주당 소속 박주민, 강선우, 전현희, 이언주, 남인순, 김윤, 차지호, 서미화, 고민정 의원과 강청희 강남을 지역위원장, 주영수 국립중앙의료원장이 참석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이자 의료대란특위 위원장을 맡은 박주민 의원은 최근 발생하고 있는 응급실 전전 끝에 사망하는 사례를 언급하며, 이는 윤석열 정부가 근거 없이 의대 증원 2000명을 과도하게 추진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박 의원은 정부가 응급실 본인 부담금을 대폭 인상하는 방식으로 국민에게 고통을 전가하려 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현재 응급 의료가 한계점에 도달했음을 강조했다. 그는 재난 상황에 이를 가능성이 큰 만큼, 특위 활동에 무거운 책임을 갖고 임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윤석열 대통령이 이날 오전 용산 대통령실 기자회견에서 의료계 비상진료 체제가 원활히 가동 중이며, 의료개혁을 멈출 수 없다고 언급한 것에 대해 비판을 쏟아냈다. 박 의원은 응급 의료 관련 전문의 숫자가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의료 체계를 확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 의원은 또한, 윤 대통령이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제시한 '2026학년도 의대 증원 유예' 안을 거부한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복지위 청문회에서 장관 등이 가능하다고 언급한 바 있는데, 대통령이 갑자기 이를 거부한 것은 일관성이 없다고 비판하며,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마지막으로, 박 의원은 현재 의료계와 논의 중인 3~4개의 아이디어가 있으며, 이 중 일부는 입법 사항이 포함되어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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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29
  • 국회 운영위, 대통령실과 더불어민주당 간 갈등 심화
    27일 열린 국회 운영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더불어민주당은 김건희 여사 오빠의 대통령실 출입과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의 시설 관련 의혹을 제기하며 대통령실을 강하게 압박했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과 여당인 국민의힘은 이 의혹들이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하며, 야당이 면책특권 뒤에 숨어 허위 정보를 유포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날 운영위에서 김건희 여사의 가족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했다. 민주당 박성준 의원은 "공식 직함이 없는 대통령 가족이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김진우 씨가 대통령실에 출입했고 회의에 참석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정진석 대통령비서실장은 "그런 경우는 본 적이 없다"라고 답하며, 박 의원의 의혹 제기에 "가짜 뉴스"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정 실장은 이러한 의혹 제기가 "카더라"식 질문에 불과하다며 매우 유감스럽다고 밝혔다. 국민의힘에서도 민주당의 의혹 제기를 강하게 비판했다. 강승규 국민의힘 의원은 "아무리 면책특권이 있다고 하더라도 팩트에 근거해 품위 있게 진행해야 한다"라고 지적하며, 이러한 방식의 질문은 신뢰를 훼손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강명구 국민의힘 의원도 "대통령실에서 처음부터 근무했지만 김 여사 오빠를 만난 적이 없다"라며, 이번 의혹 제기가 과거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과 유사한 프레임을 억지로 적용하려는 시도라고 주장했다. 민주당은 같은 날 진행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심우정 검찰총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 김진우 씨를 참고인으로 채택하기로 했다. 김 씨가 심 후보자의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점을 들어, 김 여사의 인맥이 심 후보자의 지명에 작용했는지를 조사하겠다는 계획이다. 한남동 대통령 관저에 설치된 정자에 대한 논란도 이날 운영위에서 제기되었다. 민주당 강유정 의원은 이 정자가 미등기 상태라며 부동산등기법 위반 가능성을 제기했다. 해당 정자는 2023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 전시됐던 미술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강 의원은 BTS 멤버가 이 정자를 고평가하여 'BTS 정자'로 불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강 의원은 이 정자가 어떻게 대통령 관저에 설치되었는지, 구매 내역이 없는 이유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정진석 실장은 "현재 이 건축물은 등재 협의 단계에 있다"라며, 위법한 사항은 없다고 반박했다. 윤재순 총무비서관도 "정당한 절차를 통해 비용을 지출했다"라고 강조하며, 민주당의 의혹 제기가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운영위에서는 현 정부의 역사관과 대일 기조에 대한 민주당의 비판도 집중되었다. 민주당 서미화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건국 운동"을 언급한 것을 문제 삼으며, 이를 뉴라이트 성향의 역사관이라고 비판했다. 서 의원은 "윤 대통령이 뉴라이트의 역사관을 따르고 있는가?"라며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대통령은 뉴라이트와 무관하며, 임시정부와 건국이 연속적인 역사로 이어진다는 것이 대통령의 일관된 메시지"라고 설명했다. 또한 서 의원은 김태효 차장이 과거 "일본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발언을 언급하며, "친일파, 밀정이냐"는 강한 표현으로 비판했다. 이에 대해 김 차장은 "일본과의 관계에서 우리나라가 더 잘해내고, 자신감을 갖고 한일 관계를 리드해가자는 취지의 발언"이라며, 발언의 의도를 설명했다. 정진석 실장도 윤석열 정부가 친일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극일(克日)과 승일(勝日)이라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정부의 독도 방어 훈련 비공개와 독도 조형물 철거 등의 문제도 이날 회의에서 논란이 되었다. 민주당 윤건영 의원은 "윤석열 정부가 독도 문제를 하찮게 다루고 있다"라며, 독도에 대한 정부의 태도를 비판했다. 이에 국민의힘 정성국 의원은 "민주당이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들려는 프레임을 씌우고 있다"라며 반박했다. 신원식 국가안보실장은 "친일-반일 프레임을 이용해 국민을 갈라치기 하는 행태가 이제는 사라져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독도 문제를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이번 국회 운영위원회는 김건희 여사와 관련된 의혹을 중심으로 야당과 여당이 서로 강하게 대립하면서, 현 정부의 역사관과 대일 정책에 대한 논란이 격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양측의 날선 공방이 이어지며, 정치적 긴장이 고조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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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28
  • 이재명 대표, 서울 지하철 독도 조형물 철거에 대한 진상 조사 지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서울 지하철 일부 역사에서 독도 조형물이 철거된 사건에 대해 진상 조사를 지시했다고 한민수 민주당 대변인이 밝혔다. 이 대표는 이번 철거 사건이 윤석열 정부의 일관된 '독도 지우기' 정책으로 보고 해당 사안에 대한 신속한 조사를 명령했다. 이 대표의 지시는 코로나19 양성 판정받고 인천의 한 병원에서 치료받는 상황에서 내려졌다. 이는 그의 입원 후 내린 첫 번째 지시로 이 대표의 정치적 의지를 분명히 드러내는 조치로 평가된다. 한민수 대변인은 국회 소통관에서 브리핑을 열고 자세한 사항을 전달했다. 서울 지하철 안국역과 잠실역에서 독도 조형물이 철거된 사실을 언급하며 서울교통공사가 승객의 동선 방해와 전쟁기념관이 노후화를 이유로 독도 조형물을 철거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한 대변인은 이러한 이유를 국민의 이해가 어려운 핑계로 규정하며 이는 윤석열 정부가 일관되게 독도와 관련된 내용을 지우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한 윤석열 정부가 군 정신 교재에서 독도를 분쟁 지역으로 표현하고 독도방어훈련을 축소하고 ‘일본해’ 표기를 방치하는 등의 문제를 지적했다. 이에 따라 이 대표가 독도 조형물 철거를 윤석열 정부의 독도 지우기 정책의 연장선으로 판단하고 진상 조사를 지시한 것이라고 한 대변인은 설명했다. 한 대변인은 브리핑 후 취재진과의 만남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훼손되고 있는 상황에서 독도를 지우려는 움직임이 국민적 의구심을 증가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제1야당으로서 진상을 파악하고 그 결과를 국민에게 알리는 것이 당의 의무라고 강조했다. 끝으로, '국정조사 추진을 고려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한 대변인은 조사단 활동 내용을 지켜본 뒤에 판단할 것이라 밝혔다. 또 정부가 조직적으로 독도 지우기 행태를 하는 것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제1야당과 국회가 해야 할 의무와 역할수행을 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한편, 국민의힘은 이재명 대표의 지시에 강하게 반발했다. 신동욱 국민의힘 원내 수석대변인은 이 대표의 행동을 정치적 공격으로 간주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독도를 지키는 목적의 정기적인 독도 방어 훈련을 언급했다. 또한, 철거된 조형물은 노후화된 시설로서 보수 후 재설치될 예정이라 밝혔다. 신 수석대변인은 민주당의 이 같은 주장이 일본의 이익을 도울 뿐이라고 비판하며 근거 없는 주장으로 국민 호도를 즉시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한지아 수석대변인도 민주당의 행위를 프레임 정치와 궤변 정치로 규정하며 이 대표에게 이러한 정치 스타일을 지양할 것을 촉구했다. 이 사건은 양당 간의 신경전을 더욱 고조시킬 가능성을 시사한다. 진상 조사의 결과에 따라 국정 조사의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 대표의 긴급 지시로 향후 양당의 독도 관련 정책과 행동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증폭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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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26
  • 윤석열 정부,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7월 31일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장을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한 이후 약 한 달여 만인 8월 26일 국회에서 그의 인사청문회가 진행될 예정이다. 이날 오전 10시부터 시작되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청문회는 김 후보자의 지명 이후 지속된 야당의 지명 철회 요구와 여당의 강력한 지지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이 예상된다. 대통령실은 김 후보자의 다양한 경험을 들어 그가 노동 개혁 과제를 이끌 적임자라고 평가했다. 이에 여당은 김 후보자의 행정가로서 능력과 정치적 감각, 노동 약자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강조하며 그의 적합성을 높이 평가했다. 반면, 야당은 김 후보자의 과거 발언과 행동을 집중적으로 비판하며 그를 반노동 인사로 규정, 그의 사퇴를 촉구하고 있다. 특히 김 후보자가 과거에 한 "불법파업에 대한 손배 폭탄이 특효약", "쌍용차 노조는 자살 특공대", "노조는 머리부터 세탁해야 한다." 등의 발언이 주요 쟁점으로 부각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문재인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김 후보자의 발언도 논란의 중심에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러한 김 후보자의 발언과 행동을 근거로 윤석열 대통령의 인사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며, 극우적 인사가 아닌 다른 인물을 찾을 수 없냐고 지적했다. 청문회를 하루 앞둔 25일 더불어민주당 한민수 대변인은 기자회견을 통해 윤 대통령의 인사 참사를 강도 높게 비난했다. 김 후보자는 야당의 비판에 반박하며 반노동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파업으로 인한 손해에 대해 책임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는 또한 8월 15일이 광복절과 동시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기념하는 날임을 강조하며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이승만 전 대통령을 꼽았다. 이번 청문회는 김 후보자의 과거 발언과 행동뿐만 아니라 그의 정치적 입장과 노동 정책에 대한 철학이 집중 조명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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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26
