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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탈리아와 우크라이나 집시들의 심각한 인권 침해 현황
    유럽국가들 중에서 수적으로 볼 때 가장 많은 집시 민족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 루마니아이다. 집시의 정체도 알 수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집시의 기원에 관한 문제도 분명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이다. 루마니아의 집시 전문가인 콘라드 베르코비치(Konrad Bercovici)는 “세상에서 집시의 수 만큼이나 집시의 기원에 대한 이론이 존재한다”고 언급하였던 것으로 나타날 정도로 집시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우선 집시라는 용어의 시작은 그리스어 아칭가노이(Atsinganoi)에서 유래하고 있다. 아칭가노이라는 용어는 동유럽에서 많이 통용되었으며, 또한 집시들 자체에서가 아닌 외부인들이 그들을 지칭할 때 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종종 경멸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루마니아 집시들은 이 용어보다 산스크리트 기원의 집시 언어인 ‘Rrom’이라는 용어를 더욱 선호하고 있다. 집시들은 다양한 국가들에 흩어져 생활했으며, 그 곳에서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화요소들을 유지하는 동시에 그곳의 여러 가지 문화요소들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역사적인 과정 속에서 집시라는 민족의 정체성은 항상 긍정적인 요소들만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고, 반대로 부정적인 면이 더욱 부각되어 나타나기도 했다. 루마니아의 집시들은 19세기 중엽까지 노예로 존재했었기 때문에 이들과 관련한 다양한 정황들은 역사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사실상, 집시들의 노예제도와 관련한 여러 가지 흔적들은 오늘날까지 그들의 사회 구조 속에서 남아있으며, 루마니아 인들과의 관계 및 루마니아 정부와의 관계에서도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집시 민족의 사회 내에서는 노예 제도와 관련하여 후유증을 상당히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수세기 동안 노예 제도가 지속됨으로 인해 집시들은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게 되었고, 스스로의 책임으로 행하는 진취적인 정신 또한 약하게 되었으며, 어떤 사건에 대하여 체념하는 운명론적인 삶의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최근 집시들의 동향을 보면 이탈리아와 로마시 정부가 이탈리아 사회에 동화되거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중, 선택하라고 요구하면서 집시촌을 철거하고 있다. 철거가 이루어진 거주촌에서 루마니아로 돌아가겠다고 신청한 집시들은 14명에 불과했다. 대다수의 집시들은 길거리에 거지같은 신세로 현지인들에게 돈을 구걸하거나 주머니를 터는 소매치기들로 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시는 다른 집시 거주촌들도 철거하겠다고 밝혔고 실질적으로 철거되고 있다. 이처럼 이탈리아 정부가 겉으로나마 경제적인 유인을 내걸었지만 우크라이나에서는 노골적으로 폭력을 행사해 집시를 추방하고 있다. 특히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에 맞섰던 네오나치 민병대 출신들이 크림반도를 상실한 분노의 화살을 집시에게 돌리고 있었다. 수도 키예프에서는 지난 4월 ‘C14’라는 극우 단체가 집시들의 천막촌에 불을 지르는 등 폭력을 행사해 집시들을 강제로 추방했다. 이후에도 네오나치들, 프라비 섹토르, 아조프 대대와 같은 집단들의 집시 거주촌 공격이 잇따르고 있으며 이들은 인권을 무시하고 강제로 탄압하고 있다. 집시들은 야생화 부케를 팔아 생활을 유지할 뿐 키예프 시민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항변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극우 단체들은 이들이 절도와 구걸을 하며 도시를 더럽혔다고 주장한다. 일련의 공격 이후 키예프에서는 집시를 보기 어렵게 되었다. 뉴욕 타임스의 기사에 의하면 우크라이나 정부가 폭력을 방관해왔다고 지적했다. 특히 ‘C14’는 철거 폭력 장면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버젓이 인터넷에 올렸으며 "У Києві С14 розігнала табір ромів на Лисій горі та спалила їхні намети(키예프에서 C14는 리시아 고라(Lysia Gora)에 집시촌 진영을 분산시키고 텐트를 불태웠다.)"라는 기사까지 내보내 정당성을 내세워 자신들의 인권 유린 행위에 대해 합리화했다. 2016년 우크라이나의 다른 극우 단체 회원들, 특히 동부의 아조프 대원들은 집시 남성들을 집중적으로 살해했다. 이들은 집시 추적 장면을 ‘집시 사냥(Циганське полювання)’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으로 인터넷에 올리기도 했다. 정부가 미온적으로 방관했던 이유로는 극우 인사들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전쟁 영웅’이었다는 점과 정치적 이용 가치가 있다는 점이 꼽히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유엔 등이 항의하는 가운데 2017년에야 집시 거주촌 폭력 사건 관련자에게 가택 연금 처분을 내린 것이 인권 유린에 대한 처분이었다. 또한 우크라이나 극우 세력이 ‘소프트 타겟’으로 점철된 집시에 대해 탄압을 노골화하는 것을 두고 나치즘 또는 파시즘의 부활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치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집시 30만 명을 살해하는 인종청소를 감행했다. 하지만 집시를 추방해야 한다는 주도자들은 이에 대한 인권 유린을‘사회 정화’라고 하면서 이러한 행동이 무슨 잘못이냐고 항변했다. ‘C14’를 이끄는 예우헨 카라스가 언급하기를 "우리는 파시스트로 불린다. 뭐라고 불리든 상관없다"며 “범죄자들에 대응하는 것일 뿐 인종주의적 차원의 공격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살비니 이탈리아 내무장관도 자신은 인종주의자나 파시스트가 아니며 이탈리아인을 우선으로 한 노선을 추구할 뿐이라고 말하며 집시들에 대한 인권 유린을 합리화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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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7
