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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트코인 단기 상승세…미 CPI 발표 앞두고 가상자산 시장 변동성 주목
    비트코인이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 발표를 앞두고 단기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11일 빗썸에 따르면, 이날 오전 9시 55분 기준 비트코인 가격은 전일 대비 1.18% 상승하며 7,800만 원대를 기록했다. 지난 9일부터 3일 연속 상승세를 보이며 안정적인 흐름을 보였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날 발표될 미국 8월 CPI가 비트코인 가격 변동성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전문가들은 식품과 에너지를 포함한 헤드라인 CPI가 전년 대비 2.6%, 전월 대비 0.2% 오를 것으로 예상한다. 7월 CPI 수치와 비교하면 전년 대비 0.3%포인트 하락하고 전월 대비로는 같은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판단한다. 연방준비제도(연준)는 CPI 수치를 토대로 향후 금리 정책을 결정할 가능성이 크며 특히 인플레이션이 예상보다 강한 경우 금리 인하가 지연될 수 있다. 연준 내에서도 금리 인하 폭을 두고 빅컷(0.5%포인트 인하)과 스몰컷(0.25%포인트 인하)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이런 가운데 CPI가 이 결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만약 CPI가 예상치를 상회하고 인플레이션이 쉽게 잡히지 않는다는 신호가 나오면 연준의 금리 인하 일정은 지연될 수 있다. 이는 비트코인과 같은 투자 자산의 가격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최근 가상자산 시장에 상승 동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CPI 발표는 중요한 분기점이 될 수 있다. "미 대선까지 가상자산 시장 불확실성 지속…투자자 매도세는 항복 신호" 오는 11월 미국 대선까지 가상자산 시장의 불확실성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가상자산 데이터 분석업체 난센(Nansen)에 따르면, 8월 26일부터 9월 7일까지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현물 ETF에서 약 9억8,300만 달러(약 1조 3,215억 원)가 순유출됐다. 같은 기간 스테이블코인 공급량도 4억5,000만 달러(약 6,050억 원)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가상자산 시장에서 투자자들의 매도세가 강해졌음을 시사하며, 일부 전문가들은 이를 '카피출레이션(항복)' 신호로 해석했다. 난센은 최근 가상자산 시장에서의 매도세가 3월과 8월의 매도 흐름과 다르게 투자자들이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하고 시장을 떠나는 신호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미국 대선을 앞두고 위험 자산에 대한 불확실성이 더욱 커질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이는 비트코인을 비롯한 가상자산 시장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단기적으로 상승 동력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미 디지털상공회의소, SEC의 오픈씨 제재에 권한 남용 주장 미국 가상자산 산업 로비 그룹 디지털상공회의소(The Digital Chamber)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권한 남용을 비판하며 이를 의회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SEC는 지난 8월 가상자산 거래 플랫폼 오픈씨(OpenSea)에 웰스노티스(소송 전 사전 통지)를 발송했다. 이는 오픈씨가 증권법 위반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사전 통지하는 절차였다. 디지털상공회의소는 이를 두고 SEC의 권한 남용이라고 지적하며 NFT(대체불가토큰)를 증권으로 분류하지 말고 소비자 제품으로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디지털상공회의소는 "NFT는 금융상품이 아니며 증권으로 규제되어서는 안 된다"라며 의회가 관련 법안을 통해 이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SEC의 규제 접근 방식이 가상자산 산업에 명확성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산업 발전에 장애가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NFT와 가상자산 산업 전체에 대한 규제 불확실성이 해소되지 않으면 산업 성장이 저해될 수 있다는 경고로 해석된다. 이더리움 스테이블코인 거래량 사상 최대…디파이 수요 증가 이더리움 블록체인에서 스테이블코인 거래량이 사상 최대치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상자산 데이터 분석업체 더블록(The Block)에 따르면, 이더리움의 온체인 스테이블코인 거래량은 1조4,600억 달러(약 1,962조 원)로 집계됐다. 이는 올해 초 거래량인 6,500억 달러(약 873조 원)보다 2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특히 DAI의 거래량이 9,600억 달러(약 1,290조 원)로 1위를 차지했다. 더블록은 이러한 거래량 증가가 탈중앙화금융(디파이, DeFi) 플랫폼에 대한 수요 증가와 알고리즘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분석했다. 디파이 솔루션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이더리움 기반 스테이블코인 거래가 활발해지고 있으며 이는 이더리움 생태계의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 대선 TV 토론 가상자산 주제 관심 저조" 미국 대선 후보들이 맞붙는 첫 TV 토론을 앞두고 가상자산 관련 주제에 대한 유권자들의 관심이 저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벤징가(Benzinga)가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만이 대선 TV 토론에서 가상자산 관련 논의에 관심 있다고 답했다. 응답자 중 45%는 경제와 일자리에 대한 논의를 가장 기대하며 24%는 이민 문제를 주요 토론 주제로 꼽았다. 이는 가상자산이 여전히 미국 정치 및 경제 논의에서 주요한 이슈로 부각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 설문조사는 미국 내 133명을 대상으로 진행되었으며 가상자산 시장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유권자들이 경제와 일자리 문제에 더 큰 관심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가상자산이 미 대선에서 주요한 논의 주제로 자리 잡기까지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가상자산 시장은 미국 CPI 발표와 대선을 앞두고 단기적인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불확실성이 여전히 큰 상황이다.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현물 ETF에서 대규모 자금이 유출되는 등 투자자들은 조심스러운 태도로 접근하고 있다. CPI 발표 결과와 연준의 금리 결정이 시장의 방향성을 크게 좌우할 수 있다. 특히 금리 인하가 지연될 경우 가상자산 시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미국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시장의 불안정성이 지속될 것으로 보이며 가상자산에 대한 정치적 논의는 아직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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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1
  • 장경태 의원, 윤석열 대통령 부부 골프장 이용 의혹 제기…김용현 장관 "사실 아냐, 옷 벗겠다."
    더불어민주당 장경태 의원은 10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지난 8월 24일 경기도 성남의 한성대 공군 골프장을 이용했다는 제보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장 의원은 이날 외교·통일·안보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김용현 국방부 장관을 향해, 당시 김 장관이 대통령 부부와 함께 골프를 쳤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장 의원은 "윤 대통령과 김 여사, 그리고 대통령경호처 1인이 골프를 쳤다는 제보가 있다. 그 경호처 1인이 장관이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에 김 장관은 "8월 24일 저는 인사청문회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골프장에 간 적도 없고,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라며 의혹을 부인했다. 한성대 골프장은 경기도 성남의 공군 골프장이며 대통령과 주요 인사들이 종종 이용하는 곳이다. 김 장관은 지난 7월까지 대통령경호처장으로 재직하다가 8월 12일 국방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됐으며 이달 2일 국회 인사청문회를 마쳤다. 장경태 의원은 이어서 "8월 22일 부천에서 대형 화재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고 23일부터 24일까지는 장례식이 진행됐으며 25일부터는 발인이 있었다. 그런 시기에 대통령과 김 여사가 골프장을 이용한 것이 문제가 된다"라고 강조했다. 장 의원은 골프장 이용이 사실일 경우, 김 장관이 장관 후보자로서 청문회를 준비하지 않고 대통령과 골프를 친 것이 낙마 사유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 장관은 이러한 의혹 제기에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제보 내용이 사실이라면 옷을 벗겠다"라고 강하게 부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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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1
  • 민주당, 금융투자소득세 유예론 급부상…정책 결정 앞두고 논의 격화
    더불어민주당 내에서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유예론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 민주당은 오는 24일 금투세에 대한 입장을 정하기 위해 토론회를 열 예정이다. 하지만 당 내부에서 유예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상황이다. 금투세 유예 주장의 배경에는 국민 여론과 시장 상황을 고려한 판단이다. 국민의힘은 이를 두고 민주당이 입장을 변경하고 있다고 환영하는 반면, 진보 진영에서 예정대로 시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금투세에 대해 그동안 강경 입장이던 진성준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11일 국회에서 열린 당정책간담회에서 금투세 관련 언급을 자제했다. 그는 "금투세와 관련한 원내 입장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라며 "정책 디베이트와 정책 의총 등을 통해 당의 총의를 확인해 나가겠다"라고 밝혔다. 다만 증권거래세에 대해서는 폐지가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명확히 했다. 민주당 내에서도 '유예론'이 부상하고 있다.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정일영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금투세 유예를 주장했다. 우리 주식시장이 금투세를 감당할 충분한 체력을 먼저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의원은 자본시장의 경쟁력을 강화한 뒤 금투세를 도입해도 늦지 않다며 정책 결정은 국민과 함께해야 한다고 표명했다. 이언주 최고위원 역시 금투세 유예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그는 당 지도부 내에서 같은 의견을 가진 의원이 많다며 시장과 국민 여론을 고려해 신중하게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외에도 전용기, 이소영, 이연희 의원 등도 금투세 유예를 지지한 바 있다. 반면, 국민의힘은 민주당 내 유예론 부상을 환영하며 금투세 폐지를 촉구했다. 김상훈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민주당 지도부에서 처음으로 금투세 유예를 언급한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민주당이 금투세 폐지로 전향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진보 진영은 금투세를 예정대로 시행해야 한다는 견해를 고수하고 있다. 조국혁신당은 금투세가 금융선진국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는 제도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금투세 도입이 국내 자본시장을 위축시킬 것이라는 우려는 과장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한 진보당도 금투세가 초고소득자에 대한 과세의 방편으로 예정대로 시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 여론은 팽팽하게 나뉘어 있다. 한국갤럽 조사에서는 금투세를 예정대로 시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39%, 시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이 41%로 비슷한 수준을 보였다. 그러나 주식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금투세 반대 의견이 더 많았다. 다른 여론조사에서는 금투세 폐지 또는 유예에 대한 의견이 과반을 넘겼지만, 여전히 찬성 의견도 적지 않다. 경제학계에서는 금투세 도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우세하다. 한국경제학회 조사에 따르면 경제학자 다수는 금투세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는 금투세가 국내 주식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는 예측했다. 금투세 유예나 폐지를 두고 정치권과 경제계, 국민 여론이 갈등을 빚고 있다. 민주당은 금투세에 대한 당론을 정하기 위해 치열한 논쟁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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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1
  • 추경호, '의사 블랙리스트'에 강력 대응 촉구… "2025년 의대 정원 현실적 재조정 불가능..."
