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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세기 이후, 동아프리카에 진출한 이슬람 및 현지인 & 아랍인의 무역 거래의 역사
    15세기 무렵에 이르자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 페르시아 지역의 사치성 상품들에 대한 유럽의 수요가 늘어나고 있었다. 특히 유럽 대륙에서 아프리카와 멀리 인도, 동남아시아의 후추와 향료 등이 요구되었으며, 아라비아 반도는 당시 극동,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와 지중해와 접하고 있는 국가들 사이에서 주요한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다. 중국의 비단, 인도의 면직물, 식물로서 그 의학적인 특성 때문에 가치가 있는 중국산 대황(大黃), 보석류, 후추, 열대 상록수로, 향신료와 약용으로 사용된 육두구(肉荳) 씨, 육두구 씨로 만든 향미료, 생강, 그리고 정향나무의 꽃봉오리를 말려 향료로 사용하고 있는 정향(丁香) 등이 해로를 통하거나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들에 의해 아라비아로 운반되었고, 혹은 해상 운송 권을 독점하고 있던 아라비아 인들에 의해 홍해로 이동되어져 아라비아로 운송되었다. 아라비아 지역은 동서 교역에 있어서 주요한 시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아라비아 지역은 해마다 동아프리카 해안으로 많은 배들을 내려 보내어 구매자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끌었던 안장용 표범 가죽, 철, 그리고 기장을 포함하여 상아, 노예, 향료, 별갑, 동물 가죽 등의 장사를 지속적으로 벌였다. 아프리카에서는 상아와 노예들의 주요 원산지였던 반면에 당시 유일하게 동아프리카에서 획득할 수 있었던 향신료는 유향(乳香)과 계피, 사탕수수 정도 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말라카 군도(Malacca Islands)에서 나는 정향과 인도 산 후추와 같은 향신료는 극동 지역인 중국의 항구들로부터 얻어졌으며, 아라비아와 동아프리카의 상인들은 이들의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판매점과 제품 공장을 얻기 위해 현지의 통치자들에게 돈을 지불해 임대하는 조건으로 취득했다. 동아프리카 무역에서 향수의 원료인 용연향(龍涎香)과 금은 상당한 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교역의 중심지는 짐바브웨(Zimbabwe)로 가는 가장 가까운 항구인 소팔라(Sofala)로 기록되었다. 상당한 양의 해양 선박을 소유하고 있었던 인도인들도 이러한 향료와 황금 무역에 참여했다. 중세 말기에 이르러 인도와 동아프리카 간의 무역 관계는 동아프리카와 페르시아 만 사이의 무역만큼 중요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인도인들은 아마도 금융과 소매 무역을 취급하는 것에 상당한 전문가였던 것 같다. 그에 대한 이유로 그들이 아라비아 인과는 달리 오랫동안 확실한 능력을 보여 준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인도인들과 아라비아인들은 해안 배경에 펼쳐진 그 광대한 대륙을 탐험하려는 욕구를 보여 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어떠한 위험을 감수하는 탐험보다는 안정적으로 거래하는 사업에 관심이 더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가져온 상품들인 구슬, 유리, 금속 세공품들, 그리고 천 등을, 내륙으로부터 획득한 상아, 용연향, 노예, 그리고 금과 교환하는 사업 등으로 만족했던 것이다. 인도양에서 무역선으로 사용된 선박은 이미 앞서 언급한 바 있는 한 쪽짜리 돛이 달린 범선 다우(Dhow) 선이 활용되었다. 그 규모는 한두 명이 탑승이 가능한 소형 선박에서, 최고 400톤급의 대형 선박까지 상당수 건조되었다. 해안가의 아라비아 인들은 아프리카 원주민들과 결혼하였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아라비아 부계와 아프리카 모계의 스와힐리(Swahili) 인들이 생겼고 이들은 이슬람교 신앙과 아라비아 인들의 상업 본위의 생활양식을 공유하게 되었다. 아라비아 인들은 수적으로 매우 적었으며, 3세대에 이르자 그들은 스와힐리어를 만들어 사용하게 된다. 