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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종찬 광복회장, 윤석열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주목
    윤석열 대통령의 정치 입문 멘토로 불렸던 이종찬 광복회장이 최근 윤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정치권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종찬 회장은 김형석 신임 독립기념관장을 '친일 뉴라이트 인사'로 비판하며, 윤석열 정부가 ‘1948년 건국론’을 조장한다고 주장해 논란을 일으켰다. 이 회장의 발언 이후 야당도 비슷한 논리를 펴며 협공에 나섰다.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이 회장에게 윤 대통령의 "건국절을 추진한 적도 없고, 추진할 일도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했지만, 갈등은 봉합되지 않았다. 이종찬 회장은 광복회 역사상 처음으로 8·15 광복절 경축식에 불참하며 불만을 표출했다. 윤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이 회장의 행동에 대해 답답함을 토로한 것으로 전해졌다. 윤 대통령과 이종찬 회장은 각별한 관계로 알려져 있다. 윤 대통령은 이 회장을 ‘아버님’이라 부르며 존경해왔고, 이 회장의 아들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윤 대통령의 오랜 친구로 대선 캠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최근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을 둘러싼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긴장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종찬 회장은 김형석 관장 임명을 반대하는 서신을 윤 대통령에게 세 차례나 보냈으나, 윤 대통령이 이를 무시하고 전자결재로 발령을 낸 것에 대해 모욕감을 느꼈다고 밝혔다. 여권 일부에서는 이 회장이 윤 대통령을 여전히 아들 친구로만 보는 것이 갈등의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이 회장과 윤석열 정부 간의 역사적 관점 차이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박민식 전 국가 보훈부 장관 재직 당시에도 백선엽 장군의 친일 관련 기록 삭제와 이승만 기념관 건립 추진에 대해 이 회장은 반대 견해를 명확히 했다. 당시 이 회장은 대통령에게 “이승만 기념관 건립에 관심을 기울여 달라”는 당부받았고, 일시적으로 갈등이 봉합되는 듯 보였으나, 김형석 관장 임명을 계기로 다시 갈등이 표출되었다. 이종찬 회장의 행보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도 있으나, 정치적 성향이 지나치다는 비판도 있다. 대통령실에서는 이번 논란이 이 회장이 추천한 인사가 탈락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 회장은 이에 대해 “역사적 퇴행과 훼손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반대했다”라고 밝혔다.
    • 뉴스
    • 정치
    2024-08-18

칼럼 검색결과

  • 영국 식민지 시절, 파키스탄의 분리와 배경
    1611년 영국 동인도회사는 벵골만의 항구 도시인 마술리파트남(Masulipatnam)에 무역 거점을 세우면서 인도 대륙에 입성한다. 사실 영국 동인도회사가 꼴카타에 가장 먼저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인도 중남부의 벵골만 항구인 마술리파트남(Masulipatnam)에 세워진 것이 공식적인 영국 동인도회사 1호점이라 할 수 있겠다. 이후 영국은 유럽 7년 전쟁(1756~1763)에서 승리함으로 인해 인도 대륙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는데 단순히 유럽에서 벌어진 7년 전쟁이 인도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이유는 무굴제국이 통치하고 있는 인도에서도 프랑스와 영국이 인도의 주도권을 두고 격돌했기 때문이다. 클라이브가 이끄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군대가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무굴제국 연합군에 승리를 거두어 친영국파인 현지인 벵골 태수를 임명하면서 남인도의 프랑스 세력 핵심거점인 퐁디셰리(Pondichéry)를 함락시키면서 프랑스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인도 대륙의 주도권을 쟁취한다. 세포이 항쟁 이후인 1858년에는 영국이 식민지인 인도 제국을 세우면서 영국은 인도를 완전히 식민지화에 성공하게 된다. 이후 인도의 식민 종주국이었던 영국에서 윈스턴 처칠이 퇴임하고, 인도를 비롯한 영국의 해외 식민지와 해외 영토들의 자결권을 주장하던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 1883~1967)가 영국의 총리가 되면서 인도의 독립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독립을 눈앞에 두고 영국의 식민지 지배 아래, 거대한 힌두 세력에 오랜 기간 동안 눌려 있었던 이슬람에 의해 같이 탄압받던 종파들인 자이나-시크교 비무슬림 세력과 무슬림 세력 간의 종교적인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현재는 힌두교가 인도 내의 우세 종교가 되어 시크교를 핍박했고 더불어 두 종교의 관계가 매우 험악하지면서 시크교 분리주의 테러가 많이 발생하고 있는 현실이다. 무굴제국이 존립했던 당시에는 자한기르 황제 시절, 시크교 5대 구루인 아르준(Arjun, 1563~1606)이 힌두교에 대한 탄압 중단을 요청했다가 순교했을 정도로 상호 간의 연대의식을 가졌었다. 아르준의 순교 사건은 시크교의 입장에서 볼 때, 세계에서 유일하게 구루가 다른 종교를 위해 희생했다 주장하고 있다. 한편 이전 국가인 무굴제국의 중심세력인 무슬림 세력들이 인도 내 무슬림 국가 수립을 요구했다. 