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7-04(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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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모가디슈"가 흥행에 성공했다. 영화 "모가디슈" 성공 스토리들이 들리면서 소말리아 내전에 관한 관심이 재조명되고 있다. 더불어 아프가니스탄 전쟁도 종료가 되었고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에 전 세계에 주목하고 있음에 따라 그와 닮은 꼴인 소말리아 내전은 아직도 현재진행 중이라 이곳 내전에 대한 관심이 높은 편이다. 오늘은 영화 "모가디슈"의 배경인 소말리아 내전에 대해 언급해보고자 한다. 작년 초, 소말리아 내전과 동아프리카 지역에 이슬람교의 포교 현황, 그리고 그 유래와 중동과의 중세 시대 관계사 등을 연구하면서 이슬람 제국의 일부이자 대표적인 해상 향신료 루트의 일원으로 자리잡았던 곳이기 때문에 나의 관심이 매우 높았던 지역이다. 소말리아는 수십 년째 발생하고 있는 내전의 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내전 진압의 대표적인 실패한 국가이자 사례로 꼽히고 있다. 이어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의 대표적인 사례로 불리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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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영화 "모가디슈" 포스터,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소말리아 내전이 장기화된 이유는 1991년 내전이 시작된 이래 무장 군벌들이 국가권력을 둘러싸고 투쟁을 지속적으로 벌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말리아 분쟁의 시초는 모하메드 시아드 바레(Mohamed Siad Barre) 정권의 부족들 간의 차별을 부추긴 정치로 인한 반발이었다. 모하메드 시아드 바레(1919~1995, محمد سياد بري)는 1969년부터 1991년까지 집권한 소말리아 민주 공화국의 군부 독재자이자, 대통령이었다. 소말리아가 독립한 1960년, 소말리아는 아프리카에서 민주주의의 모델로 서방 세계에서 극구 칭찬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족벌주의와 가문 간 증가된 충성, 그리고 충돌은 사회적 문제였다.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한 모하메드 시아드 바레 대통령의 사회주의 군사 정권은 자신의 출생 부족에게만 권력을 집중시켰고, 다른 부족들은 정치에서 배제되었다. 결국 1991년 1월, 불만을 가진 소말리아 내 타 정치세력들은 소말리아 연합회의(The United Somali Congress ; USC)를 결성하여 바레 대통령을 축출하고 소말리아 군대를 해체하게 된다. 


바레 정권은 민간 정부를 근절하다 결국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씨족만을 중시하는 씨족주의와 가문내의 증가된 충성으로 인하여 다른 씨족끼리 충돌하는 사회적 문제가 존재했다. 이러한 문제를 민간정부는 근절하는데 실패했으며, 결국 정부는 씨족주의 문제에 스스로 항복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쿠데타 직후 USC 내부에서 양대 군벌 간의 대결구도들이 형성되었다. 정권 쟁탈을 위한 부족 간의 대립은 심각하게 격화되었고, 소말리아는 내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으로 인해 1991년 5월 소말릴란드 공화국은 옛 영국령 소말릴란드 지역을 중심으로 소말리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1960년 6월 26일 영국령 소말릴란드는 5일 후인 7월 1일에 독립하는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와 연합할 계획으로 영국으로부터 잠깐 독립했고,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가 독립하면서 소말리아로 합쳐졌다. 하지만 하르게이사를 비롯한 전 영국령 소말릴란드 지역은 모가디슈를 비롯한 소말리아 남부에 비해 정치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소외되어 둘 사이 갈등이 빚어졌다. 


