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7-08(월)
  • 로그인
  • 회원가입
  • 지면보기
  • 전체기사보기

통합검색

검색형태 :
기간 :
직접입력 :
~

칼럼 검색결과

  • 조지아 내 내제된 사회 갈등과 양극화
    최근 조지아 의회가 언론과 시민 사회 억압에 대한 국내, 국외의 우려와 반발에도 ‘외국 대리인 법안’을 최종적으로 통과시켰다. 반러 감정을 가진 시민들은 대리인 법안 통과에 반발해 대규모 시위를 열었고, 이에 미국 등 국제사회는 여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제재를 가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법안에 따르면 해외에서 전체 예산의 20% 이상 자금 지원을 받는 언론 매체나 비정부기구인 NGO 단체들은 외국의 영향을 받는 대행기관으로 등록해야 한다. 이에 등록하지 않은 단체나 개인은 벌금과 최대 5년 이하 징역에 처해질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조지아라는 나라 자체가 다수의 NGO들이 결집해 세워진 국가이기 때문이다. 조지아의 언론 및 NGO 시민 사회 단체의 상당수는 미국과 유럽 등의 자금 지원을 받는 단체들이 많다. 이에 시민단체가 조지아 정부의 엄격한 규제에 노출되어 민주주의가 훼손될 것을 우려하여 강하게 반대해왔다. 특히 이와 같은 법안은 2012년에 제정되어 언론과 NGO, 반정부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엄격하게 규제된 러시아의 외국 대리인 법과 비슷하다 여겨 이를 ‘러시아법’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와 러시아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럼에도 이 법 자체가 러시아와 비슷하다 하여 '러시아 법'이라 이름 짓고 이를 비난한 것이다. 특히 조지아의 야당 의원들은 조지아를 친러시아 국가로 만들려는 시도라고 비판하고 있다. 조지아는 그 동안 EU와 나토 가입을 추진해왔으나, 친서방 대 친러시아 노선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과 사회적 갈등이 지속되어 왔다. 여당인 "조지아의 꿈" 정당이 집권하기 이전까지 조지아는 친서방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미국과 나토, 그리고 EU의 영향력을 러시아 국경과 인접된 남부 카프카스 지역으로 확장시켰다. 이에 안보 위협을 느낀 러시아가 남부 카프카스 지역의 갈등 문제에 개입하면서 자신들의 세력권을 구축했다. 러시아 입장에서 소련이 해체된 이후, 카프카스 지역의 저항 세력들은 큰 문제가 되었었기 때문이다. 나토와 EU가 카프카스에 진출하면 90년대 체첸 전쟁과 같은 내전이 또 다시 촉발될 가능성이 높았고 그로 인해 러시아의 안보가 매우 위태로울 수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의 지정학적 전략은 조지아 북부지역인 남오세티아와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 및 돈바스 일대에 대한 통제가 진행되면서 어느 정도 일단락되긴 했다. 조지아와 우크라이나는 지난 2017년 7월 18일 페트로 포로센코(Петр Порошенко)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조지아를 공식 방문함을 계기로 양국 관계를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한 바 있다. 그러나 기오르기 크비리카슈빌리(Giorgi Kvirikashvili) 총리 이후, 이라클리 가리바슈빌리(Irakli Garibashvili)가 2021년에 정권을 이양 받은 이후, 갑작스럽게 친러성향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 때 가리바슈빌리를 지원하고 지지한 세력은 이미 조지아에서 상당수의 재력을 확보한 친러계열의 유태계와 친러 성향의 지지자들, 그리고 바투미를 기반으로한 아자리야계 조지아인들이었다. 이들은 친러 성향을 갖고 있으며 특히 아자리야인들은 바투미를 중심으로 자치공화국을 형성하고 있을 정도로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이 아자리야인들은 조지아계 무슬림들을 대표하는 민족으로 오스만 제국 지배 시기인 16세기부터 17세기 무렵 사이 대부분 이슬람교 하나피파로 개종한 자들이다. 20세기 초 아제르바이잔 바쿠의 유전이 개발되고 생산될 석유를 운반할 송유시설 및 철도가 바투미를 거쳐 건설되면서 아자리야 지역의 중요성이 증대되었다. 게다가 흑해 연안을 쥐고 있는 아자리야인들의 영향력은 무시 못할 수준인 것이 조지아의 유일한 항구이자 바다로의 출구가 아자리야 자치공화국의 수도인 바투미 때문이다. 그래서 조지아의 사회적 갈등은 친러, 반러의 갈등이 곧 동부와 서부라는 지역적 갈등이 내포되어 있다. 