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2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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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그래픽이다.(그래픽=저널인뉴스)

 

아침부터 ‘부우웅~부우웅~’ 소리를 내는 전기톱 기계음이 아침의 고요함을 깨운다. 창밖을 내다보니 얼마 전 새롭게 조성한 도심 속의 꽃밭 정원에 심어놓은 나무들의 밑둥치가 잘려 나가고 있었다. 생명이 다한 나무들이었다. 잘려진 나무는 몸통과 가지로 또 다시 잘려진다. 

 

순간 공포영화의 한 장면, 살인한 후에 시신을 토막을 내어 버리는 장면이 떠올랐다. 원래대로의 자연이었다면 저런 꼴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인공적으로 옮겨 심어져 자신의 운명을 조기에 마감을 하는 슬픈 운명이었다. 인간에 의해 강제된 한 생명의 조기 사망을 목격하게 되었다.


며칠 전 정원을 걷다 보니 '생육관찰중'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나무들이 있었다. 인간으로 비유하자면 중환자실에서 보호관찰 중인 환자들이었다. 주위의 건강한 나무들은 나뭇가지에 생기가 넘쳐흐르는 푸른 잎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햇빛에 비친 푸른 잎들에서는 생명의 광채가 품어져 나온다. 

 

하지만 “생육관찰중”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나무들은 푸른 잎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잎이 모두 떨어진 앙상한 나무는 피골이 상접한 인간의 모습이었고, 푸른색을 잃어버리고 말라비틀어져 쪼그라들어 흙빛 색 잎들만 달고 있는 나무들은 잿빛 얼굴로 죽음이 임박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사람이든 나무든 한 생명체의 최후 모습은 애처롭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오늘 아침에 인부들은 그들을 제거하고 있었다. 정원을 관리하는 누군가가 그들에게 사망 판정을 내렸던 것이었다. 붕붕거리는 무겁고 둔탁한 전기톱의 기계음 소리가 그들 나무에게는 잔인한 사형선고였다. 어쩌면 장송곡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주변의 살아있는 나무들은 그 장송곡 소리가 슬프게 들렸을까? 

 

나는 문득 그들의 마지막 순간을 애도하기 위해 아파트 문을 열고 꽃밭 정원으로 내려갔다. 자기 몸통을 잃어버린 채 하얀 밑동만 남겨진 나무는 나무의 영혼일지도 모른다. 나이테도 보였다. 3, 4년은 되어 보였다. 그 밑동도 뿌리와 함께 곧 제거되겠지만, 오늘 아침 나는 나무의 극락왕생을 빌어주었다.


나무가 심어진 꽃밭 정원을 모두 둘러보았다. 인공적으로 심어 놓은 수십 그루의 나무 중에 밑동만 남겨놓고 잘려 나간 나무는 10여 그루는 되었다. 밑동이 잘려나간 나무의 흰 색상이 마치 흰 해골만 남겨있는 듯했다. 살아있는 나무들 사이에 아직도 '생육관찰중'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나무도 있었다. 그는 푸른 잎들을 나뭇가지에 달고 있었다. 

 

그는 사지에서 돌아온 나무였다. 그 나무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그를 붙들고 울 수는 없었지만, 나의 마음속으론 니체가 말하는 상승하는 힘의 의지를 듬뿍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의 이름표를 떼어 주었다.


생육 관찰에서 다시 생명을 얻고 부활한 나무에서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꼈다. 생명은 기계적인 모습을 띠는 경우도 있지만, 그 나름대로의 창발적인 성격도 함께 갖고 있기도 한 것 같았다. 동일한 시기에 심어진 나무들이지만 어떤 나무는 회생하였고, 어떤 나무는 사망에 이른 것이다. 식물학자들은 그 원인을 기계적으로 설명할 것이다. 

 

그들에게 생명은 만들어지는 것일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창조주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인간중심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일 것이다. 과연 그런가? 생명은 주변과의 여러 관계에 얽혀있으면서 유기체적 활동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우주의 모든 것들은 관계에 얽혀있는 하나의 생명이고, 인간은 그 우주 속의 티끌과도 같은 존재일 뿐이다. 불교의 화엄사상도 그러한 생각과 유사하다.


마굴리스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지구의 생명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에 가깝다. 생명은 자신을 고치고 유지하고 다시 만들며 자신을 능가한다.” 생명은 끊임없이 자기 생산적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마굴리스는 생명의 목적은 자신을 생명력 있는 물질로 보존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생명은 물질이 아니고 과정이다. 마굴리스는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자들의 98%가 한 해동안 새롭게 교체된다고 한다. 부처는 2500년 전에 이러한 과학적 진리를 깨달아 제행무상을 이야기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나는 니체의 힘의 의지가 연상되었다. 니체가 말한 힘은 권력이 아니라 에너지 보존법칙에서 말하는 에너지로 보아야 한다는 해석이 있다. 그 에너지를 니체는 힘으로 보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명으로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가 말하는 상승하는 힘에의 의지는 끊임없이 자기 생산적 활동을 하는 불타오르는 생명의 의지와도 일맥상통한다. 힘에의 의지는 곧 생명의 불꽃이다. 

 

상승하는 생명의 불꽃을 피우기 위해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긍정, 육체와 정신의 건강, 나아가서 지금 여기 이 순간을 긍정하는 아모르 파티를 강조한다. 이러한 생각은 철학적 논문으로 밝혀야 하겠지만, 가벼운 하나의 단상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생육관찰중’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나무들의 다양한 운명을 보면서 삶에 대한 디오니소스적 긍정을 꿈꾼다. 육체의 건강은 정신의 건강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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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장송곡과 희망의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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