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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월 2일은 베트남 독립기념일 - 베트남 독립의 기폭제가 된 디엔비엔푸 전투 이전의 배경에 대하여 언급해본다.
    9월 2일은 베트남 독립기념일이다. 어제는 내가 머물고 있는 우즈베키스탄이 독립기념일이었는데 내가 직접 운영하고 있는 베트남의 동남아시아 해양역사고고학연구소에서 DM을 보내와 알게 되었다. 2021년 개정된 베트남 노동법에 따라 휴일이 하루였던 독립기념일(9월 2일)은 이틀 휴무로 변경되었다. 즉 9월 2일과 직전 또는 직후의 1일로 구성되는 공휴일이 되었다. 올해는 9월 2일(토요일)과 9월 1일(금요일)이 공휴일로 확정되어 대체공휴일인 9월 4일(월요일)까지 연휴로 이어진다. 따라서 매년 독립기념일은 9월 1일부터 9월 4일까지 총 4일간의 연휴를 맞게 되었다. 따라서 천천히 쓸 수 있겠지만 오늘부터 4일까지 차례로 언급해 보려 한다. 19세기 이래로 베트남은 라오스, 캄보디아와 함께 프랑스의 식민지로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또는 인도차이나 연방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 상당수는 '문명의 전파'를 표방했다. 그레서 영국이나 독일, 네덜란드, 스페인에 비해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프랑스 식민 정책의 본질은 착취에 기반하는 것이며 본국에서 발령받아 식민지로 오는 관리들은 대개 수준 이하인 자들이 많았다. 게다가 이전 농업사회의 프랑스와는 달리 영국의 산업혁명이 프랑스에서도 전개되면서 프랑스는 급격히 공업화되었고, 원자재의 물량 또한 프랑스 본토 내에서 축적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영국과 더불어 해외 식민지 사업을 본격화 했으며 지구상의 영토와 원자재 확보를 위해 두 나라는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러면서 물리적으로 충돌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대륙 내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경쟁 및 충돌은 마치 미국, 소련의 냉전 시대 경쟁만큼이나 치열했다. 그에 따라 피식민 국가들에 대한 실제 통치는 가혹할 수밖에 없었는데 확보한 영토와 원자재를 독점하고 이웃 국가와의 무역, 그로 인한 지정학적 중요성 등으로 인해 현지 수탈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그렇기에 피식민 국가들에서는 불만이 팽배해질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불만을 통해 태동한 독립운동은 식민 지배자들에게도 위협적이었기에 군대를 앞세워 혹독하게 진압하고 이에 대한 반감은 더욱 쌓여만 가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서서히 서구 제국주의 몰락해 가고 있는 사이에 더욱 심화되었다. 특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마지노선을 두고 맞섰던 프랑스는 내부에서 곡물 가격이 급상승하고 축적해 놓은 식량이 부족하여 기아 상태가 거듭되자 인도차이나에서 쌀을 대대적으로 수탈해 프랑스 국내로 공급했으며 그로 인해 인도차이나 내에서 수만의 아사자들이 생기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의 경제력은 피폐해졌고 급기야 1929년에는 뉴욕발 세계대공황이 발생하자 프랑스 본국과 식민지들도 최악의 경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1930년 인도차이나의 무장봉기는 이와 같은 뉴욕발 대공황의 여파로 인해 통킹 지역과 안남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던 프랑스는 이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전투기까지 동원하게 된다. 그 결과로 인해 수많은 인도차이나 식민지인들이 프랑스군의 공습에 의해 사망하였고 이처럼 인권을 무시하는 무차별한 진압에 봉기는 실패로 끝나게 된다. 이후 인도차이나 독립 운동의 주도권은 라오스나 캄보디아가 아닌 베트남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프랑스의 가혹한 지배와 수탈, 그로 인한 베트남인들의 곤경은 결국 중국 팔로군과 소련 볼셰비키, 프랑스의 좌파 운동가들의 영향을 받은 공산주의가 태동하여 널리 확산되었는데 이 때 코민테른의 영향을 받아 인도차이나 최초의 공산주의자로 공산주의를 태동시킨 인물은 쩐푸(Trần Phú, 陳富)라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쩐푸와 함께 중앙위원회에서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아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립시킨 인물이 바로 호치민이다. 호치민은 쩐푸와 함께 베트남 국내의 여러 급진적 사회주의 정당을 규합해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설하였다. 쩐푸는 코민테른에 참가하긴 했지만 중국 팔로군 군정에서 인정을 받은 중국파고 프랑스 공산당과 소련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배우고 온 호치민은 소련파라 각기 소련과 중국이라는 거대 공산조직의 한 파를 형성하게 된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더불어 프랑스 본토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하게 되자 인도차이나 총독부는 연합국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도리어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은 일본이 침공해 인도차이나는 일본에게 점령당하게 되면서 일본의 통치를 받게 된다. 