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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엔 보고서, 아프리카 난민과 이주민의 유럽행 경로 폭력과 위험
    유엔 국제이주기구(IOM), 유엔난민기구(UNHCR), 그리고 혼합이주센터(MMC) 등 여러 기구가 공동으로 발행한 보고서에 따르면, 아프리카 난민과 이주민들이 유럽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겪는 극심한 폭력과 위협에 대한 심각한 실태가 드러났다. 이 연구는 2020년부터 2023년까지의 기간 동안 31,000명 이상의 아프리카 이주민을 대상으로 진행된 인터뷰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보고서는 이주민들이 성폭행, 고문, 성매매, 장기 적출 등의 극심한 범죄 행위에 노출되어 있다고 밝혔다. 특히 사하라 사막을 통과하는 과정에서의 사망률이 지중해를 통한 이주 시의 사망률보다 최소 두 배 이상 높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주로 극한의 탈수, 질병, 폭력에 의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보고서는 또한 이주민들이 겪는 신체적 폭력과 관련해, 특히 리비아, 알제리, 에티오피아가 가장 위험한 국가로 지목되었다고 언급했다. 이주민들은 자신들을 유럽으로 안내하는 중간업자들과 범죄 조직, 때로는 민병대에 의해 심각한 폭력을 경험했다고 증언했다. 여성 이주민들 경우 성폭력의 위험 노출이 특히 높았다. 약 90%가 성폭행을 당했다고 2020년 유엔 연구 결과에서 밝혔다. 일부 여성은 성매매를 강요당하거나 납치범과 강제로 결혼하도록 강요받는 등의 참혹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뉴욕타임스는 유럽 국가들이 이주민 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북아프리카 국가들에 자금을 지원하고 있지만, 이것이 오히려 이주민들을 더욱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럽의 지원을 받는 보안군은 이주민들을 무방비 상태로 사막으로 돌려보내며, 이로 인해 수많은 이주민이 생명을 잃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연구는 국제사회에 이주민들이 겪는 고통과 위험에 대해 더 깊은 관심과 적극적인 대응을 촉구하는 동시에, 이주민 보호와 안전한 이동을 위한 국제적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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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7

칼럼 검색결과

  • 소말리아 내전과 영화 "모가디슈", 테러 단체 알 샤바브(al-Shabaab)의 역사
    영화 "모가디슈"가 흥행에 성공했다. 영화 "모가디슈" 성공 스토리들이 들리면서 소말리아 내전에 관한 관심이 재조명되고 있다. 더불어 아프가니스탄 전쟁도 종료가 되었고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에 전 세계에 주목하고 있음에 따라 그와 닮은 꼴인 소말리아 내전은 아직도 현재진행 중이라 이곳 내전에 대한 관심이 높은 편이다. 오늘은 영화 "모가디슈"의 배경인 소말리아 내전에 대해 언급해보고자 한다. 작년 초, 소말리아 내전과 동아프리카 지역에 이슬람교의 포교 현황, 그리고 그 유래와 중동과의 중세 시대 관계사 등을 연구하면서 이슬람 제국의 일부이자 대표적인 해상 향신료 루트의 일원으로 자리잡았던 곳이기 때문에 나의 관심이 매우 높았던 지역이다. 소말리아는 수십 년째 발생하고 있는 내전의 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내전 진압의 대표적인 실패한 국가이자 사례로 꼽히고 있다. 이어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의 대표적인 사례로 불리고 있기도 하다. 소말리아 내전이 장기화된 이유는 1991년 내전이 시작된 이래 무장 군벌들이 국가권력을 둘러싸고 투쟁을 지속적으로 벌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말리아 분쟁의 시초는 모하메드 시아드 바레(Mohamed Siad Barre) 정권의 부족들 간의 차별을 부추긴 정치로 인한 반발이었다. 모하메드 시아드 바레(1919~1995, محمد سياد بري)는 1969년부터 1991년까지 집권한 소말리아 민주 공화국의 군부 독재자이자, 대통령이었다. 