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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당, 금융투자소득세 유예론 급부상…정책 결정 앞두고 논의 격화
    더불어민주당 내에서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유예론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 민주당은 오는 24일 금투세에 대한 입장을 정하기 위해 토론회를 열 예정이다. 하지만 당 내부에서 유예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상황이다. 금투세 유예 주장의 배경에는 국민 여론과 시장 상황을 고려한 판단이다. 국민의힘은 이를 두고 민주당이 입장을 변경하고 있다고 환영하는 반면, 진보 진영에서 예정대로 시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금투세에 대해 그동안 강경 입장이던 진성준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11일 국회에서 열린 당정책간담회에서 금투세 관련 언급을 자제했다. 그는 "금투세와 관련한 원내 입장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라며 "정책 디베이트와 정책 의총 등을 통해 당의 총의를 확인해 나가겠다"라고 밝혔다. 다만 증권거래세에 대해서는 폐지가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명확히 했다. 민주당 내에서도 '유예론'이 부상하고 있다.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정일영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금투세 유예를 주장했다. 우리 주식시장이 금투세를 감당할 충분한 체력을 먼저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의원은 자본시장의 경쟁력을 강화한 뒤 금투세를 도입해도 늦지 않다며 정책 결정은 국민과 함께해야 한다고 표명했다. 이언주 최고위원 역시 금투세 유예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그는 당 지도부 내에서 같은 의견을 가진 의원이 많다며 시장과 국민 여론을 고려해 신중하게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외에도 전용기, 이소영, 이연희 의원 등도 금투세 유예를 지지한 바 있다. 반면, 국민의힘은 민주당 내 유예론 부상을 환영하며 금투세 폐지를 촉구했다. 김상훈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민주당 지도부에서 처음으로 금투세 유예를 언급한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민주당이 금투세 폐지로 전향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진보 진영은 금투세를 예정대로 시행해야 한다는 견해를 고수하고 있다. 조국혁신당은 금투세가 금융선진국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는 제도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금투세 도입이 국내 자본시장을 위축시킬 것이라는 우려는 과장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한 진보당도 금투세가 초고소득자에 대한 과세의 방편으로 예정대로 시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 여론은 팽팽하게 나뉘어 있다. 한국갤럽 조사에서는 금투세를 예정대로 시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39%, 시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이 41%로 비슷한 수준을 보였다. 그러나 주식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금투세 반대 의견이 더 많았다. 다른 여론조사에서는 금투세 폐지 또는 유예에 대한 의견이 과반을 넘겼지만, 여전히 찬성 의견도 적지 않다. 경제학계에서는 금투세 도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우세하다. 한국경제학회 조사에 따르면 경제학자 다수는 금투세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는 금투세가 국내 주식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는 예측했다. 금투세 유예나 폐지를 두고 정치권과 경제계, 국민 여론이 갈등을 빚고 있다. 민주당은 금투세에 대한 당론을 정하기 위해 치열한 논쟁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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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1
  • 장동혁, 대통령 비공개 만찬 누설에 정무적 감각 부족 비판… 한동훈 외모 품평 발언에도 일침
    국민의힘 장동혁 최고위원은 9월 10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윤석열 대통령이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배제한 비공개 만찬에 대한 언론 보도와 관련해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대통령이 누구와 만나고 식사하는 것이 국민의 관심사이며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만큼 이번 만찬의 비공개가 유지되지 않은 점에 대해 깊은 아쉬움을 표했다. 장 최고위원은 "대통령께서 여당이든 야당이든 다양한 인사들과 소통하는 것은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비공개 만찬이 다음 날 언론에 보도된 것은 누가 언론에 흘렸는지 의문이 생긴다"라며 이번 보도가 가지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는 참석자가 이를 알린 것이라면 "정무적 감각이 너무 부족한 것"이라고 비판했으며, 만약 대통령실에서 나온 정보라면 "참모들이 대통령을 보좌하면서 정무적 판단을 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쉽다"라고 덧붙였다. 이번 비공개 만찬에는 윤상현 의원과 친윤계로 분류되는 인요한, 김민전 국민의힘 최고위원이 참석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이 자리에는 친한계로 분류되는 한동훈 장관은 초대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정치적 해석이 나왔다. 그로 인해 일부 언론은 윤 대통령이 한동훈 장관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장 최고위원은 "대통령과의 소통 관계를 알리고자 한 의도가 있었다면, 이는 너무나 정무적 감각이 부족한 행동"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특히 이번 보도가 나온 경위에 대해 그는 "비공개 만찬이었기 때문에 언론에 흘릴 수 있는 사람은 한정적일 것"이라며 "누가 유력한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라고 답을 피했다. 그러나 그는 만약 대통령실 내부에서 이런 정보가 나왔다면 이는 대통령이 한동훈 장관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는 메시지를 외부에 전달하려는 의도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했다. 이 때문에 여러 정치적 해석과 논란이 확산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한 장동혁 최고위원은 최근 일부 야당 의원들이 한동훈 장관의 외모에 대해 부적절한 발언을 한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국민의 대표로서 품격은 곧 국민의 품격"이라며, 이러한 발언이 정치적 수준을 떨어뜨리는 동시에 국민의 품격까지 깎아내리는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진성준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유튜브 방송에서 한동훈 장관을 처음 만나보고 "외계인을 보는 듯했다"라며 그의 외모와 표정에 대해 비하성 발언을 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장 최고위원은 "정치의 본질과 동떨어진 발언"이라며 정치인의 발언은 그 자체로 국민을 대변하는 만큼, 이러한 품격 없는 발언은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한편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도 같은 방송에서 한동훈 장관의 키를 언급하며 그가 생각보다 "얇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장 최고위원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나 한동훈 장관은 이러한 발언들에 대해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는 "한동훈 장관은 매우 쿨하다"라며, "전혀 이에 대해 어떤 말을 하지 않았다"라고 덧붙였다. 