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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범도 장군과 러시아의 인연과 상세한 독립투쟁기
    내가 갑자기 홍범도 장군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내가 러시아에서 살고 있으며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동유럽 (특히 우크라이나), 중동 일대를 전공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근현대사를 연구하다보면 적백내전은 기본으로 나오고 여기에 연해주, 독립군, 고려인, 소일대립 안 볼 수가 없게 된다. 러시아 관련에, 우리와 연관이 있으니 더 보게된다. 더불어 고려인 강제 이주 때 중앙아시아로 대거 들어왔고 그곳에서 홍범도는 고려인들에게 영웅, 그 이상이었다.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 할아버지들한테 홍범도 장군의 영웅적인 무용담을 듣고 자랐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고려인의 상징이 된 홍범도 장군의 유언에 따라 고국에 유해를 모시는데 2012년부터 동참을 해서 오늘날까지 온건데 러시아학 연구자로써 이같은 상황에 분노와 참담함을 느끼고 있다. 홍범도 장군이 러시아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05년부터였다. 의병활동을 지속하던 홍범도는 1908년 12월 중순 마침내 러시아의 소왕령(蘇王嶺: 니콜스크 우수리스크)에 도착했고 이어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무기와 탄약을 구입해 가고, 또 연해주 지역의 의병부대와 공동보조를 취하며 더 나아가 남한 지역의 의병부대와도 연계하여 대대적 의병전쟁을 전개하기 위해서였다. 이 시기 일본 헌병대 및 일본 육군 정규부대를 상대로 크고 작은 37회의 전투를 벌였다고 알려져 있다. 나라를 잃은 뒤, 의병 항쟁 여건은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이 시기 국내 무장독립운동 단체들의 일반적인 조류에 따라 홍범도 역시 1911년 연해주로 망명했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점으로 하는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해서 수시로 월경해 접경 지대의 친일파 및 일본 군경을 공격하는 게릴라 전을 수행했다. 이후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무너지고 적백 내전이 발생한다. 이 혼란을 이용해 일본군이 연해주를 침략했고 결국 블라디보스톡도 함락된다. 일본군은 이 기회를 이용해 홍범도를 포함한 연해주 소재 조선 무장독립운동 단체를 소탕하려 했다. 이에 대응해 무장독립운동 단체도 적극적으로 일본군과 교전을 벌임과 동시에, 연해주로 내려와 백군 및 이를 지원하는 일본군을 격퇴하고자 내려온 적군을 만나게 되고 몇몇 조선인 공산당원들이 접촉해 옴으로써 홍범도는 이들과 손을 잡게 된다. 결국 탄약도 없고 일본과 싸울 근거지를 잃어버린 홍범도는 무기와 탄약이 풍부하고 자금도 많은 볼셰비키의 지원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볼셰비키 적군의 합류는 홍범도에게 선택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 상태에서 일본군에게 항복하면 매국노라 욕을 먹고 공산당 측의 지원을 받거나 들어가면 빨갱이라 욕을 먹는다. 홍범도를 욕하는 당신들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그리고 자유시 참변에 홍범도가 관여했거나 홍범도가 자유시에서 같은 독립군을 직접적으로 학살했거나, 학살을 지시했거나, 적극적으로 도왔거나, 하는 등의 얘기는 근거 없는 것으로 국방부가 기자회견에서 실토했다. 이후 계속된 일본군의 토벌전 및 만주 군벌인 장작림과의 충돌로 인해 홍범도를 포함한 독립군 세력은 소련 영내로 탈출했다. 경신참변으로 인해 동포들이 몰살당하고 땅을 초토화 되어 독립군은 근거지를 잃고 친일파인 만주 군벌 장작림의 독립군의 진주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만주는 더 이상 항일 투쟁의 기지가 되지 못했다. 제국주의에 탄압받던 소수민족과 연대하겠다며 투쟁을 적극 주장하는 레닌의 소련은 이들에게 매력적인 선택지였을 것이다. 당시 독립군을 이끌던 수장들 상당수가 한글을 아직 떼지 못했거나 겨우 한글을 떼던 사람들이었는데 홍범도의 경우는 청년 시절 신계사에서 지담스님에게 한글을 겨우 떼고 한자 몇 개 아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 정도인데 홍범도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그 이념의 폐해가 무엇인지 알았겠는가? 