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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진표 전 의장의 회고록 폭로와 대통령실의 반발
    김진표 전 국회의장의 회고록 '대한민국은 무엇을 축적해 왔는가'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김 전 의장은 10·29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윤 대통령이 "특정 세력에 의해 유도되고 조작된 사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라고 언급했다고 기록했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은 강하게 반발하며, 김 전 의장이 대통령의 발언을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실은 공식 공지를 통해 "국회의장을 지내신 분이 국가 조찬기도회에서 대통령에게 독대를 요청해 나누었던 이야기를 멋대로 왜곡해서 세상에 알리는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김 전 의장의 회고록에서 언급된 '특정 세력에 의해 유도되고 조작된 사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라는 윤 대통령의 발언 자체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왜곡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대통령실은 이어서 윤 대통령이 "당시 참사 수습 및 예방을 위한 관계기관 회의가 열릴 때마다 언론에서 제기된 다양한 의혹을 전부 조사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라고 강조했다. 또한 "윤 대통령이 차선 한 개만 개방해도 인도의 인파 압력이 떨어져서 사고를 막을 수 있었는데도 차선을 열지 않은 것이 이해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혀왔다"라고 덧붙였다. 김진표 전 의장의 회고록은 이태원 참사와 관련된 내용 외에도 여러 정치적 사건과 정부 정책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나온 발언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김 전 의장은 회고록에서 윤 대통령이 이태원 참사에 대해 음모론적인 견해 표명에 대해 큰 실망감을 나타냈다. 그는 "대통령이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라고 지적했다. 김 전 의장은 또한 이태원 참사 두 달 뒤인 12월 15일 국가 조찬기도회에서 윤 대통령과 만나 이태원 참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물러나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회고록에 기록했다. 이에 대해 윤 대통령은 "이태원 참사에 관해 의심 가는 게 있어 아무래도 결정을 못하겠다"며 "이 사고가 특정 세력에 의해 유도되고 조작된 사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김 전 의장의 회고록 공개 이후 정치권과 언론은 다양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일부에서는 김 전 의장의 회고록이 지나치게 주관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대통령실의 반응이 과도하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이번 논란은 앞으로 정치권의 큰 이슈로 떠오를 전망이다. 정치권 일부에서는 윤 대통령의 발언이 사실이라면, 이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대통령이 국민의 안전과 직결된 문제에 대해 음모론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큰 문제라고 주장했다. 반면, 대통령실의 반발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김 전 의장이 사적인 대화를 공론화한 것 자체가 문제라고 주장했다. 대통령실과 김 전 의장 간의 공방이 어떻게 전개될지 주목된다. 이는 단순한 개인 간의 갈등을 넘어 정치 전반에 걸쳐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특히 국가 안보와 국민의 안전을 다루는 사안에서 정치인의 발언과 그에 따른 책임은 매우 중요하다.
    • 뉴스
    • 정치
    2024-06-28
  • 해외 유명 투자 전문가 사칭한 주식 리딩방 사기 기승…금감원 주의 당부
    최근 해외 유명 투자 전문가를 사칭한 주식 리딩방 사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들은 뉴욕 월스트리트의 유명 펀드매니저나 해외 석학 등 사칭하며 투자자들을 유인하고 있다. 주식 리딩방 사기범들은 해외주식 매수를 유도하고 매수세 유입으로 주가가 상승하면 보유 주식을 매도한 후 주가가 급락하면 채팅방을 폐쇄하고 잠적하는 방식으로 활동하고 있다. 금융감독원(금감원)은 16일 이러한 사기 행태에 대해 경고하며 "최근 온라인 사기는 초국경 형태로 해외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이런 경우 불법 세력에 대한 단속 및 법적 조치가 쉽지 않아 피해를 보더라도 범죄수익 동결, 환수 등 피해구제가 어려울 수 있다"고 주의를 당부했다. 이 사기범들은 최근 국내외 유명 투자 전문가를 사칭해 채팅앱을 통해 투자자들을 초대하고 1대1 대화방에서 매수를 추천했다. 이들은 일부러 통역기를 사용한 듯한 어눌한 한국말을 사용하여 투자자들을 속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소액의 수익을 경험하게 하여 신뢰를 쌓은 후 이후 투자금 전액을 넣도록 유도한다. 최종 매수 직후 주가가 급락하면 '강력한 공매도 공격'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채팅방을 폐쇄하거나 투자자들을 채팅방에서 강제 퇴장 조치하는 패턴을 보인다. 금감원은 이러한 사기 행태에 대해 강력한 주의를 당부하며, "1대1 투자 조언을 듣는 경우라면 정식 투자 자문 업체인지와 업체명, 운영자 신원, 연락처 등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투자자문업 등록 조회는 금감원 홈페이지에서 가능하다. 다음 달부터는 유사 투자자문업자는 단방향 채널 추천만 가능하며 등록된 투자자문업자만 양방향 채널 영업이 가능하게 된다. 금감원 관계자는 "SNS에서 유명인 사칭으로 추천하는 종목은 대부분 해외 증시에 상장한 지 6개월 미만의 주식으로 거래가 활발하지 않거나 시가총액이 낮아 특별한 이유 없이 급등·급락하기 쉬우므로 투자에 유의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또한, 해외주식의 경우 국내 주식과 달리 국내 투자자가 접할 수 있는 정보가 제한적이고 사실 여부 확인도 어려워 공시 서류, 뉴스 등을 통해 기업 실적과 사업의 실체 등을 스스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최근 피해 사례를 보면 투자자들은 처음에 소액 투자로 수익을 경험한 후 점차 큰 금액을 투자하게 된다. 예를 들어 한 투자자는 처음에 50만 원을 투자하여 수익을 본 후 사기범의 추천에 따라 5천만 원을 투자했으나 주가가 급락하면서 큰 손실을 봤다. 이후 채팅방이 폐쇄되고 연락이 두절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먼저 투자자들은 SNS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접하는 투자 조언에 대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또한, 투자 권유를 받았을 때는 해당 전문가나 업체의 신원을 철저히 확인하고, 금감원 등 공신력 있는 기관의 등록 여부를 조회해야 한다. 특히, 지나치게 높은 수익을 약속하거나 단기간에 큰 이익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 사기일 경우가 높아 주의해야 한다. 금융 당국은 이러한 사기 행태에 대해 강력한 단속과 함께 투자자들에게 지속적인 경각심을 일깨워야 한다. 초국경 형태의 사기 범죄는 단속과 법적 조치가 어려운 만큼, 국제 공조를 강화하고, 피해자 구제를 위한 다양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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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
    2024-06-16
  • 제롬 파월 연준 의장, 금리 동결 후 경제 불확실성 대응 방안 제시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은 12일(현지시간)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노동시장 상황이 예상 밖으로 약화하거나 인플레이션이 기대보다 빨리 둔화할 경우, 이에 따른 통화정책에 대해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파월 의장은 FOMC가 기준금리를 5.25∼5.50%로 동결한 뒤, "통화정책이 우리가 당면한 위험과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데 적절히 대처하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현재 통화정책이 경제 불확실성에 적절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도 필요시 신속한 정책 변화를 고려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파월 의장은 현 미국 노동시장 상황에 대해서도 "광범위한 경제지표들은 현재 미국의 노동시장 여건이 팬데믹 직전 우리가 위치했던 지점으로 복귀했음을 보여준다"라며 "상대적으로 단단(tight)하지만, 과열 상황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라고 평가했다. 이는 현재의 노동시장이 안정적이지만 지나치게 과열된 상태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날 오전 발표된 5월 미 소비자물가지수(CPI) 지표에 대해선 "인플레이션이 2% 물가 목표로 안정적으로 향한다는 확신을 쌓는 데 있어서 오늘 보고서는 진전이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이는 최근의 물가 상승세가 연준의 목표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진전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다만, FOMC 위원들이 5월 CPI 결과를 연준의 경제전망에 반영한 것인지에 대해선 "오늘 아침 관련 보고를 받았고 사람들은 변경할지 말지를 고려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어떤 사람은 반영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일반적으로 (단 하루 만에) 반영하지 않는다"라고 설명했다. 이는 CPI 지표가 발표된 지 하루 만에 경제전망에 반영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나타낸다. 연준은 이날 FOMC 회의 후 기준금리 현행 유지를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이는 연준이 당분간 고금리 기조를 유지할 것임을 시사한다. 동시에 경제 상황을 지켜보면서 신중한 대응을 한다는 것이다. 연내 금리 인하 전망 역시 기존 3회에서 1회로 축소됐다. 이는 연준이 당분간 금리 인하보다는 현행 금리를 유지하며 경제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점을 시사한다. 미 노동부는 5월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전년 동월 대비 3.3% 상승했다고 밝혔다. 이는 4월 상승률(3.4%) 대비 둔화한 수치다. 이러한 둔화는 인플레이션 압력이 다소 완화되고 있음을 나타내며 연준이 금리 동결 결정을 내리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파월 의장은 기자회견에서 "현 경제 상황은 불확실성이 많다"라며 "노동시장이 예상 밖으로 약화하거나 인플레이션이 기대보다 빨리 둔화할 경우, 이에 따른 통화정책도 대응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강조했다. 이는 연준이 경제 상황을 지속적인 모니터링하고 있으며 필요시 신속하게 대응할 것임을 밝힌 것이다. 또한, 파월 의장은 "연준은 경제 지표에 기반한 데이터 중심의 접근 방식을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연준이 경제 지표를 자세히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통화정책을 조정할 것임을 의미한다. 금리 동결 결정 이후 시장은 비교적 안정된 반응을 보였다. 전문가들은 연준의 이번 결정이 경제의 불확실성을 고려한 신중한 접근임을 평가하며 앞으로의 경제 지표에 따라 연준의 정책 방향이 달라질 수 있음을 지적했다. 시장 전문가들은 "연준이 금리 동결을 결정한 것은 인플레이션 압력이 다소 완화되고 있음을 반영한 것"이라며 "향후 경제 지표에 따라 금리 정책이 조정될 가능성이 크다"라고 분석했다. 이번 FOMC 회의에서 연준은 금리를 동결하며 경제 상황을 신중하게 지켜보겠다고 입장을 전했다. 파월 의장은 노동시장과 인플레이션 상황을 세심히 모니터링하고 있으며 필요시 신속하게 통화정책을 조정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강조했다. 이는 연준이 경제의 불확실성에 적절히 대응하며, 경제 안정성을 유지하려는 의지를 나타낸다. 앞으로 연준의 통화정책 방향은 경제 지표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시장은 연준의 신중한 접근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향후 경제 지표를 주의 깊게 지켜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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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
    2024-06-13

칼럼 검색결과

  • 폴란드와 러시아의 관계
