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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와 사회, 짝사랑의 철학
    지난 토요일 ‘바른불교재가’모임에서 <종교와 사회>라는 책의 첫 장을 장식했던 우희종교수가 쓴 ‘종교는 사회를 짝사랑해야 한다’라는 글을 저자로부터 직접 듣게 되었다. 그는 자연과학도이지만 불교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의 글 각 주를 보아도 그는 종교와 관련된 글을 여러차례 발표했음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는 우희종교수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그는 사회와 종교가 건강한 관계를 맺기 위해 사회 변화와 현실에 부합하는 종교적 도그마의 재해석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면서 그는 본 회퍼와 도킨슨을 언급한다. 본 회퍼는 유대인 집단 학살이라는 거대한 악이 선과 함께 존재하는 것에 대한 성찰에서 십자가에서 고통과 고난받는 예수를 통해 하느님은 인간의 고통과 고난에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강조했다. 우희종교수는 이 대목에서 “본 회퍼는 선한 하느님을 붙잡는 한계로 인해 거대 악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악을 실재화한 셈이다”라고 해석을 했다. 한편 과학적 합리주의와 비판적 사고를 강조하는 도킨슨은 무신론 운동을 펼치고 있다고 했다. 기성 종교는 사회의 갈등과 폭력을 조장한다고 보았기 떄문이었다. 여기서 우희종교수는 이 둘이 놓치고 있는 부분을 칼 융의 관점을 접목해서 극복하고자 하였다. 나는 본 회퍼의 신학을 모른다. 우희종교수가 언급한 본 회퍼의 신학이 궁금해서 인터넷을 검색해 봤다. 위키백과에는 본 회퍼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그는 삐뚤어진 세상 즉, 독재가 가능한 그 당시의 현실에 저항하는 교회상을 그려 내면서, 신학적 교리를 배우고 논쟁하는 교회가 아닌, 세상의 불의와 싸우는 정의에 불타는 교회를 원했다.”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라는 본 회퍼의 말도 검색할 수 있었다. 이 대목에서 우희종교수가 염두에 두고 있는 종교는 선악을 넘어서는 지점에서의 참된 종교성 회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융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했던 것 같았다. 우희종교수는 빛을 강조하는 기존의 신학적 관점을 넘어서는 감성과 영성을 모두 포괄하는 심연의 신학을 강조한다. 그는 기독교 창세기 1장의 ’아무 형태도 없이 텅 비어 흑암에 싸인 채‘라는 대목에 주목을 했다. 텅 비어 있음은 불교의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다른 이름이고. 책에는 구체적 언급이 없었지만 노자 도덕경 1장에 나오는 현(玄)과도 같았다. 도덕경의 현은 변화와 다양성을 모두 안고 있으며, 그곳에서 세계의 만물이 생성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융은 자기 안에 존재하는 의식과 무의식의 대면을 통한 자기 실현을 강조했다. 융의 분석 심리학은 자아와 자기를 구분하면서 자기 안에 내재해 있는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을 자아와의 대면을 통한 자기실현을 목표로 한다. 대극의 통합이라고 요약해서 말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의식과 무의식의 조화이다. 서구식 표현으로 말하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조화이고, 동양적 표현으로 말하면 음양의 조화이다. 우희종교수가 심연의 신학을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다음의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은 선과 악이라는 양면성을 넘어선 존재임을 인정하면서 그동안 소외되고, 무시되어 온 사회 약자들과 함께 하는 종교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을 타자화시켜 구원할 대상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 스스로의 문제로 인식하면서 풀어가는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가 말하는 종교에 대한 재해석은 오늘날의 종교는 심연의 영성 회복과 고통에 대한 적극적 수용과 비움의 자세로 스스로를 낮추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인간이 종교를 믿는 본질적인 이유는 진리와 구원 및 해방과 자유의 실천적 모습이라고 하였다. 그러한 측면에서 “포스트휴먼 시대에 심연이나 길이나 진리, 생명이 아닌, 인격적 신은 페기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 대목은 깊은 공감이 갔었다. 짝사랑은 상대편으로부터 아무런 댓가를 바라지 않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의 중생에 대한 사랑과도 같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도 그와 같은지는 모른다. 아무튼 우희종교수는 종교는 사회를 짝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그의 글 속에서 깊은 울림을 주는 대목이 있어 공유하고자 한다. “종교는 사회 그늘과 뒤편에서 세상의 어둠과 고통을 어루만져야 한다. 가진 자들의 시혜 모습이 아니라, 세상 어둠과 고통과 함께 하는 것이 곧 신을 사랑하는 것이자 진리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임을 자각하는 순종과 비움의 자세다.” 다만 어제도 우희종교수를 만나 ’순종‘이라는 개념은 왠지 모르게 외부 권위에 대한 복종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에 다른 표현으로 바꾸면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했었다. 