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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회 대정부질문 파행, 민주당 '채해병 특검법' 본회의 상정 추진
    제22대 국회의 첫 대정부질문이 김병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막말 논란으로 파행을 빚었다. 더불어민주당은 3일 '채해병 특검법'을 본회의에 반드시 상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은 이날 경제 분야 대정부질문을 마친 뒤 채해병 특검법을 본회의에 올릴 계획이다. 민주당은 4일까지 채해병 특검법을 본회의에서 처리하겠다는 방침이다. 국민의힘의 필리버스터 가능성을 고려해 이날 표결을 진행할 예정이다. 민주당은 전날 본회의에 채해병 특검법을 상정하려 했으나, 김병주 의원이 질의 도중 '정신 나간 국민의힘'이라는 발언을 사용하면서 본회의가 파행으로 치달아 무산됐다.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는 "(채해병 특검법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라며, "채해병 1주기까지 어떤 일이 있어도 특검법을 관철하겠다고 한 국민과 약속을 지키는 과정에서 국민의힘은 곤혹스러울 것"이라고 밝혔다. 박 원내대표는 "국민의힘은 빌미만 있으면 파행하려고 할 가능성이 높다"라며, "민주당은 크게 관여하지 않고 국회법에 따라 진행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주당은 이날 단독으로라도 채해병 특검법 상정과 표결을 강행하겠다는 방침이다. 여당은 필리버스터를 예고했지만, 야당이 24시간 뒤 강제로 토론을 종료하는 경우 이를 막을 수단이 없다. 윤종군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본회의 파행이 지속되더라도 중요한 표결을 미루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채해병 특검법이 본회의를 통과하면 대통령은 15일 안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4일 채해병 특검법이 본회의를 통과하고,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민주당의 목표대로 채해병 1주기인 7월 19일 직전에 국회 재표결이 가능하다. 민주당은 여론의 지지를 바탕으로 재표결 시 여당의 이탈표를 기대하고 있다. 채해병 특검법 통과를 위해서는 여당의 최소 8표 이상의 이탈표가 필요하다. 현재 여당에서 안철수 의원, 김재섭 의원, 조경태 의원이 채해병 특검법에 찬성 입장을 밝힌 상태다. 민주당의 채해병 특검법 상정 추진은 국민의힘과의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여당은 필리버스터로 저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민주당은 법적 절차를 통해 이를 강행하려 하고 있다. 이번 대정부질문 파행과 채해병 특검법 상정 문제는 향후 국회 운영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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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3
  • 민주당, 바이든 대체론 대두… 해리스와 미셸 오바마 주목
    미국 대선 첫 TV 토론 이후 민주당 내부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의 후보 교체론이 제기되고 있다. CNN과 여론조사기관 SSRS가 실시한 조사 결과, 바이든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양자 대결에서 43% 대 49%로 뒤졌다. 반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트럼프와의 가상 대결에서 45% 대 47%로 박빙을 보였다. 해리스는 특히 여성과 무당층에서 강세를 나타냈다. 조사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결할 경우 여성 응답자의 44%만이 바이든을 지지했지만, 해리스 부통령에게는 절반인 50%가 지지를 보냈다. 무당층에서도 바이든은 34%의 지지를 얻은 반면, 해리스는 43%의 지지를 받았다. 이는 해리스 부통령이 일부 유권자층에서 바이든보다 더 경쟁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트럼프 전 대통령의 가상 대결에서는 43% 대 48%로, 피트 부티지지 교통부 장관과의 대결에서는 43% 대 47%로 나타났다. 민주당의 또 다른 유력 후보인 그레첸 휘트머 미시간 주지사와의 대결에서는 42% 대 47%로 집계됐다. 한편, 로이터와 입소스가 실시한 조사에서는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이 각각 40%의 지지율로 동률을 기록했다. 해리스 부통령과 트럼프의 가상 대결에서는 해리스가 42%, 트럼프가 43%로 오차 범위 내에서 1%포인트 차이를 보였다. 일각에서 꾸준히 민주당의 대안 후보로 거론되는 미셸 오바마 여사는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가상 대결에서 50% 대 39%로 압도적인 지지율을 기록했다. 오바마 여사는 백악관을 떠난 이후에도 저서 집필 등을 통해 대중과 꾸준히 소통하며 높은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정치에는 참여할 뜻이 없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바이든 대통령의 '고령 리스크'가 드러난 첫 토론 이후, 바이든 측은 여론 조사 결과에 주목하며 위기론을 잠재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질 바이든 여사를 비롯해 아들 헌터 바이든 등 가족들은 바이든 대통령의 대선 완주를 강하게 설득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CNN을 포함한 여러 여론 조사 결과는 바이든 대통령의 '토론 후폭풍'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CNN 조사에서 민주당 및 민주당 지지자의 56%는 바이든 대통령 이외의 후보를 내세울 경우 대선 승리 가능성이 더 높다고 답했다. 바이든 대통령을 내세우는 것이 승리 확률이 높다는 답변은 43%에 불과했다. 이는 지난 1월 조사에서 바이든 대통령을 내세우는 것이 경쟁력이 높다는 답변이 53%였던 것과 대비된다.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율은 36%로 CNN 자체 조사 기준 최저치를 기록했다. 바이든 대통령을 강력하게 지지하지 않는다는 답변도 45%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호감도는 34%에 불과했으며, 비호감을 품은 비율은 58%에 달했다. 로이터 조사에서도 민주당 지지자의 32%는 바이든 대통령이 후보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밝혔다. 응답자의 59%는 바이든 대통령이 공직을 수행하기에는 너무 늙었다고 답변했다. 이와 같은 조사 결과는 민주당 내부에서 바이든 대통령의 후보 교체론이 더욱 힘을 얻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바이든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은 이러한 위기론을 잠재우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여론의 흐름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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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3
  • 이준석 의원, “국민의힘 당 대표는 김건희 여사만이 적임자” 주장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은 2일,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의힘 당을 주도적으로 통제할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BBS 라디오 '함인경의 아침저널'에 출연한 이 의원은, 국민의힘 전당대회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한 후보 중 누가 당선되더라도 수직적 당정관계를 해소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 의원은 여당 대표가 안정적으로 당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김건희 여사가 당 대표가 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은 이준석을 몰아내고, 김기현 대표도 본인이 세우고 몰아냈으며,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도 세우고 몰아내려고 했다. 굉장히 별난 분"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이 의원은 "당 대표 후보로 김 여사가 오지 않는 한 대통령이 가만히 안 둘 것"이라며 "여당 대표가 김 여사가 되지 않는 한 대통령이 가만히 안 둘 것으로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어서 그는 "굳이 화합형 지도자를 찾자면 윤상현 의원"이라며 "윤 의원은 윤 대통령이 대선에 출마할 때 끝까지 사람들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애썼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 의원은 국민의힘 전당대회 당 대표 경선을 '서울대 법대 반장선거'로 표현했다. 그는 "어떻게 한 당에 대통령, 비대위원장, 전직 비대위원장, 전당대회 후보, 전직 대표 전부 다 서울대 법대 출신이냐"라며 "이렇게 되면 유전적으로 이상이 생기고, 대한민국 정치 전반에서도 문제가 된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 의원은 "서울대 법대 출신들이 모여 있으니 결국에는 배신자 논란과 충성 논란만 생긴다"라고 했다. 그는 "과거에 윤 대통령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관계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이라며 "당이 바뀌려면 지금 위기 상황에서 비전이 나와야 하는데, 하나도 안 나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동훈 후보를 향한 비판도 이어졌다. 이 의원은 "한 100일 전까지만 하더라도 '여의도 사투리' 쓰지 않고 국민의 언어로 얘기하겠다더니, 지구당 부활을 전당대회 대표 공약으로 냈다는 것 자체가 여의도 사투리에 찌들어버린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대통령 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는데, 대통령 하고 싶은 것 하나밖에 없는 한 검사 출신 정치인 때문에 지금 대한민국이 이 지경이 됐다"라고 날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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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2
  • 정청래 최고위원, 정부 비판 강조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이 1일 국회 본청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강한 비판을 제기했다. 윤 대통령 탄핵 청원이 78만 명을 넘어선 것을 언급하며, 국민을 억압하고 야당을 탄압하는 정권의 미래에 대해 부정적 전망으로 일관했다. 정 최고위원은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나"라며 현 정부의 정치, 경제 상황을 비판했다. 그는 가수 정수라의 노래 '아! 대한민국'을 개사해 정부와 여당을 비판하는 가사를 낭독하며, 현재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을 강조했다. 그는 "하늘에 오물풍선 떠 있고, 바다엔 핵오염수 흐르고, 저마다 누려야할 권리가 오늘도 억압받는 곳"이라 말했다. 또 "국민은 대통령 탄핵을 외치고, 대통령는 총선 민심을 짓박고, 인권과 민주주의는 끝없이 추락하는 곳"이라 전했다. 정 최고위원의 발언은 특히 현재 정부의 정책과 행태가 국민의 권리를 억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윤 대통령이 총선 민심을 무시하고 인권과 민주주의를 추락시키는 등의 행위를 강하게 비판했다. 정 최고위원은 또한 경제 상황에 대해 IMF 시절보다 더 어려워졌다고 평가하며, 정부의 정책 실패를 지적했다. 그는 대통령이 민심을 무시하고 거부권을 남발하는 현실을 비판하며, 이러한 행태가 국민의 분노를 증폭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탄핵 청원의 참여자가 곧 100만 명을 넘어설 기세라고 언급하면서, 이는 국민의 강한 불만과 정권 교체에 대한 열망을 반영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김진표 전 국회의장의 회고록에서 언급된 윤 대통령의 발언을 인용하며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대통령이 유도 조작 가능성을 언급한 것에 대해 충격을 표현했다. 정 최고위원은 "국민과 정권의 한판 싸움에서 반드시 국민이 이길 것"이라며 자신감을 표현했다. 또한, 서영교 최고위원도 탄핵 청원의 급속한 증가를 언급하며, 국민의 분노와 간절한 마음을 드러냈다. 서 최고위원은 대통령에게 반성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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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1
  • 조 바이든 대통령의 대선 미래 고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최근 대선 첫 TV 토론회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며 대선 사퇴 요구가 증가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현재 캠프 데이비드 대통령 가족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모임은 가족사진 촬영을 위해 예정된 일정이지만 중요 결정이 가족과 함께 상의했던 평소와 같이 정치적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지난 30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은 7번의 유세를 마친 후 캠프 데이비드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영부인 질 바이든과 자녀, 손주들이 합류할 예정이다. 이번 별장 모임은 봄에 계획되어 있었다. 하지만 가족과의 중요한 결정을 논의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 바이든은 항상 중요한 결정은 가족과 함께 한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토론회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목소리가 쉬고 말을 더듬는 등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에 그의 고령에 대한 우려가 증폭되었다. 그러면서 그의 대선 경쟁력을 의심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미국 언론과 정치권에서 민주당 후보 교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바이든 대통령은 현재 민주당 대의원의 99% 지지를 확보하고 있다. 그의 자진사퇴만이 후보에서 내려올 수 있다. 하지만 TV 토론 이후 후보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NYT는 사설을 통해 바이든 대통령의 경선 하차를 촉구했다. 또 미국 CBS 방송과 유고브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72%의 미 유권자가 그의 대선 출마에 반대한다고 응답했다. 그렇지만 바이든 대통령의 가족은 계속해서 경선에 참여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특히 아들 헌터 바이든은 사퇴 압력에 저항하라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헌터 바이든은 최근 총기 불법 소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아들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며 지지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의 가족 모임에서의 결정은 그의 정치적 거취는 물론 미국 정치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그의 거취 결정에 대한 세계적 이목이 집중된 이유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미국 내외의 정치적 균형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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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1