당시 홍범도의 관심은 오로지 일본과 싸우는거였고 공산주의 사상은 별로 관심도 없었다. 소비에트 적군의 수장 레닌은 당시 민족자결 원칙을 내세우며 약소민족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적군은 독립군에게 신식 무장까지 약속한다. 자금력이 없던 독립군은 적군의 제안을 거절하기 힘들었다. 많은 독립군이 적군에 가담한 이유다. 홍범도 장군에게도 적군이 끈질기게 접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당시 일본이 러시아 백군을 돕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군은 적군편에 섰다. 독립군의 눈에는 일본에 총구를 겨누고 있는 적군이 ‘동지’였던 것이다. 자연스레 적군-독립군 대(對) 백군-일본군의 대결 구도가 형성됐다. 적군은 표면적으로 약소 민족 지원을 내세워 독립군과 공동 전선을 구축한 셈이다. 그러나 1921년, 적군이 갑자기 입장을 바꾸게 된다. 적군이 우위에 있었고, 백군은 궤멸 직전이었다. 적군은 더 이상 독립군의 힘을 빌릴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같은 상황을 파악 못했던 홍범도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독립군의 통합이 마무리되어 항일무장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해석이다. 당시 홍범도에게는 대한의용군, 고려혁명군 그 어느 쪽과도 이해관계가 없었다. 1922년 2월, 홍범도는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의 주최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는데 이는 소련 지도부를 설득해 충분한 지원을 얻어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서였다. 이때 레닌이 트로츠키를 통해 홍범도를 따로 불러 단독 면담을 한 다음 금화와 홍범도라는 이름이 새겨진 은제 마우저 C96 권총을 선물했다. 그리고 독립군에 대한 지원도 약속했다. 독립군 중 트로츠키나 레닌과 단독 면담을 한 것은 홍범도가 유일하며 이때 레닌에게 받은 권총은 현존하지 않지만 권총집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나 레닌이 사망하고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권력 투쟁, 스탈린의 집권이 이어지는 동안 독립군의 지원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들은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본과의 투쟁을 허락했을 뿐, 제대로 된 지원도 해주지 않았고 조선 독립이나 고려 독립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결국 소련은 홍범도와 김경천 등의 독립군 장군들을 이용만 했다. 1922년 소련은 일본과 베이징에서 밀약을 맺고 일본군의 연해주 철수를 조건을 걸었다. 이에 일본도 항일무장투쟁 단체의 해산을 조건으로 걸었다. 이를 받아들인 소련이 항일무장투쟁 단체들을 해산시켰다. 이후 홍범도는 1923년 연해주 남부에서 한인 콜호즈를 비롯한 지역 사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이 때 두번째 부인을 얻어 딸 하나를 두었다. 소련의 연금을 받아 생활하기 위해 1927년 소련 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했다. 홍범도 장군은 강제이주 전까지 원동에서 딸과 사위와 함께 생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가 그의 나이 60세가 다 되었을 때다. 그러나 스탈린에 의해 이루어진 고려인 강제 이주 때, 함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되었다. 