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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프리카의 산유국, 가봉 쿠데타
    중서부 아프리카의 석유 부국 가봉은 60년 가까이 봉고 가문이 통치해 온 전형적인 독재 국가다. 1960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래, 가봉의 국부(國父)라 할 수 있는 레옹 음바(Léon M'ba, 1902~1967) 대통령을 거쳐 오마르 봉고(Omar Bongo, 1935~2009) 대통령이 42년 동안 장기 집권을 해왔다. 국부인 레옹 음바가 1967년 11월 28일에 사망하자 그 4일 뒤인 1967년 12월 2일에 오마르 봉고는 정식으로 대통령에 되었다. 임기 초반에는 전임인 레옹 음바의 반대파들을 석방하고 복권시키면서도 레옹 음바가 이미 일당제를 구축한 기반을 이어 받아 1968년 3월부터 1990년 5월 22일에 개헌할 때까지 가봉 독립당(PDG)라는 여당만 허용되는 일당 독재 체제를 만들어 철권 통치를 휘둘렀다. 오마르 봉고는 국방부, 정보부, 기획부, 내무부의 장관과 가봉 총리까지 겸직했고, 1973년에는 첫 대통령 선거에 유일하게 대통령 후보로 나가 99.56%의 지지율로 당선되었다. 이어 같은 해에 있던 오일쇼크로 인해 원유 가격이 폭등하자 봉고는 이를 바탕으로 석유를 팔아 엄청난 경제성장도 이루었으며 그로 인해 벌어들인 자금을 바탕으로 도로, 철도, 항구, 항공사, 발전소 등의 인프라도 구축해가며 해외에서 '가봉의 기적'이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아프리카에서는 경제적 선진국이라 불릴 정도로 성장했다. 1979년에 있던 선거에서도 봉고는 다시 99.96%로 당선되었으며, 1986년에도 99.97%로 또다시 당선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의 선거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어차피 가봉 독립당이라는 1개 밖에 없는 정당에 혼자 출마했으니 득표율이 100% 가까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요식행위처럼 남겨 놓은 이름 뿐인 야권 인사들이 대권에 도전했으나 그 또한 보여주기 식이었다. 그러던 차에 오마르 봉고는 2009년 6월 8일에 요양차 머무른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대장암으로 사망했다. 이후 선거에서 오마르 봉고의 죽음에 따른 동정론 등이 대두되었고 아들인 알리 봉고 온딤바(Ali Bongo Ondimba)가 2명의 야당 후보와 경쟁하여 득표율 41.73%로 당선되어 현재까지 14년 동안 나라를 이끌어왔다. 그러나 2009년의 이 선거도 부정선거라는 의혹이 재기되었고 야가봉의 제2의 도시인 포르장틸에서 폭동이 일어나는 등, 여러 곳에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이에 가봉 의회는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재선거를 승인했고 2009년 10월 12일에 재선거가 실시되었지만 봉고 온딤바는 41.79%의 득표율을 얻어 의심의 여지 없이 당선을 확정했다. 이후 2016년 대선에서는 봉고 대통령이 대부분의 지역에서 상대 후보인 장 핑에게 뒤쳐졌으나 오트 오고웨(Haut-Ogooué) 주에서 투표율 100%, 득표율 96%를 받아 불과 5,600표 차이로 재선되었으며, 사실상 가봉에서 이 또한 부정 선거가 이루어졌음이 인정된 꼴이 되었다. 봉고 온딤바는 미국에 방문해 힐러리 클린턴과 대담을 갖기도 하고, 한국에도 방문하여 TV 예능인 무한도전 배달의 무도 특집에 몸소 출연하여 예능인 정준하와 사진을 같이 찍기도 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2023년 8월 26일 대선과 총선이 치러졌다. 야권에서는 정당 Alternance 23의 알베르 온도 오사 후보가 강력한 대권 주자로 떠오른 상황이었다. 그러나 선거 당일 투표소가 제 시간에 열리지 않고 오후 늦게 되어서야 열리면서 시민들의 투표를 방해하면서 논란이 되었고 선거 중 전국의 인터넷이 차단되어 3일 넘게 복구되지 않는 등 대놓고 선거를 조작한다는 의혹이 생기기 시작했다. 선거 후 3일이 지난 8월 30일, 가봉 선거관리위원회는 오전 3시 30분에 알리 봉고 현 대통령이 64.27%의 득표율로 3선에 성공했다고 발표하면서 이는 기정사실화 되었다. 그러자 전국 각지, 특히 수도 리브르빌 등의 대도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였다. 군부 또한 봉고 가문에 대해 오랜 불만을 갖고 있었다. 특히 브리스 올리기 응게마 장군은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에 주둔한 러시아 용병 그룹 바그너의 전격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응게마 장군은 우선 수도 리브르빌을 경비하고 있던 사령부를 장악하고 수도경비군을 움직여 주요 정부 부처 건물, 텔레비전, 라디오 송신소, 인터넷 기지국 등을 장악했다. 같은 날 아침 국영방송 Gabon 24를 통해 "우리는 현 정권에 종지부를 찍음으로써 국가의 평화를 수호하기로 결정했다"고 쿠데타 동기를 밝혔고, "봉고의 책임감 없고 예측 불가능한 통치는 우리 사회의 결속력을 약화시켜 국가를 혼란에 빠뜨릴 위험이 있다"면서 쿠데타 발생을 알렸다. 이어 군은 지난 26일 실시된 선거 결과의 무효화를 선언했으며, 정부 기구를 해산하고, 국경 폐쇄와 일부 지역에 대해 통행금지를 시행했다. 봉고 온딤바 대통령은 쿠데타 과정에서 가족과 함께 가택연금을 당했고, 그의 아들 누레딘 봉고와 3명의 고위 정치인이 체포되었다. 쿠데타 수장인 브리스 올리기 응게마는 프랑스 언론 르몽드와의 인터뷰에서, 군 장성들이 모인 회의에서 과도정부를 이끌 지도자를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으며 결국 응게마 본인이 과도정부 지도자로 추대되어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난 부르키나파소나 니제르 쿠데타와는 다르게 응게마 장군은 봉고 온딤바 전 대통령의 친척이었다. 게다가 부패 의혹 또한 상당해 국민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2020년 이후 현재까지 아프리카 중서부에서는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말리, 부르키나파소, 기니, 차드, 수단, 니제르, 가봉 등 8개국에서 쿠데타가 발발했다. 대부분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였고 독립 후 미국과 가까웠으나 최근 러시아, 중국과 관계가 강화되어 친러, 친중 세력들이 계속 정권을 잡는 사례가 빈번해지고 있다. 미국과 서유럽이 비용 부담, 국내 정치로의 치중 여파로 아프리카에서 발을 빼는 모습이 뚜렷해지면서 곳곳에서 비슷한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그간 가봉 정부와 밀접했던 프랑스조차 쿠데타 음모를 사전 입수하지 못했고 쿠데타 발발 이후에도 군부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러시아는 민간 용병회사 바그너 그룹 등을 통해 수단, 말리 등의 독재 정권을 비호하고 치안을 유지해주는 대신 광물 채굴 등 각종 이권 사업을 따냈다. 서방과 결탁한 지도자들이 독재와 부패로 일관하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 또한 민심 이반을 불렀으며 가봉의 경우, 원유, 다이아몬드 등 풍부한 원자재를 보유했지만 234만 명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빈곤에 시달려 왔다. 결국 친러 군부 응게마 장군이 대통령 선거에 도전할 것이고 쿠데타를 일으킨 친러 세력이 가봉을 통제함에 따라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응게마 장군이 차기 가봉의 대통령이 될 것은 유력해보인다. 가봉이 친러시아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면 인근 적도기니, 카메룬, 콩고, 콩고민주공화국까지 여기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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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9-11
  • 오스트로네시아 인종에 관한 정리 및 분포
    오스트로네시아 인종에 관한 고고학적 근거가 동남아시아와 말레이시아 지역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남부 지역과 중국 본토 지역 중에서 광서, 광동, 강서, 복건 지역 사이의 기술적인 관련을 증명하고 있다. 반면 지금까지 고고학적과 언어학적 조합의 근거로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화남(華南) 지역과 대만 기원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지침으로 해석되어 왔다. 특히 한족들이 중국 전체의 통치 패권을 잡기 전에는 오스트로네시아어계의 화자들은 대만을 지나 중국 남부 해안에서 통킹 만까지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같은 시기, 한족들은 남진하여 양자강과 그 강변 어귀에서 통킹만에 이르는 해안 지역들에 대해 모든 본토에 남아 있는 오스트로네시아 어계 부족들을 중국인들과 동화시켰다. 오늘날 그러한 동화 과정은 대만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 모든 오스트로네시아어는 10개의 하위 군으로 분류되었다. 모든 비포모사어는 하나의 하위분류로 하고, 나머지 9개는 대만에서만 알려져 있는데 이들 모두 오스트로네시아어계이고 이 어문을 사용하는 종족들이 오키나와의 원주민들과 연결되어 있다. 일본의 오키나와 현과 가고시마 소속의 아마미 군도(奄美群島) 지역이며, 류큐 민족이 이곳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 지역은 옛 류큐 왕국의 영토였지만 그 이전의 신석기 시대를 영위한 종족들은 대만 아미족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물론 류큐 이외 지역에도 류큐 민족이 다수 살고 있는 곳들이 있다. 1920~30년대 심각한 경제 위기인 소철 지옥(ソテツ地獄)을 겪으면서 많은 수가 생계를 위해 일본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오사카 타이쇼구(大正区), 해외에서는 미국 하와이와 브라질에 많은 류큐인들과 2, 3세들이 살고 있다. 