  • 국민의힘 전당대회 '배신의 정치' 논란
    국민의힘 7월 23일 전당대회를 앞두고 한동훈 후보를 둘러싼 '배신의 정치' 논란이 국민의 힘 내부를 더욱 격화시키고 있다. 한 후보의 '채 상병 특검' 수용을 배신으로 보는 주장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배반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과거 박근혜 전 대통령이 유승민 전 원내대표를 겨냥해 사용했던 '배신의 정치' 용어와 맥을 같이한다. 당시의 보수 분열을 연상시키는 논란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번 전당대회에서 어대한(어짜피 대표는 한동훈)의 상황에서 특히 원희룡, 나경원, 윤상현 등 주요 후보들의 발언을 통해 그 긴장감을 더하고 있다. 당원의 공포심을 통해 각 후보는 한 후보에 대한 비판을 높이고 있다. 과거를 소환하고 ‘배신자’라는 낙인을 통해 각자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원희룡 후보는 기자회견을 통해 한 후보를 향한 강도 높은 비판을 제기했다. 원 후보는 한 후보의 행동을 "인간관계의 배신, 당원들의 배신, 그리고 당정 관계의 충돌로 이어지는 행위"로 규정하며, 이는 "2017년 당시 당과 대통령의 충돌이 초래한 자멸의 경험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발언은 한 후보의 행동이 당의 분열을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나경원 후보 캠프 또한 한 후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캠프 측은 보도자료를 통해 "당원들은 박근혜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내쳤던 장면을 잊지 못하고 있다"라며 "보수의 갈라짐과 분열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채 해병 특검의 칼끝은 명백히 대통령을 겨냥하고 있다"라며 한 후보의 특검 수용을 사익을 위한 정치적 선택으로 비난했다. 윤상현 후보는 '절윤(絶尹)' 즉, 윤 대통령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배신의 정치'가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윤 후보는 이러한 전략이 과거에도 실패했으며, 당과 국민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고 강조했다. 박근혜·윤석열 정부의 '배신자' 표현은 '집권 3년 차'의 비슷한 시점에 등장했다. 하지만 윤 대통령과 박 전 대통령의 위상이 많은 차이가 난다. 박 전 대통령은 지지율이 당시 50%였고, 현재 윤 대통령은 25%대의 지지율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배신의 정치’라는 프레임이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한 후보가 오히려 ‘반윤’기조의 ‘합리적 보수’ 이미지로 차기 권력으로 급부상할 수 있다는 전망이다. 국민의힘 당 대표 후보의 각 발언은 한동훈 후보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 대부분이다. 보수 진영 내부의 분열을 걱정하며 한동훈은 당 대표에 적격하지 않다는 논리이다. 앞으로 23일 전당대회를 통해 국민의힘은 새로운 리더를 선출한다. 이 과정에서 당내 다양한 의견과 비판이 향후 어떻게 흘러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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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1
  • 김진표 전 의장의 회고록 폭로와 대통령실의 반발
    김진표 전 국회의장의 회고록 '대한민국은 무엇을 축적해 왔는가'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김 전 의장은 10·29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윤 대통령이 "특정 세력에 의해 유도되고 조작된 사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라고 언급했다고 기록했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은 강하게 반발하며, 김 전 의장이 대통령의 발언을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실은 공식 공지를 통해 "국회의장을 지내신 분이 국가 조찬기도회에서 대통령에게 독대를 요청해 나누었던 이야기를 멋대로 왜곡해서 세상에 알리는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김 전 의장의 회고록에서 언급된 '특정 세력에 의해 유도되고 조작된 사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라는 윤 대통령의 발언 자체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왜곡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대통령실은 이어서 윤 대통령이 "당시 참사 수습 및 예방을 위한 관계기관 회의가 열릴 때마다 언론에서 제기된 다양한 의혹을 전부 조사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라고 강조했다. 또한 "윤 대통령이 차선 한 개만 개방해도 인도의 인파 압력이 떨어져서 사고를 막을 수 있었는데도 차선을 열지 않은 것이 이해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혀왔다"라고 덧붙였다. 김진표 전 의장의 회고록은 이태원 참사와 관련된 내용 외에도 여러 정치적 사건과 정부 정책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나온 발언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김 전 의장은 회고록에서 윤 대통령이 이태원 참사에 대해 음모론적인 견해 표명에 대해 큰 실망감을 나타냈다. 그는 "대통령이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라고 지적했다. 김 전 의장은 또한 이태원 참사 두 달 뒤인 12월 15일 국가 조찬기도회에서 윤 대통령과 만나 이태원 참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물러나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회고록에 기록했다. 이에 대해 윤 대통령은 "이태원 참사에 관해 의심 가는 게 있어 아무래도 결정을 못하겠다"며 "이 사고가 특정 세력에 의해 유도되고 조작된 사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김 전 의장의 회고록 공개 이후 정치권과 언론은 다양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일부에서는 김 전 의장의 회고록이 지나치게 주관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대통령실의 반응이 과도하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이번 논란은 앞으로 정치권의 큰 이슈로 떠오를 전망이다. 정치권 일부에서는 윤 대통령의 발언이 사실이라면, 이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대통령이 국민의 안전과 직결된 문제에 대해 음모론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큰 문제라고 주장했다. 반면, 대통령실의 반발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김 전 의장이 사적인 대화를 공론화한 것 자체가 문제라고 주장했다. 대통령실과 김 전 의장 간의 공방이 어떻게 전개될지 주목된다. 이는 단순한 개인 간의 갈등을 넘어 정치 전반에 걸쳐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특히 국가 안보와 국민의 안전을 다루는 사안에서 정치인의 발언과 그에 따른 책임은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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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8
  • 윤석열 대통령 국정운영 지지율 26.3%로 하락…이재명, 호감도에서 한동훈 앞서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율이 26.3%로 하락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보다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국민적 호감도는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조사 결과는 향후 정치 지형 변화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수행에 대한 긍정 평가는 지난 조사에서 30.1%였으나 이번 조사에서는 26.3%로 3.8%p 하락했다. 반면, 부정 평가는 65.8%에서 69.1%로 3.3%p 상승했다. '잘 모름' 응답은 4.5%로 나타났다. 이번 조사는 전체 1,005명의 표본 중 보수 310명, 진보 257명, 중도 438명이 응답했다. 지역별로는 모든 지역에서 부정 평가가 긍정 평가보다 높았다. 보수지지세가 강한 대구·경북에서도 긍정 평가 40.7%, 부정 평가 53.1%로 12.4%p 격차가 발생했다. 다른 지역별 부정 평가는 광주·전라 82.3%, 서울 72.1%, 대전·충청·세종 71.1%, 경기·인천 70.3%, 강원·제주 66.7%, 부산·울산·경남 64.1% 순으로 나타났다. 연령별로는 70세 이상을 제외한 모든 연령층에서 부정 평가가 긍정 평가보다 높았다. 70세 이상은 긍정 평가 51.9%, 부정 평가 43.1%였다. 다른 연령별 부정 평가는 40대 83.4%, 18~29세 79.9%, 30대 78.0%, 50대 73.7%, 60대 54.2% 순으로 나타났다. 이념 성향별로 중도층에서는 긍정 평가 18.3%, 부정 평가가 75.9%로 나타났다. 보수층에서는 긍정 평가 49.0%, 부정 평가 46.0%인 반면 진보층에서는 긍정 평가 12.6%, 부정 평가 85.7%로 조사됐다.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 중 누구를 더 신뢰하고 호감을 느끼는가'라는 질문에는 이재명 전 대표가 44.8%를 기록해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의 33.1%를 앞섰다. 다만 둘 다 비호감이라는 답변은 18.8%, '잘 모른다'라는 응답자는 3.3%였다. 지역별로는 대구·경북과 부산·울산·경남에서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의 호감도가 높았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이재명 전 대표의 호감도가 높았다. 이 전 대표는 서울 46.5%, 경기·인천 45.7%, 대전·충청·세종 40.9%, 광주·전라 67.1%, 강원·제주 37.4%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한 전 비대위원장은 대구·경북 51.4%, 부산·울산·경남 42.7%로 나타났다. 연령별로는 60대와 70대 이상을 제외하고 이재명 전 대표가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보다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60대와 70대 이상에서는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이 각각 47.7%, 55.7%로 나타났다. 이 전 대표는 18~29세 34.4%, 30대 49.2%, 40대 66.8%, 50대 53.8%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정치 성향별로 보수층에서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의 지지율은 62.2%, 진보층에서 이재명 전 대표의 지지율은 74.1%로 나타났다. 중도층에서는 이 전 대표 45.9%, 한 전 비대위원장 24.1%로 이 전 대표의 지지율이 높았다. 정당 지지도 조사에서는 국민의힘 32.5%, 더불어민주당 36.3%로 집계됐다. 두 정당의 지지율 차이는 3.8%p로 오차범위 내였다. 국민의힘과 민주당 모두 지난주보다 각각 1.1%p, 1.4%p 상승했다. 이어 조국당이 10.1%, 개혁신당 4.9%, 진보당 1.7%, 새로운미래 1.2%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지지 정당 없음'은 10.2%, '그 외 다른 정당'은 1.7%, '잘 모름'은 1.4%로 나타났다. 이번 조사는 미디어토마토가 뉴스토마토 의뢰로 지난 24일과 25일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5명을 대상으로 실시했다. 조사는 무선·ARS(자동응답) 방식으로 진행됐으며, 표본 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p다. 2024년 5월 말 행정안정부 주민등록인구통계 기준 성·연령·권역별 가중치(셀가중)가 부여됐다.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이번 여론조사 결과는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모든 지역과 연령대에서 부정 평가가 높게 나타나고 있어 정부의 정책 방향과 성과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상당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높은 호감도는 향후 대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정당 지지도 측면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이 국민의힘을 근소하게 앞서고 있으나, 두 정당의 지지율 차이는 오차범위 내에 있어 앞으로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 조국혁신당과 개혁신당 등의 지지율도 주목할 만하다. 특히, 조국혁신당의 10.1% 지지율은 새로운 정치 세력의 부상을 의미해 향후 정치 지형에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 이번 여론조사는 윤석열 정부가 국민적 지지를 회복하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정책 개선과 소통 노력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또한, 이재명 전 대표와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의 경쟁 구도 역시 향후 정치적 행보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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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7
  • 임성근 전 사단장과 김건희 여사 연결 의혹