  • 여야, 28일 본회의서 10여 건 민생법안 처리 합의…방송 4법 갈등 지속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이 오는 28일 본회의에서 10여 개의 민생법안을 처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다만, 지난달 임시국회에서 통과됐다가 윤석열 대통령의 재의 요구권(거부권) 행사로 다시 국회로 돌아온 방송 4법 등 쟁점 법안에 대한 갈등은 여전히 남아 있다. 25일 정치권에 따르면, 여야는 오는 28일 본회의에서 전세사기특별법, 공공주택특별법, '구하라법'(민법 개정안) 등 10여 개의 법안에 대해 합의 처리하기로 했다. 김상훈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지난 22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이번 국회에서 처음으로 여야가 이견 없이 수용 가능한 10여 개 법안을 8월 임시국회에서 합의 처리할 것 같다"라며 "뜻을 함께해 준 진성준 민주당 정책위의장과 관계자들에게 감사하다"라고 말했다. 특히 전세사기특별법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국회에서 거부권을 행사한 바 있었으나, 이후 여야가 타협을 통해 접점을 찾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법안은 임차보증금 한도를 3억 원에서 5억 원으로 상향하고, 전세 사기 피해자 범위를 최대 7억 원 보증금까지 인정하며, 이중임대차 계약 피해자와 신탁 사기도 지원받을 수 있도록 했다. 공공주택특별법 개정안은 수요는 많지만, 사업성 부족 등으로 민간 재개발사업이 어려운 노후 지역을 개발하는 도심 공공주택 복합사업의 종료 시한을 오는 9월 20일에서 2026년 12월 31일까지로 연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가수 고(故) 구하라 씨의 이름을 딴 구하라법은 양육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부모의 상속권을 제한하는 내용이다. 지난 21대 국회에서 발의되어 여야 이견이 없던 법안이었으나, 국회 막판 채상병 특검법을 놓고 여야가 대치하면서 임기 종료로 폐기되었다. 일·가정 양립 지원법은 국민의힘이 당론으로 발의한 '저출생 대응 패키지 4법' 가운데 하나로, 배우자 출산휴가 기간을 현행 10일에서 20일로, 난임 치료 휴가 기간을 현행 연간 3일에서 6일로 늘리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가 지난 21일 의결한 도시가스사업법 개정안도 이번 본회의 처리 가능성이 높다. 이 법안은 취약계층에 대한 도시가스 요금 감면 근거를 임의 규정으로 신설하고, 요금 감면을 대신 신청하기 위한 당사자의 동의 및 관계 기관에 대한 협조 요청 근거 등을 추가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산업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에서 함께 의결된 '소부장 특별법' 개정안은 소재·부품·장비 산업 경쟁력 강화 및 공급망 안정화를 위한 특별법이다. 당초 올해 말까지 예정된 '소부장 경쟁력 강화 특별회계'의 유효기간을 2029년까지 5년 연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법은 기술자료를 부당하게 유용하는 행위로 인해 중소기업의 피해나 그럴 우려가 있을 때 법원에 이를 막아달라고 청구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여야가 8월 국회에서 처리할 것으로 여러 차례 언급됐던 간호법 제정안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 지난 22일 법안 심사 소위원회를 열어 심사를 진행했으나 통과가 불발됐다. 진료 지원(PA) 간호사의 업무 범위, 간호조무사 시험 응시 학력 기준 등에 대해 여야 간 이견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복지위는 본회의 전인 26일 추가 회의를 열지 논의 중이다. 그러나 여전히 갈등의 여지는 남아 있다. 야당 주도로 통과됐으나 윤 대통령이 재의 요구권을 행사하여 국회로 돌아온 '방송4법'과 '노란봉투법', '전국민 25만 원 지원법' 등에 대한 재의결 일정을 두고 민주당은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민주당이 28일 본회의에서 민생 법안 처리와 함께 이들 쟁점 법안의 재의결을 안건으로 올릴 경우, 여야 간 충돌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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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
    2024-08-25

칼럼 검색결과

  • 오스트로네시아 인종에 관한 정리 및 분포
    오스트로네시아 인종에 관한 고고학적 근거가 동남아시아와 말레이시아 지역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남부 지역과 중국 본토 지역 중에서 광서, 광동, 강서, 복건 지역 사이의 기술적인 관련을 증명하고 있다. 반면 지금까지 고고학적과 언어학적 조합의 근거로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화남(華南) 지역과 대만 기원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지침으로 해석되어 왔다. 특히 한족들이 중국 전체의 통치 패권을 잡기 전에는 오스트로네시아어계의 화자들은 대만을 지나 중국 남부 해안에서 통킹 만까지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같은 시기, 한족들은 남진하여 양자강과 그 강변 어귀에서 통킹만에 이르는 해안 지역들에 대해 모든 본토에 남아 있는 오스트로네시아 어계 부족들을 중국인들과 동화시켰다. 오늘날 그러한 동화 과정은 대만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 모든 오스트로네시아어는 10개의 하위 군으로 분류되었다. 모든 비포모사어는 하나의 하위분류로 하고, 나머지 9개는 대만에서만 알려져 있는데 이들 모두 오스트로네시아어계이고 이 어문을 사용하는 종족들이 오키나와의 원주민들과 연결되어 있다. 일본의 오키나와 현과 가고시마 소속의 아마미 군도(奄美群島) 지역이며, 류큐 민족이 이곳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 지역은 옛 류큐 왕국의 영토였지만 그 이전의 신석기 시대를 영위한 종족들은 대만 아미족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물론 류큐 이외 지역에도 류큐 민족이 다수 살고 있는 곳들이 있다. 1920~30년대 심각한 경제 위기인 소철 지옥(ソテツ地獄)을 겪으면서 많은 수가 생계를 위해 일본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오사카 타이쇼구(大正区), 해외에서는 미국 하와이와 브라질에 많은 류큐인들과 2, 3세들이 살고 있다. 제주도에도 몇몇 류큐계 인종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일본 내 류큐인의 인구는 15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며, 해외에 30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참고로 오키나와 어 모어 화자가 40만~90만 명 정도 되고, 류큐어에 속하는 다른 언어들을 합치면 10만 명 정도 된다. 류큐 제도 주민들 중 절반은 류큐어를 일상 언어로 사용하고 절반은 일본어를 일상 언어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집계된 일본 전체인구의 약 1%가량으로 나타난다. 이에 류큐인들이 대개 일본에서 소수 민족으로 인식되기도 하는데 이들은 전체 인종에서 반 이상이 오스트로네시아계 혼혈 민으로 주장되기도 했다. 이러한 유형이 대만에서 동남아 내륙, 말레이시아, 그리고 먼 거리에 있는 태평양까지 이어진 농경 부족의 확산에 대해 가장 잘 설명이 될 수 있는 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논란이 되어 왔다. 비록 폴리네시아 인들의 이동으로 볼 수 있는 북태평양 군도에서 뻗어 나갔던 폴리네시안 특급열차(Polynesian express train)라 불리는 모형이 광범위하게 유효한 데이터로 주장되고 있지만, 여러 우려들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 현 시점이다. 이 데이터에 대한 반론 및 대안은 멜라네시아 또는 동남아시아에서 오스트로네시아어족들의 토착 기원설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동남아시아에서 재배된 가장 이른 시기 코코넛의 게놈 분석은 오스트로네시아 인들이 코코넛 작물을 재배하는 것을 기준으로 어떻게 분포되어 나갔는지 리처드 마르틴(Richards Martin)에 의해 게놈 분석표가 발표되었다. 이들 코코넛들의 10개 미세 위성 유전자를 조사함으로 인하여, 오스트로네시아 인종 게놈 연구원들은 코코넛에 2개의 유전학적인 뚜렷한 부분 모집단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인도양에서 기원한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태평양에서 기원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두 가지의 개체 사이에, 유전자 전이의 혼성이 있었다는 근거가 발견되면서 이 또한 여러 논란이 전개되고 있다. 이는 코코넛이 해양 살포에 대해 이상적으로 적응했다는 것을 가정하면 한 곳에서 모든 개체가 바다에 떠서 다른 개체로 갔다는 것도 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혼성이 발생한 위치는 마다가스카르와 아프리카 동부 해안으로 제한되며, 세이셸은 배제되었다. 이러한 혼성 위치에 대한 다양한 메커니즘과 분포 여부는 오스트로네시아 항해자들의 무역 항로로 알려진 것과 동시에 발생된 것으로 보여 진다. 더불어 창시자 효과로부터 기인한 개체군 병목 현상을 경험했던 남미의 동부 해안에 있는 유전학적으로 나타난 뚜렷한 코코넛 하위 개체가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선조들은 태평양 코코넛을 재배했던 종족들로 그것은 오스트로네시아 인들이 미국 대륙까지 항해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여전히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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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0
  • 9월 8일은 우즈베키스탄 민족의 날
    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새로운 우즈베키스탄이라는 국가가 탄생했다. 단순 명료하게 경계를 설정한 영토, 주민, 주권을 가진 이 근대 국가는 어떤 민족의 국가인지에 대해 논란이 많다. 근대 국가의 핵심 구성 원리는 해당 영토 경계 내부에서 하나의 지배적인 민족이 자치의 권리와 주권을 향유하는 민족 국가이다. 우즈베키스탄도 국가 정체성 강화의 일환으로 정부 수준에서 ‘민족’을 발명하고 종족-민족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일련의 작업을 독립 이전부터 해오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이 우즈베크 종족과 민족의 민족국가를 지향한다면, 우즈베크 종족 및 민족은 누구인지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또한 그와 같은 민족 국가는 다수의 우즈베크인이 소수의 ‘종족(Ethnic groups)’을 개방적이고 수용적으로 모두 포괄하는 ‘시민적 민족국가(Civic Nation-State)’가 될 것인지, 혹은 우즈베크 인이 배타적으로 지배하는 ‘종족적 민족국가(Ethnic Nation-State)’가 될 것인지, 이는 우즈베키스탄의 종족 및 민족정체성을 다룰 때 제기되는 근본적인 물음이다. 우즈베크 인의 종족 및 민족정체성은 조사하여 발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발명하고 재구성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연구의 첫 번째 과제는 우즈베크 인의 조상은 누구인지에 대해 밝히고 규정하는 것이다. 우즈베키스탄 국가 지도부가 우즈베크 종족의 혈통적 원류를 규정한다는 것은 자신이 의도하고 기획하는 국가 및 민족정체성 형성의 종족적 기원을 제시한다는 점에 있어 현재 뿐 아니라 우즈베크의 미래상을 드러내는 효과를 갖게 된다. 하나의 집단이 종족 및 민족정체성에 토대한 민족이 되기 위해서는 종족의 경계 내부와 외부에 존재하는 사람을 구분하는 경계 짓는 부분과 역사적인 뿌리를 찾는 것이 필수적이며, 정치권력은 정치적 정당화의 일환으로 이를 수행한다. 유구한 혈통의 신화 없이 긴 세월 동안 이어져온 어떤 종족을 상정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는가 하는 생각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규정하는 것에 필수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조상 신화는 종족과 민족공동체 형성을 위해 가장 기초적이고 핵심적인 ‘공유된 역사적 기억(Shared historical memory)’이다. 독립 이후, 우즈베키스탄 지도부는 역사를 다시 서술하고 민족 의식을 앙양함으로써 근대적 민족국가 형성의 기반을 다지고자 했다. 역사 속에서 민족의 뿌리를 찾으면서 우즈베키스탄의 역사학자들은 14~16세기에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하여 제국을 이루고 중앙아시아 일원을 지배했던 티무르와 바부르(Babur)를 자신들의 조상으로 우즈베크화 하기를 선택했다. 티무르는 칭기즈칸이 차가타이에게 부여한 4개의 천호(千戶) 가운데 하나인 명문 부족 ‘바를라스 부족(Barlas tribe)’의 후예였다. 