제주도에도 몇몇 류큐계 인종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일본 내 류큐인의 인구는 15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며, 해외에 30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참고로 오키나와 어 모어 화자가 40만~90만 명 정도 되고, 류큐어에 속하는 다른 언어들을 합치면 10만 명 정도 된다. 류큐 제도 주민들 중 절반은 류큐어를 일상 언어로 사용하고 절반은 일본어를 일상 언어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집계된 일본 전체인구의 약 1%가량으로 나타난다. 이에 류큐인들이 대개 일본에서 소수 민족으로 인식되기도 하는데 이들은 전체 인종에서 반 이상이 오스트로네시아계 혼혈 민으로 주장되기도 했다. 이러한 유형이 대만에서 동남아 내륙, 말레이시아, 그리고 먼 거리에 있는 태평양까지 이어진 농경 부족의 확산에 대해 가장 잘 설명이 될 수 있는 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논란이 되어 왔다. 비록 폴리네시아 인들의 이동으로 볼 수 있는 북태평양 군도에서 뻗어 나갔던 폴리네시안 특급열차(Polynesian express train)라 불리는 모형이 광범위하게 유효한 데이터로 주장되고 있지만, 여러 우려들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 현 시점이다. 이 데이터에 대한 반론 및 대안은 멜라네시아 또는 동남아시아에서 오스트로네시아어족들의 토착 기원설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동남아시아에서 재배된 가장 이른 시기 코코넛의 게놈 분석은 오스트로네시아 인들이 코코넛 작물을 재배하는 것을 기준으로 어떻게 분포되어 나갔는지 리처드 마르틴(Richards Martin)에 의해 게놈 분석표가 발표되었다. 이들 코코넛들의 10개 미세 위성 유전자를 조사함으로 인하여, 오스트로네시아 인종 게놈 연구원들은 코코넛에 2개의 유전학적인 뚜렷한 부분 모집단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인도양에서 기원한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태평양에서 기원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두 가지의 개체 사이에, 유전자 전이의 혼성이 있었다는 근거가 발견되면서 이 또한 여러 논란이 전개되고 있다. 이는 코코넛이 해양 살포에 대해 이상적으로 적응했다는 것을 가정하면 한 곳에서 모든 개체가 바다에 떠서 다른 개체로 갔다는 것도 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혼성이 발생한 위치는 마다가스카르와 아프리카 동부 해안으로 제한되며, 세이셸은 배제되었다. 이러한 혼성 위치에 대한 다양한 메커니즘과 분포 여부는 오스트로네시아 항해자들의 무역 항로로 알려진 것과 동시에 발생된 것으로 보여 진다. 더불어 창시자 효과로부터 기인한 개체군 병목 현상을 경험했던 남미의 동부 해안에 있는 유전학적으로 나타난 뚜렷한 코코넛 하위 개체가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선조들은 태평양 코코넛을 재배했던 종족들로 그것은 오스트로네시아 인들이 미국 대륙까지 항해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여전히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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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0
  •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발발과 베트남의 독립으로 가는 길
    호치민이 1945년 9월 2일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한 이후,인도차이나 남부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은 베트남 남부 지역에 선거를 통한 독립을 지지하는 발언들을 자주 했지만 본래 프랑스 영토였기 때문에 결국 프랑스에게 물려주고 철수했다. 사실 영국은 인도 제국과 영국령 버마의 독립 요구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들 인도차이나에 신경 쓸 처지가 되지 못했다. 이에 병력 부족으로 인해 비시 프랑스의 나치 잔당들과 일본군 포로 일부까지 인도차이나 내부의 치안 유지에 동원하게 되자 영국 세력은 국민혁명군보다 더 큰 미움을 받게 된다. 이와 같은 영국의 정책은 프랑스 제4공화국에게 다시 한 번 베트남을 넘겨주려고 하였으며 영국은 식민지 국가들에게서 증가하는 민족주의가 주변의 인도나 버마에 큰 영향력을 줄 수 있다 판단해 베트민과 협상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영국은 계엄령을 선포하는 등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정책을 시행했다. 이로 인해 영향력 있던 베트민과 협상을 한 번도 하지 않고 들어간 프랑스는 베트남이 순순히 식민지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프랑스 제4공화국은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정식으로 인정해 주는 듯한 노선을 밟았다. 이는 영국과의 합의에 따른 것이었지만 막상 영국이 철수하자 이를 뒤엎은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베트민 주도의 베트남 독립국가 건설을 인정하지 않았고 종전 후 베트민 지도자 호치민과 프랑스 사이에 맺어진 예비 협정까지 파기하며 북쪽으로 프랑스군을 진격시켜 재식민화 하려고 했다. 1946년 11월 23일에는 하이퐁 항구에 프랑스 해군이 비행기 폭격을 동반한 함포사격을 가하면서 전쟁의 시작을 알렸고 이 하루 동안 최소 6,000명의 베트남 시민들이 사망했다. 1946년 12월 19일, 호치민은 프랑스와의 전쟁을 선포했고 이것이 사실상의 베트남 독립 전쟁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시작이 되었다. 프랑스는 이 전쟁에서 프랑스인 233,467명, 외인부대 72,833명, 북아프리카인 122,920명, 아프리카인 60,340명 등 막대한 병력을 투입했다. 여기에 프랑스에 협력하는 같은 베트남인들의 병력도 추가되었다. 프랑스는 1947년 당시, CEFEO라 불리는 프랑스 극동원정군은 인도차이나에서 11만 5천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후 6.25 전쟁 등의 발발로 인해 미국의 개입이 본격화되는 등 전쟁이 절정을 향해 가던 1951년과 1954년 사이에는 17만 5천명의 병력들이 베트남에 파견되었다. 이들은 5만 4천명의 프랑스 육군, 1만 8천 명의 서아프리카인, 3만 명의 북아프리카인, 2만 명의 외인 부대원, 5만 3천 명의 프랑스 군과 프랑스 장교들의 지휘를 받는 베트남인, 5천 명의 해군, 1만 명의 공군, 현지인 보조병 5만 5천명으로 구성되었다. 1953년부터는 바오다이 황제의 통치 하에 있던 베트남 제국의 군대인 베트남 국민군 15만명이 추가되면서 압도적인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는 프랑스 군에 있어 매우 인상적인 규모이지만 대 게릴라전의 특성 등의 이유로 대부분의 병력은 방어적인 진지전 임무를 수행했고 1953년 기준으로 기동전에 투입 가능한 병력은 7개 독립여단과 8개 공수대대, 소수의 강상 순찰부대로 국한되어 실질적으로는 전체 병력에 비해 상당히 적었다. 반면 보 응우옌 잡 장군이 이끄는 베트민 군은 압도적인 프랑스 군에게 일방적으로 공격을 받은 후 북부 산악지역으로 패퇴하여 게릴라 전으로 프랑스군과 싸우게 되었다. 1947년 10월 프랑스군은 비엣박을 대대적으로 공격하게 되었고 여기에 프랑스군이 우세하면서 호치민이 포로로 잡힐 뻔 했다. 그러나 비엣박 전투 이후 4년 동안 베트민은 소극적인 게릴라 공세를 계속하며 그 사이 정치 운동을 통해 북부에서의 입지를 굳건히 다지고 민중의 압도적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반대로 프랑스는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세네갈, 마다가스카르 등 다른 프랑스령 해외 식민지에서도 독립 운동이 가중되자 전력의 분산화는 불가피해졌고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재건을 할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남의 나라 전쟁터에 젊은이들을 내는 것에 전국적으로 시위가 발생했다. 그로 인한 프랑스 국내 여론의 악화와 더불어 미국, 영국 등 여타 서방 국가들의 외교적 압력으로 인해 서서히 베트남에서 우위를 상실했다. 설상가상으로 샤를 드골의 외아들인 필리프 드골이 베트남에서 참전하고 있었는데 베트민 게릴라 군에 의해 기습을 받아 패퇴했으며 필리프 드골은 베트남 땅에서 전사할 뻔했다. 그러나 1947년에 반전이 일어난다. 베트민은 원래부터 베트남 국민당 등의 북쪽에 기반한 비(非) 공산주의 정당들과 심각한 마찰을 빚고 있었다. 이에 1947년이 되자 그 외에도 베트민과 대 프랑스 공동전선을 이루고 있던 호아하오교, 까오다이교 등을 배신하고 그들의 주요 수장들을 납치하는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호아하오교의 교주인 후인푸소가 사망했고 까오다이교의 군사 지도자 쩐꽝빈 역시 베트민에게서 배신을 당한 뒤, 공산주의를 적대하게 되었다. 당연히 이와 같은 베트민의 배신은 베트남 전체의 민족주의자들의 공분을 사게 되었고, 민족주의자들은 모두 반공주의 노선으로 갈아타게 되었다. 이와 같은 급격한 변화에 대해 프랑스의 상당히 영리하게 대응했다. 원래 이들 남쪽 종교파 민족주의자들은 독립운동가로써 프랑스와는 적대 관계였으나 당장 베트민은 매우 비열한 행위를 했던 원수나 다름없었다. 