  • 러시아의 조국전쟁(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1812 года), 러시아와 프랑스의 격돌, 나폴레옹 원정의 황혼기
    1811년에 유럽 대륙을 장악하고 있던 나폴레옹은 스페인 지역을 제외하고는 4년 간 전쟁이 없는 평온한 시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대륙 체제는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했고, 유럽의 점령 지역, 특히 독일에서 많은 시민들이 해방 전쟁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들에게 나폴레옹의 군대는 매우 막강한 존재였다. 유럽에서 나폴레옹의 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을 가진 국가는 러시아 밖에 없었다. 알렉산드르 1세는 프랑스와의 동맹에 만족하는 것 같이 보였다. 1809년에 핀란드를 합병함으로써 어느 정도 팽창에 성공한 알렉산드르 1세는 오스만투르크와 다뉴브 강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왕가의 공주와 결혼하여 유럽 왕족의 일원이 되었으나, 나폴레옹은 러시아에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폴레옹의 미움을 산 슈타인이 러시아로 도피하게 된다. 슈타인은 유럽에서 반(反) 나폴레옹 세력이 증가하고 있음을 알려주게 되었으며, 알렉산드르 1세가 유럽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찬사를 내려 전쟁을 획책했다. 이 당시 러시아는 대륙 봉쇄령으로 인해 영국에 대해 농산물에 대해 수출의 길이 막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수성할 수 없게 된 알렉산드르 1세는 1810년 12월 31일에 공식적으로 대륙 체제에서의 탈퇴를 선언하였다. 이로써 영국과 러시아 사이의 통상이 재개되고,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 1세를 직접 응징하기로 결정하였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60여 만 명의 연합군으로 구성되었다. 3분의 1은 프랑스 인이었고, 또 다른 3분의 1은 라인 동맹과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서 온 독일인들이었으며, 나머지 3분의 1은 폴란드 인을 중심으로 구성된 기타 민족이었다. 1812년 6월에 나폴레옹은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로 진군해 들어갔다. 3주 분량의 보급 물자만을 가지고 시작된 원정은 저항 없이 후퇴하는 러시아 군을 추격하여 러시아 영토 깊숙이 들어가는 상황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대군은 후퇴하면서 물자를 현지 조달할 수 없도록 파괴하고 도주하는 러시아 군의 작전에 말려들어 기아에 허덕여야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폴레옹군은 모스크바 근방의 보로디노에서 최초로 러시아 군과 전투를 벌일 수 있었다. 결과는 러시아 군의 피해가 5만 명, 프랑스 측의 피해가 3만 명으로 나폴레옹이 승리했다. 러시아 군은 다시 질서 정연하게 후퇴하였고, 모스크바에 입성한 나폴레옹은 기아에 빠진 자신의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비어 있는 시가지만을 정복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모스크바에 대한 방화가 시작되었지만 나폴레옹이 상상하였던, 항복 문서를 든 알렉산드르 1세는 어디에도 없었다. 당황한 나폴레옹은 5주 동안 모스크바에 머무르며 알렉산드르 1세와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러시아의 차르는 어떠한 제의도 거부하였다. 러시아에서 겨울을 맞게 되자,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나폴레옹은 후퇴를 명령하였다. 이로써 긴 후퇴의 행렬이 시작되었다. 불행하게도 그 해에는 겨울이 일찍 찾아와 후퇴하는 위대한 정복자의 군대를 사정없이 괴롭혔다. 여기에 모스크바 방화로 인해 적개심에 차 있는 러시아 인들이 도처에서 무기력한 프랑스군을 습격하여 엄청난 인명 손실을 가져왔다. 원정의 결과는 참혹하였다. 61만 명의 원정군 중 40만 명이 죽고 10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 역사상 최대를 자랑하던 프랑스의 대군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의 소식에 지금까지 기다리고 지내던 독일 연방 국가들이 반(反) 나폴레옹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 군대를 동원하였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였다. 유럽 전역의 프랑스 점령 지역에서 프랑스에 저항하는 모든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탈리아에서는 반(反) 프랑스 폭동이 발생하였으며, 스페인에서는 웰링턴(1769~1852)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진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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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6
  • 15세기 이후, 동아프리카에 진출한 이슬람 및 현지인 & 아랍인의 무역 거래의 역사
