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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베트남에서 회담을 주목하며
    북한을 떠나 20일 베트남 하노이에 도착한 푸틴 대통령은 곧바로 일정을 가졌다. 야쿠츠크-평양-하노이로 이어지는 일정은 다른 국가 정상이었다면 피곤할 수도 있는 일정이다. 미국 바이든 같으면 그런 일정을 소화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각에서 푸틴이 암에 걸렸다. 혹은, 치매나 알츠하이머 등등 와병설이나 위독설이 제기되었지만 그런 설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주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러고도 암에 걸렸다. 혹은, 치매나 알츠하이머 등등 와병설이나 위독설 등은 전 세계 뉴스 찌라시들의 헛소리이자 희망 사항으로 밝혀졌다. 이번 베트남 방문 또한 북한 방문에 이어 또 다른 의미의 방문이라고 생각이 든다. 1. 지정학적 외교적인 부분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는 현재까지 좋은 관계다. 그러나 상호 간에 그리 미덥지 못한 관계인 것은 맞다. 최근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가는 천연가스 공급이 지연되고 있다. 러시아는 2022년 손상된 노르드스트림1 송유관과 거의 같은 양인 연간 500억 입방미터(bcm)의 가스를 러시아 북부에서 몽골을 거쳐 중국으로 운반할 새로운 가스관을 건설하기 위해 협의해 왔다. 그런데 이 공사가 현재 지연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와 중국은 주요 세부 사항에 대해 아직 합의하지 못했다. 시베리아의-2 전력을 운영하게 될 가즈프롬은 2030년까지 가스를 공급하기 시작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가격을 포함한 주요 쟁점들에 대한 합의는 아주 요원한 상태다. 중국과 러시아 측은 여전히 계산과 추정을 하고 있고 경제적 이익에 대해 합의가 신통치 않다. 후문에는 중국이 가스값을 사정없이 후려치고 있기에 러시아 입장에서는 중국이 후려친 가격으로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겉으로 큰 부분에서는 러시아와 중국이 좋은 협력관계로 보이지만 세부적인 면으로 볼 때, 작은 부분에서부터 이미 삐걱거리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부분들도 있기에 정치, 외교적으로 겉으로는 아주 친밀한 관계에 있지만 사실상 세부적으로 볼 때 서로 아직까지 완전히 믿지 못하는듯 싶다. 그렇다고 중국이 러시아에게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완전히 지원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집단서방, 미국 등과 맞서기 위해 상호 간의 친밀감을 과시하며 견제하는 용도일 뿐이다. 이를 서로 간에 경제적으로 러시아가 먼저 들어가면 중국이 따라 들어오고 중국이 먼저 들어가면 러시아가 따라 들어오는 스텐스를 취하며 저마다 국익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상 오월동주(吳越同舟) 관계라 볼 수 있겠는데 당사자들끼리 친밀감을 과시하면서 속으로 서로 견제하는 모션을 취하고 있음이 여기저기서 보여지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 입장에서는 언제 변할지 모르는 국제 관계의 속성상, 중국을 외교적으로 견제하기 위해 북한과 베트남이라는 일종의 보험을 들어놓기 위해 볼 수 있겠다. 게다가 둘 다 러시아와 '포괄적 전략 동반자(договор о Всеобъемлющем стратегическом партнерстве)' 관계를 맺고 있다. 이는 여차하면 중국을 지렛대로도 삼을 수 있다는 얘기다. 중국과 베트남은 서로 국민 감정도 좋지 않고, 상황에 따라서 중국이 베트남의 적성 국가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는 북한과도 마찬가지다. 북한은 그동안 중국에 경제적으로 많이 의존하였지만 때에 따라서 서로 견제하고 갈등이 생기는 경우도 종종 있었기에 북한 입장에서는 미국과 중국도 동시에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파트너로 맞아 들인 부분도 있다. 최근 베트남에는 화교 집단들의 세력이 커지며 당 중앙에까지 진출하려는 움직임도 있어 응우옌 푸 쫑 서기장은 이들을 정치적으로 견제하기 위해 부정부패 사건을 터뜨려 이를 계기로 숙청을 단행하고 있다. 