    해병대 출신 인사들이 모인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에서 지난해 5월 해병대 1사단에서 골프 모임을 추진했다는 내용이 밝혀지면서 이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이 대화방에 김건희 여사의 계좌를 관리했던 이종호 씨가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받고 있다. 이에 따라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과 김 여사의 연결고리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25일 JTBC 보도에 따르면,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태의 공범으로 김건희 여사의 계좌를 관리했던 이종호 씨를 비롯한 해병대 출신 인사들이 임 전 사단장과의 골프 모임을 추진하는 단체 대화방의 내용이 입수되었다. 이 씨는 당시 미등록 투자사 블랙펄인베스트의 전 대표로, 도이치모터스 2차 주가조작 사건의 주요 인물로 지목된 바 있다. 대화방의 내용에 따르면, 한 참석자는 "포항 1사단에서 초대합니다"라며 "사단장 및 참모들과 1박 2일 골프 및 함께하는 저녁 자리를 가지면 좋을 것 같다"라고 제안했다. 이 제안에 대해 이 씨는 일정을 확인하겠다고 답했으나, 이후 참석이 어렵다고 하여 실제 모임은 성사되지 않았다. 임성근 전 사단장은 자신이 이종호 씨와 아는 사이가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26일 기자들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이종호라는 분을 만나 뵌 적이 없다"라며 청문회 때와 같은 입장을 고수했다. 또 골프 모임 추진 사실도 이번 뉴스를 보고 처음 알았다고 설명했다. 임 전 사단장은 "당시 A씨께서 해병대 선후배들과 골프 모임을 추진하면서 일정이 맞으면 저에게 연락을 취해 세부 계획을 발전시키려 했으나, 다들 일정이 맞지 않아 더 추진하지 못했다고 들었다"라고 덧붙였다. 더불어민주당은 해병대 골프 모임을 추진한 카카오톡 메시지가 임성근 전 사단장과 김건희 여사의 연결고리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서영교 민주당 최고위원은 "윤석열 대통령과 임 전 사단장 사이에 누가 있었길래 대통령이 보호하려고 했을까"라며 이종호 씨를 지목했다. 서 최고위원은 또한 "김 여사와 주가조작으로 연루된 그 사람이 해병대 선배였다"라며 JTBC 보도를 언급했다. 한민수 민주당 대변인은 "왜 윤 대통령을 비롯한 공무원들이 해병대원 순직 사건의 진실 은폐에 총동원되었는지 풀 수 있는 마지막 퍼즐이 드러났다"라며, 수사외압의 정점에 김 여사의 주변 인물이 등장함으로써 퍼즐이 완성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윤 대통령이 임 전 사단장 구하기에 적극적이었던 이유에 대해 답해야 할 때라고 촉구했다. 앞서 지난 21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청문회에서도 관련 의혹이 제기됐다. 더불어민주당 박균택 의원은 임 전 사단장을 상대로 이종호 씨와 골프 모임을 하는 등 친분이 있지 않냐고 따져 물었으나, 임 전 사단장은 "A씨를 모른다"라고 여러 차례 답변했다. 이번 해병대 골프 모임 논란은 임성근 전 사단장과 김건희 여사, 그리고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으로 이어지는 복잡한 관계를 조명하고 있다. 임 전 사단장은 이종호 씨와의 관계를 일축하고 있지만, 더불어민주당은 이를 통해 김 여사의 영향력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이 논란은 향후 정치권과 군 내부에서 큰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군과 정치권의 관계, 그리고 군 인사들의 외부 인물과의 관계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또한 김건희 여사와 관련된 의혹이 계속 제기되는 가운데 이번 사건은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한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정치권과 군이 협력하여 철저한 조사를 통해 국민에게 명확한 답을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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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6
  • 홍준표 대구시장과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의 갈등 원인과 배경
    홍준표 대구시장은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을 '개 닭 보듯' 무시하거나 한 수 아래로 보고 있다. 한동훈 전 위원장이 같은 국민의힘 동지로서 더불어민주당에 맞서 함께 손을 맞잡아야 할 상황에서도, 홍 시장은 날카로운 비난을 퍼부으며 갈등을 드러내고 있다. 이 갈등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 배경을 총선 패배 ‘원죄론’, 정치 신인 ‘풋내기론’, 과거 행적 ‘책임론’, 대권 주자 ‘견제론’으로 나누어 분석해본다. 첫째, 홍준표 시장은 한동훈 전 위원장에게 총선 패배의 책임을 묻고 있다. 홍 시장은 26일 “총선 패배 주범에게 줄 서는 행태들이 참 가관”이라고 비난하며, 한 전 위원장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총선 패배 책임지고 원내대표 나오지 말라고 소리 높여 외친 게 엊그제 같다”라면서 한 전 위원장이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고 있는 것에 불만을 드러냈다. 또한, 홍 시장은 여당 대표의 첫 조건으로 정권과의 동행과 재집권의 기반 마련을 강조하며, 한 전 위원장이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둘째, 홍 시장은 한동훈 전 위원장이 정치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검찰 출신의 한 전 위원장이 하루아침에 여의도 정치판에 들어와 기존의 정치 문법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홍 시장은 한 전 위원장의 회동 요청을 두 차례 거절했다고 밝혔다. 그는 “25일 오겠다는 것을 내가 거절했고 27일 오겠다는 것도 거절했다”라며 한 전 위원장의 정치적 성숙도를 문제 삼았다. 또한, 홍 시장은 2017년 당 대표 시절 문재인 전 대통령의 사냥개 역할을 했던 한 전 위원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셋째, 홍준표 시장이 한동훈 전 위원장을 꺼리는 또 다른 이유는 한 전 위원장의 과거 행적이다. 홍 시장은 한 전 위원장이 과거에 자신들의 진영을 괴롭혔던 일을 언급하며, 그를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한 전 위원장은 특별한 입장이 없다고 답변하며 홍 시장과의 면담이 불발된 것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넷째, 홍 시장이 한동훈 전 위원장을 경원시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한 전 위원장이 대권 주자로 부상할 가능성이다. 홍 시장은 한 전 위원장이 당 대표를 거쳐 대권 주자로 부상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는 원희룡 후보와 면담에서 한 전 위원장을 겨냥해 “총선에 진짜 비상대권을 줬는데 쫄딱 망했지 않나”라며 비난했다. 또한, 홍 시장은 한 전 위원장이 해병대 채 상병 특검법 발의를 추진하겠다고 한 것을 두고 “채 상병 특검만 받는 게 아니고 한동훈 특검도 받을 건가”라며 비꼬았다. 홍준표 대구시장과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간의 갈등은 단순한 개인적 불화가 아니라 정치적, 역사적, 개인적 배경이 얽혀 있는 복잡한 문제이다. 총선 패배의 책임, 정치 경험 부족, 과거 행적, 그리고 대권 주자 부상 가능성 등이 얽혀 있는 이 갈등은 국민의힘 내부의 분열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갈등은 앞으로 정국에 대해 민감한 사안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내 소통과 화합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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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6

과학 검색결과

  • 전주 중학교에서 발생한 딥페이크 음란물 사건, 경찰 조사 중
    전북 전주의 한 중학교에서 남학생들이 교사와 동급생의 얼굴을 나체 사진과 합성한 사건이 발생해 사회적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들 학생은 인공지능(AI) 딥페이크 기술을 이용해 음란물을 제작하고 유포했으며, 현재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딥페이크는 AI 기술을 활용해 생성된 가짜 이미지나 오디오, 비디오를 말한다. 이 사건은 딥페이크 범죄가 점점 사회문제로 부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 딥페이크를 악용한 가짜 동영상 및 뉴스 유포 사례가 증가하고 있으며, 이를 근절할 명확한 대책은 아직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가해자를 특정하고 혐의를 입증해 처벌하기 어려운 점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서울대 딥페이크 성범죄 사건에서 보듯, 해외 서버를 이용한 딥페이크 음란물 유포 시 가해자 추적이 어렵고, 혐의 입증 역시 까다로운 상황이다. 심지어 유포 목적이 없이 개인 보관용이라고 주장할 경우 실질적인 처벌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성형 AI의 발전은 딥페이크 범죄 외에도 지식재산권 분야에서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AI가 인간의 최소한 개입만으로 창작물을 생성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면서, 저작권 침해와 같은 이슈가 발생하고 있다. 생성형 AI 기술은 2022년 11월 Open AI에 의해 개발된 챗GPT의 등장으로 급부상했다. 현재 주요국에서는 AI 규제 법령을 시행 중이다. 유럽의회는 3월에 AI 기술의 안전성과 기본권 준수를 보장하는 인공지능 법(AI Act)을 승인했다. 미국에서는 바이든 대통령이 ‘안전성·보안성·신뢰성을 갖는 AI의 개발과 활용에 관한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AI 규제를 강화했다. 중국도 생성형 AI 서비스 관련 법률을 제정해 시행 중이다. 전문가들은 생성형 AI 기술의 부작용이 증가함에 따라, 서비스 제공자의 책임 한계를 명확히 하고, 규제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를 통해 AI 기술의 발전과 사회적 문제 해결 사이의 균형을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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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1

칼럼 검색결과

  • 2년 전, 헝가리 총선, 빅토르 오르반 총리의 4연임 당선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가 2022년 총선에서 승리하며 4연임을 확정지었다. 헝가리 총선에서 여당인 오르반 피데스당이 71%의 득표율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페테르 마르키자이(Péter Márki-Zay), 야당 연합 총리 후보는 패배를 인정했다. 오르반은 이번 승리로 4연임에 성공했다. 오르반은 1998~2000년 총리를 지내고 2010년 총선 승리 이래 연속 3연임에 성공해 12년 연속 집권하면서 EU의 최장수 총리가 되었다. 그는 집권 이래 이슬람과 난민, 성소수자 등에 반대했고 사법부를 장악하는 등 EU의 규정들을 위반했다. 결국 EU 지도부는 헝가리에 대한 예산 지원 삭감을 경고했고 오르반은 지난 2월 연설에서 EU가 헝가리에 관용을 베풀지 않으면 공동의 길을 계속 갈 수 없다며 EU 탈퇴를 시사했다. 특히 오르반은 푸틴 대통령과의 오랜 친분을 강조해 왔다. 오르반은 승리 연설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을 선거 운동 기간 동안 극복해야 했던 반대자 중이자 그를 압박했던 인물 중 한 명이라고 지칭하기도 있다. 이와 같은 오르반의 배경으로 인해 헝가리는 러시아에 대한 EU 제재에 새로운 구멍이 생길수 있다는 이야기가 언급되고 있다. CNN에 따르면 오르반은 우리가 달에서도 볼 수 있는 커다란 승리를 거뒀고 이는 EU 본부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에서도 보일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승리 자축했다. 오르반은 거대한 규모의 적들과 싸워야 한다면서 헝가리 좌파와 EU 관료들, 국제 언론을 모두 적으로 꼽았다. 앞서 헝가리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EU 차원의 러시아 제재에 대부분 참여했다. 하지만 헝가리는 우크라이나에 직접 무기를 지원하는 방안은 거부하면서 EU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헝가리 외무부는 지난달 30일 헝가리 좌파가 우크라이나 정부와 협력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며 젤렌스키가 헝가리의 내정에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면서 이는 헝가리 좌파 세력들이 젤렌스키와 모종의 거래가 있지 않았냐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그렇다면 헝가리 극우 세력의 상징 빅토르 오르반은 어떠한 인물일까? 빅토르 오르반은 1963년 5월 31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태어났으며, 부다페스트의 외트뵈시 로란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는 청소년기와 대학생 때는 공산당원으로 활동했지만 군에서 제대한 이후로는 헝가리 내 공산 체제에 대해 회의감을 느꼈으며 이후 서방 세계를 동경하여 자유 노조 등에 대해 공부했다. 1988년 오르반은 공산주의 정권에 반대하는 단체인 청년민주동맹(Fiatal Demokraták Szövetsége, 줄여서 피데스 Fidesz)이 만들어질 때 창립 멤버가 되었다. 더불어 공산주의의 패망을 예측하고는 <세기의 종언(Szazadveg)>이란 잡지도 창간했다. 그 다음 해인 1989년 6월 16일 부다페스트에 있는 영웅 광장에서 열린 헝가리 혁명 당시 수상 너지 임레(Nagy Imre, 1896~1958)를 추모하는 자리에서 자유선거와 소련군의 철수를 공개적으로 촉구하는 연설을 했다. 이와 연설로 인해 그는 헝가리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으며 서구권에서도 주목받는 인사가 되었다. 이후 피데스가 헝가리 민주 정당이 되면서 오르반은 피데스 당의 당수가 되었다. 피데스는 1990년 치러진 총선에서 국회의 386석 중 21석을 차지했다. 이 시기까지 오르반 빅토르는 중도 성향의 정치인으로 선전했지만 1994년 총선에서 20석에 그치는 부진을 보이자 당의 노선을 중도파 자유주의에서 좀 더 보수주의적인 노선으로 탈바꿈했으며 이로 인해 상당수의 중도파 당원들이 탈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후 1998년 총선에서는 피데스가 돌풍을 일으키며 148석을 차지하면서 원내 제1당이 되는 데 성공했다. 오르반 빅토르는 만 35세의 나이로 총리직에 오르게 된다. 오르반 정부는 적극적으로 서구화를 추구하면서 내부 경제적으로 연 4%씩 상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외부에서는 나토나 EU 가입 등에 성공하여 최고의 외교적 성과를 올렸지만 급속한 경제성장에 따른 빈부격차가 확대되었기에 하층민의 불만이 증가했고 이로 인해 치안 또한 악화되면서 내적으로 혼란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국유 기업을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정치 부패가 만연함으로 인해 국민들의 큰 실망을 안겼고 좌파 세력이 아직 강성한 헝가리 내에 우익 세력이 부상할 가능성이 낮아짐에 따라 다음 선거에서 중도좌파인 사회당-자유민주연합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당시 헝가리 정부는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강도높은 긴축을 지속했으나 2008년 상반기에 피데스당이 주도한 국민투표에서 대학의 부분적 유료화와 무상 의료 서비스의 부분적 유료화 조치를 철폐하는 국민투표에서 패배하면서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직후에 금융 위기가 닥치면서 IMF 구제금융을 받기도 했고, 중도 좌파 정권의 개혁이 계속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여론 조사에서 피데스의 지지율이 순식간에 상승하여 60%대를 넘나들게 되었다. 게다가 친서방 자유보수주의 성향이었던 오르반 빅토르의 정치 성향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을때가 사회당 2기 집권기였을때인데 이 시기를 기점으로 친서방 자유주의 노선에서 극우 성향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오르반은 2009년 연설에서 자유주의든 공산주의든 간에 엘리트들의 사상이라고 비난하는 연설을 하면서 그와 피데스당의 정치노선에 큰 변화가 있었음을 입증했다. 2010년 총선에서 피데스당은 긴축 대신 경제 성장을 내세우는 공약을 통해 기존 사회민주당 지지층을 대거 흡수하며 52.7% 득표율로 압승을 거두었고 오르반이 다시 총리가 됨에 따라 이 때부터 그의 4연임이 성공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이를 규탄하고 EU의 대러시아 제재를 적극 지지하며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를 타국에서 무기 지원 할 경우 헝가리 국경을 경유하는 부분에 대해 헝가리 영토와 국민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하기도 했다. 심지어 그는 난민을 거부하기로 악명이 높은 인물이었고 실제로 2016년 시리아 난민이 생겼을 때, 세르비아 국경에 긴 장벽을 쌓고 시리아 난민이 들어오면 적극 구타하는 등 인권 탄압을 했을 정도의 인물이었지만 이번에는 어려움에 빠진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조건 없이 받아주고 있다. 그러나 오르반은 젤렌스키 대통령의 무기 지원과 대러 에너지 제재 동참 요구를 거절하면서 EU 간에 형성된 대러 제재가 균열이 생길 위기에 놓였다. 특히 헝가리가 가스의 85%, 원유의 60% 이상을 러시아에서 수입하고 있다. 따라서 국가 차원에서 대러 제재는 거의 국가 경제를 파탄시킬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에 대러 에너지 제재 동참 요구를 거절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EU 제재에서 헝가리가 빠져 나가게 되면서 향후 대러 제재의 귀추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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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7
