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9-11(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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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중국은 일대일로(一带一路)의 경제적 확장 사업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실정에 있다. 일대일로(一带一路)는 직역하면 하나의 띠, 하나의 길이라는 뜻으로 중국이 서부 진출을 위해 제시한 인프라 · 무역 · 금융 · 문화 교류의 경제벨트를 통칭하는 말이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2013년 8월, 카자흐스탄을 방문해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당시 대통령을 만나 내놓은 새로운 경제벨트의 대공정 사업으로 육로와 해로의 실크로드를 중점으로 하는 유라시아 공동 경제 구역을 확충하고 중국을 중심으로 유라시아 세계를 재편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일대일로에서 나타나는 일대(一带)는 산서성의 서안 혹은 내몽골 자치구의 후허하오터에서 시작하여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우루무치,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이란, 터키, 독일로 이어지는 육상 실크로드를 말한다. 일로(一路)는 북경에서 시작하여 천진, 청도, 상해, 복건성의 천주, 광저우, 해남성의 하이커우, 말레이시아, 태국, 미얀마, 방글라데시, 인도, 스리랑카, 몰디브, 파키스탄, 예멘, 케냐, 탄자니아, 그리스, 이탈리아로 이어주는 해양 실크로드를 지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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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중국의 육, 해상 일대일로(一带一路), 출처 : BU : Global Development Policy Center, https://www.bu.edu/gdp-cn/new-gdp-center-research-bri/

 

이러한 국가와 지역들을 합친 일대일로는 총 49개국을 통해 도로, 철도, 해로 등의 교통 인프라들을 직접적으로 투자하여 그 종착점을 중국으로 귀결하게 하는 국가간 운송 시스템을 마련하는 경제 계획에서 출발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 정부는 현재 새로운 통로를 개척하고 있고 일대일로 관련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중국의 미국과 서방 패권주의에 맞서 군사 전략적인 의도도 가지고 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중국은 파키스탄과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등 인도양 주변국에 일대일로 사업을 진행하여 대규모 항만 건설을 위해 공을 들이고 있었다. 

 

이러한 전략은 미국과 서방 세력이 말레카 해협을 해상봉쇄할 것을 우려해 이를 분쇄하려는 목적과 더불어 바닷길을 통해 아프리카와 경제력이 떨어지는 동유럽 일대까지 중화 제국주의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전략적인 목적도 함께 가지고 있다. 이러한 해상전략적인 해로 개발은 옛 명나라 영락제 시대에 환관 정화(鄭和)가 개척한 바닷길을 중점적으로 활용하여 남중국해와 동중국해를 넘어 인도양 자체를 중국의 내해(內海)로 두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환관 정화(鄭和)가 개척한 해양 실크로드를 다른 말로 정화일로(鄭和一路)라고 명명되기도 한다. 해양 실크로드, 그리고 일대일로에 왜 명나라 환관 정화가 언급되고 있는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2005년은 환관 정화(鄭和)가 서양(西洋)에 처음으로 나간 해로부터 600주년 되는 해였다. 당시 정화의 원정과 관련된 학술 사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었고 중국은 당시 사스 이후, 지독한 경제난의 후폭풍을 겪고 있었기에 이를 타개할 수 있는 명분과 새로운 계획이 필요했다. 

 

그리고 천롄쩡(陳連增) 중국 국가해양부 부국장은 돌연 중국 취안저우(泉州)에서 대양국제포럼을 열어 "정화의 대양 개척과 해양 실크로드"를 주제로 전 세계 각지의 해상 전문가들과 역사학자, 고고학자들을 초청하여 학술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 포럼 이후, 중국은 정화 연구와 더불어 해양 실크로드에 많은 공을 들이며 일대일로 중 정화일로(鄭和一路)의 발판을 마련하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가장 먼저 시행된 작업이 바로 캄보디아 시아누크빌 지역에 대대적인 카지노에 대한 투자와 인수였다. 그와 같이 벌어들인 돈으로 시아누크빌 항구를 조차했다. 필자는 2005년 취안저우(泉州) 대양국제포럼과 그로 인해 2006년 시아누크빌 카지노 투자 전략이 정화일로(鄭和一路)의 시작으로 보고 여기에 주목하고 있다. 


그럼 정화(鄭和)는 어떤 인물일까? 정화는 본래 한족이 아니다. 그의 집안 자체는 색목인(色目人) 출신으로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안디잔 지역에 살다가 몽골제국에 의해 정복된 후, 중국으로 들어와 원(元)나라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쿠빌라이 칸(元世朝)가 운남 지역을 정벌한 후, 정화의 증조부를 운남 지방의 다루가치로 임명하여 통치를 맡겼는데 그는 원나라 조정으로부터 마(馬)씨의 성을 하사받는다. 

