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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지아 서부를 장악하고 있는 아자리야인들의 역사와 아자리야 자치공화국 - 上편
    조지아 서부 지역과 가장 큰 도시인 바투미를 장악하고 있는 아자리야 자치공화국의 주민 중 대부분이 아자리야인이다. 조지아 서부 지역에 대해 고고학자들이 말하길 서부 지역에서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다 하였다. 이 지역을 과거에 모스흐(Moskh)라 불렸는데 이 지역운 고대 조지아 부족이 출현함으로써 B.C 7~3세기에 아자리야의 땅은 고대 콜키스의 지방이 되었다. 그 지역의 일부는 B.C 4세기 후반에 이베리아 왕국에 속하는 나라를 형성했다. B.C 5, 4세기에는 그리스인에 의해 식민지화되어, 해안의 아자리야는 후일에 로마가 통치하게 된다. 바투미와 고니오는 그 당시에 주요 도시들이었고 요새들이었다. 이 두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은 오늘날 코불레티 마을 근처에 있는 피츠바리 마을의 부유했던 흔적을 드러냈다. 서기 2세기에, 바투미는 카프카스 남쪽을 방어하는 로마군의 중요한 군사 기지였다. 11세기 초에, 아자리야는 통일 조지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고 11세기 말에는 셀주크투르크 제귝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13세기에는 몽골에 의해 파괴되었다. 1547년에,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아자리야를 공격했고 바투미를 점령했다. 당시 아자리야인의 일부는 다른 조지아 지역들로 피신했다. 남아있던 사람들은 강제적으로 이슬람교로 개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까지, 대부분의 아자리야의 소작농들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 상당히 안정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1853~1856년에 크림 전쟁과 1877~1878년에 러시아-오스만의 전쟁 기간동안에, 수천 명의 아자리야인들이 오스만 제국의 군대에 의해 징병되면서 러시아와 맞서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에게 전쟁에서 패하면서 아자리야를 러시아 제국에 양도했다. 아자리야 지역은 러시아 통치 하에 들어가면서 정교 중심의 러시아인들은 이슬람교를 압박했고, 수천명의 무슬림인들이 피난처를 찾아서 카프카스 지역 각지에 흩어졌으며 남은 아자리야 무슬림들은 적법한 이주 절차를 통해 바투미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으로 피신했다. 오스만 제국은 아자리야인들에게 자금을 조달하고 복수자들이라고 알려진 테러 조직을 이용해 러시아 장교와 공무원 뿐만아니라 제국 주둔에 동참했던 아자리야인들까지도 테러를 가해 죽이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아자리야인들은 지배자들인 러시아에 충성했고 그럼으로 인해 그들은 다른 조지아들과 재통합 될 수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1878년 베를린 의회는 바투미 지역의 수도를 포르투 프랑코 또는 자유 무역항으로 공표했다. 포르투 프랑코는 1880년대 말, 무렵에 중요한 항구 및 공업 도시가 되었으며 20세기에 들어서, 포르투 프랑코는 바투미로 이름이 바뀌고 바쿠의 석유 생산지와 최초의 송유관 중에 하나인 바쿠-바투미 송유관과 철도로 연결되었다. 이로써 바투미는 유럽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 중에 한 곳이 되었다. 이는 1892년 6월 22일에 거대한 유조선 "마루크스"가 바투미를 떠나 태국의 방콕으로 갔고, 이 유조선이 수에즈 운하를 항해한 최초의 유조선이 되었다. 이 지역에서 카프카스와 카스피해를 이어주는 회랑은 러시아 통치 하에서 무수한 파업들과 유혈 탄압이 자행되었다. 이는 차르가 노동자들을 착취한다 생각했고 공산주의자들이 차르의 탄압을 피해 카프카스 일대로 숨어 들어오면서 아자리야 일대는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암약해 유전에 취업한 현지 노동자들을 선동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차르의 탄압을 받은 아자리야 노동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 상당수의 무하지르(Muhazir)들은 오스만 군 소속 부대에 들어가면서 러시아와 싸우게 된다.