이번 비공개 만찬과 관련된 논란, 그리고 야당 의원들의 외모 비평 논쟁은 한동훈 장관을 둘러싼 정치적 관심이 더욱 커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대통령실 내부의 정보 관리와 정무적 판단이 다시 한번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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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0
  • 윤석열 정부,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7월 31일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장을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한 이후 약 한 달여 만인 8월 26일 국회에서 그의 인사청문회가 진행될 예정이다. 이날 오전 10시부터 시작되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청문회는 김 후보자의 지명 이후 지속된 야당의 지명 철회 요구와 여당의 강력한 지지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이 예상된다. 대통령실은 김 후보자의 다양한 경험을 들어 그가 노동 개혁 과제를 이끌 적임자라고 평가했다. 이에 여당은 김 후보자의 행정가로서 능력과 정치적 감각, 노동 약자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강조하며 그의 적합성을 높이 평가했다. 반면, 야당은 김 후보자의 과거 발언과 행동을 집중적으로 비판하며 그를 반노동 인사로 규정, 그의 사퇴를 촉구하고 있다. 특히 김 후보자가 과거에 한 "불법파업에 대한 손배 폭탄이 특효약", "쌍용차 노조는 자살 특공대", "노조는 머리부터 세탁해야 한다." 등의 발언이 주요 쟁점으로 부각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문재인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김 후보자의 발언도 논란의 중심에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러한 김 후보자의 발언과 행동을 근거로 윤석열 대통령의 인사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며, 극우적 인사가 아닌 다른 인물을 찾을 수 없냐고 지적했다. 청문회를 하루 앞둔 25일 더불어민주당 한민수 대변인은 기자회견을 통해 윤 대통령의 인사 참사를 강도 높게 비난했다. 김 후보자는 야당의 비판에 반박하며 반노동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파업으로 인한 손해에 대해 책임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는 또한 8월 15일이 광복절과 동시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기념하는 날임을 강조하며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이승만 전 대통령을 꼽았다. 이번 청문회는 김 후보자의 과거 발언과 행동뿐만 아니라 그의 정치적 입장과 노동 정책에 대한 철학이 집중 조명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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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26
  • 한동훈. 금융투자소득세 유예 제안…민주당 "논의 가능"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가 내년 1월 1일 시행 예정인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의 유예를 제안하며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에게 “금투세 폐지에 대한 협의는 나중에 하더라도, 내년 시행을 일단 유예하는 것에 합의하자”라고 요청했다. 한 대표는 당론인 금투세 폐지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당장 ‘개미 투자자’들의 불안을 덜기 위해 시행 유예부터 합의를 이뤄내자는 취지에서 이 같은 제안을 내놓았다. 민주당 내에서도 금투세를 그대로 시행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는 형성되어 있다. 민주당 원내 핵심 관계자는 "시행 시기와 부과 기준을 조정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할 수 있다"며 시행 유예 가능성을 한동훈 대표와 논의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이재명 대표는 금투세 유예나 완화 가능성을 언급하며 부과 기준 완화에 방점을 두었지만, 시행 유예도 협의 테이블에 올릴 수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한동훈 “부자 1%대 나머지 99% 갈라치기 안 통한다.” 한동훈 대표는 국회에서 열린 금투세 폐지 정책 토론회에서 "금투세 폐지에 대한 확실한 신호를 국민에게 전달해야 한다"라며 "연말까지 기다리지 말고 가을까지 결정을 내려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금투세 유예에 대한 여·야 간 합의를 통해 투자자들의 불안을 해소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한, 민주당이 금투세 문제를 부자와 서민 간의 갈라치기 논쟁으로 접근하는 것을 비판하며, "지금은 그 논쟁이 통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한 대표는 금투세 합의를 통해 여당이 중수청(중도, 수도권, 청년) 공략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당 지도부 관계자는 "폐지가 최종 목표이지만, 연말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적어도 1월 1일 시행이 안 된다는 것에 공감대를 이루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동훈 대표는 금투세 폐지를 청년 이슈로 강조하며, 청년들의 자산 증식이 과거와 달리 자본시장 투자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 금투세 유예 논의 가능성 있지만 내부 이견 존재 민주당도 금투세 시행을 유예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할 수 있다는 견지를 밝혔다. 이재명 대표가 금투세 유예 또는 완화를 언급한 이후, 민주당 강성 지지층 사이에서도 금투세 폐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 대표의 팬 카페 '재명이네마을'에서는 "금투세는 국민의힘에서 발의했던 법안임을 국민에게 알리고 폐지를 당론으로 정해야 한다"라는 의견이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민주당 내에서도 금투세 유예에 대해 서두를 필요는 없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민주당 원내 지도부 관계자는 "의원들 사이에서도 금투세에 대한 의견이 갈리고 있다"라며 "시간이 있는 만큼 서둘러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이미 한 차례 유예된 법안을 또 유예하는 것은 권위를 떨어뜨리는 일이라며, 예정대로 시행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민주당 내에서 나오고 있다. 고민정 의원은 “또 유예시키면 스스로 권위를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밝혔고, 진성준 정책위의장 역시 예정대로 시행해야 한다는 견해를 유지하고 있다. 