최근 베트남 국가 주석인 보 반 트엉이 푸 쫑 서기장에게 숙청을 당했는데 이는 명목상 부정부패였으나 실질적으로 베트남 남부 지역 화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보 반 트엉은 호치민과 남부 지역 화교들이 경제적으로 성장세를 보이며 남부 지역의 주축으로 자리 잡아갈 때 화교에 대한 권익을 많이 보호해 주었기 때문에 친중적 성향을 갖게 된 배경이 있다. 따라서 푸 쫑은 이를 적극 견제에 나서 보 반 트엉을 실각시키고 외부적으로 러시아를 끌어들여 친중파 각료들과 화교 집단, 이들을 지렛대로 활용하려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인 것도 있다. 그런 의미로 베트남은 러시아의 행동을 비난하는 UN의 결의안 투표에서 여러 번 기권을 택했다. 심지어는 러시아에 물자를 지원하기도 했다. 물론 베트남은 모두와 친구로 지내되 공식적인 동맹은 맺지 않는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베트남은 과거 전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미국과도 협력하고 러시아와도 동시에 우방관계를 유지 중에 있다. 이는 모두 중국을 견제하기 위함이다. 특히 스프래틀리 군도 분쟁과 파라셀 군도(Paracel Islands) 영토 분쟁은 베트남 홀로 중국을 상대하기 보다는 러시아를 통해 대화의 창구 및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다. 따라서 러시아와 베트남은 지정학적, 혹은 외교적인 부분에서 상호 지렛대 활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푸틴 대통령이 하노이 방문함으로써 이를 공고히 하려는 이유가 크다. 그리고 러시아는 베트남을 통해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을 약화시키려는 부분도 함께 가지고 있다. 생각보다 다양한 전술, 전략으로 북한과 베트남을 써먹을 수 있다는 것에서 푸틴 대통령 지정학적인 전략을 잘 구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2. 경제적인 부분 오늘날 베트남의 경제는 세계 시장에 통합되면서 변화하고 있다. 베트남의 대러 무역 규모는 중국, 아시아, 미국, 유럽에 비해 훨씬 더 적은 편이다. 이는 거리상의 문제도 있지만 90~2000년대에 러시아 경제가 파탄 상태에서 서서히 끌어 올라오는 시기였기에 양국 경제적인 부분에서 협력은 그만큼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베트남 또한 러시아의 원유와 가스를 받아 축적하는 것을 늘리고 남중국해 석유 탐사에서 러시아 석유 기업과의 파트너십에 합의했다. 더불어 사할린 에너지의 안드레이 오호트킨 이사가 밝히길 사할린-2에서 생산하는 LNG 수출 지역을 베트남을 거쳐 인도까지 늘린다고 했다. 게다가 응우옌 푸 쫑 서기장은 1981년 소련의 사회과학아카데미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은 전례가 있기에 러시아와의 관계에 있어 손수 챙겨왔었고 '베트남의 삼성'으로 불리는 빈 그룹 창업자 팜 냣 브엉(Phạm Nhật Vượng) 회장 역시 러시아 유학생 출신이다. 이러한 인연들로 인해 러시아와의 경제 협력 강화 및 확대는 푸틴 대통령의 하노이 방문으로 인해 대폭 이루어질 전망이다. 더불어 베트남 또한 전력 사정이 좋지 않다. 전력량 사용이 급증하고 있고 최대 300% 이상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베트남의 경우, 한국과 달리 납부기한을 초과하는 즉시 얄짤없이 전기가 끊긴다. 베트남의 시골에는 이유 없이 전기가 나가 1시간 가까이 들어오지 않은 적이 있었다. 도시의 경우, 태풍을 비롯한 자연재해가 아니고는 발생하지 않는 일이긴 하지만 호치민의 경우, 간간히 끊기는 경우가 발생한다. 아마도 그것은 발전 용량의 문제라기보다는 마을 내 전기를 수급하는 과정에서 일시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되지만 전반적으로 전기 수급이 원활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남부 지방에는 메콩델타 최대 발전사업으로 현재 베트남전력공사(EVN)와 싱가포르 회사가 협정을 맺어 발전단지를 만들고 있지만 이 또한 감당이 안 된다. 그래서 꺼내든 카드가 원전을 짓는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원전 기업인 로사톰(Росатом)의 지원을 받아 베트남에 원자력 과학기술 센터를 설립하는 방안을 추진하려 하고 있다. 그리고 베트남에 원전 기술 제공을 도울 것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원전에 대해 러시아의 도움을 받는다면 고질적인 베트남의 전력난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북극항로와의 연결점이다. 최근 러시아가 수에즈 운하의 대안으로 북극항로를 제시하면서 연해주 중심의 신항만 투자를 늘려가고 있으며 동방경제포럼 때 이러한 논의가 중점적으로 이루어졌다. 북극항로에 있어 동해와 동남아시아 사이를 연결해주는 대각선 정점에 부산이 위치해 있고 러시아는 이런 형식으로 동남아시아에 진출하고 싶어한다. 동남아시아와 러시아, 북극을 연결하는 신(新) 해상 실크로드가 되어 물류의 새로운 중심이자 그 종심적 역할을 베트남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베트남을 통해 인도네시아까지 나아갈 수 있다. 동남아시아와 러시아, 북극을 연결하는 신(新) 해상 실크로드가 되어 물류의 새로운 중심으로 발돋움 할 수 있는 요충지로 러시아 입장에서는 베트남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22
