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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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는 스페인이 오기 전부터 16세기 초중반 이미 필리핀 전역에서 컬버린, 란타카(Rantaka) 등을 포함한 크고 작은 화포 사용이 보편화 되어 있었다. 화승총도 거래되고 있었고 일부는 화승총을 자체 생산하기도 했다. 오래 전부터 필리핀은 이슬람 조직, 포르투갈 등의 서양 세력과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필리핀의 함선은 토착 아웃리거(Outriger) 군선들이 존재하고 스페인 측의 기록화에 따르면 이 군선들은 아이언우드 재질이었으며 길이는 10m~30m. 길이가 30m, 폭이 6m 이상인 함선들은 주앙가(Juanga)라 불렸다. 이와 같은 함선들은 첨저 선으로 원양 항해와 소규모 무역선으로도 많이 이용되었으며, 중동까지 항해했었다고 추정되지만 우선 마다가스카르까지만 항해했던 것으로 문헌에서 발견되었다. 

 

속력은 시속 15노트(knot)에 달했으며 높이가 낮아 군선이 가벼운데다 노가 많이 달려있고 큰 돛까지 달아 일본 세키부네 보다 1.5배~2.5배까지 더 빨랐다. 화살을 막는 방어 자재들을 달았고 승선 인원은 40명~200명이었다. 속도가 빠르고, 선회 력이 좋으며 높이가 매우 낮아 여러 척이 각자 변칙 각도로 돌아 적선에 접근하기 시작하면 적선이 여기저기 흩어져 원거리에서 정밀한 타격은 매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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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스페인이 식민지화 한 필리핀 원주민들, 사진출처 : HISTORY : Spanish Colonization in the Philippines, By Kira Santé

 

그로 인해 각도 조절이 용이한 선회식 화포는 1~5문으로 달았는데, 빠르게 접근해 적선박 최하단부를 격발하면 침몰이 100%였다. 네덜란드는 술루 술탄국을 공략하면서 결전을 벌였지만 해전에서 패배한 것이 필리핀의 선회식 화포의 위력의 예라 볼 수 있다. 1780년 전쟁 때도 네덜란드 함선은 필리핀 도독 령과 해전을 벌이다 토착 군선들에게 5번이나 패배했다. 

 

한편 영국 또한 술루 술탄국을 공략하다가 해전에서 패배했으며 스페인은 이슬람 계 토착 상업 왕국들과의 대규모 해전에서 패배했다. 스페인은 필리핀 도독 령의 설립 이전에 5번의 원정에서 실패했고 그 중 몇 번은 해전으로 추정된다. 포르투갈 필리핀 도독 령 설립 이전 루손인 용병단의 지원을 받은 남중국해 이슬람 함대와의 전투에서 격퇴 당했던 사건도 있었다. 

 

당시 포르투갈 함대들도 모두 여기에 당했다. 스페인은 필리핀을 제국에 편입시킨 후 이들 필리핀 함선들을 해안 방어에 사용하였다. 또한 필리핀 제도는 일본 열도에서 온 왜구들이 동남아시아로 갈 때 통과하던 경유 지점이기도 했다. 지리상 필리핀은 동아시아에서 동남아시아로 가는 중간 지점에 있고, 대만은 청나라 정부의 일본인에 대한 쇄국 정책의 영향력이 미치던 곳이라 접촉하기 용이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상대적으로 무역 등에 있어 자유롭고 여러 민족에 개방적이던 필리핀 제도에서 중국 화교들이 많이 거류하던 팡가시난(Phangasinan)에 오래 전부터 일본인들도 거류하고 있었다. 실제 후기 왜구들은 중국인, 동남아시아인, 포르투갈인 등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활동 무대가 동남아시아, 중국 해역, 한반도까지 기록이 다양한 곳에 드러난다. 