그 이유는 무굴제국이 무슬림 국가였고 인도 최후의 국가라는 정당성이 있었기 때문에 독립 이후에도 무슬림들이 무굴제국의 기득권을 놓치면 안 된다는 견해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도 내 주민들은 비무슬림 세력들이 대부분이었고 이들이 이와 같은 소수 무슬림 세력들을 억누르고 통제하는 과정에서 인도 대륙 전역에 비무슬림과 무슬림 간의 충돌 및 보복 학살이 발생해 수십만 명이 살해되는 등, 인도는 종교 집단 간의 극심한 갈등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인도 내부의 종교 간 갈등과 유혈 분쟁을 더 이상 통제가 불가능하게 된 영국은 결국 인도 대륙 내 무슬림 국가와 비무슬림 국가로나뉘는, 각기 종교적인 이유로 인한 별개의 독립을 승인한다. 1947년 8월 14일에 이르러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는 인더스 강 유역과 동부 벵골 지역이 파키스탄 자치령으로 독립을 선언한 것을 시작으로 그 다음날인 8월 15일에는 비무슬림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나머지 지역들이 인도 자치령으로 각각 독립을 선언했다. 인도 내에서 이와 같은 종교 갈등에 대해 고민한 마하트마 간디는 통일된 인도의 각 민족 및 종교 간의 화합을 외치며 인도 대륙이 파키스탄과 인도로 갈라지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분열을 봉합하는 데 실패했고, 간디는 1948년 나투람 고드세(Nathuram Godse)라는 인물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그리고 별개로 독립한 파키스탄과 인도는 독립 직후부터 지금까지 카슈미르의 지배권을 두고 전쟁을 벌이며 최악의 원수 관계로 갈라섰다. 이처럼 종교적인 문제로 인도와 갈라서게 된 파키스탄은 인더스 강 일대의 서파키스탄과 갠지스 강 삼각주 일대의 동파키스탄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두 지역 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사실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은 종교 및 종파만 같은 이슬람 수니파를 믿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면으로만 본다면 융합이 가능해 보였지만 문화, 인종, 언어 등 모든 부분에서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었다. 이들은 오히려 인도를 두고 상호 간의 힌두교도인 이웃들과 더 공통점이 많았을 것으로 보여 진다. 게다가 인도가 중간에 있다는 지리적인 요인, 그리고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의 거리가 멀어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두 국가 간의 가장 가까운 거리는 약 1,500㎞, 수도인 이슬라마바드와 다카 간의 거리는 약 2,000㎞에 달할 정도로 매우 멀다. 특히 파키스탄 독립을 이끌었던 무함마드 알리 진나(Muhammad Ali Jinnah, 1876~1948)는 인도 총독인 루이 마운트배튼(Louis Mountbatten, 1900~1979)에게 제시받은 인도-파키스탄 분할 계획으로 인해 매우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따라서 무함마드 진나는 분리 독립을 포기하고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 1889~1964)가 인도 수상이 되는 계획을 방해하는 방안을 고려하기도 했다. 당시 진나는 공개석상에서 매우 강경하게 파키스탄의 독립을 주장하면서 인도와 분리론을 주장했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영국의 관료들을 끈질기게 괴롭히면서 네루에게 권력을 이양하지 못하게 하면 된다는 방식의 발언을 측근들에게 자주 했다고 한다. 한편 진나는 영국령 인도의 총참모부 측에 동, 서파키스탄의 지정학적인 구도가 생존이 가능한 지를 계속 문의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영국령 인도의 군대를 총괄하는 총참모부 측은 꼴카타가 파키스탄에 포함되지 않으면 독립이 어려울 것이며, 꼴까타가 파키스탄의 영토에 포함되면 소련의 침공으로부터 방어가 불가능하다 답변하면서 난감한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인더스 강을 중심으로 정작 파키스탄 분리독립은 이미 초읽기로 들어가고 있었다. 따라서 진나는 문화적 정체성이 신앙에 우선한다는 이율배반적 논리를 내세워 서파키스탄의 영토까지 최대한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루이 마운트배튼은 이와 같은 파키스탄의 영토확보를 사실상 거절했고, 최소한 펀자브 주와 벵골 주 전체를 파키스탄에 포함시켜 통합 파키스탄 국가로 독립을 추진하려 한 진나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우산 벵골 무슬림들의 사정을 보자면 이들이 파키스탄에 합류하는 것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우선 무굴제국의 붕괴 이후 그전까지 무슬림에게 탄압받던 힌두교도들이 영국 통치 하에서 신식 교육을 받고 변호사, 기술자, 의사가 되어 무슬림보다 부유해졌고 역으로 억압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역차별에 대해 견딜 수가 없었다. 영국 지배 하에서 벵골의 힌두교인들이 대지주가 되어 그들을 착취했기에 이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독립한 서파키스탄의 수뇌부들은 진나를 비롯한 서파키스탄 출신들이 대거 장악했기 때문에 상대적 동파키스탄의 영향력이 약할 수 밖에 없었다. 파키스탄의 중앙 정부는 철저히 서파키스탄 위주로 운영되었고, 심지어 동파키스탄에서조차 고위 공직은 서파키스탄 출신들이 차지했다. 더불어 중간관리직으로는 인도에서 동파키스탄으로 피난 와 있는 무하지르를 우대하는 등, 토착 벵골인들은 거의 배제당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결국 동파키스탄 주민들의 서파키스탄 주도의 정부에 대한 불만은 점점 쌓여만 갔다. 게다가 동파키스탄 사람들은 서파키스탄으로부터 공공연하게 피부색깔을 두고 인종적으로 비하당했으며, 쌀, 소고기, 생선 등 모든 식량자원들은 서파키스탄에 수탈당했다. 그리고 동파키스탄에 배정되는 예산은 서파키스탄에 배정된 예산의 40%선에 불과하는 등 공공연한 차별을 받았다. 이는 영국 지배 하의 인도에서도 발생하지 않은 문제였기에 불만이 거셀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인구 자체로 볼 때, 동파키스탄이 서파키스탄보다 인구가 더 많았다는 것에 있다. 독립전쟁 직전 파키스탄의 인구로 보면 서파키스탄은 6,000만, 동파키스탄은 6,800만에 달했다. 특히 루이 마운트배튼은 파키스탄이 당시와 같이 분리되어 있는 기형적인 형태로 볼 때, 25년 이상 가지 못할 것이라 예측했다. 이는 실제로 파키스탄 건국 24년 만에 동부 벵골이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여 서파키스탄의 예속을 거부하면서 마운트베른의 예측은 정확히 들어 맞게 되었다. 결국 두 파키스탄은 상호 간의 내전 및 독립 전쟁으로 파키스탄-방글라데시로 분할 되는 상태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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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5