하지만 함께 자리한 유명한 스님들과의 대화 속에서도 종교적인 수행을 위해서는 순종이 기본 바탕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 스님이 말이 기억에 남는다. “선생님은 개념에 너무 매달려 있네요. 개념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먹물들은 그것이 어렵지요?” 나는 먹물은 아니지만, 개념에 매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개념에 매달려 있는 것이나, 외부의 권위에 매달려 있는 것이나 모두 매달려 있는 것에는 동일하다. 그래서 모든 것에 ’열려 있음‘이 중요할지도 모른다. 물론 자기 중심을 잃어버리면 그것은 한갓 부유하는 삶에 불과할 것이다. 자아를 가지고 자기와의 끊임없는 대화가 곧 참된 종교인의 자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희종교수는 융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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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9
  • 헤겔 철학, 그 역사적 전개와 의미
    지금까지의 서양철학 중 가장 난해한 철학이 있다면, 과연 어떤 철학일까? 필자가 이에 대해 답변을 하자면, 당장 떠오르는 철학자는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1770년-1831)이다. 누군가 그냥 무턱대고 헤겔 철학이 다들 어렵다고 하니 도대체 어떤 철학인지 한번 읽어보자는 의도로 헤겔의 저작을 읽어보기 시작했다간 고작 몇 줄 정도만 읽고 곧장 한목소리로 무슨 말인지 몰라 너무 어렵다거나 혹은 이게 무슨 철학인지 모르겠다는 태도를 취하면서, 헤겔 철학을 그냥 포기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양상은 오늘날에만 해당하는 특이한 일이 아니고, 헤겔이 생존했던 당시에도 매번 있었던 터라 가히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독일어에 능숙한 사람이더라도 헤겔 철학 앞에서는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예외 없이 두 손을 들기 마련이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처럼 어려운 헤겔 철학이 그대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당시에도 오늘날에도 서양철학에 가장 영향력을 끼친 철학으로 평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헤겔 철학에 동조하든 반대하든 상관없이 철학자라면 헤겔 철학이 돌파해야 할 거대한 바위산임을 뜻한다. 그러나 오히려 헤겔 철학을 돌파해 보겠다는 의도로 시작했던 야심에 가득 찬 계획들이 어느 순간 그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정지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계획들은 헤겔 철학 전체가 아니라 단지 일부만을 이용해서 각자의 철학에 활용할 따름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헤겔 철학을 잘 활용한 각자의 철학이 오히려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되었으며, 헤겔 철학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음이 확인된다. 헤겔 철학은 당시에 좌파와 우파로 갈라져 치열한 논쟁을 서로 벌였으며, 그 이후로 신헤겔주의, 마르크스주의, 프랑크푸르트학파, 포스트모더니즘, 분석철학, 실용주의, 현상학, 실존주의, 해석학 등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신헤겔주의는 헤겔 철학의 관념론과 역사주의에 치중한 결과, 헤겔 철학의 변증법은 사상(捨象)해버렸다. 마르크스주의는 헤겔의 관념론을 비판하고, 합리적 핵심(der rationale Kern)인 변증법을 취했지만, 그 이후로 독단적 교조화 및 여러 분파로 분열양상을 보였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서구 마르크스주의에서 출발해서, 헤겔과 마르크스의 관계를 중도로 돌리는 데 효과적이었지만, 사회비판이론으로 귀결하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헤겔 철학의 이성 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출발했지만, 오히려 현실의 대안으로서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분석철학은 헤겔 철학의 개념론을 언어분석철학에 활용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헤겔 철학의 사변적 성격을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실용주의는 헤겔 철학에 대한 역사철학적이고 휴머니즘적인 측면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그 이상의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현상학은 독일 현상학보다 프랑스 현상학에서 헤겔 철학의 긍정적인 면을 되살리기에는 근본적으로 헤겔 철학 전체에 해당하지 않는다. 실존주의도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여기에서는 헤겔 철학의 부정적인 측면으로 귀결되었다. 해석학은 헤겔 철학을 독백이 아니라 대화라는 측면에서 다루기는 했지만, 헤겔 철학의 논리적 체계보다는 자의적 해석의 가능성만 열어 놓게 되었다. 그 외에도 비록 헤겔이 동양철학에 관해 부정적으로 평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중국과 일본 등등에서 헤겔철학과 동양철학의 비교연구도 황행(橫行)하고 있다. 