    15세기 무렵에 이르자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 페르시아 지역의 사치성 상품들에 대한 유럽의 수요가 늘어나고 있었다. 특히 유럽 대륙에서 아프리카와 멀리 인도, 동남아시아의 후추와 향료 등이 요구되었으며, 아라비아 반도는 당시 극동,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와 지중해와 접하고 있는 국가들 사이에서 주요한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다. 중국의 비단, 인도의 면직물, 식물로서 그 의학적인 특성 때문에 가치가 있는 중국산 대황(大黃), 보석류, 후추, 열대 상록수로, 향신료와 약용으로 사용된 육두구(肉荳) 씨, 육두구 씨로 만든 향미료, 생강, 그리고 정향나무의 꽃봉오리를 말려 향료로 사용하고 있는 정향(丁香) 등이 해로를 통하거나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들에 의해 아라비아로 운반되었고, 혹은 해상 운송 권을 독점하고 있던 아라비아 인들에 의해 홍해로 이동되어져 아라비아로 운송되었다. 아라비아 지역은 동서 교역에 있어서 주요한 시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아라비아 지역은 해마다 동아프리카 해안으로 많은 배들을 내려 보내어 구매자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끌었던 안장용 표범 가죽, 철, 그리고 기장을 포함하여 상아, 노예, 향료, 별갑, 동물 가죽 등의 장사를 지속적으로 벌였다. 아프리카에서는 상아와 노예들의 주요 원산지였던 반면에 당시 유일하게 동아프리카에서 획득할 수 있었던 향신료는 유향(乳香)과 계피, 사탕수수 정도 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말라카 군도(Malacca Islands)에서 나는 정향과 인도 산 후추와 같은 향신료는 극동 지역인 중국의 항구들로부터 얻어졌으며, 아라비아와 동아프리카의 상인들은 이들의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판매점과 제품 공장을 얻기 위해 현지의 통치자들에게 돈을 지불해 임대하는 조건으로 취득했다. 동아프리카 무역에서 향수의 원료인 용연향(龍涎香)과 금은 상당한 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교역의 중심지는 짐바브웨(Zimbabwe)로 가는 가장 가까운 항구인 소팔라(Sofala)로 기록되었다. 상당한 양의 해양 선박을 소유하고 있었던 인도인들도 이러한 향료와 황금 무역에 참여했다. 중세 말기에 이르러 인도와 동아프리카 간의 무역 관계는 동아프리카와 페르시아 만 사이의 무역만큼 중요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인도인들은 아마도 금융과 소매 무역을 취급하는 것에 상당한 전문가였던 것 같다. 그에 대한 이유로 그들이 아라비아 인과는 달리 오랫동안 확실한 능력을 보여 준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인도인들과 아라비아인들은 해안 배경에 펼쳐진 그 광대한 대륙을 탐험하려는 욕구를 보여 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어떠한 위험을 감수하는 탐험보다는 안정적으로 거래하는 사업에 관심이 더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가져온 상품들인 구슬, 유리, 금속 세공품들, 그리고 천 등을, 내륙으로부터 획득한 상아, 용연향, 노예, 그리고 금과 교환하는 사업 등으로 만족했던 것이다. 인도양에서 무역선으로 사용된 선박은 이미 앞서 언급한 바 있는 한 쪽짜리 돛이 달린 범선 다우(Dhow) 선이 활용되었다. 그 규모는 한두 명이 탑승이 가능한 소형 선박에서, 최고 400톤급의 대형 선박까지 상당수 건조되었다. 해안가의 아라비아 인들은 아프리카 원주민들과 결혼하였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아라비아 부계와 아프리카 모계의 스와힐리(Swahili) 인들이 생겼고 이들은 이슬람교 신앙과 아라비아 인들의 상업 본위의 생활양식을 공유하게 되었다. 아라비아 인들은 수적으로 매우 적었으며, 3세대에 이르자 그들은 스와힐리어를 만들어 사용하게 된다. 킬와와 몸바사와 같은 몇몇의 도시들은 상당한 번영을 함께 공유하던 수천 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반면에 도시 사이에 있는 마을들의 생활은 비교적 단순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곳의 집들은 마쿠티(Makuti, 코코야자나뭇잎)로 지붕을 묶은 욋가지와 진흙으로 만든 오두막집을 짓고, 어업과 농업에 종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단순한 집들이 도시에서도 또한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더욱 부유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매우 좋은 환경 속에서 거주했는데 히 무슬림들이 거주하는 곳이거나 혹은 상인들이 사는 곳 그러했다, 심지어 부유층들은 우물로부터 물을 끌어올려 정원에 있는 레몬, 오렌지, 석류나무, 채소 등을 재배했으며, 그들의 집들은 평평한 지붕을 하고, 돌로 지어졌으며, 움푹 들어간 앞마당을 통하여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몇몇의 부유층들의 집에는 아직도 정교한 회반죽 장식의 흔적이 보인다. 부유한 상인들이 살았던 도시 지역은 아마도 바닷가가 분주한 활동 무대였으며, 건물의 벽돌 사이 좁은 길은 태양으로부터 열을 차단하는, 오늘날의 도시 라무(Lamu)와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4세기에 라무와 동아프리카 해안가를 방문했던 이븐 바투타(Ibn Battuta)로부터의 여행 보고서에 의하면 스와힐리 인들의 식욕이 왕성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평상시의 식사가 큰 접시에 우유와 과일을 곁들인 쌀 위에 놓여 진 육류, 생선, 닭고기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식사에 의하면 수입된 유약을 바른 이슬람 제품 자기나, 아마도 중국 자기에 담아 내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 가난한 사람들조차도 15세기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그릇에 음식을 먹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음식은 위에서 상술했던 풍성한 메뉴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븐 바투타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고 한다. “이 사람들은 한 명이 우리의 몇 명의 양을 먹는다. 