소말리아가 독립한 1960년, 소말리아는 아프리카에서 민주주의의 모델로 서방 세계에서 극구 칭찬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족벌주의와 가문 간 증가된 충성, 그리고 충돌은 사회적 문제였다.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한 모하메드 시아드 바레 대통령의 사회주의 군사 정권은 자신의 출생 부족에게만 권력을 집중시켰고, 다른 부족들은 정치에서 배제되었다. 결국 1991년 1월, 불만을 가진 소말리아 내 타 정치세력들은 소말리아 연합회의(The United Somali Congress ; USC)를 결성하여 바레 대통령을 축출하고 소말리아 군대를 해체하게 된다. 바레 정권은 민간 정부를 근절하다 결국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씨족만을 중시하는 씨족주의와 가문내의 증가된 충성으로 인하여 다른 씨족끼리 충돌하는 사회적 문제가 존재했다. 이러한 문제를 민간정부는 근절하는데 실패했으며, 결국 정부는 씨족주의 문제에 스스로 항복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쿠데타 직후 USC 내부에서 양대 군벌 간의 대결구도들이 형성되었다. 정권 쟁탈을 위한 부족 간의 대립은 심각하게 격화되었고, 소말리아는 내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으로 인해 1991년 5월 소말릴란드 공화국은 옛 영국령 소말릴란드 지역을 중심으로 소말리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1960년 6월 26일 영국령 소말릴란드는 5일 후인 7월 1일에 독립하는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와 연합할 계획으로 영국으로부터 잠깐 독립했고,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가 독립하면서 소말리아로 합쳐졌다. 하지만 하르게이사를 비롯한 전 영국령 소말릴란드 지역은 모가디슈를 비롯한 소말리아 남부에 비해 정치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소외되어 둘 사이 갈등이 빚어졌다. 1992년 유엔평화유지군(United Nations Operation in Somalia, UNOSOM)이 파견되어 희망 회복작전(Hope recovery operation)을 펼쳤지만, 이러한 작전을 주도했던 미군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1994년 미국과 유엔평화유지군은 결과적으로 임무 실패(Mission failed)인 상태로 철수하게 된다. 2004년 1월 유엔의 지지 아래에서 주요 분파의 지도자들이 과도연방정부(Transitional Federal Government, TFG) 구성과 선거 개최에 합의하면서 전망은 밝아지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이슬람 민병대인 이슬람 법정연합(Islamic Courts Union, ICU)이 등장하면서 다시 대립구도가 형성되었다. 이에 2006년 7월 에티오피아는 국경 안보를 명목으로 소말리아 문제에 개입하였다. 소말리아 과도정부 수상인 알리 무함마드 게디(Ali Mohamed Gedi)는 2007년 1월 2일 “소말리아 내에서 이슬람 법정연합(UIC)의 세력을 쫓아냈으며, 앞으로 소규모의 전투가 발생할 수도 있지만 이 또한 제압할 것”이라고 밝혔다. 소말리아 과도정부와 함께 이 전쟁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에티오피아 군이 소말리아 전역을 점령함으로써 2주간의 짧은 일방적 공격은 끝이 났다. 소말리아 및 에티오피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국가인 지부티에 대규모의 미군기지가 있고 이 미군기지의 주요한 임무 중에 하나는 에티오피아 군대를 대상으로 군사작전훈련, 전문군사교육, 군사훈련 관리, 반(反) 테러작전, 군 의료 지원 훈련들이다. 이로 인하여 에티오피아 정부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게 되었고, 미국의 군사지원 하에 있던 에티오피아 정부는 미국에 의한 전 세계적 반(反) 테러전쟁을 충실히 따르는 아프리카 내에서의 미국 군사전략 정부였다. 하지만 ICU는 여러 단체로 흩어져 과도 연방정부에 대한 게릴라식 투쟁을 계속하였고, 이후 폭력적 극단주의 세력인 알 샤바브(al-Shabaab)가 결성되어 그곳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청년전사운동( حركة الشباب المجاهدين‎)이라 불리며 소말리아의 테러 무장단체로 성장했다. 이들을 보통 알 샤바브(الشباب‎)로 알려져 있다. 