킬와와 몸바사와 같은 몇몇의 도시들은 상당한 번영을 함께 공유하던 수천 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반면에 도시 사이에 있는 마을들의 생활은 비교적 단순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곳의 집들은 마쿠티(Makuti, 코코야자나뭇잎)로 지붕을 묶은 욋가지와 진흙으로 만든 오두막집을 짓고, 어업과 농업에 종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단순한 집들이 도시에서도 또한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더욱 부유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매우 좋은 환경 속에서 거주했는데 히 무슬림들이 거주하는 곳이거나 혹은 상인들이 사는 곳 그러했다, 심지어 부유층들은 우물로부터 물을 끌어올려 정원에 있는 레몬, 오렌지, 석류나무, 채소 등을 재배했으며, 그들의 집들은 평평한 지붕을 하고, 돌로 지어졌으며, 움푹 들어간 앞마당을 통하여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몇몇의 부유층들의 집에는 아직도 정교한 회반죽 장식의 흔적이 보인다. 부유한 상인들이 살았던 도시 지역은 아마도 바닷가가 분주한 활동 무대였으며, 건물의 벽돌 사이 좁은 길은 태양으로부터 열을 차단하는, 오늘날의 도시 라무(Lamu)와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4세기에 라무와 동아프리카 해안가를 방문했던 이븐 바투타(Ibn Battuta)로부터의 여행 보고서에 의하면 스와힐리 인들의 식욕이 왕성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평상시의 식사가 큰 접시에 우유와 과일을 곁들인 쌀 위에 놓여 진 육류, 생선, 닭고기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식사에 의하면 수입된 유약을 바른 이슬람 제품 자기나, 아마도 중국 자기에 담아 내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 가난한 사람들조차도 15세기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그릇에 음식을 먹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음식은 위에서 상술했던 풍성한 메뉴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븐 바투타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고 한다. “이 사람들은 한 명이 우리의 몇 명의 양을 먹는다. 그것이 그들의 관습이다.” 동아프리카에서 최근 몇 년 동안 진행되어 온 고고학 연구가 단지 건물과 비문들뿐만 아니라, 도자기 종류와 동전들을 발굴해 왔다. 특히 킬와에서 발견된 유물들에 의하면 일찍부터 교환의 매개체였던 별보배고둥 종류의 조개 껍질(Cowrie shell)들이 시라지(Shirazi) 왕조의 설립자 알리 빈 알 하산(Ali bin al - Hassan)이 술탄(Sultan)이었던 1200년에 이르러서는 동전으로 대체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대개 알 하산이 통치한 기간 동안 해안에서는 이슬람교 문명이 최절정기에 달하고 있었던 때였다. 그리고 앞으로 도래할 3세기의 시작으로 간주되어지기도 한다. 이는 하나의 해상 무역에 기반을 둔 문명이었으며, 그래서 내륙으로는 겨우 5마일 정도의 지역까지만 교류되었을 뿐이다. 대부분의 도시들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칭호를 사용하는 통치자들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다음 통치자가 되는 인물이 장남이 아니더라도 그 칭호와 계급은 가족 내부에서 대대로 세습되었다. 몇몇 소도시들은 공화국 정부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어떤 도시들은 세습되는 공무원이나 세력이 있는 평의회가 통치자를 억제하기도 하였으며, 따라서 통치자들은 그들이 추방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해안가에서의 생활은 대개 내륙에서 포로로 잡은 노예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이 지역 아라비아 인 주인의 농장과 집안일을 돌보도록 선택된 노예들은 비교적 다행스러운 편이었던 것 같다. 