프랑스는 이와 같은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의 벌어진 틈을 이용하여 민족주의자들에게 적절한 유화책을 구사하면서 협력관계를 제안했다. 비록 이와 같은 협력관계는 민족주의자들의 반프랑스주의로 인해 프랑스 측과 마찰이 매우 심했고 서로간에 신뢰도 없었으나 어쨌든 프랑스는 베트남 전체의 공공의 적이라는 위치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당장은 군사적 영향력을 남겨둘 수 있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까오다이교의 한 젊은 장교에 의하면 이와 같은 프랑스와의 협력을 결정했던 것조차 반발하여 스스로의 군사조직을 조직해 베트민과, 프랑스 모두를 상대로 전투를 치르면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1949년 중국의 제2차 국공내전에소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자 북쪽은 완전히 공산주의자들의 우세로 돌아서게 되었다. 베트남 국민당의 후원자였던 중국 국민당은 대만으로 밀려났고 대륙을 장악한 중국 공산당은 베트민을 적극 지지하면서 이들을 지원했다. 1950년 1월 모택동의 중국은 호치민이 이끌던 베트민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면서 무기와 장비를 지원하게 되었고 베트남 국경 지대 근처에서 베트민의 군사훈련까지 지원해 줬다. 중공의 지원을 받은 베트민들은 1950년 9월 중순 국경지역 전체에 걸쳐 프랑스군의 취약 시설을 공략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개시되었다. 중국-베트남의 국경 지대인 동 케(Dong Ke)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베트민 군은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지원받은 바주카포와 박격포, 무반동총으로 중무장했고 결국 프랑스군은 동 케에서 3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며 패퇴했다. 베트민은 동케 전투의 승리를 시작으로 자신감을 얻어 홍 강 삼각주 지역 전체를 장악한 뒤 1950년 12월에 총공격의 계획까지 세우게 된다. 이와 같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베트남인들과 프랑스와 독립전쟁 및 같은 베트남인끼리의 이념 싸움으로 변질되고 있음을 감지한 미국은 일단은 프랑스를 지지했으나 미국의 베트남에서 궁극적인 목표는 공산주의와 식민주의를 모두 적대하는 '제3의 이념'을 내세우는 정권을 수립하는 것이었고, 이는 몇 년 뒤 남부 사이공을 중심으로 베트남 공화국 체제가 들어서고 나서야 실현되었다. 1949년 중국의 내전이 모택동의 승리로 종결되고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남에 따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한 물자 지원량은 늘어났고 6.25 전쟁 휴전 협정이 막 시작되던 1951년 시점에는 프랑스 전쟁 비용의 80%를 미국이 지원하게 되었다. 당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미국이 전쟁터에 군사를 파병하지만 않았을 뿐이지 사실상 전쟁에 개입한 것과 다름없었다. 결국 미국은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에는 군대를 파견했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는 프랑스를 도와 막대한 물자만 지원했다. 결론적으로 미군이 유엔군과 함께 6.25 전쟁의 위기 상황에서 한국을 돕기 위해 군을 파병한 것이 어쩌면 대한민국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최대 수혜국이 된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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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7
  • 사우디아라비아의 예멘 국경에서 에티오피아 난민 학살에 대한 미국의 이중성
    사우디아라비아와 예멘의 국경 지대에서는 지난 15개월 동안 어린이를 포함한 최소 655명의 난민들이 살해됐다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경 수비대들이 비무장 상태의 이주민 무리들에게 박격포 등 폭발성 무기로 공격하고, 가까이 접근한 이주민에게는 직접적인 총격을 가했다는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경수비대들이 이주민을 구금한 채 성적으로 학대한 정황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에티오피아인들로써 2014년부터 이어진 후티 반군과 정부군 간의 내전을 피해 예멘을 거쳐 사우디로 이주하고 있다. 내전은 2015년 사우디가 주도하는 정부 측 연합군이 개입하면서 더 큰 전쟁으로 번졌다. 에티오피아에서는 티그라이 내전으로 인해 2021년 6월 21일에 총선이 실시되었고 아비 아머드가 새로이 당선되어 2022년 11월 평화협정이 체결 이후 3개월 만에 처음으로 북부 티그라이 반군 지도부와 만나면서 평화를 논의하고자 했지만 티그라이에서 연방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방 의회 선거에 돌입하면서 다시 내전이 발발했다. 이 내전이 계속 진행되면서 에티오피아 난민들이 예멘을 통해 사우디아라비아로 건너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후티 반군을 지원하는 이란과 국교를 재수립하며 갈등이 다소 누그러졌지만 국경 상황은 여전히 험악한 상황이다. 망명을 위해 고국을 떠나는 에티오피아 이주민들의 주요 이동 경로를 보면 이들은 아프리카 동부의 국가 지부티에서 출발, 아덴만을 건넌 뒤, 사우디아라비아 국경까지 예멘 본토를 가로질러 이동하고 있다. HRW 보고서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경 경비대는 여성과 아동이 다수 포함된 비무장 상태의 이주자들을 향해 거침없이 발포했다고 한다. 이들은 박격포까지 동원해 수십 명을 단번에 학살하기도 했다. 지난해 9월 이주자 200여 명과 함께 국경에 접근했던 한 생존자는 “갑자기 폭발물이 날아왔고, 일행 대부분의 몸이 으깬 토마토처럼 갈가리 찢어졌다”고 말했다. 이들 후티 반군 군인들 중 상당수가 난민에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보고 이들 난민들에게 저지른 2020년대 들어 최악의 학살극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경 수비대들은 이주자들을 구금한 채 각종 학대 행위도 했다. 이주자에게 총에 맞을 신체 부위를 스스로 고르게 한 뒤 총을 쏘기도 하는 악질적인 행위를 일삼았다. 특히 이들은 남성 이주민에게 여성 일행을 성폭행하라며 성적인 학대도 일삼았다. 한 17세 소년은 “한 명이 거부하자 경비대는 그를 즉시 처형했고 곧바로 다른 남성에게 ‘네가 하라’고 강요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추방 명령을 받아 예멘으로 압송되던 이주자들도 즉각 공격을 당했다. 20대 여성 생존자는 “사우디아라비아 국경 수비대들이 우리를 차에서 내리게 한 뒤 도망가라고 소리쳤다. 1㎞ 정도 달아나 쉬고 있는데 박격포를 쐈다”고 증언했다. 지난해 3월부터 올해 6월까지 살해된 이주자는 최대 수천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 상황을 지켜본 HRW의 연구자들은 여러 증언들을 토대로 산 비탈 전체에 시신이 흩어진 ‘킬링필드’로 당시를 묘사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국가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프로 골프 리그와 축구 클럽을 사들이는 데 수십억 달러를 쓰면서 이와 같은 인권을 무시한 범죄에 대해서는 관심을 쏟지 않는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한편 2022년 3월부터 올해 6월까지 사우디아라비아 국경을 넘으려고 한 42명의 에티오피아 이주민 및 망명 신청자의 증언들과 350장의 SNS 사진, 동영상과 위성 사진을 비교 분석했다. 이를 바탕으로 이들 난민들은 예멘과 사우디아라비아 국경의 이주민들 이동 경로를 따라 각종 폭발물들과 총격으로 살해된 시체들이 발견되고 있다고 전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측은 이 주장에 대해 자신들이 벌인 행위에 대해 근거가 없으며 이와 같은 인권보고서를 신뢰할 수 없다고 전했다. 사우디아라비아 당국은 지난 해에도 유엔이 자국 국경수비대가 이주민을 조직적으로 살해했다고 지적했을 때도 이를 강하게 부인했었다. 빈 살만의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과 서방의 편에 서지 않고 이란과 화해했으며, 러시아-중국과 한 편이 되자 나는 빈 살만과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에 찍혔기 때문에 갖은 페이크 뉴스의 타겟이 될 것으로 작년에 예상했는데 올해부터 빈 살만을 향한 명확하지 않은 뉴스들이 나오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아킬레스건은 이슬람 신정체제로 인하여 발생하는 인권 문제에 있다. 미국 고위 외교관들은 작년 가을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경수비대가 예멘 국경에서 에티오피아 이민자들을 향해 총기를 난사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는데 이를 공론화하지 않았다. 당시 리처드 밀스 유엔 주재 미국 부대사가 예멘 내전 사태를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사우디아라비아 국경에서 발생한 이민자 학대 의혹에 대해 여전히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이에 대해 얼마나 많은 아프리카인이 사망했는지에 대해서는 끝내 침묵을 지켰다. 