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9-11(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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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 민족들이 자리한 곳은 인구 밀도가 지독하게 낮기 때문에 자손을 번창하게 할 여인들을 찾는 것이 매우 어렵다. 따라서 부족 단위로 인종적인 특징과 결속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당연히 각 유목민의 활동 영역에 한정된다. 그런 이유로 인해 유목 국가가 출현하더라도 이들은 서로 결속이 매우 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유목 국가의 흥망이나 부족 간의 항쟁, 기후 변화 등에 따라 유목민의 공동체는 해체와 재결성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고대 시절 각 부족들을 통일하여 세계사를 뒤집어 놓은 유목민족들의 후예가 누구이고 뿌리가 누구인지를 찾아내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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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Protesters clashed with police in the capital, Nur-Sultan, 출처 : BBC, https://www.bbc.com/news/world-asia-48574540

 

더욱이 유목민들은 살아 남기 위해 인근의 농경민들은 물론, 심지어 같은 유목민 부족들도 수시로 약탈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더더욱 타 민족의 혈통이 자주 섞이곤 했다. 그래서 유목민들의 약탈이란 단순히 재화나 식량만 털어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약탈을 당하는 나라나 부족들의 국민들이 대거 노예로 끌려가거나, 정주민들의 거주지 전체가 정복당하여 지배자인 유목민들에게 착취당하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유목민들은 종종 타 민족과의 잦은 혼혈로 인해 외견 상에서 그 모습이 달라지거나,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지기도 했고, 심지어는 피지배 민족에게 역으로 동화되어 소멸되기도 했다.


이런 유라시아의 유목 민족들의 정치적인 특색과 관습을 이어받아 현 정치 체제에 접목시켰던 국가가 카자흐스탄이다. 카자흐스탄은 근대적인 국민 주권국가의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에 기본적인 정치구조는 전근대적인 기본 구조가 그대로 남아 있다. 독립 이후에도 공산당을 재편성하여 의회라는 이름을 바꾸고 직접 선거의 대통령제를 도입했기 때문에 전 국민들의 제대로 된 민주적인 선거가 이루어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공산당 제1 서기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등의 형태로 소비에트 시절의 지도부가 계속 집권하고 있다. 이와 같은 꾸준한 집권은 소비에트에서 카자흐스탄의 독립 정부로 바뀌는 정치적 혼란을 봉쇄하고 국민들의 동요를 통제한다는 것에서 큰 의미가 있으나 과감한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소련이 붕괴된 직후, 모두 주권국가를 표명할 때 카자흐스탄은 소련이 쳐 놓은 울타리 안에 그대로 남아 있으려 하였고, 그래서 중앙아시아 국가들 중 독립 선언이 가장 늦어졌던 것이다. 그에 대한 이유는 중앙아시아 국가 중 북부 지방과 도시를 중심으로 한 공업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다수의 기업군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이 기업들이 다수의 러시아 인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카자흐스탄 국민들이 독립을 원하지 않았다는 부분이 가장 컸다. 카자흐스탄의 사회적인 분위기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이전 소비에트를 경험했던 독립 선언의 지도층들이 점차 노쇠화되었고 초대 대통령이자 독재자인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통치하던 때인 독립 후 세대들은 점차 카자흐스탄 사회의 중심이 되어 가고 있다. 


그 이전까지는 소비에트 체제에 익숙하여 독재라는 부분에 큰 거부감이 없었다면 독립 후의 세대들은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서구식 민주주의를 자주 접할 수 있었고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의 행정부와 누르 오탄 당을 중심으로 여당, 실질적인 1당 체제에 대해 조금씩 불만을 쌓아가고 있었다. 소비에트를 경험하고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의 독재에 둔감하여 정치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보수 세대들과는 달리 독립 후 세대들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는 이른바 진보 세대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이들 진보 세력들로 인해 나자르바예프와 누르 오탄 당의 독재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열망이 매우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 바로 최근 발생한 카자흐스탄의 시위이다. 그러나 올 2022년 1월 초를 뒤흔들었던 카자흐스탄의 시위는 이 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2019년 대선 당시에도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있었던 것이다.


2019년 6월은 카자흐스탄의 현대사에 있어 그 이름을 역사에 새기는 사건이 발생한다. 카자흐스탄이 건국된지 30년만에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가 치뤄진 것이다. 이 때 대선은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기 2년 전인 1989년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 서기로 시작해 1991년부터 대통령으로 30년 동안 집권한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전 대통령이 3월에 전격 하야를 선언하면서 치뤄지게 된 것이다. 나자르바예프가 은퇴하게 된 계기 또한 201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2017년 4월 본인이 주도하여 의회를 통과시킨 헌법 개정안에 서명했었다. 여기에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키고 내각과 의회의 결정에 대한 거부를 불가능하게 하는 등 권력의 분립을 승인한 것이다. 