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도중,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전쟁 과정에서, 러시아 행정부는 반항적이며 후일 통제가 불가능할 가능성이 높은 무슬림들을 바투미 지역에서 내부 러시아로의 강제 이주 절차를 시작했고, 이에 조지아의 지성인들은 그러한 강제 이주에 대하 항의를 표시했다. 러시아 두마에서 조지아 지역을 담당하는 의원들은 아자리야인들이 이슬람교에도 불구하고 민족적으로는 조지아인들이다. 그러므로 러시아에 충의가 있는 무슬림들은 러시아 내부가 아니라 아자리야 지역에 그대로 잔존해야 한다고 공언했다. 조지아 소속 두마 의원들의 항변에 대한 결과로 인해 러시아의 게오르게 미하일로비치 대공은 무슬림에 대한 인구조사를 주재했고 그 아자리야인들은 러시아 정치 제도에 적의가 없다는 수많은 보고들로 결말을 지었다. 아자리야인들의 불충을 탄원한 코사크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은 크게 비난을 받았고 지방 무슬림들은 폭력적인 대결을 부추기는 그들을 고발했다. 러시아의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아자리야 지도자들과 회담하자고 설득했고, 회담을 하는 도중 그들에게 충성심이 있다고 판결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이 1918년 1월에 끝나기 전까지는 아자리야인들의 반역을 의심하는 인구조사는 종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면서 러시아 군대가 철수함에 따라 1917년 12월 18일의 휴전에 이어졌고, 1918년 4월 14일에는 오스만 제국의 제37기 카프카스 부대가 바투미에 입성하면서 아지리야의 영토는 다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오스만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자 1919년 1월 12일에 영국에서 원정군이 오스만 제국의 병력들을 대신하여 바투미에 상륙했다. 그러면서 러시아 제국 의회의 입헌민주당 페트르 마스로프(Петро Масров)가 의장을 맡은 바툼 지역 의회에서는 1918년 12월 21일부터 1919년 4월 28일까지 아자리야에 대한 통치 권한이 일시적으로 주어지게 된다. 1918~1919년에 메흐메트 아바시제(Мехмет Абашидзе)가 회장으로 있는 이슬람 조지아인 해방 위원회(Исламский комитет освобождения Грузии)는 조지아 국경 내부에 있는 종교적 방침에 있어서 자치권이 성립 되었음을 반복적으로 증명했다. 이들 이슬람 조지아인 해방 위원회는 대부분이 아자리야 무슬림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여기에 라즈인들도 합류했다. 이슬람 조지아인 해방 위원회는 1919년 9월 13일 러시아 지방 자치단체의 기본형 의회로 알려진 매질리스(Mezilis)를 바투미에서 소집시키고 타 조지아 지역은 영국군이 주둔하면서 실질적 지배는 아르메니아인들이 하게 되고 아자리야 지역만은 조지아계 무슬림들이 지배할 수 있게 허가했다. 이와 같은 아바시제의 당파는 아자리야의 자치권만이 문제가 아닌, 완전한 독립에 대해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지아 민족과 친한 아자리야인들, 특히 조지아 정교회 소속의 아자리야인들이 먼저 자리잡고 있을지라도 이들은 조지아와의 통합을 옹호했다. 사실 오스만 제국과의 통합이 불투명한 이상, 그래도 러시아가 지지하는 조지아인들이 영국이나 아르메니아보다 더 낫다는 아바시제의 생각이었다. 그 이유는 아르메니아가 터키계 무슬림들을 학살하고 다녔기 때문에 이는 아자리야 입장에서 최선의 선택이기도 했다. 이들 중 실제 터키계 아자리야인들은 세다이 밀레스(Sedai Miles)라는 단체를 설립해 범투르크 민족주의를 주창하며 영국이나 아르메니아를 상대로 게릴라 전을 펼치기도 했다. 세다이 밀레스(Sedai Miles)는 터키어로 "사람들의 목소리(Insanların sesleri)" 라는 뜻이다. 이들의 게릴라 전과 더불어 오스만 군대와 아제르바이잔인들도 세다이 밀레스를 지원하자 수세에 몰린 영국군 1919년 8월 15일에, 카프카스 일대에서 철군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바투미의 분할된 본부는 바투미의 군사 지배권을 쿠키 콜리스(Kuky Colis)라는 자에게 넘겨주고 콘스탄티노플로 떠났다. 1920년 3월 4일에 총독이자 군사령관에 임명된 쿠키 콜리스는 바투미에서 아자리야 군대를 포함한 조지아 전 군대의 내부 동맹을 명령했다. 그러나 아자리야 내에서 반발이 거세자 1920년 7월 14일에 그 군대는 바투미에서 완전히 해체되었고 쿠키 콜리스는 바투미를 떠나 트빌리시로 이동했다. 이어 아르메니아 행정부는 7월 20일에 아자리야 지역을 조지아에게 양도하면서 이 지역에 대해 완전히 손을 땠다. 이어 러시아의 적백내전에 카프카스 지역이 휘말리게 되면서 볼셰비키 일원들이 조지아에 들어오게 되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7-04