이는 꾸란에서 무슬림들에게, 노예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하나의 미덕으로 가르쳤으며, 많은 사람들이 될 수 있는 한 노예를 잘 대우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더 불행했던 사람들은 선박에 촘촘히 실려진 채로 거의 돌아올 가망이 없는 해상 여정의 공포에 직면했던 노예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오만, 인도 그리고 거의 중국에까지 배로 운송되었던 노예들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프리카 중세 도시 몸바사(Mombasa)에 대한 운명에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 남아 있다. 1331년 이븐 바투타가 기술한 몸바사의 농업은 보잘 것이 없고, 나무로 만들어진 이슬람 모스크와 맨발로 다니는 주민들이 존재했다고 한다. 그리고 16세기 초반에 탐험가인 두아르테 바르보사(Duarte Barbosa)가 보았던 번영된 도시로까지의 변화가 이어졌는데 몸바사는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급격한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8-24
  • 이슬람 (아랍) 세계에 처음으로 알려진 Corea (코리아) 11세기 고려의 이름이 두바이에서부터 시작되다
    두바이 요새 입장료는 3디람 (한화 약 960원)으로 저렴하다. 요새 밖의 것들은 대부분 해상 무역 시대 때 사용했던 배들과 모형 대포들, 그리고 허름한 당시 아랍에미리트 현지인들의 주거 공간 뿐이다. 성축 안에 들어가면 상세한 모습이 물론 나타나지만 겉으만 봤을 때는 실망이 사실 컸다. 역시 3디람의 싼 값이니 제 값한다는 느낌이다. 요새 안에는 해상 무역 도시였기 때문에 이곳을 지켜야 할 군대도 있어야 할테고 무기도 있어야하는 것이 정상이다. 이곳은 페르시아 이후로는 오만의 이맘 왕국이 관할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근세 오만인의 흔적이 많다. 오만은 파키스탄의 발루치스탄까지도 영토로 두고 있었고 서쪽으로는 동아프리카 해안 지대까지 영토로 가지고 있었던 해상 제국이었다. 아마도 오만군의 모습을 표현하고 그들이 사용한 무기들을 재현해 전시해놓은 듯 싶다. 그리고 아랍에미리트가 예전에는 철광석 산지였다. 고대부터 철기 국가가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이곳의 철은 오만에서부터 각지로 교류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두바이 구시가지의 위치와 지형을 보면 크리크 강변까지 각 나라의 선박들이 올라와 교류를 했다. 물론 각종 특산물들이 거래되고 일부는 메카로 가고 일부는 오만을 통해 인도와 동남아시아까지 간다. 물론 중국이나 일본과도 간혹 교류하기도 했고 그 교류 선단들이 고려 시대 때 고려 예성강 벽란도에서 장사하고 이곳으로 돌아와 Corea 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알렸다. 두바이 구시가지와 성곽 원형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면 지금은 성곽을 복원했지만 그 원형보다는 뭔가 새 살을 붙인 느낌이고 구시가지 알 파히디는 옛 느낌보다는 약간 억지 구성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다는 것이 좀 그렇다. 이 모습 그대로만 유지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향신료 무역의 중심지였던 두바이는 11~12세기에 이르러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이슬람 세계를 중심으로 하고 있던 이집트, 시리아 세력들이 서로 충돌하고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군사적 정복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러면 가장 많이 발전하는 것이 이슬람 세계에 후방 보급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안정된 교역과 상업화이다.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향신료가 중동에 보급되면서 중동 일대에 향신료가 대유행하게 된다. 두바이는 도자기 공예와 차(茶)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두바이의 도자기 공예는 페르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따라서 지금 이란에서 발견되는 도자기들은 아랍에미리트 각지에서 나타나는 도자기와 생긴 것이 똑같다. 게다가 인도와 실론에서는 홍차가 생산되어 오만과 두바이를 거쳐 터키에 들어가고 터키에서 유럽으로 차 문화가 이동하면서 당시 15세기 이전의 동유럽인들, 특히 헝가리 (마자르 족) 인들이 홍차를 즐기고 아라비카 커피가 유행하는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 칼럼
    • Nova Topos