    폴란드와 러시아의 관계를 놓고 본다면 20세기 들어 같은 동구권 공산국가였고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존재하여 그 유대관계가 좋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부분과 이데올로기성 노선이 같을 뿐, 두 나라는 철천지 원수의 관계이다. 폴란드의 러시아에 대한 인식은 단순한 반러가 아니라 숙적이라고 보는게 좋다. 동유럽에 대해 특유의 호불호가 별로 없던 러시아도 폴란드는 예외일 정도로 아주 싫어한다. 두 나라의 은원 관계는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은원관계보다 더 깊고 처절하다. 두 나라가 칼리닌그라드 일대를 제외하고 직접적인 육로 국경을 접하고 있지 않아 그렇지 만약에 국경을 접하고 있다면 러시아는 민족적, 정치적 등등 모든 은원관계로만 볼 때 우크라이나가 아니라 폴란드를 먼저 공격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서로의 은원관계는 매우 깊다. 러시아의 입장에서 폴란드는 역사적으로 볼 때 철천지 원수 그 이상이다. 루스 슬라브 시절에 폴란드는 비교적 늦은 11세기에 정식적인 왕조인 피아스트 욍조가 성립되어 강대국으로 급성장했다. 그러나 루스 슬라브의 키예프 공국은 1135년 개혁군주인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가 사망한 후, 대공위 자리를 노리며 각 공후들이 치열한 내전을 벌이고 있는 바람에 국가의 힘은 갈수록 쇠락해져 가고 있었고 그 틈을 타, 루스 슬라브 공동체의 중심은 키예프를 떠나 각 공국들에게 분산되어 혼란의 시대를 거듭하고 있었다. 세력이 막강해진 폴란드 피아스트 왕조는 오늘날 우크라이나 서부와 벨라루스, 발트 지역에 분산된 루스 슬라브 공국들을 하나씩 점령하여 접수하기 시작했다. 13세기 몽골의 바투와 수부타이가 키예프를 침공하지 않았다면 키예프와 러시아는 폴란드에게 넘어갔을 것이라는게 동유럽 사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폴란드는 러시아와 같은 슬라브계지만 몽골-타타르보다 더 악랄했다. 폴란드는 러시아인에게 정교회에서 카톨릭으로 개종을 강요했으며 개종하지 않을시, 그 마을과 도시 국가를 공격하여 약탈하거나 살해하고 나무에 매달아 "개종하지 않은 이교도인"이라는 팻말을 붙이기도 했고 러시아 여자들을 강간했으며 세금 걷는 명목으로 재산들을 강제 징수해갔다. 특히 곡물들의 수탈이 대단하여 폴란드의 학살보다 기아로 인해 굶어죽는 루스 슬라브인들이 훨씬 많았을 정도였다. 키예프가 황폐화되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러시아의 중심은 키예프를 떠나 북쪽인 현 볼가 강 일대로 올라가게 됐으며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옮겨진다. 이후 폴란드는 피아스트 왕조에서 야기에우워 왕조로 교체되었으며 여전히 강력했다. 그리고 인근 폴란드계인 리투아니아 가문과 독일계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 튜튼 기사단 등은 끊임없이 러시아 영토를 노렸다. 그러던 중, 이반 4세가 사망하고 모스크바 대공국에는 극심한 혼란의 시대가 찾아온다. 변변찮은 후계자가 없었던 상황에서 이반 4세의 아들인 드미트리를 참칭하는 자들이 생겨났고 이 틈을 타서 폴란드는 러시아를 아예 멸종시켜버리기 위해 출격했다. 당시 러시아는 폴란드에게 정복되어 민족 자체가 일명 "제노사이드"를 당할 뻔한 민족적 대위기를 겪게 된다. 러시아 민족과 나라가 지도상에서 지워질 뻔한 위기가 세 번 존재했는데 첫 번째는 이반 4세 이후의 대혼란과 폴란드의 강점기였다. 두 번째는 나치 독일의 공격으로 인한 대조국 전쟁이며 세 번째는 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시작된 러시아 최악의 90년대 암혹기가 그것이다. 그 첫 번째 사례가 바로 폴란드의 강점기였던 것이다. 역사학자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폴란드 강점기 당시 러시아인의 66% 정도가 폴란드의 학살과 기아로 희생되어 당시 200만이던 인구가 겨우 7~80만 정도 밖에 남지 않았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세계는 러시아가 폴란드를 정복하여 그들을 말살하려 했던 것만 기억하고 있다. 그런 폴란드를 물리치고 지독한 폴란드 강점기를 끝낸 가문이 바로 로마노프 가문이다. 모스크바 대공국에서 로마노프 가문의 러시아 제국이 세워지기까지는 굉장히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했던 것이다. 1580년~1618년에 이르기까지 38년동안 러시아는 내부의 혼란과 영웅 보리스 고두노프의 등장, 폴란드 강점기까지 그야말로 민족이 지도상, 지구상에서 지워질 뻔한 대위기를 맞이했던 것이다. 그와 같이 대체적으로 러시아와 모스크바를 학대했던 자들은 폴란드인들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크라이나 서부를 지배하고 벨라루스 일대를 장악했던 또다른 과거 키예프 소속의 공국들로 이들의 지배층들은 폴란드계로 채워져 있었다. 이들은 모스크바와 그 일대를 노략질하며 황폐화시키고 보이는 러시아 남자들을 참수했으며 여성들은 강간하고 어린이들은 노예로 만들어 크림 칸국, 멀리 시비르 칸국까지 데려가 노예로 팔았다. 크림 칸국이 노예 무역으로 떼돈 벌기 시작한게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지역의 폴란드계가 잡아온 러시아 소년 소녀들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이들이 로마노프 가문과 러시아 공후들에게 패해 각자의 영지들로 돌아갔는데 그들 중 폴란드 본토로 돌아간 자들이 반이고 또 다른 반은 갈라치아 지방이라 불리는 폴란드 남부와 리보프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이다. 그리고 이들은 갈라치아의 토속민으로 자리잡으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점차 변해갔다. 그리고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를 맹비난하며 돈바스 다음으로 가장 많은 전투에 나서고 있는 사람들도 우크라이나 서부, 갈라치아 일대 출신들이다. 한편 러시아는 로마노프 가문이 폴란드를 밀어내고 마침내 독립을 선포하였으며 1618년 미하일 로마노프가 차르가 되면서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출범한다. 러시아는 이와 같은 폴란드에게 당했던 혹독한 역사를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절의 폴란드에 대한 인식은 정교회를 박해, 탄압하는 카톨릭 국가이며 묘사되었으며,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폴란드를 적국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니 두 나라는 절대로 사이가 좋아질 수 없다.
    • 칼럼
    • Nova Topos
    2024-07-08
  • 2011년 그리스 정부의 유로존 탈퇴 및 디폴트 선언을 무기로 한 그리스 2차 구제 금융 요구 사건
    2011년 7월부터 그리스 정부와 유로그룹은 2차 구제금융 지원 논의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2011년 10월 유로그룹은 채무탕감과 1,300억 유로의 2차 구제금융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다. EU 정상들은 유럽 은행들을 비롯한 민간 채권자들과 10시간에 걸친 마라톤 협상 끝에 그리스 부채 탕감률을 50%로 올리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그리스가 갚아야 할 총 채무 3500억유로 중 민간부문 1000억유로가량이 줄어들게 됐다. 대신 민간 채권자들이 보유한 나머지 그리스 채권이 디폴트에 빠지지 않도록 EU는 300억유로의 보증을 제공한다. 또한 EU 정상들은 EFSF를 4400억유로에서 1조유로 수준으로 대폭 확대했다. 재정위기국이 채권을 발행할 때 EFSF가 발행금액의 20~30% 정도 보증을 서는 것과 EFSF 산하에 특수목적기구(SPV)를 설치해 IMF와 중국 등 국부펀드 자금을 끌어들이자는 방안이 제안되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에게도 전화를 걸어 EFSF에 대한 투자를 요청하기도 했다. 위기에 대비해 역내 은행들이 자본을 내년 6월 말까지 1060억유로 정도 늘리는 은행 자본 확충방안도 나왔다. 은행들이 스스로 자금을 조달해보고 여의치 않을 경우 해당국 정부가 지원해 주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마저도 어려울 경우 유럽재정안정기금인 EFSF가 돕기로 했다. 이와 함께 유로존과 IMF는 그리스의 재정위기 타개를 위해 그리스에 1000억 유로 규모의 추가 지원자금을 공급하기로 했다. 이날 사르코지 대통령은 그리스 민간 부채 중 50%를 탕감하며 올해 160%로 추정되는 그리스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비율을 2020년까지 120%로 낮출 수 있게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EU 정상들은 이탈리아가 의향서 제출을 통해 각종 개혁조치를 실행하겠다고 발표한 것에 대해 환영의 뜻을 밝히면서도 스스로 정한 시한과 목표를 지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번 합의에 따른 관련 규정 변경에는 최소 2~3개월이 소요된다. EFSF 확충 등 이번 합의 사항은 모든 유로존 국가 의회의 동의를 얻아야 한다. 2012년 3월까지 그리스 332억 유로, 이탈리아 1980억 유로, 스페인 840억 유로 등 국채 만기가 도래하게 된다. EFSF가 빨리 운용 가능한 기금 규모를 확충해야 하는 이유다. 결국에는 2011년 10월 EU가 부채의 50%를 탕감해주고 2차 금융 지원을 하기로 결정되었지만, 그리스 국민들은 EU의 수장인 독일의 메르켈 총리를 나치라 비난하는 등, 거세게 반발했다. 이는 금융 지원에 있어 필연적으로 따라 붙게 되는 긴축 요구 때문이다. 당시 데일리 메일에 따르면 그리스 시내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공공의 골칫거리'라는 문구와 더불어 과거 히틀러 정권을 연상시키는 나치 SS 친위대원의 옷차림을 한 포스터가 등장했다. 메르켈 총리는 EU를 상징하는 별과 나치 상징 문양이 함께 그려진 완장도 차고 있다. 그리스 현지 신문 만평도 독일 관리들이 나치 복장을 하거나 긴축정책에 동의한 그리스 정부 관리들이 나치식 인사를 하는 모습으로 그렸다. 시민들은 정부의 임금과 연금 삭감, 증세 등 계속된 긴축정책에 반발하며 연일 시위를 벌이고 있다. 화가 난 일부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고대 유적지를 방문한 독일 관광객에게 적대적으로 대할 정도다. 그리스 언론은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 독일 정부의 간섭이 약 65년 전 히틀러 정권이 그리스에 악행을 저질렀던 경험을 연상시키며 독일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고 분석했다. 우여곡절 끝에 합의된 2차 그리스 구제금융 패키지에 대해 그리스 국민 과반수가 되려 반대 의사를 표했다. 패키지에 포함된 그리스 국채 상각(헤어컷) 프로그램이 자국에 이득이 되지 않을 것이란 이유에서다. 그리스인의 58%는 이 긴축안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고 있으며 대통령과 관료들은 반역자라고 불리고 있다고 한다. 유럽의 지원에 대해서도 50.1%는 필요하다고 답했지만 48.8%는 자주권 훼손을 우려하는 등 그리스 국민들 사이에서는 외부 지원에 대한 의견이 크게 엇갈리고 있다. 다만 그리스가 유로존(유로 사용 17개국)에 남길 원한다고 답한 이는 72.5%에 달했다. 이에 따른 증세불복 시민운동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이 운동 일부 공무원까지 참가하고 있다. 이에 대한 시민 운동의 시작은 그리스 제2의 도시 테살로니키에서 열린 국경일 기념행사의 거리행진에서 드러났다. 매년 주요 정치인들이 참여하는 이 행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0년 이탈리아군의 침공을 저지한 것을 기념해 열리는 이벤트다. 그러나 2011년의 행사는 시위대의 반발로 차질을 빚었다. 시위대는 낮부터 행진을 막고 카를로스 파풀리아스 대통령, 파노스 베글리티스 국방장관 등을 향해 “반역자”라고 외쳤다. 10월 26일에도 베글리티스 장관과 일부 국회의원들은 이 지역 한 교회를 방문했다가 호된 욕설을 들어야만 했다. EU 정상회의가 10월 27일 내놓은 그리스 채권 손실률 상향 등 위기 해법에도 비판은 더 커졌다. 그리스의 지방 자치 단체들도 반발했다. 주민 수가 7만 명인 아테네 광역도의 네아 이오니아 구에서는 전기 요금 고지서에 함께 부과된 신설 재산세를 내지 말도록 촉구했다. 당시 이라클리스 고트시스 구청장은 신설된 세금이 불법이라고 생각한다. 본질적으로는 구민들이 세금 낼 돈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로 심각했다. 재정난으로 인한 국가부도 위기를 타개하려는 정부의 증세정책에 반발한 그리스 국민의 불복종 움직임이 산발적이지만 표면화되고 있는 것이다. 증세에 대한 거부감이 확산되면서 일부 지방 공무원들마저 증세 거부운동에 가담하고 나설 정도였다. 앞서 언급한 네아 이오니아구 의회도 웹사이트에 세금은 내지 않고 전기요금만 내는 방법을 공지하면서 증세 거부를 부추겼다. 물론 이런 움직임은 네아 이오니아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부 변호사들과 노조, 사회운동가들도 정부의 신설 세금 징수와 수만 명의 공무원을 급료 일부만 지급하면서 정직시키는 계획을 좌절시키기 위해 운동에 가담하고 있다. 이로 인해 정부기관 건물들이 점거되는가 하면 파업 중인 노조원들의 복귀를 지시하는 긴급 통지문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고 국영기업들은 일시휴직 대상이 될 수 있는 공무원 명단 제출을 거부했다. 이와 같은 거부운동은 쓰레기 수거 작업원, 제빵사, 택시운전사, 치과의사, 항공관제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산발적인 파업이 계속되는 가운데 확산되었다. 당시 그리스 국민들은 정부의 재정 지출 삭감과 이로인한 가계소득 감소, 16%를 넘어선 실업률로 가계의 지출 여력이 한계에 도달했다. 그리스 국민들의 분노를 자극한 것은 특히 신설된 재산세였다. 2011년 9월 발표된 이 재산세는 올해 말까지 20억 유로를 징수할 것이 계획되어 있다. 그리스 정부는 이 세금을 쉽게 걷기 위해 전기 요금 고지서에 포함시켜 함께 부과했다. 세금을 안 내면 단전될 수 있다는 경고가 포함된 셈이다. 이와 같은 정부의 의도에 국영 전력회사 근로자들까지 분노하고 나섰다. 이들은 단전을 막겠다고 공언하고 단전된 경우에도 노인이나 실업자 등 취약계층에게는 다시 전기 공급을 재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들은 고지서 인쇄를 막기 위해 관련부서를 점거에까지 나서기도 했다. 변호사들도 가세해 아테네 변호사협회는 이번주 이 법의 폐기를 당국에 요구했다. 2011년 11월에 들어서자마자 그리스 정부는 유로존 탈퇴 및 디폴트 선언에 대한 국민투표를 진행하겠다고 나섰다. 그리스가 EU 2차 구제금융안에 대한 국민투표에 유로존 탈퇴안도 포함시키기로 결정했다. 