한동훈, 육아휴직 확대 제안…민주당도 찬성 한동훈 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육아휴직과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대상을 현행 만 8세 이하 또는 초등학교 2학년 이하에서 만 12세 이하 또는 초등학교 6학년 부모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문제를 초당적으로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 진성준 정책위의장은 "민주당도 관련 법안을 냈고 육아휴직 확대에 찬성한다"라고 밝히며, 상임위 차원에서 조율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재명, 코로나19 양성으로 입원…여야 회담 연기 이재명 대표는 코로나19 검사 결과 양성 반응을 보이며 인천의 한 병원에서 입원 치료받고 있다. 이 때문에 25일 예정됐던 이재명 대표와 한동훈 대표 회담도 연기됐다. 이재명 대표 측 관계자는 "증세가 회복되면 다시 회담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23일로 예정된 이재명 대표의 공직선거법 혐의 공판기일도 다음 달 6일로 연기됐다. 이에 따라 선고 공판 역시 10월 초로 연기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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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24

칼럼 검색결과

  • 종교와 사회, 짝사랑의 철학
    지난 토요일 ‘바른불교재가’모임에서 <종교와 사회>라는 책의 첫 장을 장식했던 우희종교수가 쓴 ‘종교는 사회를 짝사랑해야 한다’라는 글을 저자로부터 직접 듣게 되었다. 그는 자연과학도이지만 불교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의 글 각 주를 보아도 그는 종교와 관련된 글을 여러차례 발표했음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는 우희종교수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그는 사회와 종교가 건강한 관계를 맺기 위해 사회 변화와 현실에 부합하는 종교적 도그마의 재해석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면서 그는 본 회퍼와 도킨슨을 언급한다. 본 회퍼는 유대인 집단 학살이라는 거대한 악이 선과 함께 존재하는 것에 대한 성찰에서 십자가에서 고통과 고난받는 예수를 통해 하느님은 인간의 고통과 고난에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강조했다. 우희종교수는 이 대목에서 “본 회퍼는 선한 하느님을 붙잡는 한계로 인해 거대 악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악을 실재화한 셈이다”라고 해석을 했다. 한편 과학적 합리주의와 비판적 사고를 강조하는 도킨슨은 무신론 운동을 펼치고 있다고 했다. 기성 종교는 사회의 갈등과 폭력을 조장한다고 보았기 떄문이었다. 여기서 우희종교수는 이 둘이 놓치고 있는 부분을 칼 융의 관점을 접목해서 극복하고자 하였다. 나는 본 회퍼의 신학을 모른다. 우희종교수가 언급한 본 회퍼의 신학이 궁금해서 인터넷을 검색해 봤다. 위키백과에는 본 회퍼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그는 삐뚤어진 세상 즉, 독재가 가능한 그 당시의 현실에 저항하는 교회상을 그려 내면서, 신학적 교리를 배우고 논쟁하는 교회가 아닌, 세상의 불의와 싸우는 정의에 불타는 교회를 원했다.”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라는 본 회퍼의 말도 검색할 수 있었다. 이 대목에서 우희종교수가 염두에 두고 있는 종교는 선악을 넘어서는 지점에서의 참된 종교성 회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융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했던 것 같았다. 우희종교수는 빛을 강조하는 기존의 신학적 관점을 넘어서는 감성과 영성을 모두 포괄하는 심연의 신학을 강조한다. 그는 기독교 창세기 1장의 ’아무 형태도 없이 텅 비어 흑암에 싸인 채‘라는 대목에 주목을 했다. 텅 비어 있음은 불교의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다른 이름이고. 책에는 구체적 언급이 없었지만 노자 도덕경 1장에 나오는 현(玄)과도 같았다. 도덕경의 현은 변화와 다양성을 모두 안고 있으며, 그곳에서 세계의 만물이 생성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융은 자기 안에 존재하는 의식과 무의식의 대면을 통한 자기 실현을 강조했다. 융의 분석 심리학은 자아와 자기를 구분하면서 자기 안에 내재해 있는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을 자아와의 대면을 통한 자기실현을 목표로 한다. 대극의 통합이라고 요약해서 말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의식과 무의식의 조화이다. 서구식 표현으로 말하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조화이고, 동양적 표현으로 말하면 음양의 조화이다. 우희종교수가 심연의 신학을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다음의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은 선과 악이라는 양면성을 넘어선 존재임을 인정하면서 그동안 소외되고, 무시되어 온 사회 약자들과 함께 하는 종교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을 타자화시켜 구원할 대상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 스스로의 문제로 인식하면서 풀어가는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가 말하는 종교에 대한 재해석은 오늘날의 종교는 심연의 영성 회복과 고통에 대한 적극적 수용과 비움의 자세로 스스로를 낮추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인간이 종교를 믿는 본질적인 이유는 진리와 구원 및 해방과 자유의 실천적 모습이라고 하였다. 그러한 측면에서 “포스트휴먼 시대에 심연이나 길이나 진리, 생명이 아닌, 인격적 신은 페기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 대목은 깊은 공감이 갔었다. 짝사랑은 상대편으로부터 아무런 댓가를 바라지 않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의 중생에 대한 사랑과도 같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도 그와 같은지는 모른다. 아무튼 우희종교수는 종교는 사회를 짝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그의 글 속에서 깊은 울림을 주는 대목이 있어 공유하고자 한다. “종교는 사회 그늘과 뒤편에서 세상의 어둠과 고통을 어루만져야 한다. 가진 자들의 시혜 모습이 아니라, 세상 어둠과 고통과 함께 하는 것이 곧 신을 사랑하는 것이자 진리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임을 자각하는 순종과 비움의 자세다.” 다만 어제도 우희종교수를 만나 ’순종‘이라는 개념은 왠지 모르게 외부 권위에 대한 복종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에 다른 표현으로 바꾸면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했었다. 하지만 함께 자리한 유명한 스님들과의 대화 속에서도 종교적인 수행을 위해서는 순종이 기본 바탕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 스님이 말이 기억에 남는다. “선생님은 개념에 너무 매달려 있네요. 개념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먹물들은 그것이 어렵지요?” 나는 먹물은 아니지만, 개념에 매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개념에 매달려 있는 것이나, 외부의 권위에 매달려 있는 것이나 모두 매달려 있는 것에는 동일하다. 그래서 모든 것에 ’열려 있음‘이 중요할지도 모른다. 물론 자기 중심을 잃어버리면 그것은 한갓 부유하는 삶에 불과할 것이다. 자아를 가지고 자기와의 끊임없는 대화가 곧 참된 종교인의 자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희종교수는 융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한 것 같았다.