그것이 그들의 관습이다.” 동아프리카에서 최근 몇 년 동안 진행되어 온 고고학 연구가 단지 건물과 비문들뿐만 아니라, 도자기 종류와 동전들을 발굴해 왔다. 특히 킬와에서 발견된 유물들에 의하면 일찍부터 교환의 매개체였던 별보배고둥 종류의 조개 껍질(Cowrie shell)들이 시라지(Shirazi) 왕조의 설립자 알리 빈 알 하산(Ali bin al - Hassan)이 술탄(Sultan)이었던 1200년에 이르러서는 동전으로 대체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대개 알 하산이 통치한 기간 동안 해안에서는 이슬람교 문명이 최절정기에 달하고 있었던 때였다. 그리고 앞으로 도래할 3세기의 시작으로 간주되어지기도 한다. 이는 하나의 해상 무역에 기반을 둔 문명이었으며, 그래서 내륙으로는 겨우 5마일 정도의 지역까지만 교류되었을 뿐이다. 대부분의 도시들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칭호를 사용하는 통치자들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다음 통치자가 되는 인물이 장남이 아니더라도 그 칭호와 계급은 가족 내부에서 대대로 세습되었다. 몇몇 소도시들은 공화국 정부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어떤 도시들은 세습되는 공무원이나 세력이 있는 평의회가 통치자를 억제하기도 하였으며, 따라서 통치자들은 그들이 추방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해안가에서의 생활은 대개 내륙에서 포로로 잡은 노예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이 지역 아라비아 인 주인의 농장과 집안일을 돌보도록 선택된 노예들은 비교적 다행스러운 편이었던 것 같다. 이는 꾸란에서 무슬림들에게, 노예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하나의 미덕으로 가르쳤으며, 많은 사람들이 될 수 있는 한 노예를 잘 대우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더 불행했던 사람들은 선박에 촘촘히 실려진 채로 거의 돌아올 가망이 없는 해상 여정의 공포에 직면했던 노예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오만, 인도 그리고 거의 중국에까지 배로 운송되었던 노예들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프리카 중세 도시 몸바사(Mombasa)에 대한 운명에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 남아 있다. 1331년 이븐 바투타가 기술한 몸바사의 농업은 보잘 것이 없고, 나무로 만들어진 이슬람 모스크와 맨발로 다니는 주민들이 존재했다고 한다. 그리고 16세기 초반에 탐험가인 두아르테 바르보사(Duarte Barbosa)가 보았던 번영된 도시로까지의 변화가 이어졌는데 몸바사는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급격한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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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24
  • 베네치아 공국의 형성과 역사에 관한 이야기
    베네치아 공국의 역사는 5세기 고트족과 훈족 등 여러 이민족들의 약탈을 피해 파두아(Padua), 아퀼레이아(Aqileia), 콘코르디아(Concordia), 트레비소(Trebiso), 알티노(Altino) 등지에서 온 고대 로마 출신 난민들이 베네치아 석호의 섬들로 모이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초기 정착민들의 흔적은 이들의 정착과 함께 건설된 산 쟈코모(San Giacomo) 성당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원래 이 섬에 영구히 정착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섬 전체가 습지대였기 때문에 주거 환경이 열악했다. 따라서 지대가 물러 제대로 된 건물을 지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고트족이 떠날 때까지 몇 년 만 머물 임시적인 곳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고트족은 서로마를 멸망시키고 이탈리아에 완전히 정착해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제 로마의 피난민들은 어쩔 수 없이 기한 없이 머물만한 영구 정착지를 늪지대 위에 건설해야 했다. 그들이 생각한 방법은 말랑한 토층 아래 단단한 층까지 닿는 긴 말뚝을 수직으로 섬 전체에 촘촘히 박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 엄청난 육체적인 노동을 통해 말뚝을 박고 그 위에 석판을 깔아 비로소 건물을 지어 올릴 지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6세기 비잔틴 제국이 이탈리아 일대를 수복했을 때는 라벤나 총독부를 두어 통치했는데, 베네치아와 라벤나는 해로로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베네치아는 자치적으로 운영되며 독자적으로 성장해 나갔다. 이 때 랑고바르드 족을 피해 온 난민들이 오랜 기간 동안 더욱 유입되었다. 최초의 중앙 상임 통치 위원회(Tribuni maiores)는 568년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말라모코(Malamoco)와 토르첼로(Torchelo) 등 새로운 항구들이 여러 곳 건설되었고, 말라모코는 점차 이 지역 중심지가 되어갔다. 7세기경에는 각 항구들의 규모가 발전해 자신들의 지도자를 선출하고 비잔틴 제국의 황제에게 자치를 인정받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697년에 최초의 베네치아 도제가 선출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최초의 베네치아 도제인 파올로 루치오 아나페스토 (Paolo Lucio Anafesto, 697~717)와 라벤나 총독 파울로스(Paulos)는 동일 인물이었고, 선출의 형식은 따랐지만 실제로는 아직 자치권을 인정받은 단계는 아니라는 추측이 있다. 그의 후임자는 본래 그 휘하 총사령관이었던 마르첼로 테갈리아노(Marcello Tegalliano)였다. 