    2024-08-24
  • 대항해시대의 서막, 콜럼부스와 아메리카 고추로드(Chili Pepper Road)
    이탈리아 제노바 공화국 출신의 콜럼부스는 폴란드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관련 책을 읽고 그에 흥미를 갖게 되었으며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접하고 언젠가는 인도를 가고자 하는 목적과 목표를 정하게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지중해의 선원으로 활동한 그는 해적과 포르투갈 대서양 연안에서 만나 전투를 벌였지만 배가 난파되었는데 그 배가 지브롤터 해협에 이르렀고 포르투갈에 의해 구조되어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콜럼부스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근거하여 대서양을 횡단해 서쪽으로 나아가다 보면 인도에 이를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콜럼부스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지구 둘레 값인 에라토스테네스의 계산결과를 사용하지 않았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시에네(현재의 아스완)에서 하지에 태양빛이 우물의 바닥까지 닿는다는 것을 전해 듣고, 즉 해가 가장 높이 떴을 때의 고도가 90도가 된다는 것을 파악하여 지구 둘레의 값을 46,250km로 구했다. 그러나 콜럼부스는 9세기 압바스 왕조의 천문학자 알프라가누스의 측정치를 사용했다. 이 과정에서 아랍 마일로 적혀있던 알프라가누스의 계산 결과를 로마 마일로 이해한 콜럼부스는 지구의 둘레를 실제의 3/4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거기에다 당시 유럽에는 아시아의 정확한 크기를 측정한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의 위치를 실제보다 14,000km 이상 가깝다고 보았다. 그러한 이유가 있다. 에라토스테네스의 측정치는 굉장히 멀게 느껴졌고 알프라가누스의 아랍 마일로는 실제로 에라토스테네스의 측정치보다 더 멀리 나가는데 이를 이해하지 못한 콜럼부스가 에라토스테네스가 측정한 마일로 알프라가누스의 측정치를 이해했기 때문에 벌어진 오판이었다. 이러한 오판이 유럽 대륙에 아메리카라는 대륙이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된 셈이다. 1484년 포르투갈의 왕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항해 탐험을 제안하고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희망봉 루트를 준비 중이던 왕이 허락하지 않아 스페인으로 갔고 기사와 제독 작위, 발견한 땅을 다스리는 총독의 지위와 그로 인해 얻은 총 수익의 10분의 1을 자신에게 줄것을 요구하자 처음에는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이사벨라 여왕에게 스페인의 성직자들이 포르투갈 교회에 대한 경쟁 의식으로 더 넓은 선교지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여왕을 설득했고 여왕은 마침내 콜럼부스의 항해를 승인하게 된다. 콜럼부스는 해군제독이 되었고 그가 발견하는 것의 10퍼센트(%)를 콜럼버스의 소유로 한다는 조건 하에 핀타 호와 니나 호를 내주었으며 팔로스(Palos)에 사는 핀손이라는 선장이 자기 소유의 선박인 산타 마리아 호를 내주면서 총 3척이 1492년 8월에 출항하게 된다. 인도에 이르는 서쪽 항로 개척에 나섰던 콜럼부스가 육지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곳이 인도 어딘가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다. 인도에 도착하면 발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웅장한 도시나 왕궁이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땅을 서인도 제도라 부르고 그곳 원주민들을 인디언이라 불렀다. 그 이유는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 묘사한 동양인, 즉 인도인의 이미지가 인디언과 매우 유사했기 때문이다. 물론 인디언들이 아주 오래 전, 아시아에서 건너온 황인종이기 때문에 아메리카를 처음 찾은 콜럼부스에게 있어 원주민들을 인도인이라 인식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리고 콜럼부스는 두 번째 항해 때 서인도 제도의 아이티에서 매운 맛이 나는 새로운 향신료, 고추를 발견하게 된다. 