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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계 쿨리들이 세계에 진출한 과정
    1807년 영국에서는 인도주의와 효율성 및 비용의 이유로 흑인 노예무역을 금지하였다. 이로 인해 노동력을 흑인 노예로 충당해왔던 영국의 해외 식민지에서 흑인 노예 대신 데려온 중국이나 인도 출신의 계약 노동자들을 이른바 쿨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우선은 중개인과 몇 년 단위로 계약을 맺고 일하는 방식이라 노예와는 다르긴 했으나, 쿨리로 이주할 정도면 대개 소작농처럼 가난한 계층이라 계약서를 읽을 줄 몰랐으니 크게 의미가 없었다. 같은 중국인 혹은 인도인 십장 아래에서 가장 기본적인 생활 요건만 갖춘 채 열악한 조건 하에서 일하는 동안 상당수가 현지에서 사망하였다. 특히 중국인들은 대개 광산업, 부두, 건설, 토목 등에 동원되었다면 인도인들은 고무농장, 사탕수수 농장 플랜테이션 노동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인 쿨리들은 크게 보면 싱가포르 화교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싱가포르의 중국계 싱가포르 인, 말레이시아의 중국계 말레이시아 인, 페라나칸(Peranakan)의 조상들도 이러한 쿨리들이 대부분이다. 동남아시아와 호주에는 인도계와 중국계 모두 이주가 활발하였고 남아프리카의 경우 중국인 쿨리는 드물게 나타나면서 대개 인도인들이 이주하였다. 물론 중국인들도 이주해 요하네스버그에 차이나타운이 들어서기도 했다. 아메리카 중 캐나다, 가이아나의 경우 한동안 영국 연방에 속했던 이유로 인해 인도계 이민과 중국계 이민이 모두 활발하게 나타났지만, 영국 연방 소속이 아니었던 멕시코, 미국, 페루, 칠레, 푸에르토리코, 쿠바,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등에는 주로 중국계들이 정착하였다. 그리고 브라질은 주로 일본인 이민을 받았으며 그 사이로 마카오 출신으로 자발적으로 이주한 중국인들도 섞여 들어왔다. 라틴 아메리카에 인도계가 거의 보내지지 않은 이유는 이들의 얼굴이 메스티소와 물라토와 비슷해 도주하면 체포하기 어렵기도 했고, 힌두교와 이슬람교 등 종교 색이 뚜렷하여 철저한 카톨릭 신자들인 라틴 아메리카의 백인 농장주들이 들여오기 어렵기 때문인 것도 있었다. 특히 멕시코로 건너간 쿨리들은 1911년 멕시코 혁명 당시에 백인과 메스티소 출신 멕시코 인들에게 학살당하기도 했다. 노예 제도로 돌아가던 농장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읽지도 못하는 영어나 스페인어로 된 사기 계약서에 서명하고 들어온 중국인 이주민들은 현지 농장주들에게 있어 노예나 다름없었다. 북경 조약 중에는 당시 해외 이주를 제한하던 청나라에 대해 백성의 자유를 보장해 달라는 내용이 있는데, 청나라 인이 영국 식민지 등의 해외에 나가 일자리를 얻는 것은 자유이며, 이를 위해 영국의 선박에 탑승하는 것은 완전히 자유라고 인정했다. 중국인은 노예로 나갈 자유가 있고 이를 위해 중국인을 노예 함선에 태우는 것도 자유라는 것에 있다. 이러한 실상이 드러난 것이 마리아 루즈 호 사건(マリア・ルス号事件)을 들 수 있다. 페루 선적의 마리아 루즈 호가 카야오로 향하던 중에 수리를 위해 요코하마에 기항하자 쿨리 한 명이 도주하여 구해 달라면서 일본 당국에 호소한 사건으로, 일본이 출항을 금지시키고 조사한 결과 이 배의 모든 계약 노동자들이 문맹으로 어떤 내용인지도 알지 못하는 채 극도로 비인간적인 조건의 계약서에 서명했음이 드러났다. 더 충격인 것은, 그나마도 납치당해 끌려 온 사람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참상은 마리아 루스 호 사건으로 실상을 알게 된 청나라 조정이 1874년에서 1880년에 걸쳐 멕시코와 미국, 캐나다, 싱가포르 등으로 관리를 파견하고 협약을 개정함으로서 개선하게 된다. 미국으로 간 쿨리들은 주로 캘리포니아 등 태평양과 면한 미국 서부 지역에서 일했는데, 계약 기간은 기본적으로 8년이었으나 극도로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기간을 채우기 전에 사망하는 인원이 전체의 80%에 달했으며 이에 반기를 들거나 고향으로 탈출을 시도하면 총살당했다. 서부에서 이들은 조니(Jonnies)라는 유래를 알 수 없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혹독한 착취는 기본이었다. 이와 같이 험한 서부에서 He doesn't have a Chinaman's chance (아무런 기회도 없다)는 숙어가 생겼을 정도였다. 백인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중국인 마을을 공격하여 학살하는 사건까지 존재했는데, 이에 대해 미국인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다만 세계 각지로 끌려간 중국계 쿨리들이 흑인 노예의 운명을 그대로 이어받지 않았다. 