  • 구석기(Paleolithic)와 신석기(Neolithic)의 범주
    구석기(Paleolithic)와 신석기(Neolithic)는 역사 시대도 아니고 또한 역사학의 범주도 아니다. 역사학의 범위는 엄연히 체계화된 문자로 기록이라는 것이 나타나고 여러 문명이라는 존재가 피어나던 시기부터 시작된다. 기록화 되긴 이전의 시대인 구석기(Paleolithic)와 신석기(Neolithic)는 인류사(Human history)의 범주로 들어간다. 물론 이것도 역사긴 하지만 성문화 되어진 역사가 아닌 존재만 가지고 있는, 체율체득(體律體得) 형태에 생존의 역사다. 흔히 고고학과 역사학을 혼동해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고고학과 역사학은 엄연히 종류가 다른 학문이고 이것을 햇갈려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정녕 아마추어들이다. 고고학을 두고 역사학을 위한 과학적인 학문이라 착각하는 아마추어들도 있다. 고고학은 역사학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좀더 진보된 과학적인 발견을 분석하는 학문이고 고고학을 연구하는데 있어 많은 타 종류의 학문들을 다양하게 수용하고 대입할 수 있는 종합 집약적인 학문(Comprehensive Intensive Disciplines)이라 정의할 수 있다. 거기에는 역사학이 갖고 있는 문헌학(Philology) 비중이 높긴 하지만 어쨌든 고고학과 역사학은 별개의 학문이다. 우리가 흔히 문명(Civilization)이라고 하는 것은 석기 시대와 금속 도구 시대의 차이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문명(Civilization)의 사전적 정의는 고도로 발달한 인간의 문화와 사회를 말한다. 원시적인 인간의 생활, 삶의 형태들이 물질적, 기술적, 사회 구조적인 발전을 통하여 기하급수적으로 진화한 형태이다. 그래서 석기 시대에서 금속 도구를 사용하는 시대는 인류가 살아가는 삶의 질이 진보했다는 것에서 인류사에 큰 혁명적인 전환기를 맞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선 석기 시대의 인류는 생존을 위한 시기라 보면 된다. 그 자체가 원시적이었고 어쨌든 살아 남기 위한 생존 본능의 시대다. 특히 구석기 시대의 경우, 개별 집단 및 씨족 집단으로 연명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은 타 집단을 만나게 되면서 함께 융합된 집단으로 살아가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인간은 원시 동물 개개별적으로 치면 매우 약한 존재로 대형 동물이나 포식자들의 표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인간과 동물이 다른 점은, 원초적 본능에서 진화할 수 있는 뇌구조가 다르다는 것이다. 인간의 뇌가 발달한 것에는 신경과학적인 구조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을 비롯한 영장류의 뇌는 다른 동물들의 뇌에 비해 크고 신경세포의 숫자도 훨씬 더 많다. 영장류의 뇌에서는 뇌가 커져도 신경세포의 크기가 거의 변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으며 영장류의 뇌에서 신경세포의 숫자를 10배 늘리려면 뇌가 11배만 커지면 된다. 하지만 같은 질량의 사람의 뇌에는 860억개의 신경세포가 있는데 이는 호모 에렉투스의 뇌 신경 세포의 개수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다만 최초의 도구를 사용했던 종인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두개골의 용량이 600cc에 불과한 종이지만 보통 현생인류의 탄생을 나는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의 출현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근거로 들 수 있는데 이는 거의 오랑우탄과 침펜지에 중간속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확연히 구분히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타웅에서 발견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도구를 사용한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호모 루돌펜시스(Homo rudolfensis) 시기는 흔히 불이 발견되었다고 추정된 시기와 일치한 시기이고 호모 에렉투스를 거쳐 사피엔스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뇌는 조금씩 진화해 갔다. 