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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0, 11일 양일 간에 걸친 "로마 회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EU의 지원 또한 지지부진?
- 지난 7월 7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종결된 BRICS 정상회의는 회원국 수가 11개국으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푸틴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의 불참으로 인해 그 위상이 오히려 퇴색됐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같은 논리로 지난 10, 11일 로마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한 10일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Ukraine Recovery Conference, URC 2025)와 11일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 정상회의도 영국 키어 스타머 총리,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불참했다. 오히려 로마에서 벌어진 양일 간의 회의 의미가 BRICS 정상회의보다 더 반감되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나 젤렌스키 등 우크라이나 재건 회의 참석자들이 초대된 만찬에서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가 키예프에 대한 유럽 대륙의 경제 지원은 무료 봉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Il Presidente del Consiglio italiano Giorgio Meloni ha ricordato che gli aiuti economici del continente a Kiev non sono un servizio gratuito)."고 서술한 이탈리아 일간지 란티디플로마티코(L'Anti Diplomatico)의 보도가 겨우 나타나고 있을 정도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트럼프의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홀대로 인해 우크라이나 지원을 거의 홀로 책임지게 된 유럽 국가들이 로마에서 다시 반러시아, 대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해 결속을 다졌을까? rbc 등 러시아 언론과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의하면 10, 11일 이틀간 열린 로마 정상회의에서 유럽 국가들은 우선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대해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기로 했다. 이와 같은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Ukraine Recovery Conference)는 로마에서 우크라이나 기업들과 줄어들고 있는 노동자에 대한 인적 자원, 우크라이나 국내 각종 지역 문제,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등 4가지의 세션으로 진행되었다. 이같은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는 2022년 스위스 루가노, 2023년 런던, 2024년 베를린에 이어 4번째 모임이었다. 이 회의는 2017년부터 시작된 우크라이나 개혁 회의(Ukraine's Reform Conference)가 출범된 것이 시초로 러시아-우크이나 전쟁이 발발한 2022년 이후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번에 열린 로마 회의의 성과는 초기 자본금 2억 2,000만 유로의 특별 기금(Ukraine Recovery Fund)을 조성하는 합의에 있다. 주최국인 이탈리아와 독일, 프랑스, 유럽투자은행(EIB)이 이 기금을 내년인 2026년까지 5억 유로로 늘리기로 했다. EU를 대표하는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Ursula Gertrud von der Leyen) 집행 위원장은 EU가 우크라이나 복구 사업의 지원을 위해 국제 금융기관들과 약 23억 8,000만 유로 상당의 투자 협정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23억 중, 18억 유로는 대출 보증 형태로, 5억 8천만 유로는 무상 원조 형태로 우크라이나에 제공했다. EU는 앞으로 규모를 최대 100억 유로로 키울 작정인데 EU는 나토 분납금인 국가 GDP의 5%를 맞춰야 하고 각 국의 분담금 지급 시기도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EU 분담 지원금을 만약 축소하기라도 한다면 국가 GDP의 상당 부분을 EU 분담 지원금에 의지하고 있는 GDP 낮은 동유럽의 국가들이 가장 먼저 반발할 것이다. 그리고 자국 운영 자금에 세금도 그만큼 부과해야 하니 부담되는 것은 EU 시민들이다. 시민들의 불만도 그만큼 심해질 것이고, EU 각 국은 이러한 시민들의 불만들을 달래야 한다. 즉, EU는 우크라이나로 인해 서서히 자금난에 시달릴 가능성도 생각해봐야 한다. 한편 네덜란드는 우크라이나 피해 복구를 위해 3억 유로를 내놓기로 하는 등, EU 국가들도 개별적으로 우크라이나 지원 방안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이번 회의에서 나타난 우크라이나 복구 지원금 23억, 그리고 앞서 언급한 5억, 3억 유로와 같은 금액은 실제로 우크라이나가 필요한 자금들, 초창기인 2022년과 비교해 보면 현저히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회의에 참석한 우크라이나의 데니스 슈미갈 총리는 "앞으로 14년 동안 우크라이나의 재건 및 현대화에 필요한 재원은 1조 달러(Сума, необхідна для відбудови та модернізації України протягом наступних 14 років, становить 1 трильйон доларів)."로 추산했다. 그러면서 2개의 기금 조성을 제안했다. 하나는 서방 측에 의해 동결된 러시아 해외 자산과 러시아 원자재 수출에 대한 특별세 부과로 5,400억 달러 규모의 기금을 부과하고, 또 다른 하나는 유럽의 민간 투자로 4,600억 달러 규모의 기금을 만들자는 것이다. 전자는 완전히 날강도 짓이고, 후자는 민간 투자를 열어 EU 시민들의 피같은 돈을 빨아 먹겠다는 것이다. 이에 독일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는 피해 규모를 추산하는 것에서부터 우크라이나 측에 이의를 제기했다. 메르츠는 우크라이나의 전쟁 피해를 약 5,000억 유로로 추산한다고 주장했으며 슈미갈 총리의 1조 달러 주장을 부인했다. 그리고 러시아가 피해 보상을 하기 전까지, 러시아 자산 동결을 해제해서는 안 된다며 비교적인 정상적인 주장을 했다. 그러니 우크라이나가 주장한 2개의 기금 조성 주장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은 셈이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전후 복구를 위해 민간 투자 부문을 맡아 온 미국의 대형 투자업체 블랙록(Black Rock)이 로마 회의 전날, 우크라이나 복구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따라서 미국 투자기업 블랙록 주도의 민간 투자 유치 건은 전후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한 마셜 플랜의 핵심으로 보여졌다는 것을 착안한다면 자금이 급한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래리 핑크(Larry Fink) 블랙록 CEO는 지난 2023년 젤렌스키와 회동한 이후, 민간 투자를 끌어 내고, 우크라이나 정부의 투자 전략 수립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따라서 그는 이번 로마 회의에서 그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블랙록은 포기한 이유를 키예프에게 불리한 조건으로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대 우크라이나 정책을 핑계로 들었다. 블랙록이 우크라이나 복구를 위한 투자 유치를 중단했다는 사실은 지난 7월 6일 미국 블룸버그 통신에 의해 처음으로 알려졌다. 블랙록은 당초 독일과 이탈리아, 폴란드 등 유럽 주요국 기관 투자자들의 초기 지원으로 수십억 달러의 유치 목표 달성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기관 투자자들이 협상을 일부 중단했기 때문에 자금 조달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당초 블랙록의 민간 투자 유치 목표는 최소 150억 달러였는데 프랑스 업체가 블랙록의 역할을 이어 받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미국의 참여가 불투명한 상태에 있어 최소 150억 달러라는 목표가 불가능해졌다. 그나마 우크라이나에게 있어 다행한 점은 미국이 복구 회의에 처음으로 참석했다는 사실에 있다. 미국 키스 켈로그 대통령 특사는 이날 로마 회의에서 미국과 유럽이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한 새로운 '마셜 플랜'을 주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트럼프가 광물 자원 거래로 조성된 특별 기금으로 우크라이나 복구 지원에 앞장 설 것이라 언급했다. 이번 로마 회의에서는 2026~2027년 우크라이나에 대한 재정 지원 문제까지 논의되었다. 슈미갈 총리는 내년인 2026년 예산 편성에서 190억 달러의 적자가 예상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키예프는 2025년 러시아에게 입은 피해 복구 사업에 할당된 자금 지원을 절반도 받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11일 로마에서는 전날 복구 회의에 이어 우크라이나 지원 의지를 지닌 유럽 30개 국으로 구성된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은 우크라이나 지원 체제에서 트럼프의 미국이 제외된 공백을 메꾸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의 주도로 결성된 국가 연합체라 볼 수 있다. 여기에 키스 켈로그 미 대통령 특사와 대러 강경파인 린지 그레이엄(Lindsey Graham, 공화당), 리처드 블루멘탈(Richard Blumenthal, 민주당) 미 상원의원이 이 회의에 처음으로 참석해 주목을 받았다. 이번 로마 정상회의의 성과를 말한다며 우크라이나의 휴전 감시를 위한 평화유지군을 파견하는 것으로 윤곽을 잡있다는 것에 있다. 마크롱 과 스타머 총리는 비록 정상회의에 직접 참석하지 않았지만, 런던에서 화상 연결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의 우크라이나 파견군 규모를 50,000명으로 늘릴 수 있다며 허풍을 늘어 놓았다. 또한 이처럼 런던에서 합의했다며 그 합의 사항을 공개했다. 또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 작전 본부를 우산 파리에 두고 12개월 후에는 런던으로 이전, 순환하는 방식으로 운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물론 키예프에도 지부가 설립된다고 했다. 마크롱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휴전 직후 몇 시간 이내에 바로 작전을 시작할 수 있도록 평화 유지군의 운영 계획을 마련한 것이라 의미를 부여했다. 이처럼 평화 유지군에게는 우크라이나 지상군의 역량을 키워주면서, 우크라이나 영공 및 해상 안보를 지원한다는 역할도 부여되었다. 이를 위해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은 훈련 교관들과 군수 물자 공급 및 병참 전문 요원들을 우크라이나로 파견할 것으로 보여 진다. 물론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우크라이나에 투입될 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물론 우크라이나로 파견될 평화 유지군에 대한 미국의 안전 보장 약속이 큰 관건으로 보인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지난 4월 미국이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에 정보 및 물류 지원을 약속했다고 보도했지만, 공식적으로 지원 발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10일 미국의 구체적인 약속은 공개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회의에 참석한 린지 그레이엄과 리처드 블루멘탈 미 상원의원들도 우크라이나에 미군을 배치할 계획이 없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했다.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은 로마 정상회의 이후, 공동 성명을 통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추가 평화 협상인 제3차 이스탄불 협상을 지지한다면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우크라이나에 군사 및 재정 지원을 우선적으로 제공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성명은 또한 나토가 2024년 약속한 대로 올해 최소 400억 유로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휴전이 성사되기 전까지는 우크라이나에게 군사 지원을 제공하고, 휴전이 발효되면 평화 유지군을 파견하겠다는 의지인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인즉, 휴전이 되면 곧바로 평화유지군을 가장한 나토군을 투입하겠다는 얘긴데 러시아의 휴전 협상 요구 내용과 완전히 배치되는 얘기다. 