이미 작년 12월에 유엔과 비공개 회의를 열고 사망자와 부상자 수 등의 구체적인 자료를 받았는데도 말이다. 미국은 대선을 앞두고 있다. 헤리스와 민주당은 재선에 성공하기 위해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여 자신의 외교 치적으로 삼으려 한다. 물론 아랍 세계와 유대 세계인 이스라엘이 이란과 같이 외교적 화해를 하게 된다면 이는 십자군 원정 이래 1,000년 이상 이어온 유대와 아랍이 손을 잡았다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화해 이상의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되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종교적으로도 유태교와 이슬람교가 화해할 수 있는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는 것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를 만들고 민주당과 현 대통령 바이든의 치적을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의 이같은 만행에는 일부러 눈 감고 묵인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자말 까슈끄지 사건 때, 이에 대한 인권 문제에 사우디아라비아 추궁했던 미국이, 결국 에티오피아 난민 학살에는 입을 다무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 결론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 개선과 유가 문제, 이스라엘과의 외교적 화해 등 복잡하게 얽혀져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외치던 "인권(Human rights)"은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얼마든지 이용 가능한 수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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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7
  • 9월 2일은 베트남 독립기념일 - 베트남 독립의 기폭제가 된 디엔비엔푸 전투 이전의 배경에 대하여 언급해본다.
    9월 2일은 베트남 독립기념일이다. 어제는 내가 머물고 있는 우즈베키스탄이 독립기념일이었는데 내가 직접 운영하고 있는 베트남의 동남아시아 해양역사고고학연구소에서 DM을 보내와 알게 되었다. 2021년 개정된 베트남 노동법에 따라 휴일이 하루였던 독립기념일(9월 2일)은 이틀 휴무로 변경되었다. 즉 9월 2일과 직전 또는 직후의 1일로 구성되는 공휴일이 되었다. 올해는 9월 2일(토요일)과 9월 1일(금요일)이 공휴일로 확정되어 대체공휴일인 9월 4일(월요일)까지 연휴로 이어진다. 따라서 매년 독립기념일은 9월 1일부터 9월 4일까지 총 4일간의 연휴를 맞게 되었다. 따라서 천천히 쓸 수 있겠지만 오늘부터 4일까지 차례로 언급해 보려 한다. 19세기 이래로 베트남은 라오스, 캄보디아와 함께 프랑스의 식민지로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또는 인도차이나 연방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 상당수는 '문명의 전파'를 표방했다. 그레서 영국이나 독일, 네덜란드, 스페인에 비해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프랑스 식민 정책의 본질은 착취에 기반하는 것이며 본국에서 발령받아 식민지로 오는 관리들은 대개 수준 이하인 자들이 많았다. 게다가 이전 농업사회의 프랑스와는 달리 영국의 산업혁명이 프랑스에서도 전개되면서 프랑스는 급격히 공업화되었고, 원자재의 물량 또한 프랑스 본토 내에서 축적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영국과 더불어 해외 식민지 사업을 본격화 했으며 지구상의 영토와 원자재 확보를 위해 두 나라는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러면서 물리적으로 충돌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대륙 내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경쟁 및 충돌은 마치 미국, 소련의 냉전 시대 경쟁만큼이나 치열했다. 그에 따라 피식민 국가들에 대한 실제 통치는 가혹할 수밖에 없었는데 확보한 영토와 원자재를 독점하고 이웃 국가와의 무역, 그로 인한 지정학적 중요성 등으로 인해 현지 수탈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그렇기에 피식민 국가들에서는 불만이 팽배해질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불만을 통해 태동한 독립운동은 식민 지배자들에게도 위협적이었기에 군대를 앞세워 혹독하게 진압하고 이에 대한 반감은 더욱 쌓여만 가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서서히 서구 제국주의 몰락해 가고 있는 사이에 더욱 심화되었다. 특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마지노선을 두고 맞섰던 프랑스는 내부에서 곡물 가격이 급상승하고 축적해 놓은 식량이 부족하여 기아 상태가 거듭되자 인도차이나에서 쌀을 대대적으로 수탈해 프랑스 국내로 공급했으며 그로 인해 인도차이나 내에서 수만의 아사자들이 생기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의 경제력은 피폐해졌고 급기야 1929년에는 뉴욕발 세계대공황이 발생하자 프랑스 본국과 식민지들도 최악의 경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1930년 인도차이나의 무장봉기는 이와 같은 뉴욕발 대공황의 여파로 인해 통킹 지역과 안남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던 프랑스는 이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전투기까지 동원하게 된다. 그 결과로 인해 수많은 인도차이나 식민지인들이 프랑스군의 공습에 의해 사망하였고 이처럼 인권을 무시하는 무차별한 진압에 봉기는 실패로 끝나게 된다. 이후 인도차이나 독립 운동의 주도권은 라오스나 캄보디아가 아닌 베트남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프랑스의 가혹한 지배와 수탈, 그로 인한 베트남인들의 곤경은 결국 중국 팔로군과 소련 볼셰비키, 프랑스의 좌파 운동가들의 영향을 받은 공산주의가 태동하여 널리 확산되었는데 이 때 코민테른의 영향을 받아 인도차이나 최초의 공산주의자로 공산주의를 태동시킨 인물은 쩐푸(Trần Phú, 陳富)라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쩐푸와 함께 중앙위원회에서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아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립시킨 인물이 바로 호치민이다. 호치민은 쩐푸와 함께 베트남 국내의 여러 급진적 사회주의 정당을 규합해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설하였다. 쩐푸는 코민테른에 참가하긴 했지만 중국 팔로군 군정에서 인정을 받은 중국파고 프랑스 공산당과 소련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배우고 온 호치민은 소련파라 각기 소련과 중국이라는 거대 공산조직의 한 파를 형성하게 된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더불어 프랑스 본토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하게 되자 인도차이나 총독부는 연합국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도리어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은 일본이 침공해 인도차이나는 일본에게 점령당하게 되면서 일본의 통치를 받게 된다. 따라서 인도차이나는 일본과 나치 독일의 괴뢰 정부인 비시 프랑스가 동맹을 맺는 최악의 형태로 마무리 되었고 사이공에는 비시 프랑스 관저와 인도차이나 일본 총독부가 들어선다. 그러나 일본과 비시 프랑스의 지배에 저항하는 운동이 거세지면서 베트남의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은 독립을 위해 결탁하게 되면서 베트남독립동맹(越南獨立同盟), 즉 베트민(일명 월맹)을 결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태평양전쟁 당시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일본과 게릴라 전을 통한 항일 투쟁을 전개한다. 일본은 나치 독일의 패전이 가까워지자 명호작전을 벌여 동맹이었던 비시 프랑스 군을 배신하여 몰아내고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바오다이를 내세워 만주국처럼 베트남 제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성립했다. 일본인들은 비시 정부를 규탄해 이들이 파시즘이라 파시스트로부터 자유 베트남을 구한다며 독립을 지지하는 척하는 쇼를 벌이게 되지만 베트남인들을 일본인들을 절대로 믿지 않으며 대일항전을 지속했다. 결국 일본의 패배와 더불어 괴뢰국인 베트남 제국 또한 붕괴되었고 일본군이 철수함에 따라 베트남은 무정부 상태가 된다. 이에 베트민은 기민하게 행동하여 다음 날인 8월 16일 전국 국민회의를 주최하게 되고 쩐푸를 대신해 호치민이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8월 25일 호치민은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9월 2일에는 호치민 자신이 쓴 독립선언문을 발표했다. 그와 더불어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베트남의 독립기념일은 9월 2일은 1945년 프랑스와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날로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진 1954년하고 다른 날이다. 따라서 현 베트남 독립기념일인 9월 2일은 1945년 베트민 건국일을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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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3