사실상 유로존 탈퇴 여부까지 고려하고 있다는 강경한 의지로 풀이된다. 파판드레우 3새 총리는 11월 2일 EU의 구제금융에 대한 국민투표와 관련하여 그리스가 EU와 유로존 회원국임을 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파판드레우 3세 총리는 각의에서 국민투표의 딜레마는 구제금융과 유로, 유럽에 대해 찬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라며, 현 내각의 불신임 여부와 관련 없다라고 했다. 그리스가 갑자기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치킨 게임에 나서게 된 셈이다. 이에 따라 주가와 유로화 가치가 급락하는 등 금융시장이 다시 불안에 빠지고 있었다. 유로존 국가들이 철회를 요구하고 있지만 다시 한 번 국민투표 강행 의지를 표출한 것이다. 그리스 총리 관저의 툴카스 대변인도 신임투표에서 다시 한 번 승리를 거둬 정부의 계획을 밀고 나갈 것이라며 정부는 국가를 구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에게서 뒤돌아서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특히 4일 일 밤 의회에서 파판드레우 총리에 대한 신임투표를 앞두고 있었다. 여당에서도 반발하는 1명이 탈당해 여당인 범 그리스 사회주의 운동 당의 의석은 과반에서 2석 많은 152석으로 떨어졌다. 제1 야당인 신민주주의 당의 안토니오 사마라스 당수는 조기총선을 요구하면서 총리가 자신을 위해 그리스의 미래와 유럽 내 그리스의 입지를 위험에 빠뜨리는 왜곡된 딜레마를 안겼다고 비난하는 등 야당의 반발도 거세지고 있다. 이와 같은 그리스의 도박에 대해 EU 지도부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유로그룹 의장인 장 클로드 융커 룩셈부르크 총리는 그리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리스가 국민투표를 통해 구제금융안을 거부할 경우 국가부도 상황에 놓일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이어 이미 불안할 대로 불안해진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특히 로버트 졸릭 세계은행 총재는 그리스의 국민투표 결정은 재정위기를 해소하려는 유럽의 노력에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헤르만 반 롬푀이 EU 정상회의 상임의장과 호세 마누엘 바호주 EU 집행위원장도 이날 공동 성명을 통해 그리스가 유로존과 국제사회에 진 의무를 존중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반발이 거센 상황에서 프랑스와 독일, 그리스 정상들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앞서 긴급 회동했다. 이번 회담은 그리스의 국민투표 시행에 따른 금융시장 혼란 등에 대처하기 위한 것으로 IMF 총재, EU 관계자, 그리스 대표 등도 배석한다. 회의에서는 유로존 해법의 열쇠를 쥐고 있는 독일과 프랑스 정상이 그리스의 국민 투표안 철회를 강하게 압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독일과 프랑스 정상은 이날 발표한 성명에서 EU 정상회의 결정을 수행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수적이라면서 그리스 부채를 줄이는 EU 합의안 실행을 촉구했다. 그러나 그리스 국민 대다수의 여론은 디폴트 선언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렇게 될 경우 유로존은 엄청난 위기에 휩싸일 공산이 커지고 그리스는 말 그대로 파르테논 신전 같은 돌덩어리를 제외고는 국내외 자산이 모두 압류된다. 다만 그리스 국내 자산은 그리스의 사법 당국이 허가해야 해외 채권자들이 처분할 수 있다. 당시의 유럽 증시는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운 상황에 있으며 미국이나 아시아 증시의 하락세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와 같은 돌발 상황으로 인해 전 세계 주식이나 금융 쪽에 관련된 투자자나 종사자는 그리스에 대한 원망이 극에 달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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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6
  • 조지아 내 내제된 사회 갈등과 양극화
    최근 조지아 의회가 언론과 시민 사회 억압에 대한 국내, 국외의 우려와 반발에도 ‘외국 대리인 법안’을 최종적으로 통과시켰다. 반러 감정을 가진 시민들은 대리인 법안 통과에 반발해 대규모 시위를 열었고, 이에 미국 등 국제사회는 여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제재를 가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법안에 따르면 해외에서 전체 예산의 20% 이상 자금 지원을 받는 언론 매체나 비정부기구인 NGO 단체들은 외국의 영향을 받는 대행기관으로 등록해야 한다. 이에 등록하지 않은 단체나 개인은 벌금과 최대 5년 이하 징역에 처해질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조지아라는 나라 자체가 다수의 NGO들이 결집해 세워진 국가이기 때문이다. 조지아의 언론 및 NGO 시민 사회 단체의 상당수는 미국과 유럽 등의 자금 지원을 받는 단체들이 많다. 이에 시민단체가 조지아 정부의 엄격한 규제에 노출되어 민주주의가 훼손될 것을 우려하여 강하게 반대해왔다. 특히 이와 같은 법안은 2012년에 제정되어 언론과 NGO, 반정부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엄격하게 규제된 러시아의 외국 대리인 법과 비슷하다 여겨 이를 ‘러시아법’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와 러시아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럼에도 이 법 자체가 러시아와 비슷하다 하여 '러시아 법'이라 이름 짓고 이를 비난한 것이다. 특히 조지아의 야당 의원들은 조지아를 친러시아 국가로 만들려는 시도라고 비판하고 있다. 조지아는 그 동안 EU와 나토 가입을 추진해왔으나, 친서방 대 친러시아 노선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과 사회적 갈등이 지속되어 왔다. 여당인 "조지아의 꿈" 정당이 집권하기 이전까지 조지아는 친서방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미국과 나토, 그리고 EU의 영향력을 러시아 국경과 인접된 남부 카프카스 지역으로 확장시켰다. 이에 안보 위협을 느낀 러시아가 남부 카프카스 지역의 갈등 문제에 개입하면서 자신들의 세력권을 구축했다. 러시아 입장에서 소련이 해체된 이후, 카프카스 지역의 저항 세력들은 큰 문제가 되었었기 때문이다. 나토와 EU가 카프카스에 진출하면 90년대 체첸 전쟁과 같은 내전이 또 다시 촉발될 가능성이 높았고 그로 인해 러시아의 안보가 매우 위태로울 수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의 지정학적 전략은 조지아 북부지역인 남오세티아와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 및 돈바스 일대에 대한 통제가 진행되면서 어느 정도 일단락되긴 했다. 조지아와 우크라이나는 지난 2017년 7월 18일 페트로 포로센코(Петр Порошенко)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조지아를 공식 방문함을 계기로 양국 관계를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한 바 있다. 그러나 기오르기 크비리카슈빌리(Giorgi Kvirikashvili) 총리 이후, 이라클리 가리바슈빌리(Irakli Garibashvili)가 2021년에 정권을 이양 받은 이후, 갑작스럽게 친러성향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 때 가리바슈빌리를 지원하고 지지한 세력은 이미 조지아에서 상당수의 재력을 확보한 친러계열의 유태계와 친러 성향의 지지자들, 그리고 바투미를 기반으로한 아자리야계 조지아인들이었다. 이들은 친러 성향을 갖고 있으며 특히 아자리야인들은 바투미를 중심으로 자치공화국을 형성하고 있을 정도로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이 아자리야인들은 조지아계 무슬림들을 대표하는 민족으로 오스만 제국 지배 시기인 16세기부터 17세기 무렵 사이 대부분 이슬람교 하나피파로 개종한 자들이다. 20세기 초 아제르바이잔 바쿠의 유전이 개발되고 생산될 석유를 운반할 송유시설 및 철도가 바투미를 거쳐 건설되면서 아자리야 지역의 중요성이 증대되었다. 게다가 흑해 연안을 쥐고 있는 아자리야인들의 영향력은 무시 못할 수준인 것이 조지아의 유일한 항구이자 바다로의 출구가 아자리야 자치공화국의 수도인 바투미 때문이다. 그래서 조지아의 사회적 갈등은 친러, 반러의 갈등이 곧 동부와 서부라는 지역적 갈등이 내포되어 있다. 조지아 서부는 아자리야인들을 중심으로 압하지야까지 흑해 일대가 연결되어 있고 아자리야인과 압하지야인들은 상호 연대까지 하고 있다. 반면 조지아 동부 지역은 수도인 트빌리시를 중심으로 반러시아의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사진에 나와 있는 온갖 욕설의 러시아 비난과 푸틴에 대한 비난 등의 그레피티가 쓰여 있는 것은 반러 성향의 시민들의 목소리, 그리고 이를 독려하는 친우크라이나 성향의 시민 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난민들, 이어 우크라이나 네오나치인 아조프 연대와 연합한 조지아의 네오나치들이 중심이 되고 있다. 이들은 나치 독일의 제2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의 깃발과 유사한 아조프 연대의 깃발 표식을 그레피티로 새겨 놓고 대놓고 나치와 연대하고 있음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들은 대놓고 서부 지역의 아자리야인과 친러 성향을 조지아인들을 상대로 테러를 저질렀지만 친러 성향의 조지아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총선에서 이라클리 가리바슈빌리(Irakli Garibashvili)를 당선시키면서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리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인 2022년 2월 25일 이라클리 가리바쉬빌리(Irakli Garibashvili) 조지아 총리는 조지아가 서방의 대(對)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가리비쉬빌리 총리는 2023년 5월 24일 카타르 경제 포럼(Qatar Economic Forum)에서 이와 같은 조지아 정부의 입장을 재확인하게 된다. 이어 2023년 8월 23일 러시아 국가안보위원회 부의장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Дмитрий Медведев)는 조지아가 나토 가입을 추진한다면 러시아는 조지아 내 미승인국인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South Ossetia)를 합병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10월 5일에는 아슬란 브자니아(Аслан Бжания) 압하지야 대통령이 러시아와 압하지야의 방어 역량 증대를 목적으로 압하지야 영토 내에 해군 기지를 건설한다는 내용의 합의서에 서명했다. 이후 우크라이나 정부 2023년 7월 5일 재임 당시 권력 남용 혐의로 조지아에 수감 중인 전 조지아 대통령이자 우크라이나 오데사(Odesa) 주지사인 미헤일 사카슈빌리(Mikheil Saakashvili)의 건강 상태가 악화된 것을 두고 인권 탄압이라 비판하면서 우크라이나와의 관계도 멀어지게 되었다. 결국 친러어와 반러의 단순한 대립구도가 지역 대립, 민족 대립으로까지 촉발되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다. 조지아 서부 지역에는 아자리야인 말고도 라즈(Laz)인이 살고 있다. 이들 또한 아자리야인과 같은 무슬림들이고 친러 성향을 갖고 있다. 게다가 이들이 터키에 살고 있으면 조지아계 터키인이고 조지아에 살고 있으면 터키계 조지아인이라 볼 수 있다. 현 터키 대통령인 레제프 에르도안이 라즈인 혈통으로 조지아계 터키인이다. 실제로 에르도안은 인터뷰로 자신의 가문이 조상대에 조지아 바투미에서 터키 리제로 건너온 조지아인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 영향으로 인해 라즈인들은 터키 정부의 상당한 지원까지 받고 있다. 라즈인과 아자리야인으로 대표되는 조지아 서부인들은 리버럴적이 성격을 갖고 있는 조지아 동부 정교회인들과 문화적 차이도 크다. 바투미를 중심으로 한 아자리야 자치공화국도 무슬림과 정교회라는 종교적 차이 때문에 인정해준 것이다. 이처럼 조지아에는 민족계파만 해도 94개가 자리 잡고 있는 나라다. 대한민국의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합친 크기에 불과한 작은 나라지만 이 작은 나라에 90개가 넘는 민족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민족 간의 통합은 조지아의 또 다른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어쩌고 보면 무슬림과 정교회, 유태교까지 이어지는 종교적 대립도 한 몫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 입장에서 조지아를 굳이 군사적으로 공격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지아가 반러 성향의 인물이 총리로 당선되어 반러 세력이 세력의 주동이 된다면 바투미를 중심으로 아자리야 자치공화국을 정식 독립국가로 승인하면 된다. 러시아가 아자리야와 라즈인을 지원하고 조지아 동부의 반러 세력이 라즈인을 학대한다면 터키가 이 문제에 개입할 여지가 생기게 된다. 러시아 하나 막는 것도 버거운데 터키마저 개입을 한다면 조지아는 공중분해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앞서 말한 것처럼 조지아의 사회 갈등은 곧 친러 vs 반러, 동부 vs 서부의 지역갈등, 이슬람 vs 정교 & 유태의 종교갈등, 아자리야 & 라즈 vs 조지아의 민족갈등까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 미국과 집단서방이 장미혁명처럼 색깔혁명을 조장한다면 우크라이나와는 전혀 다른 제2차 조지아 내전이 발발할 가능성이 크다. 2023년 9월 18일 전(前) 조지아 내무부 차관으로 현재 우크라이나군 SBU 부국장인 기오르기 로르키파니제(Giorgi Lorkipanidze) 등이 조지아 내에서 반정부 시위를 조직, 현 정부를 전복하려는 계획이 탄로나면서 제2차 조지아 내전은 언제든 발생 가능한 상황에 있다. 그리고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사뭇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여진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도 연결되어 있기에, 조지아 내 사회갈등을 유심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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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4