중국인 특유의 사업 수완을 살려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의 가까운 동남아시아는 물론 모리셔스, 수리남, 가이아나 같은 대륙 반대편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에서 화교들이 최상류층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에 19세기 영국이 노예무역을 금지하면서 모리셔스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할 노동자로 중국인과 인도인 노동자들을 사기 계약으로 속여 모리셔스에 데려왔다. 인도인 노동자들의 경우 남녀 성비가 3:1 이상인 수준이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일처다부제가 이루어진 정도였지만, 중국계의 경우 남녀 이민 성비가 9~99:1 수준이었다. 대부분은 그냥 귀국하거나 흑인 여성과 결혼한 뒤 흑인 사회에 동화 되어 버리고, 극소수 부자들만이 현지에서 100대1의 경쟁률을 통과하거나 본국에서 다시 중국인 배우자를 데려오는 형식으로 중국계의 정체성을 유지했기에 중국계는 부자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중국계 미국인들의 후예들은 미국의 대륙 횡단 철도를 자신들의 조상이 건설한 것이라고 하여 이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며, 홍콩 영화에서 미국의 개척 시대가 나오면 늘 쿨리가 등장하게 되어 있다. 전근대 시대부터 시작된 대륙 횡단 초장거리 철도공사는 그 열악함으로 인해 사상자가 많았던 악명 높은 공사였기 때문에, 철도 침목 하나 놓을 때 마다 쿨리 한 명씩 죽었다는 소문이 들렸을 정도로 가혹한 노동 환경에 수많은 인부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관련 홍콩 영화로는 “황비홍의 서역웅사(黄飛鴻之西域雄師)”가 대표적이다. 희귀하게 철도노동을 하던 쿨리들의 일부가 남북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인천항 부두 등에서 항만 잡부 등으로 들어왔으며, 현재 인천에는 한국에서 가장 큰 차이나타운이 들어서 있다. 물론 오늘날 중국계한테 “쿨리”라고 부르는 행동은 인종차별성 멸칭이 되기 때문에 쿨리라는 어휘는 역사와 관련된 설명 외에는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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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7-08
  • 러시아는 한 때 현재 미국 켈리포니아까지 정복한 적 있다
    러시아 출신의 슬라브 인의 최초의 알래스카 정착 기록은 1648년 세묘나 데쥐뇨바(Семёна Дежнёва)가 콜리마 강에서 출발하여 북극해를 가로질러 아나디리 강의 하구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로마노프 연대기(Хроника Романов)>에서 전해진다. 시베리아에서 건너온 아시아-아메리카 토착민들의 혼혈과 더불어 러시아-슬라브 인들의 후손들은 러시아가 알레스카를 팔기 전까지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최초 시민이 되었다. 세묘나 데쥐뇨바(Семёна Дежнёва)의 탐험대 중 일부는 알래스카에 먼저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었으나, 그들이 알래스카에 정착했다는 기록은 현재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데쥐뇨바의 탐험은 러시아 중앙 정부로부터 시작되어 연결된 것이 아닌 시베리아의 끝 지역이 어디인지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고 시베리아가 다른 대륙과 연결되어 있는지에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상륙만 했던 것 뿐이다. 그로 인하여 1725년에 표트르 1세가 탐험을 한번 더 부탁했으나 데쥐뇨바가 1721년에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결국은 무산되었다. 1733~1743의 제2차 캄차카 지역의 탐험 일부로 1741년 6월에 덴마크 탐험가인 비투스 베링(Vitus Berin)이 이끄는 페트르 탐험대와 러시아인 알렉세이 치리코프(Алексей Чириков)가 이끄는 파벨 탐험대가 캄차카 반도의 항구 뻬뜨로빠블로쁘스끄 깜쨔츠끼(Петропавловск-Камчатский)에서 원정을 시작했다. 두 탐험대는 후에 따로 분리되었지만 동쪽으로 항해를 계속하면서 6월 15일에 치리코프(Чириков) 일행이 알레스카 남단의 프린스오브웨일스(Prince of Wales Island) 섬 서부 해안의 땅을 발견하고 북아메리카 북서부 해안가에서 최초로 유럽인들을 정착시키게 된다. 6월 16일경에 베링과 페트르 탐험대는 알레스카 본토의 세인트 엘리아스(Saint Elias) 산을 발견하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에 동시에 파벨 탐험대의 치리코프는 10월달에 새로운 땅인 알류산 열도 중 한 곳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러나 11월에 베링의 배는 러시아로 돌아오는 도중 베링 섬에 난파되었고 그곳에서 베링은 풍토병에 걸려 사망했다. 