이처럼 헤겔 철학의 영향력이 지대했던 것은 헤겔 철학이 학문의 거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철학적 사유를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전개했으며,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의 계기를 변증법적 사유의 힘으로 필연성을 도출해냈기 때문이다. 물론 헤겔 자신은 이를 완벽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현재 입장으로 보면, 곳곳에 허점도 있다. 그러나 유한한 삶을 영유하는 한 개인으로서 인간이 이 정도로 실로 엄청난 학문적 성취를 이루어 낸 것은 분명히 철학사에 영원히 빛날 업적이라 하겠다. 헤겔의 이러한 노력의 결과 덕분에 우리는 헤겔 철학이라는 유산을 물려받은 것이다. 그 유산은 독일에만 한정되어, 독일 계몽주의의 산물이라는 평가를 넘어서 세계적 자산이 되었다. 헤겔 철학에는 그리스 철학, 중세 신비주의, 범신론, 계몽주의, 낭만주의, 정치경제학, 사회계약론, 칸트 철학, 피히테 철학과 셸링 철학 등이 모두 녹아들어 있다. 또 논리학, 자연철학, 정신철학, 법철학, 역사철학, 종교철학, 미학, 철학사 등도 포함되어 있으며, 이 모든 분야가 서로 유기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헤겔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단순히 특정한 영역에서 몇몇 구절만을 읽고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될 경우, 헤겔 철학에 대한 오해가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는 없으며, 스스로 미로에 갇힌 채 착종(錯綜)된 모순이 휩싸이고 말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헤겔 철학에 대한 이해는 일단 고사(枯捨)하고,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봉착하면서 마치 늪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모습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헤겔 자신의 서술방식이 사변적인 탓에 야누스적 이중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때론 혼란스럽기도 하고, 분명한 일관성이 다소 없거나, 혹은 헤겔 자신의 오류로 인해 진위여부(眞僞與否)에 관한 논쟁거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헤겔 사후 지금까지도 헤겔 철학은 이러한 문제로 인해 각자도생(各自圖生)에 근거해서 전개되어왔다. 그러다 보니 헤겔 철학에는 여전히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남아 있고, 다만 누구든 그럴듯하게 타당하게 보이는 근거로 단지 각자의 주장이 제시되는 선에서 헤겔 철학을 논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종종 헤겔 철학의 핵심 개념인 변증법에 관한 논의를 회피한 채 어떤 하나의 해석만이 올바르다든가, 문자적 이해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이것은 헤겔 철학이 지니는 사유의 역동성과 역사성보다는 헤겔 철학을 개념의 논리로만 만들고 더욱 추상적으로 만드는 결과가 되었다. 더 나아가 헤겔 철학에 대한 핵심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논의하기보다 특정한 개념의 의미를 놓고 각자의 관점만을 관철하려는 틀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하는 양상은 헤겔 철학에 관한 각자의 이해방식이 빈약하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헤겔은 철학의 첫 번째 조건을 거론하면서 진리에 대한 용기와 인간 정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강조했다. 우주의 본질이 인간 정신 앞에서 열리고, 우주의 풍부함과 깊이가 인간 정신 앞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는 헤겔의 말은 다소 과장되기는 했지만,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는 한다. 어쩌면 헤겔의 이 말은 많은 사람에게 인간 정신의 위대함과 위력을 한껏 보여줌과 동시에 인간 정신을 스스로 최고의 가치라고 여길 만한 것이라 해도 괜찮다는 뜻에서 영감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반대로 부정적으로 보면, 과연 그런 것이 인간 정신에 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헤겔 철학에 대한 격렬한 비판은 바로 이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어서 심지어 헤겔 철학을 붕괴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비판이 과연 정당한지에 대한 문제는 헤겔 철학 내부에 한정해서 다루어져서는 안 되고, 오히려 헤겔 철학이 외연으로 확장될 때 비로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그와 같은 비판이 때론 헤겔 철학에 대한 오해의 산물일 수도 있을 것이다. 헤겔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첩경은 사실상 없다. 그 첩경이 어딘지를 우리가 우선 찾기보다는 헤겔 철학의 근본문제가 무엇인지에 관한 근본적 천착(穿鑿)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섣부른 얕은 지식으로 헤겔 철학을 좀 공부했다고 떠드는 자들은 이러한 근본적 문제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외면하고 뒤로 숨기 마련이다. 또 헤겔 철학에 대한 특정한 철학자의 관점이 마치 헤겔 철학 전체에 관한 이해라도 되듯이 말하는 자들도 마찬가지로 스스로 밑천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더 나아가 특정한 철학을 위한 우회로로 헤겔 철학에 접근하려는 자들도 헤겔 철학에 대한 진지한 숙고보다는 축소된 방식으로 헤겔 철학을 이해하려는 수준에 그친다. 