  • 구석기(Paleolithic)와 신석기(Neolithic)의 범주
    구석기(Paleolithic)와 신석기(Neolithic)는 역사 시대도 아니고 또한 역사학의 범주도 아니다. 역사학의 범위는 엄연히 체계화된 문자로 기록이라는 것이 나타나고 여러 문명이라는 존재가 피어나던 시기부터 시작된다. 기록화 되긴 이전의 시대인 구석기(Paleolithic)와 신석기(Neolithic)는 인류사(Human history)의 범주로 들어간다. 물론 이것도 역사긴 하지만 성문화 되어진 역사가 아닌 존재만 가지고 있는, 체율체득(體律體得) 형태에 생존의 역사다. 흔히 고고학과 역사학을 혼동해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고고학과 역사학은 엄연히 종류가 다른 학문이고 이것을 햇갈려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정녕 아마추어들이다. 고고학을 두고 역사학을 위한 과학적인 학문이라 착각하는 아마추어들도 있다. 고고학은 역사학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좀더 진보된 과학적인 발견을 분석하는 학문이고 고고학을 연구하는데 있어 많은 타 종류의 학문들을 다양하게 수용하고 대입할 수 있는 종합 집약적인 학문(Comprehensive Intensive Disciplines)이라 정의할 수 있다. 거기에는 역사학이 갖고 있는 문헌학(Philology) 비중이 높긴 하지만 어쨌든 고고학과 역사학은 별개의 학문이다. 우리가 흔히 문명(Civilization)이라고 하는 것은 석기 시대와 금속 도구 시대의 차이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문명(Civilization)의 사전적 정의는 고도로 발달한 인간의 문화와 사회를 말한다. 원시적인 인간의 생활, 삶의 형태들이 물질적, 기술적, 사회 구조적인 발전을 통하여 기하급수적으로 진화한 형태이다. 그래서 석기 시대에서 금속 도구를 사용하는 시대는 인류가 살아가는 삶의 질이 진보했다는 것에서 인류사에 큰 혁명적인 전환기를 맞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선 석기 시대의 인류는 생존을 위한 시기라 보면 된다. 그 자체가 원시적이었고 어쨌든 살아 남기 위한 생존 본능의 시대다. 특히 구석기 시대의 경우, 개별 집단 및 씨족 집단으로 연명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은 타 집단을 만나게 되면서 함께 융합된 집단으로 살아가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인간은 원시 동물 개개별적으로 치면 매우 약한 존재로 대형 동물이나 포식자들의 표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인간과 동물이 다른 점은, 원초적 본능에서 진화할 수 있는 뇌구조가 다르다는 것이다. 인간의 뇌가 발달한 것에는 신경과학적인 구조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을 비롯한 영장류의 뇌는 다른 동물들의 뇌에 비해 크고 신경세포의 숫자도 훨씬 더 많다. 영장류의 뇌에서는 뇌가 커져도 신경세포의 크기가 거의 변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으며 영장류의 뇌에서 신경세포의 숫자를 10배 늘리려면 뇌가 11배만 커지면 된다. 하지만 같은 질량의 사람의 뇌에는 860억개의 신경세포가 있는데 이는 호모 에렉투스의 뇌 신경 세포의 개수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다만 최초의 도구를 사용했던 종인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두개골의 용량이 600cc에 불과한 종이지만 보통 현생인류의 탄생을 나는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의 출현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근거로 들 수 있는데 이는 거의 오랑우탄과 침펜지에 중간속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확연히 구분히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타웅에서 발견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도구를 사용한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호모 루돌펜시스(Homo rudolfensis) 시기는 흔히 불이 발견되었다고 추정된 시기와 일치한 시기이고 호모 에렉투스를 거쳐 사피엔스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뇌는 조금씩 진화해 갔다. 