    • 칼럼
    • Nova Topos
    2024-09-09
  • 헤겔 철학, 그 역사적 전개와 의미
    지금까지의 서양철학 중 가장 난해한 철학이 있다면, 과연 어떤 철학일까? 필자가 이에 대해 답변을 하자면, 당장 떠오르는 철학자는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1770년-1831)이다. 누군가 그냥 무턱대고 헤겔 철학이 다들 어렵다고 하니 도대체 어떤 철학인지 한번 읽어보자는 의도로 헤겔의 저작을 읽어보기 시작했다간 고작 몇 줄 정도만 읽고 곧장 한목소리로 무슨 말인지 몰라 너무 어렵다거나 혹은 이게 무슨 철학인지 모르겠다는 태도를 취하면서, 헤겔 철학을 그냥 포기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양상은 오늘날에만 해당하는 특이한 일이 아니고, 헤겔이 생존했던 당시에도 매번 있었던 터라 가히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독일어에 능숙한 사람이더라도 헤겔 철학 앞에서는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예외 없이 두 손을 들기 마련이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처럼 어려운 헤겔 철학이 그대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당시에도 오늘날에도 서양철학에 가장 영향력을 끼친 철학으로 평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헤겔 철학에 동조하든 반대하든 상관없이 철학자라면 헤겔 철학이 돌파해야 할 거대한 바위산임을 뜻한다. 그러나 오히려 헤겔 철학을 돌파해 보겠다는 의도로 시작했던 야심에 가득 찬 계획들이 어느 순간 그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정지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계획들은 헤겔 철학 전체가 아니라 단지 일부만을 이용해서 각자의 철학에 활용할 따름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헤겔 철학을 잘 활용한 각자의 철학이 오히려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되었으며, 헤겔 철학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음이 확인된다. 헤겔 철학은 당시에 좌파와 우파로 갈라져 치열한 논쟁을 서로 벌였으며, 그 이후로 신헤겔주의, 마르크스주의, 프랑크푸르트학파, 포스트모더니즘, 분석철학, 실용주의, 현상학, 실존주의, 해석학 등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신헤겔주의는 헤겔 철학의 관념론과 역사주의에 치중한 결과, 헤겔 철학의 변증법은 사상(捨象)해버렸다. 마르크스주의는 헤겔의 관념론을 비판하고, 합리적 핵심(der rationale Kern)인 변증법을 취했지만, 그 이후로 독단적 교조화 및 여러 분파로 분열양상을 보였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서구 마르크스주의에서 출발해서, 헤겔과 마르크스의 관계를 중도로 돌리는 데 효과적이었지만, 사회비판이론으로 귀결하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헤겔 철학의 이성 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출발했지만, 오히려 현실의 대안으로서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분석철학은 헤겔 철학의 개념론을 언어분석철학에 활용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헤겔 철학의 사변적 성격을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실용주의는 헤겔 철학에 대한 역사철학적이고 휴머니즘적인 측면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그 이상의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현상학은 독일 현상학보다 프랑스 현상학에서 헤겔 철학의 긍정적인 면을 되살리기에는 근본적으로 헤겔 철학 전체에 해당하지 않는다. 실존주의도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여기에서는 헤겔 철학의 부정적인 측면으로 귀결되었다. 해석학은 헤겔 철학을 독백이 아니라 대화라는 측면에서 다루기는 했지만, 헤겔 철학의 논리적 체계보다는 자의적 해석의 가능성만 열어 놓게 되었다. 그 외에도 비록 헤겔이 동양철학에 관해 부정적으로 평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중국과 일본 등등에서 헤겔철학과 동양철학의 비교연구도 황행(橫行)하고 있다. 이처럼 헤겔 철학의 영향력이 지대했던 것은 헤겔 철학이 학문의 거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철학적 사유를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전개했으며,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의 계기를 변증법적 사유의 힘으로 필연성을 도출해냈기 때문이다. 물론 헤겔 자신은 이를 완벽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현재 입장으로 보면, 곳곳에 허점도 있다. 그러나 유한한 삶을 영유하는 한 개인으로서 인간이 이 정도로 실로 엄청난 학문적 성취를 이루어 낸 것은 분명히 철학사에 영원히 빛날 업적이라 하겠다. 헤겔의 이러한 노력의 결과 덕분에 우리는 헤겔 철학이라는 유산을 물려받은 것이다. 그 유산은 독일에만 한정되어, 독일 계몽주의의 산물이라는 평가를 넘어서 세계적 자산이 되었다. 헤겔 철학에는 그리스 철학, 중세 신비주의, 범신론, 계몽주의, 낭만주의, 정치경제학, 사회계약론, 칸트 철학, 피히테 철학과 셸링 철학 등이 모두 녹아들어 있다. 또 논리학, 자연철학, 정신철학, 법철학, 역사철학, 종교철학, 미학, 철학사 등도 포함되어 있으며, 이 모든 분야가 서로 유기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헤겔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단순히 특정한 영역에서 몇몇 구절만을 읽고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될 경우, 헤겔 철학에 대한 오해가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는 없으며, 스스로 미로에 갇힌 채 착종(錯綜)된 모순이 휩싸이고 말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헤겔 철학에 대한 이해는 일단 고사(枯捨)하고,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봉착하면서 마치 늪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모습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헤겔 자신의 서술방식이 사변적인 탓에 야누스적 이중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때론 혼란스럽기도 하고, 분명한 일관성이 다소 없거나, 혹은 헤겔 자신의 오류로 인해 진위여부(眞僞與否)에 관한 논쟁거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헤겔 사후 지금까지도 헤겔 철학은 이러한 문제로 인해 각자도생(各自圖生)에 근거해서 전개되어왔다. 