  • 조지아 서부를 장악하고 있는 아자리야인들의 역사와 아자리야 자치공화국 - 下편
    사실상 조지아에게서 독립한 아자리야와 아바시제는 1992년 감사후르디아가 실각하고 대권을 이어받은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Eduard Shevardnadze)와 비교적 잘 지냈다. 셰바르드나제는 제1차 조지아 내전으로 얼룩진 국내에서 정식 대통령이 되는 1995년까지 약 3년 동안 서방과 러시아에서 중립 행보를 보였으며 내전은 러시아의 개입과 중재, 그리고 셰바르드나제 측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그러나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아는 사실상 독립해버렸고 이는 2008년의 남오세티야 전쟁의 불씨를 낳아버렸다. 이같은 상황을 목도한 아슬란 아바시제는 공식적으로 선포하지는 않았지만 독립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내전이 끝났어도 조지아는 독립해버린 3국으로 인해 또 다른 혼란에 직면하게 된다. 조지아에게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내전에서 셰바르드나제의 공식 군대로 활약한 마피아 군단이었다. 이들 마피아들 중 므헤드리오니(Mhedrioni)는 조지아인 뿐 아니라 러시아인, 터키인,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소수민족으로는 라즈인과 아자리야인의 상당수가 합류한 준 군사조직이었다. 재밌는 것은 이들 준 군사화된 깡패 무리들의 무기들이 어디서 흘러왔는지 모르지만 상당수가 미제 무기를 장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침 1991년에는 미국을 비롯한 다국적군이 이라크를 상대로 한 달여 동안 걸프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당시 미국의 무기고에 재고 떨이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조지아 내전을 연구하던 미헤일 아르바쉬빌리(Mikheil Arbashvili) 교수는 걸프전을 종결한 미군이 므헤드리오니(Mhedrioni)에 상당한 양의 무기를 제공하면서 내전을 부채질했고 초대 대통령인 감사후르디아에 대한 쿠데타를 조장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내전 당시, 러시아제 무기로 무장한 압하지야, 남오세티아 군대를 약체화된 조지아군은 이를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분쟁 지역에 상당수를 민병대와 준군사조직에 위임했는데 문제는 이를 지휘하는 자들이 모두 조지아 마피아와 연결된 부패한 인물들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므헤드리오니는 조지아 마피아의 두목이었던 자바 이오셀리아니(Jaba Ioseliani)가 설립했다. 여기에 많은 범죄자들이 다수 가입해 있었으며 앞서 언급한 것처럼 러시아인, 터키인,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소수민족으로는 라즈인과 아자리야인까지 다국적 깡패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약 1,000명의 정조직원과 10,000명의 준회원들이 있었으며 어디에서 입수되었는지 불분명한 미제 무기로 무장한 이들은 불법 휘발유 공급과 마약 거래, 강도, 보호비 갈취로 자금을 마련했다. 결국 이 깡패들로 구성된 준 군사조직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감사후르디아를 자살당하게 만들고 셰바르드나제는 대통령이 된다. 자바 이오셀리아니의 므헤드리오니는 석유 산업 이권을 얻었지만 해당 지역이 포티를 비롯한 흑해 연안 지역이었던데다 아지리야 국경까지 넘어 세력 판도를 넓히기까지 하니 아바시제는 이들과 전쟁을 시도했다. 그러자 자바 이오셀리아니의 므헤드리오니 같은 마피아 조직들이 조지아 정치권에서 위세를 부렸다. 하지만 대통령인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까지 보이자 이들을 숙청하기로 결심하고 바투미로 날아가 아바시제를 만난다. 아바시제와 화해하면서 조지아 마피아 일당을 함께 토벌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아자리야가 더 큰 자치권의 지위를 인정하고 아자리야에서 아바시제의 권력 유지를 허락했다. 그러나 아바시제가 조지아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는 것은 거부했다. 그러자 아바시제는 트빌리시의 조지아 의회에 신당 창당을 건의하면서 셰바르드나제의 조지아 시민 연합(Georgia Citizens' Coalition)과 연정을 요청했고 셰바르드나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하여 조지아 민주주의 재건 연합(Georgia Coalition for Democracy Reconstruction) 당이 창당된다. 그리고 감사후르디아 때와 다르게 여당의 세가 약한 상태였기에 이들은 서로가 연정했고 결국 1995년 말, 조지아 의회 선거에서도 절대다수의 여당이 된다. 그러나 셰바르드나제는 조지아 민주주의 재건 연합(Georgia Coalition for Democracy Reconstruction)와의 연정을 깨면서 아바시제와의 약속을 어겼고 2003년까지 약 8년 동안 독재정권을 이끌게 된다. 이어 셰바르드나제가 트빌리시 의회 청사에서 폭탄 테러를 당해 암살 위기를 겪게 되자 이를 마피아들의 테러로 몰아 이들을 숙청했고 때에 맞춰 아바시제는 아자리야 땅에서 마피아들을 축출해버렸다. 셰바르드나제에 대한 트빌리시 의회 청사에서의 폭탄 테러 암살 미수 사건은 정말로 마피아들이 그 같은 테러 행위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일부 조지아의 현대 역사가들은 셰바르드나제의 자작극을 의심하고 있다. 마피아들로부터 정치적 위협을 깨고 선제 타격하여 정적을 제거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셰바르드나제와의 관계 악화에도 아바시제가 창건한 조지아 민주주의 재건 연합(Georgia Coalition for Democracy Reconstruction)은 최대 30개 의석까지 확보하고 있었다. 이들은 트빌리시 중앙 당국에 대한 온건한 반대 세력이었지만 의석 수를 더 늘리면 언제든 아바시제를 조지아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할 수가 있다. 그러나 2003년 부정선거로 인해 장미 혁명(Revolution of Roses)이 발발했고 여기에 미헤일 사카슈빌리(Mikheil Saakashvili)가 등장하면서 아바시제와 조지아 민주주의 재건 연합(Georgia Coalition for Democracy Reconstruction)의 계획은 틀어지기 시작한다. 장미 혁명과 같은 색깔혁명이 발발하면서 2003년 11월 23년에, 아슬란 아바시제는 아자리야에 비상 태세를 발령했다. 이어 아바시제는 조지아 민주주의 재건 연합(Georgia Coalition for Democracy Reconstruction)의 추천으로 2004년 1월 4일 조지아 대통령 선거에 참여했다. 그러나 색깔혁명의 여파는 뒤집을 수 없었고 그는 미헤일 사카슈빌리에게 패배했다. 패배의 결과는 결국 사카슈빌리의 최후통첩으로 연결된다. 이는 모든 아자리야의 지도자에게 조지아 헌법에 따를 것과 군대의 해산을 명령한 것이다. 그러면서 아바시제를 마피아 및 셰바르드나제와 내통 및 각종 불법물 관련 밀매 혐의로 조지아 대법원에 기소했다. 그러자 아바시제는 조지아 군대가 침입을 준비한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아자리야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러면서 아자리야의 군대는 아자리야와 조지아의 각 지역들을 연결하는 다리들을 폭파하고 혹시나 모를 조지아 군의 진입을 차단했다. 이와 같은 아자리야 지역의 비상 사태는 같은 해, 5월 4일까지 이어지면서 타 조지아 지역에 사카슈빌리에 대한 반대 집회까지 독촉하는 등, 제2차 조지아 내전이 촉발될 위기에 몰린다. 그러나 이러한 계엄령은 오히려 아자리야 내에서 역풍을 맞았다. 바투미에서는 조지아와의 평화적 공존을 위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고 이는 아바시제의 권력 구도가 축소되는 촉매 역할을 하게 된다. 아자리야에서 전체적으로 수만 명이 아바시제의 사임을 요구하기 위해 바투미로 향하면서 아바시제의 권력은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다. 아자리야 전 지방의 시위대들이 중심 바투비에 입성한 5월 6일, 아바시제의 권력은 붕괴되었다. 이를 기회로 조지아의 특수부대가 바투미와 아바시제의 공관으로 진입하여 친 아바시제 단체들을 무장 해제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에 푸틴 대통령의 전갈을 받은 러시아 대사 이고리 이바노프(Игорь Иванов)와 밤새도록 대화했고 이바노프는 아바시제를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아바시제는 다음 날, 7일 아침 퇴진을 발표했다. 그리고 8일 새벽 아바시제는 모스크바로 망명하면서 제2차 조지아 내전의 위기는 겨우 무마되었다. 아바시제의 실각과 망명 이후, 바투미에서는 새로운 지방 선거가 발표된다. 자치공화국의 발족을 위해 20인의 가협정 의회가 구성되었으며 레반 바르샬로미제(Levan Barshalomize)가 가협정 의회의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아자리야 지역 의회들의 선거는 6월 20일에 열렸고 사카슈빌리 대통령의 지지를 받은 정당은 30석 중 28석을 획득하며 아자리야 지역 의회에서 압승을 거둔다. 나머지 2석은 사카슈빌리의 이전 협력자들인 공화당원들이 장악하면서 아바시제의 세력들은 완전히 축출되었다. 그리고 7월 20일, 아자리야 최고 의회는 레반 바르샬로미제를 자치 공화국 정부의 의장으로 임명하면서 아자리야 독립 공화국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아자리야 지역 의회와 조지아 중앙 정권, 아자리야인과 조지아인은 문화적, 종교적으로 달랐으며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2008년 남오세티아 전쟁 때는 아자리야인들이 러시아를 지지했다. 사카슈빌리가 실각할 때, 아자리야인들은 러시아 국가를 부르며 사카슈빌리의 퇴진을 축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지아 입장에서 바투미는 흑해와 같은 바다로 나갈 유일한 창구다. 바투미를 잃는다는 것은 조지아에게 있어 어머어마한 타격이다. 기본적으로 아자리야 자치공화국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적극적으로 러시아를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반대로 조지아 정부와 국민들은 친서방, 친우크라이나를 선택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조지아의 여당인 "조지아의 꿈"이 친러가 되면서 아자리야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조지아 동부와 아자리야인들의 사이도 그다지 좋지 않아 제3차 조지아 내전의 불씨가 서서히 피어 오르고 있는 중이다. 이같은 국내 문제로 인해 조지아는 다시 위기 일발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7-07
  • 2011년 그리스 정부의 유로존 탈퇴 및 디폴트 선언을 무기로 한 그리스 2차 구제 금융 요구 사건
    2011년 7월부터 그리스 정부와 유로그룹은 2차 구제금융 지원 논의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2011년 10월 유로그룹은 채무탕감과 1,300억 유로의 2차 구제금융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다. EU 정상들은 유럽 은행들을 비롯한 민간 채권자들과 10시간에 걸친 마라톤 협상 끝에 그리스 부채 탕감률을 50%로 올리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그리스가 갚아야 할 총 채무 3500억유로 중 민간부문 1000억유로가량이 줄어들게 됐다. 대신 민간 채권자들이 보유한 나머지 그리스 채권이 디폴트에 빠지지 않도록 EU는 300억유로의 보증을 제공한다. 또한 EU 정상들은 EFSF를 4400억유로에서 1조유로 수준으로 대폭 확대했다. 재정위기국이 채권을 발행할 때 EFSF가 발행금액의 20~30% 정도 보증을 서는 것과 EFSF 산하에 특수목적기구(SPV)를 설치해 IMF와 중국 등 국부펀드 자금을 끌어들이자는 방안이 제안되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에게도 전화를 걸어 EFSF에 대한 투자를 요청하기도 했다. 위기에 대비해 역내 은행들이 자본을 내년 6월 말까지 1060억유로 정도 늘리는 은행 자본 확충방안도 나왔다. 은행들이 스스로 자금을 조달해보고 여의치 않을 경우 해당국 정부가 지원해 주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마저도 어려울 경우 유럽재정안정기금인 EFSF가 돕기로 했다. 이와 함께 유로존과 IMF는 그리스의 재정위기 타개를 위해 그리스에 1000억 유로 규모의 추가 지원자금을 공급하기로 했다. 이날 사르코지 대통령은 그리스 민간 부채 중 50%를 탕감하며 올해 160%로 추정되는 그리스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비율을 2020년까지 120%로 낮출 수 있게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EU 정상들은 이탈리아가 의향서 제출을 통해 각종 개혁조치를 실행하겠다고 발표한 것에 대해 환영의 뜻을 밝히면서도 스스로 정한 시한과 목표를 지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번 합의에 따른 관련 규정 변경에는 최소 2~3개월이 소요된다. EFSF 확충 등 이번 합의 사항은 모든 유로존 국가 의회의 동의를 얻아야 한다. 2012년 3월까지 그리스 332억 유로, 이탈리아 1980억 유로, 스페인 840억 유로 등 국채 만기가 도래하게 된다. EFSF가 빨리 운용 가능한 기금 규모를 확충해야 하는 이유다. 결국에는 2011년 10월 EU가 부채의 50%를 탕감해주고 2차 금융 지원을 하기로 결정되었지만, 그리스 국민들은 EU의 수장인 독일의 메르켈 총리를 나치라 비난하는 등, 거세게 반발했다. 이는 금융 지원에 있어 필연적으로 따라 붙게 되는 긴축 요구 때문이다. 당시 데일리 메일에 따르면 그리스 시내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공공의 골칫거리'라는 문구와 더불어 과거 히틀러 정권을 연상시키는 나치 SS 친위대원의 옷차림을 한 포스터가 등장했다. 메르켈 총리는 EU를 상징하는 별과 나치 상징 문양이 함께 그려진 완장도 차고 있다. 그리스 현지 신문 만평도 독일 관리들이 나치 복장을 하거나 긴축정책에 동의한 그리스 정부 관리들이 나치식 인사를 하는 모습으로 그렸다. 시민들은 정부의 임금과 연금 삭감, 증세 등 계속된 긴축정책에 반발하며 연일 시위를 벌이고 있다. 화가 난 일부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고대 유적지를 방문한 독일 관광객에게 적대적으로 대할 정도다. 그리스 언론은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 독일 정부의 간섭이 약 65년 전 히틀러 정권이 그리스에 악행을 저질렀던 경험을 연상시키며 독일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고 분석했다. 우여곡절 끝에 합의된 2차 그리스 구제금융 패키지에 대해 그리스 국민 과반수가 되려 반대 의사를 표했다. 