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9-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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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지배 하에서 동북러시아가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결속되어가고 있을 때 서부에서는 리투아니아의 세력이 막강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400년경에는 러시아가 리투아니아 지배하의 서남부와 모스크바 주도하의 동북부의 둘로 나뉘어 각각 다른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키예프 루스 말기부터 시작된 러시아인의 분화 대(大) 러시아인, 우크라이나 인, 벨로루시 인으로의 분화는 한층 더 심화되어 이후의 러시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240년경 몽골군은 러시아의 서남부를 정복하고 폴란드와 헝가리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바투 칸이 러시아의 동쪽 변방인 볼가 강변의 사라이에 킵차크 칸국의 도읍을 세운 것으로 인하여 비교적 다행스럽게 서부 러시아에는 몽골의 지배력이 그리 강하게 미치지 못했다. 그러한 틈을 이용하여 북쪽에서 리투아니아가 남진하여 서부 러시아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게 된다. 오래전부터 발트 해 연안에 살고 있던 리투아니아 인 부족들이 민다우가스(Mindaugas) 공의 지도하에 하나의 통일된 세력을 이룬 것은 1240년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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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A group of Lithuanian dancers dressed in native attire, assemble before their performance at the Lithuanian Festival. 출처 : JERSEY SHORE ONLINE, By Bob Vosseller.

 

직접적인 자극이 된 것은 북쪽에 자리 잡은 독일 기사단의 압력이었다. 민다우가스의 사후 잠시 내분에 시달리던 리투아니아는 1293년 비텐(Viten)에 의해 다시 통합되었다. 그러나 비텐을 승계한 게디미나스(Gediminas)와 그의 아들 알기르다스(Algirdas)의 치세에, 리투아니아는 서남 러시아의 여러 공국을 차례로 정벌하여 발트 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대국을 건설했다. 알기르다스는 러시아 전체를 지배하고자 세 차례나 모스크바 대공국과 전쟁을 벌였으나 결국 실패했다. 

 

동북부 러시아로의 진출은 실패했으나 리투아니아의 영토는 키예프, 볼린, 체르니코프, 스몰렌스크 등 서남 러시아 전역을 포괄했다. 리투아니아가 이처럼 러시아 속으로 급속히 팽창할 수 있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러시아 인의 저항력이 크게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지만, 한편으로 리투아니아의 지배방식이 러시아 인을 거스르지 않는 것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사실 어떤 면에서 보면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리투아니아 러시아 국가였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주민은 약 3/4이 러시아인이었고, 도시들은 러시아적인 특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으며, 러시아의 상류층과 정교회는 그들의 지위와 특권을 계속 누릴 수 있었다. 두 나라 귀족들 간의 결혼도 성행했다. 또한 이교도로서 문화적으로 뒤져 있던 리투아니아의 지배자들은 키예프 러시아의 문화를 열심히 받아들였고, 군대 · 행정 · 법률 · 재정 등도 러시아식으로 만들었으며, 러시아어를 국가의 공식 언어로 사용했다. 

 

따라서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키예프의 또 다른 상속자라고 할 수 있었다. 발트 3국 중 에스토니아와는 달리 라트비아와 함께 발트 족(Balts)을 조상으로 하는 리투아니아 민족은 중부 유럽 남쪽과 남동쪽에서 현재의 리투아니아 공화국 영토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발트 해 연안에 자리 잡은 발트 족은 서부 발트 인과 동부  발트 인으로 갈라지게 되고 현재의 리투아니아 공화국이 위치해 있는 지역의 네만(Neman) 강 하류를 따라 동 발트 족인 사모기티아(Samogitia, 또는 제마이티야(Zemaitija)) 족과 아우크스타이티아이(Aukstaitiai) 족이 거주했다. 


리투아니아 민족은 보통 사모기티야(제마이티야), 수도비야(Sudovia, 수발키야(Suvalkija) 또는 요트빈기야(Yotvingians)), 아우크스타이티아이, 주키야(Dzukians), 리에투비닌크스(Lietuvininks) 등 5개의 그룹으로 분류되었다. 리에투비닌크스 그룹은 거의 사라진 상태다. 이 5개 그룹을 통틀어 리투아니아 인이라 부르게 된다. 1251년 7월 17일 리투아니아의 민다우가스(Mindaugas) 대공이 국왕 칭호를 받으면서 왕국으로 격상되었다. 1253년 7월 6일에는 민다우가스가 리투아니아의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민다우가스의 아내인 모르타(Morta)는 리투아니아의 왕비로 즉위했다. 

 

1255년 민다우가스는 알렉산데르 4세(Alexander IV) 교황으로부터 아들을 국왕으로 대관시키는 허가를 받았다. 민다우가스가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Livonian Brothers of the Sword)과의 동맹 관계, 평화 관계를 수립하면서 리투아니아는 동쪽으로 영토를 확대했다. 가장 먼저 벨라루스 지역에서 비어 있는 민스크를 잃은 키예프 루스 본국은 재정난에 시달렸고 결국 급료를 받지 못한 슬라브의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한때 키예프 본성이 포위당하였으나 체르니코프 공후가 이끄는 루스 군의 반격으로 반란군은 패하고 반란이 평정되었다. 