이후 키질로르다에 위치한 고려극장에서 고려인 희곡 작가 태장춘의 배려로 수위장을 맡았으며 소련으로부터 연금을 받으며 생활하였는데 홍범도는 매월 80루블의 연금과 50루블의 보수를 받아 넉넉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1936년 기준, 소련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은 150 ~ 200 루블, 연금은 25 ~ 50 루블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1달 수입이 130 루블로 봤을 때, 당시 소련의 평균 임금보다 매우 낮은 편이지만 부양가족이 없었고 수위 자리도 고려인들의 영웅인 홍범도에게 생활비를 챙겨 주기 위해 일부러 마련한 자리였기에 생활에 큰 문제가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키질로르다는 수많은 고려인들이 정착을 한 지역으로 고려인 신문사, 원동조선사범대학, 조선극장, 라디오방송국, 하바로프스크 출판사 조선부 등, 고려인들이 세운 문화기관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홍범도와 자주 교류했던 소설가 김기철에 의하면 이러한 키질로르다의 생활환경이 홍범도의 말년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1941년 대조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 '물자를 아껴 전선의 병사들을 돕자'는 선전활동을 하기도 하였고 <레닌기치>를 읽으며 이웃들에게 전선 소식을 전하거나 직접 글을 투고하여 젊은이들에게 나치 독일을 격파하는데 힘을 보태라며 전쟁 참여를 독려하기도 했다. 이오시프 김이 쓴 <소련한인극단>에 의하면 홍범도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73세의 나이로 소련 정규군에 지원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고 한다. 1942년 4월 홍범도가 몸담고 있던 고려극장이 카자흐 SSR 동부 우슈토베(Үштөбе)로 옮겨간 이후에는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다가 1943년 10월 25일 노환으로 사망했다. 1927년 이후, 그는 공산주의자로 지냈지만 당시 소련의 상황으로 볼 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갈 곳이 없던 홍범도의 입장에서는 소련 잔류의 선택 밖에 없었다. 키질로르다에서도 홍범도는 고려인들 사이에서 파쟁에 참여하지 않고 매우 공평정대하게 행동하여 판결했다. 그 가혹한 스탈린 폭정시기에도 이런 홍범도를 감히 건드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고 한다. 홍범도 장군은 의도치 않게 시대적 비극과 아픔으로 소련에서 공산당에 입당했지만 조선이나 한국에 피해 준 행위를 한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유언에서도 고국에 묻히고 싶어했다. 그러는 상황에서 홍범도 장군을 모셔가더니만 이와 같은 몹쓸 대우를 받고 있는 것에 대해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동포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이들은 고려극장 안에 있는 홍범도 장군의 대형 사진 앞에서 '한일독립전쟁 영웅 홍범도 장군, 모셔갔으면 제대로 모셔라', '홍범도 장군 공산당 이력이 문제면 내 가족과 고려인 동포 50만명도 모국의 적인가'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흉상 이전 반대를 외쳤다. 홍장군은 카자흐스탄 현지 고려인들에게 정신적인 지주다. 박 드미트리 홍범도 장군 기념사업회 카자흐스탄 지회장은 홍범도 장군이 아름다운 해방된 조국의 품에 안겨 영면하시겠다고 생각하면서 마음 뿌듯해했고 한국이라는 나라를 자랑스럽게 느꼈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는 배신감이 느껴진다고 한다. 19세기, 조선 위정자들이 북삼도 주민들을 수탈해 국경 밖으로 살기 위해 연해주로 가서 집단을 이룬게 고려인들의 시작이다. 당신들의 조상들인 조선의 위정자들이 이들을 나라 밖으로 내몰은 셈이고 일제의 부역자로 살기 거부했으며 북한도 받아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공산국가 소련에 살게 됐다. 당신들은 홍범도장군을 개차반으로 만들고 명예까지 모독했으며 공산주의자라고 매도했다. 그러나 당신들이 매도한 홍범도는 고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지만 공산주의자가 되고서도 조선과 대한민국에 피해를 준적 없다. 그리고 그는 고려인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영웅으로 고려인들을 잘 이끌었던 인물이다. 당시 시대적 상황이 그러했기에 계속 홍범도, 고려인 = 공산주의자라고 할꺼면 그렇게 되도록 내몰았던 조선왕조의 후예이면서 나라를 잃도록 방관한 당신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어쨌든 홍범도, 고려인 = 공산주의자 이 공식이라면 어쨌든, 당신의 선조들이 이들을 내몰았고 당신의 선조들 덕택에 나라가 망하여 이들을 지키지 못한 것은 팩트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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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7