결국 유럽은 러시아와 휴전 없이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쯤되면 휴전과 평화를 원하지 않는 것은 유럽과 우크라이나이지 러시아는 아니다. 그리고 트럼프는 휴전을 요구해도 EU와 우크라이나는 결코 휴전을 원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올해 "로마 회의"의 결과가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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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0, 11일 양일 간에 걸친 "로마 회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EU의 지원 또한 지지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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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악연은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카프카스 지역으로 남하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란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란 카자르 왕조와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카자르 왕조의 근거지였던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정복하였다. 1828년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이란 카자르 왕조는 투르크멘차이 조약(Treaty of Turkmenchay)을 통해 국경선을 확정하였는데,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독립 이후, 오늘날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으로 거의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시아파 무슬림들이 이란과 내통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반란을 획책할 것을 깊게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시아파 무슬림 종무청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사용을 제한하고 대신 아제르바이잔어 사용을 장려하여 시아파 무슬림들의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정책이, 아제르바이잔어가 현재 아제르바이잔에 정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조지아의 티플리스(Typlis, 트빌리시)와 보르조미(Borjomi) 등이 러시아인들의 온천 휴양지로 개발된 것과 달리, 아제르바이잔으로 러시아인들이 이민한 계기는 19세기 중반 바쿠에서 유전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부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통치하던 카자르 왕조가 심각한 부패와 기근 문제가 최악의 참사로 일어났고, 이를 "페르시아 대기근(Persian Great Famine)"이라 불리는데 당시 대기근으로 무려 150만 명이 아사했다.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 상당수가 국경을 몰래 넘어 바쿠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섞여 살게 되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농촌 지역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이단으로 박해받던 몰로칸파(Mолокан) 신도들이 여타 러시아 정교회 신도들과의 갈등을 피해 아제르바이잔 일대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슬람과 몰로칸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당시 카스피해에서 석유가 본격적으로 산업에 차용되던 20세기 초반, 바쿠에서 기적적으로 생겨난 검은 황금인 석유는 러시아제국에게 있어 산업 경제에 큰 이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석유가 채굴이 된다 하더라도 이 막대한 석유를 옮길 방법이 없으면, 혹은 석유 시추에 대한 기술이 없다면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당시 기술로 본다면 석유를 이송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수의 노새를 이용해 실어 옮기는 것이었는데, 이는 발굴한 노력에 비해 옮길 수 있는 양에 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스웨덴의 노벨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스웨덴의 노벨 가문은 여러 생각을 한 끝에 러시아 제국의 풍부한 수원의 흐름을 이용하여 편리하게 실어 나르기만 한다면 바쿠 유전이 막대한 이익으로 돌아올 것임을 확신했고, 이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개시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사업이 바로 카스피해로 연결되는 볼가 강 하구인 아스트라한 습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때 볼가 강 각 곳에 카스피해에서 채굴되는 석유가 운반되기 시작하는데 이를 기준으로 볼가 강 각 지역에 운하가 만들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러시아 볼가 강 유역의 운하들은 카스피해의 막대한 석유를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시초가 된 셈이다. 당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은 석유 산업에 이렇게 발을 담구게 된다. 그는 서유럽에서 막대한 돈을 벌고 있었는데, 루드비히 노벨과 로베르트 노벨이 알프레드를 설득하여 석유 회사에 자금을 대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취득한 막대한 부는 노벨이 사망한 이후 제정된 막대한 노벨상 초창기 상금의 원금이 된다. 이후 노벨 가문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의 스탠다드 제국보다 약간 빠른 시기에 운하를 통한 운송 다음으로 빠르게 운송할 수 있는 송유관을 개발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노벨가문은 거의 세계 최초의 유조선인 조로아스터(Zoroaster) 호를 만들어 출항시켰다. 그러나 바쿠 유전이 가진 막대한 가능성과 그 효용성을 알아 본 사람들과 국가, 가문들은 스웨덴의 노벨 가문 뿐이 아니었다. 세계 석유 시장을 지배하면서 장악하고 있던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과 당시 세계 금융가를 장악하고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후원하는 로얄 더치 쉘(Royal Dutch Shell), 러시아와 라이벌이면서 그레이트 게임 등을 통해 러시아와 대적해왔던 영국의 부유한 상인들이 엄청난 투자를 했으며 미국과 독일 제국마저 바쿠를 노렸다. 로스차일드는 그동안 노벨 가문에게 돈을 지원해주면서 많은 이익을 보고 있었다. 이 때 스탠다드 오일이 바쿠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전 세계 금융가에 퍼지게 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당시 세계 최대의 석유 제국이라 불리는 스탠다드는 미국 석유의 90%이상을 장악한 거대 기업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즉각 태도를 바꾸어 스탠다드와 동맹을 맺고 노벨 가문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거기에 아제리아 바투미 석유 회사까지 인수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석유사업에 뛰어들었다. 노벨 가문의 브라노벨은 1879~1883년에 이르는 4년 여 기간 동안 2,000% 생산량 증대를 노렸다. 그러면서 러시아 시장을 50%까지 장악하면서 카프카스의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를 위협했다. 그러자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는 바쿠를 과감히 포기하고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Ploiești)로 옮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이 꾸준히 바쿠에 유입하게 되는데 이 때 바쿠에 유입된 러시아인들은 대개 포그롬 사태로 인해 카스피해 일대에 이주해 온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이후, 바쿠의 인구 30%가 러시아계 유태인들로 자리 잡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과 남다른 유대감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이들 러시아계 유태인들이 아제르바이잔에 상당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시대부터 남아있던 아제르바이잔 투르크인들이 유태인과 섞여 살게 되었는데 이들은 서로의 종교를 박해하지 않고 나름 평화롭게 잘 지냈다. 그러나 1905년이 되면서 크림 타타르족 출신 이슬람 모더니즘 사상가인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의 영향을 받은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바쿠를 중심으로 들어서게 되면서 투르크-타타르 민족주의의 광풍이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카스피해 일대에 불어 닥치게 된다.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는 범투르크주의를 기반으로 이슬람의 현대화를 주장하던 인물로, 부하라의 전통적인 이슬람 마드라사들을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무슬림 사회를 대표하고 있는 적폐로 묘사했다. 이와 동시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존재하는 립카 타타르 그룹들을 무슬림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사례로 내세웠다. 시아파 이슬람 세계에 속해 있었던 바쿠의 지식인들은 같은 시아파인 이란의 전통적인 농촌 마드라사들을 낙후한 무슬림 사회의 전형으로 보게 되면서 이란 문화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그 대신 러시아를 통해 수입된 서구식 민족주의 및 범투르크주의에 대단히 열광하게 되었다. 이는 후일 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이란과 거리를 두고 수니파 이슬람이 우세한 터키와 친교 관계를 강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이슬람 칸국들은 종파 문제 때문에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잦은 전쟁을 치르던 적대 관계였지만 이란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친(親) 오스만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918년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붕괴되면서 소련이 출범한 이후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자카프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에 완전히 병합되었으며 당시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자치 형태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 이미 바쿠에는 1904년부터 볼셰비키 조직이 자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찍이 바쿠 유전에서 근로하는 산업 노동자 계급들이 형성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들 노동자 계급들 대부분이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1926년 바쿠에서 개최된 투르크어학 대회에서 아제르바이잔어에서 페르시아 문자 사용을 금지하고, 라틴 문자로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해당 조치들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들이 터키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며 러시아어 습득에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게 되니 다시 소비에트 정권은 1939년부터 아제르바이잔어를 키릴 문자로 표기하도록 방침을 변경하게 된다. 