조지아 서부는 아자리야인들을 중심으로 압하지야까지 흑해 일대가 연결되어 있고 아자리야인과 압하지야인들은 상호 연대까지 하고 있다. 반면 조지아 동부 지역은 수도인 트빌리시를 중심으로 반러시아의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사진에 나와 있는 온갖 욕설의 러시아 비난과 푸틴에 대한 비난 등의 그레피티가 쓰여 있는 것은 반러 성향의 시민들의 목소리, 그리고 이를 독려하는 친우크라이나 성향의 시민 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난민들, 이어 우크라이나 네오나치인 아조프 연대와 연합한 조지아의 네오나치들이 중심이 되고 있다. 이들은 나치 독일의 제2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의 깃발과 유사한 아조프 연대의 깃발 표식을 그레피티로 새겨 놓고 대놓고 나치와 연대하고 있음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들은 대놓고 서부 지역의 아자리야인과 친러 성향을 조지아인들을 상대로 테러를 저질렀지만 친러 성향의 조지아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총선에서 이라클리 가리바슈빌리(Irakli Garibashvili)를 당선시키면서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리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인 2022년 2월 25일 이라클리 가리바쉬빌리(Irakli Garibashvili) 조지아 총리는 조지아가 서방의 대(對)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가리비쉬빌리 총리는 2023년 5월 24일 카타르 경제 포럼(Qatar Economic Forum)에서 이와 같은 조지아 정부의 입장을 재확인하게 된다. 이어 2023년 8월 23일 러시아 국가안보위원회 부의장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Дмитрий Медведев)는 조지아가 나토 가입을 추진한다면 러시아는 조지아 내 미승인국인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South Ossetia)를 합병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10월 5일에는 아슬란 브자니아(Аслан Бжания) 압하지야 대통령이 러시아와 압하지야의 방어 역량 증대를 목적으로 압하지야 영토 내에 해군 기지를 건설한다는 내용의 합의서에 서명했다. 이후 우크라이나 정부 2023년 7월 5일 재임 당시 권력 남용 혐의로 조지아에 수감 중인 전 조지아 대통령이자 우크라이나 오데사(Odesa) 주지사인 미헤일 사카슈빌리(Mikheil Saakashvili)의 건강 상태가 악화된 것을 두고 인권 탄압이라 비판하면서 우크라이나와의 관계도 멀어지게 되었다. 결국 친러어와 반러의 단순한 대립구도가 지역 대립, 민족 대립으로까지 촉발되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다. 조지아 서부 지역에는 아자리야인 말고도 라즈(Laz)인이 살고 있다. 이들 또한 아자리야인과 같은 무슬림들이고 친러 성향을 갖고 있다. 게다가 이들이 터키에 살고 있으면 조지아계 터키인이고 조지아에 살고 있으면 터키계 조지아인이라 볼 수 있다. 현 터키 대통령인 레제프 에르도안이 라즈인 혈통으로 조지아계 터키인이다. 실제로 에르도안은 인터뷰로 자신의 가문이 조상대에 조지아 바투미에서 터키 리제로 건너온 조지아인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 영향으로 인해 라즈인들은 터키 정부의 상당한 지원까지 받고 있다. 라즈인과 아자리야인으로 대표되는 조지아 서부인들은 리버럴적이 성격을 갖고 있는 조지아 동부 정교회인들과 문화적 차이도 크다. 바투미를 중심으로 한 아자리야 자치공화국도 무슬림과 정교회라는 종교적 차이 때문에 인정해준 것이다. 이처럼 조지아에는 민족계파만 해도 94개가 자리 잡고 있는 나라다. 대한민국의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합친 크기에 불과한 작은 나라지만 이 작은 나라에 90개가 넘는 민족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민족 간의 통합은 조지아의 또 다른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어쩌고 보면 무슬림과 정교회, 유태교까지 이어지는 종교적 대립도 한 몫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 입장에서 조지아를 굳이 군사적으로 공격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지아가 반러 성향의 인물이 총리로 당선되어 반러 세력이 세력의 주동이 된다면 바투미를 중심으로 아자리야 자치공화국을 정식 독립국가로 승인하면 된다. 러시아가 아자리야와 라즈인을 지원하고 조지아 동부의 반러 세력이 라즈인을 학대한다면 터키가 이 문제에 개입할 여지가 생기게 된다. 