그러면 석기 시대라고 하는 인류사에 있어 도구적 진보(Instrumental progress)에 대해 어떤 논의들이 있을까? 이와 같은 도구적 진보에 대해 신경과학적인 부분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발생학(Embryology)이다. 이를 두고 실제로 ‘발생학적 선택’ 이라고 하는데, 토마스 새들러(Thomas Sadler)의 저작 <사람발생학(Longmans Medical Embryolgy)>에 의하면 "뇌의 발생 과정에서 다른 동물의 뇌와 두드러지는 차이를 찾을 수 있는 것은 ‘크기(Size)’, ‘구성(Construction)’, ‘에너지 소비(Energy consumption)’, ‘혈류량(Blood flow rate)’, ‘좌우 비대칭(Left-Right asymmetry)’ 등이다." 하고 하였다. 인간의 뇌는 멜론 비슷한 크기를 갖고 있으며 체중의 2.5%에 달하는 무게를 갖고 있다. 총 1천억 개 신경 세포와 1천조 개 시냅스가 있어 뇌 자체를 두고 작은 우주라고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의 뇌는 인간 에너지 소비량의 20%를 소모하는 존재이며, 혈류량도 750 ml/min라는 엄청난 양을 갖고 있고 좌우 뇌가 비대칭적으로 기능하고 있어 다른 동물들의 뇌와 세부적으로 다른 구조를 띄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는 본능에서 벗어나 생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진화하고 진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문명이라는 것도 탄생이 되는 것이고 개별적인 집단에서 좀 더 조직적인 집단으로 변모함으로써 대형 동물이나 포식자들의 천적으로 원시 생태계의 구조를 바꾸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시기에는 어떠한 예술적 가치의 창달이라든지, 문화적, 문명적인 발상 따위는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석기 시대 토기를 가지고 여러 의미 부여를 하는 일부 학자들이 있는데 나는 그러한 해석론적 시각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에 있다. 예술적 가치, 문화, 문명적인 발상은 금속병용기 시기부터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때는 정주민족의 경우, 수렵과 채집에서 벗어나 농업에 종사하며 안정화 되어가는 시기이고 삶의 질이 점차 풍족해져 가는 시기이다. 그래서 나는 구, 신석기의 경우 구석기는 원시 상태의 단계고 신석기는 문명 사회로 가기 위한 준비 단계로 보고 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반박하며 반론을 재기하는 학자도 여럿 존재한다. 그러면 석기 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프랑스 라스코나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라던지, 한국의 반구대 암각화와 같은 흔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절에 문자가 존재했는지의 여부를 먼저 따져봐야 한다. 인간의 사고는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어떤 체계적인, 혹은 갑자기 떠오르는 발상 등을 통해 표현하게 되는데 여기에 구체적으로 체계화 되어진 문자가 석기 시대에 등장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그러면 동굴벽화나 암각화는 어떠한 진화된 사고에 의한 예술 작품이 아니라 자신이 표현하고픈 내용을 문자처럼 그릴수도 있고 자기가 속한 부족과 이미 약속되어진 언어 수단 및 부호가 될 수도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고도로 구체적이고 표현화된 예술작품의 생성은 석기 시대가 아닌 금속병용기 이후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문자도 없던 시절에 예술 작품을 생각한다는 굉장히 문명사적으로도 언발란스한 일이다. 더불어 사람의 부분적인 문맹화 시대도 아닌 인간 전체가 문맹인 시기, 생존 본능, 씨족 보호 본능이 우선이던 시기에 어떠한 문명적 발상, 문화적 발상을 과연 할 수 있었겠는가?