  • 삼성전자가 우크라이나에서 판매되는 폴더블 스마트폰 갤럭시Z 제품명에서 'Z'를 삭제한 사건
    삼성전자가 우크라이나에서 판매되는 폴더블 스마트폰 갤럭시Z 제품명에서 'Z'를 삭제했다 한다. 앞서 반(反) 러시아 성향이 강한 발트3국에 이어 우크라이나까지 해당 조치를 확대했다. 삼성전자는 이날 우크라이나 홈페이지에서 판매되는 '갤럭시Z' 시리즈 제품명을 수정했다. '갤럭시Z폴드3'는 '갤럭시폴드3'로, '갤럭시Z플립3'는 '갤럭시플립3'로 변경됐다. 러시아 국방부는 일일 브리핑과 더불어 Z를 매개로 한 사진과 영상을 몇 개씩 선보이고 있다. 진격 명령을 내린 푸틴 대통령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상징하기도 한다. 반대로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발트해 연안, 동유럽 일대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히틀러 시대의 나치 문양인 '하켄크로이츠'와 유사하게 '공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50년 역사를 지닌 스위스의 '취리히 보험회사'가 그동안 사용해온 Z로고 사용을 포기했다. 파란색 바탕에 흰색 Z를 로고로 사용해온 스위스 취리히 보험은 SNS를 통해 Z로고를 사용할 경우 오해의 소지가 있어 당분간 사용을 금지하기로 했다고 언급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지난 3월 초 러시아 군사 장비에 Z와 V자를 쓴 이유를 공식 인스타그램을 통해 설명했다. Z는 '승리를 위해'라는 의미로, 또 다른 문자 V는 '진실의 힘' (Сила в правде)과 '과업 완수'(Задача будет выполнена)를 뜻한다는 것이다. Z는 러시아어로 '승리를 위해', V는 영어로 '승리'(Victory)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Z문양은 금기시된 '나치' 문양과 유사하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특히 독일과 그 주변에서 예민하게 반응했다. 독일은 영화와 고증 등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나치즘을 선전하거나 광고하기 위해 나치 문양인 하켄크로이츠를 사용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독일의 북부 니더작센 주와 남부 바이에른 주는 Z표시를 자동차나 건물에 사용할 경우 최고 징역형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발트해 에스토니아 정부도 Z표시 사용을 경범죄로 분류하고 있다. 체코도 Z를 공개적인 장소에서 사용할 때 법적 처벌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우크라이나에서는 프라비섹토르나 아조프 대대가 나치 문양을 하고 다니는 사진들이나 영상에는 조용히 있으면서 Z문양에만 유독 나치와 똑같이 반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욱일기도 올림픽이나 월드컵에 들고 나왔어도 비판 한 마디도 못하는 자들이 Z표시를 가지고 PTSD 발작을 하고 있다. 그럴꺼면 영어 알파벳에서 Z를 아예 빼버리던가. Z가 전범의 상징이고 러시아 군사작전의 상징이니 영미권 국가들도 Z들어가는 용어를 쓰지 않으면 된다. 라틴 문자에서 Z가 들어가는 단어가 적어도 수천만개? 수억개? 정도 될텐데 그게 트리거가 될 정도면 Z들어가는 문구 모두 바꾸는 글자혁명을 해야 할 판이다. 그리고 Z 문자가 들어가는 나라 또한 14개가 있는데 이들도 나라 이름 바꿔야 할 판이다. 특히 체코는 Z를 공개적인 장소에서 사용할 때 법적 처벌 방안을 검토한다 했으니 그럼 체코 공화국 영문 이름인 Czechia 이거의 Z를 없애던지 영문을 바꾸고 그런 검토를 해야 이치에 맞지 않을까? Z 표시가 들어가 있는 모든 브랜드와 옷도 바꾸고 도시 이름도 Z가 들어가 있으면 바꿔야할듯 하다. 나치만큼 제2차 세계대전의 대학살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현재도 진행 중인 전쟁을 두고 아주 별의 별 짓을 다하고 있다. 그럼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파괴한 전범국 미국 USA의 U도 못 쓰도록 바꿔버리자고 하면 거기에는 침묵하는 자들이다. 이제는 어이 없는 것도 모자라 유치하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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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3
  • 6년 전, 2017년 4월 3일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 테러 사건의 데자뷰
    2017년 4월 3일 오후 2시 30분, 나는 당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었다. 네브스끼 인근 폰탄카 운하 쪽이었고 당시 그 근처 센노이 시장(Сенной Рынок)에서 드미트리와 부식거리를 사고 있었는데 지하철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해 최소 14명이 사망하였다는 속보가 들려왔다. 당시 러시아 언론들에 의하면, 전철역 2곳에서 폭발이 일어나 최소 14명이 숨졌고, 64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알려졌다. 당국은 해당 전철역을 폐쇄조치 하였으며, 폭발사고가 IS의 테러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지부 내 소식통은 테러범들이 테러에 최대한 적합한 시간대를 선택했다고 한다. 타스통신에 의하면 사고 당시 지하철 내에는 사람이 많았지만, 객차가 만원인 시간대는 아니었다고 했다.객차 안에 사람이 너무 많으면 폭발물 부근의 몇 명이 폭탄의 위력과 파편을 온몸으로 받게 됨으로써 희생자 수는 오히려 줄어들기 때문이라 했다. 당시 조사 결과, 지하철 테러의 폭발물이 철제, 유리 파편으로 가득 찬 소화기와 쇠구슬을 잔뜩 담은 사제 폭탄 가방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전방위로 날아든 파편 때문에 전철에 탑승한 수십 명이 죽거나 다쳤고 전철 유리창이 깨지고 출입문도 찌그러졌다. 중앙아시아 출신의 20대 남성이 저지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폭발 현장에 대한 조사를 통해 ‘자폭 테러’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파악됐다고 한다. 이날 폭발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한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과의 회담을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한 가운데 일어났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언론에 알리지 않은 채 폭발 현장을 찾아 헌화하기도 했다. 당시 지하철 폭발 사건은 지난 2010년 모스크바 지하철 테러에 이어 7년 만에 발생한 것이다. 2010년 3월 29일 오전 출근 시간에 모스크바 시내 지하철역 2곳에서 시차를 두고 연쇄 폭발이 일어나 41명이 숨지고 80여 명이 다친 바 있다. 앞서 2004년에는 2월과 8월에 각각 모스크바 지하철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람잔 카디로프 체첸 대통령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테러를 포함한 모든 가설을 점검 중”이라는 푸틴 대통령의 발언과 사진을 올린 후 “이 끔찍한 테러의 주모자와 배후를 밝혀내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했다. 다른 러시아 정치인들은 신중한 태도를 취하면서 폭탄 테러의 희생자 유가족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하는 정도로 반응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우리 모두의 아픔”이라고 썼다. 게오르기 폴타프첸코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지사는 이번 사건을 “무시무시한 비극”이라 지칭하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에게 경각심을 갖고 신중하게 대응할 것을 부탁했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 전 구간이 폐쇄된 상황이기 때문에 시내는 최악의 교통대란을 겪었다. 시당국은 지상 대중교통을 모두 무료로 개방했고 택시 기사들도 퇴근길 시내 중심가에서 탑승한 승객에게는 요금을 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통대란이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집으로’라는 해시태그를 부착하고 카풀을 제공하는 자차 운전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인터넷에도 퇴근길 카풀이 가능한 시간과 행선지 정보를 제공하는 게시판이 생겨났다. 게시판을 방문한 누군가는 “어려울 때일수록 뭉쳐야 한다”고 썼었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는 3일 간의 공식 추도일을 선포했다. 시민들은 애도의 뜻을 표하기 위해 테러가 발생한 ‘Технологический институт (체흐놀로기쩨스끼 인스띠뚜뜨)’역에 줄을 이어 꽃을 가져다 놓았다. 모스크바에서는 크레믈린 벽 무명용사의 묘에 설치된 대조국전쟁 참전도시 기념비 중 ‘영웅도시 레닌그라드’ 기념비 앞에 헌화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그 중 한 명은 타스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대조국 전쟁 중 872일 동안 독일군의 봉쇄를 견뎌낸 영웅도시 레닌그라드 기념비는 희생자들에 대한 연대의식을 표시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모스크바 축구클럽 ‘스타르타크’ 팬들도 평소에는 ‘앙숙’이자 라이벌이었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대한 연대감을 표했었다. ‘오렌부르크’팀과의 경기에서 스파르타크 팬들은 관객석에서 ‘크나큰 아픔에 가슴이 찢어진다. 피테르(페테르부르크의 애칭), 애도를 표한다’고 쓰인 대형 현수막을 펼치기도 했을 정도였다. 당시 러시아 국민들은 테러에 맞서 하나가 되었다. IS의 테러가 오히려 러시아 국민들을 단합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카페에서 다시 한 번 테러 공격이 발생했다. 200g 이상의 강력한 TNT가 터져 건물 유리가 모두 깨졌고 집기들은 처참하게 부서졌다. 이 날 러시아 유명 군사 블로거인 블라드랜 타타르스키가 사망하고 25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카페에서는 사망한 군사 블로거와 독자들의 만남이 진행되고 있었고, 한 여성이 조각상을 증정한 뒤 폭발이 발생해 조각상에 폭발물이 들어있었던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사망자는 닉네임 '블라드랜 타타르스키'로 알려진 유명 군사 블로거로,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출신이며 실제 이름은 막심 포민이며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를 지지하고 있는 블로거다. 그는 56만 명의 구독자를 가졌으며 러시아군의 인사나 작전 등에 대한 논평을 썼던 인물이다. 타타르스키와의 만남 행사를 주최한 곳은 러시아의 한 애국 단체로, 이들은 보안 절차가 있었는데도 폭발물이 반입됐다고 하였다. 부상자 25명 중 19명은 병원으로 이송됐고, 러시아 국가수사위원회는 타타르스키의 사망을 살인 사건으로 규정하고 조사에 착수했으며 폭발 당시 카페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을 상대로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유력한 용의자는 서부 우크라이나 이바노 프랑키스크 출신의 여성으로 아주 작정하고 테러를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6년 전, 오늘과 데자뷰다. 다만 테러의 주체가 IS에서 우크라이나 네오나치로 바꼈을 뿐이다. 우크라이나가 몰리게 되니 러시아에 우크라이나 난민으로 위장해 들어온 젤렌스키 정부 소속의 네오나치 테러리스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진다. 정식으로 싸우는 전쟁도 아닌 테러라면 더더욱 용납할 수 없는 범죄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테러 지원국에서 한 단계 격상해 테러 국가로 규정하고 국가 자체를 소멸시켜 테러를 일으킨 자들을 박멸해야 한다. 러시아 국민들도 이 테러에 분개하고 있다. 전쟁에 서서히 염증이 드리워질 때쯤 다시 국민들이 단합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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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3
  • 터키-아르메니아 대학살 사건은 국제적으로 매우 복잡한 문제 - 上편