 

마(馬)는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에게 원나라가 특별히 성을 하사하였기 때문에 비단 정화의 집안에만 마(馬)씨의 성을 가진 것이 아니다. 보통 원나라에 귀순한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에게 보편적으로 하사한 성씨가 바로 마(馬)씨인 것이다. 마(馬)는 이슬람교의 선지자인 무함마드를 한역한 이름으로 나타나는데 이와 같은 주장을 최초로 한 사람이 한국의 정수일 박사이다. 정화의 본래 이름은 마삼보(馬三寶)인데 그의 이름이 이러한 이유는 운남성에서의 그의 관직이 삼보태감(三寶太監)이었기 때문이다. 마삼보는 마합지(馬哈只)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탄생할 때부터 그는 무슬림이었다.


1382년 원나라의 멸망 이후, 운남성이 명나라에게 정복되자 마삼보는 명나라의 포로가 되었고 당시 연왕(燕王)이었던 주체(朱棣)는 곤명성의 성인 남자들을 모두 학살하고, 어린 남자아이는 거세했다고 한다. 당시 삼보는 붙잡혀 강제로 거세되었고 주체가 즉위해서 영락제가 되었을 때 그의 환관으로 궁에 들어오게 된다. 이후 환관의 장관인 태감(太監)에 발탁되었으며, 정(鄭)씨 성을 하사받았다. 

 

이후 영락제는 원나라를 밀어내고 중원 뿐 아니라 몽골이 지배했던 서쪽 지역을 바다를 통해 그 영광을 재현하고 동남아시아, 인도, 아랍 이슬람 국가들 등의 조공무역국을 늘리기 위해 고심을 한 결과 중앙아시아와 아랍, 인도, 동남아시아 각 지역의 사정에 밝고 중화 중심 사상을 전파할 능력이 있는 정화가 적임자로 생각하고 그에게 대원정을 명령하게 된다. 정화는 1405년부터 1430년까지 무려 7차례에 걸친 대원정을 떠나게 되는데 항해 거리만 185,000km에 이를 정도로 장대한 거리를 왕래했다. 


정화의 항해는 명나라 정부로부터 직접적으로 진행된 범국가적 사업이었기 때문에 자세한 보고서가 작성되었겠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이 없어서 어느 지역을 항해했는지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대신에 정화의 원정에 따라간 사람들이 남긴 기록이나, 원정에 참여한 사람들 무덤의 묘비와 같은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아프리카에 도달했다는 기록도 사실상 남아있지 않지만, 정화의 항해와 관련하여 아프리카의 기린으로 보이는 동물의 그림이 남아있고 케냐의 한 부족 가운데 조상이 중국인이었다는 전설이 내려져 오고 있다. 

 

DNA 조사 결과 실제로 중국인의 DNA가 있는 것도 확인되었기 때문에 최소한 동아프리카에 도달한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정화 선단의 선원이 모가디슈의 거리를 거닐었지만 별다른 감명을 받지 못했다는 기록과 메카에서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말레이시아, 자바, 인도, 실론, 페르시아 남부, 아라비아 반도 등의 지역은 송나라, 원나라 때 이미 바닷길로 통해 많이 알려진 지역이며 중국과의 교역에 대한 기록과 유물이 많은 편이라 정화의 원정 주요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존재하는 유럽의 대항해시대와 같이 역사적인 의의가 매우 큰 세계사적 사건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정화의 대원정이 끝나고 명나라는 더 이상 해상 진출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북원 및 몽골-타타르와의 잦은 전쟁으로인해 엄청난 전비의 소모가 있었으며, 원정대를 보내는 것도 엄청난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결국 더 이상 대규모 원정대를 조직하지 못해 오히려 중국의 해상 활동은 퇴보하고 말았다. 반면 이러한 정화의 해외 원정은 최근 중국으로부터 의도적으로 재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서 현재의 정화의 해외 원정은 중국의 내셔널리즘의 상징으로 이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 중국 해군 함대 이름에 정화를 붙이는 것은 물론이고 중국의 중화 패권주의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정화의 해외 원정이 악용되고 있는 상황에 있다. 현재의 일대일로가 중국에게 유리하도록 일방적으로 진행되어 현지인들의 대대적인 불만을 사는 것과 대조적으로 정화의 원정단은 방문한 지역들의 종교와 문화, 주권을 존중해왔다. 처음부터 정화가 대항해 지도자로 낙점된 이유 중 하나가 무슬림이지만 불교와 도교, 유교에 대한 이해도도 매우 높았기 때문이었다. 문화교류적인 측면에서 보면 정화의 해외 원정은 현재 중국의 패권주의 경제외교인 일대일로보다 훨씬 더 수준 높은 면모를 보여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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