  • 15세기 이후, 동아프리카에 진출한 이슬람 및 현지인 & 아랍인의 무역 거래의 역사
    15세기 무렵에 이르자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 페르시아 지역의 사치성 상품들에 대한 유럽의 수요가 늘어나고 있었다. 특히 유럽 대륙에서 아프리카와 멀리 인도, 동남아시아의 후추와 향료 등이 요구되었으며, 아라비아 반도는 당시 극동,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와 지중해와 접하고 있는 국가들 사이에서 주요한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다. 중국의 비단, 인도의 면직물, 식물로서 그 의학적인 특성 때문에 가치가 있는 중국산 대황(大黃), 보석류, 후추, 열대 상록수로, 향신료와 약용으로 사용된 육두구(肉荳) 씨, 육두구 씨로 만든 향미료, 생강, 그리고 정향나무의 꽃봉오리를 말려 향료로 사용하고 있는 정향(丁香) 등이 해로를 통하거나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들에 의해 아라비아로 운반되었고, 혹은 해상 운송 권을 독점하고 있던 아라비아 인들에 의해 홍해로 이동되어져 아라비아로 운송되었다. 아라비아 지역은 동서 교역에 있어서 주요한 시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아라비아 지역은 해마다 동아프리카 해안으로 많은 배들을 내려 보내어 구매자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끌었던 안장용 표범 가죽, 철, 그리고 기장을 포함하여 상아, 노예, 향료, 별갑, 동물 가죽 등의 장사를 지속적으로 벌였다. 아프리카에서는 상아와 노예들의 주요 원산지였던 반면에 당시 유일하게 동아프리카에서 획득할 수 있었던 향신료는 유향(乳香)과 계피, 사탕수수 정도 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말라카 군도(Malacca Islands)에서 나는 정향과 인도 산 후추와 같은 향신료는 극동 지역인 중국의 항구들로부터 얻어졌으며, 아라비아와 동아프리카의 상인들은 이들의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판매점과 제품 공장을 얻기 위해 현지의 통치자들에게 돈을 지불해 임대하는 조건으로 취득했다. 동아프리카 무역에서 향수의 원료인 용연향(龍涎香)과 금은 상당한 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교역의 중심지는 짐바브웨(Zimbabwe)로 가는 가장 가까운 항구인 소팔라(Sofala)로 기록되었다. 상당한 양의 해양 선박을 소유하고 있었던 인도인들도 이러한 향료와 황금 무역에 참여했다. 중세 말기에 이르러 인도와 동아프리카 간의 무역 관계는 동아프리카와 페르시아 만 사이의 무역만큼 중요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인도인들은 아마도 금융과 소매 무역을 취급하는 것에 상당한 전문가였던 것 같다. 그에 대한 이유로 그들이 아라비아 인과는 달리 오랫동안 확실한 능력을 보여 준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인도인들과 아라비아인들은 해안 배경에 펼쳐진 그 광대한 대륙을 탐험하려는 욕구를 보여 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어떠한 위험을 감수하는 탐험보다는 안정적으로 거래하는 사업에 관심이 더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가져온 상품들인 구슬, 유리, 금속 세공품들, 그리고 천 등을, 내륙으로부터 획득한 상아, 용연향, 노예, 그리고 금과 교환하는 사업 등으로 만족했던 것이다. 인도양에서 무역선으로 사용된 선박은 이미 앞서 언급한 바 있는 한 쪽짜리 돛이 달린 범선 다우(Dhow) 선이 활용되었다. 그 규모는 한두 명이 탑승이 가능한 소형 선박에서, 최고 400톤급의 대형 선박까지 상당수 건조되었다. 해안가의 아라비아 인들은 아프리카 원주민들과 결혼하였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아라비아 부계와 아프리카 모계의 스와힐리(Swahili) 인들이 생겼고 이들은 이슬람교 신앙과 아라비아 인들의 상업 본위의 생활양식을 공유하게 되었다. 아라비아 인들은 수적으로 매우 적었으며, 3세대에 이르자 그들은 스와힐리어를 만들어 사용하게 된다. 킬와와 몸바사와 같은 몇몇의 도시들은 상당한 번영을 함께 공유하던 수천 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반면에 도시 사이에 있는 마을들의 생활은 비교적 단순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곳의 집들은 마쿠티(Makuti, 코코야자나뭇잎)로 지붕을 묶은 욋가지와 진흙으로 만든 오두막집을 짓고, 어업과 농업에 종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단순한 집들이 도시에서도 또한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더욱 부유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매우 좋은 환경 속에서 거주했는데 히 무슬림들이 거주하는 곳이거나 혹은 상인들이 사는 곳 그러했다, 심지어 부유층들은 우물로부터 물을 끌어올려 정원에 있는 레몬, 오렌지, 석류나무, 채소 등을 재배했으며, 그들의 집들은 평평한 지붕을 하고, 돌로 지어졌으며, 움푹 들어간 앞마당을 통하여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몇몇의 부유층들의 집에는 아직도 정교한 회반죽 장식의 흔적이 보인다. 부유한 상인들이 살았던 도시 지역은 아마도 바닷가가 분주한 활동 무대였으며, 건물의 벽돌 사이 좁은 길은 태양으로부터 열을 차단하는, 오늘날의 도시 라무(Lamu)와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4세기에 라무와 동아프리카 해안가를 방문했던 이븐 바투타(Ibn Battuta)로부터의 여행 보고서에 의하면 스와힐리 인들의 식욕이 왕성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평상시의 식사가 큰 접시에 우유와 과일을 곁들인 쌀 위에 놓여 진 육류, 생선, 닭고기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식사에 의하면 수입된 유약을 바른 이슬람 제품 자기나, 아마도 중국 자기에 담아 내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 가난한 사람들조차도 15세기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그릇에 음식을 먹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음식은 위에서 상술했던 풍성한 메뉴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븐 바투타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고 한다. “이 사람들은 한 명이 우리의 몇 명의 양을 먹는다. 그것이 그들의 관습이다.” 동아프리카에서 최근 몇 년 동안 진행되어 온 고고학 연구가 단지 건물과 비문들뿐만 아니라, 도자기 종류와 동전들을 발굴해 왔다. 특히 킬와에서 발견된 유물들에 의하면 일찍부터 교환의 매개체였던 별보배고둥 종류의 조개 껍질(Cowrie shell)들이 시라지(Shirazi) 왕조의 설립자 알리 빈 알 하산(Ali bin al - Hassan)이 술탄(Sultan)이었던 1200년에 이르러서는 동전으로 대체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대개 알 하산이 통치한 기간 동안 해안에서는 이슬람교 문명이 최절정기에 달하고 있었던 때였다. 그리고 앞으로 도래할 3세기의 시작으로 간주되어지기도 한다. 이는 하나의 해상 무역에 기반을 둔 문명이었으며, 그래서 내륙으로는 겨우 5마일 정도의 지역까지만 교류되었을 뿐이다. 대부분의 도시들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칭호를 사용하는 통치자들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다음 통치자가 되는 인물이 장남이 아니더라도 그 칭호와 계급은 가족 내부에서 대대로 세습되었다. 몇몇 소도시들은 공화국 정부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어떤 도시들은 세습되는 공무원이나 세력이 있는 평의회가 통치자를 억제하기도 하였으며, 따라서 통치자들은 그들이 추방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해안가에서의 생활은 대개 내륙에서 포로로 잡은 노예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이 지역 아라비아 인 주인의 농장과 집안일을 돌보도록 선택된 노예들은 비교적 다행스러운 편이었던 것 같다. 이는 꾸란에서 무슬림들에게, 노예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하나의 미덕으로 가르쳤으며, 많은 사람들이 될 수 있는 한 노예를 잘 대우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더 불행했던 사람들은 선박에 촘촘히 실려진 채로 거의 돌아올 가망이 없는 해상 여정의 공포에 직면했던 노예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오만, 인도 그리고 거의 중국에까지 배로 운송되었던 노예들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프리카 중세 도시 몸바사(Mombasa)에 대한 운명에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 남아 있다. 1331년 이븐 바투타가 기술한 몸바사의 농업은 보잘 것이 없고, 나무로 만들어진 이슬람 모스크와 맨발로 다니는 주민들이 존재했다고 한다. 그리고 16세기 초반에 탐험가인 두아르테 바르보사(Duarte Barbosa)가 보았던 번영된 도시로까지의 변화가 이어졌는데 몸바사는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급격한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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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24