러시아 하나 막는 것도 버거운데 터키마저 개입을 한다면 조지아는 공중분해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앞서 말한 것처럼 조지아의 사회 갈등은 곧 친러 vs 반러, 동부 vs 서부의 지역갈등, 이슬람 vs 정교 & 유태의 종교갈등, 아자리야 & 라즈 vs 조지아의 민족갈등까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 미국과 집단서방이 장미혁명처럼 색깔혁명을 조장한다면 우크라이나와는 전혀 다른 제2차 조지아 내전이 발발할 가능성이 크다. 2023년 9월 18일 전(前) 조지아 내무부 차관으로 현재 우크라이나군 SBU 부국장인 기오르기 로르키파니제(Giorgi Lorkipanidze) 등이 조지아 내에서 반정부 시위를 조직, 현 정부를 전복하려는 계획이 탄로나면서 제2차 조지아 내전은 언제든 발생 가능한 상황에 있다. 그리고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사뭇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여진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도 연결되어 있기에, 조지아 내 사회갈등을 유심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7-04
  • 6년 전, 2017년 4월 3일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 테러 사건의 데자뷰
    2017년 4월 3일 오후 2시 30분, 나는 당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었다. 네브스끼 인근 폰탄카 운하 쪽이었고 당시 그 근처 센노이 시장(Сенной Рынок)에서 드미트리와 부식거리를 사고 있었는데 지하철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해 최소 14명이 사망하였다는 속보가 들려왔다. 당시 러시아 언론들에 의하면, 전철역 2곳에서 폭발이 일어나 최소 14명이 숨졌고, 64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알려졌다. 당국은 해당 전철역을 폐쇄조치 하였으며, 폭발사고가 IS의 테러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지부 내 소식통은 테러범들이 테러에 최대한 적합한 시간대를 선택했다고 한다. 타스통신에 의하면 사고 당시 지하철 내에는 사람이 많았지만, 객차가 만원인 시간대는 아니었다고 했다.객차 안에 사람이 너무 많으면 폭발물 부근의 몇 명이 폭탄의 위력과 파편을 온몸으로 받게 됨으로써 희생자 수는 오히려 줄어들기 때문이라 했다. 당시 조사 결과, 지하철 테러의 폭발물이 철제, 유리 파편으로 가득 찬 소화기와 쇠구슬을 잔뜩 담은 사제 폭탄 가방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전방위로 날아든 파편 때문에 전철에 탑승한 수십 명이 죽거나 다쳤고 전철 유리창이 깨지고 출입문도 찌그러졌다. 중앙아시아 출신의 20대 남성이 저지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폭발 현장에 대한 조사를 통해 ‘자폭 테러’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파악됐다고 한다. 이날 폭발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한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과의 회담을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한 가운데 일어났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언론에 알리지 않은 채 폭발 현장을 찾아 헌화하기도 했다. 당시 지하철 폭발 사건은 지난 2010년 모스크바 지하철 테러에 이어 7년 만에 발생한 것이다. 2010년 3월 29일 오전 출근 시간에 모스크바 시내 지하철역 2곳에서 시차를 두고 연쇄 폭발이 일어나 41명이 숨지고 80여 명이 다친 바 있다. 앞서 2004년에는 2월과 8월에 각각 모스크바 지하철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람잔 카디로프 체첸 대통령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테러를 포함한 모든 가설을 점검 중”이라는 푸틴 대통령의 발언과 사진을 올린 후 “이 끔찍한 테러의 주모자와 배후를 밝혀내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했다. 다른 러시아 정치인들은 신중한 태도를 취하면서 폭탄 테러의 희생자 유가족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하는 정도로 반응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우리 모두의 아픔”이라고 썼다. 