이어 출항한 페트르 탐험대는 돌풍을 만나 갈라지게 되면서 각 섬 지역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곳이 알류산 열도에 속한 군도들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선원들은 엄청난 추위가 닥치는 알류산 군도에서 겨울을 버틴 후에 1742년 8월에 난파선의 조각으로 배를 만들어 러시아로 떠나게 된다. 그 이후 시베리아와 알레스카 사이의 협수로를 덴마크 탐험가인 비투스 베링(Vitus Berin)의 이름을 붙여 베링 해협이라 불리게 되었다. 베링의 선원들은 1742년에 캄차카 반도의 해안에 도달했고 탐험에 대한 이야기들을 저술로 남겼다. 이때 그들이 가져온 고급 해달 가죽은 러시아 인들이 아메리카 정착을 본격적으로 노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때 이후로 알류산 열도와 알레스카가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었고, 19세기 초에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있던 북아메리카 서부 지역 인디언들 지역들을 뚫고 오늘날의 미국 오리건주(州)와 캘리포니아 주(州), 캐나다의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州)까지 진출하면서 식민지로 삼았다. 19세기 초반에 러시아령 아메리카는 남쪽으로 스페인령이던 멕시코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총책임자였던 니콜라이 레자노프(Николай Резанов)는 알렉산드르 1세의 명으로 러시아령 아메리카 총독으로 파견되어 스페인 측과 협상을 하도록 했다. 레자노프는 스페인령 지역과의 국경 지대에 러시아 인들을 진출하는 것에 대해 러시아 정부가 직접적으로 후원하려는 방편으로 요새의 건립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본국인 이베리아 반도와 지리적으로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세력도 한창 활발했던 16~17세기 같지 않았던 스페인은 역사적으로도 러시아와 인연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잘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이러한 요구를 흔쾌히 들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켈리포니아 지역에 러시아 요새가 건립이 되는데 러시아 아메리카 총독인 니콜라이 레자노프는 요새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807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지 5년이 지난 1812년에 비로소 요새가 건립되었고, 그 요새가 바로 로스 요새(Fort Ross)이다. 만약에 러시아가 오리건이나 켈리포니아, 브리티시 콜롬비아까지 모두 장악하고 유지했었다면 그거야 말로 역사상 유래가 없었던 세계 최대 제국이자 영토였을 것이다. 아마 미국도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비슷한 예로 몽골 제국이 있지만 당시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는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을 정복했고 우즈베키스탄의 3개의 칸국에게서 조공을 받아 정복 전 단계에 놓여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캐나다 서부와 미국 서부의 영토를 가졌다면 그만한 대제국은 전에도, 후에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캘리포니아는 러시아 본국에서 너무 멀었기 때문에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들었고, 설상가상으로 알레스카 지역으로 미국 상인들이 진출하면서 알레스카 지역에서의 미국에 대한 경제적인 의존도가 심해지자, 결국 러시아는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켈리포니아와 오리건, 브리티시 콜롬비아를 포기하고, 경제적 중심지인 알레스카 지역에 집중하기로 하면서 로스 요새는 거의 버려지다시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에 러시아와 영국 간에 벌어진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이라고 불리는 대치전 때문에 러시아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경영은 더욱 어렵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영국령이던 캐나다의 산하 회사인 허드슨 만 회사에 알레스카를 통과하여 항해할 수 있는 권리를 넘겨줌으로써 알류산 열도가 영국의 위협을 받게 되자 러시아는 1867년에 알레스카를 미국에 팔아치우게 된다. 1에이커 당 2달러의 가격으로 미국이 알레스카를 거저 먹은 것이다. 따라서 로스 요새를 비롯한 미국 서부 지역은 자연히 미국 영토로 넘어가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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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30