    국민의힘 추경호 원내대표는 9월 10일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최근 의료계에서 논란되고 있는 '의사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해 정부의 엄정한 대응을 촉구했다. 이는 집단 사직에 참여하지 않은 의료진의 신상이 공개된 것과 관련한 것으로 추 원내대표는 이를 "사실상 의료진을 협박하는 범죄 행태"라고 규정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추 원내대표는 "응급 의료 상황이 우려되는 시점에서 의료 현장을 지키는 의료진을 블랙리스트에 올려 조리돌림을 하고, 진료를 방해하는 불법적 행태는 즉각 중단돼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행동은 환자의 안전과 의료진의 윤리를 위협하는 행위로, 정부가 강력히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추 원내대표는 여당과 정부가 2026학년도 의대 정원 확대를 포함한 의료 개혁 논의를 위해 협의체 구성을 추진 중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의료계에도 협의체 참여를 촉구했다. 그는 "이제 협의체를 통해 의료 개혁에 대해 원점에서 재논의할 수 있는 만큼 의료계도 조속히 참여해달라"고 말했다. 기자들과의 질의응답 시간에서 추 원내대표는 의료계와 정부, 여당 간의 소통이 이어지고 있음을 밝히면서도 협의체 참여를 공식적으로 밝힌 단체는 아직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단체별로 여러 사정이 있을 수 있어 구체적으로 말할 단계는 아니다"라며, 협의체 논의가 초기 단계임을 시사했다. 추 원내대표는 특히 의료계가 요구하는 2025학년도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와 관련해 "이미 수시 접수가 시작된 상황에서 2025년 정원을 바꾸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라고 밝혔다. 수험생과 학부모에게 큰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만큼 2025년 정원 재조정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또한 의료계 일각에서 보건복지부 장·차관의 경질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에 대해 추 원내대표는 "지금은 인사 문제를 논의할 시점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현실적 의료 개혁 방안을 논의해야 할 시기이지, 사과나 책임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라고 덧붙였다 . 추 원내대표는 2026년 의대 정원 증원 문제에 대해선 "원점에서 재논의가 가능하다"라며, 의료계가 전제 조건을 내세우기보다는 대화에 참여해 생산적인 논의를 이어가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협의에 나서겠다는 여당의 견해를 명확히 하며 협의체를 통해 의료 개혁의 방향을 함께 찾아가길 촉구했다. 정부와 여당은 의료계와의 협의체 구성을 통해 의료 개혁 논의에 속도를 낼 예정이지만 의료계의 구체적인 참여 여부와 향후 협상 과정은 아직 초기 단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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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2024-09-10
  •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 "일제시대 선조 국적 일본" 발언, 국회 상임위에서 퇴장 당해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환노위) 전체회의에서 야당 의원들의 요구로 퇴장당하는 이례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이는 김 장관이 고용노동부 장관으로서 처음 출석한 국회 상임위에서의 일이다. 9일 열린 환노위 전체회의에서 김 장관은 노동부 소관 법안 설명을 위해 출석했다. 이후 더불어민주당 김주영 의원은 김 장관의 과거 발언을 문제 삼으며 사과를 요구했다. 김 의원은 "김문수 장관 후보자는 잘못된 국가관, 역사관, 가치관을 바로잡고 정치적 중립을 철저히 견제할 각오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하며 김 장관의 사과를 촉구했다. 김 의원의 요구에 더불어민주당 소속 안호영 환노위원장은 "공직자는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발언을 조심해야 하며, 과거 발언에 대해 성찰이 필요하다"라며 김 장관에게 퇴장을 명령했다. 김 장관은 퇴장을 명령받으며 회의장을 떠났다. 김문수 발언 논란 "일제시대 선조들의 국적은 일본" 김 장관이 퇴장당한 배경은 지난 8월에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발언 때문이다. 당시 김문수 후보자는 일제시대에 대한 발언 중 "1919년 당시 조선은 나라가 없었고, 선조들의 국적은 일본이었다"라는 주장을 펼쳤다. 더불어민주당 박홍배 의원이 이 발언을 재차 확인하자 김 후보자는 "나라가 없었으니 국적도 일본이었다"라고 답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야당 의원들과 일부 정치권은 김 장관의 역사관을 문제 삼으며 비판했다. 특히, 대구시장 홍준표는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을사늑약은 원천 무효이고, 이를 인정하면 상해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것이다. 임정 수립 이전에는 대한제국 국민, 이후에는 대한민국 국민이었다"며 김 장관의 발언에 반박했다. 김 장관은 논란이 불거지자 "(국적 문제는) 학계에서도 논란이 있다"라며 자신의 발언에 대해 더 공부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발언도 야당의 퇴장 요구로 이어졌다. 김 장관이 퇴장당하자 국민의힘 의원들은 강하게 반발하며 회의장을 떠났다. 그 결과 남은 야당 의원들만으로 회의가 진행되었고 204건의 법안이 각각 소위로 회부됐다. 김문수 장관의 과거 퇴장 사례 김문수 장관이 국회에서 퇴장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2년 경제사회노동위원장으로 재직할 당시에도 국정감사에서 퇴장당한 바 있다. 당시 김 장관은 더불어민주당 전용기 의원이 과거 그가 했던 발언을 문제 삼으며 질문하자, "윤건영 의원이 주사파 본성을 드러냈다"라는 주장을 고수하며 사과를 거부했다. 이에 환노위원장 전해철 의원은 "국회를 모욕했다"라며 김 위원장의 퇴장을 명령했고, 그로 인해 국정감사가 중단된 바 있다. 김문수 장관, 역사관 논란에도 임명 강행 김문수 장관은 이번 논란 이전에도 역사관과 막말 논란으로 야당의 지명 철회를 요구받았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은 이러한 요구를 거부하고 임명을 강행했다. 김 장관은 청문보고서 채택 없이 임명된 27번째 장관급 인사로 기록됐다. 이번 사태는 김문수 장관의 발언과 태도가 다시금 정치적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 사례로 고용노동부 장관으로서의 향후 행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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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0
  • 장동혁, 대통령 비공개 만찬 누설에 정무적 감각 부족 비판… 한동훈 외모 품평 발언에도 일침
    국민의힘 장동혁 최고위원은 9월 10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윤석열 대통령이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배제한 비공개 만찬에 대한 언론 보도와 관련해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대통령이 누구와 만나고 식사하는 것이 국민의 관심사이며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만큼 이번 만찬의 비공개가 유지되지 않은 점에 대해 깊은 아쉬움을 표했다. 장 최고위원은 "대통령께서 여당이든 야당이든 다양한 인사들과 소통하는 것은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비공개 만찬이 다음 날 언론에 보도된 것은 누가 언론에 흘렸는지 의문이 생긴다"라며 이번 보도가 가지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는 참석자가 이를 알린 것이라면 "정무적 감각이 너무 부족한 것"이라고 비판했으며, 만약 대통령실에서 나온 정보라면 "참모들이 대통령을 보좌하면서 정무적 판단을 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쉽다"라고 덧붙였다. 이번 비공개 만찬에는 윤상현 의원과 친윤계로 분류되는 인요한, 김민전 국민의힘 최고위원이 참석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이 자리에는 친한계로 분류되는 한동훈 장관은 초대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정치적 해석이 나왔다. 그로 인해 일부 언론은 윤 대통령이 한동훈 장관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장 최고위원은 "대통령과의 소통 관계를 알리고자 한 의도가 있었다면, 이는 너무나 정무적 감각이 부족한 행동"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특히 이번 보도가 나온 경위에 대해 그는 "비공개 만찬이었기 때문에 언론에 흘릴 수 있는 사람은 한정적일 것"이라며 "누가 유력한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라고 답을 피했다. 그러나 그는 만약 대통령실 내부에서 이런 정보가 나왔다면 이는 대통령이 한동훈 장관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는 메시지를 외부에 전달하려는 의도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했다. 이 때문에 여러 정치적 해석과 논란이 확산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한 장동혁 최고위원은 최근 일부 야당 의원들이 한동훈 장관의 외모에 대해 부적절한 발언을 한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국민의 대표로서 품격은 곧 국민의 품격"이라며, 이러한 발언이 정치적 수준을 떨어뜨리는 동시에 국민의 품격까지 깎아내리는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진성준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유튜브 방송에서 한동훈 장관을 처음 만나보고 "외계인을 보는 듯했다"라며 그의 외모와 표정에 대해 비하성 발언을 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장 최고위원은 "정치의 본질과 동떨어진 발언"이라며 정치인의 발언은 그 자체로 국민을 대변하는 만큼, 이러한 품격 없는 발언은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한편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도 같은 방송에서 한동훈 장관의 키를 언급하며 그가 생각보다 "얇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장 최고위원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나 한동훈 장관은 이러한 발언들에 대해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는 "한동훈 장관은 매우 쿨하다"라며, "전혀 이에 대해 어떤 말을 하지 않았다"라고 덧붙였다. 이번 비공개 만찬과 관련된 논란, 그리고 야당 의원들의 외모 비평 논쟁은 한동훈 장관을 둘러싼 정치적 관심이 더욱 커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대통령실 내부의 정보 관리와 정무적 판단이 다시 한번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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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0
  • 이재명, 정부의 의료개혁 실패 강력 비판… "국민 생명 위태롭게 하고 무리수만 두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9일 정부의 의료 개혁 실패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면서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정부의 대응 방식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이날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정부가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가 제안한 ‘여야의정 협의체’에 문제를 떠넘기기만 할 뿐,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재명 대표는 “정부는 일관성 없이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라며, 응급 의료 상황에서 대통령실 비서관 파견이나 군의관 징계 논의와 같은 조치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정부가 의사들을 병원에서 내쫓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군의관까지 내쫓으려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표했다. 또한 이재명 대표는 "이제 이성적으로 접근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라며, 대화를 통해 유연한 자세로 상호 양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 7개월 동안 제기된 문제들을 정부가 솔직히 인정하고, 폭넓고 개방적인 논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여야의정 협의체에 대해 언급하며, 이 협의체가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당은 여야정 협의체가 의료대란을 해결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역시 "정부는 여야의정 협의체를 환영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태도 변화가 없다"라고 비판했다. 그는 "의료대란의 책임을 떠넘기기만 하려는 정부는 무책임하다"라며, 1987년 민주화 이후 이렇게 무책임한 정권은 처음 본다고 지적했다. 박 원내대표는 정부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데 있어 더욱 책임감 있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며, 이번 의료대란 상황에서 정부의 역할을 강하게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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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9
  • 한동훈, 의대 증원 유예안으로 당정 갈등 완화…당내 입지 강화