따라서 인도차이나는 일본과 나치 독일의 괴뢰 정부인 비시 프랑스가 동맹을 맺는 최악의 형태로 마무리 되었고 사이공에는 비시 프랑스 관저와 인도차이나 일본 총독부가 들어선다. 그러나 일본과 비시 프랑스의 지배에 저항하는 운동이 거세지면서 베트남의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은 독립을 위해 결탁하게 되면서 베트남독립동맹(越南獨立同盟), 즉 베트민(일명 월맹)을 결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태평양전쟁 당시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일본과 게릴라 전을 통한 항일 투쟁을 전개한다. 일본은 나치 독일의 패전이 가까워지자 명호작전을 벌여 동맹이었던 비시 프랑스 군을 배신하여 몰아내고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바오다이를 내세워 만주국처럼 베트남 제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성립했다. 일본인들은 비시 정부를 규탄해 이들이 파시즘이라 파시스트로부터 자유 베트남을 구한다며 독립을 지지하는 척하는 쇼를 벌이게 되지만 베트남인들을 일본인들을 절대로 믿지 않으며 대일항전을 지속했다. 결국 일본의 패배와 더불어 괴뢰국인 베트남 제국 또한 붕괴되었고 일본군이 철수함에 따라 베트남은 무정부 상태가 된다. 이에 베트민은 기민하게 행동하여 다음 날인 8월 16일 전국 국민회의를 주최하게 되고 쩐푸를 대신해 호치민이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8월 25일 호치민은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9월 2일에는 호치민 자신이 쓴 독립선언문을 발표했다. 그와 더불어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베트남의 독립기념일은 9월 2일은 1945년 프랑스와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날로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진 1954년하고 다른 날이다. 따라서 현 베트남 독립기념일인 9월 2일은 1945년 베트민 건국일을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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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3
  • 유럽 중세 시대부터 이어온 상류계층, 부르주아(Bourgeoisie)의 어원과 역사
    우리는 흔히 잘 사는 사람들, 부유하거나 사회지도층격의 사람들을 통틀어 부르주아(Bourgeoisie)라고 하는데 이는 직역하면 '성 안 사람의'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이다. 사회와 경제, 정치계에서 큰 입지를 가지고 있는 상류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단어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19세기 카를 마르크스가 주장한 마르크시즘 철학에 의하면 많은 자본을 가지고 있었던 유산계급 부유층들을 지칭하기 위해 이 단어를 차용했다. 다른 학문적 용어로써 사회학에서는 이 단어를 유산계급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다. 마르크시즘 철학 내에서 이에 대응하는 단어로 흔히 사용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즉 무산계급을 말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의 경우 이 부르주아 계층을 반(反) 혁명집단이자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엄밀히 말해서 프랑스어 '부르주아'는 형용사형으로 나타나고 실제로 여기에 속한 사회계층들을 부르는 명칭은 '부르주아지'가 맞는 표현으로 보여지지만 영어로 통칭되는 언어가 아니다보니 한국에서 이를 엄밀하게 따지지는 않고 있다. 부르주아라는 단어 자체는 중세 시대인 11세기부터 등장한다. 고대 프랑크어인 Burg는 "마을"을 의미했는데 11세기부터는 발전한 마을들이 자체적으로 성벽을 축조하거나, 요새화된 성 주변에 마을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영주가 마을을 보호하면서 세금을 걷기 위해 성벽을 쌓아 도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여기 거주하는 상공인 계층을 프랑스어로 Bourgeoisie라 불렀다. 물론 이 때의 부르주아지는 정확히 표현하자면 "성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라 불러야 한다. 현재 사회에서 지칭하는 시민의 기원은 부르주아지의 등장 이후 성의 면적이 늘어나면서 도시로서의 역할을 하는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 자연적으로 인구 증가가 발생하고 도피한 농노들의 후손이자 타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 그리고 도시 근교에서 사는 사람 등을 합쳐서 통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르주아 혁명으로 알려진 일련의 절대왕정에 대한 저항혁명과 산업혁명, 그리고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제창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면서 부르주아를 통칭하는 의미는 점차적으로 달라지게 되었다. 11세기 중세의 전성기를 맞이한 유럽에서는 농업보다는 상업적인 경제 수단으로 인해 도시가 발달하게 되고 이에 성벽을 축조하고 영주로부터 특허장을 얻어 자체적으로 법을 제정하면서 법적으로 재판할 수 있는 자치권을 얻어내기 시작한다. 