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7-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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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 행정부는 1920년 7월 20일에 아자리야 지역을 조지아에게 양도했다. 그러나 당시 볼셰비키와 러시아의 요원들이 조지아에 들어와 주요 행정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일련의 사보타주와 테러 결사대를 조직하면서 오스만 제국과 관련 있는 인사들과 아르메니아 소속의 주로 소비에트에 대한 반감을 가진 자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민주주의 조지아 집행부는 소비에트 통치 하에 있었지만 아자리야인들과 자치주를 통제하기 어려웠다. 

 

이들은 아자리야 자치주에게 소비에트로 합류를 종용했다.조지아를 소비에트가 장악하고 있는 기간 동안에, 오스만 제국의 군대가 터키 동부 지역의 아르메나아 군을 밀어내면서 1921년 3월 11일 바투미에 출현했고 15일에는 볼셰비키 조지아 군을 이끌도 기오르기 마즈냐슈빌리(Giorgi Maznyashvili) 장군이 아자리야의 군대를 이끌고 오스만 군과 3일 동안 교전을 벌였다. 바투미 지역을 잘 알고 있는 아지리야 군대는 오스만 군과  시가전을 벌이며 중심 시가지들을 완전히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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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아자리야 자치 공화국 국기가 휘날리고 있다. 출처 : 아자리야 자치공화국 홈페이지

 

결국 오스만 군은 흑해 해안대를 따라 사르프로 철수했다. 그리고 바투미에서는 소비에트의 직접적인 통치가 19일에 공표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19일에 소비에트-오스만 제국이 카르스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지아 서부 지역은 일명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일명 그루지야 SSR)의 관할에 들어갔고 아자리야인이 장악한 바투미도 그루지아 SSR의 일부 지역으로 합병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지도부에서는 아자리야와 기타 조지아 지역의 종교가 달라 아자리야 지역에 자치권을 줘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때 아자리야에 자치권을 내주고 조지아에게서 독립하게 한 인물이 아이러니하게도 조지아가 고향인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당시에 민족 인민위원이었고 실제로 민족 문제 관련하여 일을 많이 했던 때였다. 스탈린은 조지아 내에서 아자리야인들에 대해 특별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고 이에 상당수의 아자리야 자치정부의 인사들이 스탈린의 측근이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스탈린은 소수민족 출신의 공산주의자들을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포섭할 수 있었으며 이는 공산당의 조직 기강을 내세우기 위해서 신설된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 서기장에 선출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스탈린과 소비에트 정부는 1921년 7월 16일에 아자리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을 공표하면서 조지아와 드디어 완전히 분리시켰다. 그리고 기존의 조지아는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변모한다. 이로 인해 아자리야는 현재까지도 친러 성향이 강한 지역으로 손꼽히고 있다. 한편 국운이 완전히 쇠진한 오스만 제국은 아자리야의 혼혈 인구에서 무슬림들의 이익을 위해 아자리야에게 자치권이 부여되는 조건으로 현 터키 영내 아자리야 지역을 볼셰비키에게 양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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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같은 영토 양도는 소련으로 하여금 모스크바에서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흑해 항구 도시인 바투미를 자카프카스에게 완전하게 통제권이 주어지는 것을 방지하려는 목적이 있었고, 오스만 제국에서 생활하는 조지아계 무슬림들에게 공산주의 성향을 북돋아 오스만 영내에서 볼셰비키의 지령을 받아 각종 사보타주와 첩보활동을 재개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 통치 하에,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교도 공산주의 무신론 사상에 대척된다 여겨 철저히 억제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1929년 4월, 아자리야와 카프카스 산악 무슬림 마을에 거주하는 라즈인들은 강제적인 집산주의화와 종교 박해에 대항하여 여러차례 봉기했다. 이에 소련의 부대들이 동원되어 반란 진압에 나섰고 반란은 곧바로 평정되었다. 그러자 수천명의 아자리야인들은 자국 공화국 밖으로 추방되거나 소련 영내로 강제 이주되어 산산히 흩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때 메흐메트 아바시제(Мехмет Абашидзе)는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지만 스탈린의 사후, 카자흐스탄의 아자리야 공동체들의 지도자 가문으로 아바시제(Абашидзе) 가문이 선정되었다. 

 

이후 흐루시초프 당시 해빙기를 맞이하면서 수많은 민족들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때, 아바시제(Абашидзе) 가문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고향인 조지아 서부 지역으로 돌아온다. 당시 메흐메트 아바시제가 1937년 스탈린의 명령으로 총살된 이후, 지도층이 거의 와해된 상황이었는데 메흐메트 아바시제의 아들인 아슬란 아바시제(Aslan Abashidze)가 아자리야 공동체를 이끌게 되었다. 그는 바투미 대학에서 역사와 철학 학위를, 트빌리시 주립 대학에서 경제학 학위를 취득하면서 소비에트 체제에서 아자리야인들의 희망이 되어갔다. 