1992년 유엔평화유지군(United Nations Operation in Somalia, UNOSOM)이 파견되어 희망 회복작전(Hope recovery operation)을 펼쳤지만, 이러한 작전을 주도했던 미군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1994년 미국과 유엔평화유지군은 결과적으로 임무 실패(Mission failed)인 상태로 철수하게 된다. 2004년 1월 유엔의 지지 아래에서 주요 분파의 지도자들이 과도연방정부(Transitional Federal Government, TFG) 구성과 선거 개최에 합의하면서 전망은 밝아지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이슬람 민병대인 이슬람 법정연합(Islamic Courts Union, ICU)이 등장하면서 다시 대립구도가 형성되었다. 이에 2006년 7월 에티오피아는 국경 안보를 명목으로 소말리아 문제에 개입하였다. 소말리아 과도정부 수상인 알리 무함마드 게디(Ali Mohamed Gedi)는 2007년 1월 2일 “소말리아 내에서 이슬람 법정연합(UIC)의 세력을 쫓아냈으며, 앞으로 소규모의 전투가 발생할 수도 있지만 이 또한 제압할 것”이라고 밝혔다. 소말리아 과도정부와 함께 이 전쟁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에티오피아 군이 소말리아 전역을 점령함으로써 2주간의 짧은 일방적 공격은 끝이 났다. 


소말리아 및 에티오피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국가인 지부티에 대규모의 미군기지가 있고 이 미군기지의 주요한 임무 중에 하나는 에티오피아 군대를 대상으로 군사작전훈련, 전문군사교육, 군사훈련 관리, 반(反) 테러작전, 군 의료 지원 훈련들이다. 이로 인하여 에티오피아 정부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게 되었고, 미국의 군사지원 하에 있던 에티오피아 정부는 미국에 의한 전 세계적 반(反) 테러전쟁을 충실히 따르는 아프리카 내에서의 미국 군사전략 정부였다. 하지만 ICU는 여러 단체로 흩어져 과도 연방정부에 대한 게릴라식 투쟁을 계속하였고, 이후 폭력적 극단주의 세력인 알 샤바브(al-Shabaab)가 결성되어 그곳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청년전사운동( حركة الشباب المجاهدين‎)이라 불리며 소말리아의 테러 무장단체로 성장했다. 이들을 보통 알 샤바브(الشباب‎)로 알려져 있다. 소말리아는 1991년 당시 대통령 시아드 바레 축출 이후, 20여 년간 내전을 치러왔다. 이 과정에서 이슬람 세계의 질서 회복을 가치로 두고 이슬람법정연합(ICU)이 출범하였다. 


알 샤바브는 이 단체에 뿌리를 둔다. 알 샤바브는 2010년 7월 11일 우간다 캄팔라에서 벌어진 자살 폭탄 연쇄 테러의 배후로 알려져 있다. 이에 2007년부터 현재까지 소말리아의 안정과 평화 회복을 위해 2만여 명의 아프리카 연합 평화 유지군(African Union Mission to Somalia, AMISOM)이 평화작전을 전개하고 있다. 오랜 기간 동안 내전을 치루었기 때문에 소말리아 연방 정부는 국토 전역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해갔고, 치안 회복을 위해 자치권을 요구하는 5개의 주(州) 정부와도 마찰을 일으키는 등, 긴장 관계를 이어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2015년에 들어서는 소말리아의 무정부 상태를 이용하여 폭력적인 극단주의 세력인 IS 소말리아지부(ISS), 알 샤바브 등이 소말리아에 침투해 내전을 조장함으로써 소말리아 내전 종식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특히 알 샤바브는 소말리아 과도정부, 유엔평화유지군, 유엔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이념적으로는 극단적인 이슬람 경전 해석을 따라간다. 따라서 음악 금지, 국가 형벌에 신체 절단 형과 투석형의 포함을 요구하고 있다. 