그들은 모두 과연 헤겔 철학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알지 못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다. 심지어 일반론 수준에서 그저 그렇게 헤겔이 얘기했다는 정도가 전부일 뿐이다. 헤겔 철학은 여전히 땅속 깊이 묻혀 있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헤겔 철학의 비밀을 우리가 완전히 풀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그 가능성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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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5
  • 자유민주주의와 방종
    요즘에 내가 중앙아시아를 돌아다니면서 느끼는 것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렵지만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를 소중히 생각하고 잘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체제적으로 본 다면 중앙아시아는 사회주의(Socialism)와 민주주의(Democracism)의 중간 단계에 있다. 정치적으로 볼 때는 사회주의적인 부분과 전체적인 부분이 강하지만 시민 사회로 봤을 때는 이만한 자유로운 분위기는 없다. 북한이나 중공 같이 통제당하는 분위기가 아니니 더욱 그렇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라는 유럽과 미국의 자유 민주주의는 방종과 가깝게 가고 있다. 이제는 어지간해서 통제도 힘든 세대다. 유럽은 68운동 이전까지만 해도 자유 민주주의를 채워주면 어느 정도는 국가의 통제력에 따라 움직인다는 진리를 이해하고 거기에 따라주었다. 서구식 자유 민주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50~60년대가 전성기였고 80~90년대가 중흥기였다. 이는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의 통제력 하에 이루어지는 자유 민주주의 자체에 염증을 느끼는 세대가 나타났는데 그들이 68 운동의 주역들인 히피족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과 미국은 경제적으로 부흥하기 시작하였는데, 전쟁 기간 동안 온갖 어려움을 감당하여 이겨낸 근성으로 살아왔던 기성세대들과는 달리 풍족한 소비 생활과 문화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당시 젊은이들과 대학생들은 먹고 사는 문제 뿐 아니라 사회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 젊은 세대들은 기존의 딱딱한 자유를 누리기 위한 책임과 의무, 그리고 그 책임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에 대해 반항심이 싹 트기 시작한다. 이런 반발심에 기성 세대들은 당시 신세대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들은 "젊은 것들 고생도 안 해 보고, 니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에 대한 헌신, 뭘 알아?" 이런 식으로 무시하기 일쑤였고 신세대들은 "그 고생 것은 알겠는데 그 때는 지난 시대이고 지금은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시기" 라며 맞받아쳤다. 이처럼 서로를 이해하지 못함에 따라 68 운동은 기존의 자유 민주주의가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며 통제했던 부분들과 반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는 68 운동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55년 지난 현재, 다시 또 다른 68 운동의 광풍이 불고 있는 것이다. 1962년 미국 포트 휴런 선언에서는 "이제 어느정도 배부른 세상이 되었지만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도 불만이 있다."고 선언하면서 각 계층간의 평등의식(Egalitarianism)을 강조했다. 이들은 민주주의 정부가 통제했던 대마초를 피우며 우드스톡 페스티벌(Woodstock Music & Art Fair)을 열어 기성세대가 이룩해 놓은 자유 민주주의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기존 민주주의 색체에 반항심이 가득한 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가장 통제적인 부분인 이데올로기성 부분에도 관심은 갖고 기존의 자유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사회주의를 끌어들였다. 무자비하고 권위주의적인 권력을 혐오하기 때문에 대학생들은 저항의 움직임으로 곳곳에 자유대학을 세우면서 모두가 선생이면서 학생역할을 하여 수직상하의 관계를 없애기도 하였다. 완전히 자유 민주주의 안에 사회주의 특성을 받아 들여 이식시켜버리려고 했다. 68 운동은 ‘금지함을 금지하라(Il est interdit d'interdire)’ 등의 슬로건을 걸었고 이는 기존 정치체제와 도덕 관습에 대한 전면적인 반란을 일으킨 셈이 되었다. 그 68 운동의 후계자들은 지금 유럽의 미국의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자신들의 선배의 뜻을 받들어 기존의 자유 민주주의에 대칭되는 부분들을 받아들여 우리가 알고 있던 도덕적이 윤리적인 부분까지 깨뜨려 버렸다. 68 운동 당시 반항심을 갖고 있던 선배들 중 여성들은 후배들에게 페미니즘적인 부분을 가르쳤고 이를 철저히 학습해 단순한 시민 운동이 아닌 정책으로 나아가기 위해 정계에 진출했다. 그 대표적인 인사가 빅토리아 눌랜드, 아날레나 베어복과 같은 작자들이다. 