    최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제안한 2026년 의대 증원 유예안이 대통령실에서도 수용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당정 간의 갈등설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있다. 당초 대통령실은 한 대표의 유예안에 불쾌감을 표시했으나, 2026학년도 의대 정원 문제에 대해 '제로베이스'와 '원점 논의'를 언급하면서 대화의 여지를 남겼다. 이는 한동훈 대표가 의정 갈등의 중재자로서 존재감을 키우며, 당 장악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기존 대통령실은 "2026학년도 의대 정원 문제는 의료계가 합리적인 안을 제시하면 논의하겠다"라는 입장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이번에 처음으로 '원점 논의'를 언급하며 대화의 폭을 넓히고 한발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한 대표가 제안한 의대 증원 유예안까지도 수용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당정 간 협조의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한동훈 대표는 지난 8월 25일 고위 당정회의 이후 유예안의 필요성을 주장했지만, 대통령실은 이를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8월 29일 국정브리핑 및 기자회견에서 의대 정원 증원에 대해 "일방적으로 정한 것이 아니라 합리적 추계를 통해 결정한 것"이라며 한 대표의 제안에 부정적 입장을 재차 밝혔다. 그런데 같은 날 예정되었던 국민의힘 연찬회에 윤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았고, 8월 30일에 예정된 윤 대통령과 한동훈 대표 등 여당 지도부의 만찬도 추석 이후로 연기되면서 당정 간 갈등설이 더욱 부각되었다. 한동훈 대표와 대통령실 사이의 갈등은 의대 정원 증원을 둘러싼 여러 정책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최근 들어 양측의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이는 추석 연휴를 앞두고 '응급실 대란'에 대한 국민적 불안감이 현실적 계기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당정은 갈등을 뒤로 하고 긴밀한 소통을 통해 의료 개혁의 속도 조절에 합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 대표는 지난 9월 5일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과 만나 의료 개혁 문제를 논의하면서 자신이 제안한 유예안을 다시 검토할 것을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장 수석은 한 대표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며 "2,000명이라는 숫자에 얽매이지 않고 합리적인 안이 나오면 논의하겠다"라고 밝혔다. 이는 한동훈 대표가 의정 갈등에서 중재자로서의 입지를 강화하며, 당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한동훈 대표는 여·야·의·정 협의체 구성을 공식 제안했으며, 이에 대해 대통령실이 즉각 긍정적으로 화답했다. 당초 더불어민주당이 처음으로 '여·야·의·정 비상협의체'를 제안했을 때 대통령실은 "여야 합의가 우선"이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한동훈 대표의 제안에 대해 대통령실이 빠르게 대응하면서 당정 간의 협조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 속에서, 한 대표는 의정 갈등 중재자로서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당내 입지를 넓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친윤(친윤석열)계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도 '원점 논의'를 언급하며 한발 물러선 모습을 보이면서, 한 대표의 리더십이 강화되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결국 한동훈 대표가 자기주장을 관철한 것"이라며 "당내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한 대표에게 이번 기회가 당 장악력을 강화하는 활로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제안한 2026년 의대 증원 유예안은 당정 간 갈등을 완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동시에 한 대표의 당내 입지를 넓히는 데 기여했다. 의정 갈등을 중재하고 당정 화해 무드를 조성한 한동훈 대표는 국민의힘 내에서 자신의 리더십을 강화하며, 앞으로의 정치적 행보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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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7
  • 윤석열 대통령, ‘마이 웨이’ 행보로 정치적 고립 자초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일련의 정치적 고립을 감수하면서 자신의 정책 기조를 강하게 밀어붙이는 ‘마이 웨이’ 행보를 하고 있다. 특히 지난 9월 2일 22대 국회 개원식에 불참한 것은 전례 없는 사건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대통령이 개원식에 불참한 것은 처음이다. 이는 사실상 국회에서 연설을 거부한 것으로 해석하며 야당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더불어민주당 박찬대 원내대표는 국회 대표 연설에서 "민심을 거역하면 불행한 전철을 밟을 수 있다"라며 윤 대통령의 탄핵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는 국정 운영에서 대통령이 국회와의 소통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한 강력한 경고로 받아들여진다. 윤석열 대통령의 정치적 행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검찰은 문재인 전 대통령의 사위 서모 씨가 '타이이스타젯 특혜 채용' 의혹에 연루되었다며, 그의 딸인 문다혜 씨의 자택과 사무실 등을 압수 수색했다. 이 과정에서 검찰은 문 전 대통령을 '뇌물 수수' 혐의 피의자로 적시하며 수사에 본격 착수했다. 이와 동시에 윤석열 정부는 '윤석열표' 연금 개혁안을 발표하며 정책 추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히, 최근 의료계와의 갈등 상황에서도 "의료 대란은 없다"라고 단언하며 자기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의사 증원 문제를 둘러싼 의정 갈등 속에서도 후퇴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다시 확인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 같은 일련의 행보는 '승부수'로 해석되고 있다. 192석에 달하는 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에 더 이상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하며, 이익단체와 여론의 반대를 뚫고 자신의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이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는 곧 보수 진영의 결집을 꾀하고, 최근 지지율 하락 국면에서 벗어나려는 다목적 포석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윤 대통령이 자신이 처한 정치적 어려움을 정면 돌파하려는 전략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자칫 정치적 부메랑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야당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국회에서 내년도 예산안, 저출생 문제, 연금 개혁 등 중요한 법안과 예산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야당과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야당과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마이 웨이' 전략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문재인 전 대통령을 겨냥한 검찰 수사를 본격화한 것은 야권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 출신의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지난 9월 1일 기자회견을 열어 윤석열 정부를 강력히 비판했다. 이들은 "윤석열 정부가 정치보복의 칼을 분명히 꺼내 들었다"라고 주장하며 "전임 대통령을 모욕하고 괴롭히기 위해 처음부터 계획된 작전이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야당은 이번 수사가 정치적 배후가 있다고 보고 있으며, 그 배후로 윤 대통령을 지목하고 있다. 윤 대통령이 지지율 추락과 정치적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국면 전환용 카드로 문재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꺼내 들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전 정권에 대한 정치보복이라고 볼 수 있는 과도한 조치가 많아지고 있다"라며, 현 정부의 실정과 정치적 실패를 덮는 방편이라는 의구심을 드러냈다. 윤석열 대통령의 정치적 상황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지난 4월 총선에서 야당에 200석 가까이 내주며 참패한 이후, 여당의 지지율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다. 리얼미터의 9월 2일 조사 결과에 따르면, 윤 대통령의 지지율은 29.3%로 2년 만에 처음으로 20%대로 떨어졌다. 특히, 최근 의료계와의 갈등이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으며, 의사 증원 문제를 둘러싼 의료계와의 대치가 해결되지 않고 의료 붕괴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윤 대통령의 입지는 좁아지고 있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한동훈 대표가 당선되면서, 윤 대통령은 여당 내 권력을 미래 권력으로 이양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반면, 윤 대통령의 최대 정치적 경쟁자인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으며 연임에 성공했다. 이재명 대표와 한동훈 대표는 최근 대표 회담을 통해 의료 대란 문제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정치적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윤 대통령은 그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잃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렇다면 문재인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가 윤 대통령에게 정치적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 일각에서는 보수 진영의 결집을 기대할 수 있다는 분석이 있지만, 회의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정부에 대한 신뢰가 이미 크게 떨어진 상황에서, 야당이 '정치보복' 프레임을 내세우며 국민의 공감을 얻을 가능성도 크다. 양승함 연세대 명예교수는 "법을 어겼다면 수사받고 처벌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가 너무 갑작스럽게 진행되어 반감이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윤 대통령과 대통령실이 국민 감정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정치적 감각 없이 법치주의를 강조할 때가 많다"라며, 이런 점이 국민에게 적대감을 키우고 있다고 설명했다. 보수 진영의 결집을 노리는 윤 대통령의 의도와 달리, 진보 진영은 오히려 더 강하게 결집할 가능성이 크다. 얼마 전 복권된 김경수 전 경남지사 역시 야권 내에서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는 당초 예상과 달리 진보 진영의 결집을 촉발할 수 있으며 이는 윤 대통령에게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또한, 문 전 대통령 수사와 함께 김건희 여사에 대한 수사도 정치적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김 여사는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사건과 관련해 수사 대상에 올라 있는데, 민주당은 형평성을 이유로 김 여사 문제를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는 "김건희 여사 앞에서는 검찰이 황제 출장 조사를 했지만 야당 인사들과 전직 대통령에 대해서는 법 앞의 평등을 주장한다"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이번 수사가 공정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 국민의힘 내에서도 윤석열 정부가 정치적 부담이 크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일부 국민의힘 전직 의원들은 "전임 대통령에 대한 수사는 정권에 힘이 있을 때 해야 지지받을 수 있는데, 지금은 오히려 부정적인 감정만 키울 수 있다"라며 검찰이 속도 조절을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마이 웨이' 행보와 문재인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는 향후 정치적 파장은 중요한 국면이 될 것으로 보인다. 보수 진영의 결집을 꾀하는 한편, 야당의 반발과 국민적 반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키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윤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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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7
  •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의혹, 수사심의위원회 개최…기소 여부 논의
    윤석열 대통령의 배우자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의혹 사건에 대한 검찰수사심의위원회(수심위)가 6일 오후 2시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서 열린다. 이번 수심위는 김 여사의 기소 여부를 논의하는 자리로 비공개로 진행된다. 수심위는 검찰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 기구로, 사회적으로 관심이 큰 사안에 대해 수사를 계속할지, 공소를 제기할지, 또는 불기소 처분을 할지 등을 심의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번 심의에서는 김 여사의 명품백 수수 혐의를 중심으로 청탁금지법 위반, 알선수재, 변호사법 위반, 뇌물수수, 직권남용, 증거인멸 등 총 6개의 혐의가 심의 대상이다. 김건희 여사는 2022년 6월부터 9월 사이 최재영 목사로부터 180만 원 상당의 고급 화장품과 300만 원 상당의 명품 가방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에 따라 청탁금지법 위반 혐의가 주요 논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 사건은 지난달 22일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이 김 여사에 대해 무혐의 결론을 내리고, 이를 검찰총장 이원석에게 보고한 바 있다. 이 총장은 수사팀의 수사가 충실히 이루어졌다고 평가하면서도, 사건의 공정성을 강화하기 위해 사건을 직권으로 수사심의위원회에 회부했다. 수심위는 권고적 효력만 가지고 있어 수사팀이 그 결론을 반드시 수용할 의무는 없다. 그렇지만 수심위 결과는 이 사건의 향방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수심위의 결론은 이날 오후 늦게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이원석 검찰총장은 수심위 결과를 존중해, 오는 15일 임기 만료 전 김 여사의 기소 여부를 최종 결정할 방침이다. 한편,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은 김건희 여사에 대한 의혹 검증을 위해 특별검사 임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공세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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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6

칼럼 검색결과

  • 오스트로네시아 인종에 관한 정리 및 분포