모든 소비에트 자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아제르바이잔에도 스탈린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당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다. 소련의 일부가 된 이후, 스탈린 시절에는 50,000명이 넘는 아제리인들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는데 그중에는 이슬람 성직자인 이맘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도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소련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하면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도 잠시 소련의 위성국으로 알려진 길란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웠지만, 이후에 이 지역을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시켰다. 레닌 시기에 발생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는 스탈린이 아제르바이잔의 편을 들어주면서 나히체반과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귀속시키면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지역을 두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1988년 2월 27일에는 아제르바이잔계 무슬림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와 아파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공격하고 살해하는 숨가이트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게 된다. 당시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고 아르메니아인들의 보복으로 발생한 카살리 학살을 적극 지지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급격한 반러시아 시위들이 일어나 오히려 서방 세계와 미국을 지지하는 여론이 커졌다. 그러나 미국과 서방 세계는 더욱 노골적으로 아르메니아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친서구 정책을 취하던 민주 정부가 붕괴되면서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ar Aliyev)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고 아제르바이잔은 친러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용어는 러시아어 민족 자치어는 아제르바이잔어였고, 공교육은 러시아어와 아제르바이잔어로 이루어졌다.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대를 거치며 아제르바이잔 내 타트족 및 탈리시족과 같은 소수민족 집단이 모어인 타트어 등으로 글을 읽고 쓸 줄은 모르지만 러시아어로는 글을 자유자재로 읽고 쓰게 되면서 이들 소수민족의 글과 말은 완전히 사장되었다. 그리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사한 이후에 러시아어만 사용하게 되었고 같은 이유로 세대가 지나면서 점차 모어를 잊어버려 아제르바이잔인으로 완전히 동화되기 이른다.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던 영향으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이 소련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계 유태인들인 석유 화학 기술자들이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하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대부분 러시아 등으로 돌아가 버리고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한 러시아 인들은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와 유태인들의 후손들이기에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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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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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헝가리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탈스탈린주의를 실행하는 루마니아와 공산정권 치하에서의 국제 외교
- 1956년 2월, 모스크바 크레믈린에서 열린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게오르기우데지와 함께 출석한 바 있던 당 정치국원인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Iosif Chișinevschi)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Miron Constantinescu)는 3월에 루마니아 노동자당 중앙 위원회에서 급격한 공업화와 집단 농업화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게오르기우데지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어 부쿠레슈티와 클루지나포카에서는 지식인 작가와 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헝가리 봉기가 터진 직후였기 때문에 그 영향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게오르기우데지의 정책에 대한 반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부쿠레슈티와 많은 헝가리 인이 거주하는 트란실바니아의 주도(州都) 클루지나포카, 티미쇼아라 등지에서 헝가리에서 발생한 민주화 운동에서 사망한 봉기자들을 동정하며, 생활 수준 향상, 러시아어의 필수 교육 폐지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루마니아 공산 정부는 한편에서는 시위 지도자를 엄격하게 탄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최저 임금을 인상시켰다. 그리고 시위대의 요구에 따라 콘스탄티네스쿠를 교육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민주화 시위에 대한 무마 정책을 실시했다. 루마니아에서 헝가리 봉기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와 같은 부분적인 양보 정책 이 외에도 전통적으로 좌익 지식인층이 소수였다는 점, 과거의 숙청 규모가 헝가리에서만큼 크지 않았다는 점, 경제 면에서의 완화 정책이 부분적으로 지속되었다는 점, 그리고 정치적인 면에서 당의 통제망이 보다 철저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그 이상의 동요 가능성으로부터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을 구해낸 것은 당시 동유럽 전체에 강하게 묶여 있던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된 국가들이 자국의 정권이 붕괴되지 않기 위해 서로 연대를 취하고 있었던 분위기 때문이었다. 1956년 6월, 공산당 중앙 위원회에서는 이나 파우케르와 바실레 루카가 루마니아의 개인을 숭배하는 풍조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나왔으며, 그와 같은 비판을 조장했다고 하는 이유에서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가 해임되었기 때문에 극단적인 자유화 운동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1958년 11월의 당 중앙 위원회는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최종 연한을 마무리 하고, 1960년부터 새로운 6개년 계획에 착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이후 1960년 6월의 제6차 당 대회에서 계획을 채택했다. 이와 같은 새로운 6개년 계획은 도나우 강 삼각주와 연결되는 갈라치 지역에 제철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연간 성장 목표 13%, 도나우 일대에서 가장 생산성이 극대화 된 철강이라는 대규모의 공업화를 노렸다. 당시만 해도 동유럽에서 자원 부국이었던 루마니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야심적인 부분이 되었으며 동유럽에서 비교적 넓은 국토를 가졌기에 경제를 이와 같이 급속도로 신장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본 것이다. 역시 1958년 5월에는 루마니아에서 소련군이 철수하는 계획들이 발표되면서 어느 정도 소련으로 부터 자유화 된 현상을 맞이하게 된다. 원래 소련군은 헝가리와 루마니아에 관해서 1947년 파리 강화 조약에 의해 오스트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소련군의 병참선 확보를 위해서 주둔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루마니아에 대한 점령군으로써 행사하기 위해 들어온 것은 아니었지만 헝가리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루마니아의 소련군은 루마니아 내 민주화 운동 발생을 염려하여 진압군으로 그 목적이 변경되어 있었다. 더불어 1955년 오스트리아와 국가 조약을 체결한 후 그 주둔의 구실은 소멸되었기에 이들은 오스트리아를 떠나 헝가리와 루마니아로 철군을 완료한 상태였었다. 헝가리 민주화 봉기 후 소련은 1956년 12월의 폴란드, 1957년 3월의 동독, 1957년 4월의 루마니아, 1957년 5월의 헝가리와 주둔군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루마니아만이 크레믈린 당 중앙회의 때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끈질기게 언급한 끝에 대대적인 교섭이 시작되었다. 이는 소련군의 철수를 실현시켰고, 그 이후 루마니아의 대외 관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즉, 루마니아는 동유럽에서 유고슬라비아 다음으로 그 어느 나라보다 더 소련으로부터 벗어났던 독자적인 외교, 경제적 노선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1958년 이후 루마니아의 독자적 공업화 노선은 앞서 언급한 대로 1960년대에 들어 코메콘(COMECON)의 통합 계획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코메콘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미국은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재건과 원조 기획인 마셜 플랜을 발표하였는데 소련은 여기에 자극을 받아 같은 해에 동구권 국가들의 경제 협력 강화를 도모하는 몰로토프 플랜을 입안하였고, 이것이 1949년 코메콘 창설로 이어졌다. 코메콘은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제상호원조회의를 의미하며 국제경제협력기구로 알려졌다. 이에 대한 통합 논의는 1961년 소련의 제22차 볼셰비키 당 대회 후에 논의되어 조금씩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당 대회 이후,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은 흐루시초프 노선으로 갈아타면서 스탈린에 대한 개인 숭배에 대해 비판을 행하고, 모든 도로, 공원에서 스탈린의 이름을 철폐했다. 1962년 3월에 부쿠레슈티에 있던 거대한 스탈린 상을 철거하면서 개인숭배 자체가 반동이라는 사상을 주입시켰다. 동시에 게오르기우데지는 1963년에 러시아어 필수 교육을 폐지했으며 러시아 언어 · 문학 대학을 격하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소련에게 조금씩 벗어나기 위한 정책들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마니아가 나치 독일에게 해방되는 것에 있어 소련군의 역할을 강조한 역사서를 수정했으며 루마니아 공산당이 소련 볼셰비키를 도와 어떻게 나치 독일을 격파했는지 그 역할에 대해 강조하는 등 교묘하게 탈소련화를 실시했다. 이와 같은 활동들을 배경으로 하여 1963년 3월의 당 확대 중앙 위원회는 코메콘의 공동 경제 국가 기관을 창설하는 계획에 대해 반대하는 결정을 했고, 각지에서는 이 결정을 지지하는 당 집회가 소집되었다. 1964년 4월에는 공산당에 의해 국제 공산주의 운동 및 노동 운동의 문제에 관한 루마니아 노동자당의 입장에 관한 성명이 발표되자, 루마니아인들은 각국의 주권을 초국가적 기관에 이양하려는 것에 크게 반발하였는데, 결국 이는 사회주의 국가 간의 관계를 기초하는 제원칙에 따르면 완전한 평등된, 국가적 주권과 이익의 존중, 상호 이익 및 동지적 협조라는 루마니아 만의 정치, 사회적 입장이단독으로 표명되었다. 