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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그래픽이다.(그래픽=저널인뉴스)

 <‘라떼’라는 유령은 사라져야 한다.>


누구에게나 역사는 존재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나 때는 말이야!”라는 말로 과거를 회상한다. 과거의 경험담이 먹히는 시대도 있었다. 농경시대의 삶이 그랬다. 그 시대의 노인들을 자연과 함께 살아야 했고, 자연에 순응하면서 터득한 삶의 지혜를 몸소 익힌 분들이었기 때문에 그 사회에서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노인들은 존경은커녕 ‘꼰대’라는 말로 비하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무엇이 문제일까? 삶의 속도가 과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변화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의 노인들은 과거에 궁핍한 시대를 살았고, 그 궁핍을 권위라는 힘으로 극복하고 오늘을 있게 했던 사람들이었다. 7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나를 포함해서 나의 선배 세대들 모두에게 해당한다. 


나는 김천이라는 지방의 소도시에서 자랐기 때문에 초등학교 시절에는 양철 도시락과 책을 보따리에 담아 어깨에 메고 얕은 산을 넘어 학교를 다니기도 했고, 새마을운동의 전신인 재건국민운동을 보며 자랐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에는 국민교육헌장 전문을 외우기도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나는 2km 남짓한 거리를 걸어서 학교를 다녔지만, 시골에 사는 친구들은 기차를 타고 통학하기도 했고, 먼 거리를 자전거로 통학하던 친구들도 있었다. 식목일이면 전교생이 학교 뒷산에 올라 나무를 심었고, 송충이 잡기, 쥐를 잡아 꼬리 가져오기, 모내기 지원 등의 일도 기억에 남는다. 국가적인 행사가 있는 날이면, 전교생이 거리에 나와 태극기를 흔들었던 시대였다.


이러한 어린 시절을 뒤로하고 80년대 군복무와 대학을 졸업한 후 직장을 다니면서 나의 생활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70년대 후반의 격렬했던 대학가의 반 정부시위와 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 등 격동의 세월을 뒤로 하고 회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 컴퓨터라는 기계도 놀라웠지만, 로투스라는 프로그램으로 계산을 하는 프로그램도 놀라웠다. 하지만 그것도 곧바로 엑셀이라는 프로그램으로 바뀌어 숫자를 계산하는 일들은 더욱 쉬워졌다. 세상은 그렇게 급변했었다. 외국계 회사에 다녀서 그런지는 몰라도, 컴퓨터에 관한 교육과 리드쉽에 관한 교육 등 다양한 교육과 경험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되었다. 내가 경험한 새로운 세계는 획일성의 강조가 아니라 다양성을 인정하는 포스트모던한 사회 경험이었다. 


하지만 내 주의의 나와 유사한 세대를 살아왔던 사람들은 아직도 획일성에 대한 믿음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바로 ‘라떼’라는 유령들이다. 사회 곳곳에 그러한 유령들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배회하면서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물론 오늘날에도 우리는 ‘라떼’라는 유령이 필요할 경우도 있다. 하지만 등장하지 않아도 되는데도 지나치게 자주 등장하는 경우가 문제가 된다. 역사는 오늘의 삶과 미래에 도움이 될 경우에만 역사로서의 가치가 있을 뿐이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후에 안세영 선수가 인터뷰에서 밝힌 소신 발언으로 한때 사회가 시끄러웠다. 그는 선수들의 부상과 관련하여 협회 차원에서의 지원이 부족했다는 소신 발언을 했다. 그에 대해서 “운동선수가 그거 하나 참지 못하고...”라는 유인촌의 발언이나, “안세영 실망스럽다. 혼자 금 딴 건 아니잖나”라는 방수현의 발언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그것들 역시 ‘라떼’들의 유령들이다. 물론 우리는 짜깁기에 능숙한 싸구려 언론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진실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글을 쓸 때도 어떤 발언을 인용할 경우에는 그 발언의 맥락을 반드시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유인촌의 발언은 신문 기사를 통하여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방수현의 말에 대해서는 신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제가 생각할 때는 협회나 시스템 이런 것들이 조금 변화되어야 하는 건 맞지만, 안 선수 본인이 혼자 금메달을 일궈낸 건 아니지 않나?” 이것이 방수현이 한 말이다. 하지만 짜깁기 기사는 이 말의 앞부분은 생략했다. 방수현의 발언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안세영 선수가 “내가 혼자 금메달을 땄다” 혹은 “내가 금메달을 딴 것에 협회가 기여한 일은 전혀 없다”라고 하지 않았지 않은가? 안세영 선수는 협회의 선수 관리의 문제점을 지적했을 뿐이다. 만약 안세영 선수의 소신 발언에 진정성이 있다면, 협회가 변화하면 된다. ‘라떼’라는 유령은 기득권이라는 유령의 탈을 쓰고 등장하기도 한다. ‘라떼’라는 유령은 기득권의 꼬리를 붙잡고 싶어 한다.


협회의 중심은 선수이다. 선수가 중심이고 협회는 선수를 위한 조직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역전이 되어 협회가 중심이 되었고, 선수는 협회의 도구로 전락하여 버렸다. 100여 년 전에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외친 것도 그와 유사한 병폐를 깨어부수기 위한 것이었다. 즉 플라톤적인 이원론의 이데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신이라는 형이상학적 무거움이 삶을 나약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삶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신이라는 형이상학적 무거움을 벗어버려야 했었다. 그것이 니체의 근대성 비판의 핵심이다. 니체의 외침은 인간의 삶, 생명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사회에서 인간의 삶이 위축되고, 인간이 죄인으로 전락되고, 삶에 대한 힘에의 의지가 소진되어 메카당스한 병든 사회를 고발하기 위한 외침이었다. 안세영의 소신발언도 그와 유사했을 것이다. 그는 선수가 중심이 되는 협회를 만들고 싶어했을 것이다.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의 일부를 인용한다. “우리는 삶과 행위를 위해서 역사를 필요로 하지, 삶이나 행위를 편안하게 기피하기 위해서 또는 이기적인 삶이나 비겁하고 나쁜 행위를 미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역사가 삶에 봉사하는 만큼 우리도 역사에 봉사할 것이다.” “불면과 되새김질, 역사적 의미에도 어떤 한도가 있는데, 이 한도에 이르면 인간이든 민족이든 문화든 살아 있는 모두 해를 입고 마침내 파멸한다.” “삶을 위해 과거를 사용하고 이미 일어난 것에서 다시 역사를 만드는 힘을 통해 비로소 인간은 인간이 된다. 역사의 과잉 속에서 인간은 다시 인간이기를 중지한다.” 현재의 삶을 파괴하는 과도한 역사에 대한 집착을 경계하는 말이다. 젊은 세대의 미래에 방해가 되는 역사의 과잉은 신의 죽음처럼 사라져 버려야 하고, 이제는 미래를 이끌어 나갈 젊은이들의 삶의 명랑성을 되찾아야 한다. ‘라떼’의 유령은 젊은이들의 미래를 위해 이제 사라져야 한다. 사라짐은 침묵의 지혜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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