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9-11(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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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는 일본열도와 다른 종족이자 세력으로 동아시아에서 주로 인식되어 왔다. 일본 본토에서 오키나와로 이주해온 야마토(大和) 민족의 경우 일본 본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이들과 류큐인에 동화된 이들로 분류되어 진다. 그러나 야마토 민족 이전의 류큐인들은 토착민들과 오스트로네시아 계통 대만 원주민들이 들어와 혼혈되어 나타난 종족들을 흔히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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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与那国島 海底遺跡, 출처 : 日本の不思議スポット10, Posted by : あやみ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전 국민이 성씨를 가지게 될 때 류큐인들은 일본 본토 야마토 민족들과 철저히 구별되었다. 그리고 본토인과의 차별하기 위해 일본 본토와는 다른 성씨를 쓰도록 강요받았다. 거주지가 오키나와이지만 아라가키(新垣), 미야자토(宮里), 가네시로(金城) 등이 전형적인 오키나와 성씨이면 토착 류큐인으로 구별되며 사토(佐藤), 야마다(山田), 이토(伊藤), 사이토(斎藤) 등 전형적인 일본 본토 성씨로 나타나고 있으면 이들은 일본 본토에서 이주해 온 야마토 민족의 후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류큐인의 유전자 중 적지 않은 수를 차지하는 조몬인 역시 오키나와에 비교적 후대에 정착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후 12세기 경 바다 건너로부터 선진 문물이 전파되어 농경 문명사회인 구스쿠 시대가 시작되었는데, 당시의 유골 분석을 통해 이 시기에 도래인들이 많이 건너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류큐 열도에 원래부터 거주하고 있던 선주민들과 도래인들이 융합하여 지금과 같은 유전자들이 검출되었다는 것이다.

 

도쿄대학과 종합연구대학원대 등으로 구성된 연구팀이 2012년 10월 일본인의 뿌리에 대해 DNA 분석에 대해 1인당 최대 90만 개소의 DNA 변이를 해석했고 지금까지 공개되었던 일본 본토 출신자와 아시아인, 서구인 약 460명분의 DNA 데이터에다 아이누족과 오키나와 출신자 71명분의 데이터를 추가해 분석했다. 이와 같은 연구결과 아이누족은 유전적으로 오키나와 출신자와 가장 가까운 것으로 나타난다.


그 다음이 일본 본토 출신자, 한국인, 중국인의 순이었다. 또 일본 본토 출신자들은 아이누족이나 오키나와 출신자들보다 한국인, 중국인과 유전적으로 더 가까운 것으로 분석되었다. 아이누족은 얼굴 윤곽이 뚜렷하고 백인을 닮았으며 오키나와 원주민은 피부가 검고 동남아시아 등 남방계를 닮아 외모상으로는 서로 뚜렷한 차이가 나고 있다. 


특히 일본에서 기록한 류큐인은 전형적으로 갈색 피부의 남방 인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보통의 오스트로네시아 인들과 비교해 볼 때 피부가 하얀 편으로 월인(越人)이나 북방인과 유사해보이나 오키나와가 매우 더운 지방이고 짧은 옷을 입어 더 탔을 뿐이다. 류큐인들은 유전적으로 볼 때 조몬 인과 야요이인들의 혼혈인 야마토인과의 혼혈도 존재하기 때문에 류큐인은 외모만으로는 본토 일본인들과 구별하기 힘들다. 


그러나 유전 형체로 볼 때 조금 더 남방계에 가깝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오키나와어가 오스트로네시아어계로 분류되어 있어 이와 같은 오키나와 남방인 주류설은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게다가 오키나와에는 해양고고학적으로 볼 때 요나구니지마(与那国島) 해저유적이라는 곳을 주목할 만 하다. 많은 한반도 마고설을 주장하는 분들의 대표적인 골자가 한반도 서남해 마고 존재설이다. 그 근거 중에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바로 이 오키나와 요나구니지마(与那国島) 해저유적이다. 많은 일본 학자들이 뮤 대륙 도시가 발견되었다고 소란을 일으켰지만 해저에 가라 앉아 있는 관계로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지 않다.


14세기에 류큐국 유력자가 해양무역활동 중에 중계점으로 개척하기 시작한 것이 알려진 최초라고 한다. 1522년 류큐 왕국에 복속하기 전까지는 상아이 이소바(실존인물인가는 확실치 않음)라는 여자 족장이 다스리는 작은 왕국이었다고 한다. 19세기에 류큐 왕국이 류큐 처분으로 일본령이 되고 대만도 마찬가지로 일본 령이 되면서 대만 주민과 설탕, 쌀 등의 밀무역이 이루어지면서 인구가 2만 명까지 늘었다. 1945년에는 미 군정이 실시되고 대만이 중화민국에 반환되면서 무역이 끊기고 주민수도 줄어들었다. 1972년 오키나와현이 일본으로 반환되면서, 오키나와현에 속하게 되었다. 


1986년에 잠수부가 해적유적으로 추정되는 지형을 발견했다고 하여 주목을 끌었다. 해양고고학자인 션 킹슬리는 이 구조물 중, 도랑의 내부에 두개의 90도 각도와 직각형태의 모서리가 있는 두 개의 거석이 존재한다는 점을 들어, 이는 건설시기가 알려지지 않은 오키나와 무덤들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구조와 흡사한 인공물이라 주장하였으나, 이 거석의 직각모서리는 기존의 자연구조물을 인공적으로 다듬은 것에 지나지 않는 다는 의견도 많다. 일본의 고고학자인 기무라 마사키는 암석표면에 동물과 사람형상의 그림을 발견하였고 한 건조물은 이스터 섬의 모아이 석상과 흡사하다 주장하였다. 


또한 일부에서는 요나구니 구조물이 세계 다른 고대 유적의 구조물과 흡사하며 이처럼 독특한 구조물이 한 곳에만 대량으로 자연생성되기 어렵다는 점을 들어 이 구조물이 인공으로 제작되었다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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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인과 일본인의 비교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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