루마니아 지도부는 야심적인 공업화를 수행하는 무기로써 과거의 전통에서 민족주의를 이용하는 방법을 선택하면서 소련을 점차 멀리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 1963년에는 유명한 공개 논쟁에서 새로이 나타난 중국과 소련의 대립에 대해서도 1964년 3월에 대표단을 중국에 파견시키는 등 중국과 소련 간의 화해와 논쟁 중지를 위해 적극 중재했다. 1963년 4월에 중국과 통상 협정을 맺음으로써 루마니아는 알바니아를 제외한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 그 해에 대 중국 무역이 증가한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이후에 알바니아와 관계가 개선되어, 1962년 초에 소련을 모방해 한 때 철수한 주 티라나 루마니아 대사가 1963년 3월에 다시 부임하게 됨에 따라 루마니아와 알바니아의 양국 간에 통상 협정이 맺어지게 된다. 한편 1964년 5월에 게오르게 가스톤마린(Gheorghe Gaston-Marin)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의 루마니아 사절단이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게 되고, 7월에 이온 게오르게 마우레르(Ion Gheorghe Maurer) 총리가 프랑스를 방문했다. 이후 외교 통상면에서 서방과 단절했던 루마니아는 무려 30년 만에 서방 자유 진영 국가들과의 관계도 급속히 긴밀화되었다. 이를 통하여 서서히 루마니아의 다각 외교가 개시되었고 이는 차우셰스쿠라는 세기적 독재자가 나타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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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헝가리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탈스탈린주의를 실행하는 루마니아와 공산정권 치하에서의 국제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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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의 전자화와 헝가리에 진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전기 자동차 공장
- 우리 대한민국 기업의 헝가리 진출은 수교하자마자 존재했지만 그 시작이 미미했었고 굵직한 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비교적 적었다. 우크라이나에 대기업 13개가 들어가 키예프 일대에 산업단지를 형성하고 삼성이 대규모 공단을 지어 유럽 진출의 교두보를 튼것과는 달리 헝가리는 생각보다 미미했던 것이다. 그러나 2019년 두산중공업이 전기차용 배터리의 핵심 부품인 전지박을 만드는 헝가리 생산공장을 착공하게 되면서 이때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두산은 전지박 생산을 위해 2018년부터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 14만4천㎡ 부지에 공장 건설을 준비했으며 2020년 초에 완공할 예정인데 코로나 때문에 조금씩 미뤄지다 하반기에 완공했다고 한다. 헝가리 전지박 공장은 연간 5만t을 생산할 수 있으며 이는 전기차 220만대에 공급할 수 있는 규모로 알려져 있다. 두산은 헝가리의 공장이 유럽의 유일한 전지박 공장으로 헝가리 현지 전기차 배터리 업체들과 가까워 물류비가 절감됨은 물론 이에 따른 가격 경쟁력과 품질 안정성 측면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전지박은 전기차 배터리의 음극재 부분에 씌우는 얇은 구리막으로 열을 외부로 방출하고 형상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는 핵심 부품이다. 앞서 두산은 2014년 룩셈부르크의 동박 제조업체 서킷포일 인수로 전지박 원천기술을 확보해 전지박 시장에 진출한 바 있다. 전기차 배터리용 전지박 시장이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전략적으로 투자한 것이 결실을 보았고 고품질이면서 가격 경쟁력을 갖춘 유럽 시장 최고의 전지박 생산 거점으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두산중공업에 이어 2020년에는 롯데알미늄이 1,100억원을 투자해 친환경 전기차에 사용하는 2차 전지용 양극박 생산 공장을 헝가리에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양극박은 충전과 방전을 반복할 수 있는 2차 전지의 용량과 전압을 결정하는 양극집 전체에 사용되는 알루미늄박으로 알려져 있다. 전기화학 반응으로 생성된 전자를 모아 방전될 시 필요한 전자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공장은 친환경 자동차 인프라가 구축된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에 6만㎡ 규모로 들어선다고 발표했다. 2020년 4월 착공해 2021년 상반기 완공 예정이라 하는데 아직까지 완공되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롯데알미늄은 헝가리의 공장에서 매년 18,000t에 이르는 2차 전지용 양극박을 생산해 유럽 지역 수요 업체에 공급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롯데알미늄의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의 공장 건설이 들려오지 않는데다 같은 지역에 위치한 삼성전자가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가 2주 후부터 다시 가동되고 있다고 한다. 삼성전자의 유럽 내 공장은 헝가리를 비롯해 슬로바키아와 폴란드에 있으며 특히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공장은 두 곳 모두 TV를 생산하는 곳이라 삼성전자의 유럽 내 TV 제조라인이 멈추었던 전무후부한 사건이다. 그 이유는 바로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무사히 잘 돌아가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SK이노베이션이 헝가리 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현지 전기차 배터리 증설을 위한 기술인력 300여명을 급파했다. 당시 코로나 때문에 헝가리의 국경폐쇄 조치가 감행됨에 따라 코마롬 제2공장 건설에 차질을 빚으면서 이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조사되었다. SK이노베이션은 헝가리 제2공장 준공, 시운전 등을 거쳐 2022년 초 제품을 본격 양산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데 아직 가동되었다는 소식은 없다. 아마 올해 안에는 가동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처럼 헝가리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전자, 전기차, 베터리 등의 산업에 집중되어 있다. 헝가리에 이같은 산업이 집중된 이유는 무엇일까? 유럽의 대기 오염은 공중 보건에 있어 가장 큰 환경적 위험 요소에 속해 있다. 하지만 각 EU에 속해있는 정부는 이 위기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유독성 공기로 매년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있는 실정이다. 유럽의 대기 오염 한계는 WHO 지침 보다 훨씬 약하고 ,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는다고 EU 환경 감사 보고서에서 밝혀왔다. 따라서 이같은 원인이 석유와 석탄으로 인해 생성된 이산화탄소가 과다 배출된 것을 원인으로 삼고 있으며 이를 줄이고 가격도 훨씬 저렴한 천연가스를 대체 연료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천연가스가 가장 풍부하고 저렴한 값으로 매입이 가능한 러시아에게 가스를 의존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스의 의존은 러시아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로 점차 치중되어졌고 유럽 각국은 러시아로부터 가스를 사들이면서 러시아의 국력 신장과 그로 인한 위협에 경계심을 갖기 시작한다. 유럽이 갖고 있는 에너지 시장의 탈러시아화는 바로 전기의 생산량을 극대화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그러한 차원에서 EU 국가들이 전기차 보급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가운데 헝가리가 유럽의 전기차 및 배터리 공장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 배터리 회사들이 헝가리에 속속 생산기지를 갖추고 있으며, 독일과 중국의 자동차 회사들도 공장 설립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인구 980만 명의 동유럽 국가 헝가리가 전기차 시대의 제조 허브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자원 하나 없는 헝가리가 전기차 시장의 허브가 된 이유는 헝가리 정부의 적극 지원 때문이다. 헝가리 정부는 전기차 구매에 따른 보조금 지원, 초록색 번호판 제공, 무료 주차 허용, 등록세 및 기타 비용 면제, 충전소 설치 및 운영 기준 완화 등을 제시했고 EU의 환경보호 정책에 발맞춰 전기차 구매에 대해 보조금 지급 정책까지 발표했다. 구체적으로 1천만 포린트 (한화 약 3,500만원) 미만 전기차에 대해서는 최대 250만 포린트 (한화 약 880만원) 지원, 1천만 포린트 이상 1,500만 포린트 (한화 약 5,300만원) 이하 전기차에 대해서는 50만 포린트 (한화 약 176만원)을 지급하도록 정했다. 환경오염도 방지하고 러시아에 대한 자원 의존도를 낮추고 에너지 자원의 탈러시아화를 꿈꾸는 유럽 시장에 있어 전기차 사업이나 이를 받쳐주는 차 베터리, 전기차 충전소 설치 사업은 꽤나 매력적인 산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려면 헝가리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발전소도 필요하다. 그래서 생각해낸게 원자력발전소의 추가 건립이다. 헝가리 원전 증설은 현재 가동 중인 퍼크스 원전을 대체할 1천200㎿급 원자로 2기를 새로 짓는 사업인데 이에 대한 전반적인 지원은 러시아가 해주기로 했다. 헝가리는 2014년 러시아 국영 원전기업 로자톰과 계약하면서 건설 비용 100억 유로의 80%를 러시아에서 차관하여 들여오기로 했다. 빅토르 오르반은 첫 번째 원자로는 2018년에 착공해 2023년 가동을 시작한다는 계획으로 현재 공사 중에 있다. 여기에 당시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기후 변화 회의가 끝난 후, 탄소중립이 가능하려면 원전이 필요하다는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의 의견에 공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원전 중심의 발전 정책을 폐기한다”는 5년 전 탈(脫) 원전 선언을 하셨던 대통령이라 헝가리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헝가리 원전 정책은 왜 공감했는지 모르겠다. 우선 그 이야기가 주된 이야기가 아니기에 넘어간다. 러시아가 헝가리의 원전 건설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은 서유럽을 향해 핵을 생산할 수 있는 기지를 두겠다는 일종의 안보 위협과 같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유럽 자체가 탄소 중립에 공감하고 그로 인해 전기차, 전기의 증설과 더불어 전력으로 할 수 있는 산업들을 추진하여 더 이상 지하의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춤에 따라 이와 같은 정책을 되돌리기란 어렵다. 유럽은 에너지 문제에 대해 최악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어떻게든 환경 문제의 해결과 에너지 자원 의존도를 낮추며 탈러시아화를 추구하려 하지만 전기, 전자화 될 때까지 당분간 러시아의 지하 에너지를 써야 하는 유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문인 것은 과연 전자화가 지하 에너지들을 대체하는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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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의 전자화와 헝가리에 진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전기 자동차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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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폴란드의 대립 삼각관계