    오스만투르크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문제에 대해서는 독일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더불어 장시간 동안 유럽에서 가장 큰 이슈였다. 특히 19세기 말, 오스만투르크 제국 시기부터 터키 공화국이 탄생한 1923년까지 오스만투르크 제국 치하에 있던 아르메니아인 약 150만 명은 조직적인 학살을 당하거나 강제로 추방되었고 그 과정에서 벌어진 약탈로 인해 굶어 죽거나 고문 및 납치 등의 방식으로 조직적인 인종청소를 당했다는 주장이 대학살 관련 문제의 핵심이라 볼 수 있겠다. 세계 각국의 아르메니아 관련 단체들은 우크라아나 홀로도모르 단체보다 더 숫자가 많고 매우 조직적이다. 이들은 국제사회를 움직여 제노사이드 인정과 더불어 터키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아르메니아인들을 약탈한 재산을 반환해달라는 내용의 국제사법재판소에 소송도 걸었고 그로 인한 보상 등을 요구하여 터키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최근에 우크라이나 홀로도모르 단체들과 연합하여 러시아도 주적으로 몰아가며 러시아 정부에도 터키에 걸고 있는 내용과 같은 내용으로 러시아에 우크라이나에 대해 공식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과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했던 홀로도모르는 내용 자체가 판이하게 다르기에 이는 러시아 입장에서 볼 때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반면 터키 정부는 아르메니아에 사과를 전혀 하지 않은게 아니다. 그동안 터키인과 자국 내 아르메니아인 간에 발생했던 유혈 충돌과 대규모 희생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거듭 사과했었다. 그러나 정부 차원에서 자행되었던 계획적, 혹은 조직적으로 학살했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 아르메니아인이 희생되었다는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시민이었던 아르메니아인들이 터키의 적국이었던 러시아에 동조하고 오스만 제국을 배신하여 독립하려던 반란으로 인한 불가피했던 조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한 근거로 아르메니아인들과의 충돌 과정에서 터키인 희생자도 40만 명에 달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을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직접적인 연결이 아니라 이를 정치적으로 쟁점화하는 것으로 끌고 간다는 것에서 이는 순수한 의미의 사과와 보상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터키를 고립시키고 악화시키려는 타 국가들의 음모라고 주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EU 국가들이고 특히 프랑스의 반발이 매우 심했다. 그 이유 프랑스에 아르메니아계 집단들이 상당수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의 요구로 인해 프랑스 의회는 2012년 1월,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부정하는 행위에 대해 형사 처벌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고 학살을 부정하면 처벌하는 것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반면 아르메니아인들은 유럽에서 오랜 투쟁으로 인한 승리를 자축하고 이를 만끽했지만, 반면 터키와 프랑스 관계는 역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게 된다. 이 법의 발효로 인해 프랑스에서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공개적으로 부인하는 발언이나 표현을 할 경우 법적인 처벌을 받게 된다. 이에 대한 반발로 터키 전역에선 반(反) 프랑스 시위가 벌어졌으며 튀니지, 모로코, 알제리 등을 식민 통치하면서 수백 년 동안 아랍인들을 박해하고 학살을 저질렀던 프랑스의 위선과 이들의 역사적인 과오를 규탄했다. 2015년에는 터키-아르메니아 학살의 100주기가 되던 해였다. 당시 터키에게 매우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는데 전 세계 곳곳에서 아르메니아에 대한 추모 행사가 열리고 있었고 이는 유럽 의회가 공식적으로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비난하는 결의안까지 채택했다. 그런데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우크라이나의 홀로도모르도 러시아의 학살로 규정하고 이를 비난하는 결의 안까지 통과시키려 한다. 그렇게 따지면 영국의 아일랜드 대기근, 인도 뱅골 대기근 등으로 인한 아사 또한 학살로 규정해야 하며 프랑스가 저지른 알제리 대학살, 베트남 대기근도 학살로 규정하여 비판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학살에는 EU 자체에서 언급이 금기어회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불어 EU의 위선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따라서 23개 국가가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면서 국제 사회는 아르메니아 측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국제 사회라기보다는 정확히 말해 EU와 영국, 이스라엘이 들어간 23개국이다. 그리고 미국은 나토의 동맹국이자 중동에서 자국 이익의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는 터키를 자극시키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를 국제 지정학, 전략적인 압박으로 이용하기 위해 법안 통과를 미루고 있다. 만약 터키가 미국의 말을 듣지 않거나 미국의 이익에 벗어나게 하는 행위를 한다면 이 법안을 미 하원에 주제로 내놓으면서 터키 정부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활용이 가능하다.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비난하는 결의안은 터키에게 당근 및 채찍을 주면서 지랫대 역할을 할 수 있는 전략적 무기인 셈이다. 그런데 그동안 아르메니아인들은 터키에 대해 격렬하게 투쟁을 해왔다. 당시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유럽 주요 도시에 부임하고 있는 터키 외교관들은 축하 대신 위로 전화를 받았다 한다. 당시 터키 외교관들에게 유럽은 매우 위험한 근무지였다. 특히 아르메니아의 극우단체인 아살라(ASALA)는 유럽 각국에 암약하여 포진하면서 표적 테러를 자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놓고 표적 테러를 저지르는데도 유럽 각국은 이를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다. 유럽은 "러소포비아" 못지 않게 "투르크포비아"를 갖고 있다. 지금은 "러소포비아"에 묻혀 드러나지 않고 있을 뿐이지만 당시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유럽 내에서 "투르크포비아"는 엄청났다. 게다가 7~80년대에 중동에서 잇달아 전쟁이 벌어지고 오일쇼크까지 터지면서 중동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하던 때였다. 그러한 반감은 엉뚱하게도 터키에도 옮겨 붙었다. 무슬림들이 많고 중동하고의 관계 또한 깊다는 것에서 나타난 일종의 기피현상인 것이다. 이 때 아르메니아 극우단체 아살라에게 희생된 터키 외교관만 해도 46명에 달했다. 그만큼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있어 터키는 학살 주범으로 마땅히 응징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면서 터키의 공식적인 사과를 받아내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 최종적인 목표였다. 그러나 이처럼 테러를 통해 아르메니아의 슬픈 과거사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은 오히려 악수를 갖고 왔다. 이들 극우주의자들은 테러리스트들로 국제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되자 아르메니아 정부가 나서 외교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방향으로 전략을 선회했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 전략도 이전에 펼친 테러 문제 때문에 상당수의 국가들이 아르메니아를 기피했다. 그런데 아르메니아인 학살 문제에 대해 파악해보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요소들이 혼재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과거 오스만투르크 제국 치하에서 아르메니아 정교도들은 밀레트(Millet)라는 투르크식 소수민족 공동체 내 총대주교가 관할권을 행사했고 이는 종교적 자유와 민족적 자치를 함께 누렸었다. 애초부터 무슬림이 아니라고 이들은 탄압 받지 않았던 것이다. 1876년 9월 주 이스탄불 영국 대사 엘리어트 경이 본국에 보낸 외교문서에 의하면 오스만투르크 제국 내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오히려 일반 터키인들보다 부유하며, 월등히 높은 삶의 질을 누리고 있다고 기술되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의 민족주의자들은 독립 국가 건설을 원했다. 오스만 제국과 무장 투쟁을 벌이면서 끊임없이 독립을 추구했다. 특히 1877~1878년 사이에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의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을 점령하자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러시아를 지원하면서 오스만 제국을 배신했다. 이러한 사건들을 계기로 아르메니아 독립 국가 건설을 노리는 민족주의 단체들이 등장했고, 훈체크라던지, 다시나크파 같은 극우 정당들도 결성되어 터키인들을 약탈하고 강간하며 학살하고 다녔다. 그러나 이들이 했던 참혹한 행위는 유럽 내 아르메니아계와 리버럴 세력들에 의해 철저히 묻혀졌다. 이들은 터키 내 에르주룸, 비트리스, 반, 엘라지으, 디야르바크르, 시바스 등 동부 지역 6개 주를 아르메니아 민족국가의 영토로 규정하고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을 본격화했다. 그러나 같은 지역을 영유하고 있던 쿠르드족이 아르메니아에 반발했다. 해당 지역들은 아르메니아보다 쿠르드족이 이미 먼저 와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해당 지역들은 쿠르디스탄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최초의 무장 투쟁은 1890년 에르주룸에서 발생했다. 오스만 제국의 주요 시설과 시민들을 향해 테러를 저질렀고 이 같은 행위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면서 쿠르드족과도 대립형세를 띄게 되었으며 쿠르드족들은 그 사이에 민병대를 조직해 아르메니아와 맞서 싸웠다. 당시 이 6개 주의 인구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15% 정도였고 상당수가 쿠르드족이었기에 숫적에서 열세를 보였다. 그러나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과 달리 아르메니아인 대부분은 경제적으로 오스만 정부가 보장해주었기 때문에 풍족한 삶을 향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민족주의자들의 독립 투쟁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터키인들은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로 인해 러시아-오스만 전쟁에서 패배했다고 생각했으며 결국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대한 불신은 크게 확산되면서 불행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다. 주제 <터키-아르메니아 대학살 사건은 국제적으로 매우 복잡한 문제>는 上, 中, 下편으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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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4
  • 터키 이스탄불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에 5번째 대면 협상에서 나온 결과
    2023년 3월 29일 터키 이스탄불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에 5번째 대면 협상이 열렸다. 여기에서 '평화 협정(Peace treaty)'이란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평화협정의 주요 내용도 이스탄불에서의 협상이 끝난 뒤 별도로 가진 양국 대표의 기자 회견을 통해 전해졌다. 양측의 회견 내용을 보면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협상은 하루 만에 끝났다. 본래 1박 2일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하루 만에 종결되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 타협점을 찾은 것으로 보여 진다. 물론 최종적으로 합의까지 이르기에는 몇 차례의 큰 고비를 넘겨야 한다. 이스탄불 회담을 중재한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6가지 협상 쟁점 중 4가지 부분에 있어 합의에 근접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합의가 될 수 있는 4가지 조건은 첫 번째,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철회하는 것, 두 번째, 우크라이나의 비무장화, 세 번째, 우크라이나에 대한 국제적 안보 보장, 네 번째, 우크라이나 내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는 조건이다. 물론 타결되지 않고 있는 나머지 두 가지는 돈바스의 독립과 더불어 2014년 러시아에 합병된 크림반도의 러시아 영유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해 군사작전을 개시하면서 핵심적인 목표로 내세웠던 우크라이나 민병대의 비무장화와 나치의 세력인 아조프 대대 및 프라비섹토르 세력의 발본색원하는 문제는 돈바스를 보호하는 조건에 있어 협상 내용에서 빠져 있는 상황이다. 이와 같은 나치 세력을 발본색원하는 문제는 우크라이나의 정권교체가 아니라 나치의 깃발을 앞세워 선동하는 세력들을 거의 제압했다 여겼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더불어 당시 남부 항구도시이자 최대 격전지인 마리우폴의 도심 돈바스 군의 통제 하에 들어왔고 아조프 대대의 근거지였던 마리우폴이 완전히 함락되었다. CNN 방송도 마리우폴이 사실상 러시아군에게 함락되었다고 보도했으며 바딤 보이첸코 마리우폴 시장은 CNN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러시아군의 포격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지역 대부분이 러시아군에게 점령되었다며 마리우폴 함락을 사실상 인정했다. 