이런 자들에게 있어 자유 민주주의의 상징은 페미니즘이고 인권(Human rights)에 대한 강조다. 여기에서 말하는 인권은 강자에게서 억압받는 약자들을 위한 사전적 의미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들에게 있어 인권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권리의 침해를 방지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이를 침해하면 인권탄압(Human rights violation)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이는 여성 뿐 아니라 남성도 마찬가지다. 보수적인 가치관의 자유 민주주의를 깨고 진보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물론 옳은 말이다. 나도 자유 민주주의에서 기존에 갖고 있던 틀을 현대화적인 방식으로 고쳐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에는 책임(Responsibility)과 의무(Obligation)가 들어가고 방종(License)을 방지하기 위한 어느 정도의 통제력(Control)이 들어가야 한다. 마약, 젠더문제, 미성년자 성관계 등 사회 전반적으로 혼란을 야기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통제가 필요하다. 이 또한 자유 민주주의라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하나의 방종 형태이기 때문에 자유와 방종의 차이에 대해서 어린 시절부터 학습이 필요한 부분이다. 물론 지금 당장 없애기는 어려운 부분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자유와 방종에 대한 구분, 자유를 누릴 수 있지만 자신이 행한 자유에 대해 책임과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교육이 필요하다. 이런 교육은 학원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학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교육이다. 자유라는 것은 공짜로 얻어지는게 아니다. 세상에는 공짜는 없다. 반드시 그에 따른 책임과 의무라는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책임과 의무, 그에 따른 통제는 자신이 어떤 자유를 행했느냐에 따라 가격이 저렴할지, 매우 비쌀지가 결정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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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8-28
  • 아프가니스탄 카르자이의 대통령으로써 재임하는 시기와 엄청난 부정부패
    이번에는 하미드 카르자이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시기 때 어떠했는지의 아프가니스탄의 현대사에 논해 보려 한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탈레반과 전쟁을 벌이는 아프가니스탄의 정세를 알리고 절대적인 지지를 호소한 카르자이는 순식간에 아프가니스탄의 차세대 리더로 떠올랐다. 그로 인해 미국의 보호 아래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민주적인 선거가 치뤄지고 55.4%라는 압도적인 표를 받고 당선이 되었다. 이는 라이벌 후보인 압둘라 압둘라에 비해 득표를 3배 이상을 받은 것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의 국민들과 전 세계는 탈레반 독재 정권에 종지부를 찍은 카르자이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지지했다. 그러나 인사 임명과 결정권에 있어 카르자이 정부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반(反) 탈레반에 동조하여 미국과 카르자이를 도운 실질적인 세력은 북부동맹이었다. 이 북부동맹의 정식 명칭은 아프가니스탄 구국 이슬람 통일 전선(United Islamic Front for the Salvation of Afghanistan)으로 타지크족, 우즈베크족, 하자라족 등의 원리주의자들로 결성된 조직이다. 이 조직의 리더는 압둘 라시드 도스툼이었지만 북부동맹의 서열 2위인 모하메드 파힘이었는데 북부동맹에서 그를 부통령 겸, 국방부 장관에 임명하라고 압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게다가 파힘은 과거 무자헤딘이 나지불라의 친소정권을 붕괴시키고 수립한 정권 당시에 카르자이가 외무부 장관이었던 시절, 헤즈비 이슬라미 단체의 수장인 굴부딘 헤크마티아르와의 관계를 중재하던 중 그에게 스파이 혐의를 뒤집어 씌워 죽이려 했던 인물이었다. 카르자이는 유럽이나 미국의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정작 아프가니스탄 내부에서는 자신의 세력을 쌓지 못했다. 이러한 카르자이의 낮은 영향력은 대통령 되기 이전부터 늘 문제시되던 부분이었는데 2002~2003년 1년 동안 북부동맹을 중심으로 나름의 불만을 가진 몇몇 원리주의자들에 의해 세 번의 쿠데타 미수 사건 존재했다. 또한 수도인 카불만 벗어나도 21세기와 벗어난 생활을 하며 접근하기조차 쉽지 않은 아프가니스탄의 험준한 지형적인 상황은 카르자이의 영향력이 카불에만 미칠 수밖에 없었고 여타 다른 지역에서 카르자이에게 반기를 들었을 경우,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었다. 따라서 그의 별칭이 카불 대통령이라는 조롱 섞인 부분이 존재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상황이 이와 같이 전개되자, 카르자이는 북부동맹을 중심으로 한 행정부와 국회를 견제하기 위해 자신과 같은 민족인 파슈툰족 관리를 고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또 다른 반발을 불러오게 된다. 대개 이런 관리 선임은 국회의 승인을 받도록 되어 있는데 북부동맹 요원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국회에서 대거 반발한 것이다. 