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9-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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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신성로마제국보다 더 큰 영토로 유럽 최대 면적을 자랑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공국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에 의해 3국 분할을 당한 뒤, 리투아니아 영토는 179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진입하여 점령당했다. 러시아는 리투아니아를 ‘북서 크라이(Северо-Западный край)’라는 행정구역으로 대체하면서 실효지배를 강화했다. 러시아는 1865년 리투아니아에 강력한 문화 말살 정책을 펴게 된다. 

 

리투아니아인들은 14세기에 들어서야 기독교를 받아들였는데, 이는 유럽 국가 가운데 가장 늦은 사례다. 러시아 치하의 국가들 중에서 폴란드의 영향으로 인해 카톨릭으로 개종했는데 그 이후에도 리투아니아인들 농민들는 이중 신앙을 유지하거나 무늬만 기독교인으로 발트 지역 다신교를 그대로 신앙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시대를 계기로 하여 역설적으로 유럽에서 가장 카톨릭 신앙심이 강한 나라중에 하나로 거듭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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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The Hill of Crosses represents Lithuania's unique national and religious identity, 출처 : National Geographic, By Paul Biris

 

폴란드가 분할된 이후 정교회를 강요하던 러시아는 종종 카톨릭이나 리투아니아어를 탄압하긴 했지만, 리투아니아인 귀족 지주들은 사회 안정을 위해 대부분 그대로 계급을 유지시켰다. 카톨릭은 탄압받았지만 계급은 그대로 유지된 상황에서 리투아니아인 귀족 지주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카톨릭의 성도인 로마에서 찾기 시작했다.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리투아니아어를 가정 내에서 사용하는 방식으로 보존하고 일부러 라틴어 어휘를 대거 도입하면서, 리투아니아어를 지키기 위해서 분투했다. 

 

리투아니아의 도심지에는 유독 카톨릭 성당들이 많이 존재했는데 내가 리투아니아를 다녔을 때, 상당수의 성당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통치 시기 때 건설되었던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었다. 러시아의 탄압이 심해질 때마다 리투아니아인들은 카톨릭을 중심으로 뭉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 대표적인 유적지가 리투아니아 제4의 도시인 샤울레이에 있는 '십자가 언덕'이다.


십자가 언덕은 18세기에 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에 의해 3국 분할당했던 시절에 사람들이 십자가를 세우기 시작한 것에 유래되었고, 소련 치하에 있던 시절에는 민족의 성지로 꼽히기도 했으며 민주화의 상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역설적으로 리투아니아의 민족 정체성과 신앙심은 폴란드와의 연합 공국이 붕괴되면서 더욱 강조되었다. 다른 발트 국가인 라트비아나 에스토니아 입장에서 기독교는 외국인 지주들이 외국어로 예배 보는 문화였기에 타 유럽 국가들에 비해 무신론자의 비율이 굉장히 높았다. 

 

그러나 리투아니아인에게 있어서 카톨릭은 러시아의 지배와 압제에서 버텨낸 민족의 자존심과도 같은 것이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기간 동안 에스토니아인들이 여전히 겉으로만 기독교를 믿는 이교도 취급받은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에스토니아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무신론자 비율이 많은 나라가 된 것과 다르게, 소련 붕괴 이후 리투아니아의 카톨릭 교회는 정치적인 영향력까지 넓혀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리투아니아에 대한 러시아의 문화 말살 정책은 1863년에 있었던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청년들의 무장봉기에 대한 징벌적 대응이었다. 당시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청년들은 20년이나 복역해야 하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징병제에 반대하며 무장봉기에 나섰던 것이다. 러시아는 크림전쟁에서 영국, 프랑스, 오스만투르크 연합군에게 패배한 후, 영국에게 발트 해마저 내줄 위기를 맞게 되자 당시 합병한 발트 3국 내의 사회적 봉기를 우려해 발트 민족의 젊은이들을 강제 입대시켰다. 

 

그리고 발트 3국에 한 해, 20년 복무를 명령하게 되는데 이러한 징병제는 당연히 반발이 따랐다. 리투아니아에는 자신들의 봉기를 유럽 전역에 알리고 영국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영국은 이런 리투아니아의 요청을 끝내 외면했다. 외세의 도움을 받지 못한 리투아니아의 봉기는 쉽게 진압되었고, 봉기 주동자들은 대부분 처형당하거나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이후 러시아의 차르인 알렉산드르 2세는 이후 리투아니아어 사용과 교육을 금지했다. 오직 러시아어와 키릴 문자만 쓰도록 했다. 러시아와 리투아니아는 인접 국가이지만 언어는 한국어와 중국어 정도의 차이로 인식하면 될 것이다. 이것이 두 나라의 언어가 서로 다른 이유이다. 리투아니아인들은 러시아 압박에 굴하지 않고 서쪽 접경인 동부 프로이센에 비밀 조직을 만들어 러시아에 대한 독립투쟁을 진행했다. 

 

그리고 민족적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프로이센에서 리투아니아어 책을 인쇄하여 국경을 넘어 도시 곳곳에 실어 날랐다. 같은 리투아니아 인들끼리 네트워크를 만들어 책을 돌려 리투아니아어를 잃지 않도록 했고 지하 교육 시설과 가정에서는 아이들에게 리투아니아 언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리투아니아어 금지령은 40년이나 지속되었다. 하지만 리투아니아의 말과 문화는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번성했다. 


