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2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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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패전국인 오스만투르크는 연합군에 항복했고 집단서방으로 구성된 연합군은 오스만투르크를 분할하기 시작했다. 1920년 8월 10일에 체결된 세브르 조약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최대 굴욕적 사건이었다.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게 되었고,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의 위임통치국이 되었다. 터키 대국민회의군(Türkiye Büyük Millet Meclisi)은 1919년 5월 19일부터 1923년 7월 24일까지 그리스 왕국, 프랑스, 영국, 아르메니아 민주 공화국을 주축으로 한 협상국 사이에서 독립전쟁을 벌이게 된다. 아타튀르크 케말의 대국민회의군은 앙카라 인근 사카리아 강까지 몰려온 그리스군을 상대로 장장 21일 동안 밤낮없이 백병전의 혈투를 벌인 끝에 그리스의 동진을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 전투가 끝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동부전선과 남부전선의 상황이 종결되었다. 동부전선의 아르메니아군은 민병대에게 패배하여 카프카스 본토로 철수했고 남부전선의 프랑스군도 가지안테프에서의 패배로 인해 더 이상을 힘을 쓰지 못하고 시리아로 철수했다. 그리하여 터키군은 모든 전력을 서쪽으로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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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로잔 조약 체결 과정, 출처 : ABC, Photo by Keystone-France / Gamma-Keystone via Getty Images

 

사카리아 전투에서 전 국민과 함께 그리스 침략자와 싸워 이긴 덕택에 결국 전세는 역전되어 집단 서방의 연합군이 몰리는 형세로 접어들었다. 1922년 사기가 오른 터키군이 그리스군을 몰아붙여 이스탄불을 향하여 전진하기 시작하면서 병력과 무기의 우위에 있었던 그리스군이 도리어 열세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터키군은 패퇴하는 그리스군의 장비와 탄약, 포탄을 넉넉하게 노획했고 이를 그리스군에 도로 공세를 퍼부으면서 오히려 그리스군이 수세가 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이스탄불에서 전세를 관망하던 영국군과 이탈리아군은 전장에서 발을 빼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영국군부는 터키 의회에 전쟁을 그만 매듭짓자고 요청했고 특사로 이스메트 파샤와 협상하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영국의 요구에 따라 터키 의회는 이스메트 파샤를 보내기로 결정했으며 양측은 스위스의 로잔에서 만나 장장 1년 여에 걸친 회의를 거듭했다. 로잔에서의 회의에서 영국은 터키와 협상을 하면서 동시에 그리스군에 무기를 지원하는 등의 이중적인 행보를 보이며 그리스가 선전할 수 있게끔 시간을 질질 끌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시간을 끌기 위한 전략 중 하나가 에디르네와 동부 트라키아 일부 지역은 그리스 영토로 하고 이즈미르는 터키의 영토로 하며 아나톨리아를 보전시키겠다는 제안을 하여 결정을 어렵도록 만든 것이다. 이에 이스메트 파샤는 터키 민족의 완전한 독립이 아니면 이런 회의는 의미가 없다며 초강경 자세로 버텼다. 영국도 그리스에 대한 물자 보급에도 한계가 있었다. 물론 그리스군에 물자를 대주면서 선전을 바라며 시간을 끌었지만 현실은 그리스군이 터키군에 계속 연전연패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영국의 지원한 물자는 터키 민병대에게 탈취당하거나 전투에서 노획당하기 일쑤였다. 거기에 적백내전이 평정되면서 국내 사정이 안정된 소련 볼셰비키는 터키 독립 전쟁에 비로소 관여하게 되면서 터키 독립군에게 각종 무기와 탄약, 물자들을 지원하게 된다. 이에 오히려 물량으로 터키가 그리스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터키군은 1922년을 기점으로 터키 전국에서 그리스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1922년 8월 30일 퀴타히아(Kütahya) 인근의 둠루프나르(Dumlupınar)에서 케말이 이끄는 터키군이 그리스군에 완승을 거두면서 더 이상 열강들도 시간을 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둠루프나르 전투에서의 승리는 사실상 결정적이었다. 


터키군은 기세를 몰아 서쪽으로 진격해 9월 9일 그리스군의 아나톨리아 본거지였던 이즈미르를 탈환했다. 그와 동시에 수세에 몰린 그리스 본국에서는 쿠데타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리스 본국에서는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Constantinos I)와 왕당파 정권에 여론이 분노하고 있었다. 그리스군의 연전연패의 소식은 수많은 시민들이 그리스가 또 다시 터키에 정복당하는거 아니냐는 극도의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이에 니콜라오스 플라스티라스(Νικόλαος Πλαστήρας) 대령을 위시로 한 베니젤로스 정파의 장교들이 9월 11일 쿠데타를 일으켜 왕당파 정권을 붕괴시켰고 콘스탄디노스 1세는 군부의 압박을 받아 퇴위하여 아들 요르요스 2세(Georgios II)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이탈리아로 망명하게 된다. 그리스 측은 이스탄불의 메흐메트 6세 술탄에게 서한을 보내 메르츠(에브로스) 강 서쪽의 에디르네 인근, 카라아아츠(Karagac)를 포함한 트라키아 동부를 즉각 그리스로 넘기라고 협박했다. 더불어 이즈미르 본거지를 잃은 그리스 군은 부르사도 터키군에 내주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동트라키아로 후퇴했다. 