그러나 726년 성상 파괴령을 둘러싸고 동서 교회 간의 논쟁이 일어나자 그레고리오 2세(Gregorio II)의 촉구에 반응하여 총독의 관할 지역 군인들과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총독을 살해했고, 그들 스스로 지도자를 선출하기로 한다. 처음으로 주민들에 의해 선출된 도제는 우르수스(Ursus, 726~737)였다. 그는 레온 3세(Leon III)의 라벤나 정복을 지지해 그에게 군사들과 각종 선박을 지원했다. 이에 따라 교황은 베네치아에 각종 특권을 내려주고, 우르수스를 공식적으로 지도자로 인정하면서 히파투스(Hifatus)라는 칭호까지 내리게 된다. 751년경 랑고바르드 족은 결국 비잔틴 제국의 라벤나 총독부를 붕괴시켰지만 베네치아 석호 지역은 남겨두고 있었다. 베네치아 석호 지역은 자치적으로 운영되고는 있었으나, 여전히 공식적으로는 비잔틴 제국 령이었고, 주민들이 지도자로 선출하는 직위도 공식적으로는 비잔틴 제국 황제가 임명한 총독이었다. 이 때 총독은 말라모코 섬에 주재하고 있었으며 현재 베네치아로 알려진 리알토(Rialto) 지역은 그저 작은 섬에 불과했다. 랑고바르드 족이 이탈리아 본토를 정복하고 다니면서 이 지역으로 유입되는 난민들은 점점 더 늘어났다. 이어 775년경에는 주교직이 신설되기에 이른다. 한편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는 비잔틴 제국과의 세력 정쟁의 일환으로 지금까지 그 어떤 민족, 그 어떤 나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던 이 베네치아 석호 지대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는 아들 피핀 카를로만을 시켜 배를 건조해 베네치아 지역을 정복하는 일을 전담하도록 한다. 805년 베네치아 내부의 파벌 정쟁 및 인접 도시 그라도(Grado)와의 전쟁으로 인해 베네치아는 카롤루스에게 자신들을 보호령으로 삼아 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피핀이 베네치아를 장악하자 비잔틴 제국은 함대를 파견해 피핀을 몰아내고 베네치아를 수복하였다. 피핀은 이를 다시 수복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807년 비잔틴 제국과 임시 휴전 조약을 맺었다. 카롤루스대제에게 사신을 보낸 주모자들은 베네치아에 의해 비잔틴 제국에 넘겨졌고 이어 추방당했다. 810년 피핀은 코마키오(Comacio)의 선박을 빌려 베네치아를 공격했다. 당시 중심지였던 말라모코는 아드리아 해에 면하고 있어 방어에 취약했다. 결국 베네치아 인들은 말라모코를 버리고 리알토로 옮겨갔다. 프랑크 군은 비어있는 말라모코를 점령해 약탈하고 불태운 다음 베네치아 군을 추적했으나 리알토 군도는 계속 저항했고 물길을 잘 아는 베네치아인과 달리 프랑크 군은 얕은 석호 지대의 물길에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일부 선단이 좌초하고 만다. 그에 따라 시간이 점점 끌리며 케팔리니아(Kepalinia) 총독 파울루스가 지휘하는 비잔틴 제국 함대가 반격하자 피핀은 철수했지만 역병에 걸려 사망하게 된다. 812년 새로운 적인 제1 불가리아 제국을 견제해야 했던 비잔틴 제국은 아들과 군사를 잃은 카롤루스 대제 사이에 강화 조약이 체결되는데, 베네치아 공화국은 비잔틴 제국의 속국으로 남고, 아드리아 해 일대 교역권을 인정받는 대신 카롤루스는 비잔틴 제국에게 제위를 인정받고 동맹을 채결했다. 그리고 도제 아녤로 파르티차코(Agnello Participazio, 811~827)는 도제의 주재지를 현재 베네치아 위치인 리알토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이곳에 최초의 두칼레(Ducale) 궁과 산 마르코(San Marco) 성당을 건설했다. 이렇듯이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각종 게르만 이주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카롤루스 대제의 정복을 거쳐 신성로마제국 소속이었다가 중세 성기(High Middle Ages 11세기~13세기) 이후 하나 둘씩 정치적으로 독립하기 시작했던 다른 북이탈리아 도시 국가들과 달리, 베네치아는 애초에 로마 제국 자체의 시설과 정통성을 비교적 잘 보존한 자치 공화국으로 시작했다. 베네치아 공국은 북이탈리아의 대다수 지역들과는 달리 프랑크 제국, 신성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적이 전혀 없다. 이와 같은 독자적인 역사적 기원은 먼 훗날 중세의 전성기를 거쳐 근세 시대의 역사적 시련과 위기에도 베네치아 공화국이 열강들 사이에서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이념적 원천이 되었다. 오르소 이파토의 아들인 테오다토 이파토(Teodato Ipato)는 근거지를 에라클레아에서 말라모코로 옮겼다. 테오다토 이파토의 도제 계승은 세습 왕조를 세우려는 오르소 이파토의 의도에 따른 것이며, 베네치아 초기 역사 중 여러 명의 도제는 세습을 시도하였으나 결국에는 실패했다. 테오다토 이파토의 치세 중 베네치아는 북부 이탈리아에 유일하게 남은 비잔틴 제국 령이 되었으며, 당시 프랑크 왕국 내에서 벌어진 카롤링거 왕조 개창 등 변화하는 정치체제는 베네치아 정치 구도를 변화시켰다. 우선 확고한 친(親) 비잔틴 세력이 있었으며, 다음으로는 실질적으로 독립하고자 하는 공화주의자들이 있었다. 이 외 주요한 파벌로는 친(親) 프랑크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당시 카롤링거 왕조의 왕인 피핀 3세를 랑고바르드 족으로부터의 최고의 보호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이는 당시 교황의 피핀 3세에 대한 지지와 맞물려 주로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상대적으로 소수파였던 친(親) 랑고바르드 세력은 멀리 떨어진 비잔틴 제국 및 프랑크 제국과의 연합을 반대하고, 바다 쪽을 제외하고는 베네치아를 완전히 둘러싸고 있던 랑고바르드 왕국과의 평화 유지에 관심을 두었다. 테오다토 이파토는 암살당했으나, 그의 자리를 찬탈한 갈라 가울로(Gala Gaulo) 역시 1년 안에 그의 정적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 후임인 도메니코 모네가리오(Domenico Monegario)가 통치하는 기간 동안 베네치아는 어촌에서 무역항 및 교역 중심지로 탈바꿈했다. 이 당시 조선 산업 역시 크게 발전하였으며, 아드리아 해의 지배권을 위한 초석 역시 이 때 놓였다. 또한 이 때 최초로 호민관제가 도입되었으며, 매년 두 명의 신임 호민관이 선출되어 도제를 감시하고 권력 남용을 방지하였다. 친(親) 랑고바르드 파였던 모네가리오는 764년 축출되었으며, 에라클레아 출신의 친(親) 비잔틴 파인 마우리치오 갈바이오(Maurizio Galbaio, 764~787)가 뒤를 승계했다. 