  • 라틴 아메리카 독립 영웅이자 대부 시몬 볼리바르에 대한 평가, 명(明)과 암(暗)
    볼리바르는 아르헨티나와 칠레에서 스페인 세력을 격퇴한 호세 데 산 마르틴과 과야킬 회담을 한 이후, 부장인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Antonio José de Sucre, 1795~1830) 를 보내 아야쿠초와 후닌 전투에서 스페인의 부왕(副王, Viceroy)을 사로잡는 성과를 올리게 된다. 원래 스페인의 부왕은 본국 군주를 대신하여 한 지역을 통치하는 직책으로 다른 나라의 총독에 해당하고 직책이다. 참고로 19세기 독립하기 전 멕시코를 비롯한 중앙아메리카 일대는 누에바에스파냐 부왕 령(領)으로 총독 직할지였으며 페루에는 페루 부왕령이 설치되어 있었다. 페루를 해방시킨 볼리바르는 남미 대륙에서 스페인 세력들을 영구히 일소시키는데 성공한다. 이후 볼리바르는 지금의 콜롬비아, 에콰도르, 파나마, 베네수엘라에 해당하는 그란 콜롬비아(Gran Colombia)의 종신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볼리바르의 몰락은 이러한 정점에 오른 이후부터 시작된다. 연이은 반란이 발생했고 권력 투쟁이 빈번했다. 그러는 사이 페루 남부가 볼리비아 공화국으로 떨어져 나갔고 1830년에는 결정적으로 정치권에서 실각한 뒤, 콜롬비아에 들어가 여생을 살았다. 정계에서 반강제적으로 은퇴한 이후 볼리바르는 지지자인 호아킨 미에르(Joaquín Mier)의 별장에서 지병인 결핵을 앓으며 요양하고 있다가 콜롬비아 북부의 산타 마르타 근처인 산 페드로 알레한드리노(San Pedro Alejandrino) 농장에서 폐결핵으로 인해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는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한 지 불과 8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러한 시몬 볼리바르에 대한 평가는 명과 암이 뚜렷하게 나타난 인물이자 장, 단점이 명확한 인물로, 인간적인 면이나, 그의 정치 철학과 성향에 대해서는 확실히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이었다. 그는 해방자(El Libertador)로써 군인과 군에서 리더로는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다. 1813년 10월,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카라카스 시에 입성한 볼리바르에게 수여된 칭호인 "엘 리베르타도르(해방자)"는 아무에게나 찬사받으며 수여되는 호칭이 아니다. 그러나 볼리바르에게 늘 따라다니는 악평은 그가 진정으로 해방하고자 했던 것인 스페인 혼혈 백인인 크리오요였고 흑인이나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해당되지 않았다. 그는 인종주의자의 틀을 벗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코뮤니즘 이론을 창설한 카를 마르크스가 1858년 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볼리바르를 언급하며 "가장 비겁하고, 횡포하며, 비참한 악당"이라 평가절하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즉, 인도에서는 영웅일지 모르지만 인류적으로 볼 때 흑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이 심했던 마하트마 간디와 놀랍도록 유사한 부분이 많다. 그러나 그러한 볼리바르에 대해 변명이 아닌 변명을 해보자면 당시 남미에는 유럽계 백인과 백인의 형질이 강한 메스티소 인종들의 인구가 더 많았고 개국 이후, 지배층들이 차루아, 테우엘체, 카웨스카르, 오나, 마푸체, 아파치와 같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을 토벌 및 학살하고 무력으로 원주민 땅을 합병했던 우루과이나 아르헨티나, 칠레, 멕시코 등과는 달랐다. 이는 현재의 에콰도르와 콜롬비아, 페루 등이 속해있던 옛 그란 콜롬비아 지역은 백인, 메스티소, 흑인, 원주민 등등 여러 인종들이 섞여 있었다. 게다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독립국가 수립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고, 심지어 골수 왕당파 성향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그란 콜롬비아의 정치가들은 자신들이 피흘려 건설한 자유 민주주의 정부가 원주민들의 반란으로 인해 무너질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에 있었다. 