패키지에 포함된 그리스 국채 상각(헤어컷) 프로그램이 자국에 이득이 되지 않을 것이란 이유에서다. 그리스인의 58%는 이 긴축안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고 있으며 대통령과 관료들은 반역자라고 불리고 있다고 한다. 유럽의 지원에 대해서도 50.1%는 필요하다고 답했지만 48.8%는 자주권 훼손을 우려하는 등 그리스 국민들 사이에서는 외부 지원에 대한 의견이 크게 엇갈리고 있다. 다만 그리스가 유로존(유로 사용 17개국)에 남길 원한다고 답한 이는 72.5%에 달했다. 이에 따른 증세불복 시민운동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이 운동 일부 공무원까지 참가하고 있다. 이에 대한 시민 운동의 시작은 그리스 제2의 도시 테살로니키에서 열린 국경일 기념행사의 거리행진에서 드러났다. 매년 주요 정치인들이 참여하는 이 행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0년 이탈리아군의 침공을 저지한 것을 기념해 열리는 이벤트다. 그러나 2011년의 행사는 시위대의 반발로 차질을 빚었다. 시위대는 낮부터 행진을 막고 카를로스 파풀리아스 대통령, 파노스 베글리티스 국방장관 등을 향해 “반역자”라고 외쳤다. 10월 26일에도 베글리티스 장관과 일부 국회의원들은 이 지역 한 교회를 방문했다가 호된 욕설을 들어야만 했다. EU 정상회의가 10월 27일 내놓은 그리스 채권 손실률 상향 등 위기 해법에도 비판은 더 커졌다. 그리스의 지방 자치 단체들도 반발했다. 주민 수가 7만 명인 아테네 광역도의 네아 이오니아 구에서는 전기 요금 고지서에 함께 부과된 신설 재산세를 내지 말도록 촉구했다. 당시 이라클리스 고트시스 구청장은 신설된 세금이 불법이라고 생각한다. 본질적으로는 구민들이 세금 낼 돈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로 심각했다. 재정난으로 인한 국가부도 위기를 타개하려는 정부의 증세정책에 반발한 그리스 국민의 불복종 움직임이 산발적이지만 표면화되고 있는 것이다. 증세에 대한 거부감이 확산되면서 일부 지방 공무원들마저 증세 거부운동에 가담하고 나설 정도였다. 앞서 언급한 네아 이오니아구 의회도 웹사이트에 세금은 내지 않고 전기요금만 내는 방법을 공지하면서 증세 거부를 부추겼다. 물론 이런 움직임은 네아 이오니아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부 변호사들과 노조, 사회운동가들도 정부의 신설 세금 징수와 수만 명의 공무원을 급료 일부만 지급하면서 정직시키는 계획을 좌절시키기 위해 운동에 가담하고 있다. 이로 인해 정부기관 건물들이 점거되는가 하면 파업 중인 노조원들의 복귀를 지시하는 긴급 통지문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고 국영기업들은 일시휴직 대상이 될 수 있는 공무원 명단 제출을 거부했다. 이와 같은 거부운동은 쓰레기 수거 작업원, 제빵사, 택시운전사, 치과의사, 항공관제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산발적인 파업이 계속되는 가운데 확산되었다. 당시 그리스 국민들은 정부의 재정 지출 삭감과 이로인한 가계소득 감소, 16%를 넘어선 실업률로 가계의 지출 여력이 한계에 도달했다. 그리스 국민들의 분노를 자극한 것은 특히 신설된 재산세였다. 2011년 9월 발표된 이 재산세는 올해 말까지 20억 유로를 징수할 것이 계획되어 있다. 그리스 정부는 이 세금을 쉽게 걷기 위해 전기 요금 고지서에 포함시켜 함께 부과했다. 세금을 안 내면 단전될 수 있다는 경고가 포함된 셈이다. 이와 같은 정부의 의도에 국영 전력회사 근로자들까지 분노하고 나섰다. 이들은 단전을 막겠다고 공언하고 단전된 경우에도 노인이나 실업자 등 취약계층에게는 다시 전기 공급을 재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들은 고지서 인쇄를 막기 위해 관련부서를 점거에까지 나서기도 했다. 변호사들도 가세해 아테네 변호사협회는 이번주 이 법의 폐기를 당국에 요구했다. 2011년 11월에 들어서자마자 그리스 정부는 유로존 탈퇴 및 디폴트 선언에 대한 국민투표를 진행하겠다고 나섰다. 그리스가 EU 2차 구제금융안에 대한 국민투표에 유로존 탈퇴안도 포함시키기로 결정했다. 사실상 유로존 탈퇴 여부까지 고려하고 있다는 강경한 의지로 풀이된다. 파판드레우 3새 총리는 11월 2일 EU의 구제금융에 대한 국민투표와 관련하여 그리스가 EU와 유로존 회원국임을 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파판드레우 3세 총리는 각의에서 국민투표의 딜레마는 구제금융과 유로, 유럽에 대해 찬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라며, 현 내각의 불신임 여부와 관련 없다라고 했다. 그리스가 갑자기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치킨 게임에 나서게 된 셈이다. 이에 따라 주가와 유로화 가치가 급락하는 등 금융시장이 다시 불안에 빠지고 있었다. 유로존 국가들이 철회를 요구하고 있지만 다시 한 번 국민투표 강행 의지를 표출한 것이다. 그리스 총리 관저의 툴카스 대변인도 신임투표에서 다시 한 번 승리를 거둬 정부의 계획을 밀고 나갈 것이라며 정부는 국가를 구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에게서 뒤돌아서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특히 4일 일 밤 의회에서 파판드레우 총리에 대한 신임투표를 앞두고 있었다. 여당에서도 반발하는 1명이 탈당해 여당인 범 그리스 사회주의 운동 당의 의석은 과반에서 2석 많은 152석으로 떨어졌다. 제1 야당인 신민주주의 당의 안토니오 사마라스 당수는 조기총선을 요구하면서 총리가 자신을 위해 그리스의 미래와 유럽 내 그리스의 입지를 위험에 빠뜨리는 왜곡된 딜레마를 안겼다고 비난하는 등 야당의 반발도 거세지고 있다. 이와 같은 그리스의 도박에 대해 EU 지도부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유로그룹 의장인 장 클로드 융커 룩셈부르크 총리는 그리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리스가 국민투표를 통해 구제금융안을 거부할 경우 국가부도 상황에 놓일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이어 이미 불안할 대로 불안해진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특히 로버트 졸릭 세계은행 총재는 그리스의 국민투표 결정은 재정위기를 해소하려는 유럽의 노력에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헤르만 반 롬푀이 EU 정상회의 상임의장과 호세 마누엘 바호주 EU 집행위원장도 이날 공동 성명을 통해 그리스가 유로존과 국제사회에 진 의무를 존중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반발이 거센 상황에서 프랑스와 독일, 그리스 정상들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앞서 긴급 회동했다. 이번 회담은 그리스의 국민투표 시행에 따른 금융시장 혼란 등에 대처하기 위한 것으로 IMF 총재, EU 관계자, 그리스 대표 등도 배석한다. 회의에서는 유로존 해법의 열쇠를 쥐고 있는 독일과 프랑스 정상이 그리스의 국민 투표안 철회를 강하게 압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독일과 프랑스 정상은 이날 발표한 성명에서 EU 정상회의 결정을 수행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수적이라면서 그리스 부채를 줄이는 EU 합의안 실행을 촉구했다. 그러나 그리스 국민 대다수의 여론은 디폴트 선언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렇게 될 경우 유로존은 엄청난 위기에 휩싸일 공산이 커지고 그리스는 말 그대로 파르테논 신전 같은 돌덩어리를 제외고는 국내외 자산이 모두 압류된다. 다만 그리스 국내 자산은 그리스의 사법 당국이 허가해야 해외 채권자들이 처분할 수 있다. 당시의 유럽 증시는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운 상황에 있으며 미국이나 아시아 증시의 하락세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와 같은 돌발 상황으로 인해 전 세계 주식이나 금융 쪽에 관련된 투자자나 종사자는 그리스에 대한 원망이 극에 달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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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6
  • 홍차무역, 동인도회사와 보스턴 차 사건, 홍차의 수장이 도화선이 된 미국독립전쟁
    현재 홍차를 생산하며 판매하고 있는 동인도회사는 1978년 영국 문장원에서 문장 사용 허가를 받아서 운영하고 있는 회사로 회사의 설립시기를 1978년이 아니라 동인도회사가 설립된 1600년으로 보고 그 연혁을 계승하고는 있다. 그러나 영업 분야가 홍차의 생산 및 판매에 한정되고 있는 만큼 사실상 다른 회사로 보는 것이 맞다. 이 회사에서 판매하는 제품 중에는 보스턴 티 파티(Boston Tea Party)라는 홍차의 제품이 있다. 이 홍차 제품의 경우, 보스턴 차 사건에서 차용한 이름이다. 그래서 제품의 라벨에 당시 보스턴 차 사건을 묘사한 삽화를 삽입했다. 그럼 동인도회사에서도 권장하는 홍차 제품에 나타난 보스턴 티 파티(Boston Tea Party), 거기에서 유래한 보스턴 차 사건은 어떤 사건을 말하는 것일까? 1755년에 시작된 프랑스-인디언 전쟁은 1763년 영국이 강력한 무력을 앞세워 압도적인 승리로 종결되었다. 이 전쟁의 승리를 통해 영국은 북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할 수 있었지만 그와 함께 막대한 빚더미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식민지인 입장에서는 프랑스나 아메리카 원주민 등 경쟁자들을 모두 제압하면서 본국에게 따로 의회와 자치를 요구할 수 있는 환경을 갖게 되었으며 결국 식민지 아메리카에 의회가 설립되었다. 당시 영국 정부의 부채는 세수 총액의 절반이었던 1억 3,000만 파운드로 엄청났다. 이에 1764년부터 설탕세와 1765년에는 인지세를 내게 하면서 아메리카 식민지 인들이 대거 반발했다. 그리고 대규모의 폭력 사태를 일으켰고 결국 영국은 1766년 이러한 큰 세금부과 정책을 철회했다. 아메리카 13개 주(州) 식민지들은 이 때 자신들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늘리기 위해 식민지 의회가 영국 의회에서 대표자로 입회하기를 희망했다. 또한 1770년 2월 22일에는 크리스토퍼 세이더라는 버지니아 주 출신의 소년이 세관 직원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서 같은 해, 3월 5일 보스턴에서 대규모 학살 사건이 발생하는 등 민심도 좋지 않은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한 반발을 강하게 억누르며 세금을 부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수가 부족하자 1773년 봄, 영국 의회에서는 세수를 확대하는 차원에서 홍차법을 제정하여 이를 아메리카 13개 주 식민지에도 적용하게 된다. 당시 홍차는 중국에서 네덜란드에 밀수로 팔고 영국 및 영국 식민지들에 유통되어 네덜란드의 밀수업자들이 대단한 이득을 보는 구조였다. 영국은 자국으로 수입되는 홍차에 대해 관세를 부과한 반면 네덜란드 정부는 홍차에 대한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홍차가 같은 가격에 수입된다면 관세를 물지 않는 측이 저렴해지기 때문에 식민지 밀수업자들은 네덜란드에서 홍차를 사는 것을 선호했던 것이다.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유럽의 홍차 무역에서 본국의 세금 징수를 부담하는 도중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홍차 무역에 밀리게 되면서 그로 인해 적자가 누적되고 있었다. 자국 동인도 회사가 어려움을 겪게 되자 영국 정부가 제시한 홍차법은 중국과 동인도회사, 영국 및 영국 식민지로 유통망을 형성하려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영국은 세수를 확보했고 영국시민들과 아메리카 식민지 13개 주민들은 완전히 거품이 빠진 정가에 홍차를 구매할 수 있게 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이로써 영국법을 통해 동인도 회사가 직접 아메리카 식민지에 홍차를 납품하게 되었고, 이러한 덕택에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은 기존 홍차 가격의 절반으로 홍차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그로 인해 당시 아메리카 식민지 인들은 이 법안에 큰 불만이 없었다. 그런데 정작 불만을 가진 이들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홍차 소비자들이 아니라 아메리카 식민지의 홍차를 네덜란드를 통해 밀수하던 상인들이었다. 당시 홍차 밀수꾼들은 밀수입을 통해 세금을 내지 않았고 이를 통한 부를 지속적으로 축적하고 있었다. 그런데 홍차법이 통과가 되어 자신들의 수입이 끊어지게 되자 이들의 불만이 폭발했고 홍차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영국 정부에 불만을 품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지식인들과 결탁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아메리카 대륙의 여러 영국 식민지들에는 각각의 총독들이 파견되었고 각 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들은 독자적인 정부와 의회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들 아메리카 식민지들을 통솔할 영국 정부는 대서양 건너편 멀리 있었기 때문에 각각의 식민지들은 서로 다른 나라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영국령 아메리카 13개 주의 경우, 영국의 다른 식민지들보다 자율성을 더욱 부여받았다. 그 이유는 청교도들이 중심이 된 메이플라워호의 출항 이후, 아메리카 대륙은 영국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에 의해 개척되었고 그들 중에서 후발주자로 들어온 이민자들 중, 귀족이나 의회 상, 하원 의원급 되는 상류층들도 대거 들어왔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입장에 있었기에 영국에서 정책을 제정하고 실행할 때 각 식민지 총독들과 협의 끝에 결정되었는데, 아메리카 13개 주 식민지만큼은 달랐다. 이들은 총독이 아닌 영국의회로 직접 건너가 대표단이 참가해서 의사결정을 했을 정도였고 의회에서의 결정문을 직접 가지고 13개 주에 돌아와 포고문을 발표했다. 게다가 13개 주의 영국 총독은 13개 주의 의회에서 투표로 선출했고 영국의회의 재가까지 받아 임명되는 다른 영국 식민지들과 엄청난 차이점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아메리카 13개 주의 식민지에 설탕세부터 시작한 세수 확대 법안이 아메리카 대표단의 의견을 무시하고 모두 영국 의회 독단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독단적인 사건은 직접세를 부과한다는 것에 큰 불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 자체가 아메리카 13개 주 식민지에서 그들에 부여된 자치에 대해 영국의회에서 이를 무시한 행위로 간주했기 때문에 이들과 홍차 밀무역꾼들이 서로 결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 때 등장한 인물이 훗날 미국의 2대 대통령 존 애덤스의 6촌 형이었던 사뮤엘 애덤였다. 사뮤엘은 자유의 아들들(Sons of Liberty)이라는 집단을 이끌고 행동에 나서게 되는데 이들은 1773년 12월 16일 저녁 7시. 미국 보스턴 항구에 등장하게 된다. 이 자유의 아들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이었던 모호크족 복장을 하고 있었고 홍차가 가득 실린 동인도 회사 소유의 무역선을 습격했다. 이들 자유의 아들 집단은 100여 명이 총 3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3척의 배에 탑승했고 이들은 선장과 선원을 협박해 화물칸 열쇠를 얻어냈다. 그리고 화물칸에 쌓인 342개에 달하는 상자들을 부수고 그 안에 있던 중국 홍차들을 모두 바다에 던져 버렸다. 이렇게 바다에 뿌려진 홍차의 총 가치는 9,000파운드로, 현재 원화 가치로 환산하면 16억원에 달하는 수준의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에 분노한 영국은 1774년 함대를 파견해 보스턴 항을 폐쇄하고 매사추세츠 자치정부를 해산시켰으며 자치통치에서 직접통치로 식민지배의 방향을 바꾸려는 생각을 갖게 되자 여기에 불만을 품은 아메리카 13개 주 식민지인들이 영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벌이게 된다.