  • 이슬람 (아랍) 세계에 처음으로 알려진 Corea (코리아) 11세기 고려의 이름이 두바이에서부터 시작되다
    두바이 요새 입장료는 3디람 (한화 약 960원)으로 저렴하다. 요새 밖의 것들은 대부분 해상 무역 시대 때 사용했던 배들과 모형 대포들, 그리고 허름한 당시 아랍에미리트 현지인들의 주거 공간 뿐이다. 성축 안에 들어가면 상세한 모습이 물론 나타나지만 겉으만 봤을 때는 실망이 사실 컸다. 역시 3디람의 싼 값이니 제 값한다는 느낌이다. 요새 안에는 해상 무역 도시였기 때문에 이곳을 지켜야 할 군대도 있어야 할테고 무기도 있어야하는 것이 정상이다. 이곳은 페르시아 이후로는 오만의 이맘 왕국이 관할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근세 오만인의 흔적이 많다. 오만은 파키스탄의 발루치스탄까지도 영토로 두고 있었고 서쪽으로는 동아프리카 해안 지대까지 영토로 가지고 있었던 해상 제국이었다. 아마도 오만군의 모습을 표현하고 그들이 사용한 무기들을 재현해 전시해놓은 듯 싶다. 그리고 아랍에미리트가 예전에는 철광석 산지였다. 고대부터 철기 국가가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이곳의 철은 오만에서부터 각지로 교류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두바이 구시가지의 위치와 지형을 보면 크리크 강변까지 각 나라의 선박들이 올라와 교류를 했다. 물론 각종 특산물들이 거래되고 일부는 메카로 가고 일부는 오만을 통해 인도와 동남아시아까지 간다. 물론 중국이나 일본과도 간혹 교류하기도 했고 그 교류 선단들이 고려 시대 때 고려 예성강 벽란도에서 장사하고 이곳으로 돌아와 Corea 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알렸다. 두바이 구시가지와 성곽 원형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면 지금은 성곽을 복원했지만 그 원형보다는 뭔가 새 살을 붙인 느낌이고 구시가지 알 파히디는 옛 느낌보다는 약간 억지 구성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다는 것이 좀 그렇다. 이 모습 그대로만 유지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향신료 무역의 중심지였던 두바이는 11~12세기에 이르러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이슬람 세계를 중심으로 하고 있던 이집트, 시리아 세력들이 서로 충돌하고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군사적 정복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러면 가장 많이 발전하는 것이 이슬람 세계에 후방 보급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안정된 교역과 상업화이다.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향신료가 중동에 보급되면서 중동 일대에 향신료가 대유행하게 된다. 두바이는 도자기 공예와 차(茶)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두바이의 도자기 공예는 페르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따라서 지금 이란에서 발견되는 도자기들은 아랍에미리트 각지에서 나타나는 도자기와 생긴 것이 똑같다. 게다가 인도와 실론에서는 홍차가 생산되어 오만과 두바이를 거쳐 터키에 들어가고 터키에서 유럽으로 차 문화가 이동하면서 당시 15세기 이전의 동유럽인들, 특히 헝가리 (마자르 족) 인들이 홍차를 즐기고 아라비카 커피가 유행하는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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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8-24
  • 대항해시대의 서막, 콜럼부스와 아메리카 고추로드(Chili Pepper Road)
    이탈리아 제노바 공화국 출신의 콜럼부스는 폴란드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관련 책을 읽고 그에 흥미를 갖게 되었으며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접하고 언젠가는 인도를 가고자 하는 목적과 목표를 정하게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지중해의 선원으로 활동한 그는 해적과 포르투갈 대서양 연안에서 만나 전투를 벌였지만 배가 난파되었는데 그 배가 지브롤터 해협에 이르렀고 포르투갈에 의해 구조되어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콜럼부스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근거하여 대서양을 횡단해 서쪽으로 나아가다 보면 인도에 이를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콜럼부스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지구 둘레 값인 에라토스테네스의 계산결과를 사용하지 않았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시에네(현재의 아스완)에서 하지에 태양빛이 우물의 바닥까지 닿는다는 것을 전해 듣고, 즉 해가 가장 높이 떴을 때의 고도가 90도가 된다는 것을 파악하여 지구 둘레의 값을 46,250km로 구했다. 그러나 콜럼부스는 9세기 압바스 왕조의 천문학자 알프라가누스의 측정치를 사용했다. 이 과정에서 아랍 마일로 적혀있던 알프라가누스의 계산 결과를 로마 마일로 이해한 콜럼부스는 지구의 둘레를 실제의 3/4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거기에다 당시 유럽에는 아시아의 정확한 크기를 측정한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의 위치를 실제보다 14,000km 이상 가깝다고 보았다. 그러한 이유가 있다. 에라토스테네스의 측정치는 굉장히 멀게 느껴졌고 알프라가누스의 아랍 마일로는 실제로 에라토스테네스의 측정치보다 더 멀리 나가는데 이를 이해하지 못한 콜럼부스가 에라토스테네스가 측정한 마일로 알프라가누스의 측정치를 이해했기 때문에 벌어진 오판이었다. 이러한 오판이 유럽 대륙에 아메리카라는 대륙이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된 셈이다. 1484년 포르투갈의 왕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항해 탐험을 제안하고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희망봉 루트를 준비 중이던 왕이 허락하지 않아 스페인으로 갔고 기사와 제독 작위, 발견한 땅을 다스리는 총독의 지위와 그로 인해 얻은 총 수익의 10분의 1을 자신에게 줄것을 요구하자 처음에는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이사벨라 여왕에게 스페인의 성직자들이 포르투갈 교회에 대한 경쟁 의식으로 더 넓은 선교지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여왕을 설득했고 여왕은 마침내 콜럼부스의 항해를 승인하게 된다. 콜럼부스는 해군제독이 되었고 그가 발견하는 것의 10퍼센트(%)를 콜럼버스의 소유로 한다는 조건 하에 핀타 호와 니나 호를 내주었으며 팔로스(Palos)에 사는 핀손이라는 선장이 자기 소유의 선박인 산타 마리아 호를 내주면서 총 3척이 1492년 8월에 출항하게 된다. 인도에 이르는 서쪽 항로 개척에 나섰던 콜럼부스가 육지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곳이 인도 어딘가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다. 인도에 도착하면 발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웅장한 도시나 왕궁이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땅을 서인도 제도라 부르고 그곳 원주민들을 인디언이라 불렀다. 그 이유는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 묘사한 동양인, 즉 인도인의 이미지가 인디언과 매우 유사했기 때문이다. 물론 인디언들이 아주 오래 전, 아시아에서 건너온 황인종이기 때문에 아메리카를 처음 찾은 콜럼부스에게 있어 원주민들을 인도인이라 인식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리고 콜럼부스는 두 번째 항해 때 서인도 제도의 아이티에서 매운 맛이 나는 새로운 향신료, 고추를 발견하게 된다. 고추는 자신이 일고 있는 후추와는 전혀 다른 향신료였지만 콜럼부스는 이에 개의치 않았고 스페인으로 귀항할 때 상당한 양의 고추를 실어갔다. 이로써 스페인에서 고추는 그간 인식되었던 스페인 음식에 대한 이미지를 획기적으로 바꿈과 동시에 고추를 양념으로 하여 만든 여러 매운 음식들이 스페인의 주요 음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아메리카산 고추는 스페인-포르투갈의 통합왕국이 결성되면서 이들의 동쪽 식민지들을 따라 전파되어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 너머까지 건너갔다. 고추는 50년 만에 전 세계로 퍼져 지역 요리, 특히 아프리카, 동아시아, 남아시아 요리와 빠르게 결합했다. 고추는 콜럼부스 아메리카 발견 및 항해가 가져다 주었던 가장 중요하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인류의 해택 가운데 하나임은 분명하다. 