터키 언론인 휘리옛과 TRT에 의하면 이스탄불 협상이 이전 4차 만남에서 러시아 협상단이 우크라이나 협상단에게 문서로 정리해 넘긴 제안서에 대한 답변 문서를 검토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러시아 협상단은 협상에서 구두로 정의하는 것보다는 문서화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가장 진정성이 있는 내용이라며 러시아의 제안을 문서로 전달했었다. 이에 대해 러시아 협상단 단장인 블라디미르 메딘스키 크레믈린 보좌관은 협상 종료 후, 회견에서 우크라이나의 중립적이고 비동맹적인 지위와 비핵국가 지위의 추구를 확인하는 제안을 문서로 받았다고 구체적으로 밝혔다. 이와 같은 상세한 내용에 의하면 생화학무기를 포함한 모든 대량살상무기의 생산과 배치를 거부하는 것과 우크라이나 내부의 외국 군사기지와 더불어 외국의 군대 배치 금지 조항이 포함되었고, 우크라이나의 안보를 보증해주는 EU 국가 및 나토 국가들의 동의 없이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것은 허가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우크라이나의 이번 제안으로 볼 때 우크라이나가 국제법적으로 안전을 보장하는 것과 더불어 영구적 중립국을 선포하는 방안을 상정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에 우크라이나는 자국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을 1994년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나 비교적 최근의 민스크 협정보다 더 강화된 다국적으로 조약을 비준하여 확실한 안보를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다비드 아라카미아 우크라이나 여당인 인민의 종 대표가 말하기를 "우크라이나의 안전을 보장하는 조약은 그 동안 보증했던 국가들이 서명하고 비준하는 국제 조약의 형태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하였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포함해 터키, 독일, 캐나다, 이탈리아, 폴란드, 이스라엘 등, 참여 가능한 국가들을 안전 보장의 보증 국가로 제시했다. 그러면서 일부 국가들로부터는 이미 참여를 허락을 받았다고까지 했다. 우크라이나가 침략을 당할 경우, 보증 국가들은 3일 간의 협의 후 우크라이나에 무기 및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고, 우크라이나 영공을 폐쇄해야 한다는 내용을 갖고 있다. 이에 따라 보증하는 국가들은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어 사용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기자회견 등을 통해 이미 약속했기 때문에 더 이상 논의가 필요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까지의 합의한 부분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었다. TRT는 협상 중 휴식 시간에 미하일로 포돌랴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고문과의 인터뷰에서 논의의 핵심 쟁점은 우크라이나의 안보 보장에 관한 국제 조약이라 역설하며 이와 같은 국제적인 조약 및 확실하게 안보를 보장 받는 것이 서로 간의 적대 행위를 종식시킬 수 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차후에 다시 있을 6번째 만남의 쟁점은 모든 인도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휴전이라고 밝혔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구체적으로 세부 사항을 검토하고 푸틴과 젤렌스키가 정상 회담을 가지며 승인하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국가가 사회와 소통하는 것으로 방침을 최근에 바꾸었고 평화협정에 대한 국민투표와 최고 의회 라다에서의 승인 및 안보 보증 국가 의회의 비준 등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러시아군이 개전 전날의 위치로 완전히 철수하는 것이 보장되어야 안보 협정의 국제적 조약 서명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최대한 근접했지만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협상이 싸인되지 않으면 군사작전 종료는 없다는 입장이다. 알렉산드르 포민 러시아 국방차관은 상호 간의 신뢰를 높이고 향후에 협상할 수 있는 필요 충분 조건을 만들기 위하여 키예프와 체르니코프에 대해 더 이상의 군사 활동을 줄이기로 했다. 이 말은 북쪽의 전선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것으로 우크라이나군에 열세에 놓였다는 말과 다름없다. 따라서 북쪽 전선은 포기하겠다는 말이다. 더불어 오늘 러시아 영내에 있는 벨고로드 군수창고 폭발하여 우크라이나군의 공격으로 여겨졌다. 리아 노보스티(РИА Новости) 국영 통신사는 러시아 긴급 구조대 대표 말을 인용해 "벨고로드 인근에서 발생한 군수창고 폭발은 인재"라고 보도했지만 우크라이나의 공격으로 추정된다는 타스 통신 등의 보도로 미루어 볼 때 이미 북쪽 지역에서 러시아군의 열세는 기정사실화 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러시아의 협상단은 군사활동의 축소가 휴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하면서 아직은 끝나지 않았음을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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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3
  • 유럽의회 선거 결과, 마크롱 대통령의 조기 총선 카드는 독배인가 아니면 승부수인가
    이번 유럽의회 선거 결과는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에게 치명타를 가했다. 유럽의회 선거는 유럽 연합회원국들이 자국의 선거법에 따라 정당에 투표하며, 그 결과에 따라 각 회원국은 인구에 비례해서 할당된 의석수 내에서 당선인을 배분해 유럽의회 의원을 선출한다. 프랑스의 경우에 할당된 의원 수는 총 720석 중 81석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정당 지지율인데, 프랑스 집권 여당인 중도성향의 자유당 그룹에 속하는 ‘르네상스당’은 약 14.5% 정도를 득표했던 반면, 극우 성향의 ‘정체성과 민주주의’에 속하는 ‘국민연합’은 약 31.4% 정도를 득표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기준으로 총선을 생각해 보면, 집권 여당은 전체 하원 의석 577석 중 현재 249석이니까, 그 절반 정도인 125∼155석 정도가 될 것이다. 이와 반대로, 국민연합은 현재 89석보다 150석 정도가 많은 235∼265석 정도가 될 것이다. 원래 정치 일정대로 총선이 실시된 경우에, 집권 여당은 완패가 될 수밖에 없다. 사실 유럽의회 선거 결과는 각국 집권당에 관한 중간평가의 성격이 강하다. 마크롱 대통령이 속해 있는 제3당인 중도 자유당 그룹은 현재 102석에서 79석으로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이와 반대로 극우 정당인 정체성과 민주주의가 현재 49석에서 58석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측되고, 여기에 이탈리아의 멜로리 총리가 속하는 극우 정당인 ‘이탈리아 형제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는 ‘유럽의 보수와 개혁’이 현재 69석에서 73석으로 늘어나게 되면, 이 두 정치 그룹의 예상 의석수는 합쳐서 128석이 되기 때문에, 제3당이 자유당 그룹을 앞지르게 될 것이다. 거기에 무소속과 기타 정당의 의석수가 100석 정도로 극우에 가깝다고 하면, 이번 유럽의회 선거 결과는 극우파의 약진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러한 결과를 인정하면서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이라는 카드를 제시했다. 프랑스의 의회해산권이 대통령에게 있으므로, 마크롱 대통령은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을 통해 프랑스 국민에게 선택권을 돌려주면서 표심의 결과에 따르려는 것이다. 그런데 외견상으로 이것은 분명히 ‘국민연합’의 허를 찌른 것이다. 르펜은 유럽의회 선거 결과의 기세를 몰아 원래 정치 일정대로 진행하게 되면, 2027년 4월에 대통령 선거에서 2022년에 패배를 설욕하게 되고, 그해 6월에 총선이 실시될 것이니까, 총선도 승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현재 프랑스의 정치 상황으로 보아 이 시나리오는 가능한 시나리오다. 그러나 마크롱 대통령이 원래의 정치 일정을 뒤집어서 3년이나 앞당겨서 조기 총선을 실시하게 되면, 그 결과에 따라 르펜도 대통령 선거 때까지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다른 변수들이 생길 수 있다는 생각에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욱이 현재 국민연합의 대표인 바르델라도 현재는 르펜과 함께 하지만, 그 결과에 따라 다른 행보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반대라면, 총리가 바르델라가 되면, 르펜은 대선후보로 나갈 것이다. 이것은 극우파가 대통령도 총리도 되는 최악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중도성향으로 프랑스의 정치지형으로 보면 주류 정치와 다소 거리가 멀고 이른바 제3의 길이라고 볼 수 있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1차 선거 결과로 24.01% 득표율을, 2차에서는 66.10% 득표율로 당선했다. 프랑스 대통령의 임기는 과거에 7년이었지만, 시락크 대통령 재임 때 임기를 5년으로 단축했고, 1번 연임은 가능하다. 마크롱 대통령은 2022년에 1차에서 27.85% 득표율을 기록했고, 2차에서는 58.54% 득표율로 재선으로 당선했다. 이러한 양상으로 보면 마크롱 대통령은 결선에서 표심을 모으는데 분명히 일가견(一家見)이 없지는 않다. 사실 그는 제3의 길을 지향하다 보니, 자신의 취약한 지지기반으로 인해 때론 좌충우돌과 돌출발언으로 많은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마크롱 대통령의 이번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 카드는 현재의 시점에서 보자면, 녹록하지 않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극우파가 약 29.5% 지지율을, 좌파가 약 18.5% 지지율을, 중도파가 약 18% 지지율을 보인다. 이번에 마크롱 대통령의 총선 조기 실시에 관해 프랑스의 원로정치인들도 극우파의 집권을 걱정하고 있으며, 오히려 지금과 같은 여세로 극우파에게 집권의 기회를 준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거기에 정통 우파인 ‘공화당’의 시오티 대표가 ‘국민연합’과 동맹을 제안했다가, 제명 위기로 번졌다. 아무리 그대로 나치독일에 맞서 드골주의 노선을 고수하고 있는 정통우파 정당의 대표가 극우파인 ‘국민연합’과 손을 잡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개인적 의견이라고 해도, 극우파와 협력하지 않는다는 정치적 금기를 깬 것은 정도(政道)를 넘어섰다는 당 안팎에서 강한 반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초라한 공화당의 현재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좌파 연합(‘굴복하지 않은 프랑스’, ‘사회당’, ‘녹색당’, ‘공산당’)도 공천 문제로 균열의 조짐이 벌써 나타나기도 한다. 극우파에 맞서 4개의 연합체로 이루어진 좌파 연합은 극좌 성향의 멜랑숑 대표가 온건파를 공천대상에서 배제하려는 움직임으로 내분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은 프랑스 현재 당면한 문제의 해결에 있어 많은 문제가 정치적으로 있지만, 그래도 극우파 집권만은 안 된다는 생각에 전국적으로 시위에 나섰다. 수십만의 시위 인파가 반극우세력 연대의 물결로 가득 채우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이 이러한 점에서 일종의 도박과 같은 정치적 승부수를 과감하게 그리고 빨리 던진 것은 직접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방식의 하원 선거(총선)에서 중도파를 끌어들이려는 정치적 계산이다. 물론 마크롱 대통령으로서는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 실시라는 카드 이외에 다른 마땅한 카드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현재 집권 여당의 의석수는 총 577석 중 250석으로 야당 전체가 327석보다 적다. 그러다 보니 각종 정부 정책이 의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중도파가 그동안에 외연을 확장하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상태로 손익계산만을 분주히 했을 뿐, 실질적으로 프랑스가 당면한 문제를 스스로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자성과 성찰이 우선 필요하다. 극단주의가 득세하는 것은 현재 집권 세력이 당면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할 의지와 비전 그리고 국민의 기대에 부합하는 신뢰를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각종 개혁과제와 경제침체 등등으로 인한 국민의 실망감과 분노, 젊은 층들의 미래에 관한 절망감 때문이다. 또 거기에 편승해서 포퓰리즘적인 정책 남발로 극우파가 표심을 파고들면서, 마치 금방이라도 자신의 정책이 수행될 수 있는 것처럼, 표심을 흔들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극단주의가 득세하게 되면, 그 역풍은 누구도 어떤 세력도 결코 막을 수 없게 된다. 