  • 헤겔 철학, 그 역사적 전개와 의미
    지금까지의 서양철학 중 가장 난해한 철학이 있다면, 과연 어떤 철학일까? 필자가 이에 대해 답변을 하자면, 당장 떠오르는 철학자는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1770년-1831)이다. 누군가 그냥 무턱대고 헤겔 철학이 다들 어렵다고 하니 도대체 어떤 철학인지 한번 읽어보자는 의도로 헤겔의 저작을 읽어보기 시작했다간 고작 몇 줄 정도만 읽고 곧장 한목소리로 무슨 말인지 몰라 너무 어렵다거나 혹은 이게 무슨 철학인지 모르겠다는 태도를 취하면서, 헤겔 철학을 그냥 포기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양상은 오늘날에만 해당하는 특이한 일이 아니고, 헤겔이 생존했던 당시에도 매번 있었던 터라 가히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독일어에 능숙한 사람이더라도 헤겔 철학 앞에서는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예외 없이 두 손을 들기 마련이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처럼 어려운 헤겔 철학이 그대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당시에도 오늘날에도 서양철학에 가장 영향력을 끼친 철학으로 평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헤겔 철학에 동조하든 반대하든 상관없이 철학자라면 헤겔 철학이 돌파해야 할 거대한 바위산임을 뜻한다. 그러나 오히려 헤겔 철학을 돌파해 보겠다는 의도로 시작했던 야심에 가득 찬 계획들이 어느 순간 그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정지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계획들은 헤겔 철학 전체가 아니라 단지 일부만을 이용해서 각자의 철학에 활용할 따름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헤겔 철학을 잘 활용한 각자의 철학이 오히려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되었으며, 헤겔 철학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음이 확인된다. 헤겔 철학은 당시에 좌파와 우파로 갈라져 치열한 논쟁을 서로 벌였으며, 그 이후로 신헤겔주의, 마르크스주의, 프랑크푸르트학파, 포스트모더니즘, 분석철학, 실용주의, 현상학, 실존주의, 해석학 등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신헤겔주의는 헤겔 철학의 관념론과 역사주의에 치중한 결과, 헤겔 철학의 변증법은 사상(捨象)해버렸다. 마르크스주의는 헤겔의 관념론을 비판하고, 합리적 핵심(der rationale Kern)인 변증법을 취했지만, 그 이후로 독단적 교조화 및 여러 분파로 분열양상을 보였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서구 마르크스주의에서 출발해서, 헤겔과 마르크스의 관계를 중도로 돌리는 데 효과적이었지만, 사회비판이론으로 귀결하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헤겔 철학의 이성 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출발했지만, 오히려 현실의 대안으로서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분석철학은 헤겔 철학의 개념론을 언어분석철학에 활용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헤겔 철학의 사변적 성격을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실용주의는 헤겔 철학에 대한 역사철학적이고 휴머니즘적인 측면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그 이상의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현상학은 독일 현상학보다 프랑스 현상학에서 헤겔 철학의 긍정적인 면을 되살리기에는 근본적으로 헤겔 철학 전체에 해당하지 않는다. 실존주의도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여기에서는 헤겔 철학의 부정적인 측면으로 귀결되었다. 해석학은 헤겔 철학을 독백이 아니라 대화라는 측면에서 다루기는 했지만, 헤겔 철학의 논리적 체계보다는 자의적 해석의 가능성만 열어 놓게 되었다. 그 외에도 비록 헤겔이 동양철학에 관해 부정적으로 평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중국과 일본 등등에서 헤겔철학과 동양철학의 비교연구도 황행(橫行)하고 있다. 이처럼 헤겔 철학의 영향력이 지대했던 것은 헤겔 철학이 학문의 거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철학적 사유를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전개했으며,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의 계기를 변증법적 사유의 힘으로 필연성을 도출해냈기 때문이다. 물론 헤겔 자신은 이를 완벽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현재 입장으로 보면, 곳곳에 허점도 있다. 그러나 유한한 삶을 영유하는 한 개인으로서 인간이 이 정도로 실로 엄청난 학문적 성취를 이루어 낸 것은 분명히 철학사에 영원히 빛날 업적이라 하겠다. 헤겔의 이러한 노력의 결과 덕분에 우리는 헤겔 철학이라는 유산을 물려받은 것이다. 그 유산은 독일에만 한정되어, 독일 계몽주의의 산물이라는 평가를 넘어서 세계적 자산이 되었다. 헤겔 철학에는 그리스 철학, 중세 신비주의, 범신론, 계몽주의, 낭만주의, 정치경제학, 사회계약론, 칸트 철학, 피히테 철학과 셸링 철학 등이 모두 녹아들어 있다. 또 논리학, 자연철학, 정신철학, 법철학, 역사철학, 종교철학, 미학, 철학사 등도 포함되어 있으며, 이 모든 분야가 서로 유기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헤겔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단순히 특정한 영역에서 몇몇 구절만을 읽고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될 경우, 헤겔 철학에 대한 오해가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는 없으며, 스스로 미로에 갇힌 채 착종(錯綜)된 모순이 휩싸이고 말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헤겔 철학에 대한 이해는 일단 고사(枯捨)하고,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봉착하면서 마치 늪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모습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헤겔 자신의 서술방식이 사변적인 탓에 야누스적 이중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때론 혼란스럽기도 하고, 분명한 일관성이 다소 없거나, 혹은 헤겔 자신의 오류로 인해 진위여부(眞僞與否)에 관한 논쟁거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헤겔 사후 지금까지도 헤겔 철학은 이러한 문제로 인해 각자도생(各自圖生)에 근거해서 전개되어왔다. 