    오스트로네시아 인종에 관한 고고학적 근거가 동남아시아와 말레이시아 지역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남부 지역과 중국 본토 지역 중에서 광서, 광동, 강서, 복건 지역 사이의 기술적인 관련을 증명하고 있다. 반면 지금까지 고고학적과 언어학적 조합의 근거로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화남(華南) 지역과 대만 기원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지침으로 해석되어 왔다. 특히 한족들이 중국 전체의 통치 패권을 잡기 전에는 오스트로네시아어계의 화자들은 대만을 지나 중국 남부 해안에서 통킹 만까지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같은 시기, 한족들은 남진하여 양자강과 그 강변 어귀에서 통킹만에 이르는 해안 지역들에 대해 모든 본토에 남아 있는 오스트로네시아 어계 부족들을 중국인들과 동화시켰다. 오늘날 그러한 동화 과정은 대만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 모든 오스트로네시아어는 10개의 하위 군으로 분류되었다. 모든 비포모사어는 하나의 하위분류로 하고, 나머지 9개는 대만에서만 알려져 있는데 이들 모두 오스트로네시아어계이고 이 어문을 사용하는 종족들이 오키나와의 원주민들과 연결되어 있다. 일본의 오키나와 현과 가고시마 소속의 아마미 군도(奄美群島) 지역이며, 류큐 민족이 이곳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 지역은 옛 류큐 왕국의 영토였지만 그 이전의 신석기 시대를 영위한 종족들은 대만 아미족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물론 류큐 이외 지역에도 류큐 민족이 다수 살고 있는 곳들이 있다. 1920~30년대 심각한 경제 위기인 소철 지옥(ソテツ地獄)을 겪으면서 많은 수가 생계를 위해 일본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오사카 타이쇼구(大正区), 해외에서는 미국 하와이와 브라질에 많은 류큐인들과 2, 3세들이 살고 있다. 제주도에도 몇몇 류큐계 인종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일본 내 류큐인의 인구는 15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며, 해외에 30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참고로 오키나와 어 모어 화자가 40만~90만 명 정도 되고, 류큐어에 속하는 다른 언어들을 합치면 10만 명 정도 된다. 류큐 제도 주민들 중 절반은 류큐어를 일상 언어로 사용하고 절반은 일본어를 일상 언어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집계된 일본 전체인구의 약 1%가량으로 나타난다. 이에 류큐인들이 대개 일본에서 소수 민족으로 인식되기도 하는데 이들은 전체 인종에서 반 이상이 오스트로네시아계 혼혈 민으로 주장되기도 했다. 이러한 유형이 대만에서 동남아 내륙, 말레이시아, 그리고 먼 거리에 있는 태평양까지 이어진 농경 부족의 확산에 대해 가장 잘 설명이 될 수 있는 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논란이 되어 왔다. 비록 폴리네시아 인들의 이동으로 볼 수 있는 북태평양 군도에서 뻗어 나갔던 폴리네시안 특급열차(Polynesian express train)라 불리는 모형이 광범위하게 유효한 데이터로 주장되고 있지만, 여러 우려들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 현 시점이다. 이 데이터에 대한 반론 및 대안은 멜라네시아 또는 동남아시아에서 오스트로네시아어족들의 토착 기원설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동남아시아에서 재배된 가장 이른 시기 코코넛의 게놈 분석은 오스트로네시아 인들이 코코넛 작물을 재배하는 것을 기준으로 어떻게 분포되어 나갔는지 리처드 마르틴(Richards Martin)에 의해 게놈 분석표가 발표되었다. 이들 코코넛들의 10개 미세 위성 유전자를 조사함으로 인하여, 오스트로네시아 인종 게놈 연구원들은 코코넛에 2개의 유전학적인 뚜렷한 부분 모집단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인도양에서 기원한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태평양에서 기원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두 가지의 개체 사이에, 유전자 전이의 혼성이 있었다는 근거가 발견되면서 이 또한 여러 논란이 전개되고 있다. 이는 코코넛이 해양 살포에 대해 이상적으로 적응했다는 것을 가정하면 한 곳에서 모든 개체가 바다에 떠서 다른 개체로 갔다는 것도 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혼성이 발생한 위치는 마다가스카르와 아프리카 동부 해안으로 제한되며, 세이셸은 배제되었다. 이러한 혼성 위치에 대한 다양한 메커니즘과 분포 여부는 오스트로네시아 항해자들의 무역 항로로 알려진 것과 동시에 발생된 것으로 보여 진다. 더불어 창시자 효과로부터 기인한 개체군 병목 현상을 경험했던 남미의 동부 해안에 있는 유전학적으로 나타난 뚜렷한 코코넛 하위 개체가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선조들은 태평양 코코넛을 재배했던 종족들로 그것은 오스트로네시아 인들이 미국 대륙까지 항해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여전히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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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9-10
  • 홍범도 장군과 러시아의 인연과 상세한 독립투쟁기
    내가 갑자기 홍범도 장군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내가 러시아에서 살고 있으며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동유럽 (특히 우크라이나), 중동 일대를 전공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근현대사를 연구하다보면 적백내전은 기본으로 나오고 여기에 연해주, 독립군, 고려인, 소일대립 안 볼 수가 없게 된다. 러시아 관련에, 우리와 연관이 있으니 더 보게된다. 더불어 고려인 강제 이주 때 중앙아시아로 대거 들어왔고 그곳에서 홍범도는 고려인들에게 영웅, 그 이상이었다.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 할아버지들한테 홍범도 장군의 영웅적인 무용담을 듣고 자랐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고려인의 상징이 된 홍범도 장군의 유언에 따라 고국에 유해를 모시는데 2012년부터 동참을 해서 오늘날까지 온건데 러시아학 연구자로써 이같은 상황에 분노와 참담함을 느끼고 있다. 홍범도 장군이 러시아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05년부터였다. 의병활동을 지속하던 홍범도는 1908년 12월 중순 마침내 러시아의 소왕령(蘇王嶺: 니콜스크 우수리스크)에 도착했고 이어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무기와 탄약을 구입해 가고, 또 연해주 지역의 의병부대와 공동보조를 취하며 더 나아가 남한 지역의 의병부대와도 연계하여 대대적 의병전쟁을 전개하기 위해서였다. 이 시기 일본 헌병대 및 일본 육군 정규부대를 상대로 크고 작은 37회의 전투를 벌였다고 알려져 있다. 나라를 잃은 뒤, 의병 항쟁 여건은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이 시기 국내 무장독립운동 단체들의 일반적인 조류에 따라 홍범도 역시 1911년 연해주로 망명했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점으로 하는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해서 수시로 월경해 접경 지대의 친일파 및 일본 군경을 공격하는 게릴라 전을 수행했다. 이후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무너지고 적백 내전이 발생한다. 이 혼란을 이용해 일본군이 연해주를 침략했고 결국 블라디보스톡도 함락된다. 일본군은 이 기회를 이용해 홍범도를 포함한 연해주 소재 조선 무장독립운동 단체를 소탕하려 했다. 이에 대응해 무장독립운동 단체도 적극적으로 일본군과 교전을 벌임과 동시에, 연해주로 내려와 백군 및 이를 지원하는 일본군을 격퇴하고자 내려온 적군을 만나게 되고 몇몇 조선인 공산당원들이 접촉해 옴으로써 홍범도는 이들과 손을 잡게 된다. 결국 탄약도 없고 일본과 싸울 근거지를 잃어버린 홍범도는 무기와 탄약이 풍부하고 자금도 많은 볼셰비키의 지원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볼셰비키 적군의 합류는 홍범도에게 선택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 상태에서 일본군에게 항복하면 매국노라 욕을 먹고 공산당 측의 지원을 받거나 들어가면 빨갱이라 욕을 먹는다. 홍범도를 욕하는 당신들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그리고 자유시 참변에 홍범도가 관여했거나 홍범도가 자유시에서 같은 독립군을 직접적으로 학살했거나, 학살을 지시했거나, 적극적으로 도왔거나, 하는 등의 얘기는 근거 없는 것으로 국방부가 기자회견에서 실토했다. 이후 계속된 일본군의 토벌전 및 만주 군벌인 장작림과의 충돌로 인해 홍범도를 포함한 독립군 세력은 소련 영내로 탈출했다. 경신참변으로 인해 동포들이 몰살당하고 땅을 초토화 되어 독립군은 근거지를 잃고 친일파인 만주 군벌 장작림의 독립군의 진주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만주는 더 이상 항일 투쟁의 기지가 되지 못했다. 제국주의에 탄압받던 소수민족과 연대하겠다며 투쟁을 적극 주장하는 레닌의 소련은 이들에게 매력적인 선택지였을 것이다. 당시 독립군을 이끌던 수장들 상당수가 한글을 아직 떼지 못했거나 겨우 한글을 떼던 사람들이었는데 홍범도의 경우는 청년 시절 신계사에서 지담스님에게 한글을 겨우 떼고 한자 몇 개 아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 정도인데 홍범도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그 이념의 폐해가 무엇인지 알았겠는가? 당시 홍범도의 관심은 오로지 일본과 싸우는거였고 공산주의 사상은 별로 관심도 없었다. 소비에트 적군의 수장 레닌은 당시 민족자결 원칙을 내세우며 약소민족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적군은 독립군에게 신식 무장까지 약속한다. 자금력이 없던 독립군은 적군의 제안을 거절하기 힘들었다. 많은 독립군이 적군에 가담한 이유다. 홍범도 장군에게도 적군이 끈질기게 접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당시 일본이 러시아 백군을 돕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군은 적군편에 섰다. 독립군의 눈에는 일본에 총구를 겨누고 있는 적군이 ‘동지’였던 것이다. 자연스레 적군-독립군 대(對) 백군-일본군의 대결 구도가 형성됐다. 적군은 표면적으로 약소 민족 지원을 내세워 독립군과 공동 전선을 구축한 셈이다. 그러나 1921년, 적군이 갑자기 입장을 바꾸게 된다. 적군이 우위에 있었고, 백군은 궤멸 직전이었다. 적군은 더 이상 독립군의 힘을 빌릴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같은 상황을 파악 못했던 홍범도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독립군의 통합이 마무리되어 항일무장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해석이다. 당시 홍범도에게는 대한의용군, 고려혁명군 그 어느 쪽과도 이해관계가 없었다. 1922년 2월, 홍범도는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의 주최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는데 이는 소련 지도부를 설득해 충분한 지원을 얻어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서였다. 이때 레닌이 트로츠키를 통해 홍범도를 따로 불러 단독 면담을 한 다음 금화와 홍범도라는 이름이 새겨진 은제 마우저 C96 권총을 선물했다. 그리고 독립군에 대한 지원도 약속했다. 독립군 중 트로츠키나 레닌과 단독 면담을 한 것은 홍범도가 유일하며 이때 레닌에게 받은 권총은 현존하지 않지만 권총집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나 레닌이 사망하고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권력 투쟁, 스탈린의 집권이 이어지는 동안 독립군의 지원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들은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본과의 투쟁을 허락했을 뿐, 제대로 된 지원도 해주지 않았고 조선 독립이나 고려 독립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결국 소련은 홍범도와 김경천 등의 독립군 장군들을 이용만 했다. 1922년 소련은 일본과 베이징에서 밀약을 맺고 일본군의 연해주 철수를 조건을 걸었다. 이에 일본도 항일무장투쟁 단체의 해산을 조건으로 걸었다. 이를 받아들인 소련이 항일무장투쟁 단체들을 해산시켰다. 이후 홍범도는 1923년 연해주 남부에서 한인 콜호즈를 비롯한 지역 사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이 때 두번째 부인을 얻어 딸 하나를 두었다. 소련의 연금을 받아 생활하기 위해 1927년 소련 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했다. 홍범도 장군은 강제이주 전까지 원동에서 딸과 사위와 함께 생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가 그의 나이 60세가 다 되었을 때다. 그러나 스탈린에 의해 이루어진 고려인 강제 이주 때, 함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되었다. 이후 키질로르다에 위치한 고려극장에서 고려인 희곡 작가 태장춘의 배려로 수위장을 맡았으며 소련으로부터 연금을 받으며 생활하였는데 홍범도는 매월 80루블의 연금과 50루블의 보수를 받아 넉넉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1936년 기준, 소련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은 150 ~ 200 루블, 연금은 25 ~ 50 루블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1달 수입이 130 루블로 봤을 때, 당시 소련의 평균 임금보다 매우 낮은 편이지만 부양가족이 없었고 수위 자리도 고려인들의 영웅인 홍범도에게 생활비를 챙겨 주기 위해 일부러 마련한 자리였기에 생활에 큰 문제가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키질로르다는 수많은 고려인들이 정착을 한 지역으로 고려인 신문사, 원동조선사범대학, 조선극장, 라디오방송국, 하바로프스크 출판사 조선부 등, 고려인들이 세운 문화기관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홍범도와 자주 교류했던 소설가 김기철에 의하면 이러한 키질로르다의 생활환경이 홍범도의 말년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1941년 대조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 '물자를 아껴 전선의 병사들을 돕자'는 선전활동을 하기도 하였고 <레닌기치>를 읽으며 이웃들에게 전선 소식을 전하거나 직접 글을 투고하여 젊은이들에게 나치 독일을 격파하는데 힘을 보태라며 전쟁 참여를 독려하기도 했다. 이오시프 김이 쓴 <소련한인극단>에 의하면 홍범도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73세의 나이로 소련 정규군에 지원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고 한다. 1942년 4월 홍범도가 몸담고 있던 고려극장이 카자흐 SSR 동부 우슈토베(Үштөбе)로 옮겨간 이후에는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다가 1943년 10월 25일 노환으로 사망했다. 1927년 이후, 그는 공산주의자로 지냈지만 당시 소련의 상황으로 볼 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갈 곳이 없던 홍범도의 입장에서는 소련 잔류의 선택 밖에 없었다. 키질로르다에서도 홍범도는 고려인들 사이에서 파쟁에 참여하지 않고 매우 공평정대하게 행동하여 판결했다. 그 가혹한 스탈린 폭정시기에도 이런 홍범도를 감히 건드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고 한다. 홍범도 장군은 의도치 않게 시대적 비극과 아픔으로 소련에서 공산당에 입당했지만 조선이나 한국에 피해 준 행위를 한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유언에서도 고국에 묻히고 싶어했다. 그러는 상황에서 홍범도 장군을 모셔가더니만 이와 같은 몹쓸 대우를 받고 있는 것에 대해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동포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이들은 고려극장 안에 있는 홍범도 장군의 대형 사진 앞에서 '한일독립전쟁 영웅 홍범도 장군, 모셔갔으면 제대로 모셔라', '홍범도 장군 공산당 이력이 문제면 내 가족과 고려인 동포 50만명도 모국의 적인가'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흉상 이전 반대를 외쳤다. 홍장군은 카자흐스탄 현지 고려인들에게 정신적인 지주다. 박 드미트리 홍범도 장군 기념사업회 카자흐스탄 지회장은 홍범도 장군이 아름다운 해방된 조국의 품에 안겨 영면하시겠다고 생각하면서 마음 뿌듯해했고 한국이라는 나라를 자랑스럽게 느꼈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는 배신감이 느껴진다고 한다. 19세기, 조선 위정자들이 북삼도 주민들을 수탈해 국경 밖으로 살기 위해 연해주로 가서 집단을 이룬게 고려인들의 시작이다. 당신들의 조상들인 조선의 위정자들이 이들을 나라 밖으로 내몰은 셈이고 일제의 부역자로 살기 거부했으며 북한도 받아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공산국가 소련에 살게 됐다. 당신들은 홍범도장군을 개차반으로 만들고 명예까지 모독했으며 공산주의자라고 매도했다. 그러나 당신들이 매도한 홍범도는 고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지만 공산주의자가 되고서도 조선과 대한민국에 피해를 준적 없다. 그리고 그는 고려인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영웅으로 고려인들을 잘 이끌었던 인물이다. 당시 시대적 상황이 그러했기에 계속 홍범도, 고려인 = 공산주의자라고 할꺼면 그렇게 되도록 내몰았던 조선왕조의 후예이면서 나라를 잃도록 방관한 당신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어쨌든 홍범도, 고려인 = 공산주의자 이 공식이라면 어쨌든, 당신의 선조들이 이들을 내몰았고 당신의 선조들 덕택에 나라가 망하여 이들을 지키지 못한 것은 팩트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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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7
  • 이탈리아와 우크라이나 집시들의 심각한 인권 침해 현황