소말리아는 1991년 당시 대통령 시아드 바레 축출 이후, 20여 년간 내전을 치러왔다. 이 과정에서 이슬람 세계의 질서 회복을 가치로 두고 이슬람법정연합(ICU)이 출범하였다. 알 샤바브는 이 단체에 뿌리를 둔다. 알 샤바브는 2010년 7월 11일 우간다 캄팔라에서 벌어진 자살 폭탄 연쇄 테러의 배후로 알려져 있다. 이에 2007년부터 현재까지 소말리아의 안정과 평화 회복을 위해 2만여 명의 아프리카 연합 평화 유지군(African Union Mission to Somalia, AMISOM)이 평화작전을 전개하고 있다. 오랜 기간 동안 내전을 치루었기 때문에 소말리아 연방 정부는 국토 전역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해갔고, 치안 회복을 위해 자치권을 요구하는 5개의 주(州) 정부와도 마찰을 일으키는 등, 긴장 관계를 이어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2015년에 들어서는 소말리아의 무정부 상태를 이용하여 폭력적인 극단주의 세력인 IS 소말리아지부(ISS), 알 샤바브 등이 소말리아에 침투해 내전을 조장함으로써 소말리아 내전 종식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특히 알 샤바브는 소말리아 과도정부, 유엔평화유지군, 유엔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이념적으로는 극단적인 이슬람 경전 해석을 따라간다. 따라서 음악 금지, 국가 형벌에 신체 절단 형과 투석형의 포함을 요구하고 있다. 소말리아 중남부에 세력을 두고 있는 알 샤바브는 모가디슈에서 정부군과 매일 전투를 벌였다. 알 카에다는 알 샤바브를 지원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자행된 1998년 케냐, 탄자니아 미국 대사관 테러는 알 샤바브의 배후이자 알 카에다 최고위층인 파줄 압둘라 모하메드의 역할이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 카에다와 연계를 통해 이라크,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에서 수백 명이 이 알 샤바브에 들어가 있다. 전투 시에는 동원 가능한 전력이 3000~7000명 정도였다. 폭력적 극단주의 세력은 그들 간 영향력 경쟁을 할 뿐만 아니라 소말리아 땅 위에 이슬람국가 건설을 목표로 연방 정부 고위급 인사와 민간인에 대한 테러를 지속하고 있다. 한편 오랜 내전 속에서 어업 종사자들은 자신들의 안전과 바다를 지키기 위해 자력으로 무장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발적인 해안 경비대로 출발했지만, 소말리아 해안을 장악한 군벌들이 어민들의 해적 활동을 지원하고 사업화하면서 초국가적인 위협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태로 인해 한국의 청해부대는 2009년 3월 13일부터 아덴만에 파견되어 해적을 격퇴하고 한국 선박의 안전 호송 및 안전 항해를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소말리아 내부에서 내전을 벌이는 종족과 평화유지군에게 공동의 적으로 인식된 이슬람 무장세력 알 샤바브(Al-Shabaab)는 2006년~2009년에 두 번째 내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등장한 무장단체로 이슬람 법정연합(Union of Islamic Courts, UIC)의 하부 청년조직에서부터 시작한 단체였다. 알 샤바브는 2006년에 분파를 선언한 이후부터 청년(Youth)이라는 뜻의 조직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UIC와 분파한 이유가 추구하는 이슬람의 교리적 이념은 서로 상이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UIC와 알 샤바브는 이슬람 신정국가 건설의 목표가 같았지만 UIC는 비교적인 온건적인인 입장이었고 알 샤바브는 급진적이고 이슬람의 근본주의적 교리를 따르면서 IS나 탈레반과 같이 폭력적인 성향을 갖추고 있었다. 