  • 지나친 역사 미화를 하는 분들의 마지막 여정
    결국 과도한 환타지의 역사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환상이 깨졌을 때 정해진 곳은 바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사상이다. 왜냐면 사회적으로 퍽퍽한 삶, 자신들을 이꼴로 몰고 간 것을 외세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때부터 적은 자신들이 판단하기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며 믿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서구 세력과 일본이 된다. 서구 세력의 제국주의로 광활한 영역의 대조선의 영토와 활동범위가 줄어들어 한반도로 이주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그런 공통의 적이 미국과 일본이며 그들을 타도하는 것이 민족 주체를 바로 세우고 자신들의 또 다른 새로운 환타지를 심어줄 것으로 믿고 있다. 결국 세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사라지고 주관적인 시선으로 보니 당연히 독선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집과 아집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게 된다. 그러니 6.25 사변을 북침으로 규정하였으며 이들에게 있어 공산주의 사상보다는 미국이나 일본과 싸워 이겼다는 민족 승리 전쟁이라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현재에만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한국의 경우, 조선 시대 후기, 정조대왕이 개혁에 실패한 이후 순조 시대 때부터 정조가 개혁하고자 하여 선발한 인재들을 1801년 신유박해를 통해 천주교 세력 제거를 명분으로 삼아 정략적인 숙청 작업을 개시했다. 정조가 총애하며 귀하게 여겼던 개혁 신료들을 천주학쟁이로 몰아 처형했으며 체제공 선생의 묘가 파묘되고 정약용과 같은 실학자들은 10여 년 동안 남쪽의 섬 지역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그와 더불어 흉년과 가뭄, 홍수가 지속되었고 북삼도(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백성에 대한 차별이 극심화되니 1811년 홍경래의 난을 시작으로 각 민란이 발생해 조선을 뿌리채 흔들어 놓았다. 조정에서는 당쟁이 마무리되고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하여 백성들은 피폐해지고 매관매직이 성행하였으며 양반이라는 신분을 돈을 주고 샀기 때문에 지배층들이 늘어나 피지배층을 학대하니 그 헐벗은 군중들은 각지에서 민란을 일으키게 된다. 진주민란, 그리고 19세기 말에 동학 운동의 시발이 되는 고부 민란이 터진 것도 그러한 배경들부터인 것이다. 이 때 헐벗었던 사람들, 특히 북삼도 지역 사람들은 정부의 수탈을 피해 러시아나 만주로 도망가,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 이것이 1대 조선족과 1대 고려인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1910년에는 나라마저 잃으니 이때 연해주로 건너가서 살고 있던 고려인들은 나라 없는 무국적자 신세가 되어버렸다. 나라가 책임지지도 않았고 수탈했으며 조선 왕조 내내 차별과 멸시, 그리고 피폐해진 사회 및 혼란기를 겪은 자들에게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정부에서 자신들을 괴롭히며 수탈한 요인보다 조국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에 대한 증오였다. 그런 배경으로 독립군이나 의병에 들어가 일본군과 싸우는 등 민족주의의 기치 아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숭고한 희생을 했다. 우선 조선 정부보다 자신들을 이렇게 만든 것이 일본 제국 때문이라는 인식이 자리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싸워도 조국은 해방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점점 지쳐갔고 때마침 러시아에서는 적백내전이 터지며 공산당과 왕당파의 치열한 전쟁이 연해주에도 벌어지자 독립군과 고려인들은 적군과 백군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디. 