갈바이오는 긴 치세 기간 동안 베네치아를 지역적 뿐만 아니라 국제적 번영의 도상에 올렸으며, 한편으로는 세습 왕조를 세우기 위해 가장 집요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이 때 베네치아는 리알토 지역까지 확장되었다. 후임은 아들인 지오반니 갈바이오(Giovanni Galbaio, 787~804)이며, 부친과 마찬가지로 긴 치세 동안 그는 노예무역을 두고 카롤루스 대제와 충돌하였으며 교회와 대립하였다. 세습 왕조를 건국하고자 했던 야심은 804년 친(親) 프랑크 파가 오벨레리오 델리안토네리(Obelerio degli Antenori, 804~811)의 치하에서 권력을 쟁취했고 세습왕조의 계획은 분쇄되었다. 오벨레리오는 베네치아를 카롤링거 왕조의 영향권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그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여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인 피피노 카를로만의 도움을 요청함으로써 시민들의 분노를 샀으며, 810년 피핀이 베네치아를 포위했을 때 가족과 함께 도시를 떠나야 했다. 피핀은 6개월 동안 베네치아를 포위했으나, 늪지에서 발생한 역병의 창궐 등으로 인하여 결국 철수해야 했다. 피핀 자신도 여기에서 얻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병으로 인하여 몇 개월 후 사망하였다. 베네치아는 이 때의 승리로 쟁취한 독립을 이후 유지하였으며, 이는 후에 카롤루스 대제와 비잔틴 제국의 황제 니케포루스 1세(Nikeporus I) 간에 맺은 협정에서 추인되었다. 이 협정은 베네치아를 비잔틴 제국의 영토로 인정하였으며, 또한 ”다섯 도시”, 카롤루스 대제가 교황에게 베네치아 인을 축출하라고 했던 안코나(Ancona), 파노(Pano), 페사로(Pesaro), 리미니(Limini), 시니갈리아(Sinigalia)를 포함하여 아드리아 해에서 베네치아의 교역권을 인정하게 된다. 오벨레리오의 후임은 통합된 베네치아를 물려받았다. 803년 니케포루스 협정에 의거하여 카롤링거 왕조와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베네치아가 명목적으로는 비잔틴 제국의 영토로 남게 되지만 실질적으로 베네치아가 독립국임을 확인하였다. 파르티치파치오(Participazio, 811~836) 가문의 지배 하에서 베네치아는 근대적인 형태를 갖추게 된다. 가문의 첫째 도제였던 안젤로 파르티치파치오(Agnello Participazio, 811~827)는 에라클레아 태생이었으나 리알토 초기 시대의 이주자 중 하나였으며, 그의 치세는 교량, 운하, 방벽, 요새, 석조 건물 등의 건축을 통한 베네치아의 바다로의 확장으로 특징지어진다. 안젤로의 아들인 주스티니아노(Giustiniano)가 도제이던 시기에는 트리부노(Thribuno) 및 루스티코(Rustico) 등 두 명의 상인이 성 마르코의 유해를 알렉산드리아로부터 가져왔으며, 이후 베네치아는 성 마르코를 수호성인으로 삼았다 한다. 조반니 파르티치파치오의 후임인 피에트로 트라도니코(Pietro Tradonico, 800~864) 치하에서 베네치아는 먼 훗날 십자군에 영향을 미치고 수 세기 동안 아드리아 해를 지배할 수 있는 군사력을 키우기 시작하였으며, 신성로마제국의 로타르 1세와 맺은 무역 협정 상 권리는 이후 오토 1세 시절에 확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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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20
  • 사탕수수 무역과 설탕의 세계화
    8세기 무렵 이슬람의 무역상들이 인도에서 상업 행위를 하면서 사탕수수를 들여왔고 그 뒤 10세기에는 메소포타미아 전 지역과 북아프리카의 여러 곳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지었으며 여기에서 증류한 설탕 등을 독점하게 되었다. 유럽에는 십자군 원정을 통해 11세기경 전파되었으며 사탕수수의 북방 재배의 한계선은 유럽의 경우 지중해 일부, 특히 주로 베네치아 공국에서 장악한 키프로스에서만 재배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낮은 편이었고, 그 경작에 많은 물과 노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비싼 작물이었기에 재배 또한 많이 까다로운 편이었다. 특히 재배할 때 먼저 사탕수수 밭을 불에 태운다. 이는 잔여 잎들을 없앨 수 있고, 달콤한 성분으로 인해 숨어 있는 독사나 해충 등도 모두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탕수수의 줄기나 뿌리는 수분을 머금고 있기에 상하지 않지만 상당히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라 볼 수 있다. 콜럼부스가 처음으로 사탕수수를 아이티에 전파시켰고, 이후 서양 열강들은 카리브해 지역을 설탕 재배용 식민지로 중요하게 여겨왔다. 아직도 카리브 지역의 섬들에게서는 사탕수수가 중요 작물로 여겨지고 있으며 대항해시대의 주요 교역품으로서 항해 기술의 발전과 늘어난 식민지를 통한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다. 스페인을 필두로 아메리카에 진출한 유럽 열강들은 카리브해 근방의 여러 섬들을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만들었는데 그중 일부는 섬의 90%가 사탕수수 농장이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특히 카리브해 지역에는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데려왔고, 이는 서인도 제도의 정치, 사회적으로도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특히 카리브해 지역이나 태평양의 하와이, 피지와 같은 열대 지방의 섬들은 사탕수수가 경제, 사회와 민족 구성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카리브 해 지역들의 기후와 토질이 사탕수수를 재배하기에 알맞아 미국과 유럽에서 이들 섬에 플랜테이션 방식의 사탕수수 농업을 크게 벌였고 사탕수수는 서방 국가의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것이 이어져서 이들 지역에서 흑인이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아이티는 인구의 90%가 흑인이고 자메이카도 비슷하며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도 흑인종이 대단히 많다. 