그러다 보니 헤겔 철학에는 여전히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남아 있고, 다만 누구든 그럴듯하게 타당하게 보이는 근거로 단지 각자의 주장이 제시되는 선에서 헤겔 철학을 논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종종 헤겔 철학의 핵심 개념인 변증법에 관한 논의를 회피한 채 어떤 하나의 해석만이 올바르다든가, 문자적 이해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이것은 헤겔 철학이 지니는 사유의 역동성과 역사성보다는 헤겔 철학을 개념의 논리로만 만들고 더욱 추상적으로 만드는 결과가 되었다. 더 나아가 헤겔 철학에 대한 핵심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논의하기보다 특정한 개념의 의미를 놓고 각자의 관점만을 관철하려는 틀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하는 양상은 헤겔 철학에 관한 각자의 이해방식이 빈약하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헤겔은 철학의 첫 번째 조건을 거론하면서 진리에 대한 용기와 인간 정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강조했다. 우주의 본질이 인간 정신 앞에서 열리고, 우주의 풍부함과 깊이가 인간 정신 앞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는 헤겔의 말은 다소 과장되기는 했지만,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는 한다. 어쩌면 헤겔의 이 말은 많은 사람에게 인간 정신의 위대함과 위력을 한껏 보여줌과 동시에 인간 정신을 스스로 최고의 가치라고 여길 만한 것이라 해도 괜찮다는 뜻에서 영감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반대로 부정적으로 보면, 과연 그런 것이 인간 정신에 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헤겔 철학에 대한 격렬한 비판은 바로 이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어서 심지어 헤겔 철학을 붕괴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비판이 과연 정당한지에 대한 문제는 헤겔 철학 내부에 한정해서 다루어져서는 안 되고, 오히려 헤겔 철학이 외연으로 확장될 때 비로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그와 같은 비판이 때론 헤겔 철학에 대한 오해의 산물일 수도 있을 것이다. 헤겔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첩경은 사실상 없다. 그 첩경이 어딘지를 우리가 우선 찾기보다는 헤겔 철학의 근본문제가 무엇인지에 관한 근본적 천착(穿鑿)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섣부른 얕은 지식으로 헤겔 철학을 좀 공부했다고 떠드는 자들은 이러한 근본적 문제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외면하고 뒤로 숨기 마련이다. 또 헤겔 철학에 대한 특정한 철학자의 관점이 마치 헤겔 철학 전체에 관한 이해라도 되듯이 말하는 자들도 마찬가지로 스스로 밑천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더 나아가 특정한 철학을 위한 우회로로 헤겔 철학에 접근하려는 자들도 헤겔 철학에 대한 진지한 숙고보다는 축소된 방식으로 헤겔 철학을 이해하려는 수준에 그친다. 그들은 모두 과연 헤겔 철학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알지 못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다. 심지어 일반론 수준에서 그저 그렇게 헤겔이 얘기했다는 정도가 전부일 뿐이다. 헤겔 철학은 여전히 땅속 깊이 묻혀 있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헤겔 철학의 비밀을 우리가 완전히 풀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그 가능성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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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5
  • 러시아 국민시인 알렉산드르 푸쉬킨 동상이 우크라이나에서 수난 중
    러시아 국민시인 알렉산드르 푸쉬킨 동상이 우크라이나에서 계속 수난을 당하고 있다 한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 있는 푸쉬킨 동상은 머리가 갈색 천으로 덮히고 붉은 테이프로 묶여 "'시인이 앞을 볼 수 없는' 포로가 됐다(Поет став сліпим в’язнем.)." 라고 쓰며 동상 하단에는 붉고 흰색 페이트로 '탈식민지화는 멈출 수 없다(Деколонізацію неможливо зупинити)'는 문구가 우크라이나어로 써있다. 러시아어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적 언어로 만들었다며 전 세계에서 찬사를 받고 있던 푸쉬킨은 러시아어를 축출하려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들에게 사실상 공공의 적으로 몰려 그 유산이 파괴되고 있다. 더불어 푸쉬킨 동상의 이같은 행위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러시아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저질러진 것으로 보인다. 지난 해에는 우크라이나 북부 하리코프의 시인 광장과 서부 쩨르노브찌(Чернівці)의 드라마 극장 앞에 서 있던 푸쉬킨의 흉상이 당국에 의해 철거된 뒤, '독재자' 스탈린 흉상과 같은 창고에 처박힌 것으로 전해졌다. 러시아의 유산을 없앤다고 하지만 이는 쉽지 않다.