볼리바르가 유년기 때 그를 보살펴주고 키워줬던 흑인 노예 이폴리타에 대한 호의적인 기억으로 인해 흑인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높은 차별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런 부분은 간디와의 차별성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정치적인 배경으로 볼 때 볼리바르의 원주민을 배제하는 정책이 반드시 인종차별의 의도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현재 스페인-라틴 아메리카 학계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볼리바르가 딱히 백인 우월주의자인지에 대해서 회의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학자들도 많다. 볼리바르는 어릴적에 자기 또래의 노예 아이들과 거리낌 없이 친하게 지냈고 아이티에 망명했을적에 백인과 흑인이 뒤섞인 혼성 군인 아이티 군의 모습을 보고 크게 감명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이런 것으로 볼 때 적어도 흑인에 대해서는 그다지 차별의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또한 볼리바르가 다른 독재자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독재의 패턴이 다르고 다른 자유 민주주의자들에게 인정 받는 점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독재자의 길을 간 것이 아니라는 것에 있다. 보통 독재자들은 자신의 사리사욕이나 권력에 대한 탐욕으로 인해 초심을 잃고 변해갔던 자들이 많았다. 이와는 달리 볼리바르는 이제 막 독립한 남미가 외부의 영향에 흔들리지 않고 큰 통합에 이르기 위해서 소수의 엘리트에 의한 지배가 효과적일 수 있다고 생각해 종신 대통령에 취임했다. 실제로 그는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자신의 권력으로 부정축재를 벌이거나 반대파를 숙청하는 등의 독재자로써 흔히 나타나는 전횡을 부리지 않았다. 그는 반란을 일으켰다 하더라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항복했으면 그의 직위를 그대로 유지시켰으며, 심지어 자신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인물들도 주동자만 국외로 추방하고 나머지는 석방시켜주는 관대한 처벌을 내리기도 했다. 또한 평생 재산에 대한 욕심도 없었는데 그란 콜롬비아 연방이 해체되고 대통령직과 후계자 지명권을 포함한 모든 정치적 권한을 포기하고 물러났을 때, 의회에서 거액의 연금을 평생 지급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는 그것을 거부했다. 물론 원래부터 볼리바르의 집안은 부유했지만 독립 운동을 하면서 가산을 거의 탕진했고, 대통령직에 있으면서도 퇴임 후, 자신이 돌아갈 집조차도 없어 호아킨 미에르의 집에 머물렀으며 모아 놓은 재산도 없었기 때문에 퇴임 후에도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그가 47세에 폐결핵으로 사망했을때, 의사가 장례를 준비하면서 그의 낡고 해진 셔츠를 보고 놀랐을 정도로 그는 청빈한 삶을 살았다. 통일 라틴 아메리카 건설이란 숭고한 이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한계에 부딪혔던 안타까운 실패자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식민지 독립의 영웅이라는 측면에서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나 칠레의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아르헨티나 호세 데 산 마르틴 등과 비슷한 부분이 있었지만, 볼리바르가 독립시킨 식민지는 미국이나 칠레, 아르헨티나처럼 통합된 단일 국가로 성장하지는 못하고 국력을 키우지 못해 이후에도 큰 혼란을 겪었다. 이는 지리적인 요인이 컸는데 오이긴스가 독립시킨 칠레와 산 마르틴이 독립시킨 아르헨티나의 경우 지정학적으로 안데스 산맥을 사이에 두고 태평양과 대서양 연안의 해안 저지대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어 스페인의 식민 통치에서 독립 후 단일국가를 건설하기 수월했다. 그에 비해 볼리바르가 독립시킨 남미 식민지들인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 페루, 에콰도르는 안데스 산맥과 아마존 밀림, 소택지 등 고립되고 험준한 지리 지형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들 국가들을 통합시켜 칠레, 아르헨티나처럼 통일 국가를 남미 대륙에 수립하기에는 지정학적으로도 악조건이 적지 않았다. 