그러면 석기 시대라고 하는 인류사에 있어 도구적 진보(Instrumental progress)에 대해 어떤 논의들이 있을까? 이와 같은 도구적 진보에 대해 신경과학적인 부분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발생학(Embryology)이다. 이를 두고 실제로 ‘발생학적 선택’ 이라고 하는데, 토마스 새들러(Thomas Sadler)의 저작 <사람발생학(Longmans Medical Embryolgy)>에 의하면 "뇌의 발생 과정에서 다른 동물의 뇌와 두드러지는 차이를 찾을 수 있는 것은 ‘크기(Size)’, ‘구성(Construction)’, ‘에너지 소비(Energy consumption)’, ‘혈류량(Blood flow rate)’, ‘좌우 비대칭(Left-Right asymmetry)’ 등이다." 하고 하였다. 인간의 뇌는 멜론 비슷한 크기를 갖고 있으며 체중의 2.5%에 달하는 무게를 갖고 있다. 총 1천억 개 신경 세포와 1천조 개 시냅스가 있어 뇌 자체를 두고 작은 우주라고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의 뇌는 인간 에너지 소비량의 20%를 소모하는 존재이며, 혈류량도 750 ml/min라는 엄청난 양을 갖고 있고 좌우 뇌가 비대칭적으로 기능하고 있어 다른 동물들의 뇌와 세부적으로 다른 구조를 띄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는 본능에서 벗어나 생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진화하고 진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문명이라는 것도 탄생이 되는 것이고 개별적인 집단에서 좀 더 조직적인 집단으로 변모함으로써 대형 동물이나 포식자들의 천적으로 원시 생태계의 구조를 바꾸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시기에는 어떠한 예술적 가치의 창달이라든지, 문화적, 문명적인 발상 따위는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석기 시대 토기를 가지고 여러 의미 부여를 하는 일부 학자들이 있는데 나는 그러한 해석론적 시각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에 있다. 예술적 가치, 문화, 문명적인 발상은 금속병용기 시기부터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때는 정주민족의 경우, 수렵과 채집에서 벗어나 농업에 종사하며 안정화 되어가는 시기이고 삶의 질이 점차 풍족해져 가는 시기이다. 그래서 나는 구, 신석기의 경우 구석기는 원시 상태의 단계고 신석기는 문명 사회로 가기 위한 준비 단계로 보고 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반박하며 반론을 재기하는 학자도 여럿 존재한다. 그러면 석기 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프랑스 라스코나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라던지, 한국의 반구대 암각화와 같은 흔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절에 문자가 존재했는지의 여부를 먼저 따져봐야 한다. 인간의 사고는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어떤 체계적인, 혹은 갑자기 떠오르는 발상 등을 통해 표현하게 되는데 여기에 구체적으로 체계화 되어진 문자가 석기 시대에 등장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그러면 동굴벽화나 암각화는 어떠한 진화된 사고에 의한 예술 작품이 아니라 자신이 표현하고픈 내용을 문자처럼 그릴수도 있고 자기가 속한 부족과 이미 약속되어진 언어 수단 및 부호가 될 수도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고도로 구체적이고 표현화된 예술작품의 생성은 석기 시대가 아닌 금속병용기 이후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문자도 없던 시절에 예술 작품을 생각한다는 굉장히 문명사적으로도 언발란스한 일이다. 더불어 사람의 부분적인 문맹화 시대도 아닌 인간 전체가 문맹인 시기, 생존 본능, 씨족 보호 본능이 우선이던 시기에 어떠한 문명적 발상, 문화적 발상을 과연 할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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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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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석기(Paleolithic)와 신석기(Neolithic)의 범주