소말리아 중남부에 세력을 두고 있는 알 샤바브는 모가디슈에서 정부군과 매일 전투를 벌였다. 알 카에다는 알 샤바브를 지원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자행된 1998년 케냐, 탄자니아 미국 대사관 테러는 알 샤바브의 배후이자 알 카에다 최고위층인 파줄 압둘라 모하메드의 역할이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 카에다와 연계를 통해 이라크,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에서 수백 명이 이 알 샤바브에 들어가 있다. 전투 시에는 동원 가능한 전력이 3000~7000명 정도였다. 폭력적 극단주의 세력은 그들 간 영향력 경쟁을 할 뿐만 아니라 소말리아 땅 위에 이슬람국가 건설을 목표로 연방 정부 고위급 인사와 민간인에 대한 테러를 지속하고 있다. 한편 오랜 내전 속에서 어업 종사자들은 자신들의 안전과 바다를 지키기 위해 자력으로 무장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발적인 해안 경비대로 출발했지만, 소말리아 해안을 장악한 군벌들이 어민들의 해적 활동을 지원하고 사업화하면서 초국가적인 위협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태로 인해 한국의 청해부대는 2009년 3월 13일부터 아덴만에 파견되어 해적을 격퇴하고 한국 선박의 안전 호송 및 안전 항해를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소말리아 내부에서 내전을 벌이는 종족과 평화유지군에게 공동의 적으로 인식된 이슬람 무장세력 알 샤바브(Al-Shabaab)는 2006년~2009년에 두 번째 내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등장한 무장단체로 이슬람 법정연합(Union of Islamic Courts, UIC)의 하부 청년조직에서부터 시작한 단체였다. 알 샤바브는 2006년에 분파를 선언한 이후부터 청년(Youth)이라는 뜻의 조직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UIC와 분파한 이유가 추구하는 이슬람의 교리적 이념은 서로 상이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UIC와 알 샤바브는 이슬람 신정국가 건설의 목표가 같았지만 UIC는 비교적인 온건적인인 입장이었고 알 샤바브는 급진적이고 이슬람의 근본주의적 교리를 따르면서 IS나 탈레반과 같이 폭력적인 성향을 갖추고 있었다. 결국 UIC와 분리를 선언한 알 샤바브는 예멘과 가까운 지역인 “아프리카의 뿔”과 가까운 곳에 정착하여 반(反) 정부 활동을 펼쳤다. 


2009년 소말리아 과도연방정부(Transitional Federal Government, TFG)의 지도자가 UIC의 온건 세력 출신의 지도부에서 선출되자 알 샤바브는 세속적인 지도자를 선출했다고 이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 알 샤바브는 TFG를 적으로 간주하고 TFG 정부를 멸망시키기 위해 수도인 모가디슈를 습격함으로써 전면적인 공격을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2009년 2월에는 또 다른 이슬람 반란 세력인 히즈불 이슬람(Hizbul Islam)도 새로운 연립정부와 AMISOM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게 되면서 같은 해 6월, 소말리아 과도정부인 TFG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기에 이른다. 2010년 알 샤바브가 아프리카 연합군의 동원을 주도한 것에 대한 복수전으로 2010년 7월,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를 공격하면서 알 샤바브와의 전투 범위는 주변국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아프리카 연합은 알 샤바브에 대해 선제공격을 허가할 것에 합의하고, 더 많은 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이 때 증원된 AMISOM의 군대는 8,000명에 달했고, 이에 대항하여 2010년 8월 알 샤바브는 모가디슈에서 또 다시 정부와 AMISOM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로 인해 알 샤바브와 정부군 및 AMISOM의 분쟁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북부지역인 푼틀랜드 주(州), 중부 갈무두그 주(州), 그리고 키스마요(Kismayo)가 있는 남부 지역에서도 지속적인 교전이 발생했다. 알 샤바브의 공격으로 인해 AMISOM 병력의 피해가 지속되자, 2011년 이래 AMISOM은 소말리아 정부군과 함께 알 샤바브를 집중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2011년 1만 4천 명에 이르던 알 샤바브 조직원들은 2012년 무렵에는 지속적인 소탕전으로 인해 대거 희생되어 7~9천 명으로 줄어들었다. 한편 수세에 몰린 알 샤바브는 2012년 2월 범세계적인 테러 활동에 대해 충성을 맹세하면서 알카에다(Al-Qaeda)와 동맹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2012년 9월 AMISOM과 소말리아 정부군이 알 샤바브의 중요한 거점인 키스마요(Kismayo)를 탈환하는 것에 성공했으며 2014년 9월 미군의 무인기 공격으로 인해 알 샤바브 지도자 아흐메드 고단(Ahmed A. Godane)이 전사했다. 알 샤바브는 극심한 지도부의 내분을 겪으며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알 사뱌브는 여전히 소말리아 국토의 30% 가량을 통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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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말리아 내전과 영화 "모가디슈", 테러 단체 알 샤바브(al-Shabaab)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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