워싱턴이나 산 마르틴, 오이긴스보다 더 훨씬 악조건을 갖고 있었고 그로 인해 결과는 썩 좋지 못했다. 조지 워싱턴이 독립시킨 미국의 13개 식민지는 거대한 연방으로서 세계 패권을 장악한 초강대국으로 성장했고 오이긴스가 독립시킨 식민지 칠레, 산 마르틴이 독립시킨 식민지 아르헨티나는 통합에도 성공했으며 독립 이후 한 동안 라틴 아메리카 역내에서 세계 5위의 선진국이자 강대국의 위세를 보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옛 그란 콜롬비아는 안타까운 실정이 아닐 수 없다. 이들 국가들이 볼리바르의 이상을 이루지 못한 것은 물론 볼리바르의 개인적인 문제도 있는데, 일단 볼리바르부터 독재자가 되어 종신 대통령을 하려다가 결국은 자신이 새로 건국한 공화국을 다른 인물에게 물려주었다. 정치적인 독재가 가능했음에도 악한 선례를 남기지 않겠다면서 두 번 재임 후 은퇴한 조지 워싱턴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 또한 볼리바르는 자유 민주주의 공화국의 영향 받기는 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인종주의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았고 아메리카 원주민의 경우, 흑인과 다르게 잠재되어 있는 적으로까지 여겼다. 볼리바르는 흑인을 제외한 유색 인종을 멸시했는데 이는 원주민 공동체 토지 제도를 공식적으로 폐기하고, 그의 기여로 남미가 독립한 이후 원주민들의 처우가 급격히 나빠졌다는 것을 보면 이들에게 있어 볼리바르는 새로운 식민지 독재자와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페루와 볼리비아에서는 다수 민족인 원주민들의 지위가 점점 높아지면서 볼리바르를 국부로 인정하지 않고 존경조차하지 않는 국민들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페루와 볼리비아가 지금처럼 독립국가로 존재하며 잉카 제국의 후신을 칭할 수 있게 된 것도 결과론적으로 보면 볼리바르가 주도한 독립운동으로 인해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애증의 대상 중 하나로 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는 원주민들만이 아니라 중국인 등 황인종 및 노예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란 콜롬비아 건설 이후, 아이티의 '흑인 혁명'에 대해 여타 크리오요들과 같이 매우 급진적이고 위험하다 생각했으며 이후 1812년 제1 공화정 실패 이후 전면적인 노예 해방을 선언했지만 이는 본인의 군대에 가담하는 노예에 한해서 해방시켜 주었다. 그 후 1816년 1월 아이티의 흑인 대통령 페티옹에게 도움을 받기 위해 베네수엘라의 노예 제도를 폐지하기로 약속했고, 아이티의 도움이 그가 식민지 독립을 성취하는 기반이 되었지만 이후 독립 투쟁에 가담한 노예 농장주들에게 지위를 보장하기로 약속했고 1821년 그란 콜롬비아의 대통령이 되었을 때에도 전면적인 노예 해방을 미루어 노예 농장주들과 약속을 우선하는 모습을 보였다. 흑인에 대해서는 그나마 나았지만 시종일관 이중적인 행태를 보이기도 했으며 아이티 방식의 혁명을 경계했다. 볼리바르는 흑인 반란에 대해 스페인의 침입보다 1,000배 더 나쁘다는 발언을 하면서 흑인들의 반발을 샀다. 동시에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던 물라토 지지자들에 대해 정치적인 탄압을 자행하면서 흑인 혁명에 대한 노골적인 적개심을 보였다. 이는 그가 혼혈이었지만 백인으로 받아들여졌으며 크리오요라는 특권계층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볼리바르가 살았던 시대에 가장 큰 논란이 되었고 치명적인 결점으로 비판받았으며 지금에도 자주 회자되는 사건이 구아이라 항구에서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에 대한 배신이었다.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는 볼리바르와 다른 라틴 아메리카 통합론자들의 사상적인 스승었고 독립 투쟁의 선구자(Precurser)로 불리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 독립 운동계의 거물이었던 인물이다. 또한 미란다는 볼리바르를 매우 총애했는데 그를 세계적인 베네수엘라인, 혹은 나폴레옹에게 미치지 않은 돈키호테라고 불렸고, 6개 국어를 구사하는 지식인이기도 했으며 조지 워싱턴 미국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미국 대통령, 윌리엄 피트 영국 총리, 나폴레옹 프랑스 황제, 예카테리나 2세 러시아 차르, 프리드리히 2세 프로이센 왕과 같은 세계 지도자들과 교류하던 명사였다. 그러나 미란다와 볼리바르가 세운 베네수엘라 제1 공화국이 잇다른 악재에 시달리게 되면서 스페인 왕당파의 군세에 의해 수세에 몰리는 등 상황은 악화되자 볼리바르 자신이 지키던 독립파의 중요 거점이었던 푸에르토 카베요의 산 펠리페 성이 함락되면서 미란다는 이대로라면 독립이 좌절될 것이 우려되었다. 