    • 칼럼
    • Nova Topos
    2024-07-06
  • 조지아 서부를 장악하고 있는 아자리야인들의 역사와 아자리야 자치공화국 - 中편
    아르메니아 행정부는 1920년 7월 20일에 아자리야 지역을 조지아에게 양도했다. 그러나 당시 볼셰비키와 러시아의 요원들이 조지아에 들어와 주요 행정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일련의 사보타주와 테러 결사대를 조직하면서 오스만 제국과 관련 있는 인사들과 아르메니아 소속의 주로 소비에트에 대한 반감을 가진 자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민주주의 조지아 집행부는 소비에트 통치 하에 있었지만 아자리야인들과 자치주를 통제하기 어려웠다. 이들은 아자리야 자치주에게 소비에트로 합류를 종용했다.조지아를 소비에트가 장악하고 있는 기간 동안에, 오스만 제국의 군대가 터키 동부 지역의 아르메나아 군을 밀어내면서 1921년 3월 11일 바투미에 출현했고 15일에는 볼셰비키 조지아 군을 이끌도 기오르기 마즈냐슈빌리(Giorgi Maznyashvili) 장군이 아자리야의 군대를 이끌고 오스만 군과 3일 동안 교전을 벌였다. 바투미 지역을 잘 알고 있는 아지리야 군대는 오스만 군과 시가전을 벌이며 중심 시가지들을 완전히 장악했다. 결국 오스만 군은 흑해 해안대를 따라 사르프로 철수했다. 그리고 바투미에서는 소비에트의 직접적인 통치가 19일에 공표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19일에 소비에트-오스만 제국이 카르스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지아 서부 지역은 일명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일명 그루지야 SSR)의 관할에 들어갔고 아자리야인이 장악한 바투미도 그루지아 SSR의 일부 지역으로 합병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지도부에서는 아자리야와 기타 조지아 지역의 종교가 달라 아자리야 지역에 자치권을 줘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때 아자리야에 자치권을 내주고 조지아에게서 독립하게 한 인물이 아이러니하게도 조지아가 고향인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당시에 민족 인민위원이었고 실제로 민족 문제 관련하여 일을 많이 했던 때였다. 스탈린은 조지아 내에서 아자리야인들에 대해 특별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고 이에 상당수의 아자리야 자치정부의 인사들이 스탈린의 측근이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스탈린은 소수민족 출신의 공산주의자들을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포섭할 수 있었으며 이는 공산당의 조직 기강을 내세우기 위해서 신설된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 서기장에 선출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스탈린과 소비에트 정부는 1921년 7월 16일에 아자리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을 공표하면서 조지아와 드디어 완전히 분리시켰다. 그리고 기존의 조지아는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변모한다. 이로 인해 아자리야는 현재까지도 친러 성향이 강한 지역으로 손꼽히고 있다. 한편 국운이 완전히 쇠진한 오스만 제국은 아자리야의 혼혈 인구에서 무슬림들의 이익을 위해 아자리야에게 자치권이 부여되는 조건으로 현 터키 영내 아자리야 지역을 볼셰비키에게 양도했다. . 그와 같은 영토 양도는 소련으로 하여금 모스크바에서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흑해 항구 도시인 바투미를 자카프카스에게 완전하게 통제권이 주어지는 것을 방지하려는 목적이 있었고, 오스만 제국에서 생활하는 조지아계 무슬림들에게 공산주의 성향을 북돋아 오스만 영내에서 볼셰비키의 지령을 받아 각종 사보타주와 첩보활동을 재개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 통치 하에,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교도 공산주의 무신론 사상에 대척된다 여겨 철저히 억제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1929년 4월, 아자리야와 카프카스 산악 무슬림 마을에 거주하는 라즈인들은 강제적인 집산주의화와 종교 박해에 대항하여 여러차례 봉기했다. 이에 소련의 부대들이 동원되어 반란 진압에 나섰고 반란은 곧바로 평정되었다. 그러자 수천명의 아자리야인들은 자국 공화국 밖으로 추방되거나 소련 영내로 강제 이주되어 산산히 흩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때 메흐메트 아바시제(Мехмет Абашидзе)는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지만 스탈린의 사후, 카자흐스탄의 아자리야 공동체들의 지도자 가문으로 아바시제(Абашидзе) 가문이 선정되었다. 이후 흐루시초프 당시 해빙기를 맞이하면서 수많은 민족들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때, 아바시제(Абашидзе) 가문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고향인 조지아 서부 지역으로 돌아온다. 당시 메흐메트 아바시제가 1937년 스탈린의 명령으로 총살된 이후, 지도층이 거의 와해된 상황이었는데 메흐메트 아바시제의 아들인 아슬란 아바시제(Aslan Abashidze)가 아자리야 공동체를 이끌게 되었다. 그는 바투미 대학에서 역사와 철학 학위를, 트빌리시 주립 대학에서 경제학 학위를 취득하면서 소비에트 체제에서 아자리야인들의 희망이 되어갔다. 이후 소련이 해체되면서 아자리야는 형식적으로 조지아에 속했으나 사실상 독립국이나 다름없었던 미승인국가가 되어 있었다. 이에 조지아에서 첫 번째 민주주의 의회가 생성되고 대통령 선거가 치뤄지며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Zviad Gamsakhurdia)가 조지아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감사후르디아는 당선되자마자 아자리야 공화국 지도자인 아슬란 아바시제(Aslan Abashidze)를 초청해 오찬을 함께 했다 한다. 이 때 감사후르디아가 아바시제에게 바랬던 것은 지역 자치의 지위를 포기하여 조지아의 영향 하에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1991년 3월 15일에 감사후르디아는 아바시제를 아자리야 최고 의회 의장으로 임명했다. 이어 감사후르디아는 손수 바투미로 날아가 아바시제를 만나 아자리야 자치권의 폐지를 제안했다. 이에 아바시제는 아바시제는 항변하여 자치권 폐지를 거부했고 감사후르디아는 트빌리시로 돌아가 아자리야인을 특히 지역 무슬림이라 부르면서 이들에 대한 탄압과 강제 진압하기 위해 전군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중앙의 조지아 당국과의 긴장이 형성되며 조지아 내전으로 촉발될 가능성이 커졌다. 감사후르디아는 조지아 민족에게 있어 좋은 지도자였을지 몰라도 압하지야, 남오세티야와 아자리야, 라즈인들에게 있어 그는 흉폭한 폭군이었다. 압하지야, 남오세티야는 감사후르디아의 조치에 즉각 반발했고 당시 체첸과 전쟁에 여념이 없던 러시아를 이 분쟁에 끌어들였다. 특히 아자리야의 아슬란 아바시제는 직접 모스크바로 날아가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을 만났다. 이 때 모스크바에서 옐친의 지원을 확약받고 러시아의 도움을 받게 되니 당시 카바르디노-발카르와 쿠반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군 700여 명이 바투미에 입항하면서 아자리야의 민병대와 합류했다. 1991년 4월 22일, 아바시제 민병대들은 조지아의 공무원들과 친조지아 의회 의원들의 즉각적인 사퇴를 요구하며 바투미 의회로 쇄도했다. 이들은 친조지아 세력들과 관료들을 아자리야 지역에서 추방했으며 감사후르디아의 조지아 군을 격파해 아자리야에서 몰아냈다. 이로써 아바시제는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아자리야를 독립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지아는 당시 심각한 내부 분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수도인 트빌리시에서는 오세티야와 압하지야의 민족 분리 운동으로 인해 소요 사태가 심각했다. 1991년 1월 5일 조지아의 국가 요인 경호대는 남오세티야의 수도 츠힌발리로 진입해서 도시를 포위하면서 중대한 위기 상황을 맞이한다. 그러자 트빌리시에서는 오세티야인과 압하지아인들의 분리 독립 시위가 발생했고 감사후르디아는 여기에 발포를 허가하자 이 시위는 폭동으로 변질되었다. 중요한 국가의 준군사 세력인 조지아 국가 요인 경비대는 친, 반 감사쿠르디아로 분열되었으며 이는 심각한 조지아의 내전(Georgian Civil War, 1991~1993)으로 촉발된다. 상황이 이쯤되니 감사후르디아는 아자리야의 사건들에 간섭할 수 없었다. 게다가 최고 소비에트 의장 대리이며 아자리야에서 조지아 정부의 최고위층 지지자인 보다르 임나제(Bodar Imnaze)가 살해됐다. 아바시제 측의 주장에 의하면, 임나제의 손에 총이 들려있었고 아바시제의 집무실에서 테러를 시도하다가 경호원의 총에 맞았다고 했다. 이를 트빌리시의 대중매체들은 임나제의 사망이 사유불명으로 간략하게 보도했을 뿐이다. 그러나 내부의 주장들에 의하면 임나제가 집무실에서 아바시제와 논쟁하던 중에 아바시제가 격분해 그를 사살했다고 한다. 결국 이는 아자리야가 조지아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독립했음 시사하게 되는 사건임이 틀림없었다. 아자리야는 바투미 항구를 끼고 조지아의 대외무역을 사실상 독점하는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조지아 내전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조지아는 아자리야의 사실상 독립을 막을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아자리야는 표면상으로는 조지아에 속해있었지만 사실상 조지아의 지배를 전혀 받지않는 독립적인 위치에 있게 되었다. 아자리야 공화국은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1997년 10월 24일에, 아자리야는 유럽 지역 의회(AER)의 완전환 회원이 되면서 정식 국가로 서서히 발돋움하기 시작한다. 아자리야 지도부는 조지아 중앙 당국의 예산 확충을 위해 세금 내는 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아바시제에게는 문화, 바투비 해항, 다른 전략적인 대상들에 전체적인 통제권을 갖고 있었고 게다가 그 배후에는 러시아가 있었기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바시제는 자신을 위한 무장 부대를 만들어 아자리야 국방부를 따로 설립했고 조지아 국방부 소속의 바투미 해군기지 25번째 여단의 모든 통제권을 장악했다. 이에 조지아 정부는 바투미 기지의 러시아 군대의 부대가 아바시제의 독재를 위한 세력 기반이라 주장했고 아바시제의 친러시아 행보를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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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4
  • 조지아 내 내제된 사회 갈등과 양극화
    최근 조지아 의회가 언론과 시민 사회 억압에 대한 국내, 국외의 우려와 반발에도 ‘외국 대리인 법안’을 최종적으로 통과시켰다. 반러 감정을 가진 시민들은 대리인 법안 통과에 반발해 대규모 시위를 열었고, 이에 미국 등 국제사회는 여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제재를 가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법안에 따르면 해외에서 전체 예산의 20% 이상 자금 지원을 받는 언론 매체나 비정부기구인 NGO 단체들은 외국의 영향을 받는 대행기관으로 등록해야 한다. 이에 등록하지 않은 단체나 개인은 벌금과 최대 5년 이하 징역에 처해질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조지아라는 나라 자체가 다수의 NGO들이 결집해 세워진 국가이기 때문이다. 조지아의 언론 및 NGO 시민 사회 단체의 상당수는 미국과 유럽 등의 자금 지원을 받는 단체들이 많다. 이에 시민단체가 조지아 정부의 엄격한 규제에 노출되어 민주주의가 훼손될 것을 우려하여 강하게 반대해왔다. 특히 이와 같은 법안은 2012년에 제정되어 언론과 NGO, 반정부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엄격하게 규제된 러시아의 외국 대리인 법과 비슷하다 여겨 이를 ‘러시아법’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와 러시아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럼에도 이 법 자체가 러시아와 비슷하다 하여 '러시아 법'이라 이름 짓고 이를 비난한 것이다. 특히 조지아의 야당 의원들은 조지아를 친러시아 국가로 만들려는 시도라고 비판하고 있다. 조지아는 그 동안 EU와 나토 가입을 추진해왔으나, 친서방 대 친러시아 노선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과 사회적 갈등이 지속되어 왔다. 여당인 "조지아의 꿈" 정당이 집권하기 이전까지 조지아는 친서방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미국과 나토, 그리고 EU의 영향력을 러시아 국경과 인접된 남부 카프카스 지역으로 확장시켰다. 이에 안보 위협을 느낀 러시아가 남부 카프카스 지역의 갈등 문제에 개입하면서 자신들의 세력권을 구축했다. 러시아 입장에서 소련이 해체된 이후, 카프카스 지역의 저항 세력들은 큰 문제가 되었었기 때문이다. 나토와 EU가 카프카스에 진출하면 90년대 체첸 전쟁과 같은 내전이 또 다시 촉발될 가능성이 높았고 그로 인해 러시아의 안보가 매우 위태로울 수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의 지정학적 전략은 조지아 북부지역인 남오세티아와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 및 돈바스 일대에 대한 통제가 진행되면서 어느 정도 일단락되긴 했다. 조지아와 우크라이나는 지난 2017년 7월 18일 페트로 포로센코(Петр Порошенко)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조지아를 공식 방문함을 계기로 양국 관계를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한 바 있다. 그러나 기오르기 크비리카슈빌리(Giorgi Kvirikashvili) 총리 이후, 이라클리 가리바슈빌리(Irakli Garibashvili)가 2021년에 정권을 이양 받은 이후, 갑작스럽게 친러성향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 때 가리바슈빌리를 지원하고 지지한 세력은 이미 조지아에서 상당수의 재력을 확보한 친러계열의 유태계와 친러 성향의 지지자들, 그리고 바투미를 기반으로한 아자리야계 조지아인들이었다. 이들은 친러 성향을 갖고 있으며 특히 아자리야인들은 바투미를 중심으로 자치공화국을 형성하고 있을 정도로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이 아자리야인들은 조지아계 무슬림들을 대표하는 민족으로 오스만 제국 지배 시기인 16세기부터 17세기 무렵 사이 대부분 이슬람교 하나피파로 개종한 자들이다. 20세기 초 아제르바이잔 바쿠의 유전이 개발되고 생산될 석유를 운반할 송유시설 및 철도가 바투미를 거쳐 건설되면서 아자리야 지역의 중요성이 증대되었다. 게다가 흑해 연안을 쥐고 있는 아자리야인들의 영향력은 무시 못할 수준인 것이 조지아의 유일한 항구이자 바다로의 출구가 아자리야 자치공화국의 수도인 바투미 때문이다. 그래서 조지아의 사회적 갈등은 친러, 반러의 갈등이 곧 동부와 서부라는 지역적 갈등이 내포되어 있다. 조지아 서부는 아자리야인들을 중심으로 압하지야까지 흑해 일대가 연결되어 있고 아자리야인과 압하지야인들은 상호 연대까지 하고 있다. 반면 조지아 동부 지역은 수도인 트빌리시를 중심으로 반러시아의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사진에 나와 있는 온갖 욕설의 러시아 비난과 푸틴에 대한 비난 등의 그레피티가 쓰여 있는 것은 반러 성향의 시민들의 목소리, 그리고 이를 독려하는 친우크라이나 성향의 시민 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난민들, 이어 우크라이나 네오나치인 아조프 연대와 연합한 조지아의 네오나치들이 중심이 되고 있다. 이들은 나치 독일의 제2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의 깃발과 유사한 아조프 연대의 깃발 표식을 그레피티로 새겨 놓고 대놓고 나치와 연대하고 있음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들은 대놓고 서부 지역의 아자리야인과 친러 성향을 조지아인들을 상대로 테러를 저질렀지만 친러 성향의 조지아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총선에서 이라클리 가리바슈빌리(Irakli Garibashvili)를 당선시키면서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리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인 2022년 2월 25일 이라클리 가리바쉬빌리(Irakli Garibashvili) 조지아 총리는 조지아가 서방의 대(對)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가리비쉬빌리 총리는 2023년 5월 24일 카타르 경제 포럼(Qatar Economic Forum)에서 이와 같은 조지아 정부의 입장을 재확인하게 된다. 