노예제도가 금지된 이후 아시아에서 저임금으로 노동자를 데려왔으며 갑자기 남태평양의 섬 피지에서 인도계가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하와이에 일본인이 많은 것도 이런 역사적인 배경에 있다. 그리고 일제 시대 이후 많은 조선인들이 조선을 떠나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독립운동가인 도산 안창호 선생도 미국 본토로 이주하기 전에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한동안 일했다고 전해진다. 17세기 초에는 오키나와에도 사탕수수 농사가 시작되었다. 이 지역의 사람인 기마 웨카타 신죠(儀間親方真常, 1557~1644)가 설탕을 제조하는 방법 등을 동남아시아에서 류큐로 가지고 들어왔는데, 그는 중국에서는 고구마, 일본에서는 목화를 들여왔다고 한다. 그는 류큐인으로써 새로운 작물을 들여온 류큐의 신(新) 문물을 전해온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도 사츠마가 지배했던 아마미 군도로도 사탕수수가 전해지게 되었고 이 지역들의 흑설탕이 일본 전역에 퍼져나가게 된다. 특히 일본에서의 흑설탕 매매는 류큐 왕국의 자금줄이나 마찬가지였고, 사츠마가 후일 탈번하여 메이지 유신을 달성할 수 있게 한 자금줄 역할을 하기도 했다. 현재에도 가고시마 아마미 군도와 오키나와에서 생산되는 흑설탕은 지금도 그 지방의 유명한 특산품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이후에 유럽에서는 사탕무가 가공됨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설탕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사탕수수의 수출이 힘들어진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커피를 사탕수수 대신 재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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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19
  • 카자흐스탄 민주화 시위는 2019년 6월에도 존재했다
    유목 민족들이 자리한 곳은 인구 밀도가 지독하게 낮기 때문에 자손을 번창하게 할 여인들을 찾는 것이 매우 어렵다. 따라서 부족 단위로 인종적인 특징과 결속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당연히 각 유목민의 활동 영역에 한정된다. 그런 이유로 인해 유목 국가가 출현하더라도 이들은 서로 결속이 매우 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유목 국가의 흥망이나 부족 간의 항쟁, 기후 변화 등에 따라 유목민의 공동체는 해체와 재결성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고대 시절 각 부족들을 통일하여 세계사를 뒤집어 놓은 유목민족들의 후예가 누구이고 뿌리가 누구인지를 찾아내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부분이다. 더욱이 유목민들은 살아 남기 위해 인근의 농경민들은 물론, 심지어 같은 유목민 부족들도 수시로 약탈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더더욱 타 민족의 혈통이 자주 섞이곤 했다. 그래서 유목민들의 약탈이란 단순히 재화나 식량만 털어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약탈을 당하는 나라나 부족들의 국민들이 대거 노예로 끌려가거나, 정주민들의 거주지 전체가 정복당하여 지배자인 유목민들에게 착취당하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유목민들은 종종 타 민족과의 잦은 혼혈로 인해 외견 상에서 그 모습이 달라지거나,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지기도 했고, 심지어는 피지배 민족에게 역으로 동화되어 소멸되기도 했다. 이런 유라시아의 유목 민족들의 정치적인 특색과 관습을 이어받아 현 정치 체제에 접목시켰던 국가가 카자흐스탄이다. 카자흐스탄은 근대적인 국민 주권국가의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에 기본적인 정치구조는 전근대적인 기본 구조가 그대로 남아 있다. 독립 이후에도 공산당을 재편성하여 의회라는 이름을 바꾸고 직접 선거의 대통령제를 도입했기 때문에 전 국민들의 제대로 된 민주적인 선거가 이루어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공산당 제1 서기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등의 형태로 소비에트 시절의 지도부가 계속 집권하고 있다. 이와 같은 꾸준한 집권은 소비에트에서 카자흐스탄의 독립 정부로 바뀌는 정치적 혼란을 봉쇄하고 국민들의 동요를 통제한다는 것에서 큰 의미가 있으나 과감한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소련이 붕괴된 직후, 모두 주권국가를 표명할 때 카자흐스탄은 소련이 쳐 놓은 울타리 안에 그대로 남아 있으려 하였고, 그래서 중앙아시아 국가들 중 독립 선언이 가장 늦어졌던 것이다. 그에 대한 이유는 중앙아시아 국가 중 북부 지방과 도시를 중심으로 한 공업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다수의 기업군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이 기업들이 다수의 러시아 인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카자흐스탄 국민들이 독립을 원하지 않았다는 부분이 가장 컸다. 카자흐스탄의 사회적인 분위기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이전 소비에트를 경험했던 독립 선언의 지도층들이 점차 노쇠화되었고 초대 대통령이자 독재자인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통치하던 때인 독립 후 세대들은 점차 카자흐스탄 사회의 중심이 되어 가고 있다. 그 이전까지는 소비에트 체제에 익숙하여 독재라는 부분에 큰 거부감이 없었다면 독립 후의 세대들은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서구식 민주주의를 자주 접할 수 있었고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의 행정부와 누르 오탄 당을 중심으로 여당, 실질적인 1당 체제에 대해 조금씩 불만을 쌓아가고 있었다. 