러시아의 지배 기간동안 암암리에 출판한 리투아니아어 출판물은 350만 부가 넘어섰다. 초등 교재 50만권, 일반 서적 30만권, 신문 75,000부가 발행되었다. 이로 인해 리투아니아는 반 세기 가까이 언어를 러시아에게 극렬한 탄압을 받았지만 1905년이 문해율이 50%를 넘길 정도로 발트 지역에서 가장 자존심이 강한 문화 민족으로 성장했다.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발생하면서 로마노프 제국이 무너졌고 다음 해, 리투아니아도 러시아에게 해방된다. 

 

하지만 독립은 오래가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면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독소불가침 조약)과 후속 조약이 체결되어 나치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갈라 먹기로 결정됨에 따라 리투아니아는 1940년 소련군이 진주하여 점령되었다. 이어 1941년 나치 독일이 침공하면서 다시 리투아니아는 독일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이 기간 동안 리투아니아에서 유태인들 약 20만 명이 잔혹하게 학살되었다.


그러나 1944년 소련이 리투아니아를 재정복한 이후 스탈린에 의해 피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소련은 나치의 잔당을 정리한다는 명분으로 3만 가구를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리고 12만 명을 서독과 프랑스, 영국 일대로 추방했다. 그로 인해 어마어마한 난민이 발생했고 서유럽은 나치 독일과의 전쟁으로 이미 황폐화된데다가 직접으로 나치를 제압한 소련이 강대국으로 부상함에 따라 리투아니아인 난민들에 대해 제대로 된 항의조차 하지 못했다. 

 

서유럽은 더 이상 싸울 여력이 없었고 소련의 군대는 사기가 충천했으며 베를린을 직접 점령했던 강군이었기 때문이었다. 살아남은 리투아니아인 5만 명이 숲 속에서 소련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나치 독일이 패망하면서 이들의 무기를 털어 소련군에 대항했지만 결국 승리하지 못했다. 리투아니아는 소련의 압제 속에서 40년이 넘는 세월을 견뎌야 했다.


1989년 소련 붕괴를 몇 년 앞두고 리투아니아 국민은 같은 처지인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국민과 함께, 역사에 길이 남는 평화의 상징을 만들게 된다. 소련의 지배가 시작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50주년 행사를 비난하여 3개국 국민들은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서 라트비아 수도 리가를 거쳐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까지 이어지는 675.5㎞ 길이의 인간띠를 만들었다. 3국 인구 3분의 1이 동원된 이 캠페인을 두고 ‘발트의 길’이라고 불렸다. 

 

수많은 사람이 도로에 줄지어 서서 손을 맞잡고 독립을 외쳤다. 이 사건은 전 세계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이를 계기로 리투아니아는 1990년 독립을 선언했고, 1991년 9월 마침내 독립을 쟁취했다. 이와 같은 역사 때문에 리투아니아에는 반(反) 러시아 민족주의 정서가 강하다. 리투아니아는 구소련 국가들 중 러시아인 거주 비율이 가장 낮은 국가로 러시아인이 6% 정도 살고 있다.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구소련 국가가 많지만 리투아니아는 공식 언어로 리투아니아어만 고집하고 있다. 


그라즈비다스 야수티스 리투아니아 빌뉴스 대학 국제관계학 박사가 주장하기를 "1944년 이후 소련 치하에서 수많은 리투아니아인이 강제 추방당했다. 최소 13만명이 노동교화소, 굴라크(정치범수용소), 시베리아와 같은 변방으로 보내졌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 소련은 또 1991년 1월 ‘피의 일요일’이라고 불리는 사건을 일으켜 리투아니아 민간인을 공격하기도 했다. 리투아니아인에겐 거대한 트라우마"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1991년 1월 ‘피의 일요일’에 대한 발트 3국 무력 진압 시도에 대해서는 있다가 포스팅할 예정이다.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리투아니아는 러시아가 주도한 CIS 독립국가연합 참여를 거절하고 바로 UN에 가입했다. 1994년 구소련 국가 최초로 나토에 가입 신청을 했다. 반(反) 소련 군사 동맹이나 다름없는 나토 가입을 서두를 정도로 독립에 대한 열의가 충만했다. 리투아니아는 2004년 나토와 EU에 정식으로 가입이 승인되었다.


반러시아 정서로 인해 러시아와 벨라루스의 반 체제 인사들이 망명하는 일도 잦아지도 있다. 푸틴과 루카센코에 대항하다가 망명한 러시아-벨라루스 반 체제 인사들에게 있어 ‘소도’인 셈이다. 2018년에는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을 비판한 언론인 예브게니 티토프(Евгений Титов)가 망명했다. 

 

2019년에는 벨라루스 반 체제 언론인 라흐만 프라타세비치(Рахман Праташевич)가 그리스에서 리투아니아로 향하던 비행기를 타고 가다 벨라루스 당국에게 비상 착륙 요구를 한적 있다. 벨라루스 당국은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로부터 여객기를 폭파 시키겠다는 협박 서한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해명했지만, 조사 결과 여객기 안에서 폭탄은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이 사건은 라흐만 프라타세비치(Рахман Праташевич)를 체포하기 위해 벌인 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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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언덕', 리투아니아를 비롯한 발트 3국 반러체제 인사들의 성지(聖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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