이어 2023년 8월 23일 러시아 국가안보위원회 부의장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Дмитрий Медведев)는 조지아가 나토 가입을 추진한다면 러시아는 조지아 내 미승인국인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South Ossetia)를 합병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10월 5일에는 아슬란 브자니아(Аслан Бжания) 압하지야 대통령이 러시아와 압하지야의 방어 역량 증대를 목적으로 압하지야 영토 내에 해군 기지를 건설한다는 내용의 합의서에 서명했다. 이후 우크라이나 정부 2023년 7월 5일 재임 당시 권력 남용 혐의로 조지아에 수감 중인 전 조지아 대통령이자 우크라이나 오데사(Odesa) 주지사인 미헤일 사카슈빌리(Mikheil Saakashvili)의 건강 상태가 악화된 것을 두고 인권 탄압이라 비판하면서 우크라이나와의 관계도 멀어지게 되었다. 결국 친러어와 반러의 단순한 대립구도가 지역 대립, 민족 대립으로까지 촉발되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다. 조지아 서부 지역에는 아자리야인 말고도 라즈(Laz)인이 살고 있다. 이들 또한 아자리야인과 같은 무슬림들이고 친러 성향을 갖고 있다. 게다가 이들이 터키에 살고 있으면 조지아계 터키인이고 조지아에 살고 있으면 터키계 조지아인이라 볼 수 있다. 현 터키 대통령인 레제프 에르도안이 라즈인 혈통으로 조지아계 터키인이다. 실제로 에르도안은 인터뷰로 자신의 가문이 조상대에 조지아 바투미에서 터키 리제로 건너온 조지아인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 영향으로 인해 라즈인들은 터키 정부의 상당한 지원까지 받고 있다. 라즈인과 아자리야인으로 대표되는 조지아 서부인들은 리버럴적이 성격을 갖고 있는 조지아 동부 정교회인들과 문화적 차이도 크다. 바투미를 중심으로 한 아자리야 자치공화국도 무슬림과 정교회라는 종교적 차이 때문에 인정해준 것이다. 이처럼 조지아에는 민족계파만 해도 94개가 자리 잡고 있는 나라다. 대한민국의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합친 크기에 불과한 작은 나라지만 이 작은 나라에 90개가 넘는 민족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민족 간의 통합은 조지아의 또 다른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어쩌고 보면 무슬림과 정교회, 유태교까지 이어지는 종교적 대립도 한 몫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 입장에서 조지아를 굳이 군사적으로 공격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지아가 반러 성향의 인물이 총리로 당선되어 반러 세력이 세력의 주동이 된다면 바투미를 중심으로 아자리야 자치공화국을 정식 독립국가로 승인하면 된다. 러시아가 아자리야와 라즈인을 지원하고 조지아 동부의 반러 세력이 라즈인을 학대한다면 터키가 이 문제에 개입할 여지가 생기게 된다. 러시아 하나 막는 것도 버거운데 터키마저 개입을 한다면 조지아는 공중분해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앞서 말한 것처럼 조지아의 사회 갈등은 곧 친러 vs 반러, 동부 vs 서부의 지역갈등, 이슬람 vs 정교 & 유태의 종교갈등, 아자리야 & 라즈 vs 조지아의 민족갈등까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 미국과 집단서방이 장미혁명처럼 색깔혁명을 조장한다면 우크라이나와는 전혀 다른 제2차 조지아 내전이 발발할 가능성이 크다. 2023년 9월 18일 전(前) 조지아 내무부 차관으로 현재 우크라이나군 SBU 부국장인 기오르기 로르키파니제(Giorgi Lorkipanidze) 등이 조지아 내에서 반정부 시위를 조직, 현 정부를 전복하려는 계획이 탄로나면서 제2차 조지아 내전은 언제든 발생 가능한 상황에 있다. 그리고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사뭇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여진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도 연결되어 있기에, 조지아 내 사회갈등을 유심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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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4
  • 삼성전자가 우크라이나에서 판매되는 폴더블 스마트폰 갤럭시Z 제품명에서 'Z'를 삭제한 사건
    삼성전자가 우크라이나에서 판매되는 폴더블 스마트폰 갤럭시Z 제품명에서 'Z'를 삭제했다 한다. 앞서 반(反) 러시아 성향이 강한 발트3국에 이어 우크라이나까지 해당 조치를 확대했다. 삼성전자는 이날 우크라이나 홈페이지에서 판매되는 '갤럭시Z' 시리즈 제품명을 수정했다. '갤럭시Z폴드3'는 '갤럭시폴드3'로, '갤럭시Z플립3'는 '갤럭시플립3'로 변경됐다. 러시아 국방부는 일일 브리핑과 더불어 Z를 매개로 한 사진과 영상을 몇 개씩 선보이고 있다. 진격 명령을 내린 푸틴 대통령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상징하기도 한다. 반대로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발트해 연안, 동유럽 일대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히틀러 시대의 나치 문양인 '하켄크로이츠'와 유사하게 '공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50년 역사를 지닌 스위스의 '취리히 보험회사'가 그동안 사용해온 Z로고 사용을 포기했다. 파란색 바탕에 흰색 Z를 로고로 사용해온 스위스 취리히 보험은 SNS를 통해 Z로고를 사용할 경우 오해의 소지가 있어 당분간 사용을 금지하기로 했다고 언급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지난 3월 초 러시아 군사 장비에 Z와 V자를 쓴 이유를 공식 인스타그램을 통해 설명했다. Z는 '승리를 위해'라는 의미로, 또 다른 문자 V는 '진실의 힘' (Сила в правде)과 '과업 완수'(Задача будет выполнена)를 뜻한다는 것이다. Z는 러시아어로 '승리를 위해', V는 영어로 '승리'(Victory)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Z문양은 금기시된 '나치' 문양과 유사하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특히 독일과 그 주변에서 예민하게 반응했다. 독일은 영화와 고증 등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나치즘을 선전하거나 광고하기 위해 나치 문양인 하켄크로이츠를 사용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독일의 북부 니더작센 주와 남부 바이에른 주는 Z표시를 자동차나 건물에 사용할 경우 최고 징역형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발트해 에스토니아 정부도 Z표시 사용을 경범죄로 분류하고 있다. 체코도 Z를 공개적인 장소에서 사용할 때 법적 처벌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우크라이나에서는 프라비섹토르나 아조프 대대가 나치 문양을 하고 다니는 사진들이나 영상에는 조용히 있으면서 Z문양에만 유독 나치와 똑같이 반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욱일기도 올림픽이나 월드컵에 들고 나왔어도 비판 한 마디도 못하는 자들이 Z표시를 가지고 PTSD 발작을 하고 있다. 그럴꺼면 영어 알파벳에서 Z를 아예 빼버리던가. Z가 전범의 상징이고 러시아 군사작전의 상징이니 영미권 국가들도 Z들어가는 용어를 쓰지 않으면 된다. 라틴 문자에서 Z가 들어가는 단어가 적어도 수천만개? 수억개? 정도 될텐데 그게 트리거가 될 정도면 Z들어가는 문구 모두 바꾸는 글자혁명을 해야 할 판이다. 그리고 Z 문자가 들어가는 나라 또한 14개가 있는데 이들도 나라 이름 바꿔야 할 판이다. 특히 체코는 Z를 공개적인 장소에서 사용할 때 법적 처벌 방안을 검토한다 했으니 그럼 체코 공화국 영문 이름인 Czechia 이거의 Z를 없애던지 영문을 바꾸고 그런 검토를 해야 이치에 맞지 않을까? Z 표시가 들어가 있는 모든 브랜드와 옷도 바꾸고 도시 이름도 Z가 들어가 있으면 바꿔야할듯 하다. 나치만큼 제2차 세계대전의 대학살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현재도 진행 중인 전쟁을 두고 아주 별의 별 짓을 다하고 있다. 그럼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파괴한 전범국 미국 USA의 U도 못 쓰도록 바꿔버리자고 하면 거기에는 침묵하는 자들이다. 이제는 어이 없는 것도 모자라 유치하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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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3
  • 6년 전, 2017년 4월 3일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 테러 사건의 데자뷰
    2017년 4월 3일 오후 2시 30분, 나는 당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었다. 네브스끼 인근 폰탄카 운하 쪽이었고 당시 그 근처 센노이 시장(Сенной Рынок)에서 드미트리와 부식거리를 사고 있었는데 지하철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해 최소 14명이 사망하였다는 속보가 들려왔다. 당시 러시아 언론들에 의하면, 전철역 2곳에서 폭발이 일어나 최소 14명이 숨졌고, 64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알려졌다. 당국은 해당 전철역을 폐쇄조치 하였으며, 폭발사고가 IS의 테러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지부 내 소식통은 테러범들이 테러에 최대한 적합한 시간대를 선택했다고 한다. 타스통신에 의하면 사고 당시 지하철 내에는 사람이 많았지만, 객차가 만원인 시간대는 아니었다고 했다.객차 안에 사람이 너무 많으면 폭발물 부근의 몇 명이 폭탄의 위력과 파편을 온몸으로 받게 됨으로써 희생자 수는 오히려 줄어들기 때문이라 했다. 당시 조사 결과, 지하철 테러의 폭발물이 철제, 유리 파편으로 가득 찬 소화기와 쇠구슬을 잔뜩 담은 사제 폭탄 가방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전방위로 날아든 파편 때문에 전철에 탑승한 수십 명이 죽거나 다쳤고 전철 유리창이 깨지고 출입문도 찌그러졌다. 중앙아시아 출신의 20대 남성이 저지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폭발 현장에 대한 조사를 통해 ‘자폭 테러’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파악됐다고 한다. 이날 폭발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한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과의 회담을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한 가운데 일어났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언론에 알리지 않은 채 폭발 현장을 찾아 헌화하기도 했다. 당시 지하철 폭발 사건은 지난 2010년 모스크바 지하철 테러에 이어 7년 만에 발생한 것이다. 2010년 3월 29일 오전 출근 시간에 모스크바 시내 지하철역 2곳에서 시차를 두고 연쇄 폭발이 일어나 41명이 숨지고 80여 명이 다친 바 있다. 앞서 2004년에는 2월과 8월에 각각 모스크바 지하철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람잔 카디로프 체첸 대통령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테러를 포함한 모든 가설을 점검 중”이라는 푸틴 대통령의 발언과 사진을 올린 후 “이 끔찍한 테러의 주모자와 배후를 밝혀내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했다. 다른 러시아 정치인들은 신중한 태도를 취하면서 폭탄 테러의 희생자 유가족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하는 정도로 반응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우리 모두의 아픔”이라고 썼다. 게오르기 폴타프첸코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지사는 이번 사건을 “무시무시한 비극”이라 지칭하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에게 경각심을 갖고 신중하게 대응할 것을 부탁했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 전 구간이 폐쇄된 상황이기 때문에 시내는 최악의 교통대란을 겪었다. 시당국은 지상 대중교통을 모두 무료로 개방했고 택시 기사들도 퇴근길 시내 중심가에서 탑승한 승객에게는 요금을 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통대란이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집으로’라는 해시태그를 부착하고 카풀을 제공하는 자차 운전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인터넷에도 퇴근길 카풀이 가능한 시간과 행선지 정보를 제공하는 게시판이 생겨났다. 게시판을 방문한 누군가는 “어려울 때일수록 뭉쳐야 한다”고 썼었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는 3일 간의 공식 추도일을 선포했다. 시민들은 애도의 뜻을 표하기 위해 테러가 발생한 ‘Технологический институт (체흐놀로기쩨스끼 인스띠뚜뜨)’역에 줄을 이어 꽃을 가져다 놓았다. 모스크바에서는 크레믈린 벽 무명용사의 묘에 설치된 대조국전쟁 참전도시 기념비 중 ‘영웅도시 레닌그라드’ 기념비 앞에 헌화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그 중 한 명은 타스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대조국 전쟁 중 872일 동안 독일군의 봉쇄를 견뎌낸 영웅도시 레닌그라드 기념비는 희생자들에 대한 연대의식을 표시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모스크바 축구클럽 ‘스타르타크’ 팬들도 평소에는 ‘앙숙’이자 라이벌이었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대한 연대감을 표했었다. ‘오렌부르크’팀과의 경기에서 스파르타크 팬들은 관객석에서 ‘크나큰 아픔에 가슴이 찢어진다. 피테르(페테르부르크의 애칭), 애도를 표한다’고 쓰인 대형 현수막을 펼치기도 했을 정도였다. 당시 러시아 국민들은 테러에 맞서 하나가 되었다. IS의 테러가 오히려 러시아 국민들을 단합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카페에서 다시 한 번 테러 공격이 발생했다. 200g 이상의 강력한 TNT가 터져 건물 유리가 모두 깨졌고 집기들은 처참하게 부서졌다. 이 날 러시아 유명 군사 블로거인 블라드랜 타타르스키가 사망하고 25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카페에서는 사망한 군사 블로거와 독자들의 만남이 진행되고 있었고, 한 여성이 조각상을 증정한 뒤 폭발이 발생해 조각상에 폭발물이 들어있었던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사망자는 닉네임 '블라드랜 타타르스키'로 알려진 유명 군사 블로거로,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출신이며 실제 이름은 막심 포민이며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를 지지하고 있는 블로거다. 그는 56만 명의 구독자를 가졌으며 러시아군의 인사나 작전 등에 대한 논평을 썼던 인물이다. 타타르스키와의 만남 행사를 주최한 곳은 러시아의 한 애국 단체로, 이들은 보안 절차가 있었는데도 폭발물이 반입됐다고 하였다. 부상자 25명 중 19명은 병원으로 이송됐고, 러시아 국가수사위원회는 타타르스키의 사망을 살인 사건으로 규정하고 조사에 착수했으며 폭발 당시 카페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을 상대로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유력한 용의자는 서부 우크라이나 이바노 프랑키스크 출신의 여성으로 아주 작정하고 테러를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6년 전, 오늘과 데자뷰다. 다만 테러의 주체가 IS에서 우크라이나 네오나치로 바꼈을 뿐이다. 우크라이나가 몰리게 되니 러시아에 우크라이나 난민으로 위장해 들어온 젤렌스키 정부 소속의 네오나치 테러리스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진다. 정식으로 싸우는 전쟁도 아닌 테러라면 더더욱 용납할 수 없는 범죄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테러 지원국에서 한 단계 격상해 테러 국가로 규정하고 국가 자체를 소멸시켜 테러를 일으킨 자들을 박멸해야 한다. 러시아 국민들도 이 테러에 분개하고 있다. 전쟁에 서서히 염증이 드리워질 때쯤 다시 국민들이 단합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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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3
  • 소말리아 내전과 영화 "모가디슈", 테러 단체 알 샤바브(al-Shabaab)의 역사