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어를 헌법상의 유일한 국어로 인정하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분야에서 러시아어가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는 이중언어 국가이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어 구사자가 전체 인구의 적게는 1/3, 많게는 절반에 이르고 있으나, 2012년 8월에 법률 "국어정책 토대에 관한 법(Закон про засади мовної політики України)"이 통과되기 전까지 러시아어의 지위는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2012년에 재정된 우크크라이나의 언어법은 각급 지자체 주민 인구의 10% 이상이 사용하는 언어를 지역어로 선정하여 공공기관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법이다. 더불어 이 법을 재정할 당시의 대통령 친러계인 빅토르 야누코비치(Виктор Янукович) 시대였다. 당시 우크라이나 지역어 중 핵심적인 언어가 러시아어였고, 이 법을 통하여 지역어가 해당 지역에서 국어인 우크라이나어가 사용돨 권한을 잠식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 법의 입안 및 통과, 시행, 폐지, 폐지 무효화를 둘러싸고 우크라이나는 극심한 갈등을 겪기도 했다. 물론 러시아어의 지위를 둘러싼 갈등은 현재도 진행형이며 시시각각 양상을 달리하고 있는 형편이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어 사용은 전면 금지되었다. 우크라이나의 작가 루브코 데레쉬(Рубко Дереш)는 작년 6월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Ми не можемо мовчати)" 잡지 인터뷰에서 '죄와 벌'을 쓴 러시아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예프스끼(1821∼1881) 등 러시아 문학을 언급하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공범론을 주장하며 이상한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면서 "러시아 문학은 푸틴의 공범이다. 하나는 국가로서 러시아가 가지는 제국주의적 야망과 관련이 있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존엄, 자유 및 책임이 러시아 문학에 결여돼 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러시아 문학과 종교, 즉 사회 문화는 이 전쟁의 공범이다. (Російська література – пособниця Путіна. Одне пов’язане з імперіалістичними амбіціями Росії як нації, а інше — з тим, що в російській літературі бракує індивідуальної гідності, свободи та відповідальності. Співучасниками цієї війни є російська література і релігія, тобто соціальна культура.)"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Ми не можемо мовчати)" 이 단체에 속해 있는 우크라이나 작가들이 집에서 한 번도 러시아어를 쓰지 않는다면 인정하겠는데 필자의 오랜 우크라이나 경험상 그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장담한다. 공식적인 장소에서는 서툰 우크라이나어 쓰면서 러시아어를 섞어 쓰기도 한다. 집에서는 러시아어로 말하면서 러시아어와 글을 금지한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다. 우크라이나를 겪어본 사람이면 이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인지 알만한 사람 다 알고 있다. 저 사람들 누군가가 약 올려서 흥분하게 하면 우크라이나어가 아니라 러시아어로 욕지거리 하며 침 튀기며 달려드는 기막힌 상황을 보게 될 것이다. 도대체 "러시아가 가지는 제국주의적 야망(Імперіалістичні амбіції Росії)"에 러시아 문학과 푸틴의 연관성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 같은 헛소리를 하는지 알 수는 없다. 그리고 "개인의 존엄, 자유 및 책임이 러시아 문학에 결여돼 있다(Це пов'язано з тим, що в російській літературі не вистачає особистої гідності, свободи і відповідальності.)"고 하는데 러시아 문학을 제대로 읽어봤음 절대 그런 소리할 수가 없다. 오히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작가라는 타라스 세브첸코(Тарас Шевченко, 1814~1861)의 작품들이 개인의 존엄, 자유 및 책임이 결여되어 있는 내용들이 많다. 그 이유는 그가 농노 출신이었고 농노에서 해방된 것도 러시아 친구들이 도와줘서였다. 그는 키릴-메토디우스 형제단(Кирило-Мефодіївське товариство)이라는 매우 투쟁적이고 과격한 테러집단에 속해있으며 이 불법 단체는 슬라브인들의 단합을 주장해 러시아 제국 곳곳에서 테러를 자행하며 수많은 러시아인들을 살상했다. 여기에 우크라이나가 언급한 "개인의 존엄, 자유 및 책임(Особиста гідність, свобода та відповідальність)이 있을 수가 없다. 우크라이나 현대 작가들이 말하는 "러시아 문학과 종교, 즉 사회 문화는 러시아가 일으킨 전쟁의 공범"이라 주장하는 것은 전쟁과 상관없음이 분명한데도 러시아의 문화를 깎아내림으로써 저급한 하위 문화로 전 세계에 인식시켜 러시아의 자존감과 자부심을 짓밟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일환으로 푸쉬킨 동상에 대한 우크라이나 인들의 공격은 러시아인들의 자부심을 죽임으로써 자신들의 자존감을 높이려 한, 정신승리에 블과한 테러 행위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좋게 말해서 민족주의자지 사실상 무식하고 무도한 자들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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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4
  • 실패에 대한 인정이 매말라가는 대한민국 사회의 현 주소와 경고