또 극단주의가 프랑스적인 정서와 전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프랑스사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프랑스 국민은 마크롱 대통령과 여당을 지지해서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나치독일의 치욕과 악몽을 경험했기 때문에, 극우파의 집권만은 안 된다는 생각으로 거리에 나선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적 극단주의란 결국 서로를 스스로 파멸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성취로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조기 총선을 앞두고 각 정파는 합종연횡을 통해 의회 권력에 서로 다가가려고 하지만, 누가 갈 수 있는지는 전적으로 프랑스 국민의 선택에 달려 있다. 만일 ‘대이변’이 일어날 경우, 프랑스는 격동에 휩싸일 것이고, 마크롱 대통령은 남은 임기 동안에 상당한 사임 압박에 더욱 시달릴 것이다. 현재의 조기 총선으로 인한 일시적 혼란보다 더 큰 혼란이 벌어진다면, 사실 극우파는 오히려 역풍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극우도 극좌도 싫다면, 이번 총선의 투표가 최선도 최악도 아니라면, 결국 프랑스 국민은 차악(遮惡)의 선택권을 행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거기에 마크롱 대통령의 어설프지만, 현재로서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카드일 것이다. 그러나 그 카드가 독배도 될 수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아마도 마크롱 대통령은 독배를 마신 이후 시간이 좀 지나서 독배였음을 알게 될 수도 있지만, 이와 반대로 처음부터 독배가 아니었는데, 마크롱 자신이 독배로 먼저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둘 중 어느 것이든 이번 프랑스 조기 총선은 어떤 결과를 낳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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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9
  •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 어색한 만남으로 인한 빛바랜 기념식
    1944년 6월 6일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좌우할 결정적인 상륙작전이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연합국이 나치 독일에 맞서 유럽 대륙에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던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이었다. 프랑스 북서 쪽의 노르망디 지역은 영국 남쪽을 차지하고 있는 와이트섬에서 보면, 영국 해협을 사이에 두고 코탕탱반도와 오른 강을 따라 캉을 중심으로 하는 바스노르망디 지역과 세느강과 외르강을 끼고 루앙을 중심으로 하는 오트 노르망디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현재는 두 지역이 병합되어서 캉에는 지방의회가 있고, 루앙에는 도청이 있다. 이번에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노르망디의 생 로랑 쉬르 메르(칼바도스 주의 지역 공동체)를 방문했고, 그가 연설한 곳은 이른바 프앙테 뒤 오크인데, 이곳은 약 80 킬로미터의 노르망디 해변에서 보면 30 미터 길이의 절벽이다. 그 당시에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상륙작전을 위해 노르망디 해변을 5개의 해변으로 나누어서 각각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유타 해변, 오마하 해변, 골드 해변, 주노 해변, 스워드 해변이라고 명명했다. 프앙테 뒤 오크는 오마하 해변으로부터 서쪽으로 약 6.4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데, 나치 독일은 이른바 대서양 방벽의 일부로 콘크리트 구조물과 해안포대를 통해, 이곳을 요새화했다. 미군은 이곳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군인들의 피해가 컸다. 미군 225명 중 13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까닭은 미군이 장비를 상륙정에 싣고 해변에 상륙하면서, 독일군의 저항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해변에 상륙한 다음에 절벽을 오르면서도,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의 연설은 자유와 민주를 위해 침략에 맞설 것과 미국의 고립주의에 대한 견제를 강조하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서방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더욱이 이곳은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40년에 전에 연설했던 장소이기 때문에, 바이든 대통령으로서는 레이건 전 대통령의 향수를 자극하면서도 동시에 트럼프 전 대통령을 견제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그런데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연합국의 상당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러시아(당시에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최종적 승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초대하지 못했지만,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결코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마크롱 대통령도 그 당시에 러시아의 도움을 의도적으로 회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 행사에 마크롱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초청한 것은 역설적이다. 우크라이나는 그 당시에 나치독일에 협력했던 국가인데,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초청되고, 독일 숄츠 총리와 함께 자리에 선다는 것은 이번 기념식을 정치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물론 어떤 국자의 지도자를 기념식에 초청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주최국의 판단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기념식의 원래 취지에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나치 독일에 맞서 약 15만 명의 군인들이 전장에 투입되어 약 1만 명의 사상자가 생겼던 지상 최대의 상륙작전을 기념하는 것은 승리를 기념하는 이벤트 행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치 독일과 같은 침략전쟁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서로 협상하고 중재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각국 지도자들의 발언을 보면, 그것보다는 허울 좋은 추상적인 말로 그럴듯한 외교적 수사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로 공통점이 있다면, 각국 지도자들이 대체로 낮은 지지율로 인해 내치에서 상당히 고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6월 6일에서부터 6월 9일까지 실시된 유럽 의회 선거는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의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이라는 결과를 가져 왔다. 이것은 마크롱 대통령이 사실 위험한 도박을 한 것인데, 파리 올림픽을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에 고육지책으로 제시한 비장의 카드였다. 극우파의 약진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피로감과 더불어 인플레이션, 에너지 가격 인상, 반이민주의 정서, 실업률 증가 등등이 반영된 결과라 하겠다. 표심으로만 보자면, 이번 기념식에서 각국의 지도자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엘리트주의자들의 자화자찬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인데, 그들의 미래에 대해 어두운 그림자만이 드리울 뿐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 기념일이 반쪽짜리 행사로 만든 것은 어찌 보면 유럽이 처한 냉정한 현실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한때는 연합국으로 나치독일에 맞서 모두 함께 싸웠지만, 지금은 오직 자국의 이익을 위해 러시아와의 전쟁도 불사하겠다거나. 우크라이나에 지상군을 직접 파병하겠다거나, 혹은 우크라이나에 제공한 서방 무기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본토 공격에 사용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과연 유럽의 평화를 위한 지도자의 발언이라고 볼 수 있는가! 전쟁을 끝내고 중재하기 위한 중재도 협상도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정치적 발언이라 하는 것이 과연 누굴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가면 우크라이나 민간인들의 피해만 극심하고, 시간이 갈수록 그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뿐이다. 더 나아가 향후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시간이 우크라이나 편이 전혀 아니라는 점이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번 기념식에 참석해서 각국에 지원을 호소하고 있지만, 2년 전과 비교하면 사뭇 격세지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지원 결정이 우크라이나의 현실적 상황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지는 우려의 시각도 많다. 오히려 그와 같은 지원 방안이 유럽 각국에게는 극우세력들의 부상으로 나타나서, 정치적 변화가 발생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같은 획기적 돌파구도 없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치열한 소모전과 공방전 그리고 이로 인한 막대한 인명피해만 커지고 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독일군은 연합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어느 지점으로 연합군이 상륙할 것인지에 따라 독일군의 대응도 달랐을 것이라는 점이다. 연합군이 노르망디 쪽으로 상륙할 경우에, 독일군은 3개의 보병사단과 다소 남쪽에 2개의 기갑 사단으로 방어해야 했다. 그런데 이 경우에 문제는 연합군이 독일 해공군보다 월등한 공중포격전의 우위에 있는 상황에서 해병대와 공수사단과 같은 특수부대원들의 상륙을 보병 위주의 독일군이 저지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는 점이다. 또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연합국이 우선 파리를 입성하려는 계획이었기 때문에, 연합군은 파 드 칼레에 주둔했던 독일군과 교전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은 됭케르트 철수 작전과 더불어 연합군의 반격을 위해 매우 중요했다. 독일은 이를 통해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입장이 되었다. 결국 독일은 패전국이 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 기념식은 연합국 승리의 기념일이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정치적 행사로 변질이 되어 버렸다.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동맹도 없고, 각국의 이익을 위해 합종연횡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명분과 도덕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이 과연 필요한지는 의문이다. 또 그 결과가 전 세계를 위기로 몰아넣고, 긴장감을 조장하는 것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유럽의 지도자들은 거기에 편승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손익계산만 하고 있을 뿐이다. 별로 표심에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치 지도자는 자신의 정치적 능력이 무능하다는 사실 밖에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자국으로부터도 별로 지지를 받지 못하는 지도자가 국제무대에서 과연 지도자로서 인정받기는 어렵다. 그동안에 유럽연합의 두 축이었던 독일 총리와 프랑스 대통령은 이제 역사의 엄정한 무대에서 서서히 사라질 상황에 처해 있다. 물론 차후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매우 불확실하고, 좋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 기념식, 프랑스는 독일에 참담한 패배를 당했지만,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도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독일군의 후방을 괴롭혔고, 독일군의 수송과 보급을 차단하는 역할을 상당히 수행했다. 5년마다 열리는 이 기념식에서 개최국인 프랑스는 분명히 그 의미가 남다르다. 그러나 이번처럼 반쪽짜리 기념행사는 그 의미를 퇴색시키고, 더 나아가 국제적 위상도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보다 퇴락의 폐허만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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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6