이에 따라 카르자이는 자신이 정국을 운영하는데 있어 북부동맹과의 충돌로 인해 많은 차질을 빚게 된다. 이러한 도중에 미국과 영국 등에서 지원한 상당수의 금액이 증발했고 카르자이와 북부동맹의 갈등으로 인해 정부는 지속적인 혼란으로 결집력 또한 와해되고 있었다. 이는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 정부의 형세와 매우 흡사했으며 결국 이러한 정부의 상태는 현 2021년 탈레반이 카불을 장악하고 승리를 선언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결국 결집되지 못하고 서로 대립하는 정부는 패망하리라는 역사적 진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이와 같은 대립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아프가니스탄의 정부가 단단히 기초를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할 미국은 정작 이라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사이 탈레반은 은밀하게 세를 불려갔으며 이란과 중국으로부터 자금 원조를 받고 러시아로부터 무기를 공급받는 등 차분히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카르자이는 재선에는 성공했지만, 이 시기부터 오바마 정부와 카르자이 정부는 서서히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카르자이가 재선할 때 이 선거가 부정선거라는 폭로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정적이자 라이벌인 압둘라 압둘라는 아예 선거를 보이콧 하면서 그를 규탄하고 나섰다. 한편 미국은 승리선언을 해서는 안된다고 카르자이에게 경고를 주었지만 카르자이는 미국에 대해 대대적인 불만을 표출했다. 그의 1차 선거에서 그를 돌봐준 것은 조지 부시 대통령이었지만 2차 선거 때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로 바뀌면서 카르자이에 대해 적당히 거리를 두려고 했던 것이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에 무작정 금액 원조를 단행했지만 오바마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에 투명하고 적당히 원조를 하려했다. 실제로 아프가니스탄에 지원되는 미국의 지원금의 상당수는 고위층이나 같은 파벌의 정치인들을 몇 번 거치며 엄청난 액수의 금액이 세탁되어 각종 부정부패와 비리로 사라져갔다. 당시에 카르자이 대통령의 동생 아미드 왈리는 칸다하르 주 의회 의장이었지만 ‘마약왕’이라 불릴 정도로 아프가니스탄 내의 양귀비 매매 사업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2007년 파키스탄 대통령인 무샤라프를 만났을 때 카르자이가 국경의 마약 밀수를 막지 못하는 파키스탄의 무능력을 불평했는데, 무샤라프가 그에게 “당신 가족이나 단속하라”고 비꼬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카르자이의 형 마무드 카르자이는 권력형 비리의 상징으로 아프가니스탄 최대 은행인 카불은행의 이사이며 도요타자동차의 독점 수입, 판매상이자, 석탄 탄광을 네 곳이나 보유한 아프가니스탄 최대 사업가였다. 그리고 공무원이나 경찰, 군인 등 모든 공직은 마무드의 매관매직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마무드 카르자이의 별명은 ‘장관셀러’로 알려져 있다. 오죽하면 부장 자리는 5만 달러, 국장 자리는 8만 달러라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닌 것이다. 정부 관리가 되려면 말단직부터 고위직까지 모두 가격이 매겨져 있다. 남부 가즈니 주에서 보건국 부장급 자리에 있었던 사미 라크바니는 당시 뉴욕타임즈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슈퍼마켓에 가면 물건 값이 적혀져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프가니스탄 공무원과 경찰, 군대는 진열장에 전시된 물건처럼 가격이 책정되어 있다. 나는 5만 달러를 내고 부장 자리를 샀고 내 위 국장급 자리는 8만 달러 정도였다. 집안에서 돈을 모아 내가 이 자리를 샀지만 나는 이 돈의 본전을 뽑고 8만 달러짜리 국장급으로 옮기는 것이 꿈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체가 거의 다 그렇다. 중앙 정부 쪽은 5만 달러 이하 자리는 없을 정도다. 말하자면 그 자리는 브랜드 자리다” 가즈니 주 사르만의 경찰서에는 이곳 서장이 2008년에 10만 달러를 내고 서장 자리를 샀다. 그의 부하 경찰 30여 명 모두 돈을 주고 직장을 얻었다. 그들의 주요 업무는 카불에서 칸다하르에 이르는 ‘세계에서 제일 위험한 고속도로’라고 알려진 힌두쿠시 하이웨이를 지키는 일이다. 이 도로는 2007년 한국인 23명이 탈레반에 납치되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위험한 업무를 맡는데 유리한 조건은 고속도로 ‘통행세’를 받아 챙기는 것이다. 이에 대해 파지왁 뉴스의 사자르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경찰들은 도로가 위험하니 에스코트를 해준다는 둥, 아는 탈레반에게 청탁을 넣어준다는 둥 갖가지 이유로 돈을 뜯어낸다. 슬프게도 이제 그런 풍경이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에게 당연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받은 뇌물은 단속 경찰 혼자서 차지하는 게 아니다. 상사에게 바친다. 경찰이 되고 싶은 지원자는 얼마든지 있기에 윗사람에게 잘 보여야 한다. 그러니 고속도로 경찰은 혈안이 되어 먹잇감을 찾는다. 부패한 경찰은 탈레반과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탈레반과 경찰이 서로 한 가족, 한 집안인 경우가 종종 있다. 그들은 서로 짜고 고속도로를 지나가는 차를 위협한 뒤 경찰이 나타나 호위 비용을 받아 이 돈을 다시 탈레반에게 나누어 준다. 