    자유 민주주의의 모호한 경계는 일종의 덫이나 다름없다. 미국이 마약을 적극적으로 강력하게 통제하지 못한 이면에는 말 그대로 "자유 민주주의(Liberal Democracy)" 국가 기본 기조로 내세웠고 상징성이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덫으로 인해 강력히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약을 하는 것도 자유인데 이를 통제한다면 심각한 인권탄압(Human rights violation)에 휩싸일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 동안 미국은 전 세계 어느 나라든, 인권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인권탄압에 있어 엄청난 비판과 비난을 가했던 나라다. 그랬던 미국이 마약 범죄에 대해 강력히 통제한다면 내로남불 논란에 휩싸이며 역으로 비난을 받을 수 있다. 그와 같은 자유 민주주주의의 가치를 수호해야 한다는 일종의 "덫"에 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서 남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에 대해서만 강력 정책을 성토하고 있다. 인간 스스로 통제가 안 되고 국가도 통제력을 상실했는데 남의 자유에 대한 침해는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다. 결국 미국의 이러한 사회적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자유의 방종의 경계, 그리고 법적인 문제가 어느 부분에서 들어가야 할지 논란은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부분들의 남의 나라 이야기에만 국한 되는 부분이 아니다. 특히 대한민국이 이런 자유 오남용이 심한 국가에 속하는데 자유를 누리고 있는 권리(Right)를 최우선으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인류학에서 바라보는 자유 민주주의는 권리에 대한 통제도 필요하지만 권리를 극대화한만큼 그만한 책임(Responsibility)과 의무(Obligation)가 따른다. 자신이 누린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스스로 방종(Self-indulgence)으로 치닫는 부분을 경계하여 통제하는 것이지만 의무의 경우에는 타율적인 강제성과 통제가 들어간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요즘 사회를 보면 누린 것에 대한 권리는 지속적으로 주장하지만 그것에 대한 책임과 의무는 등한시 하는 모습이 많다. 그리고 이것이 정당화 되지 않으면 집단 이기주의(Collectivism)로 시위 형태 등등의 직접적인 행동에 나선다. 그런 형식의 권리를 앞세운 집단 이기주의(Collectivism)는 결국 자유라는 것을 빙자하여 또 다른 권력화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를 빙자한 집단화 권력의 오남용은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언젠가 군중심리(Herd mentality)에 대한 사회심리학 에쎄이를 쓴 바 있다. 한국은 양 극단을 지지하며 모든 것을 이분법적인 잣대에서 판단하는 경향이 강한데 대개 자기 의견을 굽힐 줄 모른다. 그 이유가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이 강한 이유는 뭘까? 이는 "존재론(Ontology)" 때문이다. 나이든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과 해왔던 것에 대한 자부심에 존재의 의미를 갖지만 나이가 어린 사람들은 직관적이며 주관적이다. 즉, 자기가 보고 공부하며, 배운 것에 대한 자신감이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로 삼는다. 여기에 반론이 들어오거나 반대 의견이 들어오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저항적인 면모를 내뿜게 되는데 이는 자신이라는 존재가 존재함에 있어 부정당한다는 느낌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자기가 쌓아왔던 경험, 그동안 해오며 성공한적 있다는 자신감과 자부심 그런 것들을 평생 축적하고 쌓았는데 누군가가 그에 대한 반론이 들어오거나 반대 의견이 들어오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이를 지키려는 신념이 생겨 극도의 저항을 하게 된다. 그동안 자신이 축적한 것이 순간 부정당하고 무너질 수 있다는 것에 심한 허탈감이 느껴서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공부하며, 배운 것이 절대적이며 최고의 지식인 줄 알았는데 누군가가 그에 대한 반론이 들어오거나 반대 의견이 들어오게 되면 이 역시 자신도 모르게 이를 지키려는 신념이 생겨 극도의 저항을 하게 된다. 그동안 자신이 축적한 것이 순간 부정당하고 무너질 수 있다는 것에 심한 허탈감이 느껴서다. 그러니 더더욱 인정하기가 싫어진다. 그렇다면 자신이 갖고 있는 견해에 대해 합리화를 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알고 있고 경험해본 것들을 머리 속에서 나열한 뒤, 최대한 말이 되는 것들을 끌어다 붙이며 합리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느 정도 먹힌다 생각하면 전보다 더 강화된 논리로 재등장한다. 그러니 자신이 갖고 있는 오류를 시정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잘못했어도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뭔가 틀렸고 잘못됐으면 우선 객관적으로 이를 마주하여 인정할 줄 알아야 다음 단계를 어떻게 할 지 슬기로운 처신 방법이 보이는데 인정하지 않으면 쇄신의 기회조차 날려 버리게 된다. 앞으로 인터넷이 발달되어 검색률이 더더욱 다양해지게 되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려는 모습 또한 더 많이 사라지게 된다. 그러면서 끝없는 실패를 하게 되면 그 실패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 것이 아닌 "남탓"을 하게 된다. 결국 자신의 성찰을 포기하고 원인을 타인에게서 찾는 것이다. 이런 스타일이 많아질수록 더더욱 기회주의적일 것이고 상호신뢰성도 약화될 것이며 결국 그 사회는 피폐해져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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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30