    • 칼럼
    • Nova Topos
    2024-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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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석기(Paleolithic)와 신석기(Neolithic)의 범주
    구석기(Paleolithic)와 신석기(Neolithic)는 역사 시대도 아니고 또한 역사학의 범주도 아니다. 역사학의 범위는 엄연히 체계화된 문자로 기록이라는 것이 나타나고 여러 문명이라는 존재가 피어나던 시기부터 시작된다. 기록화 되긴 이전의 시대인 구석기(Paleolithic)와 신석기(Neolithic)는 인류사(Human history)의 범주로 들어간다. 물론 이것도 역사긴 하지만 성문화 되어진 역사가 아닌 존재만 가지고 있는, 체율체득(體律體得) 형태에 생존의 역사다. 흔히 고고학과 역사학을 혼동해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고고학과 역사학은 엄연히 종류가 다른 학문이고 이것을 햇갈려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정녕 아마추어들이다. 고고학을 두고 역사학을 위한 과학적인 학문이라 착각하는 아마추어들도 있다. 고고학은 역사학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좀더 진보된 과학적인 발견을 분석하는 학문이고 고고학을 연구하는데 있어 많은 타 종류의 학문들을 다양하게 수용하고 대입할 수 있는 종합 집약적인 학문(Comprehensive Intensive Disciplines)이라 정의할 수 있다. 거기에는 역사학이 갖고 있는 문헌학(Philology) 비중이 높긴 하지만 어쨌든 고고학과 역사학은 별개의 학문이다. 우리가 흔히 문명(Civilization)이라고 하는 것은 석기 시대와 금속 도구 시대의 차이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문명(Civilization)의 사전적 정의는 고도로 발달한 인간의 문화와 사회를 말한다. 원시적인 인간의 생활, 삶의 형태들이 물질적, 기술적, 사회 구조적인 발전을 통하여 기하급수적으로 진화한 형태이다. 그래서 석기 시대에서 금속 도구를 사용하는 시대는 인류가 살아가는 삶의 질이 진보했다는 것에서 인류사에 큰 혁명적인 전환기를 맞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선 석기 시대의 인류는 생존을 위한 시기라 보면 된다. 그 자체가 원시적이었고 어쨌든 살아 남기 위한 생존 본능의 시대다. 특히 구석기 시대의 경우, 개별 집단 및 씨족 집단으로 연명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은 타 집단을 만나게 되면서 함께 융합된 집단으로 살아가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인간은 원시 동물 개개별적으로 치면 매우 약한 존재로 대형 동물이나 포식자들의 표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인간과 동물이 다른 점은, 원초적 본능에서 진화할 수 있는 뇌구조가 다르다는 것이다. 인간의 뇌가 발달한 것에는 신경과학적인 구조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을 비롯한 영장류의 뇌는 다른 동물들의 뇌에 비해 크고 신경세포의 숫자도 훨씬 더 많다. 영장류의 뇌에서는 뇌가 커져도 신경세포의 크기가 거의 변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으며 영장류의 뇌에서 신경세포의 숫자를 10배 늘리려면 뇌가 11배만 커지면 된다. 하지만 같은 질량의 사람의 뇌에는 860억개의 신경세포가 있는데 이는 호모 에렉투스의 뇌 신경 세포의 개수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다만 최초의 도구를 사용했던 종인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두개골의 용량이 600cc에 불과한 종이지만 보통 현생인류의 탄생을 나는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의 출현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근거로 들 수 있는데 이는 거의 오랑우탄과 침펜지에 중간속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확연히 구분히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타웅에서 발견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도구를 사용한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호모 루돌펜시스(Homo rudolfensis) 시기는 흔히 불이 발견되었다고 추정된 시기와 일치한 시기이고 호모 에렉투스를 거쳐 사피엔스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뇌는 조금씩 진화해 갔다. 