그렇기에 이들은 공생 관계가 되는 것이다. 이들이 주는 뇌물 액수는 많으면 몇 천 달러에서 적게는 300달러 정도로 천차만별이다. 카불에서 출발할 때부터 현금을 조수석에 싣고 뿌리고 다닌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뇌물 경찰이 한 군데만 있으면 괜찮은데 많으면 검문소가 10km마다 하나씩 있다. 한 군데도 그냥 통과시켜주는 법이 없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할 정도였다. 세계 각국에서 아프가니스탄에 보내온 전후 재건기금이 유용되는 것은 기본이다. 이러한 착복에는 갖은 아이디어가 동원된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이름을 올려 월급을 타내서 가로 채는 경우는 흔하다. 필요한 수량보다 훨씬 많은 전투장비를 신청한 다음 가격을 몇 배나 부풀려 탈레반에게 팔아먹는 일도 존재한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내무부와 경찰에 훈련 지원 프로그램으로 100억 달러를 지원해왔는데, 이 가운데 지난 3월까지 총 6억 5,300만 달러가 경찰 봉급으로 지불되었다. 미국 측은 이 비용 가운데 일부가 여러 방법으로 착복되고 있다고 파악했다. 사법부도 이는 마찬가지로 현금이 든 서류 가방만 들고 법원에 가서 재판장과 법원 직원을 돌아다니며 돈을 뿌리고 나면 피의자는 무죄가 된다고 한다. 절도죄 정도는 몇 백 달러에서 해결이 가능하고 살인죄는 5만 달러에서 10만 달러까지 가격이 매겨져 있다. 중죄를 지으면 더 많은 뇌물을 주면 된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 법원은 “중죄를 지은 죄인이 많아지는 것을 좋아하는, 지구상에 하나뿐인 법원” 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8년 11월 카르자이는 대국민 연설을 통해 “이 나라 정치인들은 돈으로 모든 것을 얻었다. 알라 신 마저 두 손 다 들었다. 세계 은행 금고는 아프가니스탄 정치인들의 은행계좌와 집의 금고로 가득 찼다” 고 말했다. 참고로 각국의 부패지수를 측정하는 독일 NGO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에 따르면 2008년 아프가니스탄의 부패지수 순위는 176위로 세계 최하위에 랭크되었다.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의 가족부터 말단 공무원까지 부정부패가 자행되고 자신들의 적인 탈레반에게까지 팔아먹기도 하니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이 탈레반과 싸울 의지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나는 아프가니스탄의 이러한 사태는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 시대부터 이어온 부정부패의 만연이 불러온 "참사"라고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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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20
  • 국내 주요 기업,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존재하는 해외 법인들
    바이든 대통령이 서방의 우방국들과 함께 고강도의 러시아 무역 제재를 승인한 터라, 러시아에 진출한 기업들이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현재 국내 대기업이 러시아에 설립한 해외법인은 53개로 파악됐다. 러시아에 설립된 해외 계열사 중에서 현대자동차 그룹이 18곳으로 가장 많았다. 그 뒤를 삼성과 롯데가 각 9곳이었다. SK와 CJ, 두산, KT&G 등은 각각 2개 법인을 러시아에 세워둔 것으로 조사되었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우리 기업 13개에 주재원 43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러시아에 존재하는 법인 기업 53개라면 우크라이나는 13개 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우크라이나에 세워진 법인보다 41곳 많은 숫자다. 단순 계열사 진출 현황 숫자만 놓고 보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보다 4배 이상 많았다. 그만큼 국내 대기업들이 우크라이나 보다 러시아 시장을 더 주목하고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룹별로 살펴보면 현대자동차 그룹이 18곳 (34%)으로 최다였다. 러시아에 배치한 해외 계열사 3곳 중 1곳꼴로 현대자동차 그룹이 압도적이었다. 현대자동차가 러시아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놓고 있었는지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러시아에 진출한 국내 대기업 해외 법인의 경우 향후 미국과 동맹국, 유럽 등이 러시아를 대상으로 고강도 금융 및 경제제재 등이 본격 진행되면 공장가동 중단 등 직접적 경제 타격을 볼 가능성이 높다. 특히 이 전쟁이 장기전으로 접어들 경우 석유와 천연가스 등의 수급이 불안정해져 국내 기업들도 산업분야 곳곳에서 경제적 손실이 불가피할 것은 불문가지다. 사세가 이와 같은데 국회 외교통일위원회가 지난 2022년 4월 11일 오후 5시에 젤렌스키 대통령이 화상 연설을 진행하는 방안을 우크라이나 측에 제안했다. 우리가 우크라이나로부터 제안을 받은게 아니라 제안을 했다는 것이 팩트다. 기업, 유학생, 각 코트라 주재원들, 교민들, 일반 비즈니스맨들과 각 학계의 연구자들, 그리고 15만 명 가까이 되는 고려인들까지 한러 수교 30년 동안 공들여 쌓아왔던 러시아와의 관계는 일본처럼 파탄나기 직전까지 몰고 가고 있다. 