결국 UIC와 분리를 선언한 알 샤바브는 예멘과 가까운 지역인 “아프리카의 뿔”과 가까운 곳에 정착하여 반(反) 정부 활동을 펼쳤다. 2009년 소말리아 과도연방정부(Transitional Federal Government, TFG)의 지도자가 UIC의 온건 세력 출신의 지도부에서 선출되자 알 샤바브는 세속적인 지도자를 선출했다고 이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 알 샤바브는 TFG를 적으로 간주하고 TFG 정부를 멸망시키기 위해 수도인 모가디슈를 습격함으로써 전면적인 공격을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2009년 2월에는 또 다른 이슬람 반란 세력인 히즈불 이슬람(Hizbul Islam)도 새로운 연립정부와 AMISOM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게 되면서 같은 해 6월, 소말리아 과도정부인 TFG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기에 이른다. 2010년 알 샤바브가 아프리카 연합군의 동원을 주도한 것에 대한 복수전으로 2010년 7월,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를 공격하면서 알 샤바브와의 전투 범위는 주변국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아프리카 연합은 알 샤바브에 대해 선제공격을 허가할 것에 합의하고, 더 많은 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이 때 증원된 AMISOM의 군대는 8,000명에 달했고, 이에 대항하여 2010년 8월 알 샤바브는 모가디슈에서 또 다시 정부와 AMISOM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로 인해 알 샤바브와 정부군 및 AMISOM의 분쟁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북부지역인 푼틀랜드 주(州), 중부 갈무두그 주(州), 그리고 키스마요(Kismayo)가 있는 남부 지역에서도 지속적인 교전이 발생했다. 알 샤바브의 공격으로 인해 AMISOM 병력의 피해가 지속되자, 2011년 이래 AMISOM은 소말리아 정부군과 함께 알 샤바브를 집중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2011년 1만 4천 명에 이르던 알 샤바브 조직원들은 2012년 무렵에는 지속적인 소탕전으로 인해 대거 희생되어 7~9천 명으로 줄어들었다. 한편 수세에 몰린 알 샤바브는 2012년 2월 범세계적인 테러 활동에 대해 충성을 맹세하면서 알카에다(Al-Qaeda)와 동맹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2012년 9월 AMISOM과 소말리아 정부군이 알 샤바브의 중요한 거점인 키스마요(Kismayo)를 탈환하는 것에 성공했으며 2014년 9월 미군의 무인기 공격으로 인해 알 샤바브 지도자 아흐메드 고단(Ahmed A. Godane)이 전사했다. 알 샤바브는 극심한 지도부의 내분을 겪으며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알 사뱌브는 여전히 소말리아 국토의 30% 가량을 통치하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7-01
  • 이슬람 문화권에서 베두인의 정의와 민족적 실체
    이스라엘 군에도 베두인들로 구성된 경보병 특수부대가 4차 중동전쟁 때까지도 존재하고 있었으며 해당 부대의 지휘관 또한 당연히 베두인이었다. 이스라엘의 베두인들은 2차와 3차 중동전쟁에서의 공훈으로 인해 이스라엘 최고 무공훈장을 받은 적도 있을 정도이나 현재는 폐지되고 없는 상태이다. 그래도 베두인 병사의 지원 복무는 계속되고 있어서 수백 명 단위의 베두인들이 이스라엘 군에서 복무하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 군에는 베두인들로 구성된 BDRB (Bedouin Desert Recon Battalion) 부대가 있다. 물론 팔레스타인 베두인들에게서 배신자 취급을 당하지만 이스라엘 외에도 팔레스타인 사람으로 거주하는 베두인들도 있다. 시리아에도 베두인이 62만 명 정도 거주하고 있다. 최근에는 시리아 내전이 격화되자 시리아의 베두인들도 주변 국가인 요르단, 레바논, 터키로 이동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베두인들은 이스라엘에서 심한 차별을 받고 있는 편이다. 베두인들은 예루살렘과 가자 지구에서 유태인 정착촌 등에 섞여 살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에 의해 많은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가까운 촌락에도 먼 길을 돌아가야 했으며 귀중한 재산인 당나귀를 사살당해도 이에 대한 손해 배상을 못하며, 아이들이 학교에 갈 때도 유태인 아이들에게 온갖 구타와 학대를 당해 학교도 못가며 가난하게 살아가는 베두인이 자주 나타난다. 