우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816년 7월, 왕당파와 휴전 협정을 맺고 영국으로 가서 외교적 지원을 요청하려고 했다. 그러나 볼리바르는 자신을 따르는 장교들을 이끌고 구아이라 항구로 간 미란다를 체포해서 왕당파에 넘겼다. 그 대가로 자기 자신은 왕당파에게서 풀려나 미란다와 자신이 헌신했던 베네수엘라 제1 공화국을 떠나 자메이카로 도주하는 역대급 만행을 저지른다. 이 때 볼리바르가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에게 내린 죄목은 황당하게도 반역죄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볼리바르에게 있어 두고두고 흑역사로 남았다. 후일 본인이 실각된 후, 가장 후회되는 사건이라 회고한 것도 "구이아라 배신 사건"이었고 이는 볼리바르의 어두운 부분을 두고 두고 규탄당하는 트라우마로 남았다. 볼리바르는 정치적으로도, 사상적으로도, 이념적으로도 실패한 인물이지만 라틴 아메리카를 독립시킨 영웅으로써 가치는 아직도 살아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호불호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국부로써 존경도 받고 미움도 함께 받는 애증의 인물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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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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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는 한 때 현재 미국 켈리포니아까지 정복한 적 있다
    러시아 출신의 슬라브 인의 최초의 알래스카 정착 기록은 1648년 세묘나 데쥐뇨바(Семёна Дежнёва)가 콜리마 강에서 출발하여 북극해를 가로질러 아나디리 강의 하구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로마노프 연대기(Хроника Романов)>에서 전해진다. 시베리아에서 건너온 아시아-아메리카 토착민들의 혼혈과 더불어 러시아-슬라브 인들의 후손들은 러시아가 알레스카를 팔기 전까지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최초 시민이 되었다. 세묘나 데쥐뇨바(Семёна Дежнёва)의 탐험대 중 일부는 알래스카에 먼저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었으나, 그들이 알래스카에 정착했다는 기록은 현재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데쥐뇨바의 탐험은 러시아 중앙 정부로부터 시작되어 연결된 것이 아닌 시베리아의 끝 지역이 어디인지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고 시베리아가 다른 대륙과 연결되어 있는지에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상륙만 했던 것 뿐이다. 그로 인하여 1725년에 표트르 1세가 탐험을 한번 더 부탁했으나 데쥐뇨바가 1721년에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결국은 무산되었다. 1733~1743의 제2차 캄차카 지역의 탐험 일부로 1741년 6월에 덴마크 탐험가인 비투스 베링(Vitus Berin)이 이끄는 페트르 탐험대와 러시아인 알렉세이 치리코프(Алексей Чириков)가 이끄는 파벨 탐험대가 캄차카 반도의 항구 뻬뜨로빠블로쁘스끄 깜쨔츠끼(Петропавловск-Камчатский)에서 원정을 시작했다. 두 탐험대는 후에 따로 분리되었지만 동쪽으로 항해를 계속하면서 6월 15일에 치리코프(Чириков) 일행이 알레스카 남단의 프린스오브웨일스(Prince of Wales Island) 섬 서부 해안의 땅을 발견하고 북아메리카 북서부 해안가에서 최초로 유럽인들을 정착시키게 된다. 6월 16일경에 베링과 페트르 탐험대는 알레스카 본토의 세인트 엘리아스(Saint Elias) 산을 발견하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에 동시에 파벨 탐험대의 치리코프는 10월달에 새로운 땅인 알류산 열도 중 한 곳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러나 11월에 베링의 배는 러시아로 돌아오는 도중 베링 섬에 난파되었고 그곳에서 베링은 풍토병에 걸려 사망했다. 이어 출항한 페트르 탐험대는 돌풍을 만나 갈라지게 되면서 각 섬 지역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곳이 알류산 열도에 속한 군도들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선원들은 엄청난 추위가 닥치는 알류산 군도에서 겨울을 버틴 후에 1742년 8월에 난파선의 조각으로 배를 만들어 러시아로 떠나게 된다. 