고추는 자신이 일고 있는 후추와는 전혀 다른 향신료였지만 콜럼부스는 이에 개의치 않았고 스페인으로 귀항할 때 상당한 양의 고추를 실어갔다. 이로써 스페인에서 고추는 그간 인식되었던 스페인 음식에 대한 이미지를 획기적으로 바꿈과 동시에 고추를 양념으로 하여 만든 여러 매운 음식들이 스페인의 주요 음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아메리카산 고추는 스페인-포르투갈의 통합왕국이 결성되면서 이들의 동쪽 식민지들을 따라 전파되어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 너머까지 건너갔다. 고추는 50년 만에 전 세계로 퍼져 지역 요리, 특히 아프리카, 동아시아, 남아시아 요리와 빠르게 결합했다. 고추는 콜럼부스 아메리카 발견 및 항해가 가져다 주었던 가장 중요하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인류의 해택 가운데 하나임은 분명하다. 아시아의 후추는 종이 하나로 인식되지만 고추는 캅시쿰(Capsicum)이라는 가지과 속 아래에 다양한 종들이 분포하고 있다. 고추의 원산지는 열대 아메리카로 인류는 9000년전부터 고추를 사용해 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고추와 같은 종에는 벨페퍼(Bell paper), 스위트 페퍼(Sweet paper), 피멘토(Pimento), 바나나 페퍼(Banana papper), 파프리카(Paprika), 카옌 페퍼(Cayenne pepper) 등이 있다. 타바스코 페퍼(Tabasco pepper)는 캅시쿰 프루테스켄스(Capsicum frutescens, 목질의 다년생)의 변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고추는 색깔, 크기, 모양이 다양하지만 고추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매운맛의 원인은 캡사이신(Capsaicin)이라는 물질로 나타나고 있다. 캡사이신의 화학식은 C18H27O3N이며 구조식은 피페린과 유사한 형태를 띄고 있다. 캡사이신과 피페린 모두 산소와 이중결합을 이루고 있는 탄소, 그리고 그 옆에 질소가 있으며 탄소로 이루어진 방향성 고리 하나를 갖고 있다. 우리가 느끼는 맵다는 감각은 분자의 형태에 기인하는 것에 이루어지고 있다면 캡사이신과 피페린이 모두 매운맛을 향유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분자 형태론이 일치하고 있는 세 번째 매운분자는 생강의 뿌리 줄기에서 볼 수 있는 진제론(Zingerone, C11H14O)에서 형성되고 있다. 진제론 분자는 피페린이나 캡사이신보다 작은 입자를 띄고 있지만 그 역시 매운 방향성 고리를 갖고 있다 진제론도 캡사이신처럼 HO와 H3C-O를 갖고 있지만 질소 원자는 없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다만 파프리카의 경우, 상대적으로 캡사이신 물질이 덜 함유되어 있어 굴라시와 같은 쇠고기와 야채로 만든 스튜에 이용되어 유럽에 정착되었다. 다만 고추는 유럽음식에 잘 융화되지 못했다. 유럽에서는 매운맛을 내는 분자로 후추의 피페린이 완전히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이 남인도 지방의 캘리컷을 지배하면서 후추와 고추의 교환 무역이 이루어진다. 이 지역들은 약 150년간 포르투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는데 인도의 그 매운 고추가 정착에 성공한 것도 이 시기부터이다. 그리고 17세기 초에 이르자 네덜란드와 영국이 포르투갈의 고추 무역을 넘겨 받았다. 암스테르담과 런던은 아메리카에서 나온 고추가 아시아로 유통되는 주요 무역항이 되었다. 1600년, 동인도 향료 무역에서 영국의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영국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 동인도 회사의 원래 이름인 동인도 제도 무역 잉글랜드-웨식스 상인 조합이 런던에 설치한 런던 상인 조합이었다. 인도로 가는 함선에 고추를 가득 싣고 후추와 교환하여 싣고 돌아오는 항해에 있어 자금을 대는 일은 위험 부담이 컸기 때문에 상인들은 자신들이 입게 될지도 모를 손실 규모를 줄이기 위해 항해에 대한 몫을 따로 요구했다. 물론 이런 관행은 주식을 사는 것으로 발전되어 현대 자본주의의 시초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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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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