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9-11(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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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프랑스 전쟁 당시 러시아 제국 군의 육군 전력은 전역 초기에 코사크는 제외하고 370,000명으로 추산되는데 주력은 제1 전선군의 바클라이 드 톨리(Барклай-де-Толли)와, 제2 전선군의 표트르 바그라티온(Пётр Багратион), 제3 전선군 알렉산드르 토르마소프(Александр Тормасов)가 이끌었다. 

 

1812년 6월 24일 나폴레옹은 네만 강을 건너 러시아령 폴란드를 침공했다. 나폴레옹의 목표는 속전속결로 러시아군 주력을 일시에 섬멸시키고 빠른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알렉산드르 1세는 러시아 국경 내에 프랑스 군 무장 병력이 단 한 명이라도 있는 한, 강화는 없다고 발언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장기전으로 연결되었다. 

 

알렉산드르 1세 차르는 자신과 장군들 및 궁정 신하들에게도 이와 같은 내용을 발표하면서 항전의 의자를 불태웠다. 이어 군 총사령부에서 따로 나폴레옹에게 사신을 보내는 것도 차단하고 감시했다. 미하일 쿠투조프가 후에 나폴레옹이 보낸 사절과 대화만 한 것도 크게 질책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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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카잔 성당 앞의 바클라이 드 톨리(Барклай-де-Толли) 장군의 동상,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폴란드에는 러시아의 제1 서부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병력도 100,000명에 달했지만 사령관인 바클라이 드 톨리는 나폴레옹의 병력이 생각보다 큰 군세임을 파악하고 나서 신속히 퇴각하고 나폴레옹이 의도한 결전을 피했다. 리투아니아 빌뉴스에 있었던 알렉산드르 1세도 후퇴하면서 바클라이 드 톨리에게 총지휘권을 넘겨준 뒤, 모스크바를 거쳐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 

 

바클라이 드 톨리는 30,000명에 달하는 바그라티온의 제2 서부 군대와의 합류를 요구했다. 드리사(Drissa)에서 나폴레옹을 막는 데 역부족이라고 판단한 바클라이 드 톨리는 드리사도 버리고 계속 내륙으로 후퇴했다. 그로 인해 프랑스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동쪽으로 진군을 계속했다. 

 

그런데 바클라이 드 톨리가 신속히 퇴각함으로써 나폴레옹의 대군은 강행군을 하게 되어 비전투 손실이 극심해졌다. 강행군이 시작된 지 며칠 만에 폭우가 내려서 길이 유실된 곳이 많았으며 불어난 강물로 인해 폴란드의 기병대 병사들 상당수가 익사했다. 


군마의 먹이인 건초와 귀리가 부족했는데 농가의 초가지붕을 벗겨 말에게 먹였다가 며칠 만에 군마 20,000마리가 병들어 굶어 죽거나 탈진했다. 식수도 부족하여 비상용 증류주는 금방 바닥이 났으며 목이 말라 길가의 고인 물을 마신 병사들은 수인성 질병인 발진티푸스(Typhus Fever)에 걸려 첫 2주 만에 병력 135,000명을 비전투 손실로 잃었다. 

 

나폴레옹도 이러한 상황을 예견하여 폴란드 지역에 엄청난 양의 보급품을 저장해두었으나 당시로서는 이것을 러시아까지 제대로 운반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특히 구급약품 수송 마차들은 전투 부대 뒤로 쳐지는 상황에서 아무 치료도 못 받았고 일선에서는 약품을 대체할 대용품조차 없었다고 한다. 

 

러시아 원정 당시 군의관으로 활약한 도미니크 장 라레(Dominique-Jean Larrey, 1766~1842)의 기록에 의하면 붕대 대신 속옷을 감아주다가 나중에는 종이, 더 이후에는 지푸라기를 감아주었다고 한다. 


게다가 러시아의 도로가 매우 낙후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차의 수레바퀴가 틈만 나면 파괴되어 포병대가 매우 고생을 했다. 많은 경우 군대가 행군할만한 도로가 단 하나여서 마차 수리나 휴식을 위해서 한 번 행군 대열에서 나오면 다시 합류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만약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려고 하면 다른 부대와 마찰을 빚었고 서로 싸우는 경우가 빈번했다. 이러한 열악한 복무 여건 속에서 탈영자와 자살자가 속출하여 독일 지역 동맹 병사들에게는 민심 이반을 우려하여 본국으로의 편지 보내기를 금지할 정도였다. 이후 나폴레옹의 본대 주력군은 스몰렌스크 전투 직전 175,000명으로 감소했다. 