    유럽국가들 중에서 수적으로 볼 때 가장 많은 집시 민족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 루마니아이다. 집시의 정체도 알 수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집시의 기원에 관한 문제도 분명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이다. 루마니아의 집시 전문가인 콘라드 베르코비치(Konrad Bercovici)는 “세상에서 집시의 수 만큼이나 집시의 기원에 대한 이론이 존재한다”고 언급하였던 것으로 나타날 정도로 집시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우선 집시라는 용어의 시작은 그리스어 아칭가노이(Atsinganoi)에서 유래하고 있다. 아칭가노이라는 용어는 동유럽에서 많이 통용되었으며, 또한 집시들 자체에서가 아닌 외부인들이 그들을 지칭할 때 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종종 경멸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루마니아 집시들은 이 용어보다 산스크리트 기원의 집시 언어인 ‘Rrom’이라는 용어를 더욱 선호하고 있다. 집시들은 다양한 국가들에 흩어져 생활했으며, 그 곳에서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화요소들을 유지하는 동시에 그곳의 여러 가지 문화요소들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역사적인 과정 속에서 집시라는 민족의 정체성은 항상 긍정적인 요소들만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고, 반대로 부정적인 면이 더욱 부각되어 나타나기도 했다. 루마니아의 집시들은 19세기 중엽까지 노예로 존재했었기 때문에 이들과 관련한 다양한 정황들은 역사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사실상, 집시들의 노예제도와 관련한 여러 가지 흔적들은 오늘날까지 그들의 사회 구조 속에서 남아있으며, 루마니아 인들과의 관계 및 루마니아 정부와의 관계에서도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집시 민족의 사회 내에서는 노예 제도와 관련하여 후유증을 상당히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수세기 동안 노예 제도가 지속됨으로 인해 집시들은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게 되었고, 스스로의 책임으로 행하는 진취적인 정신 또한 약하게 되었으며, 어떤 사건에 대하여 체념하는 운명론적인 삶의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최근 집시들의 동향을 보면 이탈리아와 로마시 정부가 이탈리아 사회에 동화되거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중, 선택하라고 요구하면서 집시촌을 철거하고 있다. 철거가 이루어진 거주촌에서 루마니아로 돌아가겠다고 신청한 집시들은 14명에 불과했다. 대다수의 집시들은 길거리에 거지같은 신세로 현지인들에게 돈을 구걸하거나 주머니를 터는 소매치기들로 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시는 다른 집시 거주촌들도 철거하겠다고 밝혔고 실질적으로 철거되고 있다. 이처럼 이탈리아 정부가 겉으로나마 경제적인 유인을 내걸었지만 우크라이나에서는 노골적으로 폭력을 행사해 집시를 추방하고 있다. 특히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에 맞섰던 네오나치 민병대 출신들이 크림반도를 상실한 분노의 화살을 집시에게 돌리고 있었다. 수도 키예프에서는 지난 4월 ‘C14’라는 극우 단체가 집시들의 천막촌에 불을 지르는 등 폭력을 행사해 집시들을 강제로 추방했다. 이후에도 네오나치들, 프라비 섹토르, 아조프 대대와 같은 집단들의 집시 거주촌 공격이 잇따르고 있으며 이들은 인권을 무시하고 강제로 탄압하고 있다. 집시들은 야생화 부케를 팔아 생활을 유지할 뿐 키예프 시민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항변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극우 단체들은 이들이 절도와 구걸을 하며 도시를 더럽혔다고 주장한다. 일련의 공격 이후 키예프에서는 집시를 보기 어렵게 되었다. 뉴욕 타임스의 기사에 의하면 우크라이나 정부가 폭력을 방관해왔다고 지적했다. 특히 ‘C14’는 철거 폭력 장면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버젓이 인터넷에 올렸으며 "У Києві С14 розігнала табір ромів на Лисій горі та спалила їхні намети(키예프에서 C14는 리시아 고라(Lysia Gora)에 집시촌 진영을 분산시키고 텐트를 불태웠다.)"라는 기사까지 내보내 정당성을 내세워 자신들의 인권 유린 행위에 대해 합리화했다. 2016년 우크라이나의 다른 극우 단체 회원들, 특히 동부의 아조프 대원들은 집시 남성들을 집중적으로 살해했다. 이들은 집시 추적 장면을 ‘집시 사냥(Циганське полювання)’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으로 인터넷에 올리기도 했다. 정부가 미온적으로 방관했던 이유로는 극우 인사들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전쟁 영웅’이었다는 점과 정치적 이용 가치가 있다는 점이 꼽히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유엔 등이 항의하는 가운데 2017년에야 집시 거주촌 폭력 사건 관련자에게 가택 연금 처분을 내린 것이 인권 유린에 대한 처분이었다. 또한 우크라이나 극우 세력이 ‘소프트 타겟’으로 점철된 집시에 대해 탄압을 노골화하는 것을 두고 나치즘 또는 파시즘의 부활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치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집시 30만 명을 살해하는 인종청소를 감행했다. 하지만 집시를 추방해야 한다는 주도자들은 이에 대한 인권 유린을‘사회 정화’라고 하면서 이러한 행동이 무슨 잘못이냐고 항변했다. ‘C14’를 이끄는 예우헨 카라스가 언급하기를 "우리는 파시스트로 불린다. 뭐라고 불리든 상관없다"며 “범죄자들에 대응하는 것일 뿐 인종주의적 차원의 공격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살비니 이탈리아 내무장관도 자신은 인종주의자나 파시스트가 아니며 이탈리아인을 우선으로 한 노선을 추구할 뿐이라고 말하며 집시들에 대한 인권 유린을 합리화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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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7
  • 사우디아라비아의 예멘 국경에서 에티오피아 난민 학살에 대한 미국의 이중성
    사우디아라비아와 예멘의 국경 지대에서는 지난 15개월 동안 어린이를 포함한 최소 655명의 난민들이 살해됐다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경 수비대들이 비무장 상태의 이주민 무리들에게 박격포 등 폭발성 무기로 공격하고, 가까이 접근한 이주민에게는 직접적인 총격을 가했다는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경수비대들이 이주민을 구금한 채 성적으로 학대한 정황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에티오피아인들로써 2014년부터 이어진 후티 반군과 정부군 간의 내전을 피해 예멘을 거쳐 사우디로 이주하고 있다. 내전은 2015년 사우디가 주도하는 정부 측 연합군이 개입하면서 더 큰 전쟁으로 번졌다. 에티오피아에서는 티그라이 내전으로 인해 2021년 6월 21일에 총선이 실시되었고 아비 아머드가 새로이 당선되어 2022년 11월 평화협정이 체결 이후 3개월 만에 처음으로 북부 티그라이 반군 지도부와 만나면서 평화를 논의하고자 했지만 티그라이에서 연방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방 의회 선거에 돌입하면서 다시 내전이 발발했다. 이 내전이 계속 진행되면서 에티오피아 난민들이 예멘을 통해 사우디아라비아로 건너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후티 반군을 지원하는 이란과 국교를 재수립하며 갈등이 다소 누그러졌지만 국경 상황은 여전히 험악한 상황이다. 망명을 위해 고국을 떠나는 에티오피아 이주민들의 주요 이동 경로를 보면 이들은 아프리카 동부의 국가 지부티에서 출발, 아덴만을 건넌 뒤, 사우디아라비아 국경까지 예멘 본토를 가로질러 이동하고 있다. HRW 보고서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경 경비대는 여성과 아동이 다수 포함된 비무장 상태의 이주자들을 향해 거침없이 발포했다고 한다. 이들은 박격포까지 동원해 수십 명을 단번에 학살하기도 했다. 지난해 9월 이주자 200여 명과 함께 국경에 접근했던 한 생존자는 “갑자기 폭발물이 날아왔고, 일행 대부분의 몸이 으깬 토마토처럼 갈가리 찢어졌다”고 말했다. 이들 후티 반군 군인들 중 상당수가 난민에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보고 이들 난민들에게 저지른 2020년대 들어 최악의 학살극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경 수비대들은 이주자들을 구금한 채 각종 학대 행위도 했다. 이주자에게 총에 맞을 신체 부위를 스스로 고르게 한 뒤 총을 쏘기도 하는 악질적인 행위를 일삼았다. 특히 이들은 남성 이주민에게 여성 일행을 성폭행하라며 성적인 학대도 일삼았다. 한 17세 소년은 “한 명이 거부하자 경비대는 그를 즉시 처형했고 곧바로 다른 남성에게 ‘네가 하라’고 강요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추방 명령을 받아 예멘으로 압송되던 이주자들도 즉각 공격을 당했다. 20대 여성 생존자는 “사우디아라비아 국경 수비대들이 우리를 차에서 내리게 한 뒤 도망가라고 소리쳤다. 1㎞ 정도 달아나 쉬고 있는데 박격포를 쐈다”고 증언했다. 지난해 3월부터 올해 6월까지 살해된 이주자는 최대 수천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 상황을 지켜본 HRW의 연구자들은 여러 증언들을 토대로 산 비탈 전체에 시신이 흩어진 ‘킬링필드’로 당시를 묘사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국가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프로 골프 리그와 축구 클럽을 사들이는 데 수십억 달러를 쓰면서 이와 같은 인권을 무시한 범죄에 대해서는 관심을 쏟지 않는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한편 2022년 3월부터 올해 6월까지 사우디아라비아 국경을 넘으려고 한 42명의 에티오피아 이주민 및 망명 신청자의 증언들과 350장의 SNS 사진, 동영상과 위성 사진을 비교 분석했다. 이를 바탕으로 이들 난민들은 예멘과 사우디아라비아 국경의 이주민들 이동 경로를 따라 각종 폭발물들과 총격으로 살해된 시체들이 발견되고 있다고 전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측은 이 주장에 대해 자신들이 벌인 행위에 대해 근거가 없으며 이와 같은 인권보고서를 신뢰할 수 없다고 전했다. 사우디아라비아 당국은 지난 해에도 유엔이 자국 국경수비대가 이주민을 조직적으로 살해했다고 지적했을 때도 이를 강하게 부인했었다. 빈 살만의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과 서방의 편에 서지 않고 이란과 화해했으며, 러시아-중국과 한 편이 되자 나는 빈 살만과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에 찍혔기 때문에 갖은 페이크 뉴스의 타겟이 될 것으로 작년에 예상했는데 올해부터 빈 살만을 향한 명확하지 않은 뉴스들이 나오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아킬레스건은 이슬람 신정체제로 인하여 발생하는 인권 문제에 있다. 미국 고위 외교관들은 작년 가을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경수비대가 예멘 국경에서 에티오피아 이민자들을 향해 총기를 난사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는데 이를 공론화하지 않았다. 당시 리처드 밀스 유엔 주재 미국 부대사가 예멘 내전 사태를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사우디아라비아 국경에서 발생한 이민자 학대 의혹에 대해 여전히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이에 대해 얼마나 많은 아프리카인이 사망했는지에 대해서는 끝내 침묵을 지켰다. 이미 작년 12월에 유엔과 비공개 회의를 열고 사망자와 부상자 수 등의 구체적인 자료를 받았는데도 말이다. 미국은 대선을 앞두고 있다. 헤리스와 민주당은 재선에 성공하기 위해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여 자신의 외교 치적으로 삼으려 한다. 물론 아랍 세계와 유대 세계인 이스라엘이 이란과 같이 외교적 화해를 하게 된다면 이는 십자군 원정 이래 1,000년 이상 이어온 유대와 아랍이 손을 잡았다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화해 이상의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되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종교적으로도 유태교와 이슬람교가 화해할 수 있는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는 것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를 만들고 민주당과 현 대통령 바이든의 치적을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의 이같은 만행에는 일부러 눈 감고 묵인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자말 까슈끄지 사건 때, 이에 대한 인권 문제에 사우디아라비아 추궁했던 미국이, 결국 에티오피아 난민 학살에는 입을 다무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 결론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 개선과 유가 문제, 이스라엘과의 외교적 화해 등 복잡하게 얽혀져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외치던 "인권(Human rights)"은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얼마든지 이용 가능한 수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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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7
  • 영국 식민지 시절, 파키스탄의 분리와 배경
    1611년 영국 동인도회사는 벵골만의 항구 도시인 마술리파트남(Masulipatnam)에 무역 거점을 세우면서 인도 대륙에 입성한다. 사실 영국 동인도회사가 꼴카타에 가장 먼저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인도 중남부의 벵골만 항구인 마술리파트남(Masulipatnam)에 세워진 것이 공식적인 영국 동인도회사 1호점이라 할 수 있겠다. 이후 영국은 유럽 7년 전쟁(1756~1763)에서 승리함으로 인해 인도 대륙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는데 단순히 유럽에서 벌어진 7년 전쟁이 인도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이유는 무굴제국이 통치하고 있는 인도에서도 프랑스와 영국이 인도의 주도권을 두고 격돌했기 때문이다. 클라이브가 이끄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군대가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무굴제국 연합군에 승리를 거두어 친영국파인 현지인 벵골 태수를 임명하면서 남인도의 프랑스 세력 핵심거점인 퐁디셰리(Pondichéry)를 함락시키면서 프랑스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인도 대륙의 주도권을 쟁취한다. 세포이 항쟁 이후인 1858년에는 영국이 식민지인 인도 제국을 세우면서 영국은 인도를 완전히 식민지화에 성공하게 된다. 이후 인도의 식민 종주국이었던 영국에서 윈스턴 처칠이 퇴임하고, 인도를 비롯한 영국의 해외 식민지와 해외 영토들의 자결권을 주장하던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 1883~1967)가 영국의 총리가 되면서 인도의 독립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독립을 눈앞에 두고 영국의 식민지 지배 아래, 거대한 힌두 세력에 오랜 기간 동안 눌려 있었던 이슬람에 의해 같이 탄압받던 종파들인 자이나-시크교 비무슬림 세력과 무슬림 세력 간의 종교적인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현재는 힌두교가 인도 내의 우세 종교가 되어 시크교를 핍박했고 더불어 두 종교의 관계가 매우 험악하지면서 시크교 분리주의 테러가 많이 발생하고 있는 현실이다. 무굴제국이 존립했던 당시에는 자한기르 황제 시절, 시크교 5대 구루인 아르준(Arjun, 1563~1606)이 힌두교에 대한 탄압 중단을 요청했다가 순교했을 정도로 상호 간의 연대의식을 가졌었다. 아르준의 순교 사건은 시크교의 입장에서 볼 때, 세계에서 유일하게 구루가 다른 종교를 위해 희생했다 주장하고 있다. 한편 이전 국가인 무굴제국의 중심세력인 무슬림 세력들이 인도 내 무슬림 국가 수립을 요구했다. 