아시아의 후추는 종이 하나로 인식되지만 고추는 캅시쿰(Capsicum)이라는 가지과 속 아래에 다양한 종들이 분포하고 있다. 고추의 원산지는 열대 아메리카로 인류는 9000년전부터 고추를 사용해 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고추와 같은 종에는 벨페퍼(Bell paper), 스위트 페퍼(Sweet paper), 피멘토(Pimento), 바나나 페퍼(Banana papper), 파프리카(Paprika), 카옌 페퍼(Cayenne pepper) 등이 있다. 타바스코 페퍼(Tabasco pepper)는 캅시쿰 프루테스켄스(Capsicum frutescens, 목질의 다년생)의 변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고추는 색깔, 크기, 모양이 다양하지만 고추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매운맛의 원인은 캡사이신(Capsaicin)이라는 물질로 나타나고 있다. 캡사이신의 화학식은 C18H27O3N이며 구조식은 피페린과 유사한 형태를 띄고 있다. 캡사이신과 피페린 모두 산소와 이중결합을 이루고 있는 탄소, 그리고 그 옆에 질소가 있으며 탄소로 이루어진 방향성 고리 하나를 갖고 있다. 우리가 느끼는 맵다는 감각은 분자의 형태에 기인하는 것에 이루어지고 있다면 캡사이신과 피페린이 모두 매운맛을 향유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분자 형태론이 일치하고 있는 세 번째 매운분자는 생강의 뿌리 줄기에서 볼 수 있는 진제론(Zingerone, C11H14O)에서 형성되고 있다. 진제론 분자는 피페린이나 캡사이신보다 작은 입자를 띄고 있지만 그 역시 매운 방향성 고리를 갖고 있다 진제론도 캡사이신처럼 HO와 H3C-O를 갖고 있지만 질소 원자는 없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다만 파프리카의 경우, 상대적으로 캡사이신 물질이 덜 함유되어 있어 굴라시와 같은 쇠고기와 야채로 만든 스튜에 이용되어 유럽에 정착되었다. 다만 고추는 유럽음식에 잘 융화되지 못했다. 유럽에서는 매운맛을 내는 분자로 후추의 피페린이 완전히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이 남인도 지방의 캘리컷을 지배하면서 후추와 고추의 교환 무역이 이루어진다. 이 지역들은 약 150년간 포르투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는데 인도의 그 매운 고추가 정착에 성공한 것도 이 시기부터이다. 그리고 17세기 초에 이르자 네덜란드와 영국이 포르투갈의 고추 무역을 넘겨 받았다. 암스테르담과 런던은 아메리카에서 나온 고추가 아시아로 유통되는 주요 무역항이 되었다. 1600년, 동인도 향료 무역에서 영국의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영국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 동인도 회사의 원래 이름인 동인도 제도 무역 잉글랜드-웨식스 상인 조합이 런던에 설치한 런던 상인 조합이었다. 인도로 가는 함선에 고추를 가득 싣고 후추와 교환하여 싣고 돌아오는 항해에 있어 자금을 대는 일은 위험 부담이 컸기 때문에 상인들은 자신들이 입게 될지도 모를 손실 규모를 줄이기 위해 항해에 대한 몫을 따로 요구했다. 물론 이런 관행은 주식을 사는 것으로 발전되어 현대 자본주의의 시초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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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23
  • 2024년 중남미 파나마의 대선과 총선
    그 동안 파나마는 글로벌 물류를 담당하고 있는 운하가 거대한 시련을 겪고 있었다. 파나마 운하는 2023년 여름부터 일일 통과 선박을 35→31→21척 등으로 각각 줄여 왔다. 그리고 현 2024년 2월에는 다시 18척으로 축소했다. 이는 엘니뇨로 인한 가뭄으로 인해 수량이 부족해지면서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파나마 운하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통로 역할을 맡고 있다. 현대의 함선들은 크기가 워낙 거대해져 통과 선박 크기에 제한이 있다. 파나마 운하의 높이는 해수면보다 최대 26m로 높은 편이다. 선박들은 도크에 들어온 뒤 물을 채워 더 높은 위치의 도크로 올라가게 되고 운하 중간에 위치한 가툰 호수를 거쳐 다시 도크로 들어가 물을 빼 내려가며 계단식으로 운하를 통과하여 바다로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갑문 엘리베이터에 사용되는 물은 가툰 호수에서 끌어다 쓰고 있는데 현 파나마 최악의 가뭄은 가툰 호수의 물을 말려 바닥을 드러낼 위험에 처해지고 있는 것이다. 가툰 호수의 위기는 곧 파나마 운하의 효용성의 위기와도 직결된다. 파나마 운하는 갑문식으로 만들어져서 비록 속도는 매우 느리지만, 무려 20,000km 이상을 돌아가야 하는 것에서 단 하루 정도로 건너갈 수 있게 되자,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건너가는 선박들과 반대로 태평양에서 대서양으로 건너가는 선박들이 파나마 운하를 이용하게 되었다. 결국 파나마 운하는 건설비에 들어간 비용 이상을 통행수수료로 쉽게 뽑아낼 수 있을 정도인데 파나마 국가 경제의 80% 이상을 이 운하의 통행수수료로 충당하고 있다. 파나마는 1인당 GDP가 중남미에서 가장 높은 축에 드는 나라로 2010년대 중남미에서 도미니카 공화국, 볼리비아와 함께 가장 높은 성장세를 보인 나라 중 하나로 손꼽힌다. 사실상 이 운하 하나로 중남미에서 일약 잘 사는 나라로 손꼽히게 됐는데 1인당 GDP가 14,618달러로 개발도상국 수준을 넘어 중진국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파나마 운하에 문제가 생긴다면 하루아침에 최빈국으로 나락 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글로벌 물동량 5%, 화물선의 약 40%가 통과하는 파나마 운하의 통과 선박 감소는 글로벌 물류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데 파나마 운하에 문제가 생긴다면 파나마 다음으로 경제에 큰 타격을 받는 나라는 바로 미국이다. 미국은 파나마 운하 통과 선박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데 남해와 북해가 없는 미국 입장에서 해운으로의 동, 서 무역 연결은 파나마 운하 밖에 방법이 없다. 미국 입장에서도 파나마 운하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동안 미국은 1999년 12월 31일 파나마 운하를 파나마 정부에 반환하면서 이를 관리할 관리비를 비롯, 상당 양의 달러를 파나마에 퍼줬다. 그렇기 때문에 파나마 운하의 위기는 미국 경제의 위기, 미국 국가 안보의 위기로도 직결된다. 자국을 방어하는 미 해군 군함들이 동서를 왕래하기 위해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기 때문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두 운하에 문제가 동시에 발생하면 글로벌 해상통상로가 (무역선들이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과 남미 남단의 마젤란 해협으로 돌아가야 했던) 18세기로 퇴행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없다. 이는 당사 국가인 파나마도 마찬가지고 미국도 이를 해결할 방법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다른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니카라과 운하 프로젝트(Nicaragua Canal Project)이다. 사실 니카라과 운하의 건설은 20세기 초에 미국이 추진하다가 파나마 운하 건설권을 프랑스로부터 4,000만 달러에 넘겨받으면서 포기한 프로젝트였다. 이후 니카라과가 친러, 친중 국가가 되면서 2012년 9월 26일, 니카라과 정부와 중국의 홍콩 니카라과 운하 개발(HongKong Nicaragua Canal Development, 이하 HKND)은 니카라과 운하를 건설하기로 협의하고 양해각서에 서명했다. 니카라과 운하 건설업체로 선정된 HKND는 왕징(王靖) 대표가 설립한 회사로, 이 프로젝트의 총 건설비가 400억~50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를 위해 니카라과의 의회는 HKND의 개발 참여를 승인했고 이를 통해 HKND는 니카라과 운하 개통 후 100년간의 운하의 건설과 관리, 개발의 권리를 갖게 되었으며, 운하 건설과정에 필요한 보조도로, 항만, 공항, 철도 등의 건설도 허가받았다. 태평양 연안의 브리토 강에서 나카라과 호수를 거쳐 카리브 해 연안의 푼타 고르다 강까지 총 길이가 278km에 달한다. 니카라과 운하의 폭은 최소 230m에서 최대 520m이며, 수심은 27.6m로 확장 공사를 한 파나마 운하는 길이 82km, 폭은 55m, 수심은 18.3m로 니카라과 운하보다 규모가 작다. 파나마 운하는 최대 8만 t의 선박이 오갈 수 있는데 니카라과 운하는 선박의 최대 적재톤수가 최대 25만 t이나 된다. 이게 완성되기라도 하면 이미 파나마 운하와의 경쟁력에서 앞서게 되는 것이다. 이게 완공되면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을 통해 니카라과 운하를 갖게 되면 향후 100년 동안 미국의 동, 서 물류와 무역의 항로까지 틀어 쥘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왕징의 금융 손실로 인해 HKND가 니카라과 프로젝트에서 손을 땠고 2018년 2월에 HKND는 홍콩 본사를 폐쇄한 채 유령 회사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곳을 중국 정부가 다시 손을 대기 위해 니카라과와 서서히 접촉하고 있다. 여기에 중국은 파나마에도 손을 뻗치고 있는데 니카라과가 안 되면 언제든지 파나마로 옮길 수 있게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일종의 보험용일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당장 내일 있을 5월 5일 파나마의 대선에 당선이 유력한 호세 라울 물리노(Jose Raul Mulino) 전 공공 안전부 장관이 친미성향을 갖고 있지만 친중성향도 함께 갖고 있다는 것이다. 