 

왜구들과 활동을 같이 하기도 했으며 마닐라, 톤도 왕국 군대가 왜구들과 함께 태국 시암 왕가와 미얀마 사이에 전쟁이 있을 때 용병으로 고용된 기록도 있다. 일본 본토의 아시가루들의 월 봉급이 1칸 55유이었고 필리핀은 금, 은, 보석을 지급하고 이 외의 다른 금속 화폐는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화폐차이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일본 무사 계층들이 당시 동남아시아에서 지속적으로 용병으로 활동한 것은 돈을 벌기 위함이었다. 개개인의 검술 형식에 따라, 전장에서의 위치에 따라 선호도에 맞춰 검의 모양과 크기를 맞춤 제작하던 전통이 있었던 전문 무사들이었다.

해적 활동 이외에도 각 국가들의 군대는 말라카, 동티모르, 시암, 미얀마, 브루나이 등에 금전을 지불받고 용병으로 고용된 기록이 남아있다. 

 

군사 활동 영역은 동남아시아 최서단, 최남단, 중국 남부 등 동남아시아 전역과 동아시아 일부에 걸쳐 있었다. 동남아시아 각 왕국의 군사 동원력은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있으나 당시의 기록을 토대로 추정하면 막탄 섬의 소 영주였던 라푸라푸가 마젤란  200여 명의 스페인 군을 상대로 막탄 섬 방어에 동원한 병력이 대략 1,000~1,500명으로 추정된다. 막탄 섬은 매우 작은 섬인데, 세부 왕국 전체의 군사 동원력은 막탄보다 최소 몇 배에서 십 수 배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략 센코쿠 시대 다이묘들과 비슷한 병력 동원력을 유지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금전을 더 많이 사용 시 정글에 사는 네그리토 궁수들까지도 추가로 고용할 수 있었다. 각 왕국들의 용병 활동 기록이 동남아시아 역사 전체에서 발견되고 있지만 전면전 기록은 별로 드러나지 않고 있는데, 국제 무역 관계로 인해서인지 전면전은 지양하는 경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용병업, 해적 활동 이외의 방어전에서는 군사력이 온전히 발휘되는 병영 국가의 모습이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상업 왕국인 술루 술탄국의 군사 동원력은 식민통치 말기 기준으로 15만 명이었다. 330여 년간의 인구 증감률을 감안하더라도 일개 지방으로써는 큰 수치이다. 1405년 영락제 당시 명나라가 군대를 파견해 침략을 시도한 적이 있다. 이는 명나라 수군 도독 정화의 대규모 해상 원정 시기와 일치한다. 

 

확실한 것은 마닐라 지역이 일시적으로 함락되었고, 점령 후 얼마 동안은 지방관을 파견했다고 되어 있다. 이후에 대한 역사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십 수 년 뒤의 기록을 살펴보면 힌두교 세부 왕국과 마긴다나오(Magindanao) 사이에 전쟁을 계속 하고 있는 등 건재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바이바이인 문자는 계속해서 사용되고 있었고 필리핀의 여러 왕국들의 해상 활동도 꾸준하게 발견된다. 150여 년 후, 스페인의 도래 시기에도 상업으로 번성하여 건재함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명나라의 필리핀 정복 시도는 실패하였다.