그러면 석기 시대라고 하는 인류사에 있어 도구적 진보(Instrumental progress)에 대해 어떤 논의들이 있을까? 이와 같은 도구적 진보에 대해 신경과학적인 부분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발생학(Embryology)이다. 이를 두고 실제로 ‘발생학적 선택’ 이라고 하는데, 토마스 새들러(Thomas Sadler)의 저작 <사람발생학(Longmans Medical Embryolgy)>에 의하면 "뇌의 발생 과정에서 다른 동물의 뇌와 두드러지는 차이를 찾을 수 있는 것은 ‘크기(Size)’, ‘구성(Construction)’, ‘에너지 소비(Energy consumption)’, ‘혈류량(Blood flow rate)’, ‘좌우 비대칭(Left-Right asymmetry)’ 등이다." 하고 하였다. 인간의 뇌는 멜론 비슷한 크기를 갖고 있으며 체중의 2.5%에 달하는 무게를 갖고 있다. 총 1천억 개 신경 세포와 1천조 개 시냅스가 있어 뇌 자체를 두고 작은 우주라고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의 뇌는 인간 에너지 소비량의 20%를 소모하는 존재이며, 혈류량도 750 ml/min라는 엄청난 양을 갖고 있고 좌우 뇌가 비대칭적으로 기능하고 있어 다른 동물들의 뇌와 세부적으로 다른 구조를 띄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는 본능에서 벗어나 생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진화하고 진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문명이라는 것도 탄생이 되는 것이고 개별적인 집단에서 좀 더 조직적인 집단으로 변모함으로써 대형 동물이나 포식자들의 천적으로 원시 생태계의 구조를 바꾸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시기에는 어떠한 예술적 가치의 창달이라든지, 문화적, 문명적인 발상 따위는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석기 시대 토기를 가지고 여러 의미 부여를 하는 일부 학자들이 있는데 나는 그러한 해석론적 시각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에 있다. 예술적 가치, 문화, 문명적인 발상은 금속병용기 시기부터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때는 정주민족의 경우, 수렵과 채집에서 벗어나 농업에 종사하며 안정화 되어가는 시기이고 삶의 질이 점차 풍족해져 가는 시기이다. 그래서 나는 구, 신석기의 경우 구석기는 원시 상태의 단계고 신석기는 문명 사회로 가기 위한 준비 단계로 보고 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반박하며 반론을 재기하는 학자도 여럿 존재한다. 그러면 석기 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프랑스 라스코나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라던지, 한국의 반구대 암각화와 같은 흔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절에 문자가 존재했는지의 여부를 먼저 따져봐야 한다. 인간의 사고는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어떤 체계적인, 혹은 갑자기 떠오르는 발상 등을 통해 표현하게 되는데 여기에 구체적으로 체계화 되어진 문자가 석기 시대에 등장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그러면 동굴벽화나 암각화는 어떠한 진화된 사고에 의한 예술 작품이 아니라 자신이 표현하고픈 내용을 문자처럼 그릴수도 있고 자기가 속한 부족과 이미 약속되어진 언어 수단 및 부호가 될 수도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고도로 구체적이고 표현화된 예술작품의 생성은 석기 시대가 아닌 금속병용기 이후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문자도 없던 시절에 예술 작품을 생각한다는 굉장히 문명사적으로도 언발란스한 일이다. 더불어 사람의 부분적인 문맹화 시대도 아닌 인간 전체가 문맹인 시기, 생존 본능, 씨족 보호 본능이 우선이던 시기에 어떠한 문명적 발상, 문화적 발상을 과연 할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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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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