  • 하마스-이스라엘 전쟁 여론, 소위 보수우파에 대한 비판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의 네이버 댓글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 해서 인종청소 해야한다는 등의 댓글들이 주류를 이루는 것을 보고 그 저열한 수준에 참담함을 느끼고 페이스북을 본 찰나, 어느 보수 우파가 "빨갱이 척결" 하자고 하는 글을 보게 되었다. 순간 궁금했다. 사전 "척결" 이라는 단어를 보면 "나쁜 부분이나 요소들을 깨끗이 없애 버림" 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단어가 사람에게, 다수의 민중에게 항한다는 것은 굉장히 무서운 말이다. 왜냐하면 학살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말 자체가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 그걸 인식하고 있기나 한건지 단순하게 실험해보기로 했다. 빨갱이 척결, 우선 기준이 어디까지인지, 구체적인 설명은 하지 않았다. 아주 단순하게 토론해 보았다. 소위 보수우파가 말하는 좌파의 기준. 이재명을 지지했던 49%, 저들이 아무나 프레임 씌우기 좋아하는 위장 우파 21%, 합쳐서 70%는 척결,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하니 이 보수 우파는 몸을 사리기 시작한다. 너무 과격하고 위험한 주장이라는 것이다. 아니, 당신 논리에 의하면 빨갱이 척결해야 한다면서요? 그러자 좌익의 핵심을 처리하자는 것으로 말을 바꾸며 몸을 사린다. 그래서 척결이라는 말 함부로 쓰는게 아니다. 직접 실행할 힘도 없이 입으로만 주장하고 막상 실행하라 하니 몸을 사리는게 비겁하다. 척결이라는 단어 자체가 얼마나 위험한지 경각심을 세워주려 했지만 아무리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그 개념이 획일화 되어 있어 본질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지만 과거 독립운동을 하던 시기에 공산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은 헐벗고 굶주린 사람이 주축이라는 착각을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민족주의를 이끌고 조선인들이 선생님으로 추앙하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많았다. 즉 못 배운 자들보다 잘 배운 지식인 엘리트 계층들이 실제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들을 주도했다. 그 이유는 헐벗고 굶주리고 수탈당하는 사람들을 보니 그에 대한 안타까움과 수탈하는 측에 대한 비분강개(悲憤慷慨)가 겹쳐서 생긴 발상이었다. 특히 그런 지식인들 대부분이 비주류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주류에 들어갈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열등감도 함께 섞여 있었다. 요즘 MZ 세대의 언어로 보자면, 인싸(인사이드) 지식인이 아니라 아싸(아웃사이드) 지식인들이 아싸를 벗어나기 위해 자신들만의 신세계 구현을 원했고 그런 자들에게 있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사상만한 이데올로기는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두 사상은 획일화 되어 있는데다 자신들이 갖고 있던 이론들을 대입하면 단순해지기도 하는 마법까지 부릴 수 있었다. 그러니 헐벗고 굶주리며 현실 세계에 대한 절망과 착취만 해대는 지도층에 대한 반발심으로 뭉쳐 있는 일반 백성들에게 공산주의에 경도된 지식인들의 이론들을 단순화하게 도식화하여 알려주면 스펀치처럼 빠르게 흡수되는 효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가난한 지역과 빈부격차가 심각한 개발도상국들이 쉽게 공산화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기도 하다. 그래서 이를 근거로 그냥 단순하게 토론에 나섰더니만 그냥 실제 좌파 척결은 말 뿐이고 몸을 사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사회가 우파 중심으로 바뀌길 원하고 있지만 본인들은 직접 움직이길 싫어한다는 것이다. 빨갱이 척결을 주장하지만 누군가가 대신 해주길 원하고 있다. 척결이라는 거친 단어, 그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직접적으로 인지를 못하니 생각없이 마구 쏟아내는 것이다. 즉 과격하게 말은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게다가 또 그런 행동으로 옮기자는 말은 경계까지 한다. 이번 실험을 통해 또 확인한게 하나 더 있다. 보수 우파 할배들이 지독히 이중적인 것도 있지만 소위 "빨갱이 척결"에 대한 구체적인 플렌도 없다는 것이다. 대상도 문재인과 이재명, 민주당을 제외하면 모호하고 어떻게 척결할 것이며 척결하고 나면 저들이 주장하는 보수프레임의 우파가 얼마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척결 이후의 지향점 등등 모두 모호하다는 것이다. 보수의 성지(聖地)인 영국의 예를 든다면 보수연합당(Conservative and Unionist Party)은 800년의 유구한 전통을 갖고 있다. 그 보수적 행동과 가치의 명제는 원칙(Principle), 책임(Responsibility), 명예(Honour)이다. 보수나 진보가 가지는 프라이드와 가치는 이념 정치, 사상 정치의 핵심이자 품격이다. 무작정 "빨갱이 척결"을 외쳐대는 자칭 보수우파들, 실행 능력도 없고 플렌도 없고 그냥 입으로만 외쳐대는 자들에게서 대한민국의 보수주의는 무슨 품격과 희망이 있을까? 클레식한 보수주의를 꿈꾸는 필자인데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보면 참으로 암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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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28
  • 왜곡된 역사 인식을 넘어서
    친구들의 카톡방에 이런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 “우리를 중국으로부터 독립시킨 것은 일본이고, 우리를 일본으로부터 독립시킨 것은 미국이다.” 그리고 그 글의 마지막에는 “일본과 미국을 배척하고 북한과 중국을 섬기는 무리들은 대한민국을 떠나야 한다. 국민이 될 자격이 없다.” 그렇지 않아도 날씨가 더운데 그 글을 읽는 순간 더욱 더워졌다. 그렇다고 그 글을 퍼날랐던 친구에게 화를 낼 수는 없어서 우회적인 글로써 내 마음을 달랬다. “초자아는 양심이나 죄책감으로 자아를 지배한다. 하지만 초자아의 배후에는 에로스와 타나투스의 욕망이 자리한다. 타나투스의 욕망이 지배할 경우 인간은 파괴의 길을 걷게 된다.” 어쩌면 오늘날의 세계 정치도 죽음의 본능이 작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죽음의 본능은 화해를 모른다. 오직 배제와 파괴에만 몰두할 뿐이다. 그런데 정말로 우리를 중국으로부터 독립시킨 것은 일본이었을까? 