그 이유는 무굴제국이 무슬림 국가였고 인도 최후의 국가라는 정당성이 있었기 때문에 독립 이후에도 무슬림들이 무굴제국의 기득권을 놓치면 안 된다는 견해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도 내 주민들은 비무슬림 세력들이 대부분이었고 이들이 이와 같은 소수 무슬림 세력들을 억누르고 통제하는 과정에서 인도 대륙 전역에 비무슬림과 무슬림 간의 충돌 및 보복 학살이 발생해 수십만 명이 살해되는 등, 인도는 종교 집단 간의 극심한 갈등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인도 내부의 종교 간 갈등과 유혈 분쟁을 더 이상 통제가 불가능하게 된 영국은 결국 인도 대륙 내 무슬림 국가와 비무슬림 국가로나뉘는, 각기 종교적인 이유로 인한 별개의 독립을 승인한다. 1947년 8월 14일에 이르러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는 인더스 강 유역과 동부 벵골 지역이 파키스탄 자치령으로 독립을 선언한 것을 시작으로 그 다음날인 8월 15일에는 비무슬림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나머지 지역들이 인도 자치령으로 각각 독립을 선언했다. 인도 내에서 이와 같은 종교 갈등에 대해 고민한 마하트마 간디는 통일된 인도의 각 민족 및 종교 간의 화합을 외치며 인도 대륙이 파키스탄과 인도로 갈라지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분열을 봉합하는 데 실패했고, 간디는 1948년 나투람 고드세(Nathuram Godse)라는 인물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그리고 별개로 독립한 파키스탄과 인도는 독립 직후부터 지금까지 카슈미르의 지배권을 두고 전쟁을 벌이며 최악의 원수 관계로 갈라섰다. 이처럼 종교적인 문제로 인도와 갈라서게 된 파키스탄은 인더스 강 일대의 서파키스탄과 갠지스 강 삼각주 일대의 동파키스탄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두 지역 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사실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은 종교 및 종파만 같은 이슬람 수니파를 믿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면으로만 본다면 융합이 가능해 보였지만 문화, 인종, 언어 등 모든 부분에서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었다. 이들은 오히려 인도를 두고 상호 간의 힌두교도인 이웃들과 더 공통점이 많았을 것으로 보여 진다. 게다가 인도가 중간에 있다는 지리적인 요인, 그리고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의 거리가 멀어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두 국가 간의 가장 가까운 거리는 약 1,500㎞, 수도인 이슬라마바드와 다카 간의 거리는 약 2,000㎞에 달할 정도로 매우 멀다. 특히 파키스탄 독립을 이끌었던 무함마드 알리 진나(Muhammad Ali Jinnah, 1876~1948)는 인도 총독인 루이 마운트배튼(Louis Mountbatten, 1900~1979)에게 제시받은 인도-파키스탄 분할 계획으로 인해 매우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따라서 무함마드 진나는 분리 독립을 포기하고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 1889~1964)가 인도 수상이 되는 계획을 방해하는 방안을 고려하기도 했다. 당시 진나는 공개석상에서 매우 강경하게 파키스탄의 독립을 주장하면서 인도와 분리론을 주장했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영국의 관료들을 끈질기게 괴롭히면서 네루에게 권력을 이양하지 못하게 하면 된다는 방식의 발언을 측근들에게 자주 했다고 한다. 한편 진나는 영국령 인도의 총참모부 측에 동, 서파키스탄의 지정학적인 구도가 생존이 가능한 지를 계속 문의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영국령 인도의 군대를 총괄하는 총참모부 측은 꼴카타가 파키스탄에 포함되지 않으면 독립이 어려울 것이며, 꼴까타가 파키스탄의 영토에 포함되면 소련의 침공으로부터 방어가 불가능하다 답변하면서 난감한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인더스 강을 중심으로 정작 파키스탄 분리독립은 이미 초읽기로 들어가고 있었다. 따라서 진나는 문화적 정체성이 신앙에 우선한다는 이율배반적 논리를 내세워 서파키스탄의 영토까지 최대한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루이 마운트배튼은 이와 같은 파키스탄의 영토확보를 사실상 거절했고, 최소한 펀자브 주와 벵골 주 전체를 파키스탄에 포함시켜 통합 파키스탄 국가로 독립을 추진하려 한 진나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우산 벵골 무슬림들의 사정을 보자면 이들이 파키스탄에 합류하는 것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우선 무굴제국의 붕괴 이후 그전까지 무슬림에게 탄압받던 힌두교도들이 영국 통치 하에서 신식 교육을 받고 변호사, 기술자, 의사가 되어 무슬림보다 부유해졌고 역으로 억압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역차별에 대해 견딜 수가 없었다. 영국 지배 하에서 벵골의 힌두교인들이 대지주가 되어 그들을 착취했기에 이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독립한 서파키스탄의 수뇌부들은 진나를 비롯한 서파키스탄 출신들이 대거 장악했기 때문에 상대적 동파키스탄의 영향력이 약할 수 밖에 없었다. 파키스탄의 중앙 정부는 철저히 서파키스탄 위주로 운영되었고, 심지어 동파키스탄에서조차 고위 공직은 서파키스탄 출신들이 차지했다. 더불어 중간관리직으로는 인도에서 동파키스탄으로 피난 와 있는 무하지르를 우대하는 등, 토착 벵골인들은 거의 배제당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결국 동파키스탄 주민들의 서파키스탄 주도의 정부에 대한 불만은 점점 쌓여만 갔다. 게다가 동파키스탄 사람들은 서파키스탄으로부터 공공연하게 피부색깔을 두고 인종적으로 비하당했으며, 쌀, 소고기, 생선 등 모든 식량자원들은 서파키스탄에 수탈당했다. 그리고 동파키스탄에 배정되는 예산은 서파키스탄에 배정된 예산의 40%선에 불과하는 등 공공연한 차별을 받았다. 이는 영국 지배 하의 인도에서도 발생하지 않은 문제였기에 불만이 거셀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인구 자체로 볼 때, 동파키스탄이 서파키스탄보다 인구가 더 많았다는 것에 있다. 독립전쟁 직전 파키스탄의 인구로 보면 서파키스탄은 6,000만, 동파키스탄은 6,800만에 달했다. 특히 루이 마운트배튼은 파키스탄이 당시와 같이 분리되어 있는 기형적인 형태로 볼 때, 25년 이상 가지 못할 것이라 예측했다. 이는 실제로 파키스탄 건국 24년 만에 동부 벵골이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여 서파키스탄의 예속을 거부하면서 마운트베른의 예측은 정확히 들어 맞게 되었다. 결국 두 파키스탄은 상호 간의 내전 및 독립 전쟁으로 파키스탄-방글라데시로 분할 되는 상태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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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5
  • 헤겔 철학, 그 역사적 전개와 의미
    지금까지의 서양철학 중 가장 난해한 철학이 있다면, 과연 어떤 철학일까? 필자가 이에 대해 답변을 하자면, 당장 떠오르는 철학자는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1770년-1831)이다. 누군가 그냥 무턱대고 헤겔 철학이 다들 어렵다고 하니 도대체 어떤 철학인지 한번 읽어보자는 의도로 헤겔의 저작을 읽어보기 시작했다간 고작 몇 줄 정도만 읽고 곧장 한목소리로 무슨 말인지 몰라 너무 어렵다거나 혹은 이게 무슨 철학인지 모르겠다는 태도를 취하면서, 헤겔 철학을 그냥 포기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양상은 오늘날에만 해당하는 특이한 일이 아니고, 헤겔이 생존했던 당시에도 매번 있었던 터라 가히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독일어에 능숙한 사람이더라도 헤겔 철학 앞에서는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예외 없이 두 손을 들기 마련이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처럼 어려운 헤겔 철학이 그대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당시에도 오늘날에도 서양철학에 가장 영향력을 끼친 철학으로 평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헤겔 철학에 동조하든 반대하든 상관없이 철학자라면 헤겔 철학이 돌파해야 할 거대한 바위산임을 뜻한다. 그러나 오히려 헤겔 철학을 돌파해 보겠다는 의도로 시작했던 야심에 가득 찬 계획들이 어느 순간 그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정지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계획들은 헤겔 철학 전체가 아니라 단지 일부만을 이용해서 각자의 철학에 활용할 따름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헤겔 철학을 잘 활용한 각자의 철학이 오히려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되었으며, 헤겔 철학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음이 확인된다. 헤겔 철학은 당시에 좌파와 우파로 갈라져 치열한 논쟁을 서로 벌였으며, 그 이후로 신헤겔주의, 마르크스주의, 프랑크푸르트학파, 포스트모더니즘, 분석철학, 실용주의, 현상학, 실존주의, 해석학 등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신헤겔주의는 헤겔 철학의 관념론과 역사주의에 치중한 결과, 헤겔 철학의 변증법은 사상(捨象)해버렸다. 마르크스주의는 헤겔의 관념론을 비판하고, 합리적 핵심(der rationale Kern)인 변증법을 취했지만, 그 이후로 독단적 교조화 및 여러 분파로 분열양상을 보였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서구 마르크스주의에서 출발해서, 헤겔과 마르크스의 관계를 중도로 돌리는 데 효과적이었지만, 사회비판이론으로 귀결하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헤겔 철학의 이성 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출발했지만, 오히려 현실의 대안으로서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분석철학은 헤겔 철학의 개념론을 언어분석철학에 활용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헤겔 철학의 사변적 성격을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실용주의는 헤겔 철학에 대한 역사철학적이고 휴머니즘적인 측면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그 이상의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현상학은 독일 현상학보다 프랑스 현상학에서 헤겔 철학의 긍정적인 면을 되살리기에는 근본적으로 헤겔 철학 전체에 해당하지 않는다. 실존주의도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여기에서는 헤겔 철학의 부정적인 측면으로 귀결되었다. 해석학은 헤겔 철학을 독백이 아니라 대화라는 측면에서 다루기는 했지만, 헤겔 철학의 논리적 체계보다는 자의적 해석의 가능성만 열어 놓게 되었다. 그 외에도 비록 헤겔이 동양철학에 관해 부정적으로 평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중국과 일본 등등에서 헤겔철학과 동양철학의 비교연구도 황행(橫行)하고 있다. 이처럼 헤겔 철학의 영향력이 지대했던 것은 헤겔 철학이 학문의 거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철학적 사유를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전개했으며,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의 계기를 변증법적 사유의 힘으로 필연성을 도출해냈기 때문이다. 물론 헤겔 자신은 이를 완벽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현재 입장으로 보면, 곳곳에 허점도 있다. 그러나 유한한 삶을 영유하는 한 개인으로서 인간이 이 정도로 실로 엄청난 학문적 성취를 이루어 낸 것은 분명히 철학사에 영원히 빛날 업적이라 하겠다. 헤겔의 이러한 노력의 결과 덕분에 우리는 헤겔 철학이라는 유산을 물려받은 것이다. 그 유산은 독일에만 한정되어, 독일 계몽주의의 산물이라는 평가를 넘어서 세계적 자산이 되었다. 헤겔 철학에는 그리스 철학, 중세 신비주의, 범신론, 계몽주의, 낭만주의, 정치경제학, 사회계약론, 칸트 철학, 피히테 철학과 셸링 철학 등이 모두 녹아들어 있다. 또 논리학, 자연철학, 정신철학, 법철학, 역사철학, 종교철학, 미학, 철학사 등도 포함되어 있으며, 이 모든 분야가 서로 유기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헤겔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단순히 특정한 영역에서 몇몇 구절만을 읽고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될 경우, 헤겔 철학에 대한 오해가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는 없으며, 스스로 미로에 갇힌 채 착종(錯綜)된 모순이 휩싸이고 말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헤겔 철학에 대한 이해는 일단 고사(枯捨)하고,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봉착하면서 마치 늪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모습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헤겔 자신의 서술방식이 사변적인 탓에 야누스적 이중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때론 혼란스럽기도 하고, 분명한 일관성이 다소 없거나, 혹은 헤겔 자신의 오류로 인해 진위여부(眞僞與否)에 관한 논쟁거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헤겔 사후 지금까지도 헤겔 철학은 이러한 문제로 인해 각자도생(各自圖生)에 근거해서 전개되어왔다. 그러다 보니 헤겔 철학에는 여전히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남아 있고, 다만 누구든 그럴듯하게 타당하게 보이는 근거로 단지 각자의 주장이 제시되는 선에서 헤겔 철학을 논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종종 헤겔 철학의 핵심 개념인 변증법에 관한 논의를 회피한 채 어떤 하나의 해석만이 올바르다든가, 문자적 이해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이것은 헤겔 철학이 지니는 사유의 역동성과 역사성보다는 헤겔 철학을 개념의 논리로만 만들고 더욱 추상적으로 만드는 결과가 되었다. 더 나아가 헤겔 철학에 대한 핵심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논의하기보다 특정한 개념의 의미를 놓고 각자의 관점만을 관철하려는 틀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하는 양상은 헤겔 철학에 관한 각자의 이해방식이 빈약하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헤겔은 철학의 첫 번째 조건을 거론하면서 진리에 대한 용기와 인간 정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강조했다. 우주의 본질이 인간 정신 앞에서 열리고, 우주의 풍부함과 깊이가 인간 정신 앞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는 헤겔의 말은 다소 과장되기는 했지만,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는 한다. 어쩌면 헤겔의 이 말은 많은 사람에게 인간 정신의 위대함과 위력을 한껏 보여줌과 동시에 인간 정신을 스스로 최고의 가치라고 여길 만한 것이라 해도 괜찮다는 뜻에서 영감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반대로 부정적으로 보면, 과연 그런 것이 인간 정신에 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헤겔 철학에 대한 격렬한 비판은 바로 이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어서 심지어 헤겔 철학을 붕괴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비판이 과연 정당한지에 대한 문제는 헤겔 철학 내부에 한정해서 다루어져서는 안 되고, 오히려 헤겔 철학이 외연으로 확장될 때 비로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그와 같은 비판이 때론 헤겔 철학에 대한 오해의 산물일 수도 있을 것이다. 헤겔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첩경은 사실상 없다. 그 첩경이 어딘지를 우리가 우선 찾기보다는 헤겔 철학의 근본문제가 무엇인지에 관한 근본적 천착(穿鑿)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섣부른 얕은 지식으로 헤겔 철학을 좀 공부했다고 떠드는 자들은 이러한 근본적 문제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외면하고 뒤로 숨기 마련이다. 또 헤겔 철학에 대한 특정한 철학자의 관점이 마치 헤겔 철학 전체에 관한 이해라도 되듯이 말하는 자들도 마찬가지로 스스로 밑천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더 나아가 특정한 철학을 위한 우회로로 헤겔 철학에 접근하려는 자들도 헤겔 철학에 대한 진지한 숙고보다는 축소된 방식으로 헤겔 철학을 이해하려는 수준에 그친다. 그들은 모두 과연 헤겔 철학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알지 못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다. 심지어 일반론 수준에서 그저 그렇게 헤겔이 얘기했다는 정도가 전부일 뿐이다. 헤겔 철학은 여전히 땅속 깊이 묻혀 있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헤겔 철학의 비밀을 우리가 완전히 풀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그 가능성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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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5