그러나 체르니코프 공후의 전공을 시기한 귀족들의 견제가 시작되었고 체르니코프 공후는 키예프를 떠나 리투아니아에 항복했다. 민다우가스는 체르니코프와 트베리로 가서 공후들을 제압하고 벨라루스 남부 지역을 자신의 영지로 만들었다. 그 전쟁 와중에서 트베리, 페레야슬라블의 공후들은 드네프르 강물에 수장되어 그의 아들들은 모스크바로 도주했다. 한편 리투아니아는 동진을 하던 중 몽골군 바투가 돈 강 남쪽에서 서진을 지속하고 있었다. 이에 페스코프 일대에서 리투아니아와 몽골이 격돌하는 상황이 맞이된다. 1377년 알기르다스가 죽은 후 새로운 요소가 들어왔다. 

 

그의 아들 요가일라(Yogaila)가 1386년에 폴란드의 야드비가(Yadviga) 여왕과 결혼하여 폴란드 국왕을 겸임하게 되면서 폴란드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요가일라는 스스로 정교를 버리고 카톨릭으로 개종했을 뿐만 아니라, 이교도였던 리투아니아인들을 카톨릭교도로 개종시켰다. 그로 인하여 성직자들이 폴란드에서 리투아니아로 왔고, 교회는 교육 · 문화 · 예술 등의 분야에서 폴란드 화를 선도하는 거점이 된다. 


그러나 그의 밑에서 리투아니아의 대공이 된 사촌 비타우타스(Bitautas)는 독립적인 군주로 행동하면서 독일 기사단의 위협을 제거하고 몽골과도 큰 전쟁을 일으키며 모스크바 대공국의 내란에도 개입하는 등, 적극적인 동방 정책을 펴기도 했다. 비타우타스가 죽은 해인 1430년 무렵까지가 폴란드-리투아니아 공국의 전성기로서, 그 후로는 리투아니아 인과 동슬라브 인,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의 민족적 · 종교적 갈등에 폴란드 기사단 세력들의 간섭, 모스크바 러시아의 압력까지도 겹쳐 쇠퇴하게 된다. 그 이후 폴란드 화가 더 급속히 진행되었다. 

 

교회의 영향력은 종교와 교육 · 문화를 넘어 사회와 경제 · 정치로까지 확대되었다. 늘어나는 교회의 토지들은 계속 면세 특권을 누렸고, 주교들이 대공의 자문 위원회에 참석하는 등,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많은 성직자들이 국사에 관여했다. 게다가 상류 집단일수록 더 광범한 폴란드화가 진행됐다. 귀족들에게 많은 특권을 주는 폴란드는 리투아니아와 서부 러시아의 지주들에게 아주 매력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리투아니아의 상류층은 폴란드어와 함께 귀족들의 독립성과 명예를 중시하는 폴란드의 관습들까지 받아들였고, 지주들은 폴란드의 예를 따라 영주 직영지 경영을 발전시켰다. 1569년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는 대등한 관계의 국가 연합을 이루었다. 두 국가는 공동의 군주와 공동의 의회를 가졌으나, 사법 · 행정 · 재정 · 군대는 별도로 유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명 “루블린 연합” 으로 리투아니아는 사실상 폴란드의 종속국이 된 셈이다. 

 

실제로는 루블린 연합 자체가 폴란드의 강압에 의한 것으로 평가되며 폴란드는 더욱 강대국이 되어 러시아와 주변국을 한 동안 위협한다. 리투아니아의 지배층이 연합에 동의하지 않자 폴란드의 지기스문트 2세는 군대를 파견,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남부를 장악하여 폴란드 영토에 편입시켰다. 위기를 느낀 리투아니아 인들은 폴란드의 강력한 공격을 받고 루블린 연합의 일원으로써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협약은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의 평등을 분명히 밝히고 있으나 사실은 폴란드의 명백한 승리였다. 


의회의 대표권에서도 폴란드가 3:1로 우세했으며, 리투아니아인들 사이에 폴란드의 영향력이 깊이 퍼져 있어 모든 면에서 폴란드가 형님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모스크바 대공국과 함께 러시아를 양분하던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마침내 사라졌다. 모스크바 대공국이 전 러시아의 통일을 향해 준비해가고 있을 때, 결속력이 약했던 리투아니아는 폴란드의 영향 아래로 종속된 것이다. 

 

이후,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던 우크라이나인들은 리투아니아 폴란드 연합의 지배에 순응하지 않고 이반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는 1648년 흐멜니츠키의 주도 하에 일어난 우크라이나 코사크 인들의 반란은 마침내 우크라이나 독립 전쟁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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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 3국 중, 리투아니아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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