-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함께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폴란드를 삼국 분할을 하며 폴란드 동부를 지배했다. 폴란드가 이전에 러시아에서 악랄하게 대했던지라 러시아도 폴란드에 보복을 하게 되었다. 두 나라는 숙적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였다. 동구권 블록 및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는 폴란드의 제1가상 적국이다. 그래서 폴란드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나토에 가입했으며 미군 주둔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면서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있다. 언어와 혈통에서 러시아와 폴란드는 같은 슬라브 계통에 속하기는 하지만, 서슬라브 계통인 폴란드가 일찍이 카톨릭을 받아들이고 서방권으로 편입된 반면 동슬라브 계통인 러시아는 정교회를 받아들여 문화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소련 시대에는 소련인 인구 상당수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계였던 영향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이 사악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봉건 지주의 대명사로 묘사되곤 했다. 그렇다면 내내 폴란드가 우위였던 두 나라의 관계는 언제 역전이 되었을까? 러시아가 폴란드 강점기에서 해방된 직후, 17세기에 일어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코사크족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와 폴란드 정부에 봉기를 일으키게 되고 이를 기점으로 두 나라의 세력 관계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를 받으면서 정교회를 믿던 동슬라브계 주민 루테니아인들은 우크라이나 그리스 카톨릭을 비롯한 동방 카톨릭 교회로 개종을 강요 받게 되자 자신들을 보호할 수호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에 러시아는 대대적으로 개입을 시작하여 폴란드군에게 연이어 승리하고 스웨덴과 함께 국토의 95% 이상을 점령하여 폴란드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결과적으로 신성로마제국과 헝가리의 개입으로 폴란드를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했지만 국경이 드네프르 강으로 서쪽으로 변경되면서 키예프 장악 이후 폴란드 국토 전역이 황폐화되었다. 이 때부터 두 나라의 관계는 러시아의 일방적 우세로 전환된 것이다. 또한 20년에 걸친 전란으로 인해 폴란드의 교역 인프라가 완전히 파괴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어 회복되지 못하게 되었다. 폴란드가 범국가적 혼란에 직면하는 동안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라는 명군에 의해 유럽 진출을 시도하게 되고 서유럽과 더불어 해상을 주도하는 강국으로 탈바꿈 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폴란드와 이웃한 프로이센 등도 인구가 급증하며 국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반면 폴란드는 대북방전쟁, 폴란드 왕위계승전쟁 등에서 잇달아 패배하여 국력은 더욱 약해져 갔다. 그리고 사실상 예카테리나 대제 당시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179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여 지배했다. 이처럼 폴란드 동북부 영토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를 받고 동시에 러시아의 처절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포란든는 러시아에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특히 카톨릭과 폴란드어, 라틴 문자 사용이 금지되면서 인종 자체를 멸절시키려 했다. 러시아령 폴란드의 영토는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로 불리며 차르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시기 농노 해방 때는 모든 러시아의 농노들이 해방되었어도 폴란드만은 예외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폴란드를 지배하는 제주 계층에게 특별히 불리한 형태로 보상이 이루어지게 된다. 러시아 귀족들의 가장 노른자 땅이던 토질이 비옥한 우크라이나 일대에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대한 불려서 계산한 반면, 벨라루스 및 폴란드 일대에서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소로 축소시켜 폴란드 지식 계층을 몰락시키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러자 당시의 폴란드의 지식인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많은 수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으로 이주했다. 여기에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도 포함되었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퀴리 부인은 프랑스에서 방사성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여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가 설치되었을 때는 1832년 11월 봉기가 발생하고 1863년 1월 봉기로 인해 폴란드의 입헌 왕국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부터 부여 받은 자치권을 상실하고 급속도로 러시아에 편입되었던 시기로 나타난다. 특히 1870년대부터는 사실상 러시아의 장군들이 통치하는 군정이 되었고 1880년대에는 폴란드어가 러시아어와의 공용어 지위를 박탈당하고 사용이 금지되었다. 당시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학교 수업 중에 수시로 러시아군 장교가 들어와 폴란드인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을 테스트하고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이 서투르거나 하면 교사들을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가혹한 폴란드 민족 말살 정책의 실상은 이브 퀴리가 저술한 퀴리 부인의 본명인 마리 퀴리의 전기 <마담 퀴리>에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민족 말살 정책은 당연히 폴란드인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 마리 퀴리의 친구 오빠는 폴란드의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가 러시아군에게 체포되어 공개 총살당했고, 이에 분노한 마리와 그녀의 친구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승전비를 볼 때마다 비석에 침을 뱉기도 했으며,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을 때는 매우 기뻐했다 한다. 그로 인한 원한으로 인해 후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후신인 소련을 상대로 소련-폴란드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폴란드군은 잡혀온 소련군 포로들을 가혹하게 구타하면서 고문과 학대를 일삼았다. 그러한 구타와 학살로 인해 2만 명 가량의 러시아인들이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폴란드 동화 정책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독일 제국이 폴란드 지역을 점령, 폴란드 섭정왕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세우면서 종료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본토를 떠나 러시아령 폴란드로 이주해 거주하던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이 러시아령 폴란드를 점령하자 대부부 이를 피해 러시아 본토로 돌아갔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 및 독일 제국 편에 붙은 토착 폴란드인들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오늘날 폴란드 내 정교회 신자들 및 러시아령 폴란드의 러시아인 실향민 후손들은 폴란드에 남아있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내 문화유산들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소련-폴란드 전쟁도 1920년 10월 12일 정전을 합의했고, 이후 협상에서 벨로루시를 절반으로 분할하여 서쪽은 폴란드에게, 민스크를 비롯한 나머지는 러시아가 영유하는 강화 조약을 맺게 된다. 이것이 1921년 3월에 체결되었던 리가 조약이다. 민스크를 폴란드가 러시아한테 양도하는 것은 합의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당시 협상에 나섰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는 민스크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까지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가 조약의 체결로 인해 폴란드-러시아 간 국경선이 합의됨에 따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멸망이 확정되었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는 국외로 망명하면서 질긴 투쟁을 이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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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폴란드의 대립 삼각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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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앞잡이로 자국에서 환영받지 못한 폴란드의 영웅 콘스탄틴 로코소브스끼(Константин Рокоссовский, 1896~1968) 이야기
- 콘스탄틴 로코소브스키(Константин Рокоссовский)는 폴란드계 러시아 귀족 계급의 아버지 크사베리 보이치에흐 로코소프스키(Ksawery Wojciech Rokossowski)와 러시아인 어머니 안토니나 옵샨니코바(Антонина Овсянникова)의 사이에 1896년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부친인 크사베리는 러일전쟁 때 장교로 복무하면서 발틱함대를 탑승했다가 현해탄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침몰하였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가문은 몰락하여 철도 노동자로 취업해 프스코프 주(州)의 벨리키예루키(Великие Луки)로 이주했다. 부친인 크사베리는 철도 노동자로써 삶이 순탄치 않았고 1907년에 갑작스러운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어머니인 옵샨니코바 역시 1911년에 세상을 떠나 로코소브스키는 15세라는 어린 나이부터 여동생과 함께 폴란드 방산 공장에서 노동을 해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이후 채석장과 직물 공장 등을 전전하여 힘들게 일하던 로코소브스키는 16세에 이르어 폴란드 반(反) 정부 노동자 시위에 휘말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의해 투옥 생활도 경험하게 된다.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로코소브스키는 러시아군에 입대하여 동부전선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는 부사관으로 훈련받은 후 제5기병연대에 입대하여 뛰어난 용맹성을 발휘했다. 이와 같은 용맹성을 인정받아 그는 4개의 게오르기 십자 훈장을 획득했다. 여기까지는 그의 라이벌이자 친구이기도 한 게오르기 주코프(Георгий Жуков)의 경력와 비슷하게 흘러간다.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로코소브스키는 소련 공산당과 신생 소련군에 입대하였고 폴란드인 출신 지원병들을 모집하여 소련군에 입대시켰으며, 적백내전이 발발하자 제30기병사단 소속 연대를 이끌고 백군과 전투를 벌였다. 백군을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제압하는데 대활약을 한 로코소브스키는 프룬제 군사대학에 입학해 엘리트 장교가 되는 교육을 받았지만 소련군 내에서 암암리에 벌어진 폴란드 출신에 대한 차별로 인해서 승진이 어려운데다 몰락한 로마노프 제국 시절 귀족집안, 부르주아로 찍혀 장교들 사이에서도 집단 따돌림을 당해야 했다. 그런데 1919년에 소련-폴란드 전쟁이 터지자 제27기병 연대장인 로코소브스키는 자신의 연대를 이끌고 참전하여 동족인 폴란드 인과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이 전쟁에서의 활약으로 로코소브스키의 충성심이 인정되어 그는 군부 내에서 입지를 강하게 만들 수 있었다. 1937년에 스탈린은 군부 내에도 대숙청을 감행했고 로코소브스키는 스탈린의 숙청의 대상자가 되고 말았다. 