더구나 베두인들은 대부분이 가난에 시달리며 이스라엘의 빈곤층으로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극우 유대인들은 이들도 팔레스타인, 베두인-아라비아 인, 흑인들과 동급의 야만적인 종족으로 간주해 그들에게 테러를 당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이스라엘 정부가 베두인 거주지를 파괴하고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면서 베두인들에게서 반(反) 이스라엘에 대한 감정이 폭발했다. 2013년에는 베두인 주민 수천 명이 거주지 파괴에 대한 항의 시위를 벌여 여기에 놀란 이스라엘 정부가 이를 달래려고 베두인 강제 이주 계획을 취소한다고 발표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다시 베두인들의 거주지를 파괴하고 그들을 강제 이주시키며 유대인 정착촌 건설에 나서면서 베두인들은 이스라엘 정부에 대한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베두인-아라비아 인들과 한편이 되어 그들 무장단체에 들어가 이스라엘 타도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많다. 유목민들에서는 부계(父系) 출생을 엄격하게 지키며 확대 가족과 씨족을 사회생활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 흑염소의 털로 만든 유르트와 가축, 가재(家財) 등은 가족 전체의 소유물이다. 하나의 유르트에는 아흘 알 바이트(Ahl Al-Bait)가 한 사람 있어 주부의 일을 한다. 우물은 씨족에게 소속되고 이동 및 숙영(宿營)지 확보도 씨족 전원이 협력하여 한다. 몇 개의 씨족이 모여 부족을 형성하고, 부족과 지족(支族)의 수장은 세습제로 일정한 가계에서 나오는 것이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낙타는 부족들의 공유물이었고, 부족 전원이 세력을 연합해 적들과 전투를 벌인다. 보통 베두인들은 일부다처제이며, 6종의 카스트 계층들이 있다. 귀족과 평민들은 아라비아 사막의 유목민이고, 정착하여 농경을 하는 아라비아 제족들과 베르베르 제족은 종속 민들이며, 사하라 사막 남부나 아프리카 수단에서는 흑인의 농노(農奴)가 존재하고 있고, 노예와 천민(賤民)이 있다. 노예는 남부 유럽에서 데려온 지중해 코카소이드형 백인도 있었으나, 나중에는 동아프리카 수단의 흑인들에만 국한되었다. 이들은 아라비아의 노예사냥에서 체포된 사람들인데 그들의 자손은 혼인 등에서 차별화된다. 카스트 제도로 구분되는 계급 사회는 잦은 정복 전쟁에서 생긴 것으로, 같은 카스트의 남녀 이외에는 결혼이 허락되지 않는다. 베두인들은 기마(騎馬)에도 능숙하여, 창을 사용하고 유럽 중세 기사와 같은 우월감을 가지며, 고귀한 존재라고 자부했다. 이교도인 베르베르 인과 흑인을 이슬람 화 시킨 것도 그들인데, 베두인 제족은 농경의 종속 민들과 오아시스 통상로의 상인으로부터 약탈과 재물에 대한 보호의 대가로 공납금을 취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20세기에 접어들자 중앙 정부의 세력 증대로 약탈과 공납에 의한 수입이 감퇴하였으며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국경을 왕래하는 유목 경제가 곤란하게 되어 목축을 포기하고 농경을 생활 수단으로 하는 베두인 족도 증가하였다. 대부분 베두인 유목민 출신인 요르단 인들은 타인에게 지극한 환대를 보이고 혈족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이러한 생활 태도로 볼 때 고대 베두인들 삶의 방식이다. 유목민에 기반을 둔 근대의 촌락 생활 방식은 급격하게 변화되고 있지만 그러한 기반이 되는 요소는 변하지 않고 남아 있다. 촌락의 나이 많은 여성, 때로는 젊은 여성들은 전통 의상인 길고 검은 토부(Thobe)를 입는데 어깨와 소매 등에 복잡하고 화려한 색의 작은 수를 놓아 입기도 한다. 도시 역시 전통적인 가치관이 존속하고 있다. 오래 전부터 요르단 인들은 관대함과 따뜻함, 친절함 등을 배워왔으며 요르단 사회 핵심에는 부족 간의 조화와 가족을 존중하는 사상이 많이 남아 있다. 요르단은 높은 수준의 공예로 유명하다. 다양한 종류의 공예품들이 요르단 수도 암만의 상점과 수도에서 떨어진 근교의 작은 마을 시장을 채우고 있다. 이러한 공예품으로는 그릇, 장신구, 수예품, 카페트와 전통 의상 등이 있다. 암만에서는 지역적 특성의 예술을 지닌 유리 제품을 만드는 유리를 깔때기로 부는 장인을 만날 수 있다. 유목 경제적으로 볼 때 베두인이 기르는 양은 모직의 중요한 공급원이다. 이러한 양털로 작은 베틀에서 여러 종류의 모직제품을 만드는데 관광객 및 외국인들에게 가장 널리 판매되는 것은 아라비아 융단이나 카페트이다. 각각의 카페트에는 독창적인 특징과 독특하고 섬세한 디자인이 나타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아랍 문학 작품인 <천일야화 : 아리비안나이트>는 요르단 인의 작품이며 20세기의 작가로 뛰어난 문체와 사상을 표현한 시인 무스타파 와바 앗 탈은 아랍의 주요한 시인으로 나타나며 이들 모두 베두인 출신이다. 