  • 러시아 국민시인 알렉산드르 푸쉬킨 동상이 우크라이나에서 수난 중
    러시아 국민시인 알렉산드르 푸쉬킨 동상이 우크라이나에서 계속 수난을 당하고 있다 한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 있는 푸쉬킨 동상은 머리가 갈색 천으로 덮히고 붉은 테이프로 묶여 "'시인이 앞을 볼 수 없는' 포로가 됐다(Поет став сліпим в’язнем.)." 라고 쓰며 동상 하단에는 붉고 흰색 페이트로 '탈식민지화는 멈출 수 없다(Деколонізацію неможливо зупинити)'는 문구가 우크라이나어로 써있다. 러시아어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적 언어로 만들었다며 전 세계에서 찬사를 받고 있던 푸쉬킨은 러시아어를 축출하려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들에게 사실상 공공의 적으로 몰려 그 유산이 파괴되고 있다. 더불어 푸쉬킨 동상의 이같은 행위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러시아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저질러진 것으로 보인다. 지난 해에는 우크라이나 북부 하리코프의 시인 광장과 서부 쩨르노브찌(Чернівці)의 드라마 극장 앞에 서 있던 푸쉬킨의 흉상이 당국에 의해 철거된 뒤, '독재자' 스탈린 흉상과 같은 창고에 처박힌 것으로 전해졌다. 러시아의 유산을 없앤다고 하지만 이는 쉽지 않다.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어를 헌법상의 유일한 국어로 인정하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분야에서 러시아어가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는 이중언어 국가이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어 구사자가 전체 인구의 적게는 1/3, 많게는 절반에 이르고 있으나, 2012년 8월에 법률 "국어정책 토대에 관한 법(Закон про засади мовної політики України)"이 통과되기 전까지 러시아어의 지위는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2012년에 재정된 우크크라이나의 언어법은 각급 지자체 주민 인구의 10% 이상이 사용하는 언어를 지역어로 선정하여 공공기관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법이다. 더불어 이 법을 재정할 당시의 대통령 친러계인 빅토르 야누코비치(Виктор Янукович) 시대였다. 당시 우크라이나 지역어 중 핵심적인 언어가 러시아어였고, 이 법을 통하여 지역어가 해당 지역에서 국어인 우크라이나어가 사용돨 권한을 잠식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 법의 입안 및 통과, 시행, 폐지, 폐지 무효화를 둘러싸고 우크라이나는 극심한 갈등을 겪기도 했다. 물론 러시아어의 지위를 둘러싼 갈등은 현재도 진행형이며 시시각각 양상을 달리하고 있는 형편이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어 사용은 전면 금지되었다. 우크라이나의 작가 루브코 데레쉬(Рубко Дереш)는 작년 6월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Ми не можемо мовчати)" 잡지 인터뷰에서 '죄와 벌'을 쓴 러시아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예프스끼(1821∼1881) 등 러시아 문학을 언급하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공범론을 주장하며 이상한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면서 "러시아 문학은 푸틴의 공범이다. 하나는 국가로서 러시아가 가지는 제국주의적 야망과 관련이 있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존엄, 자유 및 책임이 러시아 문학에 결여돼 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러시아 문학과 종교, 즉 사회 문화는 이 전쟁의 공범이다. (Російська література – пособниця Путіна. Одне пов’язане з імперіалістичними амбіціями Росії як нації, а інше — з тим, що в російській літературі бракує індивідуальної гідності, свободи та відповідальності. Співучасниками цієї війни є російська література і релігія, тобто соціальна культура.)"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Ми не можемо мовчати)" 이 단체에 속해 있는 우크라이나 작가들이 집에서 한 번도 러시아어를 쓰지 않는다면 인정하겠는데 필자의 오랜 우크라이나 경험상 그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장담한다. 공식적인 장소에서는 서툰 우크라이나어 쓰면서 러시아어를 섞어 쓰기도 한다. 집에서는 러시아어로 말하면서 러시아어와 글을 금지한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다. 우크라이나를 겪어본 사람이면 이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인지 알만한 사람 다 알고 있다. 저 사람들 누군가가 약 올려서 흥분하게 하면 우크라이나어가 아니라 러시아어로 욕지거리 하며 침 튀기며 달려드는 기막힌 상황을 보게 될 것이다. 도대체 "러시아가 가지는 제국주의적 야망(Імперіалістичні амбіції Росії)"에 러시아 문학과 푸틴의 연관성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 같은 헛소리를 하는지 알 수는 없다. 그리고 "개인의 존엄, 자유 및 책임이 러시아 문학에 결여돼 있다(Це пов'язано з тим, що в російській літературі не вистачає особистої гідності, свободи і відповідальності.)"고 하는데 러시아 문학을 제대로 읽어봤음 절대 그런 소리할 수가 없다. 오히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작가라는 타라스 세브첸코(Тарас Шевченко, 1814~1861)의 작품들이 개인의 존엄, 자유 및 책임이 결여되어 있는 내용들이 많다. 그 이유는 그가 농노 출신이었고 농노에서 해방된 것도 러시아 친구들이 도와줘서였다. 그는 키릴-메토디우스 형제단(Кирило-Мефодіївське товариство)이라는 매우 투쟁적이고 과격한 테러집단에 속해있으며 이 불법 단체는 슬라브인들의 단합을 주장해 러시아 제국 곳곳에서 테러를 자행하며 수많은 러시아인들을 살상했다. 여기에 우크라이나가 언급한 "개인의 존엄, 자유 및 책임(Особиста гідність, свобода та відповідальність)이 있을 수가 없다. 우크라이나 현대 작가들이 말하는 "러시아 문학과 종교, 즉 사회 문화는 러시아가 일으킨 전쟁의 공범"이라 주장하는 것은 전쟁과 상관없음이 분명한데도 러시아의 문화를 깎아내림으로써 저급한 하위 문화로 전 세계에 인식시켜 러시아의 자존감과 자부심을 짓밟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일환으로 푸쉬킨 동상에 대한 우크라이나 인들의 공격은 러시아인들의 자부심을 죽임으로써 자신들의 자존감을 높이려 한, 정신승리에 블과한 테러 행위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좋게 말해서 민족주의자지 사실상 무식하고 무도한 자들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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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4
  • 지나친 역사 미화를 하는 분들의 마지막 여정
    결국 과도한 환타지의 역사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환상이 깨졌을 때 정해진 곳은 바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사상이다. 왜냐면 사회적으로 퍽퍽한 삶, 자신들을 이꼴로 몰고 간 것을 외세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때부터 적은 자신들이 판단하기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며 믿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서구 세력과 일본이 된다. 서구 세력의 제국주의로 광활한 영역의 대조선의 영토와 활동범위가 줄어들어 한반도로 이주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그런 공통의 적이 미국과 일본이며 그들을 타도하는 것이 민족 주체를 바로 세우고 자신들의 또 다른 새로운 환타지를 심어줄 것으로 믿고 있다. 결국 세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사라지고 주관적인 시선으로 보니 당연히 독선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집과 아집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게 된다. 그러니 6.25 사변을 북침으로 규정하였으며 이들에게 있어 공산주의 사상보다는 미국이나 일본과 싸워 이겼다는 민족 승리 전쟁이라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현재에만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한국의 경우, 조선 시대 후기, 정조대왕이 개혁에 실패한 이후 순조 시대 때부터 정조가 개혁하고자 하여 선발한 인재들을 1801년 신유박해를 통해 천주교 세력 제거를 명분으로 삼아 정략적인 숙청 작업을 개시했다. 정조가 총애하며 귀하게 여겼던 개혁 신료들을 천주학쟁이로 몰아 처형했으며 체제공 선생의 묘가 파묘되고 정약용과 같은 실학자들은 10여 년 동안 남쪽의 섬 지역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그와 더불어 흉년과 가뭄, 홍수가 지속되었고 북삼도(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백성에 대한 차별이 극심화되니 1811년 홍경래의 난을 시작으로 각 민란이 발생해 조선을 뿌리채 흔들어 놓았다. 조정에서는 당쟁이 마무리되고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하여 백성들은 피폐해지고 매관매직이 성행하였으며 양반이라는 신분을 돈을 주고 샀기 때문에 지배층들이 늘어나 피지배층을 학대하니 그 헐벗은 군중들은 각지에서 민란을 일으키게 된다. 진주민란, 그리고 19세기 말에 동학 운동의 시발이 되는 고부 민란이 터진 것도 그러한 배경들부터인 것이다. 이 때 헐벗었던 사람들, 특히 북삼도 지역 사람들은 정부의 수탈을 피해 러시아나 만주로 도망가,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 이것이 1대 조선족과 1대 고려인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1910년에는 나라마저 잃으니 이때 연해주로 건너가서 살고 있던 고려인들은 나라 없는 무국적자 신세가 되어버렸다. 나라가 책임지지도 않았고 수탈했으며 조선 왕조 내내 차별과 멸시, 그리고 피폐해진 사회 및 혼란기를 겪은 자들에게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정부에서 자신들을 괴롭히며 수탈한 요인보다 조국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에 대한 증오였다. 그런 배경으로 독립군이나 의병에 들어가 일본군과 싸우는 등 민족주의의 기치 아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숭고한 희생을 했다. 우선 조선 정부보다 자신들을 이렇게 만든 것이 일본 제국 때문이라는 인식이 자리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싸워도 조국은 해방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점점 지쳐갔고 때마침 러시아에서는 적백내전이 터지며 공산당과 왕당파의 치열한 전쟁이 연해주에도 벌어지자 독립군과 고려인들은 적군과 백군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디. 일본군이 러시아 백군인 왕당파를 지원했기 때문에 독립군들이나 당시 고려인 1~2세대들은 볼셰비키 공산당인 적군을 지원하는 것을 선택하여 볼셰비키와 함께 일본 제국 및 백군과 싸우게 된다. 볼셰비키가 동료가 된 과정에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며 신분과 계급에 상관없다는 공산주의 핵심 사상은 내내 조선 말기부터 차별과 멸시, 수탈을 당해 헐벗은 이들에게 있어 분명히 매력적인 사상이었고 이들에게도 평등이라는 사상이 처음으로 뿌리깊게 내려왔다. 게다가 사적 소유관계를 배척하여 모두가 공산으로 나누어 쓰고 부르주아의 것을 빼앗아 인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줘야 한다는 투쟁적인 선동은 수탈만 당해온 이들에게 복수심과 공격성 충만하게 만들었다. 이어 집단 봉기를 통해 국가권력을 직접 타도하고 국가기구를 장악하여 사회 · 경제적 변혁을 추구한다는 달콤한 사상 또한 이들을 쉽게 공산주의에 물들게 했다. 백성들을 이같이 공산주의자로 만들고 북한이라는 나라를 만들어 분단의 아픔을 겪게 했으며 6.25 동란으로 수많은 동족들의 피를 뿌린 것에 대해 애초부터 헐벗고 굶주리며 조선 후기 시대의 분란을 다스리지 못한 조선 왕실에 그 근본적인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확실한 책임 소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조선론자들은 그와 같은 책임론을 부정하며 모든 원인은 미국과 일본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들은 6.25 사변을 미국의 북침으로 규정했고 공산당들은 남조선을 미국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인민해방전쟁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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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3
  • 방글라데시 반정부 시위, 발단과 배경