게오르기 폴타프첸코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지사는 이번 사건을 “무시무시한 비극”이라 지칭하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에게 경각심을 갖고 신중하게 대응할 것을 부탁했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 전 구간이 폐쇄된 상황이기 때문에 시내는 최악의 교통대란을 겪었다. 시당국은 지상 대중교통을 모두 무료로 개방했고 택시 기사들도 퇴근길 시내 중심가에서 탑승한 승객에게는 요금을 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통대란이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집으로’라는 해시태그를 부착하고 카풀을 제공하는 자차 운전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인터넷에도 퇴근길 카풀이 가능한 시간과 행선지 정보를 제공하는 게시판이 생겨났다. 게시판을 방문한 누군가는 “어려울 때일수록 뭉쳐야 한다”고 썼었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는 3일 간의 공식 추도일을 선포했다. 시민들은 애도의 뜻을 표하기 위해 테러가 발생한 ‘Технологический институт (체흐놀로기쩨스끼 인스띠뚜뜨)’역에 줄을 이어 꽃을 가져다 놓았다. 모스크바에서는 크레믈린 벽 무명용사의 묘에 설치된 대조국전쟁 참전도시 기념비 중 ‘영웅도시 레닌그라드’ 기념비 앞에 헌화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그 중 한 명은 타스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대조국 전쟁 중 872일 동안 독일군의 봉쇄를 견뎌낸 영웅도시 레닌그라드 기념비는 희생자들에 대한 연대의식을 표시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모스크바 축구클럽 ‘스타르타크’ 팬들도 평소에는 ‘앙숙’이자 라이벌이었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대한 연대감을 표했었다. ‘오렌부르크’팀과의 경기에서 스파르타크 팬들은 관객석에서 ‘크나큰 아픔에 가슴이 찢어진다. 피테르(페테르부르크의 애칭), 애도를 표한다’고 쓰인 대형 현수막을 펼치기도 했을 정도였다. 당시 러시아 국민들은 테러에 맞서 하나가 되었다. IS의 테러가 오히려 러시아 국민들을 단합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카페에서 다시 한 번 테러 공격이 발생했다. 200g 이상의 강력한 TNT가 터져 건물 유리가 모두 깨졌고 집기들은 처참하게 부서졌다. 이 날 러시아 유명 군사 블로거인 블라드랜 타타르스키가 사망하고 25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카페에서는 사망한 군사 블로거와 독자들의 만남이 진행되고 있었고, 한 여성이 조각상을 증정한 뒤 폭발이 발생해 조각상에 폭발물이 들어있었던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사망자는 닉네임 '블라드랜 타타르스키'로 알려진 유명 군사 블로거로,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출신이며 실제 이름은 막심 포민이며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를 지지하고 있는 블로거다. 그는 56만 명의 구독자를 가졌으며 러시아군의 인사나 작전 등에 대한 논평을 썼던 인물이다. 타타르스키와의 만남 행사를 주최한 곳은 러시아의 한 애국 단체로, 이들은 보안 절차가 있었는데도 폭발물이 반입됐다고 하였다. 부상자 25명 중 19명은 병원으로 이송됐고, 러시아 국가수사위원회는 타타르스키의 사망을 살인 사건으로 규정하고 조사에 착수했으며 폭발 당시 카페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을 상대로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유력한 용의자는 서부 우크라이나 이바노 프랑키스크 출신의 여성으로 아주 작정하고 테러를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6년 전, 오늘과 데자뷰다. 다만 테러의 주체가 IS에서 우크라이나 네오나치로 바꼈을 뿐이다. 우크라이나가 몰리게 되니 러시아에 우크라이나 난민으로 위장해 들어온 젤렌스키 정부 소속의 네오나치 테러리스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진다. 정식으로 싸우는 전쟁도 아닌 테러라면 더더욱 용납할 수 없는 범죄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테러 지원국에서 한 단계 격상해 테러 국가로 규정하고 국가 자체를 소멸시켜 테러를 일으킨 자들을 박멸해야 한다. 러시아 국민들도 이 테러에 분개하고 있다. 전쟁에 서서히 염증이 드리워질 때쯤 다시 국민들이 단합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 칼럼