    구석기(Paleolithic)와 신석기(Neolithic)는 역사 시대도 아니고 또한 역사학의 범주도 아니다. 역사학의 범위는 엄연히 체계화된 문자로 기록이라는 것이 나타나고 여러 문명이라는 존재가 피어나던 시기부터 시작된다. 기록화 되긴 이전의 시대인 구석기(Paleolithic)와 신석기(Neolithic)는 인류사(Human history)의 범주로 들어간다. 물론 이것도 역사긴 하지만 성문화 되어진 역사가 아닌 존재만 가지고 있는, 체율체득(體律體得) 형태에 생존의 역사다. 흔히 고고학과 역사학을 혼동해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고고학과 역사학은 엄연히 종류가 다른 학문이고 이것을 햇갈려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정녕 아마추어들이다. 고고학을 두고 역사학을 위한 과학적인 학문이라 착각하는 아마추어들도 있다. 고고학은 역사학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좀더 진보된 과학적인 발견을 분석하는 학문이고 고고학을 연구하는데 있어 많은 타 종류의 학문들을 다양하게 수용하고 대입할 수 있는 종합 집약적인 학문(Comprehensive Intensive Disciplines)이라 정의할 수 있다. 거기에는 역사학이 갖고 있는 문헌학(Philology) 비중이 높긴 하지만 어쨌든 고고학과 역사학은 별개의 학문이다. 우리가 흔히 문명(Civilization)이라고 하는 것은 석기 시대와 금속 도구 시대의 차이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문명(Civilization)의 사전적 정의는 고도로 발달한 인간의 문화와 사회를 말한다. 원시적인 인간의 생활, 삶의 형태들이 물질적, 기술적, 사회 구조적인 발전을 통하여 기하급수적으로 진화한 형태이다. 그래서 석기 시대에서 금속 도구를 사용하는 시대는 인류가 살아가는 삶의 질이 진보했다는 것에서 인류사에 큰 혁명적인 전환기를 맞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선 석기 시대의 인류는 생존을 위한 시기라 보면 된다. 그 자체가 원시적이었고 어쨌든 살아 남기 위한 생존 본능의 시대다. 특히 구석기 시대의 경우, 개별 집단 및 씨족 집단으로 연명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은 타 집단을 만나게 되면서 함께 융합된 집단으로 살아가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인간은 원시 동물 개개별적으로 치면 매우 약한 존재로 대형 동물이나 포식자들의 표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인간과 동물이 다른 점은, 원초적 본능에서 진화할 수 있는 뇌구조가 다르다는 것이다. 인간의 뇌가 발달한 것에는 신경과학적인 구조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을 비롯한 영장류의 뇌는 다른 동물들의 뇌에 비해 크고 신경세포의 숫자도 훨씬 더 많다. 영장류의 뇌에서는 뇌가 커져도 신경세포의 크기가 거의 변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으며 영장류의 뇌에서 신경세포의 숫자를 10배 늘리려면 뇌가 11배만 커지면 된다. 하지만 같은 질량의 사람의 뇌에는 860억개의 신경세포가 있는데 이는 호모 에렉투스의 뇌 신경 세포의 개수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다만 최초의 도구를 사용했던 종인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두개골의 용량이 600cc에 불과한 종이지만 보통 현생인류의 탄생을 나는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의 출현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근거로 들 수 있는데 이는 거의 오랑우탄과 침펜지에 중간속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확연히 구분히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타웅에서 발견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도구를 사용한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호모 루돌펜시스(Homo rudolfensis) 시기는 흔히 불이 발견되었다고 추정된 시기와 일치한 시기이고 호모 에렉투스를 거쳐 사피엔스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뇌는 조금씩 진화해 갔다. 