이슬람 발생 이전의 아라비아 반도에는 베두인(Bedouin : 사막의 유목민)과 오아시스의 정착민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두 민족 모두 부족 단위로 공동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부족에는 부족장(shaykh 또는 sayyid), 신관(神官, Kāhin), 전시 군사 지도자(Qā’ìd) 및 중재자(Ḥakam) 등의 요직이 있었으며, 이들은 부족 구성원 총회(Majlis)에서 선임되었다. 부족장은 특별한 권한을 누렸다기보다 동등한 구성원 가운데 제1인자의 역할을 맡아 회의를 주재하면서 다른 부족들과의 교섭에서 부족을 대표하는 정도였다. 그는 덕망이 높고 나이가 많은 구성원 중에서 주로 선출되었다. 베두인의 신관은 부족의 제사와 축제 및 장례 등의 의식을 관장하였으며, 전쟁 시 군사 지도자로는 다른 부족과의 전쟁, 기상이변 등 위기 시에는 연로한 부족장보다는 군사적 식견과 활동력이 좋은 중년의 구성원이 더 적격으로 여겨져 선임되기도 했다. 중재자들은 부족 구성원들 간의 분규를 조정하여 해결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부족 구성원 총회에서 토의하여 최종 결정하였다. 물론 이러한 결정에는 부족 내부의 관행(Sunnah)이 매우 중요시되었다. 베두인들은 넓은 사막을 배회하면서 초원을 찾아 방목하여 생활을 이어 나갔으나, 도시의 정착민들은 농경 생활을 영위하거나 상업 활동을 통하여 생계를 이어나갔다. 오아시스 도시 가운데 메카와 메디나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메카는 예멘과 시리아, 이라크와 에티오피아를 이어주는 중간 지점에 위치하며 상업 도시로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또한 이 도시들은 토질이 척박하여 주민들과 가장 큰 부족인 쿠라이쉬(Quraysh) 부족은 주로 상업과 무역에 종사하여 생계를 이어나갔다. 도시의 중심에는 카바(Ka‘bāh)라는 성역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곳에는 쿠라이쉬 족의 신상(神像) 뿐만 아니라 주변에 거주하고 있는 수많은 아라비아 반도 부족들의 신상도 존재하기 때문에 메카는 종교적 중심지 역할도 하고 있었다. 따라서 메카는 예멘에서 실어 온 향료를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및 이집트 등 각처에 공급하였고, 보다 개화되어진 지역들의 문물을 가져와 아라비아 반도에 보급한 문명의 중개도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메카 북방 약 300㎞에 위치한 메디나는 단순히 농업 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쿠라이쉬 부족은 교역 활동을 통하여 협동력, 조직력 및 자제력을 함양하였으며, 베두인의 용맹성과 결합하여 후에 이슬람 제국 창건에 큰 원동력이 되었다. 이에 베두인-아라비아 인이라는 개념은 인종과 혈통적인 성격보다는 셈어라는 아랍어 계통을 모국어로 공유하는 민족들의 집단이라는 개념이 강하게 나타난다. 6세기까지 아라비아 인들은 아라비아 반도의 주민들에 한정되었지만, 이슬람교의 전파로 이집트인, 메소포타미아인, 혹은 이라크인, 시리아인, 팔레스타인인 등 중동 지역의 많은 주민들이 언어적으로 동화되면서 베두인-아라비아 인으로 통칭되었다. 이러한 아라비아 인들은 한때 이베리아 반도의 안달루시아까지 진출했으며, 중세 시대에는 중국과 더불어 세계 최고의 문명을 발전시켰다. 20세기 초에는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유럽 열강들의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 운동 중에서 범아라비아주의가 발흥하였고, 아랍어 화자들 사이에 베두인-아라비아 인이라는 민족의식이 강화되었다. 7세기 이전의 아라비아 지역은 아라비아 반도 지역을 지칭했으나, 이슬람 문화권이 확장되면서 중동과 그 인근의 이슬람 문화권을 통칭하여 지칭하는 단어로 변화되었다. 또한 아라비아 지역은 역사적인 세력들로 볼 때 아라비아 제국을 뜻하기도 했고, 오늘날에는 아랍 연맹을 뜻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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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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