일본군이 러시아 백군인 왕당파를 지원했기 때문에 독립군들이나 당시 고려인 1~2세대들은 볼셰비키 공산당인 적군을 지원하는 것을 선택하여 볼셰비키와 함께 일본 제국 및 백군과 싸우게 된다. 볼셰비키가 동료가 된 과정에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며 신분과 계급에 상관없다는 공산주의 핵심 사상은 내내 조선 말기부터 차별과 멸시, 수탈을 당해 헐벗은 이들에게 있어 분명히 매력적인 사상이었고 이들에게도 평등이라는 사상이 처음으로 뿌리깊게 내려왔다. 게다가 사적 소유관계를 배척하여 모두가 공산으로 나누어 쓰고 부르주아의 것을 빼앗아 인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줘야 한다는 투쟁적인 선동은 수탈만 당해온 이들에게 복수심과 공격성 충만하게 만들었다. 이어 집단 봉기를 통해 국가권력을 직접 타도하고 국가기구를 장악하여 사회 · 경제적 변혁을 추구한다는 달콤한 사상 또한 이들을 쉽게 공산주의에 물들게 했다. 백성들을 이같이 공산주의자로 만들고 북한이라는 나라를 만들어 분단의 아픔을 겪게 했으며 6.25 동란으로 수많은 동족들의 피를 뿌린 것에 대해 애초부터 헐벗고 굶주리며 조선 후기 시대의 분란을 다스리지 못한 조선 왕실에 그 근본적인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확실한 책임 소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조선론자들은 그와 같은 책임론을 부정하며 모든 원인은 미국과 일본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들은 6.25 사변을 미국의 북침으로 규정했고 공산당들은 남조선을 미국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인민해방전쟁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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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3
  • 정율성과 홍범도 장군을 비교하는 자들에 대한 비판
    정율성과 홍범도 장군을 비교하는 자들이 있어 개탄스럽다. 정율성은 친북 중국인이다. 그는 1939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고 '팔로군 행진곡'(현 중국인민해방군진행곡)을 작곡했다. 1947년 평양으로 들어와 조선인민군 구락부장을 지냈고, 인민군 협주단을 창단하여 단장이 됐고 6.25 전쟁 중인 1950년 9월 중국으로 갔다가, 같은 해, 12월 중국 인민지원군의 일원으로 북한에 돌아와 전선 위문활동을 했다. 우리 국군들을 죽이는 북한군이나 중공군을 돌아다니며 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전선 위문공연을 했던 것이다. 이 인물은 고향 광주를 일찌감치 등지고 중공과 북한의 앞잡이가 되어 국적까지도 바꿨다. 홍범도 장군은 독립군이 반강제적으로 무장해제된 뒤, 1927년 공산당원증을 받고 소련 국적자가 됐다. 당시에는 나라가 없었을 때고 적국인 일본인이 되기 싫어 그냥 소련 국적자가 됐다. 그리고 공산당원으로써 그가 한 것은 고려인의 영웅이자 정신적 지주로 고려인을 보살폈던 것이다. 카자흐스탄 키질로르다에 가서 고려인들을 인터뷰 해보면 장군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떻게 고려인들을 보살폈는지 증언들을 들을 수 있다. 당시 고려인들은 소련으로부터 불합리한 대우를 받고 강제이주까지 당했지만 늘 공명정대한 홍범도 장군을 그 악독한 스탈린과 볼셰비키들도 건들지 못했다. 홍범도 장군과 함께한 고려인들은 키질로르다를 고려인들의 도시로 만들었다. 소련 정부가 홍범도를 제거했다면 아마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은 폭동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당원으로써 한 것은 일본과 동맹을 맺은 나치 독일을 응징해야 한다고 고려인 젊은이들에게 참전을 독려한 것, 그 정도다. 우리에게 정작 홍범도 장군은 피해를 준적이 없다. 북한에 협력한적도, 중공에 협력한적도 없다. 김일성을 만난적도 없으며 편지도 주고 받은적 없다.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된 이후, 고려공산당들도 만난적 없고 오직 고려인들만 돌봐오셨다. 장군은 6.25 발발 7년 전에 이미 돌아가셨으며 고국에 묻히고 싶어하셨다. 반면 정율성은 우리 국군들을 죽이는 북한군이나 중공군을 돌아다니며 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전선 위문공연을 하면서 우리에게 피해를 주었고 고향인 광주를 등졌다. 홍범도 장군과 달리 정율성은 마음만 먹으면 해방된 대한민국에서 대한민국 국적자가 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런데도 홍범도 장군과 정율성, 비교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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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28