  • 알렉세이 나발니의 일생과 죽음이 미치는 영향 - 1부
    푸틴 대통령과 대적한 러시아의 반 체제 인사이자 횡령 사기범인 알렉세이 나발니(Алексей Навальный)가 지난 16일 야말-네네츠 제 3교도소에서 사망했다. 푸틴과 맞서온 그의 인생을 함 조망해본다. 그는 1976년 생으로 모스크바 주 부틴이란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아나톨리 이바노비치 나발니(Анатолий Иванович Навальный)는 우크라이나 키예프 출신이고 어머니 류드밀라 이바노브나 나발나야(Людмила Ивановна Навальная)는 러시아 출신으로 그는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인 셈이다. 나발니가 우크라이나에 호의적이었던 이유는 자신의 부친이 우크라이나인이기도 했고 본인도 우크라이나계라는 자부심도 갖고 있다. 2010년대 타스통신에서 한 나발니의 인터뷰를 본적이 있는데 자신은 러시아인으로 살고 있지만 한켠에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다 한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자신의 가계의 대한 내력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친우크라이나계 인사였던 보리스 넴초프와 가깝게 지냈고 크림 합병에 대해 찬성하긴 했지만 당시 정치인으로써 나발니의 세력이 미미했기에 우선 자신의 인지도에 상처가 되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반전 시위 선동에서 보면 알 수 있는데 이 때도 푸틴 대통령을 비난하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즉, 그는 대놓고 러시아인이면서 반러시아 행세를 했던 것이다. 나발니는 모스크바로부터 남서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오브닌스크에서 자랐으나, 어릴 때 여름에는 우크라이나에 있는 그의 할머니와 지냈다고 한다. 나발니는 본인 스스로 어린 시절을 회상했을 때, 키예프의 생활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강한 애정을 갖게 되었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는 이례적으로 쉬꼴라를 모스크바에서 키예프로 옮겨 키예프에서 쉬꼴라를 졸업했다. 그는 몸과 국적만 러시아인이지 속 전체는 우크라이나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1993년 모스크바로 돌아와 러시아 민족 우호 대학교에 입학하여 1998년 법학학사학위를 취득했고 연방 지원 금융 대학에서 증권과 투자, 환전, 그리고 금융 경제를 공부했다. 당시 러시아의 입장에서 1998년 모라토리움 선언하는 등, 경제적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에 금융 경제에 대한 관심을 갖고 기존의 법학에서 금융경제학으로 잠깐 외유를 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원래의 나발니의 성향은 좌파였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정계에 입문했고 2000년 진보주의와 사회, 녹색자유주의, 친유럽 성향이면서 대표적인 친서방 리버럴 정당인 야블로코(Яблоко)에 입당한다. 이 정당은 사유재산을 보호하고 동등한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정치, 경제에서의 공정한 경쟁을 지지하는 정당으로 외교적으로는 러시아의 유럽 연합 가입과 미국과의 우호관계 수립 등 서방과의 관계 강화를 주장하고 있는 정당이다. 여기서 활동한 나발니는 친서방 인사 및 미국의 정계권 인사들과도 접촉을 가지며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발니의 영어 실력은 러시아어 억양이 강하기는 하지만 단어 및 어휘선택이 탁월할 정도 유창했던게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확실한 인종주의자이기도 했다. 2004년 나발니는 피부색이 다른 카프카스계 군인들을 바퀴벌레에 비유하며 “사람은 총으로 죽여야 하지만 바퀴벌레는 슬리퍼로 밟아 죽여야 한다.”고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그는 카프카스계 민족들을 매우 경멸했는데 카프카스 지역의 민족들이 러시아 경제권에 진입해 러시아인들의 취업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에서 이민족들을 매우 싫어한 것이다. 그는 2006년 반 외국인 성향을 띈 러시아인의 행진(Русский марш)을 승인해 줄 것을 모스크바 연방 특별시 시청에 청원하고 참관인 자격으로 이 시위에 참여했다. 말 그대로 성향 자체가 인종차별적인 면과 과격한 전체주의 나치의 성향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보면 된다. 나발니는 카프카스, 중앙아시아, 그리고 동양인을 혐오했는데 러시아인의 행진(Русский марш) 자체가 그와 같은 성향을 띄고 있다. 즉, 유색인종 차별, 과도한 폭력성 자체의 광기 어린 모습을 갖고 있었더 것인데 이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당시 갖고 있던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 및 무시, 차별, 폭력성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겠다. 나도 당시 모스크바 마야꼽스까야에서 푸쉬낀스까야까지 러시아인의 행진(Русский марш) 시위 행렬에서 목소리 구호를 외치고 연설하며 독려하는 나발니를 본적이 있다. 당시 그를 가까이서 보지는 못했지만 연설하며 독려하는 표정과 그 제스처가 어딘가 많이 익숙한 모습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돌프 히틀러가 총통이 되기 전, 선동하는 그의 제스쳐와 참 많이 닮았다. 물론 그가 나치 성향을 갖고 있지만 네오나치는 아닌듯 싶다. 나치 표식을 몸에 새기지 않았고 나치라 할만한 어떠한 물건도 발견된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나발니는 2007년 야블로코로부터 인종차별적, 민족주의적 활동 등으로 당의 규정에 위배되는 행위를 저질렀다며 제명 되어 버렸다. 야블로코 당에서 제명당한 이후에도 나발니는 '러시아인의 행진' 시위에 지속적으로 참가하면서 "러시아 인민해방운동(Национального Русского Освободительного Движения, НАРОД)" 정당을 창설했다. 그리고 2008년 남오세티아 전쟁이 발발하자 나발니는 극우로 돌아서 당시 대통령인 메드베제프와 푸틴 총리를 적극 지지했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그루지야(현 조지아)에 대한 적극적 봉쇄조치가 필요하며 크루즈 미사일을 동원해 그루지야 참모 본부를 공격해야 하고 남오세티야 공화국 상공을 지나는 모든 항공기들을 격추시켜야 한다고 적어 논란을 일으킨다. 또한 나발니는 러시아 내에 있는 조지아인들을 "설치류 떼들(грызуны)"이라 비하하며 그들을 전부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전쟁 이후에는 남오세티야 공화국과 압하지야 공화국을 독립국가로 인정해야 한다고 언급해 조지아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남오세티아 전쟁이 승리로 끝난 후, 그동안 공부한 금융경제학과 투자에 관한 전문성을 내세워 2008년 로스네프트, 가스프롬, 가스프롬 네프트, 루크오일, 그리고 수르구트네프트 가스, 이렇게 5개의 가스 회사 주식을 30만 루블 어치를 사들여 주주행동주의자로 성장하게 된다. 그는 회사들이 소유한 금융 재산의 투명성을 강조했지만 당시만 해도 러시아는 금융 관련 부패가 심각했었고 이 부분이 정치권과 연결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특히 로스네프트, 가스프롬, 가스프롬 네프트 등에는 상위 직원들이 횡령과 회사 투명성을 차단하는 행위를 자행했고 이를 파악한 나발니는 주 정부의 부적절한 예산 지출과 부실한 주 정부 서비스 등을 지적하면서 연방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친서방 리버럴에 나치와 같은 전체주의적 성향, 서방 리버럴 인사들과 교류가 두텁고 반골 기질까지 있는 나발니를 주목한 것은 미국 정가였다. 그는 2010년 미국으로 들어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예일 대학에서 World Fellows 프로그렘을 수행했다. 최근 미국 대통령 여섯 명 중 네 명이 예일 출신일 정도로 미국 정가와 뿌리 깊은 관계를 갖고 있던 예일 대학에서 나발니 수많은 리버럴 정가 인사들을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러시아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푸틴을 비판하는 일이었다. 미국에서 어떠한 권유를 받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 때를 계기로 그는 철저히 반 체제, 반 푸틴 인사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 정도 설명했으면 충분히 눈치챘을 것이다. 그는 딥스테이트의 개가 되어 러시아로 돌아와 체제 전복을 꾀했던 것이다. 이 때부터 그가 가까워진 인물이 바로 보리스 넴초프다. 그는 넴초프의 지지를 받아 트랜스네프트 가스 회사의 비밀 회계 감사 자료를 공개한다. 이 때부터 그는 반 부패 활동을 시작한다. 행정상 필요한 물자 조달 등을 모든 러시아 정부가 온라인에 게시 및 공고하여 입찰을 하도록 하는 로스필 프로젝트를 촉구했다. 일반 개인이 도로에 있는 구멍들을 러시아 정부에 보고하고, 러시아 연방 정부가 불만사항들에 응답하게 한 로스야마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그러한 행위는 러시아 우파 정당들의 공격을 불러왔고 결국 나발니는 러시아 인민해방운동 해산했다. 2011년 6월 로이터와 영어로 능숙하게 인터뷰 했는데 "푸틴의 정치 체제는 부패에 의해 매우 약화되고 있으며, 러시아 연방에서도 5년 이내에 아랍의 봄과 같은 반정부 데모 시위가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며 러시아 내 반 정부 시위를 벌일 것임을 예고했다. 그리고 체제 개혁을 진행 중에 있던 푸틴의 모든 정책을 반대하며 이를 규탄하기 위해 여러 곳에서 지지자들을 모아 시위를 야기했다. 그로 인해 2018년까지 10차례나 행정구류(Административный арест)를 당해 총 192일 간 구금되기도 했다. 처음에 러시아 국민들은 그의 반 부패 조사 행위를 응원했다. 소련 해체 이후, 경제적 침체와 공무원들의 부패에 시달리고 있던 시민들의 지지는 갈수록 올라갔다. 여기에 힘을 받은 나발니는 여러 곳에서 후원을 받기 시작했으며 이것의 그의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나발니는 나치와 같은 전체주의적 성향은 그대로 갖고 있었는데 치과 의사로 변장해 외국인들을 '러시아 민족의 뿌리를 뒤흔드는' 충치에 비유하며 추방을 요구하는 영상을 올려 논란을 빚게 된다. 그런데 이 영상에 환호하는 지지자도 있었지만 반 부패 척결에 적극 찬성하는 시민들은 이 영상을 보고 나발니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당시에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그 인기를 토대로 보리스 넴초프가 있는 인민자유당(Партия народной свободы, PARNAS)에 입당했고 넴초프의 후원을 받아 2013년 나발니는 모스크바 시장 선거에 출마한다. 그는 선거 유세 과정에서 그의 인종차별적 발언 등이 도마에 오르자 블로그를 통해 '조지아인들을 설치류 떼라 비하한 것을 사과한다'고 말했으나 전쟁에 찬성했던 과거 행적에 대해서는 별다른 해명을 내놓지 않았다. 이에 조지아인들은 시장 선거가 아니면 그가 사과했을까?, 혹은 모스크바에 거주하는 조지아계 러시아인들의 표가 급했을 것이라 그를 조롱하기도 했다. 즉, 아무도 그의 사과를 진정성 있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남오세티아 전쟁에 찬성했던 것에 대해 해명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정성이 없다 판단한 것이다. 게다가 그는 그 와중에도 중앙아시아 이민자에 대한 지원 중단을 요구하는 ‘코카서스 급식 중단' 캠페인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런 그를 카프카스 민족들 중 누가 진정성 있는 사과라 볼 수 있겠는가? 당시만 해도 이러한 인종차별이 모스크바 시장 선거에서 낙선한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선거가 시작되고 27.24%, 632,697표를 얻어 선전했지만 세르게이 소뱌닌에게 밀려 결국 큰 차이로 낙선했다. 물론 선전은 했지만 타 민족 러시아계 시민들이 소뱌닌에게 몰표를 던졌기 때문에 낙선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선거에 불복해 지지자들을 이끌고 시위를 조장해 또 다시 구류 조치를 당했고 2014년 12월 30일, 그는 프랑스 화장품 회사 이브 로셰의 러시아 연방 지사 등으로부터 3,100만 루블 (약 5억 9천만 원)을 횡령하여 사기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 그는 징역 3년 6개월 실형에 3년 6개월 집행유예까지 추가하여 7년 형을 받는다. 재판이 끝난 후, 러시아 연방 법원 건물 밖에 모여 있던 지지자들을 향해 "현 정권은 존재할 가치가 없으며 붕괴돼야 한다. 오늘 모두가 가두 시위에 나서 달라"고 촉구하며 내란을 조장했다. 그리고 집권 여당인 통합 러시아당을 '사기꾼들과 도둑놈들의 정당' 이라 비판했다. 2018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의사를 보였으나, 2017년 12월 25일 러시아 연방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2014년의 횡령죄 판결에 따라 나발니의 출마 자격을 박탈하게 된다. 이에 나발니는 지지자들에게 대선 보이콧을 촉구하며 2018년 1월 28일 대대적인 시위를 예고했다. 그러나 해당 시위는 결국 불법으로 규정되어 그의 지지자들 상당수가 투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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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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