    • Nova Topos
    2024-07-03
  • 알렉세이 나발니의 일생과 죽음이 미치는 영향 - 1부
    푸틴 대통령과 대적한 러시아의 반 체제 인사이자 횡령 사기범인 알렉세이 나발니(Алексей Навальный)가 지난 16일 야말-네네츠 제 3교도소에서 사망했다. 푸틴과 맞서온 그의 인생을 함 조망해본다. 그는 1976년 생으로 모스크바 주 부틴이란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아나톨리 이바노비치 나발니(Анатолий Иванович Навальный)는 우크라이나 키예프 출신이고 어머니 류드밀라 이바노브나 나발나야(Людмила Ивановна Навальная)는 러시아 출신으로 그는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인 셈이다. 나발니가 우크라이나에 호의적이었던 이유는 자신의 부친이 우크라이나인이기도 했고 본인도 우크라이나계라는 자부심도 갖고 있다. 2010년대 타스통신에서 한 나발니의 인터뷰를 본적이 있는데 자신은 러시아인으로 살고 있지만 한켠에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다 한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자신의 가계의 대한 내력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친우크라이나계 인사였던 보리스 넴초프와 가깝게 지냈고 크림 합병에 대해 찬성하긴 했지만 당시 정치인으로써 나발니의 세력이 미미했기에 우선 자신의 인지도에 상처가 되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반전 시위 선동에서 보면 알 수 있는데 이 때도 푸틴 대통령을 비난하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즉, 그는 대놓고 러시아인이면서 반러시아 행세를 했던 것이다. 나발니는 모스크바로부터 남서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오브닌스크에서 자랐으나, 어릴 때 여름에는 우크라이나에 있는 그의 할머니와 지냈다고 한다. 나발니는 본인 스스로 어린 시절을 회상했을 때, 키예프의 생활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강한 애정을 갖게 되었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는 이례적으로 쉬꼴라를 모스크바에서 키예프로 옮겨 키예프에서 쉬꼴라를 졸업했다. 그는 몸과 국적만 러시아인이지 속 전체는 우크라이나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1993년 모스크바로 돌아와 러시아 민족 우호 대학교에 입학하여 1998년 법학학사학위를 취득했고 연방 지원 금융 대학에서 증권과 투자, 환전, 그리고 금융 경제를 공부했다. 당시 러시아의 입장에서 1998년 모라토리움 선언하는 등, 경제적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에 금융 경제에 대한 관심을 갖고 기존의 법학에서 금융경제학으로 잠깐 외유를 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원래의 나발니의 성향은 좌파였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정계에 입문했고 2000년 진보주의와 사회, 녹색자유주의, 친유럽 성향이면서 대표적인 친서방 리버럴 정당인 야블로코(Яблоко)에 입당한다. 이 정당은 사유재산을 보호하고 동등한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정치, 경제에서의 공정한 경쟁을 지지하는 정당으로 외교적으로는 러시아의 유럽 연합 가입과 미국과의 우호관계 수립 등 서방과의 관계 강화를 주장하고 있는 정당이다. 여기서 활동한 나발니는 친서방 인사 및 미국의 정계권 인사들과도 접촉을 가지며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발니의 영어 실력은 러시아어 억양이 강하기는 하지만 단어 및 어휘선택이 탁월할 정도 유창했던게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확실한 인종주의자이기도 했다. 2004년 나발니는 피부색이 다른 카프카스계 군인들을 바퀴벌레에 비유하며 “사람은 총으로 죽여야 하지만 바퀴벌레는 슬리퍼로 밟아 죽여야 한다.”고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그는 카프카스계 민족들을 매우 경멸했는데 카프카스 지역의 민족들이 러시아 경제권에 진입해 러시아인들의 취업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에서 이민족들을 매우 싫어한 것이다. 그는 2006년 반 외국인 성향을 띈 러시아인의 행진(Русский марш)을 승인해 줄 것을 모스크바 연방 특별시 시청에 청원하고 참관인 자격으로 이 시위에 참여했다. 