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2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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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절대 권력의 상징, 이탈리아 현대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거물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1936~2023)가 오늘 오전 밀라노의 산 라파엘레 병원에 별세했다. 베를루스코니는 만성 골수 백혈병(CML)에 따른 폐 감염으로 지난 4월 5일부터 45일간 이곳 병원에 입원했었다. 약간의 차도가 생겨 지난 달 5월 19일에 퇴원했다가, 최근 다시 상태가 악화되어 다시 입원 치료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확한 사망 원인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으나, 지병인 백혈병 악화에 따른 합병증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록 정치적인 행적으로보나 사생활적인 부분을 보면 그리 도덕적인 인물은 아니지만 1994년부터 2011년까지 3기에 걸쳐 총리로 장기간 집권하며 이탈리아 현대사와 유럽 현대사에 있어 한 획을 그은 인물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게다가 그의 기행이 무엇이든, 부정부패를 많이 저질렀고 이탈리아의 경제를 파탄나게 했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계속 장기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전 이탈리아 국민들에 있어 애증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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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AC밀란 구단주 시절의 베를루스코니, 출처 : AC밀란 홈페이지

 

 이는 그의 정적이나 마찬가지였던 마테오 렌치 전 총리도 그를 추모하며 트위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사랑했고, 또 미워했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베를루스코니의 업적으로는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스포츠, 텔레비전 등 이탈리아인의 삶에 미친 막대한 영향을 인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현 이탈리아의 집권당인 FdI는 “우리는 그를 이탈리아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결단력 있으며 높이 평가받는 인물 중 하나로 기억할 것”이라며 “그의 가족에 진심 어린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현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또한 베를루스코니를 “투사”라고 칭하며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을 절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 용기와 결단력이 그를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우리는 그와 함께 싸워 이기고, 패배하는 등 많은 전투를 치러왔고 그를 위해서라도 우리가 함께 세운 목표를 지킬 것”이라며 작별을 고했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이끌었던 전진 이탈리아당은 “우리는 당신을 절대 보낼 수 없다”며 “안녕히 가세요 총리, 당신의 정치 공동체로부터”라고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귀도 크로세토 이탈리아 국방장관 또한 트위터를 통해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의 죽음은 “큰 빈자리를 남겼다”며 “한 시대가 지나가고, 한 시대가 막을 내린다. 나는 그를 매우 사랑했다”고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의 오랜 정치적 동지인 안토니오 타야니 이탈리아 부총리 겸 외교장관은 “슬픔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감사했다”고 애도했다. 베를루스코니와 경쟁했던 중도 좌파 민주당의 엘리 슐레인은 “모든 것이 우리를 분열시키고 그의 정치적 비전으로부터 우리를 갈라놓았지만 인간적으로 우리나라 역사의 주인공이었던 한 사람에 대한 존경은 여전히 남아 있다. 민주당을 대표해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했다. 마테오 살비니 이탈리아 부총리 겸 교통장관은 “오늘 위대한 이탈리아인이 우리에게 작별을 고했다”며 “어떤 관점에서 보든 모든 분야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오늘 위대한 친구를 잃었다”며 망연자실한 심정을 덧붙였다. 그가 행한 비행이나 기행에 비해 이런 정도를 평가와 애도를 받는다면 베를루스코니가 얼마나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애증의 존재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마 한국이었으면 평생 욕 먹어도 모자랐을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베를루스코니는 악행도 무수히 남겼지만 업적도 그만큼 남겼던 유럽 현대사에 있어 "살아있는 고목이자 거물"이었다. 파올로 젠틸로니 유럽 집행위원회(EC) 재무장관 겸 전 총리는 “최근 수십 년간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지도자,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별세했다”라고 애도했으며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총리에 대해 유럽의 위대한 정치인이고 정치의 '마지막 모히칸족' 중 한 명이었다"며 "베를루스코니가 권좌에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이탈리아에 좋은 일이었으며, 이탈리아 내정을 안정시키는 요인이었다." 라며 그를 추모했다. 


베를루스코니는 1936년 밀라노에서 출생했다. 그는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병역기피를 한 것과 크루즈 함선에서 가수를 한 것을 제외하면 매우 평범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건설업 사장이 되어 밀라노 교외에 밀라노2라는 이름으로 아파트 분양을 했는데 이게 대박나면서 건설 재벌이 될 수 있는 길을 열게 되었고, 당시 밀라노 시장인 베티노 크락시와도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고 이후 베티노 크락시는 그의 정치 스승이 된다. 이후 자유 라디오 운동에 큰 영감을 받아 방송 진출이 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1973년 텔레밀라노라는 케이블 방송사를 열어 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1977년 이탈리아 헌법재판소 판결로 민영방송 금지조항이 폐지되자 방송사업을 더욱 확장해 지상파 방송사를 차리면서 언론계 재벌로 급성장하게 된다. 이처럼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자금을 어떻게 조달했는지에 대해 시칠리아 마피아와의 연루설과 정경유착설 등 여러 구설수들이 있었지만 지주 회사 핀인베스트의 복잡한 지분관계로 인해 제대로 된 수사 없이 넘어갔다. 당시 이탈리아는 베를루스코니가 정계에 있기 전부터 이미 부정부패와 그로 인한 언론통제가 만연한 사회였던 것이다. 


