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28(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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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그래픽이다.(그래픽=저널인뉴스)

 

니체와 불교에 관한 글을 읽다가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시간 있나? 한 게임 하자!” 나는 그 친구의 제안에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 무한한 긍정이다. 읽던 책을 덮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그 친구와 만나면 하는 일이 항상 동일하다. 당구 게임으로 승부를 가리고 지는 사람이 술 한잔 사는 것이다. 오늘은 내가 졌다. 늦은 점심과 함께 소주 각 일병씩 마셨다. 

 

술안주로 각자의 일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를 통해 들었던 이야기가 신선한 충격이었다. 사회복지사로 활동 중인 친구의 이야기는 이렇다. 재산이 무척 많은 90대의 어르신이 몸이 불편해서 재가 복지 서비스를 받는데, 자신을 돕기 위해 방문하는 요양보호사에게 안 줘도 될 돈을 준다고 한다. 그분의 생각은 이렇다. “저 사람이 부유하지도 않을 텐데 나를 위해 저렇게 봉사를 하니 내가 당연히 보상해야지!”


부자도 저런 부자가 많은 사회라면 그들을 귀족으로 대우해주는 귀족사회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니체를 읽고 있어서 든 생각이었다. 니체는 귀족주의를 강조했다. 니체는 동정을 부정했지만, 이런 이야기도 했다. “고귀한 인간도 역시 불행한 자를 돕기도 하지만, 그것은 연민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넘쳐흐르는 힘이 낳은 충동 때문이다.” 그 어르신도 분명히 넘쳐흐르는 힘에 의한 충동으로 자신을 돕는 요양보호사에게 두둑한 보너스를 지급했을 것이다. 

 

니체가 말한 힘에의 의지가 그 어르신과 같이 자기 자신의 충만한 힘을 바탕으로 삶을 긍정하는 자세라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필요한 덕목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한 귀족주의의 역시 저런 유형의 귀족이라면,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니체는 평등을 노예의 도덕이라고 비난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소주 한잔하면서 친구에게 털어놓은 나의 고민도 그 부분이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니체가 강조하는 힘에의 의지와 삶을 긍정하는 니체의 철학은 오늘날에도 수용할 수 있는데, 평등을 노예의 도덕이라고 비난하고 대중을 경멸한 부분, 그리고 위계적 질서를 강조하는 니체의 귀족주의는 니체의 해석에 아직도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처럼 논란이 되는 부분을 니체의 전체 사상과 조화를 이루면서 현대에서도 수용가능한 하나의 줄기로 풀어내야 하는데, 아직도 그 실타래를 풀지 못한 것이 나의 고민이다. 하지만 사실은 고민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즐기고 있기 떄문이다. 아모르 파티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내 운명을 사랑한다. 그리고 즐긴다.


물론 니체 전공한 학자들이 니체의 귀족주의는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힘을 야만적으로 발휘하는 착취적인 영웅주의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 극복을 해나가는 고차적인 도덕적 인간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는 한다. 또한 나의 은사이기도 하며, 독일에서 니체를 전공한 1세대 니체 전공자라고 불리우는 정동호 선생님은 “니체가 평등을 거부하고 엘리트 산출을 위한 인간 사육을 획책했다는 비판이 있지만, 그가 거부한 것은 인간을 퇴화시키는 계량화된 평등이었으며 인간 사육 역시 인류 전체의 양육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니체는 인류의 정신적 치료사라는 이야기이다.


나의 지인인 우희종 선생님은 언젠가 나에게 물었다. “이 선생님은 왜 그렇게 책을 많이 읽습니까?” 그 질문에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솔직한 내 마음을 전했다. “대학 때 계속 공부하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서 석박사과정을 밟지 못했습니다. 젊었을 때 이루지 못한 꿈을 60이 넘은 나이에 실현해 보려고 책을 읽습니다.” 나의 솔직한 마음이다. 학부 4년 동안 여러 교수님에게 교육받은 노트를 아직도 보관 중인데 얼마 전에 풀어헤쳐 보았다. 

 

두꺼운 대학 노트 12권에 작은 글씨로 빽빽이 적어 놓은 노트를 펼쳐보니 놀라웠다. “이런 수업도 들었나?” 특히 한문과 수학 기호로 가득한 한국철학과 기호논리학 노트는 외계인의 글씨처럼 낯설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러한 수업 모두 A학점을 받았다. 4.0만점에 나의 졸업 평균 학점은 3.8점 이상이다. 그러니 한때는 외계인의 언어를 이해했다는 말이 된다.


내가 니체와 불교에 관심을 갖는 것은 미래의 바람직한 인간상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립하고 싶어서이다. 불교, 특히 대승불교가 추구하는 바람직한 인간은 보살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인간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니 누구나 보살이 될 수 있다. 니체에게 있어서도 인간은 가능성으로서의 인간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미래의 인간상은 위버멘쉬이다. 니체는 신을 전제로 하지 않는 동양의 불교를 기독교보다 우수하다고 평가했다. 

 

한편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포하면서 신의 빈자리에 위버멘쉬를 두고자 하였다. 그렇다면 보살과 위버멘쉬의 공통점이 있지 않을까? 아마도 니체는 대승불교에 관한 지식은 없었을 것이다. 니체가 알고 있었는 불교는 초기불교일 가능성이 높다. 지금까지 읽었던 나의 짧은 독서로서는 그렇다.


지금까지 독서로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불교에서 말하는 사무량심은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고 괴로움과 미혹을 없애주기 위해 보살이 가지는 자, 비, 희, 사의 4가지 무량심을 의미한다. 불교는 연기설을 중심으로 하는 사고체계이기에 관계 중심적인 세계관이 바탕에 깔려있다. 그러하기에 불교의 중심은 자비를 통한 중생의 구제이다. 이는 분명히 파리떼나 무리 군중이라는 비유로 대중을 비하는 니체의 사유와는 다른 부분이다. 

 

니체는 위버멘쉬에 대한 구체적인 기술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가능성의 존재이고, 위버멘쉬로 나아가야 하는 도상의 존재이다. 위버멘쉬는 니체 사상의 핵심인 힘에의 의지를 바탕으로 영원회귀라는 운명을 사랑하는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의 삶에 대한 긍정과 우주와 하나가 되는 체험을 통하여 세계와 자신의 존재를 사랑하는 사람을 말한다. 보살과 위버멘쉬의 공통점이 있다면, 인간의 가능성을 극대화하고자 함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교가 강조하는 자비와 니체가 강조하는 힘에의 의지에 있어서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까? 건널 수 없는 차이가 있다면 무엇일까? 이러한 문제들을 풀어내기 위해 나는 내일 또 다시 니체와 불교에 관한 책을 읽을 것이다. 새벽 두 시의 상현달이 창밖에서 나를 보고 빙그레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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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과 위버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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