물론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승리로 1895년 4월 체결된 시모노세끼 조약의 제1조는 다음과 같다. “중국은 조선국의 완전무결한 독립 자주를 확인한다.” 그런데 일본은 왜 청나라와 전쟁을 했을까? 청일전쟁은 우리나라를 일본의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서 일으킨 전쟁이다. 만약 우리를 중국으로부터 독립시킨 일본에 고마워야 한다면, 1895년 10월에 일본에 의한 민비 살해사건인 을미사변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이 당시의 시기를 <한국사강의>-한국역사연구회편-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보호국 화하기 위하여 침략을 강화하는 동시에 중국 동북부에 대한 침략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극동 진출을 꾀하던 러시아를 선두로 한 독일, 프랑스의 삼국개입을 초래하여 일본의 정치적 지위는 약화되고 반대로 러시아의 침략이 강화되어 갔다. 이러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일본은 민비를 살해고 단발령을 강제로 실시하여 친일세력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로 일제와 친일정권에 반대한 지방 유생들의 위정척사적인 의병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나 결국 친일정권이 붕괴되고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되었다.” 위의 언급만으로도 일본의 목표는 분명함이 드러난다. 청일전쟁은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국으로 만들려는 야욕으로 시작되었다. 그 당시 조선이 청나라의 식민지국은 아니었지만,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욕은 청나라로부터 조선을 대외적으로 독립시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입김을 노골적으로 강화하게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결국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국으로 전락하였지만, 우리가 그러한 일본에 고마워야 하나? 오리엔탈리즘이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억압하기 위한 서양의 방식이라면, 식민사관이야말로 오리엔탈리즘의 변형이다. 즉, 한국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억압하기 위한 일본의 방식이다. 우리가 일본의 사고방식을 따라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제국주의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식민지 사람들은 우리가 베풀어 준 은혜에 대해 고마움을 모르는 미개인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저질렀던 식민지국에 대한 경제적 착취와 식민지 사람들에게 가한 무분별한 노동력 착취로 겪어야만 했던 비참함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미개인들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식이다. 그런데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사람들이 제국주의적 사고를 두둔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들과 동일시 함으로써 자신의 트라우마을 극복하려는 심리적 방어기재가 작동한 것일까? 위와 같은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승만과 박정희를 찬양한다. “일본이 우리를 식민지로 만들었지만, 우리에게 물려준 유산이 많았다”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유사한 맥락에서 이승만과 박정희가 우리의 경제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향상시킨 토대를 구축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음모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일본은 대륙 침략이라는 목적을 위해 조선을 철저히 도구화했듯이, 이승만과 박정희는 자신들의 독재를 위해 철처히 국민들을 억압했었다. 인간은 어쩔수 없이 양면의 얼굴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프로이트의 생각이 맞다면,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에로스의 본능과 타나토스의 본능이 서로 충돌하며 존재한다. 그들의 조화가 자아를 건강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충돌들이 자아를 해칠 정도로 심각해질 경우 증상으로 나타난다. 정신분석은 그러한 증상 이면에서 무의식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자각하게 만들어 재해석하게 하는 작업이다. 무의식의 극심한 충돌이 자아를 해치듯이, 과거에 대한 한쪽으로 편향된 지나친 해석 역시 오늘날의 현실을 헤친다. 니체는 ‘신의 죽음’이후에 오는 유럽에 닥칠 운명을 이렇게 표현했다. “마침내 우리의 배가 다시 출항할 수 있게, 모든 위험을 향해 출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식의 모든 모험이 다시 허락되었다. 바다가, 우리의 바다가 다시 열렸다. 그러한 열린 바다는 아마도 일찍이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니체가 신의 죽음 이후 온갖 가치의 혼란을 잠재우고 새로운 인간,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기를 희망했듯이, 우리도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기를 희망한다. 한쪽으로 편향된 역사의식은 오늘의 현실과 내일의 미래에 해가 될 뿐이다. 특히 우리는 제국주의적 역사 인식을 경계해야 한다. 새로운 역사의 해석은 우리의 밝은 미래를 위해 과거의 악몽을 인정하는 한편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허무를 철저히 반성한 후에야 허무를 극복할 수 있다는 니체의 생각은 아직도 유효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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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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