말 그대로 성향 자체가 인종차별적인 면과 과격한 전체주의 나치의 성향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보면 된다. 나발니는 카프카스, 중앙아시아, 그리고 동양인을 혐오했는데 러시아인의 행진(Русский марш) 자체가 그와 같은 성향을 띄고 있다. 즉, 유색인종 차별, 과도한 폭력성 자체의 광기 어린 모습을 갖고 있었더 것인데 이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당시 갖고 있던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 및 무시, 차별, 폭력성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겠다. 나도 당시 모스크바 마야꼽스까야에서 푸쉬낀스까야까지 러시아인의 행진(Русский марш) 시위 행렬에서 목소리 구호를 외치고 연설하며 독려하는 나발니를 본적이 있다. 당시 그를 가까이서 보지는 못했지만 연설하며 독려하는 표정과 그 제스처가 어딘가 많이 익숙한 모습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돌프 히틀러가 총통이 되기 전, 선동하는 그의 제스쳐와 참 많이 닮았다. 물론 그가 나치 성향을 갖고 있지만 네오나치는 아닌듯 싶다. 나치 표식을 몸에 새기지 않았고 나치라 할만한 어떠한 물건도 발견된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나발니는 2007년 야블로코로부터 인종차별적, 민족주의적 활동 등으로 당의 규정에 위배되는 행위를 저질렀다며 제명 되어 버렸다. 야블로코 당에서 제명당한 이후에도 나발니는 '러시아인의 행진' 시위에 지속적으로 참가하면서 "러시아 인민해방운동(Национального Русского Освободительного Движения, НАРОД)" 정당을 창설했다. 그리고 2008년 남오세티아 전쟁이 발발하자 나발니는 극우로 돌아서 당시 대통령인 메드베제프와 푸틴 총리를 적극 지지했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그루지야(현 조지아)에 대한 적극적 봉쇄조치가 필요하며 크루즈 미사일을 동원해 그루지야 참모 본부를 공격해야 하고 남오세티야 공화국 상공을 지나는 모든 항공기들을 격추시켜야 한다고 적어 논란을 일으킨다. 또한 나발니는 러시아 내에 있는 조지아인들을 "설치류 떼들(грызуны)"이라 비하하며 그들을 전부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전쟁 이후에는 남오세티야 공화국과 압하지야 공화국을 독립국가로 인정해야 한다고 언급해 조지아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남오세티아 전쟁이 승리로 끝난 후, 그동안 공부한 금융경제학과 투자에 관한 전문성을 내세워 2008년 로스네프트, 가스프롬, 가스프롬 네프트, 루크오일, 그리고 수르구트네프트 가스, 이렇게 5개의 가스 회사 주식을 30만 루블 어치를 사들여 주주행동주의자로 성장하게 된다. 그는 회사들이 소유한 금융 재산의 투명성을 강조했지만 당시만 해도 러시아는 금융 관련 부패가 심각했었고 이 부분이 정치권과 연결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특히 로스네프트, 가스프롬, 가스프롬 네프트 등에는 상위 직원들이 횡령과 회사 투명성을 차단하는 행위를 자행했고 이를 파악한 나발니는 주 정부의 부적절한 예산 지출과 부실한 주 정부 서비스 등을 지적하면서 연방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친서방 리버럴에 나치와 같은 전체주의적 성향, 서방 리버럴 인사들과 교류가 두텁고 반골 기질까지 있는 나발니를 주목한 것은 미국 정가였다. 그는 2010년 미국으로 들어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예일 대학에서 World Fellows 프로그렘을 수행했다. 최근 미국 대통령 여섯 명 중 네 명이 예일 출신일 정도로 미국 정가와 뿌리 깊은 관계를 갖고 있던 예일 대학에서 나발니 수많은 리버럴 정가 인사들을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러시아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푸틴을 비판하는 일이었다. 미국에서 어떠한 권유를 받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 때를 계기로 그는 철저히 반 체제, 반 푸틴 인사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 정도 설명했으면 충분히 눈치챘을 것이다. 그는 딥스테이트의 개가 되어 러시아로 돌아와 체제 전복을 꾀했던 것이다. 이 때부터 그가 가까워진 인물이 바로 보리스 넴초프다. 그는 넴초프의 지지를 받아 트랜스네프트 가스 회사의 비밀 회계 감사 자료를 공개한다. 이 때부터 그는 반 부패 활동을 시작한다. 