이들은 차가타이어를 사용했지만, 이러한 부분은 당시 우즈베크 인이 사용하던 ‘킵차크 방언(Qipchak dialects)’과는 다른 것이었다. 16세기에 바부르를 중앙아시아에서 몰아낸 것은 다름 아닌 ‘샤이바니 칸(Shaybani Khan)’이 거느린 우즈베크 인이었다. 우즈베키스탄 국가가 당시 우즈베크 인이 몰아낸 바부르와 그의 선조 티무르, 그리고 티무르 제국을 오늘날 종족-민족 발명의 역사적 근거, 민족적 · 국가적 정통성의 뿌리로 삼았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그 의미는 심대하다고 보여 진다. 중요한 것은 통상 확인하기 어려운 조상에 대한 어떤 사실 관계보다 공통 조상의 신화이기 때문이다. 이 선택은 과거 전성기를 이루던 티무르 제국의 영광과 전통을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국가정체성 형성의 토대로 삼기 위해 우즈베크 민족의 기원과 범주에 대한 새로운 역사 만들기, 그리고 티무르의 후손으로서 우즈베크 민족을 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티무르와 바부르로 이어진 차가타이 부락의 유산을 계승한다는 것은 혈연이나 종족의 근원보다는 이 지역에 거주했다는 공간의 귀속성을 더욱 중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티무르 제국을 역사적, 민족적 정통성의 뿌리로 선택했다는 것은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이 제국의 계승자로서 중앙아시아의 지역 강대국으로서 역할을 자임할 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음을 증명하고 과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우즈베크 방식의 민족의 뿌리에 대한 재발견 사업은 티무르가 분쇄한 1402년,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거리를 두고, 투르크적인 부분과 페르시아적인 유산을 동시에 가진 티무르 제국의 특징을 계승하면서 이를 우즈베크화 하려는 것으로서 순수하게 중앙아시아적 정체성을 모색하고 추구하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우즈베크 종족 및 민족의 뿌리 찾기를 위한 국가적인 노력에서 드러나는 종족 및 민족정체성의 형성 방향으로 볼 때 민족주의는 민족이 자의식을 각성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민족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민족을 발명해낸다는 역사학자들의 분석이 민족의 형성화에 의미하는 바와 더 가깝다고 할 것이다. 민족의 뿌리를 더 깊이하고, 민족적 전통을 더 유구하게 만들려는 국가적 노력에 부응해 현대 우즈베크 역사학파는 우즈베크 족의 뿌리를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를 우즈베크 역사의 분기점이라 보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19세기 말까지 ‘우즈베크’라는 용어는 ‘다슈트-이 킵차크 유목 우즈베크(Dasht-i Kipchak nomad Uzbek)’ 부족의 직계 후손을 의미했었다. 이들은 16세기 초에 샤이바니 칸을 지도자로 하여 ‘마베란나흐르(Maverannakhr)’ 지역을 정복하고, 샤이바니 왕조의 통치 시대에 그곳에 정착했다. 여기에는 그 이후에 그들에게 합류한 몇몇 투르크 부족도 포함되고 있다. 이는 3대 우즈베크 구성 종족이 ‘다슈트-이 킵차크 유목 우즈베크’, 이 지역에 존재하고 있는 투르크 부족과 차가타이와 오구스(Oguz)계 씨족들, 그리고 투르크어를 사용하는 정착민인 사르트(The Sarts) 등이다. 부족연합체적인 성격을 가진 우즈베크 족이 샤이바니 왕조의 핵심 종족으로써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지방민과 정착민과 혼융을 이루었으며, 1599년 샤이바니 왕조의 멸망 이후 여러 세력들이 각축을 벌이는 가운데 히바, 코칸트, 부하라 칸국 등이 명맥을 이어갔으나 그러한 칸국들은 모두 지배자와 관할 영토 중심의 통치체로서 민족이나 민족정체성의 형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우즈베크 족의 직계 조상인 ‘다슈트-이 킵차크 유목 우즈베크’족이 이곳을 정복하고 정주한 16세기 초엽부터 1937년의 대숙청 시기까지를 말하며 민족정체성 형성에 대해 초점을 두고 말하자면, 중앙아시아의 역사는 공백 상태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종족 및 민족정체성은 소비에트 시절 인위적으로 구획된 연방구성 민족공화국의 경계 내부에서 우즈베크 인이 된 상이한 종족을 대표하여 광의적이며 포괄적인 성격을 띄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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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0
  • 홍범도 장군과 러시아의 인연과 상세한 독립투쟁기
    내가 갑자기 홍범도 장군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내가 러시아에서 살고 있으며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동유럽 (특히 우크라이나), 중동 일대를 전공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근현대사를 연구하다보면 적백내전은 기본으로 나오고 여기에 연해주, 독립군, 고려인, 소일대립 안 볼 수가 없게 된다. 러시아 관련에, 우리와 연관이 있으니 더 보게된다. 더불어 고려인 강제 이주 때 중앙아시아로 대거 들어왔고 그곳에서 홍범도는 고려인들에게 영웅, 그 이상이었다.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 할아버지들한테 홍범도 장군의 영웅적인 무용담을 듣고 자랐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고려인의 상징이 된 홍범도 장군의 유언에 따라 고국에 유해를 모시는데 2012년부터 동참을 해서 오늘날까지 온건데 러시아학 연구자로써 이같은 상황에 분노와 참담함을 느끼고 있다. 홍범도 장군이 러시아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05년부터였다. 의병활동을 지속하던 홍범도는 1908년 12월 중순 마침내 러시아의 소왕령(蘇王嶺: 니콜스크 우수리스크)에 도착했고 이어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무기와 탄약을 구입해 가고, 또 연해주 지역의 의병부대와 공동보조를 취하며 더 나아가 남한 지역의 의병부대와도 연계하여 대대적 의병전쟁을 전개하기 위해서였다. 이 시기 일본 헌병대 및 일본 육군 정규부대를 상대로 크고 작은 37회의 전투를 벌였다고 알려져 있다. 나라를 잃은 뒤, 의병 항쟁 여건은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이 시기 국내 무장독립운동 단체들의 일반적인 조류에 따라 홍범도 역시 1911년 연해주로 망명했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점으로 하는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해서 수시로 월경해 접경 지대의 친일파 및 일본 군경을 공격하는 게릴라 전을 수행했다. 이후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무너지고 적백 내전이 발생한다. 이 혼란을 이용해 일본군이 연해주를 침략했고 결국 블라디보스톡도 함락된다. 일본군은 이 기회를 이용해 홍범도를 포함한 연해주 소재 조선 무장독립운동 단체를 소탕하려 했다. 이에 대응해 무장독립운동 단체도 적극적으로 일본군과 교전을 벌임과 동시에, 연해주로 내려와 백군 및 이를 지원하는 일본군을 격퇴하고자 내려온 적군을 만나게 되고 몇몇 조선인 공산당원들이 접촉해 옴으로써 홍범도는 이들과 손을 잡게 된다. 결국 탄약도 없고 일본과 싸울 근거지를 잃어버린 홍범도는 무기와 탄약이 풍부하고 자금도 많은 볼셰비키의 지원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볼셰비키 적군의 합류는 홍범도에게 선택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 상태에서 일본군에게 항복하면 매국노라 욕을 먹고 공산당 측의 지원을 받거나 들어가면 빨갱이라 욕을 먹는다. 홍범도를 욕하는 당신들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그리고 자유시 참변에 홍범도가 관여했거나 홍범도가 자유시에서 같은 독립군을 직접적으로 학살했거나, 학살을 지시했거나, 적극적으로 도왔거나, 하는 등의 얘기는 근거 없는 것으로 국방부가 기자회견에서 실토했다. 이후 계속된 일본군의 토벌전 및 만주 군벌인 장작림과의 충돌로 인해 홍범도를 포함한 독립군 세력은 소련 영내로 탈출했다. 경신참변으로 인해 동포들이 몰살당하고 땅을 초토화 되어 독립군은 근거지를 잃고 친일파인 만주 군벌 장작림의 독립군의 진주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만주는 더 이상 항일 투쟁의 기지가 되지 못했다. 제국주의에 탄압받던 소수민족과 연대하겠다며 투쟁을 적극 주장하는 레닌의 소련은 이들에게 매력적인 선택지였을 것이다. 당시 독립군을 이끌던 수장들 상당수가 한글을 아직 떼지 못했거나 겨우 한글을 떼던 사람들이었는데 홍범도의 경우는 청년 시절 신계사에서 지담스님에게 한글을 겨우 떼고 한자 몇 개 아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 정도인데 홍범도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그 이념의 폐해가 무엇인지 알았겠는가? 당시 홍범도의 관심은 오로지 일본과 싸우는거였고 공산주의 사상은 별로 관심도 없었다. 소비에트 적군의 수장 레닌은 당시 민족자결 원칙을 내세우며 약소민족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적군은 독립군에게 신식 무장까지 약속한다. 자금력이 없던 독립군은 적군의 제안을 거절하기 힘들었다. 많은 독립군이 적군에 가담한 이유다. 홍범도 장군에게도 적군이 끈질기게 접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당시 일본이 러시아 백군을 돕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군은 적군편에 섰다. 독립군의 눈에는 일본에 총구를 겨누고 있는 적군이 ‘동지’였던 것이다. 자연스레 적군-독립군 대(對) 백군-일본군의 대결 구도가 형성됐다. 적군은 표면적으로 약소 민족 지원을 내세워 독립군과 공동 전선을 구축한 셈이다. 그러나 1921년, 적군이 갑자기 입장을 바꾸게 된다. 적군이 우위에 있었고, 백군은 궤멸 직전이었다. 적군은 더 이상 독립군의 힘을 빌릴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같은 상황을 파악 못했던 홍범도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독립군의 통합이 마무리되어 항일무장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해석이다. 당시 홍범도에게는 대한의용군, 고려혁명군 그 어느 쪽과도 이해관계가 없었다. 1922년 2월, 홍범도는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의 주최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는데 이는 소련 지도부를 설득해 충분한 지원을 얻어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서였다. 이때 레닌이 트로츠키를 통해 홍범도를 따로 불러 단독 면담을 한 다음 금화와 홍범도라는 이름이 새겨진 은제 마우저 C96 권총을 선물했다. 그리고 독립군에 대한 지원도 약속했다. 독립군 중 트로츠키나 레닌과 단독 면담을 한 것은 홍범도가 유일하며 이때 레닌에게 받은 권총은 현존하지 않지만 권총집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나 레닌이 사망하고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권력 투쟁, 스탈린의 집권이 이어지는 동안 독립군의 지원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들은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본과의 투쟁을 허락했을 뿐, 제대로 된 지원도 해주지 않았고 조선 독립이나 고려 독립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결국 소련은 홍범도와 김경천 등의 독립군 장군들을 이용만 했다. 1922년 소련은 일본과 베이징에서 밀약을 맺고 일본군의 연해주 철수를 조건을 걸었다. 이에 일본도 항일무장투쟁 단체의 해산을 조건으로 걸었다. 이를 받아들인 소련이 항일무장투쟁 단체들을 해산시켰다. 이후 홍범도는 1923년 연해주 남부에서 한인 콜호즈를 비롯한 지역 사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이 때 두번째 부인을 얻어 딸 하나를 두었다. 소련의 연금을 받아 생활하기 위해 1927년 소련 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했다. 홍범도 장군은 강제이주 전까지 원동에서 딸과 사위와 함께 생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가 그의 나이 60세가 다 되었을 때다. 그러나 스탈린에 의해 이루어진 고려인 강제 이주 때, 함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되었다. 이후 키질로르다에 위치한 고려극장에서 고려인 희곡 작가 태장춘의 배려로 수위장을 맡았으며 소련으로부터 연금을 받으며 생활하였는데 홍범도는 매월 80루블의 연금과 50루블의 보수를 받아 넉넉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1936년 기준, 소련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은 150 ~ 200 루블, 연금은 25 ~ 50 루블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1달 수입이 130 루블로 봤을 때, 당시 소련의 평균 임금보다 매우 낮은 편이지만 부양가족이 없었고 수위 자리도 고려인들의 영웅인 홍범도에게 생활비를 챙겨 주기 위해 일부러 마련한 자리였기에 생활에 큰 문제가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키질로르다는 수많은 고려인들이 정착을 한 지역으로 고려인 신문사, 원동조선사범대학, 조선극장, 라디오방송국, 하바로프스크 출판사 조선부 등, 고려인들이 세운 문화기관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홍범도와 자주 교류했던 소설가 김기철에 의하면 이러한 키질로르다의 생활환경이 홍범도의 말년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1941년 대조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 '물자를 아껴 전선의 병사들을 돕자'는 선전활동을 하기도 하였고 <레닌기치>를 읽으며 이웃들에게 전선 소식을 전하거나 직접 글을 투고하여 젊은이들에게 나치 독일을 격파하는데 힘을 보태라며 전쟁 참여를 독려하기도 했다. 