그러면서 카자흐스탄 최고회의(The Assembly of People)의 의장 직위를 2020년을 마지막으로 내려놓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대통령 권한을 축소시킨다는 것은 말 뿐이고 오히려 절대다수 정당인 누르 오탄 당의 힘을 실어주게 되면서 본인 스스로의 퇴진 이후에도 별 탈 없게 만들려고 하는 정치적인 공작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한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얕은 수를 독립 후 세대들은 결코 넘어가지 않았고 헌법 개정안 자체를 대통령과 절대 다수의 여당인 누르 오탄 당이 서로 결탁하여 결행한 사안이라며 적극 반발하기도 했다. 이러한 강한 반발에 직면한 나자르바예프는 최악의 부패 스캔들까지 터지며 국민들의 분노를 자아내게 했다. 게다가 세계금융위기와 저유가의 여파로 2010년대 중후반 들어선 8,000달러까지 떨어지는 등 카자흐스탄 경제가 침체되자 이에 대한 책임론까지 부상하여 나자르바예프는 정치 생명의 최대 위기를 맞게 된다. 


당시 나자르바예프의 선택지는 대통령에서 사퇴하고 우크라이나의 빅토르 야누코비치처럼 러시아로 망명하는 것과 조용히 정계에 떨어져 있으면서 재집권의 기회를 노리는 것, 두 가지 뿐이었다. 결국 나자르바예프는 후자를 선택했고 카심 조마르트 토카예프를 임시대통령으로 임명하며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리고 2019년 3월에 마침내 전격 퇴진했다. 토카예프는 임시대통령이 되자마자 수도 아스타나를 나자르바예프의 이름을 따 누르술탄으로 개명했다. 그러자 주변에서는 이와 같은 토카예프의 이해할 수 없는 행위에 의문을 재기했는데 "카자흐스탄 민주 선택당"의 지도자 무흐타르 아블랴조프(Мухтар Аблязов)는 자신의 소셜미디어에서 이와 같은 수도의 명칭 변경이 나자르바예프의 입김이 들어간 것이 아니냐는 강한 의혹을 재기하기도 했다. 이 때부터 나자르바예프의 상왕 정치는 이미 예견된 수순이었던 것이다. 


2019년 6월 정식 대선이 카자흐스탄에서 치뤄졌고 결국 임시대통령 토카예프가 70.6%의 득표율을 올리며 당선됐다. 그러자 야당 대표인 아미르잔 코사노프(Амиржан Косанов)와 무흐타르 아블랴조프(Мухтар Аблязов)는 이 선거가 부정선거라며 반발했고 결국 대선 결과에 항의하는 시위가 2019년 6월 11일 수도 누르술탄과 카자흐스탄 최대 도시인 알마티 등지에서 벌어졌다. 당시 시위는 카자흐스탄이 소련에서 독립한 후 최대 규모였다고 BBC 등 외신들이 전했다. 카자흐스탄 내무부는 시위대 중 약 500명을 강제 체포했으며 알마티의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선거 거부” 및 “국민과 함께 하는 경찰”이라는 구호를 외치다 강제 해산되기도 했다. 경찰이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하는 과정에서 경찰 버스로 연행된 시위대 중 일부는 버스 유리창을 파손한 뒤 탈출하고 일부는 진압 경찰의 방패와 곤봉을 탈취하는 등 격렬한 모습의 동영상이 유튜브에 게재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시위를 두고 정부에서는 불법 집회 및 시위라고 주장했고 그 배후에는 어처구니없게도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인 'DVK'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결국 부정선거 항의 시위는 단 5일 만에 제압되어 종결되었고 결국 부정선거 의혹 및 토카예프 당선과 더불어 누르 오탄 당을 성토하는 집회 및 시위는 실패로 끝났다. 이와 대규모 시위에서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보게 된 독립 후 탄생한 진보 세대들은 마침내 LPG 가격 인상과 더불어 코로나로 인해 악화된 경제난에 대한 누적된 국민들의 불만까지 겹쳐 3년 후, 2022년 1월 2일에 자나오젠에서의 시위를 시작으로 1월 11일에 완전히 종료되기까지 약 10일간의 항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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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민주화 시위는 2019년 6월에도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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