그러다 보니 헤겔 철학에는 여전히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남아 있고, 다만 누구든 그럴듯하게 타당하게 보이는 근거로 단지 각자의 주장이 제시되는 선에서 헤겔 철학을 논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종종 헤겔 철학의 핵심 개념인 변증법에 관한 논의를 회피한 채 어떤 하나의 해석만이 올바르다든가, 문자적 이해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이것은 헤겔 철학이 지니는 사유의 역동성과 역사성보다는 헤겔 철학을 개념의 논리로만 만들고 더욱 추상적으로 만드는 결과가 되었다. 더 나아가 헤겔 철학에 대한 핵심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논의하기보다 특정한 개념의 의미를 놓고 각자의 관점만을 관철하려는 틀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하는 양상은 헤겔 철학에 관한 각자의 이해방식이 빈약하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헤겔은 철학의 첫 번째 조건을 거론하면서 진리에 대한 용기와 인간 정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강조했다. 우주의 본질이 인간 정신 앞에서 열리고, 우주의 풍부함과 깊이가 인간 정신 앞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는 헤겔의 말은 다소 과장되기는 했지만,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는 한다. 어쩌면 헤겔의 이 말은 많은 사람에게 인간 정신의 위대함과 위력을 한껏 보여줌과 동시에 인간 정신을 스스로 최고의 가치라고 여길 만한 것이라 해도 괜찮다는 뜻에서 영감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반대로 부정적으로 보면, 과연 그런 것이 인간 정신에 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헤겔 철학에 대한 격렬한 비판은 바로 이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어서 심지어 헤겔 철학을 붕괴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비판이 과연 정당한지에 대한 문제는 헤겔 철학 내부에 한정해서 다루어져서는 안 되고, 오히려 헤겔 철학이 외연으로 확장될 때 비로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그와 같은 비판이 때론 헤겔 철학에 대한 오해의 산물일 수도 있을 것이다. 헤겔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첩경은 사실상 없다. 그 첩경이 어딘지를 우리가 우선 찾기보다는 헤겔 철학의 근본문제가 무엇인지에 관한 근본적 천착(穿鑿)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섣부른 얕은 지식으로 헤겔 철학을 좀 공부했다고 떠드는 자들은 이러한 근본적 문제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외면하고 뒤로 숨기 마련이다. 또 헤겔 철학에 대한 특정한 철학자의 관점이 마치 헤겔 철학 전체에 관한 이해라도 되듯이 말하는 자들도 마찬가지로 스스로 밑천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더 나아가 특정한 철학을 위한 우회로로 헤겔 철학에 접근하려는 자들도 헤겔 철학에 대한 진지한 숙고보다는 축소된 방식으로 헤겔 철학을 이해하려는 수준에 그친다. 그들은 모두 과연 헤겔 철학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알지 못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다. 심지어 일반론 수준에서 그저 그렇게 헤겔이 얘기했다는 정도가 전부일 뿐이다. 헤겔 철학은 여전히 땅속 깊이 묻혀 있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헤겔 철학의 비밀을 우리가 완전히 풀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그 가능성을 알 수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9-05
  • 철학사는 지식이 아니라 사유의 역사적 축적이다.
    철학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오랜 전통을 가진 인간 사유의 역사적 결정판이다. 21세기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철학사는 기원전 7세기 혹은 기원전 6세기를 포함해서 약 2600∼2700년 철학의 장구한 역사를 기술한다. 이처럼 장구한 철학사는 수많은 철학자 자신의 사상을 역사에 뿌려 놓았으며, 우리는 역사에 남겨진 흔적을 따라 철학자들의 사상을 역추적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철학자의 사상이든지 선배 철학자들의 영향을 배경적으로 지니지 않은 철학자는 결단코 없다. 우리가 철학사를 고찰할 때 이를 간과하는 것은 특정한 철학에 대한 이해를 교조화하는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철학자든 자신의 철학이 역사적 축적 과정을 걸치면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했다면, 그는 철학사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거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한 철학자의 사상이 시대를 거스르거나 혹은 시대를 사상으로 포착하지 못해 그대로 사장되어 버리는 것이다. 둘째, 어떤 철학자가 자신의 사상을 기록이나 저술 혹은 자료 등등으로 남기는 것이 보통인데, 그것들이 대규모 전쟁이나 종교적-정치적 탄압 등등으로 소실되어 버린 것이다. 첫 번째 경우는 비록 당대에 철학자의 사상이 꽃을 피우지 못했지만, 그 이후에 새롭게 조명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기록이나 자료 등등이 남아 있다면, 그 철학자의 사상은 철학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장식할 것이다. 두 번째 경우에는 원전의 소실로 인해 간접적인 자료들에만 의지해서 매우 제한적으로 철학자의 사상이 간략하게 소개될 것이다. 이 경우에는 간접적 자료들의 신빙성은 떨어지기 때문에, 산재해 있는 자료들에 대한 비판적 분석도 필요하고, 편집자 혹은 저자의 의도에 따라 어떤 철학자가 철학사에 들어가는지를 결정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두 가지 측면에서 보면 철학사는 계속 보충되고 개정되어야 한다. 