이오시프 김이 쓴 <소련한인극단>에 의하면 홍범도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73세의 나이로 소련 정규군에 지원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고 한다. 1942년 4월 홍범도가 몸담고 있던 고려극장이 카자흐 SSR 동부 우슈토베(Үштөбе)로 옮겨간 이후에는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다가 1943년 10월 25일 노환으로 사망했다. 1927년 이후, 그는 공산주의자로 지냈지만 당시 소련의 상황으로 볼 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갈 곳이 없던 홍범도의 입장에서는 소련 잔류의 선택 밖에 없었다. 키질로르다에서도 홍범도는 고려인들 사이에서 파쟁에 참여하지 않고 매우 공평정대하게 행동하여 판결했다. 그 가혹한 스탈린 폭정시기에도 이런 홍범도를 감히 건드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고 한다. 홍범도 장군은 의도치 않게 시대적 비극과 아픔으로 소련에서 공산당에 입당했지만 조선이나 한국에 피해 준 행위를 한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유언에서도 고국에 묻히고 싶어했다. 그러는 상황에서 홍범도 장군을 모셔가더니만 이와 같은 몹쓸 대우를 받고 있는 것에 대해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동포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이들은 고려극장 안에 있는 홍범도 장군의 대형 사진 앞에서 '한일독립전쟁 영웅 홍범도 장군, 모셔갔으면 제대로 모셔라', '홍범도 장군 공산당 이력이 문제면 내 가족과 고려인 동포 50만명도 모국의 적인가'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흉상 이전 반대를 외쳤다. 홍장군은 카자흐스탄 현지 고려인들에게 정신적인 지주다. 박 드미트리 홍범도 장군 기념사업회 카자흐스탄 지회장은 홍범도 장군이 아름다운 해방된 조국의 품에 안겨 영면하시겠다고 생각하면서 마음 뿌듯해했고 한국이라는 나라를 자랑스럽게 느꼈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는 배신감이 느껴진다고 한다. 19세기, 조선 위정자들이 북삼도 주민들을 수탈해 국경 밖으로 살기 위해 연해주로 가서 집단을 이룬게 고려인들의 시작이다. 당신들의 조상들인 조선의 위정자들이 이들을 나라 밖으로 내몰은 셈이고 일제의 부역자로 살기 거부했으며 북한도 받아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공산국가 소련에 살게 됐다. 당신들은 홍범도장군을 개차반으로 만들고 명예까지 모독했으며 공산주의자라고 매도했다. 그러나 당신들이 매도한 홍범도는 고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지만 공산주의자가 되고서도 조선과 대한민국에 피해를 준적 없다. 그리고 그는 고려인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영웅으로 고려인들을 잘 이끌었던 인물이다. 당시 시대적 상황이 그러했기에 계속 홍범도, 고려인 = 공산주의자라고 할꺼면 그렇게 되도록 내몰았던 조선왕조의 후예이면서 나라를 잃도록 방관한 당신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어쨌든 홍범도, 고려인 = 공산주의자 이 공식이라면 어쨌든, 당신의 선조들이 이들을 내몰았고 당신의 선조들 덕택에 나라가 망하여 이들을 지키지 못한 것은 팩트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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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7
  • 사우디아라비아의 예멘 국경에서 에티오피아 난민 학살에 대한 미국의 이중성
    사우디아라비아와 예멘의 국경 지대에서는 지난 15개월 동안 어린이를 포함한 최소 655명의 난민들이 살해됐다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경 수비대들이 비무장 상태의 이주민 무리들에게 박격포 등 폭발성 무기로 공격하고, 가까이 접근한 이주민에게는 직접적인 총격을 가했다는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경수비대들이 이주민을 구금한 채 성적으로 학대한 정황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에티오피아인들로써 2014년부터 이어진 후티 반군과 정부군 간의 내전을 피해 예멘을 거쳐 사우디로 이주하고 있다. 내전은 2015년 사우디가 주도하는 정부 측 연합군이 개입하면서 더 큰 전쟁으로 번졌다. 에티오피아에서는 티그라이 내전으로 인해 2021년 6월 21일에 총선이 실시되었고 아비 아머드가 새로이 당선되어 2022년 11월 평화협정이 체결 이후 3개월 만에 처음으로 북부 티그라이 반군 지도부와 만나면서 평화를 논의하고자 했지만 티그라이에서 연방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방 의회 선거에 돌입하면서 다시 내전이 발발했다. 이 내전이 계속 진행되면서 에티오피아 난민들이 예멘을 통해 사우디아라비아로 건너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후티 반군을 지원하는 이란과 국교를 재수립하며 갈등이 다소 누그러졌지만 국경 상황은 여전히 험악한 상황이다. 망명을 위해 고국을 떠나는 에티오피아 이주민들의 주요 이동 경로를 보면 이들은 아프리카 동부의 국가 지부티에서 출발, 아덴만을 건넌 뒤, 사우디아라비아 국경까지 예멘 본토를 가로질러 이동하고 있다. HRW 보고서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경 경비대는 여성과 아동이 다수 포함된 비무장 상태의 이주자들을 향해 거침없이 발포했다고 한다. 이들은 박격포까지 동원해 수십 명을 단번에 학살하기도 했다. 지난해 9월 이주자 200여 명과 함께 국경에 접근했던 한 생존자는 “갑자기 폭발물이 날아왔고, 일행 대부분의 몸이 으깬 토마토처럼 갈가리 찢어졌다”고 말했다. 이들 후티 반군 군인들 중 상당수가 난민에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보고 이들 난민들에게 저지른 2020년대 들어 최악의 학살극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경 수비대들은 이주자들을 구금한 채 각종 학대 행위도 했다. 이주자에게 총에 맞을 신체 부위를 스스로 고르게 한 뒤 총을 쏘기도 하는 악질적인 행위를 일삼았다. 특히 이들은 남성 이주민에게 여성 일행을 성폭행하라며 성적인 학대도 일삼았다. 한 17세 소년은 “한 명이 거부하자 경비대는 그를 즉시 처형했고 곧바로 다른 남성에게 ‘네가 하라’고 강요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추방 명령을 받아 예멘으로 압송되던 이주자들도 즉각 공격을 당했다. 20대 여성 생존자는 “사우디아라비아 국경 수비대들이 우리를 차에서 내리게 한 뒤 도망가라고 소리쳤다. 1㎞ 정도 달아나 쉬고 있는데 박격포를 쐈다”고 증언했다. 지난해 3월부터 올해 6월까지 살해된 이주자는 최대 수천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 상황을 지켜본 HRW의 연구자들은 여러 증언들을 토대로 산 비탈 전체에 시신이 흩어진 ‘킬링필드’로 당시를 묘사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국가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프로 골프 리그와 축구 클럽을 사들이는 데 수십억 달러를 쓰면서 이와 같은 인권을 무시한 범죄에 대해서는 관심을 쏟지 않는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한편 2022년 3월부터 올해 6월까지 사우디아라비아 국경을 넘으려고 한 42명의 에티오피아 이주민 및 망명 신청자의 증언들과 350장의 SNS 사진, 동영상과 위성 사진을 비교 분석했다. 이를 바탕으로 이들 난민들은 예멘과 사우디아라비아 국경의 이주민들 이동 경로를 따라 각종 폭발물들과 총격으로 살해된 시체들이 발견되고 있다고 전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측은 이 주장에 대해 자신들이 벌인 행위에 대해 근거가 없으며 이와 같은 인권보고서를 신뢰할 수 없다고 전했다. 사우디아라비아 당국은 지난 해에도 유엔이 자국 국경수비대가 이주민을 조직적으로 살해했다고 지적했을 때도 이를 강하게 부인했었다. 빈 살만의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과 서방의 편에 서지 않고 이란과 화해했으며, 러시아-중국과 한 편이 되자 나는 빈 살만과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에 찍혔기 때문에 갖은 페이크 뉴스의 타겟이 될 것으로 작년에 예상했는데 올해부터 빈 살만을 향한 명확하지 않은 뉴스들이 나오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아킬레스건은 이슬람 신정체제로 인하여 발생하는 인권 문제에 있다. 미국 고위 외교관들은 작년 가을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경수비대가 예멘 국경에서 에티오피아 이민자들을 향해 총기를 난사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는데 이를 공론화하지 않았다. 당시 리처드 밀스 유엔 주재 미국 부대사가 예멘 내전 사태를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사우디아라비아 국경에서 발생한 이민자 학대 의혹에 대해 여전히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이에 대해 얼마나 많은 아프리카인이 사망했는지에 대해서는 끝내 침묵을 지켰다. 이미 작년 12월에 유엔과 비공개 회의를 열고 사망자와 부상자 수 등의 구체적인 자료를 받았는데도 말이다. 미국은 대선을 앞두고 있다. 헤리스와 민주당은 재선에 성공하기 위해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여 자신의 외교 치적으로 삼으려 한다. 물론 아랍 세계와 유대 세계인 이스라엘이 이란과 같이 외교적 화해를 하게 된다면 이는 십자군 원정 이래 1,000년 이상 이어온 유대와 아랍이 손을 잡았다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화해 이상의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되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종교적으로도 유태교와 이슬람교가 화해할 수 있는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는 것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를 만들고 민주당과 현 대통령 바이든의 치적을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의 이같은 만행에는 일부러 눈 감고 묵인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자말 까슈끄지 사건 때, 이에 대한 인권 문제에 사우디아라비아 추궁했던 미국이, 결국 에티오피아 난민 학살에는 입을 다무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 결론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 개선과 유가 문제, 이스라엘과의 외교적 화해 등 복잡하게 얽혀져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외치던 "인권(Human rights)"은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얼마든지 이용 가능한 수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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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7
  • 헤겔 철학, 그 역사적 전개와 의미