이후 소련이 해체되면서 아자리야는 형식적으로 조지아에 속했으나 사실상 독립국이나 다름없었던 미승인국가가 되어 있었다. 이에 조지아에서 첫 번째 민주주의 의회가 생성되고 대통령 선거가 치뤄지며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Zviad Gamsakhurdia)가 조지아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감사후르디아는 당선되자마자 아자리야 공화국 지도자인 아슬란 아바시제(Aslan Abashidze)를 초청해 오찬을 함께 했다 한다. 이 때 감사후르디아가 아바시제에게 바랬던 것은 지역 자치의 지위를 포기하여 조지아의 영향 하에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1991년 3월 15일에 감사후르디아는 아바시제를 아자리야 최고 의회 의장으로 임명했다. 이어 감사후르디아는 손수 바투미로 날아가 아바시제를 만나 아자리야 자치권의 폐지를 제안했다. 이에 아바시제는 아바시제는 항변하여 자치권 폐지를 거부했고 감사후르디아는 트빌리시로 돌아가 아자리야인을 특히 지역 무슬림이라 부르면서 이들에 대한 탄압과 강제 진압하기 위해 전군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중앙의 조지아 당국과의 긴장이 형성되며 조지아 내전으로 촉발될 가능성이 커졌다. 


감사후르디아는 조지아 민족에게 있어 좋은 지도자였을지 몰라도 압하지야, 남오세티야와 아자리야, 라즈인들에게 있어 그는 흉폭한 폭군이었다. 압하지야, 남오세티야는 감사후르디아의 조치에 즉각 반발했고 당시 체첸과 전쟁에 여념이 없던 러시아를 이 분쟁에 끌어들였다. 특히 아자리야의 아슬란 아바시제는 직접 모스크바로 날아가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을 만났다. 이 때 모스크바에서 옐친의 지원을 확약받고 러시아의 도움을 받게 되니 당시 카바르디노-발카르와 쿠반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군 700여 명이 바투미에 입항하면서 아자리야의 민병대와 합류했다. 

 

1991년 4월 22일, 아바시제 민병대들은 조지아의 공무원들과 친조지아 의회 의원들의 즉각적인 사퇴를 요구하며 바투미 의회로 쇄도했다. 이들은 친조지아 세력들과 관료들을 아자리야 지역에서 추방했으며 감사후르디아의 조지아 군을 격파해 아자리야에서 몰아냈다. 이로써 아바시제는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아자리야를 독립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지아는 당시 심각한 내부 분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수도인 트빌리시에서는 오세티야와 압하지야의 민족 분리 운동으로 인해 소요 사태가 심각했다. 


1991년 1월 5일 조지아의 국가 요인 경호대는 남오세티야의 수도 츠힌발리로 진입해서 도시를 포위하면서 중대한 위기 상황을 맞이한다. 그러자 트빌리시에서는 오세티야인과 압하지아인들의 분리 독립 시위가 발생했고 감사후르디아는 여기에 발포를 허가하자 이 시위는 폭동으로 변질되었다. 중요한 국가의 준군사 세력인 조지아 국가 요인 경비대는 친, 반 감사쿠르디아로 분열되었으며 이는 심각한 조지아의 내전(Georgian Civil War, 1991~1993)으로 촉발된다. 상황이 이쯤되니 감사후르디아는 아자리야의 사건들에 간섭할 수 없었다. 

 

게다가 최고 소비에트 의장 대리이며 아자리야에서 조지아 정부의 최고위층 지지자인 보다르 임나제(Bodar Imnaze)가 살해됐다. 아바시제 측의 주장에 의하면, 임나제의 손에 총이 들려있었고 아바시제의 집무실에서 테러를 시도하다가 경호원의 총에 맞았다고 했다. 이를 트빌리시의 대중매체들은 임나제의 사망이 사유불명으로 간략하게 보도했을 뿐이다. 그러나 내부의 주장들에 의하면 임나제가 집무실에서 아바시제와 논쟁하던 중에 아바시제가 격분해 그를 사살했다고 한다. 결국 이는 아자리야가 조지아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독립했음 시사하게 되는 사건임이 틀림없었다. 


아자리야는 바투미 항구를 끼고 조지아의 대외무역을 사실상 독점하는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조지아 내전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조지아는 아자리야의 사실상 독립을 막을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아자리야는 표면상으로는 조지아에 속해있었지만 사실상 조지아의 지배를 전혀 받지않는 독립적인 위치에 있게 되었다. 아자리야 공화국은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1997년 10월 24일에, 아자리야는 유럽 지역 의회(AER)의 완전환 회원이 되면서 정식 국가로 서서히 발돋움하기 시작한다. 

 

아자리야 지도부는 조지아 중앙 당국의 예산 확충을 위해 세금 내는 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아바시제에게는 문화, 바투비 해항, 다른 전략적인 대상들에 전체적인 통제권을 갖고 있었고 게다가 그 배후에는 러시아가 있었기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바시제는 자신을 위한 무장 부대를 만들어 아자리야 국방부를 따로 설립했고 조지아 국방부 소속의 바투미 해군기지 25번째 여단의 모든 통제권을 장악했다. 이에 조지아 정부는 바투미 기지의 러시아 군대의 부대가 아바시제의 독재를 위한 세력 기반이라 주장했고 아바시제의 친러시아 행보를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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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서부를 장악하고 있는 아자리야인들의 역사와 아자리야 자치공화국 - 中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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