  • 국내 주요 기업,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존재하는 해외 법인들
    바이든 대통령이 서방의 우방국들과 함께 고강도의 러시아 무역 제재를 승인한 터라, 러시아에 진출한 기업들이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현재 국내 대기업이 러시아에 설립한 해외법인은 53개로 파악됐다. 러시아에 설립된 해외 계열사 중에서 현대자동차 그룹이 18곳으로 가장 많았다. 그 뒤를 삼성과 롯데가 각 9곳이었다. SK와 CJ, 두산, KT&G 등은 각각 2개 법인을 러시아에 세워둔 것으로 조사되었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우리 기업 13개에 주재원 43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러시아에 존재하는 법인 기업 53개라면 우크라이나는 13개 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우크라이나에 세워진 법인보다 41곳 많은 숫자다. 단순 계열사 진출 현황 숫자만 놓고 보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보다 4배 이상 많았다. 그만큼 국내 대기업들이 우크라이나 보다 러시아 시장을 더 주목하고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룹별로 살펴보면 현대자동차 그룹이 18곳 (34%)으로 최다였다. 러시아에 배치한 해외 계열사 3곳 중 1곳꼴로 현대자동차 그룹이 압도적이었다. 현대자동차가 러시아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놓고 있었는지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러시아에 진출한 국내 대기업 해외 법인의 경우 향후 미국과 동맹국, 유럽 등이 러시아를 대상으로 고강도 금융 및 경제제재 등이 본격 진행되면 공장가동 중단 등 직접적 경제 타격을 볼 가능성이 높다. 특히 이 전쟁이 장기전으로 접어들 경우 석유와 천연가스 등의 수급이 불안정해져 국내 기업들도 산업분야 곳곳에서 경제적 손실이 불가피할 것은 불문가지다. 사세가 이와 같은데 국회 외교통일위원회가 지난 2022년 4월 11일 오후 5시에 젤렌스키 대통령이 화상 연설을 진행하는 방안을 우크라이나 측에 제안했다. 우리가 우크라이나로부터 제안을 받은게 아니라 제안을 했다는 것이 팩트다. 기업, 유학생, 각 코트라 주재원들, 교민들, 일반 비즈니스맨들과 각 학계의 연구자들, 그리고 15만 명 가까이 되는 고려인들까지 한러 수교 30년 동안 공들여 쌓아왔던 러시아와의 관계는 일본처럼 파탄나기 직전까지 몰고 가고 있다. 야뽄스끼 모레 (일본해)와 다케시마라고 표기까지 해놓은 친일국가에 북한 ICBM 미사일 엔진 기술까지 전수하여 우리의 안보까지 위협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수장에게 화상 연설을 시키겠다니, 이는 대놓고 러시아와 적대하겠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비우호국가로 찍혀 러시아의 강력 제재를 받으며 우리 기업과 교민들이 러시아 정부로부터 불이익을 당하거나 러시아로부터 제대로 된 차단을 당할 수 있는 명분을 주고 있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교민 수가 400명이 안되지만 러시아에는 3,500명의 교민들이 산다. 숫자에서 우선 비교가 안 되고 기사 말미에 12,000명 가까이 되는 고려인 동포 중 1,000여 명이 고향을 떠나 주변국으로 피신 중이라고 했었다. 반면 러시아에는 15만 명이 산다. 숫자에서 상대가 안 되는데 이렇게까지 러시아를 자극하는 이유는 무엇인지가 궁금하다. 우리의 한, 미, 일 공조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감성적인 사고는 버리는게 좋다. 국제적인 이득에 따라서 언제든지 합종연횡(合從連衡)이 가능한게 국제 관계의 진리다. 그 관계는 한, 미, 일도 다르지 않다. 외통위는 이러한 행위들에 집중하는 것보다 동북아시아 문제나 좀 신경쓰는게 좋다. 감정적으로 안타까워 하는거와 실전에서의 국제 관계 문제는 전혀 다른 얘기다. 우크라이나는 9,000km나 떨어져 있고 러시아는 동해 바다 건너 비행기로 2시간 거리다. 우리 대한민국은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한다.