어떤 철학이든 그 철학이 상당히 영향력이 있었고, 일정한 학파를 형성했거나 치열한 철학적 논쟁 등등이 있었다면, 분명히 특정한 철학자의 사상은 선배 철학자들의 사상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그와 같은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천차만별(千差萬別)이므로 천편일률(千篇一律)에 의해 단순히 재단하기 어렵다. 동양철학의 경우에는 특히 중국철학처럼 난세에 백가쟁명(百家爭鳴)이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그와 같은 차이는 시대의 화두와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매우 상이하다. 이른바 철학의 시대가 도래한 것인데, 이러한 논쟁은 중국철학의 성격을 추상적이기보다 실용적이면서도 동시에 이합집산(離合集散)을 하면서 서로 종합하는 방식으로 전개하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비교적 안정적인 시기에는 그 차이가 크기보다는 서로 다른 관점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은 긍정적으로 보면 어떤 철학을 심화하는 단계로 발전한 것이기도 하지만, 달리 보면 이와 반대로 중국철학이 지나치게 범주화나 도식화로 빠질 우려도 있다. 인도철학은 중국철학과 달리 전통주의와 비전통주의로 갈라지긴 하지만, 점차 힌두교를 정당화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인도철학에서도 다양한 학파가 서로 종합되고 각각의 철학자의 관점도 사뭇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이슬람 철학은 초기에는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점차로 기독교 혹은 유대교에 대한 대응으로 이슬람 교리를 정당화하는 철학으로 전개되었다. 서양철학의 경우에는 동양철학과 달리 어떤 철학이든 초기에는 유사한 출발점을 갖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철학자 자신의 독자적인 관점을 강하게 표명한다. 그리스 철학, 기독교 중심의 중세철학, 근대철학(르네상스 철학, 영국철학, 프랑스 철학, 독일 철학 등등), 현대철학 등등이 구별되지만, 각각 시대별로 다양한 학파를 만들어 일정한 흐름을 갖고 왔지만, 그 학파 내부에서도 각자의 철학적 관점이 뚜렷하게 구별된다. 고대-중세에는 종교와 철학이 강하게 결합하게 되지만, 근대-현대에는 자연과학이 발전에 힘입어 과학과 철학이 밀접하게 연관된다. 서양철학사는 시대별로 뿐만 아니라, 국가별로도 사뭇 다양한 학파나 이론 등등을 형성하면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양상은 고대철학이나 중세철학보다 근대철학 이후에서 두드러질 뿐인데, 그 까닭은 근대 이후에 철학사에 대한 체계적 서술이 그나마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서양철학을 보면, 그리스 철학이 원류이기는 하지만, 유럽 각국에 본격적인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중세에서 기독교를 정당화하는 역할만을 수행했다. 이후에 근대에 오면서 그리스 철학에 대한 향수와 더불어 종교에 대한 합리적 비판이 전개되면서, 서양철학이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서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서양철학사는 각자의 관점에 따라 서술되다 보니 자의적 취사선택(取捨選擇)에 따라 편차가 클 뿐만 아니라, 고대철학이나 중세철학의 경우에 공통된 점이 발견되기 쉬웠던 반면, 근대나 현대로 오면서 일관성이 결여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철학사는 한갓 철학자들의 생애를 열거하거나, 혹은 철학자의 삶과 관련된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미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또 철학사에서 거론된 철학자들의 사상들을 지식으로 이해하는 방식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철학사는 단순히 과거의 철학사상을 습득하는 관점에 머물고 만다. 철학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사가 역사적 축적의 결과물이고, 철학사에서 개인으로 한 철학자가 어떻게 자신의 사상을 역사의 장에서 영향력을 미쳤는지를 현재의 시점에서 우리는 평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사는 철학자들의 위인전도 아니고, 한갓 철학자들의 알려지지 않은 야사(野史)와 같은 것으로 모여서 잡담하는 소일거리도 아니다. 철학사는 오히려 사유의 보물이고, 인간 정신의 위대한 발자취로서 역사의 매 순간을 특정한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자리매김한다. 어찌 보면 철학사에서 중요한 것은 철학자의 이름이나 삶의 행적이 아니라, 철학자의 사상이 중요하다. 누군지 정확한 기록이나 자료가 없어 알 수 없는 사람이지만, 철학사에서는 상당히 박식하며, 현명하고,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자신의 논변을 펼친 철학자도 많다. 또 아무리 탁월한 철학자라도 철학사에서는 비판의 대상이 얼마든지 될 수 있다. 그가 당대에 탁월하다는 평가가 있었을지 몰라도 역사적 축적의 과정에서는 얼마든지 다른 평가도 내려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철학사의 상당한 부분은 서양철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동양철학도 서양철학의 방법론과 기준에 따라 논의되다 보니, 동양철학을 서양철학의 기준에 맞추어서 평가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동양철학의 상당한 부분이 철학사에서 배제되거나 혹은 동양철학을 종교철학이나 도덕철학으로 한정해서 논의되곤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동양철학의 역사적 발전에 관한 무지를 뜻할 뿐만 아니라 동양철학에 내재한 고유한 성격이 피상적으로 파악되는 차원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이것도 동양철학을 역사적 지평으로 갖고 오면 중국철학이든 인도철학이든 이슬람 철학이든 서양철학 못지않게 풍부한 철학의 내재적인 발전은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서양철학의 잣대가 아니라 동양철학 그 자체를 이해하고자 하는 열린 태도에 달려 있다. 세계철학사라는 좀 더 광의적 차원에서 보면 서양철학도 일부일 뿐 전체가 아니므로 서양철학에 가려진 동양철학의 성격도 역사적 지평에서 부활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세계철학사가 되려면 거기에 머물기만 해서 안 되고,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을 서로 비교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서로 종합과 통합의 지평에서 사유의 여정이 멈추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철학사가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저자가 철학사를 매우 자의적이고, 비역사적으로 서술하거나, 특정한 시대에만 치중해서 기술하거나, 핵심의 정곡을 찌르지 못하고 장황한 설명만 급급하기 때문이다. 물론 완벽한 철학사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완벽한 철학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저자의 일관된 기준에 부합해서 철학사가 서술되었는지를 확인할 필요는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철학사를 비판적으로 독해할 까닭은 분명히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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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21