    지금까지의 서양철학 중 가장 난해한 철학이 있다면, 과연 어떤 철학일까? 필자가 이에 대해 답변을 하자면, 당장 떠오르는 철학자는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1770년-1831)이다. 누군가 그냥 무턱대고 헤겔 철학이 다들 어렵다고 하니 도대체 어떤 철학인지 한번 읽어보자는 의도로 헤겔의 저작을 읽어보기 시작했다간 고작 몇 줄 정도만 읽고 곧장 한목소리로 무슨 말인지 몰라 너무 어렵다거나 혹은 이게 무슨 철학인지 모르겠다는 태도를 취하면서, 헤겔 철학을 그냥 포기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양상은 오늘날에만 해당하는 특이한 일이 아니고, 헤겔이 생존했던 당시에도 매번 있었던 터라 가히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독일어에 능숙한 사람이더라도 헤겔 철학 앞에서는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예외 없이 두 손을 들기 마련이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처럼 어려운 헤겔 철학이 그대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당시에도 오늘날에도 서양철학에 가장 영향력을 끼친 철학으로 평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헤겔 철학에 동조하든 반대하든 상관없이 철학자라면 헤겔 철학이 돌파해야 할 거대한 바위산임을 뜻한다. 그러나 오히려 헤겔 철학을 돌파해 보겠다는 의도로 시작했던 야심에 가득 찬 계획들이 어느 순간 그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정지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계획들은 헤겔 철학 전체가 아니라 단지 일부만을 이용해서 각자의 철학에 활용할 따름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헤겔 철학을 잘 활용한 각자의 철학이 오히려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되었으며, 헤겔 철학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음이 확인된다. 헤겔 철학은 당시에 좌파와 우파로 갈라져 치열한 논쟁을 서로 벌였으며, 그 이후로 신헤겔주의, 마르크스주의, 프랑크푸르트학파, 포스트모더니즘, 분석철학, 실용주의, 현상학, 실존주의, 해석학 등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신헤겔주의는 헤겔 철학의 관념론과 역사주의에 치중한 결과, 헤겔 철학의 변증법은 사상(捨象)해버렸다. 마르크스주의는 헤겔의 관념론을 비판하고, 합리적 핵심(der rationale Kern)인 변증법을 취했지만, 그 이후로 독단적 교조화 및 여러 분파로 분열양상을 보였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서구 마르크스주의에서 출발해서, 헤겔과 마르크스의 관계를 중도로 돌리는 데 효과적이었지만, 사회비판이론으로 귀결하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헤겔 철학의 이성 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출발했지만, 오히려 현실의 대안으로서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분석철학은 헤겔 철학의 개념론을 언어분석철학에 활용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헤겔 철학의 사변적 성격을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실용주의는 헤겔 철학에 대한 역사철학적이고 휴머니즘적인 측면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그 이상의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현상학은 독일 현상학보다 프랑스 현상학에서 헤겔 철학의 긍정적인 면을 되살리기에는 근본적으로 헤겔 철학 전체에 해당하지 않는다. 실존주의도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여기에서는 헤겔 철학의 부정적인 측면으로 귀결되었다. 해석학은 헤겔 철학을 독백이 아니라 대화라는 측면에서 다루기는 했지만, 헤겔 철학의 논리적 체계보다는 자의적 해석의 가능성만 열어 놓게 되었다. 그 외에도 비록 헤겔이 동양철학에 관해 부정적으로 평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중국과 일본 등등에서 헤겔철학과 동양철학의 비교연구도 황행(橫行)하고 있다. 이처럼 헤겔 철학의 영향력이 지대했던 것은 헤겔 철학이 학문의 거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철학적 사유를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전개했으며,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의 계기를 변증법적 사유의 힘으로 필연성을 도출해냈기 때문이다. 물론 헤겔 자신은 이를 완벽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현재 입장으로 보면, 곳곳에 허점도 있다. 그러나 유한한 삶을 영유하는 한 개인으로서 인간이 이 정도로 실로 엄청난 학문적 성취를 이루어 낸 것은 분명히 철학사에 영원히 빛날 업적이라 하겠다. 헤겔의 이러한 노력의 결과 덕분에 우리는 헤겔 철학이라는 유산을 물려받은 것이다. 그 유산은 독일에만 한정되어, 독일 계몽주의의 산물이라는 평가를 넘어서 세계적 자산이 되었다. 헤겔 철학에는 그리스 철학, 중세 신비주의, 범신론, 계몽주의, 낭만주의, 정치경제학, 사회계약론, 칸트 철학, 피히테 철학과 셸링 철학 등이 모두 녹아들어 있다. 또 논리학, 자연철학, 정신철학, 법철학, 역사철학, 종교철학, 미학, 철학사 등도 포함되어 있으며, 이 모든 분야가 서로 유기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헤겔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단순히 특정한 영역에서 몇몇 구절만을 읽고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될 경우, 헤겔 철학에 대한 오해가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는 없으며, 스스로 미로에 갇힌 채 착종(錯綜)된 모순이 휩싸이고 말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헤겔 철학에 대한 이해는 일단 고사(枯捨)하고,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봉착하면서 마치 늪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모습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헤겔 자신의 서술방식이 사변적인 탓에 야누스적 이중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때론 혼란스럽기도 하고, 분명한 일관성이 다소 없거나, 혹은 헤겔 자신의 오류로 인해 진위여부(眞僞與否)에 관한 논쟁거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헤겔 사후 지금까지도 헤겔 철학은 이러한 문제로 인해 각자도생(各自圖生)에 근거해서 전개되어왔다. 그러다 보니 헤겔 철학에는 여전히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남아 있고, 다만 누구든 그럴듯하게 타당하게 보이는 근거로 단지 각자의 주장이 제시되는 선에서 헤겔 철학을 논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종종 헤겔 철학의 핵심 개념인 변증법에 관한 논의를 회피한 채 어떤 하나의 해석만이 올바르다든가, 문자적 이해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이것은 헤겔 철학이 지니는 사유의 역동성과 역사성보다는 헤겔 철학을 개념의 논리로만 만들고 더욱 추상적으로 만드는 결과가 되었다. 더 나아가 헤겔 철학에 대한 핵심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논의하기보다 특정한 개념의 의미를 놓고 각자의 관점만을 관철하려는 틀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하는 양상은 헤겔 철학에 관한 각자의 이해방식이 빈약하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헤겔은 철학의 첫 번째 조건을 거론하면서 진리에 대한 용기와 인간 정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강조했다. 우주의 본질이 인간 정신 앞에서 열리고, 우주의 풍부함과 깊이가 인간 정신 앞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는 헤겔의 말은 다소 과장되기는 했지만,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는 한다. 어쩌면 헤겔의 이 말은 많은 사람에게 인간 정신의 위대함과 위력을 한껏 보여줌과 동시에 인간 정신을 스스로 최고의 가치라고 여길 만한 것이라 해도 괜찮다는 뜻에서 영감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반대로 부정적으로 보면, 과연 그런 것이 인간 정신에 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헤겔 철학에 대한 격렬한 비판은 바로 이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어서 심지어 헤겔 철학을 붕괴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비판이 과연 정당한지에 대한 문제는 헤겔 철학 내부에 한정해서 다루어져서는 안 되고, 오히려 헤겔 철학이 외연으로 확장될 때 비로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그와 같은 비판이 때론 헤겔 철학에 대한 오해의 산물일 수도 있을 것이다. 헤겔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첩경은 사실상 없다. 그 첩경이 어딘지를 우리가 우선 찾기보다는 헤겔 철학의 근본문제가 무엇인지에 관한 근본적 천착(穿鑿)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섣부른 얕은 지식으로 헤겔 철학을 좀 공부했다고 떠드는 자들은 이러한 근본적 문제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외면하고 뒤로 숨기 마련이다. 또 헤겔 철학에 대한 특정한 철학자의 관점이 마치 헤겔 철학 전체에 관한 이해라도 되듯이 말하는 자들도 마찬가지로 스스로 밑천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더 나아가 특정한 철학을 위한 우회로로 헤겔 철학에 접근하려는 자들도 헤겔 철학에 대한 진지한 숙고보다는 축소된 방식으로 헤겔 철학을 이해하려는 수준에 그친다. 그들은 모두 과연 헤겔 철학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알지 못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다. 심지어 일반론 수준에서 그저 그렇게 헤겔이 얘기했다는 정도가 전부일 뿐이다. 헤겔 철학은 여전히 땅속 깊이 묻혀 있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헤겔 철학의 비밀을 우리가 완전히 풀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그 가능성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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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5
  • 하마스-이스라엘 전쟁 여론, 소위 보수우파에 대한 비판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의 네이버 댓글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 해서 인종청소 해야한다는 등의 댓글들이 주류를 이루는 것을 보고 그 저열한 수준에 참담함을 느끼고 페이스북을 본 찰나, 어느 보수 우파가 "빨갱이 척결" 하자고 하는 글을 보게 되었다. 순간 궁금했다. 사전 "척결" 이라는 단어를 보면 "나쁜 부분이나 요소들을 깨끗이 없애 버림" 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단어가 사람에게, 다수의 민중에게 항한다는 것은 굉장히 무서운 말이다. 왜냐하면 학살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말 자체가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 그걸 인식하고 있기나 한건지 단순하게 실험해보기로 했다. 빨갱이 척결, 우선 기준이 어디까지인지, 구체적인 설명은 하지 않았다. 아주 단순하게 토론해 보았다. 소위 보수우파가 말하는 좌파의 기준. 이재명을 지지했던 49%, 저들이 아무나 프레임 씌우기 좋아하는 위장 우파 21%, 합쳐서 70%는 척결,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하니 이 보수 우파는 몸을 사리기 시작한다. 너무 과격하고 위험한 주장이라는 것이다. 아니, 당신 논리에 의하면 빨갱이 척결해야 한다면서요? 그러자 좌익의 핵심을 처리하자는 것으로 말을 바꾸며 몸을 사린다. 그래서 척결이라는 말 함부로 쓰는게 아니다. 직접 실행할 힘도 없이 입으로만 주장하고 막상 실행하라 하니 몸을 사리는게 비겁하다. 척결이라는 단어 자체가 얼마나 위험한지 경각심을 세워주려 했지만 아무리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그 개념이 획일화 되어 있어 본질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지만 과거 독립운동을 하던 시기에 공산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은 헐벗고 굶주린 사람이 주축이라는 착각을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민족주의를 이끌고 조선인들이 선생님으로 추앙하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많았다. 즉 못 배운 자들보다 잘 배운 지식인 엘리트 계층들이 실제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들을 주도했다. 그 이유는 헐벗고 굶주리고 수탈당하는 사람들을 보니 그에 대한 안타까움과 수탈하는 측에 대한 비분강개(悲憤慷慨)가 겹쳐서 생긴 발상이었다. 특히 그런 지식인들 대부분이 비주류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주류에 들어갈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열등감도 함께 섞여 있었다. 요즘 MZ 세대의 언어로 보자면, 인싸(인사이드) 지식인이 아니라 아싸(아웃사이드) 지식인들이 아싸를 벗어나기 위해 자신들만의 신세계 구현을 원했고 그런 자들에게 있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사상만한 이데올로기는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두 사상은 획일화 되어 있는데다 자신들이 갖고 있던 이론들을 대입하면 단순해지기도 하는 마법까지 부릴 수 있었다. 그러니 헐벗고 굶주리며 현실 세계에 대한 절망과 착취만 해대는 지도층에 대한 반발심으로 뭉쳐 있는 일반 백성들에게 공산주의에 경도된 지식인들의 이론들을 단순화하게 도식화하여 알려주면 스펀치처럼 빠르게 흡수되는 효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가난한 지역과 빈부격차가 심각한 개발도상국들이 쉽게 공산화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기도 하다. 그래서 이를 근거로 그냥 단순하게 토론에 나섰더니만 그냥 실제 좌파 척결은 말 뿐이고 몸을 사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사회가 우파 중심으로 바뀌길 원하고 있지만 본인들은 직접 움직이길 싫어한다는 것이다. 빨갱이 척결을 주장하지만 누군가가 대신 해주길 원하고 있다. 척결이라는 거친 단어, 그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직접적으로 인지를 못하니 생각없이 마구 쏟아내는 것이다. 즉 과격하게 말은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게다가 또 그런 행동으로 옮기자는 말은 경계까지 한다. 이번 실험을 통해 또 확인한게 하나 더 있다. 보수 우파 할배들이 지독히 이중적인 것도 있지만 소위 "빨갱이 척결"에 대한 구체적인 플렌도 없다는 것이다. 대상도 문재인과 이재명, 민주당을 제외하면 모호하고 어떻게 척결할 것이며 척결하고 나면 저들이 주장하는 보수프레임의 우파가 얼마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척결 이후의 지향점 등등 모두 모호하다는 것이다. 보수의 성지(聖地)인 영국의 예를 든다면 보수연합당(Conservative and Unionist Party)은 800년의 유구한 전통을 갖고 있다. 그 보수적 행동과 가치의 명제는 원칙(Principle), 책임(Responsibility), 명예(Honour)이다. 보수나 진보가 가지는 프라이드와 가치는 이념 정치, 사상 정치의 핵심이자 품격이다. 무작정 "빨갱이 척결"을 외쳐대는 자칭 보수우파들, 실행 능력도 없고 플렌도 없고 그냥 입으로만 외쳐대는 자들에게서 대한민국의 보수주의는 무슨 품격과 희망이 있을까? 클레식한 보수주의를 꿈꾸는 필자인데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보면 참으로 암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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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8-28