그 이후 시베리아와 알레스카 사이의 협수로를 덴마크 탐험가인 비투스 베링(Vitus Berin)의 이름을 붙여 베링 해협이라 불리게 되었다. 베링의 선원들은 1742년에 캄차카 반도의 해안에 도달했고 탐험에 대한 이야기들을 저술로 남겼다. 이때 그들이 가져온 고급 해달 가죽은 러시아 인들이 아메리카 정착을 본격적으로 노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때 이후로 알류산 열도와 알레스카가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었고, 19세기 초에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있던 북아메리카 서부 지역 인디언들 지역들을 뚫고 오늘날의 미국 오리건주(州)와 캘리포니아 주(州), 캐나다의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州)까지 진출하면서 식민지로 삼았다. 19세기 초반에 러시아령 아메리카는 남쪽으로 스페인령이던 멕시코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총책임자였던 니콜라이 레자노프(Николай Резанов)는 알렉산드르 1세의 명으로 러시아령 아메리카 총독으로 파견되어 스페인 측과 협상을 하도록 했다. 레자노프는 스페인령 지역과의 국경 지대에 러시아 인들을 진출하는 것에 대해 러시아 정부가 직접적으로 후원하려는 방편으로 요새의 건립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본국인 이베리아 반도와 지리적으로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세력도 한창 활발했던 16~17세기 같지 않았던 스페인은 역사적으로도 러시아와 인연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잘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이러한 요구를 흔쾌히 들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켈리포니아 지역에 러시아 요새가 건립이 되는데 러시아 아메리카 총독인 니콜라이 레자노프는 요새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807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지 5년이 지난 1812년에 비로소 요새가 건립되었고, 그 요새가 바로 로스 요새(Fort Ross)이다. 만약에 러시아가 오리건이나 켈리포니아, 브리티시 콜롬비아까지 모두 장악하고 유지했었다면 그거야 말로 역사상 유래가 없었던 세계 최대 제국이자 영토였을 것이다. 아마 미국도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비슷한 예로 몽골 제국이 있지만 당시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는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을 정복했고 우즈베키스탄의 3개의 칸국에게서 조공을 받아 정복 전 단계에 놓여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캐나다 서부와 미국 서부의 영토를 가졌다면 그만한 대제국은 전에도, 후에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캘리포니아는 러시아 본국에서 너무 멀었기 때문에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들었고, 설상가상으로 알레스카 지역으로 미국 상인들이 진출하면서 알레스카 지역에서의 미국에 대한 경제적인 의존도가 심해지자, 결국 러시아는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켈리포니아와 오리건, 브리티시 콜롬비아를 포기하고, 경제적 중심지인 알레스카 지역에 집중하기로 하면서 로스 요새는 거의 버려지다시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에 러시아와 영국 간에 벌어진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이라고 불리는 대치전 때문에 러시아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경영은 더욱 어렵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영국령이던 캐나다의 산하 회사인 허드슨 만 회사에 알레스카를 통과하여 항해할 수 있는 권리를 넘겨줌으로써 알류산 열도가 영국의 위협을 받게 되자 러시아는 1867년에 알레스카를 미국에 팔아치우게 된다. 1에이커 당 2달러의 가격으로 미국이 알레스카를 거저 먹은 것이다. 따라서 로스 요새를 비롯한 미국 서부 지역은 자연히 미국 영토로 넘어가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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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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