대부분의 바랑가이들은 무기 이 외의 방어구는 각종 재료들을 가공한 갑옷들을 제작했다. 스페인 원정대의 생존자인 안토니오 피가페타(Antonio Phigapeta)의 기록에는 다양한 재료와 여러 방식으로 가공을 거친 갑옷들은 상상 외로 단단하고, 창이나 단검으로 찔러도 뚫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유럽 최고의 스페인 산 강철이 필리핀 갑옷에 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갑옷들은 철이 아닌 만큼, 뜨거운 햇빛에 거의 가열되지 않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철이 아닌 가공한 재료들로 제작되어 비를 맞아도 녹슬지 않았다. 대부분은 경 갑옷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중 갑옷은 팔꿈치와 무릎까지 내려온다고 되어 있다. 현재 대부분 썩어서 남아있지 않으며, 경 갑옷은 일부 몇 개 남아있다. 스페인 마젤란 원정대가 왔을 때 모두 오지 원주민인 것처럼 벗은 채로 전투를 벌이는 것으로 묘사된 기록화들은 모두 허구이다. 다만, 실력 좋은 자신감 있는 전사들은 더 큰 민첩성을 위해서 갑옷을 벗고 전투를 벌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투 이외의 평상시에는 금으로 만든 칼집이나 손잡이, 각종 장신구를 착용한 평상복 차림으로 외국 무역선들을 의전 하였다. 금으로 장식된 필리핀의 검은 당시 필리핀과 무역을 하던 일본에서 골동품 유물로 발견되기도 했다. 센다이 지방 다이묘인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의 유품으로, 이 금 장식이 된 검들은 필리핀에서 센다이 사절단에게 판매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상단은 전형적인 토착 양식이고 하단은 스페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기본적으로 필리핀 섬 지역민들은 해적이었기 때문에 해군을 겸한 보병이 군대 그 자체였다. 대개 전투는 바다, 해안, 시가지, 정글 순으로 이루어졌다. 그 어떤 곳도 기병의 효용이 떨어지는 지형의 연속이라 기병이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베어내도 금세 우거져 버리는 열대 정글의 존재와 화산으로 형성된 산맥들이 균일하지 못한 복잡한 지형이었던 데다 그 안에 수천에서 수만 단위의 인구로 살고 있는 네그리토 전사들의 존재는 기병의 필요성을 없애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섬과 섬이 이어져 있지 않고 수많은 섬으로 분할되어 있는 군도 특성상 바다를 천연 교통로로 활용하는 것이 더욱 편했고 대부분은 전쟁도 육로가 아닌 바다로부터 상륙을 통해 공격해왔다. 타국 해안가나 항구를 약탈 할 때도 군선을 이용해 일시적으로 점령하여 약탈을 마치고 퇴각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기병이 없었기 때문에 목축 또한 양돈 이외에는 의미 있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들과의 전면전은 방어전인 경우가 많았고 해외 원정을 가는 경우에는 대개 중소규모의 용병 단으로 참전하였다. 애초에 전투의 목적이 돈을 버는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농민 징집 병이 대부분에다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이 목적이었던 주변 국가들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점이다. 필리핀 각 중소국가들은 상인, 해적들이 모여 규모가 커져서 제각기 국가화 된 것에 해당하기 때문에 농경민족 단위에 왕을 중심으로 중앙 집권화 된 인도차이나 반도 국가들과 그 시작이 다른 해양 민족이었다. 

 

고대부터 필리핀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접경 지역에 있어 다국적 자본의 교차 지역이면서 중국으로 가는 주요한 길목에 위치했던 연유로 예로부터 중국인, 아랍인, 인도인, 페르시아인, 크메르인, 태국인, 말레이인, 베트남인, 참파인, 일본인, 대만인, 류큐인, 자바인, 바자우인 등 다양한 이방인들이 왕래했으며 이들이 각 섬에 정착하기도 했는데 지배층과 피지배층, 노예 간의 인종 구분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 


지역별로 특정 인종, 문화권이 우세했던 인도차이나 반도와 다르게 필리핀 제도는 아시아의 다양한 문화권의 인종들이 비교적 균일한 숫자로 거주하면서 상업, 전쟁 등으로 경쟁했고 그 결과는 대체로 인도 및 이슬람 계 문화권 출신들이 전후반기 모두 우위를 점하였다. 단적인 예로 크메르 계통 인구의 우세 속에 크메르 계 문자를 사용하던 태국, 중국계 인구의 우세 속에 한자를 사용하던 베트남과는 달리, 필리핀 제도는 인도, 아라비아계의 바이바이인 문자를 사용했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스페인이 도래하기 이전부터 금, 은, 귀금속 등의 화폐 경제가 발달했으며 다른 금속 화폐들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필리핀의 경제적 구조는 폐쇄성 보다는 개방적인 성격이 매우 짙은 자유로운 무역을 했던 것으로 분류된다. 일단 스페인 도래 이전 기준으로도 매우 부유하였고, 스페인의 기록상 마닐라, 부투안 등은 동남아시아 내에서도 가장 많은 금을 보유하고 있던 곳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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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강한 필리핀 원주민들의 무력, 스페인 7차례 원정 끝에 정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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