  • 대항해시대의 서막, 콜럼부스와 아메리카 고추로드(Chili Pepper Road)
    이탈리아 제노바 공화국 출신의 콜럼부스는 폴란드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관련 책을 읽고 그에 흥미를 갖게 되었으며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접하고 언젠가는 인도를 가고자 하는 목적과 목표를 정하게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지중해의 선원으로 활동한 그는 해적과 포르투갈 대서양 연안에서 만나 전투를 벌였지만 배가 난파되었는데 그 배가 지브롤터 해협에 이르렀고 포르투갈에 의해 구조되어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콜럼부스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근거하여 대서양을 횡단해 서쪽으로 나아가다 보면 인도에 이를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콜럼부스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지구 둘레 값인 에라토스테네스의 계산결과를 사용하지 않았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시에네(현재의 아스완)에서 하지에 태양빛이 우물의 바닥까지 닿는다는 것을 전해 듣고, 즉 해가 가장 높이 떴을 때의 고도가 90도가 된다는 것을 파악하여 지구 둘레의 값을 46,250km로 구했다. 그러나 콜럼부스는 9세기 압바스 왕조의 천문학자 알프라가누스의 측정치를 사용했다. 이 과정에서 아랍 마일로 적혀있던 알프라가누스의 계산 결과를 로마 마일로 이해한 콜럼부스는 지구의 둘레를 실제의 3/4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거기에다 당시 유럽에는 아시아의 정확한 크기를 측정한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의 위치를 실제보다 14,000km 이상 가깝다고 보았다. 그러한 이유가 있다. 에라토스테네스의 측정치는 굉장히 멀게 느껴졌고 알프라가누스의 아랍 마일로는 실제로 에라토스테네스의 측정치보다 더 멀리 나가는데 이를 이해하지 못한 콜럼부스가 에라토스테네스가 측정한 마일로 알프라가누스의 측정치를 이해했기 때문에 벌어진 오판이었다. 이러한 오판이 유럽 대륙에 아메리카라는 대륙이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된 셈이다. 1484년 포르투갈의 왕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항해 탐험을 제안하고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희망봉 루트를 준비 중이던 왕이 허락하지 않아 스페인으로 갔고 기사와 제독 작위, 발견한 땅을 다스리는 총독의 지위와 그로 인해 얻은 총 수익의 10분의 1을 자신에게 줄것을 요구하자 처음에는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이사벨라 여왕에게 스페인의 성직자들이 포르투갈 교회에 대한 경쟁 의식으로 더 넓은 선교지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여왕을 설득했고 여왕은 마침내 콜럼부스의 항해를 승인하게 된다. 콜럼부스는 해군제독이 되었고 그가 발견하는 것의 10퍼센트(%)를 콜럼버스의 소유로 한다는 조건 하에 핀타 호와 니나 호를 내주었으며 팔로스(Palos)에 사는 핀손이라는 선장이 자기 소유의 선박인 산타 마리아 호를 내주면서 총 3척이 1492년 8월에 출항하게 된다. 인도에 이르는 서쪽 항로 개척에 나섰던 콜럼부스가 육지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곳이 인도 어딘가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다. 인도에 도착하면 발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웅장한 도시나 왕궁이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땅을 서인도 제도라 부르고 그곳 원주민들을 인디언이라 불렀다. 그 이유는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 묘사한 동양인, 즉 인도인의 이미지가 인디언과 매우 유사했기 때문이다. 물론 인디언들이 아주 오래 전, 아시아에서 건너온 황인종이기 때문에 아메리카를 처음 찾은 콜럼부스에게 있어 원주민들을 인도인이라 인식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리고 콜럼부스는 두 번째 항해 때 서인도 제도의 아이티에서 매운 맛이 나는 새로운 향신료, 고추를 발견하게 된다. 고추는 자신이 일고 있는 후추와는 전혀 다른 향신료였지만 콜럼부스는 이에 개의치 않았고 스페인으로 귀항할 때 상당한 양의 고추를 실어갔다. 이로써 스페인에서 고추는 그간 인식되었던 스페인 음식에 대한 이미지를 획기적으로 바꿈과 동시에 고추를 양념으로 하여 만든 여러 매운 음식들이 스페인의 주요 음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아메리카산 고추는 스페인-포르투갈의 통합왕국이 결성되면서 이들의 동쪽 식민지들을 따라 전파되어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 너머까지 건너갔다. 고추는 50년 만에 전 세계로 퍼져 지역 요리, 특히 아프리카, 동아시아, 남아시아 요리와 빠르게 결합했다. 고추는 콜럼부스 아메리카 발견 및 항해가 가져다 주었던 가장 중요하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인류의 해택 가운데 하나임은 분명하다. 아시아의 후추는 종이 하나로 인식되지만 고추는 캅시쿰(Capsicum)이라는 가지과 속 아래에 다양한 종들이 분포하고 있다. 고추의 원산지는 열대 아메리카로 인류는 9000년전부터 고추를 사용해 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고추와 같은 종에는 벨페퍼(Bell paper), 스위트 페퍼(Sweet paper), 피멘토(Pimento), 바나나 페퍼(Banana papper), 파프리카(Paprika), 카옌 페퍼(Cayenne pepper) 등이 있다. 타바스코 페퍼(Tabasco pepper)는 캅시쿰 프루테스켄스(Capsicum frutescens, 목질의 다년생)의 변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고추는 색깔, 크기, 모양이 다양하지만 고추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매운맛의 원인은 캡사이신(Capsaicin)이라는 물질로 나타나고 있다. 캡사이신의 화학식은 C18H27O3N이며 구조식은 피페린과 유사한 형태를 띄고 있다. 캡사이신과 피페린 모두 산소와 이중결합을 이루고 있는 탄소, 그리고 그 옆에 질소가 있으며 탄소로 이루어진 방향성 고리 하나를 갖고 있다. 우리가 느끼는 맵다는 감각은 분자의 형태에 기인하는 것에 이루어지고 있다면 캡사이신과 피페린이 모두 매운맛을 향유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분자 형태론이 일치하고 있는 세 번째 매운분자는 생강의 뿌리 줄기에서 볼 수 있는 진제론(Zingerone, C11H14O)에서 형성되고 있다. 진제론 분자는 피페린이나 캡사이신보다 작은 입자를 띄고 있지만 그 역시 매운 방향성 고리를 갖고 있다 진제론도 캡사이신처럼 HO와 H3C-O를 갖고 있지만 질소 원자는 없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다만 파프리카의 경우, 상대적으로 캡사이신 물질이 덜 함유되어 있어 굴라시와 같은 쇠고기와 야채로 만든 스튜에 이용되어 유럽에 정착되었다. 다만 고추는 유럽음식에 잘 융화되지 못했다. 유럽에서는 매운맛을 내는 분자로 후추의 피페린이 완전히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이 남인도 지방의 캘리컷을 지배하면서 후추와 고추의 교환 무역이 이루어진다. 이 지역들은 약 150년간 포르투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는데 인도의 그 매운 고추가 정착에 성공한 것도 이 시기부터이다. 그리고 17세기 초에 이르자 네덜란드와 영국이 포르투갈의 고추 무역을 넘겨 받았다. 암스테르담과 런던은 아메리카에서 나온 고추가 아시아로 유통되는 주요 무역항이 되었다. 1600년, 동인도 향료 무역에서 영국의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영국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 동인도 회사의 원래 이름인 동인도 제도 무역 잉글랜드-웨식스 상인 조합이 런던에 설치한 런던 상인 조합이었다. 인도로 가는 함선에 고추를 가득 싣고 후추와 교환하여 싣고 돌아오는 항해에 있어 자금을 대는 일은 위험 부담이 컸기 때문에 상인들은 자신들이 입게 될지도 모를 손실 규모를 줄이기 위해 항해에 대한 몫을 따로 요구했다. 물론 이런 관행은 주식을 사는 것으로 발전되어 현대 자본주의의 시초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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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23
  • 제4차 십자군 전쟁과 베네치아 공국의 동지중해 지배 시대 이야기
    제4차 성지 탈환을 목적으로 한 십자군은 1198년 8월 15일 교황 인노첸시오 3세(Inochensio III)가 십자군을 촉구하는 칙령을 반포하며 시작되었다. 4차 십자군은 무슬림 치하에 놓인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시작되었으나 1204년 4월 13일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정교회 국가인 비잔틴 제국을 붕괴시키는 뜻밖의 결과와 함께 종결되었다. 제4차 십자군의 원정 결과, 콘스탄티노플 일대의 비잔틴 제국의 옛 영토에는 라틴 제국이 건설되었고 십자군의 일원인 베네치아도 여러 거점을 확보하였다. 십자군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지역에서는 망명 정부 역할을 한 니케아 제국, 트라페준타 제국, 이피로스 전제 군주 왕국 등이 들어서면서 비잔틴 제국은 분열되었다. 이들 중 니케아 제국이 다른 세력들을 물리치고 60여 년 만인 1261년 콘스탄티노플을 다시 수복하며 비잔틴 제국이 재건되었다. 국내 세계사 교육과정에서는 베네치아 상인의 농간으로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고 괴뢰 국가 라틴 제국이 성립됐다고 축약된 내용만 등장하고 있다. 한 때 레반트 해안 일대를 장악하고 다마스쿠스, 이집트 등을 위협하던 예루살렘 왕국의 상황은 비참했다. 영토는 아크레(Akre) 등의 해안지대로 줄어들어 이슬람의 바다 속에 고립된 상황이었고, 트리폴리 백국과 안티오키아 공국의 상황도 마찬가지여서 본거지와 그 주변만을 보전하고 있었다. 마누일 1세 시절 혼인 동맹 등으로 이끌어낸 비잔틴 제국의 지원도 어렵게 날아가 버렸고 비잔틴 제국의 상황도 악화되면서 더 이상 지원을 받기는 어려웠다. 결국, 얼마 전 제3차 십자군 원정이라는 대규모 지원이 있었음에도 다시 서유럽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제3차 십자군 원정 당시 프리드리히 1세와 갈등을 벌이던 이사키오스 2세의 실정을 보다 못해 동생을 끌어내리고 제위에 오른 알렉시오스 3세가 황제였으나, 이미 안드로니코스 1세(Andronicos I)의 찬탈과 이사키오스 2세(Isacios II)의 등극으로 내부 상황은 물론 외교까지 파탄 난 상황이었다. 알렉시오스 3세가 필사적으로 수습한 끝에 제국은 간신히 안정되어 가고 있었으나, 이미 하인리히 6세의 협박에 굴할 정도로 국방력이 파괴된 제국은 십자군의 결성을 지켜보며 그저 자신들이 마지막까지 보전하고 있던 부(富)와 작아진 영토에 큰 분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처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베네치아-비잔틴 제국의 무역 전쟁과 라틴 인 학살로 인해 서방에서 비잔틴 제국의 이미지는 악화될 대로 악화되어 있었고, 서방 인들은 비잔틴 제국을 불신하며 언제든지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198년 1월 37세의 젊은 나이로 교황의 자리에 오른 인노첸시오 3세는 야심이 많은 사제였다. 전임 교황인 첼레스티노 3세(Chelestino III)는 막강한 하인리히 6세에게 힘겨운 임기를 보냈으나, 인노첸시오 3세에게는 시칠리아 왕국의 왕이 된 3세의 어린 프리드리히 2세의 섭정이 되는 등 행운이 따라 주었다. 