행정상 필요한 물자 조달 등을 모든 러시아 정부가 온라인에 게시 및 공고하여 입찰을 하도록 하는 로스필 프로젝트를 촉구했다. 일반 개인이 도로에 있는 구멍들을 러시아 정부에 보고하고, 러시아 연방 정부가 불만사항들에 응답하게 한 로스야마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그러한 행위는 러시아 우파 정당들의 공격을 불러왔고 결국 나발니는 러시아 인민해방운동 해산했다. 2011년 6월 로이터와 영어로 능숙하게 인터뷰 했는데 "푸틴의 정치 체제는 부패에 의해 매우 약화되고 있으며, 러시아 연방에서도 5년 이내에 아랍의 봄과 같은 반정부 데모 시위가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며 러시아 내 반 정부 시위를 벌일 것임을 예고했다. 그리고 체제 개혁을 진행 중에 있던 푸틴의 모든 정책을 반대하며 이를 규탄하기 위해 여러 곳에서 지지자들을 모아 시위를 야기했다. 그로 인해 2018년까지 10차례나 행정구류(Административный арест)를 당해 총 192일 간 구금되기도 했다. 처음에 러시아 국민들은 그의 반 부패 조사 행위를 응원했다. 소련 해체 이후, 경제적 침체와 공무원들의 부패에 시달리고 있던 시민들의 지지는 갈수록 올라갔다. 여기에 힘을 받은 나발니는 여러 곳에서 후원을 받기 시작했으며 이것의 그의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나발니는 나치와 같은 전체주의적 성향은 그대로 갖고 있었는데 치과 의사로 변장해 외국인들을 '러시아 민족의 뿌리를 뒤흔드는' 충치에 비유하며 추방을 요구하는 영상을 올려 논란을 빚게 된다. 그런데 이 영상에 환호하는 지지자도 있었지만 반 부패 척결에 적극 찬성하는 시민들은 이 영상을 보고 나발니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당시에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그 인기를 토대로 보리스 넴초프가 있는 인민자유당(Партия народной свободы, PARNAS)에 입당했고 넴초프의 후원을 받아 2013년 나발니는 모스크바 시장 선거에 출마한다. 그는 선거 유세 과정에서 그의 인종차별적 발언 등이 도마에 오르자 블로그를 통해 '조지아인들을 설치류 떼라 비하한 것을 사과한다'고 말했으나 전쟁에 찬성했던 과거 행적에 대해서는 별다른 해명을 내놓지 않았다. 이에 조지아인들은 시장 선거가 아니면 그가 사과했을까?, 혹은 모스크바에 거주하는 조지아계 러시아인들의 표가 급했을 것이라 그를 조롱하기도 했다. 즉, 아무도 그의 사과를 진정성 있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남오세티아 전쟁에 찬성했던 것에 대해 해명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정성이 없다 판단한 것이다. 게다가 그는 그 와중에도 중앙아시아 이민자에 대한 지원 중단을 요구하는 ‘코카서스 급식 중단' 캠페인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런 그를 카프카스 민족들 중 누가 진정성 있는 사과라 볼 수 있겠는가? 당시만 해도 이러한 인종차별이 모스크바 시장 선거에서 낙선한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선거가 시작되고 27.24%, 632,697표를 얻어 선전했지만 세르게이 소뱌닌에게 밀려 결국 큰 차이로 낙선했다. 물론 선전은 했지만 타 민족 러시아계 시민들이 소뱌닌에게 몰표를 던졌기 때문에 낙선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선거에 불복해 지지자들을 이끌고 시위를 조장해 또 다시 구류 조치를 당했고 2014년 12월 30일, 그는 프랑스 화장품 회사 이브 로셰의 러시아 연방 지사 등으로부터 3,100만 루블 (약 5억 9천만 원)을 횡령하여 사기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 그는 징역 3년 6개월 실형에 3년 6개월 집행유예까지 추가하여 7년 형을 받는다. 재판이 끝난 후, 러시아 연방 법원 건물 밖에 모여 있던 지지자들을 향해 "현 정권은 존재할 가치가 없으며 붕괴돼야 한다. 오늘 모두가 가두 시위에 나서 달라"고 촉구하며 내란을 조장했다. 그리고 집권 여당인 통합 러시아당을 '사기꾼들과 도둑놈들의 정당' 이라 비판했다. 2018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의사를 보였으나, 2017년 12월 25일 러시아 연방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2014년의 횡령죄 판결에 따라 나발니의 출마 자격을 박탈하게 된다. 이에 나발니는 지지자들에게 대선 보이콧을 촉구하며 2018년 1월 28일 대대적인 시위를 예고했다. 그러나 해당 시위는 결국 불법으로 규정되어 그의 지지자들 상당수가 투옥되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12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