    • 칼럼
    • Nova Topos
    2024-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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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 주요 기업,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존재하는 해외 법인들
    바이든 대통령이 서방의 우방국들과 함께 고강도의 러시아 무역 제재를 승인한 터라, 러시아에 진출한 기업들이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현재 국내 대기업이 러시아에 설립한 해외법인은 53개로 파악됐다. 러시아에 설립된 해외 계열사 중에서 현대자동차 그룹이 18곳으로 가장 많았다. 그 뒤를 삼성과 롯데가 각 9곳이었다. SK와 CJ, 두산, KT&G 등은 각각 2개 법인을 러시아에 세워둔 것으로 조사되었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우리 기업 13개에 주재원 43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러시아에 존재하는 법인 기업 53개라면 우크라이나는 13개 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우크라이나에 세워진 법인보다 41곳 많은 숫자다. 단순 계열사 진출 현황 숫자만 놓고 보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보다 4배 이상 많았다. 그만큼 국내 대기업들이 우크라이나 보다 러시아 시장을 더 주목하고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룹별로 살펴보면 현대자동차 그룹이 18곳 (34%)으로 최다였다. 러시아에 배치한 해외 계열사 3곳 중 1곳꼴로 현대자동차 그룹이 압도적이었다. 현대자동차가 러시아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놓고 있었는지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러시아에 진출한 국내 대기업 해외 법인의 경우 향후 미국과 동맹국, 유럽 등이 러시아를 대상으로 고강도 금융 및 경제제재 등이 본격 진행되면 공장가동 중단 등 직접적 경제 타격을 볼 가능성이 높다. 특히 이 전쟁이 장기전으로 접어들 경우 석유와 천연가스 등의 수급이 불안정해져 국내 기업들도 산업분야 곳곳에서 경제적 손실이 불가피할 것은 불문가지다. 사세가 이와 같은데 국회 외교통일위원회가 지난 2022년 4월 11일 오후 5시에 젤렌스키 대통령이 화상 연설을 진행하는 방안을 우크라이나 측에 제안했다. 우리가 우크라이나로부터 제안을 받은게 아니라 제안을 했다는 것이 팩트다. 기업, 유학생, 각 코트라 주재원들, 교민들, 일반 비즈니스맨들과 각 학계의 연구자들, 그리고 15만 명 가까이 되는 고려인들까지 한러 수교 30년 동안 공들여 쌓아왔던 러시아와의 관계는 일본처럼 파탄나기 직전까지 몰고 가고 있다. 야뽄스끼 모레 (일본해)와 다케시마라고 표기까지 해놓은 친일국가에 북한 ICBM 미사일 엔진 기술까지 전수하여 우리의 안보까지 위협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수장에게 화상 연설을 시키겠다니, 이는 대놓고 러시아와 적대하겠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비우호국가로 찍혀 러시아의 강력 제재를 받으며 우리 기업과 교민들이 러시아 정부로부터 불이익을 당하거나 러시아로부터 제대로 된 차단을 당할 수 있는 명분을 주고 있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교민 수가 400명이 안되지만 러시아에는 3,500명의 교민들이 산다. 숫자에서 우선 비교가 안 되고 기사 말미에 12,000명 가까이 되는 고려인 동포 중 1,000여 명이 고향을 떠나 주변국으로 피신 중이라고 했었다. 반면 러시아에는 15만 명이 산다. 숫자에서 상대가 안 되는데 이렇게까지 러시아를 자극하는 이유는 무엇인지가 궁금하다. 우리의 한, 미, 일 공조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감성적인 사고는 버리는게 좋다. 국제적인 이득에 따라서 언제든지 합종연횡(合從連衡)이 가능한게 국제 관계의 진리다. 그 관계는 한, 미, 일도 다르지 않다. 외통위는 이러한 행위들에 집중하는 것보다 동북아시아 문제나 좀 신경쓰는게 좋다. 감정적으로 안타까워 하는거와 실전에서의 국제 관계 문제는 전혀 다른 얘기다. 우크라이나는 9,000km나 떨어져 있고 러시아는 동해 바다 건너 비행기로 2시간 거리다. 우리 대한민국은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한다.
    • 칼럼
    • Nova Topos
    2024-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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