하인리히 6세의 동생인 로마의 왕 슈바벤의 필립은 이탈리아 전역을 다시 확보하고 싶었지만, 방금 제위에 오른 데다 대관식을 치르지도 못했고, 그 대관식을 치러줄 교황이 시칠리아 왕국을 배경을 삼고 있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과 기독교의 권위를 높이고 주변 군주들의 주의를 돌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명예도 높일 기회가 찾아왔다. 빈사 상태의 예루살렘 왕국이 성지 회복을 외치며 원조를 요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지 회복은 전임 교황이 이루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야심이 많은 교황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비추어졌다. 제3차 십자군 원정 당시 프리드리히 1세는 대군을 이끌고 원정에 나섰으나, 본인의 죽음으로 인해 원정이 종결되었다. 그 뒤를 승계한 장남 하인리히 6세는 아버지가 확보하지 못했던 상징적인 땅, 이탈리아를 확보하여 진정한 로마 제국으로서 유럽 세계를 주도하고자 했고 실제로 군사력을 통해 시칠리아 왕국을 붕괴시키고 황후를 시칠리아 왕국의 계승자로 만듦으로 인해 이를 실현하였다. 이에 야심 많은 황제는 동쪽으로 목표를 설정해 자신의 동생과 비잔틴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3세의 질녀인 이리니 앙겔리나(Irina Angelina)와 결혼시켰으며, 십자군 원정을 위한 군비라며 비잔틴 제국에 조공을 요구하는 등 노골적으로 야심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1197년 32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는 불과 3세에 불과하여 그의 후계자 선출을 두고 제국은 혼란에 빠졌다. 당시 슈바벤의 필립이 후계자로 선출되었으나 그에 대한 타협책으로 선출된 그의 황권은 미약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살아 있었고, 벨프(Velf) 가문의 오토 4세(Otto IV) 또한 반 호엔슈타우펜 제후들, 교황,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가 등의 지지를 바탕으로 강력하게 제위를 노리고 있었다. 이렇게 제국 내부가 혼란스러워지자 십자군 원정은 부차적인 문제가 되어버렸다. 두 왕국은 제3차 십자군 원정 때의 주요한 참가국이었으나, 이번에는 참가할 형편이 못 되었다. 당시 잉글랜드는 프랑스 서부 일대에 프랑스 왕보다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명목상의 상위 군주인 프랑스 왕들은 이를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특히 냉철한 현실주의자인 필리프 2세는 주변의 백안시에도 불구하고 제3차 십자군 원정 도중에 귀국, 아직 원정 중이던 리처드 1세와 왕세제인 존 사이의 알력을 이용하여 이득을 취하고자 하였다. 한 때 리처드 1세가 살라딘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서둘러 귀국하여 계획이 무산되는 듯하였으나, 1199년 리처드가 어이없게 사망하여 존 왕이 왕위에 오르자 이를 기회로 삼아 1202년부터 전쟁을 벌여 프랑스 내의 영국 영토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제4차 십자군 원정의 준비 기간은 1198~1202년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양국의 왕들은 원정 참여가 불가능했다. 베네치아는 당시 막강한 부와 강력한 해군력을 갖춘 강대국이었다. 바실리오스 2세, 알렉시오스 1세 등 비잔틴 제국의 황제들에게 해군력을 지원해준 대가로 통상 특혜를 부여 받은 베네치아는 지중해 무역으로 엄청난 이윤을 창출할 수 있었고, 한 때 상업 공화국으로서 독보적인 지위를 구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베네치아의 지위는 흔들리고 있었다. 제노바, 피사, 아말피, 리보르노, 안코나 등 경쟁자들이 십자군 전쟁을 발판으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비잔틴 측과 차례로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 주요한 항로와 거점, 상품 등을 장악한 비잔틴 제국과의 관계도 문제였다. 막강한 부와 해군력을 가진 베네치아는 요안니스 2세의 치세에 해군력으로 비잔틴 측을 곤란하게 했었으나 상업 활동 간의 갈등으로 촉발된 1171~1172년간의 해전에서는 재건된 비잔틴 제국의 해군에게 패퇴당했다. 이후 1185~1186년에 해군력을 지원하는 대가로 다시 통상 조약을 체결하면서 상업 활동을 지속하고 투자도 재개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으나, 내심 자신들의 생명선인 상업 활동을 좌우할 수 있는 제국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베네치아는 태생이 해운 도시 국가였기 때문에 타국에 대해 해군력과 자금력 이 외의 강제력을 가지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국력의 근간인 상업 이익을 도모할 수만 있다면 누구든 크게 적대하지 않고 그 사이에서 조율하는 태도를 십자군 전쟁 시기동안 취했다. 그로 인해 베네치아 측은 1198년 교황이 4차 십자군 원정을 위한 동원을 명령할 때 같은 해, 비잔틴 제국 측과 통상 조약 갱신을 알렉시오스 3세의 금인칙서를 통해 확인한 상황이었다. 동시에 서유럽 영주들의 십자군의 수송을 1201년에 받아들였고 이집트를 목적지로 1202년 6월 24일경에 출발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면서 1202년 막 술탄의 자리에 오른 이집트 아유브 왕조의 알 아딜(Al-Adill)과 통상 조약을 맺었다. 이는 상업적인 이득을 위해서 양쪽을 조율하든 그 이상이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손님이 빚쟁이가 되자, 이후 베네치아는 우선 기선을 제압하게 된다. 1198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성지 회복을 외치며 조서를 발하였다. 그러나 유럽 군주들의 상황이 원정을 떠날 상황이 아니었고, 가장 열성적으로 많은 것을 투자한 리처드 1세 등 2, 3차 원정 참가자들의 결과가 그다지 좋지 않았기에 반응은 차가웠다. 교회가 명령하는 대로 공격에 나서 봤자 돈과 인력을 소모시키면서 이득도 얻지 못할 것인데 굳이 갈 이유는 없다. 그러나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들은 꾸준히 선동했고, 결국 프랑스계의 기사와 영주들이 주축이 되어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게 되었다. 상파뉴, 블루아, 아미앵, 플랑드르, 부르고뉴 등 프랑스 동북부 계통이 주축이 되었고, 추가로 몬페라토 변경백 보니파시오가 신임 사령관이 되면서 몬테라토도 합류하게 되었다. 기사 4,500명, 종자 9,000명, 보병 2만 등 약 33,500명의 대병력이 모일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교황은 이에 기뻐하며 대사, 은사 등을 약속하였다. 십자군 인사들의 회의를 통해, 목표는 아유브 왕조의 근거지인 이집트가 되었다. 성지 회복을 최우선 목표로 정하였으나 성지를 회복하더라도 가까운 이집트에 적의 근거지를 둔다면 유지하기 힘들 것으로 보였고, 또한 부유한 이집트는 많은 전리품을 약속할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우선 제4차 십자군의 이동 경로로는 해로가 채택되었다. 이전까지의 원정을 돌이켜 봤을 때 육로원정은 각종 위험과 원정로 상의 현지 세력과의 갈등을 야기한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해로가 상대적으로 안전해 보였다. 이와 같이 과거의 십자군 규모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나름의 학습을 통해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원정이 계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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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23
  • 베네치아 공국의 형성과 역사에 관한 이야기
    베네치아 공국의 역사는 5세기 고트족과 훈족 등 여러 이민족들의 약탈을 피해 파두아(Padua), 아퀼레이아(Aqileia), 콘코르디아(Concordia), 트레비소(Trebiso), 알티노(Altino) 등지에서 온 고대 로마 출신 난민들이 베네치아 석호의 섬들로 모이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초기 정착민들의 흔적은 이들의 정착과 함께 건설된 산 쟈코모(San Giacomo) 성당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원래 이 섬에 영구히 정착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섬 전체가 습지대였기 때문에 주거 환경이 열악했다. 따라서 지대가 물러 제대로 된 건물을 지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고트족이 떠날 때까지 몇 년 만 머물 임시적인 곳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고트족은 서로마를 멸망시키고 이탈리아에 완전히 정착해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제 로마의 피난민들은 어쩔 수 없이 기한 없이 머물만한 영구 정착지를 늪지대 위에 건설해야 했다. 그들이 생각한 방법은 말랑한 토층 아래 단단한 층까지 닿는 긴 말뚝을 수직으로 섬 전체에 촘촘히 박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 엄청난 육체적인 노동을 통해 말뚝을 박고 그 위에 석판을 깔아 비로소 건물을 지어 올릴 지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6세기 비잔틴 제국이 이탈리아 일대를 수복했을 때는 라벤나 총독부를 두어 통치했는데, 베네치아와 라벤나는 해로로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베네치아는 자치적으로 운영되며 독자적으로 성장해 나갔다. 이 때 랑고바르드 족을 피해 온 난민들이 오랜 기간 동안 더욱 유입되었다. 최초의 중앙 상임 통치 위원회(Tribuni maiores)는 568년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말라모코(Malamoco)와 토르첼로(Torchelo) 등 새로운 항구들이 여러 곳 건설되었고, 말라모코는 점차 이 지역 중심지가 되어갔다. 7세기경에는 각 항구들의 규모가 발전해 자신들의 지도자를 선출하고 비잔틴 제국의 황제에게 자치를 인정받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697년에 최초의 베네치아 도제가 선출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최초의 베네치아 도제인 파올로 루치오 아나페스토 (Paolo Lucio Anafesto, 697~717)와 라벤나 총독 파울로스(Paulos)는 동일 인물이었고, 선출의 형식은 따랐지만 실제로는 아직 자치권을 인정받은 단계는 아니라는 추측이 있다. 그의 후임자는 본래 그 휘하 총사령관이었던 마르첼로 테갈리아노(Marcello Tegalliano)였다. 그러나 726년 성상 파괴령을 둘러싸고 동서 교회 간의 논쟁이 일어나자 그레고리오 2세(Gregorio II)의 촉구에 반응하여 총독의 관할 지역 군인들과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총독을 살해했고, 그들 스스로 지도자를 선출하기로 한다. 처음으로 주민들에 의해 선출된 도제는 우르수스(Ursus, 726~737)였다. 그는 레온 3세(Leon III)의 라벤나 정복을 지지해 그에게 군사들과 각종 선박을 지원했다. 이에 따라 교황은 베네치아에 각종 특권을 내려주고, 우르수스를 공식적으로 지도자로 인정하면서 히파투스(Hifatus)라는 칭호까지 내리게 된다. 751년경 랑고바르드 족은 결국 비잔틴 제국의 라벤나 총독부를 붕괴시켰지만 베네치아 석호 지역은 남겨두고 있었다. 베네치아 석호 지역은 자치적으로 운영되고는 있었으나, 여전히 공식적으로는 비잔틴 제국 령이었고, 주민들이 지도자로 선출하는 직위도 공식적으로는 비잔틴 제국 황제가 임명한 총독이었다. 이 때 총독은 말라모코 섬에 주재하고 있었으며 현재 베네치아로 알려진 리알토(Rialto) 지역은 그저 작은 섬에 불과했다. 랑고바르드 족이 이탈리아 본토를 정복하고 다니면서 이 지역으로 유입되는 난민들은 점점 더 늘어났다. 이어 775년경에는 주교직이 신설되기에 이른다. 한편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는 비잔틴 제국과의 세력 정쟁의 일환으로 지금까지 그 어떤 민족, 그 어떤 나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던 이 베네치아 석호 지대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는 아들 피핀 카를로만을 시켜 배를 건조해 베네치아 지역을 정복하는 일을 전담하도록 한다. 805년 베네치아 내부의 파벌 정쟁 및 인접 도시 그라도(Grado)와의 전쟁으로 인해 베네치아는 카롤루스에게 자신들을 보호령으로 삼아 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피핀이 베네치아를 장악하자 비잔틴 제국은 함대를 파견해 피핀을 몰아내고 베네치아를 수복하였다. 피핀은 이를 다시 수복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807년 비잔틴 제국과 임시 휴전 조약을 맺었다. 카롤루스대제에게 사신을 보낸 주모자들은 베네치아에 의해 비잔틴 제국에 넘겨졌고 이어 추방당했다. 810년 피핀은 코마키오(Comacio)의 선박을 빌려 베네치아를 공격했다. 당시 중심지였던 말라모코는 아드리아 해에 면하고 있어 방어에 취약했다. 결국 베네치아 인들은 말라모코를 버리고 리알토로 옮겨갔다. 프랑크 군은 비어있는 말라모코를 점령해 약탈하고 불태운 다음 베네치아 군을 추적했으나 리알토 군도는 계속 저항했고 물길을 잘 아는 베네치아인과 달리 프랑크 군은 얕은 석호 지대의 물길에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일부 선단이 좌초하고 만다. 