그러면 석기 시대라고 하는 인류사에 있어 도구적 진보(Instrumental progress)에 대해 어떤 논의들이 있을까? 이와 같은 도구적 진보에 대해 신경과학적인 부분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발생학(Embryology)이다. 이를 두고 실제로 ‘발생학적 선택’ 이라고 하는데, 토마스 새들러(Thomas Sadler)의 저작 <사람발생학(Longmans Medical Embryolgy)>에 의하면 "뇌의 발생 과정에서 다른 동물의 뇌와 두드러지는 차이를 찾을 수 있는 것은 ‘크기(Size)’, ‘구성(Construction)’, ‘에너지 소비(Energy consumption)’, ‘혈류량(Blood flow rate)’, ‘좌우 비대칭(Left-Right asymmetry)’ 등이다." 하고 하였다. 인간의 뇌는 멜론 비슷한 크기를 갖고 있으며 체중의 2.5%에 달하는 무게를 갖고 있다. 총 1천억 개 신경 세포와 1천조 개 시냅스가 있어 뇌 자체를 두고 작은 우주라고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의 뇌는 인간 에너지 소비량의 20%를 소모하는 존재이며, 혈류량도 750 ml/min라는 엄청난 양을 갖고 있고 좌우 뇌가 비대칭적으로 기능하고 있어 다른 동물들의 뇌와 세부적으로 다른 구조를 띄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는 본능에서 벗어나 생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진화하고 진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문명이라는 것도 탄생이 되는 것이고 개별적인 집단에서 좀 더 조직적인 집단으로 변모함으로써 대형 동물이나 포식자들의 천적으로 원시 생태계의 구조를 바꾸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시기에는 어떠한 예술적 가치의 창달이라든지, 문화적, 문명적인 발상 따위는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석기 시대 토기를 가지고 여러 의미 부여를 하는 일부 학자들이 있는데 나는 그러한 해석론적 시각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에 있다. 예술적 가치, 문화, 문명적인 발상은 금속병용기 시기부터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때는 정주민족의 경우, 수렵과 채집에서 벗어나 농업에 종사하며 안정화 되어가는 시기이고 삶의 질이 점차 풍족해져 가는 시기이다. 그래서 나는 구, 신석기의 경우 구석기는 원시 상태의 단계고 신석기는 문명 사회로 가기 위한 준비 단계로 보고 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반박하며 반론을 재기하는 학자도 여럿 존재한다. 그러면 석기 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프랑스 라스코나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라던지, 한국의 반구대 암각화와 같은 흔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절에 문자가 존재했는지의 여부를 먼저 따져봐야 한다. 인간의 사고는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어떤 체계적인, 혹은 갑자기 떠오르는 발상 등을 통해 표현하게 되는데 여기에 구체적으로 체계화 되어진 문자가 석기 시대에 등장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그러면 동굴벽화나 암각화는 어떠한 진화된 사고에 의한 예술 작품이 아니라 자신이 표현하고픈 내용을 문자처럼 그릴수도 있고 자기가 속한 부족과 이미 약속되어진 언어 수단 및 부호가 될 수도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고도로 구체적이고 표현화된 예술작품의 생성은 석기 시대가 아닌 금속병용기 이후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문자도 없던 시절에 예술 작품을 생각한다는 굉장히 문명사적으로도 언발란스한 일이다. 더불어 사람의 부분적인 문맹화 시대도 아닌 인간 전체가 문맹인 시기, 생존 본능, 씨족 보호 본능이 우선이던 시기에 어떠한 문명적 발상, 문화적 발상을 과연 할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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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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