그는 폴란드계 소련인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었으며 그의 공무와 처사에 매번 간섭하는 정치 장교들과 자주 갈등을 일으켜 당성에 의심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핀란드와의 겨울전쟁에서 대숙청으로 인해 유능한 장교들이 부족하여 소련군의 패착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자 1940년에 총참모장으로 임명된 게오르기 주코프는 스탈린에게 숙청되어 수용소에 갇힌 지휘관들을 전선에 복귀시키자고 강력히 주장했고 스탈린은 마지못해 이를 승인했다. 시베리아에 유형되어 있던 로코소브스키는 자신이 왜 숙청되었는지를 포함해 일체의 해명없이 곧바로 석방되었다. 로코소브스끼는 크림 반도에서 잠시 요양한 후 스탈린과의 면담한 뒤, 제9기계화 군단장으로 현역에 복귀하였다. 이후 대조국전쟁이 발발하자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 제6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항복을 직접 받아 명성을 떨쳤고 이후 중부전선군과 브랸스크 전선군을 통합한 벨라루스 전선군의 사령관에 취임해 바그라티온 작전의 최선봉에 서서 민스크를 포위해 9군을 섬멸했다. 그리고 독일 제4군과 제1기갑군을 궤멸시켜 우크라이나를 장악한 다음 폴란드의 바르샤바 근처 비스와 강까지 진격하는 바그라티온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기도 했다. 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폴란드는 소련의 위성국인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되었는데, 로코소브스키는 스탈린의 명령을 받아 신생 폴란드 정부의 국방장관이자 폴란드군 원수에 취임했고 뒤이어 내각 수반인 각료 의회 의장 자리까지 차지했다. 로코소브스키는 사실상 소련의 대리인이며 볼셰비키의 지령을 받는 폴란드의 감시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나름 폴란드군을 제대로 정예화시키는데 기여했다. 로코소브스키 뿐만 아니라 소련군에 있던 여러 폴란드계 소련인들이 폴란드군에 돌아와 지휘관이나 부사관을 역임하면서 현재 폴란드군의 기반을 만들었다. 로코소브스키는 오랫동안 러시아에서 살았기 때문에 폴란드어가 무척 어눌했으며 기본적인 단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이에 폴란드 국민들은 소련-폴란드 전쟁과 바르샤바 봉기에서 로코소브스키가 한 기행과 악행으로 인해 로코소브스키를 소련의 하수인이자 러시아에서 온 이방인으로 생각하여 매우 싫어하고 불신했다. 이에 로코소브스키는 러시아에서 자신을 폴란드인이라고 했는데, 폴란드에서는 자신을 러시아인이라 한다며 나름 불편한 감정을 내비치기도 했다.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집권하자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폴란드를 비롯해 동유럽 국가들에서는 반소 자유화 운동이 발생하게 된다. 로코소브스키는 이를 잔인하게 탄압하는 것에 앞장섰고 비밀경찰, 고문과 강제 수용소를 동원해 소련에 반대하는 수많은 인사들을 체포했다. 이는 로코소브스키 자신이 소련에서 대숙청 당시 당했던 것과 같은 방법이었다. 더불어 1956년 포즈난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에는 약 1만 명의 병력과 300대의 전차를 동원해 동족인 폴란드 군중들에게 발포까지 하며 시위대를 해산시켰고 그로 인해 74명의 사상자를 냈다. 로코소브스키의 이와 같은 잔혹한 방법은 큰 비난을 받았고 폴란드 내에서의 로코소브스키의 입지는 크게 좁아졌다. 같은 년도에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집권하자 로코소브스키는 해임되어 소련으로 추방되었다. 로코소브스키는 흐루시초프에게 폴란드를 무력으로 침공하여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흐루시초프는 로코소브스키의 주장을 받아주지 않았고 대신 폴란드의 지도자였던 고무우카와 협상을 개시했다. 흐루시초프는 고무우카와의 협상에서 로코소브스키를 다시 폴란드로 돌려보내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반면 로코소브스키에게는 폴란드 귀화 이전의 소련 직위를 다시 내리며 달래기도 했다. 학자들은 로코소브스키가 대조국전쟁의 분수령에서 항상 선봉을 자처하여 승리를 이끌어 낸 전형적인 명장이자 소련 승리의 큰 공신으로 평가하고 있다. 로코소브스키는 소련군 내에서도 대조국 전쟁에 활약한 일선 야전 사령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지휘관 중 한 명으로 불린다. 군인으로서의 로코소브스키는 최고의 능력을 갖춘 인물로 그의 수하들은 그를 정직하며 겸손하다고 높이 평가했다. 로코소브스키의 제2 벨라루스 전선 군대는 동유럽 점령지에서 최대한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 했다는 사실까지 그의 치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도 러시아에서는 로코소브스키를 영웅으로 숭배하며 모스크바에는 로코소브스키 거리가 있다. 반면 로코소브스키의 고향인 폴란드에서는 소련에 부역한 인물로 매국노 취급을 받고 있다. 폴란드의 역사에서는 로코소브스키의 개입 기간을 폴란드 인민공화국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로 여기고 있다. 사실 이는 스스로 폴란드인이라는 생각이 전혀 없던 로코소브스키를 폴란드계라는 이유로 폴란드에 주둔시킨 스탈린의 잘못된 인사행정으로 빚어진 일이다. 민주화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1950년대 후반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등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자가 집권했을 때부터 이미 이 기간은 최악의 역사로 여겨졌다. 소련의 눈치를 봐야 했던 공산주의 통치자들에게도 비난받을 정도로 로코소브스키는 폴란드에서 행동과 정책은 최악이었다. 그는 군인으로 훌륭했었던 인물이지만 행정은 최악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로코소브스키는 러시아계 폴란드인들에게는 입지전적의 인물로 좋은 평가를 듣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도 토착 폴란드인들이 워낙 좋지 않게 보기 때문에 로코소브스키를 영웅으로 찬양하지는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벨라루스의 경우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정권으로 대표되는 친러 진영에서는 소련 계승의식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콘스탄틴 로코소브스키를 구국의 영웅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벨라루스 민족주의 세력으로 대표되는 반러 진영에서는 그냥 외국인 러시아의 위인 정도로만 여기고 있다. 반러 진영은 로코소브스키가 나치 독일을 격퇴한 명장이라는 것 자체는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그러한 그의 업적을 그저 소련 군인으로서의 업적으로만 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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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앞잡이로 자국에서 환영받지 못한 폴란드의 영웅 콘스탄틴 로코소브스끼(Константин Рокоссовский, 1896~1968)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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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의 혈통들, 루마니아 로얄 패밀리들의 집단 정체성
- 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의 혈통에 대해서는 루마니아 학계에서 많은 의견들과 각종 견해들이 나타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바사라브 왕가의 기원이 트란실바니아에 정착한 슬라브 계통이라고 하기도 하고, 일부 학자는 아시아에서 건너온 쿠만 종족의 일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민족주의 학자들은 고대 다키아 지배층의 후손이라는 주장이 강하다. 2012년에는 루마니아 문화부에서 바사라브 왕가의 인종적 기원을 찾기 위해 쿠르테아 데 아르제쉬(Curtea de Argeș) 수도원에 안치되었던 블라디슬라브 1세(Vladislav I) 왕의 시신에서 DNA를 추출하여 검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바사라브 왕가의 기원에 대해서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바사라브 왕가의 왕들 중 많은 수의 왕은 생을 마감한 후에 쿠르테아 데 아르제쉬의 수도원이나 코지아의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의 시조는 지금의 루마니아 남동부 지역 문테니아(Muntania)와 남서부 지역 올테니아(Oltenia)를 다스렸다. 바사라브 1세(재위 : 1310~1352)는 발라히아(Balahia, 영어로는 왈라키아) 또는 짜라 로므네아스커라고 불리는 공국을 건설한 후, 당시 헝가리의 지배하에 있던 루마니아 남동부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다가 점차 헝가리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이 다스리는 영토를 독립된 공국의 지위로 올려 놓았다. 바사라브 1세는 1330년 정확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포사다(Posada) 지역에서 헝가리의 왕 카를로 로베르트 1세의 침략군을 대파하고, 발라히아를 독립된 공국의 지위로 격상시켰다. 바사라브 1세의 지략이 크게 각광받았던 포사다 전투 이후에 루마니아 남부의 발라히아 뿐만 아니라 루마니아 동북쪽의 형제 공국인 몰도바도 헝가리의 간섭에서 점차 벗어나 독립된 공국의 기틀을 닦을 수 있게 되었다. 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는 바사라브 1세의 뒤를 이어 1600년대까지 발라히아 공국의 수많은 왕들을 배출했다. 몰도바 공국의 무샤트(Mushat) 왕가와는 잦은 정략 결혼을 통해 혈연 관계를 맺어 왔으며, 이를 통해 두 공국은 국가의 위기 때마다 서로 협력하면서 국난을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바사라브 1세의 딸 테오도라(Theodora)는 불가리아의 이반 알렉산데르 왕과 결혼하여 제2 불가리아 제국의 외척 혈통이 되었다. 바사라브 1세의 아들인 니콜라에 알렉산드루(Nicolae Alexandru)의 장녀 엘리자베타(Elizabeta) 공주는 폴란드 야기에우워 왕조의 오폴레(Opole)의 블라디슬라우스(Vladislaus) 왕과 결혼하였고, 작은 딸 안카(Anka)는 세르비아의 스테판 우로쉬 5세 왕과 결혼하였다. 이후에도 발라히아의 바사라브 왕가는 유럽의 여러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어 왔기 때문에, 현재 유럽 주요 왕실의 혈통에는 바사라브 왕가의 혈통이 섞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의 전통적인 왕위 계승 방식은 장자 상속이 아니라 국가 평의회 귀족들의 합의에 의한 선출 방식이었다. 왕이 낳은 모든 아들들은 적자이든 서자이든 상관없이 모두 왕실 혈통으로 받아들여졌고, 언제든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잠재적인 자격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사실 발라히아 공국의 왕위 계승은 상황에 따라 매우 복잡한 양상을 보이게 된다. 어떤 때에는 군사력으로 왕권을 장악하기도 하였고, 어떤 때에는 외국 강대국에게 조공을 약속하고 재가를 얻어 왕위를 보장받기도 하였다. 특히 오스만투르크가 발칸 반도의 거의 대부분을 장악한 1500년대 이후에 등극한 바사라브 왕가의 발라히아 왕들 중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오스만투르크 황제의 허가를 받고 난 후에야 비로소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의 대다수 왕들은 왕권 투쟁 과정에서 왕위 등극과 하야를 여러 차례 반복하기도 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추방되었던 왕이 불과 몇 달 만에 다시 등극하는 일도 있었고, 잠시 왕좌를 아들이나 형제에게 맡겨 놓았다가 얼마 뒤에 다시 찾아가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사라브 왕가의 왕들은 가계 도상에서 재위 순서로 나열하면 비슷한 왕의 이름이 적게는 두세 차례, 많게는 여섯 차례까지 반복되어 등장하기도 한다. 바사라브 왕가는 1400년대 중반 이후에 도네쉬티(Doneshiti) 왕가와 드라쿨레쉬티(Draculeshiti) 왕가로 분류되어 져서 서로 오랜 기간 동안 권력 투쟁을 벌였다. 두 왕가는 서로 상대방을 암살하거나 상해를 입히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면서까지 서로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였다. 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는 헝가리, 오스만투르크, 폴란드, 러시아 등을 상대로 때로는 전쟁을 치르거나 화친을 하면서 중세 유럽 변방의 작은 공국인 발라히아를 수성해냈고, 지금의 루마니아가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된다. 루마니아 국민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미르체아 첼 버트른(Mircea cel Bătrân), 블라드 체페슈(Vlad Țepeș), 미하이 비테아줄(Mihai Viteazul) 등이 바사라브 왕가의 가장 대표적인 왕들이다. 바사라브 왕가의 마지막 왕은 미흐네아 3세(Mihnea III, 재위 : 1658~1659)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바사라브 왕가는 발라히아의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후손들은 유럽 여러 왕실과 혈통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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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의 혈통들, 루마니아 로얄 패밀리들의 집단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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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미국 : 이스라엘의 12일 전쟁 휴전이 우크라이나에게 미칠 영향과 나토 정상회의의 주 논제들에 대해