 

한편 바클라이 드 톨리는 비텝스크(Витебск)에서 나폴레옹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바그라티온의 2군이 모길료프(Могилёв)에서 격파당하고 비텝스크로 가는 도로가 차단되었기 때문에 동쪽으로 이동하여 2군과 스몰렌스크에서 합류했다. 


나는 바클라이 드 톨리의 작전을 청야전술의 일종으로 본다. 하지만 프랑스 측의 사가들에 의하면 그가 의도적으로 청야작전을 구사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 군에게 맞서려고 준비하다 보니 어느새 적이 도착해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전투를 벌이지 못하고 후퇴를 거듭한 끝에  도시와 농지를 소개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한다. 

 

특히 <전쟁과 평화(Война и мир)>에서 레프 톨스토이는 러시아군의 청야전술이 의도된 것이 아니라 어쩌다보니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 평가했던 것을 두고 프랑스 사가들이 이를 근거로 삼고 있다. 알렉산드르 1세 또한 거점이 함락될 때마다 총사령부에 직접 신하를 파견해 모든 것을 청야하고 후퇴만을 거듭하는 바클라이 드 톨리를 질책했다. 

 

8월에 접어들면서 스몰렌스크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나폴레옹은 여태까지 전투를 벌일만 하면 퇴각하는 러시아 군의 전술에 몇 번씩 당하며 초조해져 있었고 화가 나 있었다. 


마침 스몰렌스크는 러시아 군의 서유럽 전진 보급기지였고 군수물자가 풍부했기 때문에 일시에 장악하려 했지만 선발대가 공성용 대포를 가져오지 못해 공격의 시간을 놓쳤다. 그 사이 바클라이 드 톨리가 스몰렌스크 기지창의 파괴를 명령했고 목조 건물이 많은 스몰렌스크는 화재로 전소되었다. 

 

물론 양측 간의 교전이 있긴 했지만 큰 교전은 아니었고 사상자 수는 20,000명 이하였다. 알렉산드르 1세는 스몰렌스크 전투 이후 스몰렌스크를 지키라는 명령도 못 지키고 도시를 전소시킨 바클라이 드 톨리를 크게 질책하면서 청야전술에 부정적이었던 미하일 쿠투조프를 총사령관으로 지명했다. 

 

쿠투조프는 취임 조건으로 통수권자인 알렉산드르 1세를 향해 간섭하지 말라는 말은 할 수 없었고 대신 황태제인 콘스탄틴(Константин Павлович) 대공을 기용하여 명령권에 간섭하지 말 것을 차르에게 직접 요구했다. 이에 차르는 분노했지만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쿠투조프도 막상 실무를 맡고 보니 그동안 열심히 비판했던 바클라이 드 톨리의 전술을 채용해야 했다. 쿠투조프도 바클라이 드 톨리의 청야전술을, 실전에 투입되다보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클라이 드 톨리의 의도적인 청야로 인해 러시아 측은 병력을 최대한 보존한 반면 공세 측인 프랑스는 장거리를 이동하면서 막대한 비전투 손실을 입었는데 특히 보급선이 점점 길어지는 문제를 겪었다. 

 

결국 나폴레옹은 넓은 영토를 최대한 활용하여 강한 나폴레옹의 예봉을 꺾고 전투력을 감소시키면서 대륙의 혹독한 기후와 척박한 땅을 철저히 활용했다. 결국 이는 프랑스의 패배로 이어졌고 나폴레옹 몰락의 전주곡이 된다. 최근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 쿠르스크를 공격해 생각보다 깊숙이 진군했다. 

 

그러나 그들의 수는 얼마 되지 않고 러시아 땅은 넓다. 넓은 대지를 활용하여 바클라이 드 톨리가 했던 것처럼 그들을 깊숙이 끌어들이고 퇴로와 보급을 차단해 버리면 마치 독 안에 든 쥐가 된다. 마침 러시아군도 그와 같은 작전을 벌이며 침공한 쿠르스크의 우크라이나군을 섬멸하고 있다. 212년 전, 나폴레옹이 실패했던 것처럼, 우크라이나군도 같은 전철을 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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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프랑스 전쟁 (일명 조국전쟁)에서 최고의 전략가는 바클라이 드 톨리(Барклай-де-Толли)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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