  • 베네치아 공국의 형성과 역사에 관한 이야기
    베네치아 공국의 역사는 5세기 고트족과 훈족 등 여러 이민족들의 약탈을 피해 파두아(Padua), 아퀼레이아(Aqileia), 콘코르디아(Concordia), 트레비소(Trebiso), 알티노(Altino) 등지에서 온 고대 로마 출신 난민들이 베네치아 석호의 섬들로 모이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초기 정착민들의 흔적은 이들의 정착과 함께 건설된 산 쟈코모(San Giacomo) 성당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원래 이 섬에 영구히 정착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섬 전체가 습지대였기 때문에 주거 환경이 열악했다. 따라서 지대가 물러 제대로 된 건물을 지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고트족이 떠날 때까지 몇 년 만 머물 임시적인 곳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고트족은 서로마를 멸망시키고 이탈리아에 완전히 정착해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제 로마의 피난민들은 어쩔 수 없이 기한 없이 머물만한 영구 정착지를 늪지대 위에 건설해야 했다. 그들이 생각한 방법은 말랑한 토층 아래 단단한 층까지 닿는 긴 말뚝을 수직으로 섬 전체에 촘촘히 박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 엄청난 육체적인 노동을 통해 말뚝을 박고 그 위에 석판을 깔아 비로소 건물을 지어 올릴 지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6세기 비잔틴 제국이 이탈리아 일대를 수복했을 때는 라벤나 총독부를 두어 통치했는데, 베네치아와 라벤나는 해로로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베네치아는 자치적으로 운영되며 독자적으로 성장해 나갔다. 이 때 랑고바르드 족을 피해 온 난민들이 오랜 기간 동안 더욱 유입되었다. 최초의 중앙 상임 통치 위원회(Tribuni maiores)는 568년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말라모코(Malamoco)와 토르첼로(Torchelo) 등 새로운 항구들이 여러 곳 건설되었고, 말라모코는 점차 이 지역 중심지가 되어갔다. 7세기경에는 각 항구들의 규모가 발전해 자신들의 지도자를 선출하고 비잔틴 제국의 황제에게 자치를 인정받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697년에 최초의 베네치아 도제가 선출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최초의 베네치아 도제인 파올로 루치오 아나페스토 (Paolo Lucio Anafesto, 697~717)와 라벤나 총독 파울로스(Paulos)는 동일 인물이었고, 선출의 형식은 따랐지만 실제로는 아직 자치권을 인정받은 단계는 아니라는 추측이 있다. 그의 후임자는 본래 그 휘하 총사령관이었던 마르첼로 테갈리아노(Marcello Tegalliano)였다. 그러나 726년 성상 파괴령을 둘러싸고 동서 교회 간의 논쟁이 일어나자 그레고리오 2세(Gregorio II)의 촉구에 반응하여 총독의 관할 지역 군인들과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총독을 살해했고, 그들 스스로 지도자를 선출하기로 한다. 처음으로 주민들에 의해 선출된 도제는 우르수스(Ursus, 726~737)였다. 그는 레온 3세(Leon III)의 라벤나 정복을 지지해 그에게 군사들과 각종 선박을 지원했다. 이에 따라 교황은 베네치아에 각종 특권을 내려주고, 우르수스를 공식적으로 지도자로 인정하면서 히파투스(Hifatus)라는 칭호까지 내리게 된다. 751년경 랑고바르드 족은 결국 비잔틴 제국의 라벤나 총독부를 붕괴시켰지만 베네치아 석호 지역은 남겨두고 있었다. 베네치아 석호 지역은 자치적으로 운영되고는 있었으나, 여전히 공식적으로는 비잔틴 제국 령이었고, 주민들이 지도자로 선출하는 직위도 공식적으로는 비잔틴 제국 황제가 임명한 총독이었다. 이 때 총독은 말라모코 섬에 주재하고 있었으며 현재 베네치아로 알려진 리알토(Rialto) 지역은 그저 작은 섬에 불과했다. 랑고바르드 족이 이탈리아 본토를 정복하고 다니면서 이 지역으로 유입되는 난민들은 점점 더 늘어났다. 이어 775년경에는 주교직이 신설되기에 이른다. 한편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는 비잔틴 제국과의 세력 정쟁의 일환으로 지금까지 그 어떤 민족, 그 어떤 나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던 이 베네치아 석호 지대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는 아들 피핀 카를로만을 시켜 배를 건조해 베네치아 지역을 정복하는 일을 전담하도록 한다. 805년 베네치아 내부의 파벌 정쟁 및 인접 도시 그라도(Grado)와의 전쟁으로 인해 베네치아는 카롤루스에게 자신들을 보호령으로 삼아 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피핀이 베네치아를 장악하자 비잔틴 제국은 함대를 파견해 피핀을 몰아내고 베네치아를 수복하였다. 피핀은 이를 다시 수복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807년 비잔틴 제국과 임시 휴전 조약을 맺었다. 카롤루스대제에게 사신을 보낸 주모자들은 베네치아에 의해 비잔틴 제국에 넘겨졌고 이어 추방당했다. 810년 피핀은 코마키오(Comacio)의 선박을 빌려 베네치아를 공격했다. 당시 중심지였던 말라모코는 아드리아 해에 면하고 있어 방어에 취약했다. 결국 베네치아 인들은 말라모코를 버리고 리알토로 옮겨갔다. 프랑크 군은 비어있는 말라모코를 점령해 약탈하고 불태운 다음 베네치아 군을 추적했으나 리알토 군도는 계속 저항했고 물길을 잘 아는 베네치아인과 달리 프랑크 군은 얕은 석호 지대의 물길에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일부 선단이 좌초하고 만다. 