- 이란-미국 : 이스라엘의 12일 전쟁 휴전이 성사된 이후, 남은 것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선이다. 이란-이스라엘 전쟁을 끝낸 방법을 다시 사용하기에는 위험부담도 크고 이란-이스라엘과는 상황이 크게 다르다. 중동 전쟁에서 우선 우방인 이스라엘이 있고 확전을 원치 않는 걸프만의 수니파 왕정 국가들도 있으니 미국은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선 이란에 대해서는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지만 핵 시설이 파괴됐는지는 미지수고 목적이었던 우라늄 고농축물이 파괴되었다는 확인 또한 하지 못했다. 사실 트럼프식 "보여주기 위한 쇼"로 마무리 된 미국의 작전은 생각보다 그 성과가 미미했다. 만약 핵 시설의 복구가 완료 된다면 트럼프의 이 작전은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은 키예프에 압력을 가해 전면 휴전에 동의하도록 설득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아직까지 무조건적인 휴전에 동의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이란처럼 폭격 전략을 사용한다면 오히려 미국이 위험해질 공산이 크다. 그것은 바로 '핵 전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핵탄두 수는 러시아가 미국을 압도하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의 네오콘들은 트럼프에게 대(對)러시아에 대한 강경책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미 바이든 정권 때 대러 강경책은 실패로 돌아간 바 있어 이는 쉽지 않는 선택이다. 그렇다고 모스크바가 정한 휴전 조건을 모두 들어줄 수도 없다. 이럴 경우, 동맹국들의 신뢰를 모두 잃고 비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 입장에서는 고민에 빠질만 하다. 그나마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다행스러운 것은 트럼프가 중동 위기를 최단 시간 안에 종결지었다는 것이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는 사실에 있다. 이란 핵 협상에서 러시아가 어느 정도 역할에 참여할 경우를 생각한다면 모스크바와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 어렵다는 점은 무시하기 힘들다. 푸틴 대통령과의 개인적 친분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조기 종식을 이끌어 내려는 트럼프로서는 러시아에 대한 강경책보다는 러시아의 입장을 최대한 들어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 현재로서는 매우 유력한 상황이다.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이제 자신들에게 지원을 올인하게 됐다고 마냥 좋아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래도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중동 전쟁이 예상보다 빨리 끝난 것이 행운으로 여길만 하다. 하지만 군사적인 측면으로 볼 때 12일 동안의 중동 전쟁은 이미 우크라이나에 큰 내상을 안긴 셈이다. 미국이 앞으로 이스라엘과 중동 내 군사기지들의 방공망 강화에 집중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는 이란의 드론과 미사일 반격으로 이스라엘이 자랑하던 최강의 방공시스템들이 붕괴되어 버렸다. 이를 복구하고 새로운 방공시스템들을 강화하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비록 우크라이나가 돈을 주고 미제 무기를 산다고 해도, 우크라이나에 방공시스템 등 군사 장비를 제공할 여유가 없기 때문애 우크라이나의 향후 선택은 중동의 포화가 조기에 그쳤지만, 여전히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는 가운데 나토 정상회의가 24, 25일 양일간 열리고 있다. 가장 큰 안건은 방위비 분담이다.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은 미국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헤이그에서 열릴 회의의 내용을 이미 결정한 상태이기 때문에 "방위비 분담" 이야기는 확정된 사항이다. 나토 회원국들은 방위비를 증액하겠다고 약속을 했으며 이는 트럼프 원하는 바이기도 하고 이번 회의를 통해 이를 확정지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타협안과 임시 방편적인 부분들이 불가피하게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이번 정상회의는 무역과 러시아, 그리고 중동에서 심화하는 분쟁 문제를 둘러싼 여러 안건들로 인해 많은 나토 동맹국들 간의 의견 충돌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왜냐면 나토 회원국 중, 대러 강경책을 좋아하지 않는 헝가리, 슬로바키아, 터키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트럼프의 입장에 변수다. 여태까지 국제 문제에서 속 시원하게 해결된 일이 없는 상황이 트럼프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 이란-이스라엘의 휴전을 성사시켰지만 이 또한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다. 이스라엘이 휴전 약속을 깨고 가자지구를 선제 공격한 것처럼 이번에도 이스라엘이 먼저 깨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현재 부패 혐의 등으로 핀치에 몰려 있는 네타냐후 입장에서는 어쩌면 전쟁을 통한 내부 문제를 외부로 환기시키는 것 때문에 어떤 행위를 벌일 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트럼프는 나토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었다. 심지어 나토의 집단방위체제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트럼프가 첫 임기 중 처음으로 참석한 나토 정상회의에서 유럽 동맹국들이 나토군에 대해 충분한 지출을 하지 않고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며 질책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트럼프는 나토에 대해 매우 일관된 입장을 고수해왔다. 마르크 뤼터 사무총장은 트럼프와 절친인 인사다. 그는 나토에서 트럼프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전개할 수 있도록 조율하고 있는 인물이다. 따라서 뤼터는 나토 정상회의는 3시간 동안만 진행되며, 트럼프의 요구로 인해 정상회의 공동성명은 5개 문단으로 축소시키는 등 왠만하면 짧고 간결한 측으로 초점이 맞춰졌다. 이번 정상회의 시간이 짧아진 이유는 장시간의 긴 회의를 싫어하는 트럼프의 성향에 맞추고 그의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뤼터가 일부러 스캐줄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논의 주제가 적은데다가 짧은 정상회의가 오히려 나토 회원국들 간의 의견 분열을 숨기는 것에 도움이 된다. 나토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커트 폴커는 일부 유럽 국가들이 국내총생산(GDP)의 5%를 국방비로 지출하라고 요구하는 트럼프의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왜냐면 서유럽에 비해 경제력이 약한 동유럽 국가들에게 있어 그와 같은 비용들은 국가 예산에 큰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루마니아, 불가리아의 경우, 더더욱 쉽지 않다. 참고로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는 나토 회원국 중 가장 1인당 GDP가 낮은 국가로 EU에서도 가장 가난한 국가로 꼽힌다. 현재 유럽은 여전히 나토 전체 군사비 지출의 30%만을 부담하고 있다. 커트 폴커는 유럽 회원국들 중, 가난한 회원국들이 이처럼 노골적으로 강요를 받은 것은 유감이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한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일부 유럽 국가들은 이미 국방비를 GDP의 5%까지 늘리고 있다. 대개 폴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러시아와 인접한 국가들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많은 나토 회원국들이 새로운 국방비를 목표치까지 달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발트 3국 중,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의 경우, 10년 전에 설정한 목표치의 2%도 채 달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설정한 뤼터의 타협 안은 동맹국들이 핵심 나토 국방비를 GDP의 3.5%까지 늘리고, 국방 관련 지출에 1.5%를 추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국방 관련 지출의 개념이 모호하기 때문에 이런 타협 안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뤼터는 여기에 교량과 도로, 철도 건설과 같은 인프라 산업 비용도 포함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 정도 금액 가지고 인프라 구축까지 담당하는 것은 무리다. 물론 새로운 지출 목표가 승인되더라도 일부 국가들, 아까 언급했던 루마니아나 불가리아의 경우, 2032년 또는 2035년까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의지가 거의 없을 수 있다. 물론 목표 달성 시기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대개 그동안 나토 회의에서 정해졌듯이 10년 단위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스페인 총리 페드로 산체스(Pedro Sánchez)는 이미 새로운 목표치가 불합리하고 비생산적이라고 언급하면서 불가하다는 입장을 비췄다. 영국 총리 키어 스타머는 영국이 언제까지 GDP의 3%를 국방비로 지출할지조차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말로는 언젠가 의회에서 이를 논할 것이라고 언급했을 뿐이다. 하지만 나토를 영국 국방 정책의 중심에 두겠다는 영국 정부 방침으로 볼 때, 스타머는 이와 같은 새로운 계획을 지지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새로운 계획은 러시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나토 자체 방위 계획의 일환이다. 뤼터는 러시아가 나토 회원국을 5년 이내에 공격할 수 있다고 발언한 적 있다. 그런데 나토의 방위 계획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내일 26일이면 그 또한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뤼터 는 이미 나토에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밝힌 바 있는데 나토가 현재 방공 및 미사일 방어 체계를 400% 이상 증강하기 위해 수천 대의 장갑차와 탱크, 그리고 수백만 발의 포탄을 더 확보해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무기를 우크라이나에게 퍼줬기 때문이다. 