    영화 "모가디슈"가 흥행에 성공했다. 영화 "모가디슈" 성공 스토리들이 들리면서 소말리아 내전에 관한 관심이 재조명되고 있다. 더불어 아프가니스탄 전쟁도 종료가 되었고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에 전 세계에 주목하고 있음에 따라 그와 닮은 꼴인 소말리아 내전은 아직도 현재진행 중이라 이곳 내전에 대한 관심이 높은 편이다. 오늘은 영화 "모가디슈"의 배경인 소말리아 내전에 대해 언급해보고자 한다. 작년 초, 소말리아 내전과 동아프리카 지역에 이슬람교의 포교 현황, 그리고 그 유래와 중동과의 중세 시대 관계사 등을 연구하면서 이슬람 제국의 일부이자 대표적인 해상 향신료 루트의 일원으로 자리잡았던 곳이기 때문에 나의 관심이 매우 높았던 지역이다. 소말리아는 수십 년째 발생하고 있는 내전의 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내전 진압의 대표적인 실패한 국가이자 사례로 꼽히고 있다. 이어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의 대표적인 사례로 불리고 있기도 하다. 소말리아 내전이 장기화된 이유는 1991년 내전이 시작된 이래 무장 군벌들이 국가권력을 둘러싸고 투쟁을 지속적으로 벌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말리아 분쟁의 시초는 모하메드 시아드 바레(Mohamed Siad Barre) 정권의 부족들 간의 차별을 부추긴 정치로 인한 반발이었다. 모하메드 시아드 바레(1919~1995, محمد سياد بري)는 1969년부터 1991년까지 집권한 소말리아 민주 공화국의 군부 독재자이자, 대통령이었다. 소말리아가 독립한 1960년, 소말리아는 아프리카에서 민주주의의 모델로 서방 세계에서 극구 칭찬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족벌주의와 가문 간 증가된 충성, 그리고 충돌은 사회적 문제였다.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한 모하메드 시아드 바레 대통령의 사회주의 군사 정권은 자신의 출생 부족에게만 권력을 집중시켰고, 다른 부족들은 정치에서 배제되었다. 결국 1991년 1월, 불만을 가진 소말리아 내 타 정치세력들은 소말리아 연합회의(The United Somali Congress ; USC)를 결성하여 바레 대통령을 축출하고 소말리아 군대를 해체하게 된다. 바레 정권은 민간 정부를 근절하다 결국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씨족만을 중시하는 씨족주의와 가문내의 증가된 충성으로 인하여 다른 씨족끼리 충돌하는 사회적 문제가 존재했다. 이러한 문제를 민간정부는 근절하는데 실패했으며, 결국 정부는 씨족주의 문제에 스스로 항복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쿠데타 직후 USC 내부에서 양대 군벌 간의 대결구도들이 형성되었다. 정권 쟁탈을 위한 부족 간의 대립은 심각하게 격화되었고, 소말리아는 내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으로 인해 1991년 5월 소말릴란드 공화국은 옛 영국령 소말릴란드 지역을 중심으로 소말리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1960년 6월 26일 영국령 소말릴란드는 5일 후인 7월 1일에 독립하는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와 연합할 계획으로 영국으로부터 잠깐 독립했고,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가 독립하면서 소말리아로 합쳐졌다. 하지만 하르게이사를 비롯한 전 영국령 소말릴란드 지역은 모가디슈를 비롯한 소말리아 남부에 비해 정치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소외되어 둘 사이 갈등이 빚어졌다. 1992년 유엔평화유지군(United Nations Operation in Somalia, UNOSOM)이 파견되어 희망 회복작전(Hope recovery operation)을 펼쳤지만, 이러한 작전을 주도했던 미군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1994년 미국과 유엔평화유지군은 결과적으로 임무 실패(Mission failed)인 상태로 철수하게 된다. 2004년 1월 유엔의 지지 아래에서 주요 분파의 지도자들이 과도연방정부(Transitional Federal Government, TFG) 구성과 선거 개최에 합의하면서 전망은 밝아지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이슬람 민병대인 이슬람 법정연합(Islamic Courts Union, ICU)이 등장하면서 다시 대립구도가 형성되었다. 이에 2006년 7월 에티오피아는 국경 안보를 명목으로 소말리아 문제에 개입하였다. 소말리아 과도정부 수상인 알리 무함마드 게디(Ali Mohamed Gedi)는 2007년 1월 2일 “소말리아 내에서 이슬람 법정연합(UIC)의 세력을 쫓아냈으며, 앞으로 소규모의 전투가 발생할 수도 있지만 이 또한 제압할 것”이라고 밝혔다. 소말리아 과도정부와 함께 이 전쟁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에티오피아 군이 소말리아 전역을 점령함으로써 2주간의 짧은 일방적 공격은 끝이 났다. 소말리아 및 에티오피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국가인 지부티에 대규모의 미군기지가 있고 이 미군기지의 주요한 임무 중에 하나는 에티오피아 군대를 대상으로 군사작전훈련, 전문군사교육, 군사훈련 관리, 반(反) 테러작전, 군 의료 지원 훈련들이다. 이로 인하여 에티오피아 정부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게 되었고, 미국의 군사지원 하에 있던 에티오피아 정부는 미국에 의한 전 세계적 반(反) 테러전쟁을 충실히 따르는 아프리카 내에서의 미국 군사전략 정부였다. 하지만 ICU는 여러 단체로 흩어져 과도 연방정부에 대한 게릴라식 투쟁을 계속하였고, 이후 폭력적 극단주의 세력인 알 샤바브(al-Shabaab)가 결성되어 그곳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청년전사운동( حركة الشباب المجاهدين‎)이라 불리며 소말리아의 테러 무장단체로 성장했다. 이들을 보통 알 샤바브(الشباب‎)로 알려져 있다. 소말리아는 1991년 당시 대통령 시아드 바레 축출 이후, 20여 년간 내전을 치러왔다. 이 과정에서 이슬람 세계의 질서 회복을 가치로 두고 이슬람법정연합(ICU)이 출범하였다. 알 샤바브는 이 단체에 뿌리를 둔다. 알 샤바브는 2010년 7월 11일 우간다 캄팔라에서 벌어진 자살 폭탄 연쇄 테러의 배후로 알려져 있다. 이에 2007년부터 현재까지 소말리아의 안정과 평화 회복을 위해 2만여 명의 아프리카 연합 평화 유지군(African Union Mission to Somalia, AMISOM)이 평화작전을 전개하고 있다. 오랜 기간 동안 내전을 치루었기 때문에 소말리아 연방 정부는 국토 전역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해갔고, 치안 회복을 위해 자치권을 요구하는 5개의 주(州) 정부와도 마찰을 일으키는 등, 긴장 관계를 이어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2015년에 들어서는 소말리아의 무정부 상태를 이용하여 폭력적인 극단주의 세력인 IS 소말리아지부(ISS), 알 샤바브 등이 소말리아에 침투해 내전을 조장함으로써 소말리아 내전 종식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특히 알 샤바브는 소말리아 과도정부, 유엔평화유지군, 유엔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이념적으로는 극단적인 이슬람 경전 해석을 따라간다. 따라서 음악 금지, 국가 형벌에 신체 절단 형과 투석형의 포함을 요구하고 있다. 소말리아 중남부에 세력을 두고 있는 알 샤바브는 모가디슈에서 정부군과 매일 전투를 벌였다. 알 카에다는 알 샤바브를 지원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자행된 1998년 케냐, 탄자니아 미국 대사관 테러는 알 샤바브의 배후이자 알 카에다 최고위층인 파줄 압둘라 모하메드의 역할이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 카에다와 연계를 통해 이라크,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에서 수백 명이 이 알 샤바브에 들어가 있다. 전투 시에는 동원 가능한 전력이 3000~7000명 정도였다. 폭력적 극단주의 세력은 그들 간 영향력 경쟁을 할 뿐만 아니라 소말리아 땅 위에 이슬람국가 건설을 목표로 연방 정부 고위급 인사와 민간인에 대한 테러를 지속하고 있다. 한편 오랜 내전 속에서 어업 종사자들은 자신들의 안전과 바다를 지키기 위해 자력으로 무장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발적인 해안 경비대로 출발했지만, 소말리아 해안을 장악한 군벌들이 어민들의 해적 활동을 지원하고 사업화하면서 초국가적인 위협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태로 인해 한국의 청해부대는 2009년 3월 13일부터 아덴만에 파견되어 해적을 격퇴하고 한국 선박의 안전 호송 및 안전 항해를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소말리아 내부에서 내전을 벌이는 종족과 평화유지군에게 공동의 적으로 인식된 이슬람 무장세력 알 샤바브(Al-Shabaab)는 2006년~2009년에 두 번째 내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등장한 무장단체로 이슬람 법정연합(Union of Islamic Courts, UIC)의 하부 청년조직에서부터 시작한 단체였다. 알 샤바브는 2006년에 분파를 선언한 이후부터 청년(Youth)이라는 뜻의 조직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UIC와 분파한 이유가 추구하는 이슬람의 교리적 이념은 서로 상이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UIC와 알 샤바브는 이슬람 신정국가 건설의 목표가 같았지만 UIC는 비교적인 온건적인인 입장이었고 알 샤바브는 급진적이고 이슬람의 근본주의적 교리를 따르면서 IS나 탈레반과 같이 폭력적인 성향을 갖추고 있었다. 결국 UIC와 분리를 선언한 알 샤바브는 예멘과 가까운 지역인 “아프리카의 뿔”과 가까운 곳에 정착하여 반(反) 정부 활동을 펼쳤다. 2009년 소말리아 과도연방정부(Transitional Federal Government, TFG)의 지도자가 UIC의 온건 세력 출신의 지도부에서 선출되자 알 샤바브는 세속적인 지도자를 선출했다고 이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 알 샤바브는 TFG를 적으로 간주하고 TFG 정부를 멸망시키기 위해 수도인 모가디슈를 습격함으로써 전면적인 공격을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2009년 2월에는 또 다른 이슬람 반란 세력인 히즈불 이슬람(Hizbul Islam)도 새로운 연립정부와 AMISOM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게 되면서 같은 해 6월, 소말리아 과도정부인 TFG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기에 이른다. 2010년 알 샤바브가 아프리카 연합군의 동원을 주도한 것에 대한 복수전으로 2010년 7월,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를 공격하면서 알 샤바브와의 전투 범위는 주변국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아프리카 연합은 알 샤바브에 대해 선제공격을 허가할 것에 합의하고, 더 많은 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이 때 증원된 AMISOM의 군대는 8,000명에 달했고, 이에 대항하여 2010년 8월 알 샤바브는 모가디슈에서 또 다시 정부와 AMISOM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로 인해 알 샤바브와 정부군 및 AMISOM의 분쟁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북부지역인 푼틀랜드 주(州), 중부 갈무두그 주(州), 그리고 키스마요(Kismayo)가 있는 남부 지역에서도 지속적인 교전이 발생했다. 알 샤바브의 공격으로 인해 AMISOM 병력의 피해가 지속되자, 2011년 이래 AMISOM은 소말리아 정부군과 함께 알 샤바브를 집중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2011년 1만 4천 명에 이르던 알 샤바브 조직원들은 2012년 무렵에는 지속적인 소탕전으로 인해 대거 희생되어 7~9천 명으로 줄어들었다. 한편 수세에 몰린 알 샤바브는 2012년 2월 범세계적인 테러 활동에 대해 충성을 맹세하면서 알카에다(Al-Qaeda)와 동맹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2012년 9월 AMISOM과 소말리아 정부군이 알 샤바브의 중요한 거점인 키스마요(Kismayo)를 탈환하는 것에 성공했으며 2014년 9월 미군의 무인기 공격으로 인해 알 샤바브 지도자 아흐메드 고단(Ahmed A. Godane)이 전사했다. 알 샤바브는 극심한 지도부의 내분을 겪으며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알 사뱌브는 여전히 소말리아 국토의 30% 가량을 통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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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1
  •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주재의 우리 기업과 주재원 이야기
    바이든 대통령이 서방의 우방국들과 함께 고강도의 러시아 무역 제재를 승인한 터라, 러시아에 진출한 기업들이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현재 국내 대기업이 러시아에 설립한 해외법인은 53개로 파악됐다. 러시아에 설립된 해외 계열사 중에서 현대자동차 그룹이 18곳으로 가장 많았다. 그 뒤를 삼성과 롯데가 각 9곳이었다. SK와 CJ, 두산, KT&G 등은 각각 2개 법인을 러시아에 세워둔 것으로 조사되었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우리 기업 13개에 주재원 43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러시아에 존재하는 법인 기업 53개라면 우크라이나는 13개 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우크라이나에 세워진 법인보다 41곳 많은 숫자다. 단순 계열사 진출 현황 숫자만 놓고 보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보다 4배 이상 많았다. 그만큼 국내 대기업들이 우크라이나 보다 러시아 시장을 더 주목하고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룹별로 살펴보면 현대자동차 그룹이 18곳 (34%)으로 최다였다. 러시아에 배치한 해외 계열사 3곳 중 1곳꼴로 현대자동차 그룹이 압도적이었다. 현대자동차가 러시아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놓고 있었는지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러시아에 진출한 국내 대기업 해외 법인의 경우 향후 미국과 동맹국, 유럽 등이 러시아를 대상으로 고강도 금융 및 경제제재 등이 본격 진행되면 공장가동 중단 등 직접적 경제 타격을 볼 가능성이 높다. 특히 이 전쟁이 장기전으로 접어들 경우 석유와 천연가스 등의 수급이 불안정해져 국내 기업들도 산업분야 곳곳에서 경제적 손실이 불가피할 것은 불문가지다. 사세가 이와 같은데 국회 외교통일위원회가 4월 11일 오후 5시에 젤렌스키 대통령이 화상 연설을 진행하는 방안을 우크라이나 측에 제안했다 한다. 우리가 우크라이나로부터 제안을 받은게 아니라 제안을 했다는 것이 팩트다. 기업, 유학생, 각 코트라 주재원들, 교민들, 일반 비즈니스맨들과 각 학계의 연구자들, 그리고 15만 명 가까이 되는 고려인들까지 한러 수교 30년 동안 공들여 쌓아왔던 러시아와의 관계는 일본처럼 파탄나기 직전까지 몰고 가고 있다. 야뽄스끼 모레 (일본해)와 다케시마라고 표기까지 해놓은 친일국가에 북한 ICBM 미사일 엔진 기술까지 전수하여 우리의 안보까지 위협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수장에게 화상 연설을 시키겠다니, 진짜 미쳤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그렇지 않아도 비우호국가로 찍혀 러시아의 강력 제재를 받으며 우리 기업과 교민들이 러시아 정부로부터 불이익을 당하거나 러시아로부터 제대로 된 차단을 당할 수 있는 명분을 주고 있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교민 수가 400명이 안되지만 러시아에는 3,500명의 교민들이 산다. 숫자에서 우선 비교가 안 되고 기사 말미에 12,000명 가까이 되는 고려인 동포 중 1000여 명이 고향을 떠나 주변국으로 피신 중이라 써놨는데 러시아는 15만 명이 산다. 숫자에서 상대가 안 되는데 이렇게까지 러시아를 자극하는 이유는 뭐냐? 우리의 한, 미, 일 공조가 영원할꺼라고 생각하는 감성적인 사고는 버리는게 좋다. 국제적인 이득에 따라서 언제든지 합종연횡(合從連衡)이 가능한게 국제 관계의 진리다. 그 관계는 한, 미, 일도 다르지 않다. 외통위는 이런 문제보다 동북아시아 문제나 좀 신경써야 한다. 감정적으로 안타까워 하는거와 실전에서의 국제 관계 문제는 전혀 다른 얘기다. 아직 조율 중이라니까 하는 얘긴데 우크라이나는 9,000km나 떨어져 있고 러시아는 동해 바다 건너 비행기로 2시간 거리다. 이번에는 좀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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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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