이에 타 군소 민영방송사(Rete4, Italia 1)들의 지분을 구입하여 최종적으로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 자신의 방송이 송출되는 광활한 방송망을 가지게 되면서 본격적인 언론계 재벌이 된다. 1983년 베를루스코니의 자금 지원을 받은 그의 정치적 스승인 베티노 크락시가 총리가 되자 베를루스코니는 이러한 기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방송 규제의 완화를 이끌어냈고, 그로 인해 더욱 큰 돈을 벌게 되었다. 방송 규제 완화 규정 중 일부가 로마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을 받으면서 세의 확장이 주춤했었지만, 기민당과 사회당에 정치자금을 적절하게 제공했고 1990년 생방송 뉴스 프로그램 방영까지 할 수 있게 되면서 정치적인 영향력까지 거머쥐게 되는, 이른바 거물로써 출발이 이루어졌다. 1992년 마니 풀리테, 불법 정치 자금 사건으로 인해 베티노 크락시를 비롯한 유력 정치인들이 몰락하게 되면서, 1994년 총선에서 좌익민주당의 집권이 유력해졌다. 이 때 베를루스코니는 전진 이탈리아당(Forza Italia)을 창당하고 직접 정치에 뛰어 들었다. 


베를루스코니는 비디오 민주주의라는 평이 나왔을 정도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방송망과 신문들을 총동원하여 기존의 사회당과 기민당 지지층을 대거 확보했고, 성공한 기업가 겸 A.C 밀란 축구 구단주로서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총선에서 승리했으며 우파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총리에 취임하게 된다. 하지만 막상 집권 이후에는 북부 동맹과의 불화가 있어 결국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총리직에서 내려와야 했고 1996년 총선에서 참패해버렸다. 그러나 자신의 주특기인 미디어를 이용해 좌익 민주당을 대대적으로 공격한 끝에 2001년 총선에서 다시 승리하였다. 2기 집권 당시에는 이라크 전에 참전하는 문제와 RAI 장악 등으로 여러모로 평이 좋지 않았고, 경제 정책도 생각보다 큰 이슈를 만들어 내지 못하여 이전 정권과 다를 바 없다는 평을 받게 된다. 그러한 와중에 1당을 안정적으로 장악하기 위해 선거법을 개정하였는데 2006년 총선에서 아깝게 패배해버렸지만 득표율이 1% 차이도 나지 않았기 때문에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더불어 2008년 총선에서 또 한 번의 승리를 거두며 3선 총리가 되었다. 세 번째로 총리가 되자 중도우파 정당인 자유의 인민을 창당해서 2개 당의 당 대표까지 역임했다. 3기 집권 내내 이탈리아 경제는 악화된 상태로 떨어졌고 청년 실업률은 30~40%대까지 치솟아 결국 2년 만에 총리직에서 퇴진했다. 2013년 의원 임기가 종료되자 자유의 인민당을 정리했다. 2017년 지방선거에서 베를루스코니는 의외로 선전하면서 정치적으로 부활에 성공했다. 2018년 총선에서 베를루스코니는 극우파 북부동맹을 포함하는 중도-우파 연합을 맺어 선거에 임했다. 때마침 집권 중이었던 중도좌파 민주당이 포퓰리즘 정당인 오성운동의 집권을 막으려는 목적에서 선거법을 개정하여 원내 1당에게 다수의석을 부여하는 방식의 선거법을 철폐하고 정당 연합도 표를 받을수있도록 선거법을 통과시켜 놓았다. 그러자 베를루스코니를 싫어하는 유권자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베를루스코니가 정치적으로 완전히 부활하게 된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 지식인들이나 많은 국민들에게 무능한 정치인을 넘어 공공의 적 취급을 받았다. 특히 현대 이탈리아 영화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중 한 명인 난니 모레티는 거의 마이클 무어가 조지 W. 부시를 싫어하는 수준으로 베를루스코니를 극혐하여 베를루스코니를 비판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움배르토 에코는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치인이 언론과 결합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지 예로 들기도 했다. 바티칸과 한 때의 동맹이었던 우파 정치인들에게까지 비난을 받았다. 그는 여성편력 또한 대단하고 갖가지 망언을 아무렇지도 쏟아냈다. 그래도 그가 이탈리아 내에서 인기가 있는 이유는 이탈리아 국민들의 감성과 문화를 자극하는 고도의 이미지 메이킹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를루스코니 가(家)와 그의 친인척들이 이탈리아 민영 언론을 독과점했기 때문인 것도 있다. 더불어 2013년 이후부터 시민결합을 지지해왔고 동성결혼에 있어서도 적극적 반대가 아닌 유보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는 결국 백혈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갖은 기행과 비행을 저질렀지만 유럽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거물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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