파나마는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에도 가장 먼저 참여했던 국가 중에 하나이고 물리노도 중국과의 관계와 미국과의 관계를 두고 중립적인 입장을 받아들이되,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중단 없이 계속 실행하겠다고 했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마르티넬리는 부패 혐의로 미국 입국이 금지된 반면, 물리노는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같은 파나마 대선이 총선과 함께 치뤄지는 이유는 전 대통령인 리카르도 마르티넬리(Ricardo Martinelli)가 최근 공공 자금을 세탁한 혐의를 받고 유죄 판결이면서 대통령으로써의 자격이 박탈당했다. 따라서 8명의 대통령 후보자가 나타나 5월 5일 선거를 치르게 된다. 파나마 시민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피치 레이팅스(Fitch Ratings)가 최근 투자 등급에서 파나마의 신용 등급을 강등시킨 가운데 파나마의 경제적 안정성을 회복하는 것이고 파나마 운하 문제의 해결, 그로 인한 최근 떨어진 경제를 회복하는 것이다. 마틴 토리호스(2004~2009) 전 대통령과 2019년 선거에서 2위로 머무른 로물로 루(Rómulo Roux)는 일자리 창출과 투자를 강조하면서 경제 안정을 회복하겠다는 공약을 바탕으로 유세를 벌였고 리카르도 롬바나(Ricardo Lombana)는 노동자들, 특히 구리 광산 시위 당시 그들의 지지를 받으면 철저한 좌파 성향인 인물로 우파의 부패를 척결하자는 것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마르티넬리의 후임자로 지명된 호세 라울 물리노(José Raúl Mulino)의 공약은 다소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지만, 최근 여론 조사를 보면 그는 파나마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특히 물리노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국과 중국 모두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했다. 미국은 반도체와 같은 산업 분야의 협력 가능성에 초점을 맞춰 파나마에서 외교적 입지를 강화했고 중국은 파나마 인프라 개선에 대한 투자를 강화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미국보다는 중국에 쏠려 있는 경향이 다소 나타나고 있다. 게다가 가장 풀기 어려운 숙제인 파나마 운하의 담수를 해결하는 문제도 남아있다. 내일 그들은 누구를 선택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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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22
  • 제3차 수단 내전과 국제 사회에서의 수단 내전에 대한 움직임
    2023년 4월 수단 군부 내 두 실권자 간 권력을 둘러싼 갈등이 전면적인 무력 충돌로 비화했다. 특히 압델 파타 알-부르한(Abdel Fattah Al-Burhan)이 이끄는 수단 정부군(SAF : Sudanese Armed Forces)과 모하메드 함단 ‘헤메티’ 다갈로(Mohammed Hamdan ‘Hemeti’ Dagalo : 이하 헤메티)가 이끄는 신속지원군(RSF : Rapid Support Forces)이 수도 하르툼에서 충돌했다. 이와 같은 폭력 사태는 하르툼을 벗어나 다르푸르, 코르도판과 같은 변방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는 수단 역사상 최초의 전국 단위 무력 분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에 수단 정부군은 20~30만 명 규모의 병력을 운용하고 있었다. 더불어 공군력을 이용하여 신속지원군을 목표로 공중 폭격 작전을 펼쳤다. 이슬람주의 세력 및 다르푸르, 남부 코르도판 등의 비 아라비아 부족 무장 세력과 연대를 형성했으며 반면 신속지원군의 병력 규모는 정부군의 절반 정도인 10~15만 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열세에 있다. 더불어 신속지원군은 전투기를 보유하지 않은 관계로 공중전에서 불리한 상태에 있다. 하지만 신속지원군은 상당량의 최신 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정부군보다 전투 경험이 많으며 척박한 환경에서 게릴라전, 시가전을 치루며 단련되어 있다. 신속지원군은 다르푸르의 아라비아계 부족 세력, 차드, 리비아 등 외국 출신 용병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제사회의 중재 노력에도 정부군과 신속지원군은 휴전을 거부하고 교전을 지속하고 있다. 이러한 수단의 제3차 내전은 일진일퇴의 소모전으로 치닫고 있으며 이는 심각한 인도주의적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15,000명 이상이 사망하고 800만 명 이상이 국내 실향민 혹은 난민으로 전락했으며 인구의 절반 이상이 식량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더불어 기아(Famine) 발생 우려가 높아지고 있으며 또한 신속지원군, 정부군 모두 심각한 인권 유린 자행으로 비난받고 있는 상태이다. 수단 내전은 알-부르한과 헤메티 두 군부 지도자 간 권력 투쟁이 폭력화 된 결과로 나타났다. 2021년 10월 2차 쿠데타 이후 민정 이양을 위한 협상 과정에서 신속지원군의 정부군 통합 문제는 폭력 사태에 촉매제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수단 내전은 부족 간 정체성 대립 양상을 띠고 있다. 알-부르한은 정규 군사 교육을 받은 군부 내 경험이 많은 수장이며 독립 이후 권력을 독점한 수도 하르툼을 위시, 리버 나일(River Nile) 주 부족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헤메티는 수단 변방 다르푸르의 차드 아라비아계 리제이갓(Rizeigat) 부족 출신으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이러한 대조적인 출신 배경에 기인한 상호 불신 및 반감은 권력 투쟁을 제로섬 게임으로 만들어 내전 발생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 더불어 수단의 지정학적, 경제적 가치는 아랍에미리트, 이집트, 러시아, 이란,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외부 국가들의 개입을 부채질하고 있다. 이는 수단 내전의 기폭제로 작용하고 있으며 외부 국가의 지원으로 인한 군사력, 경제력 제고는 정규군과 신속지원군 지도자들의 전투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고취시켜, 협상과 타협을 배제하고 무력 사용을 선호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수단 내전이 심각한 인도주의적인 위기로 치닫게 되면서 국제사회의 중재 노력 및 휴전 압박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전이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우세한 상황이다. 따라서 내전은 어느 한 편이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지 못하는 소모전 형태로 지속될 전망에 있다. 소모전이 지속되면서 수단이 ‘제2의 리비아’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에 정부군과 신속지원군은 우세 지역의 통치를 강화하면서 영토를 넓히기 위해 전투를 벌일 것으로 보이며 현재도 전투가 진행되고 있다. 양측 모두 힘을 소진할 경우 협상을 통해 내전 종식을 시도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이와 같은 경우가 발생할 때, 수단은 두 국가로 분할될 수 있는 위기를 맞이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엔 혹은 아프리카 연합 차원의 평화유지군이 파병될 수 있다. 이러한 수단 내전의 지속은 지역 불안정을 조장할 수 있다. 폭력적 극단주의 세력 확산, 신속지원군 외국 용병의 귀국 시 출신 국가 정세가 불안하다든지, 홍해 인근 무력 충돌 격화 및 국제 무역 타격 등의 유라시아 물류의 엄청난 대란을 초래할 수 있다. 또한 수단 발 난민 유입 증가는 차드, 이집트, 에티오피아, 남수단 등 인접국 경제에 상당한 부담을 안길 것으로 보여 진다. 수단 내전에서 신속지원군을 지원하는 러시아의 아프리카 사헬 지역 내 영향력 증대가 예상된다. 이는 이 지역에서 서방의 영향력 퇴조로 이어질 수 있으며 현재 그와 같은 서방의 영향력은 감소하고 있는 추세에 있다. 수단과 긴밀한 경제적 관계를 구축한 중국이 불간섭 입장에서 벗어나 자체적인 중재 노력을 펼칠 가능성 또한 존재하며 미국은 제다 프로세스 활성화 및 제재 강화를 통해 수단 내전 종식을 시도할 전망이다. 이를 통해 역내 정세 안정 및 러시아의 대 아프리카 영향력 확산을 견제할 것으로 보여 진다. 특히 유엔비상임이사국이자 글로벌 중추국가를 지향하는 한국은 수단 분쟁 해결, 인도주의적 위기 완화 관련 논의 및 결의안 채택에 있어서 좀 더 주도적인 역할을 모색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동시에 수단 출신 난민 및 난민 수용 국가들의 지원을 확대시키고 식량 및 보건 부문에서 지원 확대 등을 고려할 수 있음. 또한 폭력 사태 진정 이후 배치가 예상되는 유엔 혹은 아프리카 연합 평화유지군에 기여하는 방안 또한 모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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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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