소비에트를 경험하고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의 독재에 둔감하여 정치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보수 세대들과는 달리 독립 후 세대들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는 이른바 진보 세대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이들 진보 세력들로 인해 나자르바예프와 누르 오탄 당의 독재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열망이 매우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 바로 최근 발생한 카자흐스탄의 시위이다. 그러나 올 2022년 1월 초를 뒤흔들었던 카자흐스탄의 시위는 이 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2019년 대선 당시에도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있었던 것이다. 2019년 6월은 카자흐스탄의 현대사에 있어 그 이름을 역사에 새기는 사건이 발생한다. 카자흐스탄이 건국된지 30년만에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가 치뤄진 것이다. 이 때 대선은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기 2년 전인 1989년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 서기로 시작해 1991년부터 대통령으로 30년 동안 집권한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전 대통령이 3월에 전격 하야를 선언하면서 치뤄지게 된 것이다. 나자르바예프가 은퇴하게 된 계기 또한 201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2017년 4월 본인이 주도하여 의회를 통과시킨 헌법 개정안에 서명했었다. 여기에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키고 내각과 의회의 결정에 대한 거부를 불가능하게 하는 등 권력의 분립을 승인한 것이다. 그러면서 카자흐스탄 최고회의(The Assembly of People)의 의장 직위를 2020년을 마지막으로 내려놓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대통령 권한을 축소시킨다는 것은 말 뿐이고 오히려 절대다수 정당인 누르 오탄 당의 힘을 실어주게 되면서 본인 스스로의 퇴진 이후에도 별 탈 없게 만들려고 하는 정치적인 공작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한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얕은 수를 독립 후 세대들은 결코 넘어가지 않았고 헌법 개정안 자체를 대통령과 절대 다수의 여당인 누르 오탄 당이 서로 결탁하여 결행한 사안이라며 적극 반발하기도 했다. 이러한 강한 반발에 직면한 나자르바예프는 최악의 부패 스캔들까지 터지며 국민들의 분노를 자아내게 했다. 게다가 세계금융위기와 저유가의 여파로 2010년대 중후반 들어선 8,000달러까지 떨어지는 등 카자흐스탄 경제가 침체되자 이에 대한 책임론까지 부상하여 나자르바예프는 정치 생명의 최대 위기를 맞게 된다. 당시 나자르바예프의 선택지는 대통령에서 사퇴하고 우크라이나의 빅토르 야누코비치처럼 러시아로 망명하는 것과 조용히 정계에 떨어져 있으면서 재집권의 기회를 노리는 것, 두 가지 뿐이었다. 결국 나자르바예프는 후자를 선택했고 카심 조마르트 토카예프를 임시대통령으로 임명하며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리고 2019년 3월에 마침내 전격 퇴진했다. 토카예프는 임시대통령이 되자마자 수도 아스타나를 나자르바예프의 이름을 따 누르술탄으로 개명했다. 그러자 주변에서는 이와 같은 토카예프의 이해할 수 없는 행위에 의문을 재기했는데 "카자흐스탄 민주 선택당"의 지도자 무흐타르 아블랴조프(Мухтар Аблязов)는 자신의 소셜미디어에서 이와 같은 수도의 명칭 변경이 나자르바예프의 입김이 들어간 것이 아니냐는 강한 의혹을 재기하기도 했다. 이 때부터 나자르바예프의 상왕 정치는 이미 예견된 수순이었던 것이다. 2019년 6월 정식 대선이 카자흐스탄에서 치뤄졌고 결국 임시대통령 토카예프가 70.6%의 득표율을 올리며 당선됐다. 그러자 야당 대표인 아미르잔 코사노프(Амиржан Косанов)와 무흐타르 아블랴조프(Мухтар Аблязов)는 이 선거가 부정선거라며 반발했고 결국 대선 결과에 항의하는 시위가 2019년 6월 11일 수도 누르술탄과 카자흐스탄 최대 도시인 알마티 등지에서 벌어졌다. 당시 시위는 카자흐스탄이 소련에서 독립한 후 최대 규모였다고 BBC 등 외신들이 전했다. 카자흐스탄 내무부는 시위대 중 약 500명을 강제 체포했으며 알마티의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선거 거부” 및 “국민과 함께 하는 경찰”이라는 구호를 외치다 강제 해산되기도 했다. 경찰이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하는 과정에서 경찰 버스로 연행된 시위대 중 일부는 버스 유리창을 파손한 뒤 탈출하고 일부는 진압 경찰의 방패와 곤봉을 탈취하는 등 격렬한 모습의 동영상이 유튜브에 게재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시위를 두고 정부에서는 불법 집회 및 시위라고 주장했고 그 배후에는 어처구니없게도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인 'DVK'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결국 부정선거 항의 시위는 단 5일 만에 제압되어 종결되었고 결국 부정선거 의혹 및 토카예프 당선과 더불어 누르 오탄 당을 성토하는 집회 및 시위는 실패로 끝났다. 이와 대규모 시위에서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보게 된 독립 후 탄생한 진보 세대들은 마침내 LPG 가격 인상과 더불어 코로나로 인해 악화된 경제난에 대한 누적된 국민들의 불만까지 겹쳐 3년 후, 2022년 1월 2일에 자나오젠에서의 시위를 시작으로 1월 11일에 완전히 종료되기까지 약 10일간의 항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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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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