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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唐)나라 고선지(高仙芝) 서역 원정과 위구르 제국의 지배기 및 페체네그 족의 서방 이동
    712년은 당나라 현종(玄宗, 712~762)이 즉위한 시기로 이 때부터 당나라는 태종 이후 두 번째 전성기인 개원의 치(開元之治)를 맞이하지만 중앙아시아에 분포되어 있던 유목민족들의 침략이 강해지던 시기이기도 했다. 721년 티베트에서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토번(吐番)이 침략하여 당나라 서쪽 변경의 성들을 함락했다. 그러나 당시의 유격장군이던 고선지(高仙芝)가 토번을 격퇴했고 토번군을 추격하여 타클라마칸 사막 서쪽까지 침공했다. 이 때부터 고선지의 서방 원정이 시작된다. 고선지는 파미르 고원을 넘어 서역으로 침공했고 당시 돌궐 제2 제국은 고선지의 침입에 당황하여 몽골 동부에서 서역으로 군을 이동시켰으나 고선지는 서역의 여러 나라들과 캉글리 등을 약탈한 이후, 실크로드를 따라서 장안으로 돌아갔다. 고선지의 파미르 원정은 불과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서역을 정벌한 것이어서 이는 중앙아시아 역사에 있어 여러 의미를 갖게 했다. 서역의 여러 국가들로 하여금 조공을 받게 했으며 이러한 공로로 인하여 747년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의 도독으로 승격했다. 당시 토번과 연결되어 있던 소발률(小勃律)을 격파하고 그 왕을 사로잡았다. 이 공로로 같은 해, 안서사진절도사(安西四鎭節度使)로 임명되었다. 이와 더불어 당나라 조정에 조공을 바치지 않는 호탄 왕과 토번의 군대를 격파하고, 750년에는 파미르 고원을 넘어, 서쪽 투르키스탄과 타슈켄트까지 점령했다. 이 때 캉글리를 비롯한 서역 민족들과 소그드 인들은 대거 약탈을 당했고 이 때의 고선지는 서역 민족들과 돌궐 제2 제국에게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같은 해에 쿠차(邱差)와 그 왕을 사로잡고 쿠차에서 현 우루무치에 이르기까지 30여 도시의 재물을 약탈했으며 이 때 서역에 속한 36개국이 당나라에 조공하게 되었으며 돌궐 제2 제국의 세력이 급격히 쇠퇴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발흥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슬람 제국의 압바스 왕조는 서(西)투르키스탄에 진출해 있었는데 이들은 돌궐과 키르기스, 서역 민족들과 연합하니 15만 대군이 모였다. 아부 무슬림(Abu Muslim) 카라시니(Karasini) 총독은 이들 연합군을 파견하여 탈라스 강가로 진출하게 했다. 751년 고선지는 탈라스 강가로 진격하여 이들 연합군과 교전을 벌였다. 그러나 고선지의 당군은 숫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해 대패했고 당군 3만 중 2만의 군사적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당나라 황실에서 그 동안 고선지가 세웠던 전공이 워낙 컸기 때문에 패전에 대한 책임을 묻지는 않았다. 고선지는 이후 755년 안녹산이 낙양을 점령하고 난을 일으키는 상황에서 진압 명령을 받아 중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안서도호부에 소속되어 있던 서역 민족들은 일거에 독립하게 되었으나 이전과 같은 활발한 중개 무역을 하지 못했다. 이는 고선지의 원정으로 인하여 서역과 돌궐 제2 제국의 세력이 약해짐에 따라 오늘날 신강 지역의 위구르 족이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위구르 족은 서역 민족들의 도시들을 접수한 후 호라산 서쪽에서 진군하는 이슬람 세력의 서진을 저지하였다. 그러나 위구르는 호라산 일대로 들어가지 못했고 이 지역의 책임자였던 아부 무슬림은 옛 부하였던 알 바스라(Al-Basra)의 모함을 받고 결국 참수당해 중앙아시아에 대한 압바스 왕조의 지배권이 종식되었다. 탈라스 전투에서의 격전은 당시 포로가 된 당나라 병사들을 위구르 족이 재 탈취하는데 성공했으며 여기에 살아남은 자들이 제지기술자를 통해 서방에 제지기술이 전해졌다. 당시 위구르 족의 쿠틀룩 빌게 카간(Kutlug Bilge Kagan)은 셀렝게 강에서 신강 지역까지 많은 도시들을 섭렵하고 744년에는 돌궐 제2 제국을 침입하여 동돌궐을 정복했다. 이후 755년에는 서돌궐마저 공격하여 정복했고 이로써 돌궐 제2 제국은 멸망했다. 돌궐 제2 제국이 멸망함에 따라 그들의 지배에 있었던 서역의 모든 도시들은 위구르 제국에 의해 지배되었고 위구르 카간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게 된다. 이는 곧 서역 민족의 힘이 다했음을 의미한다. 세력이 약해진 서역 민족은 이후 위구르의 지배를 받았고 일부는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압바스 왕조에 조공했다. 그러나 서역 민족들은 9세기 초, 키르기스의 세력이 강력해지면서 상업 물자를 강점하고 그러면서 유목 생활을 할 수 있는 가축들을 약탈하자 당시 위구르 제국의 세력이 많이 약해져 있는 상황이라 서역 민족들을 보호할 수 있는 여력이 거의 없었다. 특히 위구르 제국은 카간의 재위를 둘러싼 내분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따라서 키르기스 족은 이러한 위구르의 약점을 간파하고 지속적으로 위구르의 국경 지대와 서역 민족들을 노략질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의 오구즈 계열의 민족들은 점차 페르시아 지역으로 남하하고 있었고 서역 민족들은 주변의 외적들에게 침공 받을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서역 민족 중에 유목에 주로 경제생활이 치중되어 있는 민족들은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때 캉글리의 민족들도 카스피 해 북안의 우랄 강으로 이동해 정착했다. 그리고 볼가 강 동안 지역까지 세력을 넓게 분포하면서 이들 민족을 페체네그(Pechenek)라 하였다. 페체네그 어를 사용했고 이를 사용하는 언어가 비록 알타이어계에 속하였지만 페체네그의 볼가 강 유역의 정착화와 슬라브 인과 혼혈화가 진행되면서 페체네그 어가 여러 언어로 섞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카스피 해 북부 지역에 하자르 제국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공격하여 영토를 넓히는 것이 필요했다. 따라서 페체네그는 하자르 제국 동부 지역을 정복하고 볼가 강을 중심으로 슬라브 인과 마주하게 된다. 페체네그는 약 1세기 동안 볼가 강을 중심으로 슬라브 인과 전쟁도 벌였지만 한편으로는 화해하기도 하면서 슬라브 인과 혼혈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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