그리스군은 동트라키아를 지키기 위해 반격 준비에 나섰고 터키군 역시 마지막 목표인 이스탄불과 동트라키아로 진격하려 했다. 그러자 영국은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오지 말라고 터키 의회에 최후 통첩을 날려 그리스를 보호하려 했으나 1차 세계 대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고 또 다시 전쟁이 확전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이탈리아, 프랑스 등의 반대와 결정적으로 미국이 영국에 반대했기에 결국 영국 정부는 한 발 물러서게 된다. 그렇게하여 10월 11일 무다니아(Mudanya)에서 터키 의회와 협상국 사이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전쟁은 마무리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쿠데타 이후 복귀한 그리스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Eleftherios Venizelos, 1864~1936)는 동트라키아, 특히 에디르네만큼은 어떻게 해서든지 지키려 노력했으나 결국 휴전에 동의하여 동트라키아에서 그리스군은 철수하게 된다. 이로써 터키군은 동트라키아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로잔에서의 2중 조약은 끈질기게 진행되었다. 영국은 그리스군이 터키군에게 패배해 에게 해로 밀려나자 궁지에 몰린 그리스군을 구하고 전쟁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스메트 파샤에게 이스탄불 부근의 동트라키아와 에게 해의 섬들 중 한 쪽을 선택하라는 조건을 걸었다.


이에 이스메트 파샤는 세르브 조약의 전면적인 폐기를 요구했다. 기존의 세르브 조약은 다음과 같은 조건이 걸려 있었다. 


① 그리스 왕국 : 스미르니를 위시로 한 이오니아 지방과 수도 코스탄티니예 (현 이스탄불)을 제외한 동트라키아 전역, 에게해의 임브로스와 테네도스 섬의 획득

② 이탈리아 왕국 : 반도 서남부 (프리기아-콘야-안탈리야) 할양

③ 프랑스 공화국 : 킬리키아, 카파도키아, 디야르바크르 일대 할양

④ 영국 : 동남부 (반 호수 남쪽 일대) 할양

⑤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 : 동부 (트라브존-에르주룸-반 호수) 할양

⑥ 쿠르디스탄 자치령 : 아르메니아 영토와 영국령 제외 전역, 쿠르디스탄의 확실한 독립


그러나 더 이상의 시간을 끌다가 그리스마저 터키에게 점령당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다급해진 영국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반발을 누르고 폐기에 합의했다. 또한 그와 같이 다급해진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소련의 움직임이었다. 소련은 터키군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는 동시에 아르메니아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고 터키 동부 지역에 모든 전력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에서 아르메니아는 소련의 기습 공격을 받았던 것이다. 소련군은 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을 빠르게 장악하고 오늘날 터키 동부 지역으로 빠르게 밀고 내려와 도시들을 접수하기 시작한다. 이에 놀란 아타튀르크 케말은 소련과 카르스에서 만나 협상에 돌입했고 당시에 이라크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영국군도 소련군과 맞서기 위해 출병하자 소련은 현 아르메니아 땅을 장악하고 동부 지역은 터키가 장악하는 선에서 마무리 짓고 철군하게 된다. 이로써 이라크에서 출병한 영국군은 도중에 발이 묶이게 되었고 아타튀르크 케말은 영국에 강한 경고를 날리자 영국군은 즉시 이라크로 퇴각했다. 터키 동부의 아르메니아 영토는 이렇게 하여 터키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결국 터키는 동트라키아를 선택하고 에게 해의 섬들과 키프로스를 포기함으로써 로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과정에서 독립을 약속한 쿠르디스탄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 로잔 조약이 체결되기까지 1년 여 동안의 과정에서 쿠르디스탄 독립에 대한 논의는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 조약에서 쿠르디스탄 대표는 아예 참석조차 하지 못했다. 집단서방, 영국이 쿠르디스탄은 대표를 보낼 필요 없이 영국이 알아서 독립을 약속해주겠다고 하여 그들은 대표를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쿠르디스탄은 영국을 절대적으로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영국은 로잔 조약에서 쿠르디스탄 독립에 대해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결국 영국은 쿠르드인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셈이다. 조약이 체결된 이후, 영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실을 안 쿠르드인들은 분노했다. 그러나 이미 조약은 체결되어 끝난 상황이었고 터키군이 갑자기 쿠르디스탄 영토에 진주하면서 쿠르디스탄은 단 한 번의 저항도 제대로 못 해보고 터키에게 굴복했다. 


자신들이 스스로 싸워 쟁취하지 않고 모든 것을 외세에 의존한 민족의 최후였다. 이는 세계사에서 최대의 교훈이 되었다.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나라와 민족이 어떻게 버려지는지, 그로 인한 트라우마와 민족적 후회가 어떻게 남아있는지, 그리고 강대국들에게 끊임없이 독립을 약속 받지만 결국 이용당하며 또 다시 팽해지는 안타까운 역사는 현재에도 되풀이 되고 있다. 2023년 7월 24일, 로잔 조약 100주년을 맞이해 터키 동남부 지역의 쿠르드인들은 조약의 무효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러면서 독립을 요구하였고 독립에 대한 주민들 찬반투표가 공식적으로 열려지도록 터키 의회에 강하게 요구했으나 이는 철저히 묵살되었다. 쿠르드족은 한 번의 기회를 외세에만 의존해 독립을 날려버린 비운의 민족이 되어 오늘날까지 최장기간 디아스포라 민족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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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디스탄의 독립을 날려버린 로잔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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