그에 따라 시간이 점점 끌리며 케팔리니아(Kepalinia) 총독 파울루스가 지휘하는 비잔틴 제국 함대가 반격하자 피핀은 철수했지만 역병에 걸려 사망하게 된다. 812년 새로운 적인 제1 불가리아 제국을 견제해야 했던 비잔틴 제국은 아들과 군사를 잃은 카롤루스 대제 사이에 강화 조약이 체결되는데, 베네치아 공화국은 비잔틴 제국의 속국으로 남고, 아드리아 해 일대 교역권을 인정받는 대신 카롤루스는 비잔틴 제국에게 제위를 인정받고 동맹을 채결했다. 그리고 도제 아녤로 파르티차코(Agnello Participazio, 811~827)는 도제의 주재지를 현재 베네치아 위치인 리알토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이곳에 최초의 두칼레(Ducale) 궁과 산 마르코(San Marco) 성당을 건설했다. 이렇듯이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각종 게르만 이주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카롤루스 대제의 정복을 거쳐 신성로마제국 소속이었다가 중세 성기(High Middle Ages 11세기~13세기) 이후 하나 둘씩 정치적으로 독립하기 시작했던 다른 북이탈리아 도시 국가들과 달리, 베네치아는 애초에 로마 제국 자체의 시설과 정통성을 비교적 잘 보존한 자치 공화국으로 시작했다. 베네치아 공국은 북이탈리아의 대다수 지역들과는 달리 프랑크 제국, 신성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적이 전혀 없다. 이와 같은 독자적인 역사적 기원은 먼 훗날 중세의 전성기를 거쳐 근세 시대의 역사적 시련과 위기에도 베네치아 공화국이 열강들 사이에서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이념적 원천이 되었다. 오르소 이파토의 아들인 테오다토 이파토(Teodato Ipato)는 근거지를 에라클레아에서 말라모코로 옮겼다. 테오다토 이파토의 도제 계승은 세습 왕조를 세우려는 오르소 이파토의 의도에 따른 것이며, 베네치아 초기 역사 중 여러 명의 도제는 세습을 시도하였으나 결국에는 실패했다. 테오다토 이파토의 치세 중 베네치아는 북부 이탈리아에 유일하게 남은 비잔틴 제국 령이 되었으며, 당시 프랑크 왕국 내에서 벌어진 카롤링거 왕조 개창 등 변화하는 정치체제는 베네치아 정치 구도를 변화시켰다. 우선 확고한 친(親) 비잔틴 세력이 있었으며, 다음으로는 실질적으로 독립하고자 하는 공화주의자들이 있었다. 이 외 주요한 파벌로는 친(親) 프랑크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당시 카롤링거 왕조의 왕인 피핀 3세를 랑고바르드 족으로부터의 최고의 보호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이는 당시 교황의 피핀 3세에 대한 지지와 맞물려 주로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상대적으로 소수파였던 친(親) 랑고바르드 세력은 멀리 떨어진 비잔틴 제국 및 프랑크 제국과의 연합을 반대하고, 바다 쪽을 제외하고는 베네치아를 완전히 둘러싸고 있던 랑고바르드 왕국과의 평화 유지에 관심을 두었다. 테오다토 이파토는 암살당했으나, 그의 자리를 찬탈한 갈라 가울로(Gala Gaulo) 역시 1년 안에 그의 정적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 후임인 도메니코 모네가리오(Domenico Monegario)가 통치하는 기간 동안 베네치아는 어촌에서 무역항 및 교역 중심지로 탈바꿈했다. 이 당시 조선 산업 역시 크게 발전하였으며, 아드리아 해의 지배권을 위한 초석 역시 이 때 놓였다. 또한 이 때 최초로 호민관제가 도입되었으며, 매년 두 명의 신임 호민관이 선출되어 도제를 감시하고 권력 남용을 방지하였다. 친(親) 랑고바르드 파였던 모네가리오는 764년 축출되었으며, 에라클레아 출신의 친(親) 비잔틴 파인 마우리치오 갈바이오(Maurizio Galbaio, 764~787)가 뒤를 승계했다. 갈바이오는 긴 치세 기간 동안 베네치아를 지역적 뿐만 아니라 국제적 번영의 도상에 올렸으며, 한편으로는 세습 왕조를 세우기 위해 가장 집요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이 때 베네치아는 리알토 지역까지 확장되었다. 후임은 아들인 지오반니 갈바이오(Giovanni Galbaio, 787~804)이며, 부친과 마찬가지로 긴 치세 동안 그는 노예무역을 두고 카롤루스 대제와 충돌하였으며 교회와 대립하였다. 세습 왕조를 건국하고자 했던 야심은 804년 친(親) 프랑크 파가 오벨레리오 델리안토네리(Obelerio degli Antenori, 804~811)의 치하에서 권력을 쟁취했고 세습왕조의 계획은 분쇄되었다. 오벨레리오는 베네치아를 카롤링거 왕조의 영향권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그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여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인 피피노 카를로만의 도움을 요청함으로써 시민들의 분노를 샀으며, 810년 피핀이 베네치아를 포위했을 때 가족과 함께 도시를 떠나야 했다. 피핀은 6개월 동안 베네치아를 포위했으나, 늪지에서 발생한 역병의 창궐 등으로 인하여 결국 철수해야 했다. 피핀 자신도 여기에서 얻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병으로 인하여 몇 개월 후 사망하였다. 베네치아는 이 때의 승리로 쟁취한 독립을 이후 유지하였으며, 이는 후에 카롤루스 대제와 비잔틴 제국의 황제 니케포루스 1세(Nikeporus I) 간에 맺은 협정에서 추인되었다. 이 협정은 베네치아를 비잔틴 제국의 영토로 인정하였으며, 또한 ”다섯 도시”, 카롤루스 대제가 교황에게 베네치아 인을 축출하라고 했던 안코나(Ancona), 파노(Pano), 페사로(Pesaro), 리미니(Limini), 시니갈리아(Sinigalia)를 포함하여 아드리아 해에서 베네치아의 교역권을 인정하게 된다. 오벨레리오의 후임은 통합된 베네치아를 물려받았다. 803년 니케포루스 협정에 의거하여 카롤링거 왕조와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베네치아가 명목적으로는 비잔틴 제국의 영토로 남게 되지만 실질적으로 베네치아가 독립국임을 확인하였다. 파르티치파치오(Participazio, 811~836) 가문의 지배 하에서 베네치아는 근대적인 형태를 갖추게 된다. 가문의 첫째 도제였던 안젤로 파르티치파치오(Agnello Participazio, 811~827)는 에라클레아 태생이었으나 리알토 초기 시대의 이주자 중 하나였으며, 그의 치세는 교량, 운하, 방벽, 요새, 석조 건물 등의 건축을 통한 베네치아의 바다로의 확장으로 특징지어진다. 안젤로의 아들인 주스티니아노(Giustiniano)가 도제이던 시기에는 트리부노(Thribuno) 및 루스티코(Rustico) 등 두 명의 상인이 성 마르코의 유해를 알렉산드리아로부터 가져왔으며, 이후 베네치아는 성 마르코를 수호성인으로 삼았다 한다. 조반니 파르티치파치오의 후임인 피에트로 트라도니코(Pietro Tradonico, 800~864) 치하에서 베네치아는 먼 훗날 십자군에 영향을 미치고 수 세기 동안 아드리아 해를 지배할 수 있는 군사력을 키우기 시작하였으며, 신성로마제국의 로타르 1세와 맺은 무역 협정 상 권리는 이후 오토 1세 시절에 확대된다.
    • 칼럼
    • Nova Topos
    2024-08-20
  • 아프간족과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파란만장한 역사
    아프가니스탄의 역사는 5,000년의 긴 역사를 갖고 있다. 고대 스키타이, 사르마트 뿐 아니라 고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가 지배했었고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받으며 헬레니즘 문화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박트리아, 대월지, 파르티아 (안식국)의 지배를 받으며 많은 민족의 쟁패기를 거쳤고 3세기에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지배 하에 들어가 7세기 이슬람 세력에게 정복될 때까지 아프가니스탄은 페르시아 인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7세기 이슬람에게 정복된 후, 돌궐, 투르크족의 영향을 받으면서 이들의 문화를 흡수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아프간족은 단일 종족이 아니라 여러 종족들이 합쳐서 형성된 다수의 집단을 의미한다. 이들 중 주류는 파슈툰족으로 전 아프간족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 외에도 타직인, 타타르-투르크의 혼혈인 하자라인, 우즈벡인, 아미막인, 투르크맨인, 키르기스인, 발루치인, 펀자브인, 파미르계 민족, 브라후이 족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몽골 제국 시대 정착한 몽골 군인들의 직계 후손에 해당하며 현재도 몽골어족 모골어를 사용하는 모골인들도 있다. 이들의 경우 하자라인과 다르게 수니파를 믿으며 아프가니스탄 현지인들과 통혼이 있던 관계로 외양이 하자라인보다는 남아시아계 민족 등과 흡사하다. 본래 아프간이라는 단어는 페르시아어로 파슈툰인을 지칭하는 말인 아프간(افغان)에서 따온 것이다. 그렇기에 아프가니스탄(افغانستان)이라 한다면 페르시아어로 '파슈툰인들의 땅'으로 불리는 것이다. 국경을 이루고 있는 파키스탄에도 전 인구의 15%가 파슈툰인으로 대부분 파슈툰 주(州)에서 거주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 사는 파슈툰인들은 아프간인, 파키스탄인보다는 파슈툰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훨씬 강하다. 이로 인해 양국의 파슈툰인들이 국경선에 서로 개의치 않고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사람과 물자가 왕래하고 있는데, 이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도저히 끝날 수가 없는 현실적인 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국경선 통제를 안해서 생긴 문제이기도 하지만 국경보다는 동족이라는 개념이 우선시 되기 때문에 그러한 아프가니스탄 내전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왕래하며 때로는 협력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탈레반 정권이 카불에서 퇴출되고 나서 탈레반 세력에 속해 있는 파슈툰인들이 파키스탄의 파슈툰인들에게로 도주하여 파키스탄 파슈툰 주에 암약하여 세력을 부활시킬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속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파슈툰인들의 거주 지역이 두 나라로 분열 된 것도 19세기 말 영국이 러시아와의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으로 인해 국경선을 나누게 되면서 벌어진 일이다. 지금의 파키스탄을 포함한 인도 전체를 식민지로 정복한 영국이 아프가니스탄까지 노리고 침공하여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이에 아프가니스탄 영토 일부를 분할하여 인도령으로 통합했고, 이러한 사태가 현재까지 이어졌고 이러한 파슈툰인들의 분노가 미국과 서방 세계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파슈툰인들은 특히 용맹하기로 명성이 높은데, 그 이전부터 이 일대의 전투민족이라고 불릴 정도였으며 당시에 침략하던 강대국들을 모조리 격파한 걸로 유명하다. 특히 이란 사파비 왕조를 격파했고 아시아 3대 최강국 중 하나인 인도 무굴제국의 침입마저 격파했다. 그리고 당시 대영제국으로 유명한 영국도 밀어냈으며 1979년 소련의 침공도 마침내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특히 소련과 전쟁을 벌였던 아프가니스탄의 주력인 무자헤딘의 대다수도 파슈툰인들었으며 그 세월이 지나 무려 40년의 세월이 지난 현재, 마침내 세계 최강인 미국도 몰아내고 있다. 2020년 2월 29일, 도하 협정 체결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주도로 미군 완전 철수가 합의되면서 거의 철수가 완료된 상태이지만 그래도 탈레반의 지독한 투쟁이 결실을 본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결국 최종적으로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탈레반에 항복하였으며 정권 이양에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아프간 정부군이 해산되었지만 공항, 병원 등의 시설들은 그대로 정상 운영된다고 한다.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이 사퇴하여 망명하고 탈레반 과도정부의 수반에는 학자 출신인 알리 아흐마드 잘랄리(علی احمد جلالی) 전 내무장관이 임명될 예정에 있다. 가니는 처형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그와 탈레반 대표단이 포옹하는 사진이 올라왔으며 탈레반은 가니의 망명을 그대로 허가해주었다고 한다. 가니는 타지키스탄으로 망명을 선택했다고 하지만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를 거쳐 최종적으로 오만에 정착한다고 들었다. 결국 아프가니스탄의 미국을 비롯한 다국적군의 활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탈레반이 다시 20년만에 복귀한 셈이 되었다. 사실 탈레반이 이란과 중국, 러시아의 지원을 받았었고 특히 러시아는 계속 하여 신무기가 나오고 있음에 따라 기존의 무기들을 대체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기존의 무기들을 시리아 정부군과 탈레반에게 팔아 적당한 이윤을 남겼다. 결국 중국은 파키스탄에 이어 아프가니스탄에도 일대일로의 사업을 확장하려 할 것이고 러시아 또한 기존의 무기들을 처리함으로 인해 쏠쏠한 이익을 보았다. 결국 미국과 다국적군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는 대 중국-러시아와의 신(新) 냉전 속에서 전략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여겨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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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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