중세에서 근세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도시의 시민들은 영주의 간섭을 차단하기 위해, 국왕은 귀족들을 견제할 세력을 키우기 위해 서로 결탁하기 시작하는데, 국왕으로부터 의회에 참여할 권한을 얻거나 관료로 발탁되었다. 또한 자치권을 보장받는 등의 특권을 얻는 대신, 세금을 국왕에게 직접적으로 납부하고 국왕의 전시 소집 명령에 따라 참전하는 등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도시민, 또는 부르주아들의 자치 전통은 단순히 국왕을 위한 장치들 중 하나가 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계몽주의 등 정치사상의 발전에 따라 서구 각국에서 다른 양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스위스 등은 도시들이 자체적으로 동맹을 결성해서 독립적인 국가로 성립되었다. 미국 독립 전쟁도 도시민들의 자치 전통과 자유주의적 정치사상의 영향 속에서 발생한 사건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1789년에 발생한 프랑스 대혁명은 부르주아를 향한 혁명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부르주아에 대한 혁명이 성공적으로 일어난 곳에서는 자본주의 뿐만아니라 계급제도가 타파되고 시민들의 자유가 보장되어 민주주의의 기초가 완성되었다. 그런데 이는 귀족들의 2/3 이상 사라진 프랑스와 같은 국가가 유일한 형태로 남아있었다. 유럽에만 해도 독일, 영국 등 다른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귀족들이 근대 이후에 이르기까지 보전되었고 현재에도 영국의 경우, 귀족계층이 실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시기 귀족 가문들이 대거 멸문당했으며 이는 귀족 집안의 자제들이 나름대로의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기 위해 최전선에 하급 장교로 많이 지원, 참전하여 전사하여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에서 귀족의 존재는 사라진 상태에 있다. 그러나 영국의 경우를 보자면 기존의 젠트리(Gentry) 계층이 기존 귀족계층들과 큰 마찰없이 공존하였고 오히려 젠트리(Gentry)들이 귀족들 가문과 결혼하면서 하나로 통합되었다. 사실 프랑스도 시민들의 편에 선 귀족들은 왕정이 복고하자 왕위를 차지하는데 성공하는 등, 어느 정도 적당히 시민들과 타협하여 살아남은 집단들도 존재했다. 프랑스 대혁명이 바꿔 놓은 것은 귀족들을 실권 및 특권도 존재하지 않은 단순 명예 직위로 바꿔 놓은 것에 더 가까울 정도였다. 프랑스 혁명을 기반으로 한 근대의 모델은 다른 국가에도 전해져 다른 지역에서도 젠트리 등 프랑스의 부르주아에 해당하는 상공인들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그러한 프랑스의 혁명 시기만해도 정작 부르주아들은 그냥 일반 자유민이자 시민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특히 파리 시민을 배경으로 왕과 왕 주위 귀족들을 제거한 이들이 프랑스 혁명 정부의 정치인들이었고 온 시민들에게 평등하게 새로운 정권의 권리를 나누어야한다는 정파도 분명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단기간에 그칠 것으로 보였던 정치적인 혼란이 끝나지 않게 되자 혁명에 대한 피로감을 느낀 프랑스 국민들 스스로가 나폴레옹이 혼란스러운 정국을 수습해나가고 황제가 되었음에도 군주정의 복권을 지지했다. 이후, 왕정이 복고되자 혁명 이후 프랑스의 귀족 계급들은 절반 이상이 혁명 이전에는 평민이었던 신흥 귀족들로 채워지게 된다. 이들은 기존의 대토지를 갖고 있던 귀족들과 달리 상업자본가들이었으며 이들은 빠르게 출세한 사람들이다보니 기존 귀족들의 관습이나 문화를 적극적으로 모방하려고 했다. 오직 혈통과 대대로 물려받은 영지로만 귀족 계급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능력 있고 자금을 갖춘 사람들로 모두 교체되면서 당시 일어나던 산업혁명의 수혜를 입게 되었다. 그래서 같은 시기 프랑스의 귀족 문화는 이전보다도 더욱 화려하게 발전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네오 르네상스 양식, 고딕 리바이벌 양식, 네오 비잔틴 양식 등 18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들을 세우고 그 이전보다 화려하고 거대한 규모의 건축 양식들이 대유행을 타게 된다. 이후 그저 시민 계급을 말하는 '부르주아'라는 단어는 화려하고 귀족적 이미지가 붙은 것으로 바뀌게 되었고 프랑스의 신흥 귀족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관념으로 탈바꿈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들을 전체적인 타락 계층으로 고정시켜버린 사람이 카를 마르크스이다. 마르크시즘에서 막스 자신이 살던 시대를 자본주의 사회로 규정하고 유산 계급인 부르주아와 무산 계급인 프롤레타리아로 나누어지는 계급 사회로 규정했다. 이를 토대로 부르주아는 계급적으로 매우 부유하고 높은 직위의 인물들로 변하게 된다. 이후 학문적인 세분화가 이루어지면서 역사학과 중세 및 근세를 다루는 부분에 있어 부르주아라고 하면 마르크시즘 및 현대적 용법의 부르주아와 다른 뜻으로 분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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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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