그에 따라 시간이 점점 끌리며 케팔리니아(Kepalinia) 총독 파울루스가 지휘하는 비잔틴 제국 함대가 반격하자 피핀은 철수했지만 역병에 걸려 사망하게 된다. 812년 새로운 적인 제1 불가리아 제국을 견제해야 했던 비잔틴 제국은 아들과 군사를 잃은 카롤루스 대제 사이에 강화 조약이 체결되는데, 베네치아 공화국은 비잔틴 제국의 속국으로 남고, 아드리아 해 일대 교역권을 인정받는 대신 카롤루스는 비잔틴 제국에게 제위를 인정받고 동맹을 채결했다. 그리고 도제 아녤로 파르티차코(Agnello Participazio, 811~827)는 도제의 주재지를 현재 베네치아 위치인 리알토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이곳에 최초의 두칼레(Ducale) 궁과 산 마르코(San Marco) 성당을 건설했다. 이렇듯이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각종 게르만 이주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카롤루스 대제의 정복을 거쳐 신성로마제국 소속이었다가 중세 성기(High Middle Ages 11세기~13세기) 이후 하나 둘씩 정치적으로 독립하기 시작했던 다른 북이탈리아 도시 국가들과 달리, 베네치아는 애초에 로마 제국 자체의 시설과 정통성을 비교적 잘 보존한 자치 공화국으로 시작했다. 베네치아 공국은 북이탈리아의 대다수 지역들과는 달리 프랑크 제국, 신성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적이 전혀 없다. 이와 같은 독자적인 역사적 기원은 먼 훗날 중세의 전성기를 거쳐 근세 시대의 역사적 시련과 위기에도 베네치아 공화국이 열강들 사이에서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이념적 원천이 되었다. 오르소 이파토의 아들인 테오다토 이파토(Teodato Ipato)는 근거지를 에라클레아에서 말라모코로 옮겼다. 테오다토 이파토의 도제 계승은 세습 왕조를 세우려는 오르소 이파토의 의도에 따른 것이며, 베네치아 초기 역사 중 여러 명의 도제는 세습을 시도하였으나 결국에는 실패했다. 테오다토 이파토의 치세 중 베네치아는 북부 이탈리아에 유일하게 남은 비잔틴 제국 령이 되었으며, 당시 프랑크 왕국 내에서 벌어진 카롤링거 왕조 개창 등 변화하는 정치체제는 베네치아 정치 구도를 변화시켰다. 우선 확고한 친(親) 비잔틴 세력이 있었으며, 다음으로는 실질적으로 독립하고자 하는 공화주의자들이 있었다. 이 외 주요한 파벌로는 친(親) 프랑크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당시 카롤링거 왕조의 왕인 피핀 3세를 랑고바르드 족으로부터의 최고의 보호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이는 당시 교황의 피핀 3세에 대한 지지와 맞물려 주로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상대적으로 소수파였던 친(親) 랑고바르드 세력은 멀리 떨어진 비잔틴 제국 및 프랑크 제국과의 연합을 반대하고, 바다 쪽을 제외하고는 베네치아를 완전히 둘러싸고 있던 랑고바르드 왕국과의 평화 유지에 관심을 두었다. 테오다토 이파토는 암살당했으나, 그의 자리를 찬탈한 갈라 가울로(Gala Gaulo) 역시 1년 안에 그의 정적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 후임인 도메니코 모네가리오(Domenico Monegario)가 통치하는 기간 동안 베네치아는 어촌에서 무역항 및 교역 중심지로 탈바꿈했다. 이 당시 조선 산업 역시 크게 발전하였으며, 아드리아 해의 지배권을 위한 초석 역시 이 때 놓였다. 또한 이 때 최초로 호민관제가 도입되었으며, 매년 두 명의 신임 호민관이 선출되어 도제를 감시하고 권력 남용을 방지하였다. 친(親) 랑고바르드 파였던 모네가리오는 764년 축출되었으며, 에라클레아 출신의 친(親) 비잔틴 파인 마우리치오 갈바이오(Maurizio Galbaio, 764~787)가 뒤를 승계했다. 갈바이오는 긴 치세 기간 동안 베네치아를 지역적 뿐만 아니라 국제적 번영의 도상에 올렸으며, 한편으로는 세습 왕조를 세우기 위해 가장 집요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이 때 베네치아는 리알토 지역까지 확장되었다. 후임은 아들인 지오반니 갈바이오(Giovanni Galbaio, 787~804)이며, 부친과 마찬가지로 긴 치세 동안 그는 노예무역을 두고 카롤루스 대제와 충돌하였으며 교회와 대립하였다. 세습 왕조를 건국하고자 했던 야심은 804년 친(親) 프랑크 파가 오벨레리오 델리안토네리(Obelerio degli Antenori, 804~811)의 치하에서 권력을 쟁취했고 세습왕조의 계획은 분쇄되었다. 오벨레리오는 베네치아를 카롤링거 왕조의 영향권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그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여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인 피피노 카를로만의 도움을 요청함으로써 시민들의 분노를 샀으며, 810년 피핀이 베네치아를 포위했을 때 가족과 함께 도시를 떠나야 했다. 피핀은 6개월 동안 베네치아를 포위했으나, 늪지에서 발생한 역병의 창궐 등으로 인하여 결국 철수해야 했다. 피핀 자신도 여기에서 얻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병으로 인하여 몇 개월 후 사망하였다. 베네치아는 이 때의 승리로 쟁취한 독립을 이후 유지하였으며, 이는 후에 카롤루스 대제와 비잔틴 제국의 황제 니케포루스 1세(Nikeporus I) 간에 맺은 협정에서 추인되었다. 이 협정은 베네치아를 비잔틴 제국의 영토로 인정하였으며, 또한 ”다섯 도시”, 카롤루스 대제가 교황에게 베네치아 인을 축출하라고 했던 안코나(Ancona), 파노(Pano), 페사로(Pesaro), 리미니(Limini), 시니갈리아(Sinigalia)를 포함하여 아드리아 해에서 베네치아의 교역권을 인정하게 된다. 오벨레리오의 후임은 통합된 베네치아를 물려받았다. 803년 니케포루스 협정에 의거하여 카롤링거 왕조와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베네치아가 명목적으로는 비잔틴 제국의 영토로 남게 되지만 실질적으로 베네치아가 독립국임을 확인하였다. 파르티치파치오(Participazio, 811~836) 가문의 지배 하에서 베네치아는 근대적인 형태를 갖추게 된다. 가문의 첫째 도제였던 안젤로 파르티치파치오(Agnello Participazio, 811~827)는 에라클레아 태생이었으나 리알토 초기 시대의 이주자 중 하나였으며, 그의 치세는 교량, 운하, 방벽, 요새, 석조 건물 등의 건축을 통한 베네치아의 바다로의 확장으로 특징지어진다. 안젤로의 아들인 주스티니아노(Giustiniano)가 도제이던 시기에는 트리부노(Thribuno) 및 루스티코(Rustico) 등 두 명의 상인이 성 마르코의 유해를 알렉산드리아로부터 가져왔으며, 이후 베네치아는 성 마르코를 수호성인으로 삼았다 한다. 조반니 파르티치파치오의 후임인 피에트로 트라도니코(Pietro Tradonico, 800~864) 치하에서 베네치아는 먼 훗날 십자군에 영향을 미치고 수 세기 동안 아드리아 해를 지배할 수 있는 군사력을 키우기 시작하였으며, 신성로마제국의 로타르 1세와 맺은 무역 협정 상 권리는 이후 오토 1세 시절에 확대된다.
    • 칼럼
    • Nova Topos
    2024-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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