    최근 2024년 방글라데시에서 발생한 반정부 시위는 공식 수치로만 3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을 정도로 방글라데시 독립 이래 사상 최악의 유혈 사태로 나타난다. 이 시위의 여파는 셰이크 하시나(Sheikh Hasina) 방글라데시 총리의 사임과 내각 해체까지 유발했을 정도로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나는 이 사태를 일으킨 국제 정세의 입장이 아닌 방글라데시 내부의 입장부터 고려해서 파악해보고자 한다. 이것을 두고 미국의 지원을 받은 세력이 색깔혁명을 일으켜 친중정권을 붕괴시켰다는 국제 정치적인 입장에서 보는 경우도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방글라데시에서 오랜 기간 동안 쌓여 있는 부작용들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라 보는 것이 옳다. 독립 이후, 현재까지 방글라데시는 극심한 실업난을 겪고 있는 국가다. CEIC의 데이터를 보면 1991년부터 2020년 사이에 평균 3.94%의 청년 실업률을 보였고 최근 데이터를 보면 2019년에 4.22%, 2020년에는 5.3%로 훌쩍 뛰어 올랐다. 148,460km²의 작은 면적의 영토와 1억 7천만의 인구로 인구 밀집률 세계 상위권의 국가라는 것을 감안하면 5.3%의 실업률, 게다가 2023년 자료에는 무려 7%까지 치솟았다. 이 정도면 앞으로도 증가할 확률은 더 높다는 것인데 이는 매우 심각한 것이다. 방글라데시는 세계 경제에서 떠오르는 별이라고 불렸다. 방글라데시는 지난 20년 동안 연평균 6% 이상 성장했고 2023년에는 세계 32위 경제 대국에까지 올라왔다. 겉으로는 방글라데시가 전체적인 가난의 틀을 벗고 중진국으로 도약하는 듯 하게 보였다. 방글라데시 GDP는 2022년 7.1%, 2023년 5.8% 증가했다. 20년간 연평균은 6% 이상, 최근 10년간은 연평균 7% 이상 성장했다. 지난 30년 동안 역성장한 적도 없다. 이에 아시아개발은행(ADB)은 올해 방글라데시 경제가 6.1% 성장해 아시아에서 인도(7.0%)에 이어 두 번째로 크게 성장할 것으로 예측했다. 이 같은 성장의 요인은 하시나 정권이 수출 주도 무역에 경제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당시 방글라데시는 섬유 산업을 토대로 성장을 이끌어냈다. 방글라데시의 2022~2023 회계 연도 수출의 84.5%, GDP의 13% 이상이 섬유 산업에서 창출됐다 한다. 방글라데시 중앙은행에 따르면 2023년 봉제 등 섬유 관련 매출은 사상 최고인 473억8,000만 달러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는 속 빈 강정이나 다름없었다. ‘분배 없는 성장(Growth without distribution)’이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하시나 정권의 수출 위주 성장 전략은 세계적으로 최악에 가까운 부의 불평등을 구축했다. 방글라데시의 집권 세력으로 파키스탄 아와미 무슬림 연맹이자 뱅골계 중심인 후세인 수라와르디(Huseyn Suhrawardy)에 창당된 아와미 연맹(Awami League)에 문제가 있다. 이들은 경제 성장이라는 실적을 올리며 콘크리트 체제를 구축했지만, 방글라데시 내부의 경제는 각종 상류층들의 이권 경쟁과 넘쳐 나는 부정부패, 친중이냐, 친인도냐를 두고 벌이는 정치적 양극화 스텐스와 빈부격차의 심화로 언제 무너질 지 모르는 위기를 맞고 있었다. 더불어 코로나 펜데믹 시기에는 전체 인구의 10%에 가까운 1,640만명이 순식간에 빈곤층으로 전락했다. 그러면서 부자감세, 서민증세(간접세 증세), 법인세 감세를 강행하면서 서민들의 불만을 촉발시켰다.더불어 정부가 1971년에 발생한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의 유공자 자녀들에게 공무원 할당제 (공직의 약 30% 할당)를 추진하면서 대학생들이 이에 반발해 시위에 나섰다. 방글라데시는 청년 인구가 매우 많아 청년 실업률이 40%에 달할 정도로 실업난이 심각한 상태이다. 매년 약 40만 명의 대학 졸업생 중 많은 이들이 월급은 높지 않지만 안정적인 공직 3,000개를 놓고 경쟁하는데, 많지 않은 유공자 자녀들에게 공직의 1/3을 할당하면 경쟁률이 133:1에서 200:1로 급상승하게 된다. 참고로 방글라데시의 공무원 월급은 매우 낮은 편에 속한다. 방글라데시에서 가장 낮은 등급의 공무원이 받는 급여는 8,000~20,000 방글라데시 타카로 한화 기준 월 8~20만원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고위직 공무원조차도 한화기준 월 100만 원(100,000 방글라데시 타카)도 못 받는 사람이 허다하기 때문에 공무원들 사이에서 뇌물과 각종 비리가 횡행했다. 심지어 방글라데시 총리도 월급이 한화 130만 원(130,000 방글라데시 타카) 정도로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보다 20만원을 못 받는다. 그래서 공무원이 되면 뇌물을 받기 쉽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받은 뇌물로 축재하기 용이하다. 거기에다가 공무원 특유의 왠만하면 정년이 보장되어 있다는 안정성까지 겹쳐 공무원 경쟁률이 매우 높다. 그런 상황에서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의 유공자 자녀들에게 공무원 할당제를 추진한다는 것은 기득권들이 서민들의 공무원 자격을 줄이고 자기들끼리 날로 먹겠다는 얘기다. 그러니 시위가 벌어지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밀린 숙제 2)에서 필자가 후술하겠지만 원인은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에서 군공을 세우거나 독립에 기여한 기득권 층에 있다. 하시나 전 총리의 아버지이자 방글라데시 초대 대통령이던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Sheikh Mujibur Rahman, 1920~1975)이 1972년 파키스탄에서 독립한 직후 공무원 일자리 80%를 참전용사 등에게 할당하는 채용할당제를 도입하면서부터다. 그러면서 오늘날까지 방글라데시에서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은 권력을 잡은 기득권으로 세습되다시피 유지되어 왔다. 이 정책으로 본다면 독립유공자 자녀 할당제라는 것은 표면상의 이유일 뿐이고 실질적으로는 기득권 자녀 할당제인 셈이다. 이들의 부패를 몸소 겪어본 청년들은 이 같은 할당제에 격렬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방글라데시 싱크탱크인 정책대화센터(Centre for Policy Dialogue‧CPD)에 따르면 방글라데시의 전체 공무원 수는 120만명 수준이다. 이에 적절하게 공무원 할당에 대한 선정 기준을 세워 잘 분배하면 젊은 층들의 반감은 약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시나 정권과 아와미 연맹은 이 기준조차도 제대로 세우지 않았다. 게다가 같은 아와미 연맹의 자손들끼리 서로 밀어주는 특혜 논란까지 생기며 상당한 문제가 되었다. 기존 방글라데시 독립운동의 가장 큰 공로자는 방글라데시의 국부이면서 셰이크 하시나 총리의 아버지인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과 독립군 총사령관을 지낸 칼레다 지아(Khaleda Zia)의 남편 지아우르 라흐만(Ziaur Rahman, 1936~1981)이다. 그런데 셰이크 하시나와 칼레다 지아는 서로 강력한 정적이자 라이벌이며 그 집안까지도 서로 교류를 엄금할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다. 그래서 현재 집권하고 있는 셰이크 하시나의 경우, 당연히 자신의 부친을 도와 독립전쟁을 이끈 사람들의 후손들에게만 공무원 자리를 할당해줄 것은 당연하다. 지아우르 라흐만을 도와 독립전쟁을 이끈 사람들의 후손들에게는 공무원자리를 할당해주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아마 필자의 판단으로는 이러한 할당제 대한 논란을 흘린 것은 지아우르 라흐만 측이고 청년들을 분노케하여 이들을 대리로 내세워 하시나 정권과 아와미 연맹을 축출하려 했던 것 같다. 하시나가 독립유공자를 우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공무원직에 자기 사람을 심어 지속적인 권력 유지를 하려는 목적성이 더 강하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셰이크 하시나가 집권하면서 지아우르 라흐만이 독립전쟁을 이끌은 기록은 방글라데시 교과서에서 크게 축소되었으며 정적인 지아우르 라흐만의 집안을 어떠한 빌미를 내세워서라도 숙청하려 했다. 물론 이것이 칼레다 지아가 집권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의 독립운동 기록이 축소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발생한 정치 보복인 부분이라 생각되지만 지아우르 라흐만을 지지하는 방글라데시 내 시킴족, 동부 벵갈인, 몬족, 샨-라흐만 등의 계파들 세력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숙청하고 싶어도 못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셰이크 하시나 총리와 여당은 반대하는 청년 시위대를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서파키스탄 군에 부역했던 라자카르 민병대에 비유했는데 이는 더 큰 분노를 불러왔고 결국 하시나 총리가 결정적으로 하야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면서 노골적으로 할당제 부활을 정당화하며 강행, 추진하려 했다. 여기에 더해 부정선거 의혹이 짙게 나타난 2024년 방글라데시 의회 선거의 결과로 선출된 하시나 총리의 할당제 추진은 반정부 여론을 더욱 촉진시키게 된다. 당시 상당수의 대학생들은 이와 같은 할당제에 대한 정책과 관련하여 하시나 총리가 자신의 지지 세력을 위해 추진하는 정책이며, 사법부는 정부의 심복에 불과하다 주장했다. 한편 아와미 연맹을 지지하는 대학생 회원 등 할당제를 지지하는 측 친정부 학생들 또한 찬성 시위를 벌였고, 찬반 두 집단이 충돌하면서 벽돌과 몽둥이를 들고 상호 간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그러자 경찰이 개입했지만 할당제 찬성 측 학생들보다는 할당제 반대 측 학생들만 강경하게 진압하게 되니 할당제 반대파의 시위는 점차 반정부 & 민주화 요구 시위로 규모가 더욱 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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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1
  • 자유의 아이러니
    1987년 개정된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강조한 대목이 있다.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라는 문구 속에 ’자유민주적‘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독재가 가장 극심한 시절에 탄생한 유신헌법에 자유라는 단어를 헌법 조문에 포함시켰는 것을 보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자유의 반대가 폭력인데, 독재가 가장 극심했을 시대에 자유를 강조한 것이었다. 폭력은 그렇게 자유의 탈을 쓰고 역사 속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자유민주주의라고 말할 때 자유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유의 개념 정의는 무척 다양하다. 그래서 최장집선생은 민주주의가 자유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말 자체가 무의미하거나 공허한 것일 수 있다고 말하였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말하는 자유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이기보다는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자유주의에 가깝다. 윤 대통령이 자주 언급하는 자유도 고전적 자유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고대 그리스에서의 자유는 도시 공동체에 참여하는 시민 자치로서의 자유, 공적인 자유이다. 근대 자유론자의 중심에 있는 밀에게 있어서도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거나 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각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자유”였다. 하지만 시장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타인의 자유를 전재로 한 자유는 사라져버렸다. 오직 사적 자유만 존재할 뿐이다. 공동체에 대한 시민의식이 빠져있다. 오늘날의 자유는 자유로운 경쟁 속에서 개인 이익의 최대화에만 관심을 갖는 자유이다. 타인의 자유는 관심 밖이다. 시장의 경쟁 속에서의 승리만 있을 뿐이다. 늑대의 자유가 양에게는 죽음으로 작용하는 자유이다. 자유에 대한 개념은 근대에 부각된 개인에 대한 발견에서부터 그 변화가 가속되었다. 근대 자유주의의 출발점을 로크와 에덤 스미스에서 찾는 학자들도 있다. 로크의 경우는 개인의 노동이 포함된 재산의 보호를 위해 사회계약을 하고 그 속에서의 자유를 말하고 있고, 스미스에 있어서 자유는 개인의 이기심을 바탕으로 하여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경제가 돌아간다고 보았기 때문에 시장의 자기조정 기능 속에서의 자유를 존중하였다. 다분히 자본주의적 삶의 관점에서 바라 본 자유이다. 그래서 근대 이후의 자유는 타자와 자연마저도 대상으로 취급하여 대상을 재구성하는 창조로서의 자유가 부각되었다. 좋은 말로 창조이지만, 달리 말하면 타자에 대한 강요이고, 자연에 대한 착취로서의 자유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인 자유 개념이 오늘날의 대세를 이룬다. 물론, 신자유주의가 강조하는 개인의 자유로 인하여 문명의 발전이 급진적으로 발전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빈부격차의 심화라는 그에 따른 부작용 역시 컸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는 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주장하며 복지국가의 탄생을 꿈꾼 케인즈주의도 등장했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복지국가 운운하는 것 자체가 포퓰리즘으로 둔갑하여 비난을 받는다. 신자유주의는 사회에서는 경제적 기득권과 정부 권력의 결탁은 자연스럽기조차 하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법을 이용한 폭력까지 거리낌 없이 행사하는 자유까지 등장한다. 이사야 벌린이 경계하는 적극적 자유의 폐단이다. 참고로 이사야 벌린이 말하는 적극적 자유는 내가 내 운명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자유이다. 얼핏 보기에는 적극적 자유가 매력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벌린은 적극적 자유가 독재를 은폐하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경계를 하고 있다. 나의 자유가 타인에게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회는 병들어간다.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사회를 발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거대한 전환> 발문에서 로버트 매키버는 ”우리 시대에 닥쳐온 모순들을 극복해 나가는 작업은 오로지 사회, 즉 인간이 서로서로 의존하는 포용력있고 연대심 넘치는 통일체가 무엇보다도 우선한다는 것을 발견할 때에만 기대할 수 있는 일이다“라고 했고,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너무 늦기 전에 지구 공동체의 불균형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도전에 적극적으로 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폴라니는 ”복합 사회에서의 자유의 의미를 총체적으로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토록 갈망하는 자유를 결코 얻어낼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시장경제는 오직 이윤과 물질적 안녕을 창출하는 것이기에 시장경제 아래서는 평화와 자유를 창출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시장의 자기조정기능은 유토피아적 환상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폴라니는 ”사회의 발견은 자유의 종말일 수도 있고, 그것의 재탄생일 수도 있다“고 하였다. 자유의 재탄생은 사회의 발견과 함께 모든 인류가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통제되지 않는 권력은 다중의 자유를 파괴한다. 통제되지 않는 권력을 막는 힘은 깨어있는 시민들의 사회적 연대에만 찾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사회의 재발견이다. 신자유주의의 자유는 지배 엘리트들의 이기심으로 무장한 폭력으로서의 자유이고, 소비사회에 물든 대중들에게는 환상 속의 자유일 뿐이다. 소비사회는 대중을 획일화시킨다. 개인의 개성은 사라지고 획일화된 개인만 양산한다. 이를 이기상선생님은 이렇게 표현한다. “현대인은 자기규정의 자유로부터, 실존함으로부터 도망하여 소유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상품으로 도피하고 있다. 현대인은 그가 갖고 싶어하는 것을 가짐으로써 자신이 자유롭다는 것을 입증하려 든다.” 소유에 집착하는 한 인간은 자동인형으로 전락한다. 진정한 자유는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공유에서 온다. 대안은 없는가? 나의 ’자유‘에 대한 관심은 노자, 장자, 불교에 이어 니체와 프로이트, 융에게까지 이어졌다. 이들이 가진 공통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관계중심적인 세계관을 가졌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불교적 가치관의 몇 가지만 언급하고자 한다. 대승불교의 근본 가치 중 하나는 입전수수라고 볼 수 있다. 현실 종교로서의 불교는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철학으로서의 불교는 중생이 아프면 내가 아프다는 보살의 마음으로 이웃과 함께 하는 삶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사회적 실천의 강조이다. 또한 불교는 연기설을 바탕으로 하기에 상의상존의 가치관을 바탕에 깔고있다. 이는 니체의 생각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있는 것은 아무 것도 버릴 것이 없으며, 없어도 좋은 것은 없다.” 이러한 생각에는 개인은 사회적 존재이면서 자연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있다. 나와 관계하는 모든 것이 소중하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불교적 가치관과 동일하다. 폴라니가 말한 사회의 재발견과 새로운 자유는 관계중심적인 세계관을 가진 불교적 가치관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중생이 아프면, 내가 아프다. 여기에서 사회가 재탄생되며 새로운 자유가 탄생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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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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