야뽄스끼 모레 (일본해)와 다케시마라고 표기까지 해놓은 친일국가에 북한 ICBM 미사일 엔진 기술까지 전수하여 우리의 안보까지 위협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수장에게 화상 연설을 시키겠다니, 이는 대놓고 러시아와 적대하겠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비우호국가로 찍혀 러시아의 강력 제재를 받으며 우리 기업과 교민들이 러시아 정부로부터 불이익을 당하거나 러시아로부터 제대로 된 차단을 당할 수 있는 명분을 주고 있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교민 수가 400명이 안되지만 러시아에는 3,500명의 교민들이 산다. 숫자에서 우선 비교가 안 되고 기사 말미에 12,000명 가까이 되는 고려인 동포 중 1,000여 명이 고향을 떠나 주변국으로 피신 중이라고 했었다. 반면 러시아에는 15만 명이 산다. 숫자에서 상대가 안 되는데 이렇게까지 러시아를 자극하는 이유는 무엇인지가 궁금하다. 우리의 한, 미, 일 공조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감성적인 사고는 버리는게 좋다. 국제적인 이득에 따라서 언제든지 합종연횡(合從連衡)이 가능한게 국제 관계의 진리다. 그 관계는 한, 미, 일도 다르지 않다. 외통위는 이러한 행위들에 집중하는 것보다 동북아시아 문제나 좀 신경쓰는게 좋다. 감정적으로 안타까워 하는거와 실전에서의 국제 관계 문제는 전혀 다른 얘기다. 우크라이나는 9,000km나 떨어져 있고 러시아는 동해 바다 건너 비행기로 2시간 거리다. 우리 대한민국은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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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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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 주요 기업,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존재하는 해외 법인들
    바이든 대통령이 서방의 우방국들과 함께 고강도의 러시아 무역 제재를 승인한 터라, 러시아에 진출한 기업들이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현재 국내 대기업이 러시아에 설립한 해외법인은 53개로 파악됐다. 러시아에 설립된 해외 계열사 중에서 현대자동차 그룹이 18곳으로 가장 많았다. 그 뒤를 삼성과 롯데가 각 9곳이었다. SK와 CJ, 두산, KT&G 등은 각각 2개 법인을 러시아에 세워둔 것으로 조사되었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우리 기업 13개에 주재원 43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러시아에 존재하는 법인 기업 53개라면 우크라이나는 13개 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우크라이나에 세워진 법인보다 41곳 많은 숫자다. 단순 계열사 진출 현황 숫자만 놓고 보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보다 4배 이상 많았다. 그만큼 국내 대기업들이 우크라이나 보다 러시아 시장을 더 주목하고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룹별로 살펴보면 현대자동차 그룹이 18곳 (34%)으로 최다였다. 러시아에 배치한 해외 계열사 3곳 중 1곳꼴로 현대자동차 그룹이 압도적이었다. 현대자동차가 러시아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놓고 있었는지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러시아에 진출한 국내 대기업 해외 법인의 경우 향후 미국과 동맹국, 유럽 등이 러시아를 대상으로 고강도 금융 및 경제제재 등이 본격 진행되면 공장가동 중단 등 직접적 경제 타격을 볼 가능성이 높다. 특히 이 전쟁이 장기전으로 접어들 경우 석유와 천연가스 등의 수급이 불안정해져 국내 기업들도 산업분야 곳곳에서 경제적 손실이 불가피할 것은 불문가지다. 사세가 이와 같은데 국회 외교통일위원회가 지난 2022년 4월 11일 오후 5시에 젤렌스키 대통령이 화상 연설을 진행하는 방안을 우크라이나 측에 제안했다. 우리가 우크라이나로부터 제안을 받은게 아니라 제안을 했다는 것이 팩트다. 기업, 유학생, 각 코트라 주재원들, 교민들, 일반 비즈니스맨들과 각 학계의 연구자들, 그리고 15만 명 가까이 되는 고려인들까지 한러 수교 30년 동안 공들여 쌓아왔던 러시아와의 관계는 일본처럼 파탄나기 직전까지 몰고 가고 있다. 야뽄스끼 모레 (일본해)와 다케시마라고 표기까지 해놓은 친일국가에 북한 ICBM 미사일 엔진 기술까지 전수하여 우리의 안보까지 위협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수장에게 화상 연설을 시키겠다니, 이는 대놓고 러시아와 적대하겠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비우호국가로 찍혀 러시아의 강력 제재를 받으며 우리 기업과 교민들이 러시아 정부로부터 불이익을 당하거나 러시아로부터 제대로 된 차단을 당할 수 있는 명분을 주고 있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교민 수가 400명이 안되지만 러시아에는 3,500명의 교민들이 산다. 숫자에서 우선 비교가 안 되고 기사 말미에 12,000명 가까이 되는 고려인 동포 중 1,000여 명이 고향을 떠나 주변국으로 피신 중이라고 했었다. 반면 러시아에는 15만 명이 산다. 숫자에서 상대가 안 되는데 이렇게까지 러시아를 자극하는 이유는 무엇인지가 궁금하다. 우리의 한, 미, 일 공조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감성적인 사고는 버리는게 좋다. 국제적인 이득에 따라서 언제든지 합종연횡(合從連衡)이 가능한게 국제 관계의 진리다. 그 관계는 한, 미, 일도 다르지 않다. 외통위는 이러한 행위들에 집중하는 것보다 동북아시아 문제나 좀 신경쓰는게 좋다. 감정적으로 안타까워 하는거와 실전에서의 국제 관계 문제는 전혀 다른 얘기다. 우크라이나는 9,000km나 떨어져 있고 러시아는 동해 바다 건너 비행기로 2시간 거리다. 우리 대한민국은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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