영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회원국은 아직 나토에서 약속한 역량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스웨덴은 군대 규모를 두 배로 늘리고, 독일은 병력을 6만 명 이상 증원할 계획이다. 그런데 나토는 러시아가 침공할 경우 동맹이 동쪽 측면 지역을 어떻게 방어할 것인지에 대해 상당한 딜레마에 빠져 있다. 유럽 주둔 미군 사령관인 크리스 도나휴(Chris Donahue)는 최근 연설에서 러시아 영토인 칼리닌그라드 인근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영토를 방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도나휴는 동맹의 기존 역량을 살펴본 결과 동맹들의 역량이 러시아를 상대로 지역 방어로 맡기는 것은 허상이었음을 빨리 깨달았다고 밝혔다. 그 전략대로 해야 하는데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군 능력이 해당 지역 방어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인 것이다. 그렇다고 미군을 투입할 수는 없다. 미군 투입은 오히려 러시아를 자극시켜 러시아군의 대규모 공격이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여기서도 자제될 것으로 보인다. 젤렌스키가 참여했지만 대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유럽 측의 소득만 있을 뿐, 미국의 지원은 가능성이 낮다고 본다. 특히 트럼프가 이미 푸틴 대통령과 대화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을 보류하고 있기 때문에 나토의 직접적인 지원보다 EU 차원의 개별적인 지원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이 문제는 현재 유럽과 미국을 분열시키는 가장 큰 쟁점이다. 커트 폴커는 트럼프 정권에서 미국이 우크라이나 안보를 유럽 안보에 필수적으로 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유럽 동맹국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한편 뤼터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는 이슈는 제외됐다고 하였다. 이는 트럼프와의 분열을 피하기 위해서다. 나토 정상들은 새로운 대러시아 전략을 논의할 예정이었지만 이번 의제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했다. 젤렌스키는 정상들의 만찬에 초대됐지만, 북대서양 이사회(North Atlantic Council) 주요 논의에는 참여하지 않을 예정에 있다. G7에 이어 이번에도 젤렌스키는 뭐 하나 성과를 얻어가기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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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미국 : 이스라엘의 12일 전쟁 휴전이 우크라이나에게 미칠 영향과 나토 정상회의의 주 논제들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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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냐민 네타냐후의 정체 : 폴란드 아쉬케나지와 본토 유태인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네타냐후 가문
- 네타냐후는 친영국, 친미국 인사로 당시 총리였던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1922~1995)의 정적이었다. 이츠하크 라빈이 꾸준히 살아있었다면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이러한 피비린내가 진동한 역사는 종식되고 양쪽이 모두 평화롭게 존속했을 것이다. 네타냐후의 이력을 보자면 그는 출생은 텔아비브에서 했지만 부친이 폴란드계 아슈케나지였다. 그의 부친인 벤치욘 네타냐후(Benzion Netanyahu)는 폴란드 바르샤바 출생이다. 본래 성씨는 폴란드어식인 밀레이코프스키(Milejkowski)였지만 베냐민 네타냐후의 어머니인 칠라 세갈(Tzila Segal)을 만나 결혼하고 나서 바꾼 성씨가 네타냐후이다. 네타냐후는 히브리어로 '신이 주신'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참고로 어머니인 세갈은 오스만투르크 제국령 팔레스타인 출신의 토착 유태인이다. 아마 유태인들이 모계사회이자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는 풍속으로 미루어 볼 때, 팔레스타인 전역의 영유화를 꿈꾸는 베냐민 네타냐후가 아마 어머니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베냐민은 1963년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6년 동안 이스라엘에서 군복무하면서 중동전쟁에 참가했고, 이후 1980년까지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MIT에서 학사, 석사를 마치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공부하는 등, 신종 미국의 딥스테이트와 네오콘의 엘리트 과정을 거쳤다. 그가 악랄해질 수 있었던 것의 배경은 이러합 딥스와 네오콘의 엘리트 과정을 모두 습득했기 때문이고, 이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1984년부터 1988년까지 주 UN 대사를 지내고 이스라엘로 돌아와 국회의원이 되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인 지역에 유태인들을 정착시키려는 프로젝트를 만들어 오슬로 협정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이를 비밀 회담이라는 약점을 이용해 "비공식적이 야합"으로 치부했다. 1993년 라빈 정부와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는 가자 지구와 요단강 서안 지역을 위한 자치적 정부 계획의 시작과 그 지역들로부터 이스라엘이 물러남을 포함한 동의서를 서명하여 양국은 또한 자신들의 분쟁들을 풀리는 데 노력하는 데 동의하게 되자 네타냐후는 라빈을 매우 비난했고, 라빈이 오슬로 협정을 맺어 중동의 평화를 이룬 공으로 1994년 10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와 외무장관 시몬 페레스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자 이를 "팔레스타인에게 나라를 판 댓가"라며 거세게 비난했다. 이후 이츠하크 라빈 총리는 1995년 11월 4일 텔아비브의 킹스 오브 이스라엘 광장에서 집회에 참석한 이후, 극우파 유대인 과격론자인 이갈 아미르(Yigal Amir)의 총에 맞아 암살을 당했는데 이 암살의 배후에 아랍과 전쟁을 원하고 팔레스타인의 인종청소를 원하는 딥스 & 네오콘, 그리고 네타냐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라빈 총리가 암살되기 직전 당시 극우파의 지도적인 정치인인 네타냐후가 평화 회담을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를 주도한 사실에 있기 때문이다. 네타냐후가 시위대의 선두에서 관을 들고 행진하는 등 정국분위기를 험악하게 끌고가 암살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무고한 타인을 죽이거나 해치려는 자에 대한 심판을 허용하는 유태교의 종교법인 할라카(Halakha)의 '추적자 원칙'(Din Rodef)을 적극 옹호하던 인물로, 유태인을 테러한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할라카의 심판을 주장하며 시위를 더욱 과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라빈 총리 암살 직후 47세의 나이로 총리에 당선되어 이스라엘 역사상 최연소 총리가 되었다. 난 개인적으로 라빈을 암살한 것은 네타냐후임을 의심하고 있다. 그런 인물이, 가자와 평화를 지키고 중동의 평화를 수호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그는 ICC (국제형사재판소)의 수배를 받고 있다. 미국의 비호만 아니었으면 벌써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있어야 하는 인물이다. 하마스의 공격과 침공을 비난하는 자들이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및 침공은 비난하지 않고 이란 따위가 핵을 가지는 것은 위험하다며 이스라엘의 공습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이처럼 대한민국에는 명예 유태인들과 이스라엘 2등 시민들이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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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냐민 네타냐후의 정체 : 폴란드 아쉬케나지와 본토 유태인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네타냐후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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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0, 11일 양일 간에 걸친 "로마 회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EU의 지원 또한 지지부진?
- 지난 7월 7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종결된 BRICS 정상회의는 회원국 수가 11개국으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푸틴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의 불참으로 인해 그 위상이 오히려 퇴색됐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같은 논리로 지난 10, 11일 로마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한 10일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Ukraine Recovery Conference, URC 2025)와 11일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 정상회의도 영국 키어 스타머 총리,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불참했다. 오히려 로마에서 벌어진 양일 간의 회의 의미가 BRICS 정상회의보다 더 반감되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나 젤렌스키 등 우크라이나 재건 회의 참석자들이 초대된 만찬에서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가 키예프에 대한 유럽 대륙의 경제 지원은 무료 봉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Il Presidente del Consiglio italiano Giorgio Meloni ha ricordato che gli aiuti economici del continente a Kiev non sono un servizio gratuito)."고 서술한 이탈리아 일간지 란티디플로마티코(L'Anti Diplomatico)의 보도가 겨우 나타나고 있을 정도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트럼프의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홀대로 인해 우크라이나 지원을 거의 홀로 책임지게 된 유럽 국가들이 로마에서 다시 반러시아, 대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해 결속을 다졌을까? rbc 등 러시아 언론과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의하면 10, 11일 이틀간 열린 로마 정상회의에서 유럽 국가들은 우선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대해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기로 했다. 이와 같은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Ukraine Recovery Conference)는 로마에서 우크라이나 기업들과 줄어들고 있는 노동자에 대한 인적 자원, 우크라이나 국내 각종 지역 문제,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등 4가지의 세션으로 진행되었다. 이같은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는 2022년 스위스 루가노, 2023년 런던, 2024년 베를린에 이어 4번째 모임이었다. 이 회의는 2017년부터 시작된 우크라이나 개혁 회의(Ukraine's Reform Conference)가 출범된 것이 시초로 러시아-우크이나 전쟁이 발발한 2022년 이후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번에 열린 로마 회의의 성과는 초기 자본금 2억 2,000만 유로의 특별 기금(Ukraine Recovery Fund)을 조성하는 합의에 있다. 주최국인 이탈리아와 독일, 프랑스, 유럽투자은행(EIB)이 이 기금을 내년인 2026년까지 5억 유로로 늘리기로 했다. EU를 대표하는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Ursula Gertrud von der Leyen) 집행 위원장은 EU가 우크라이나 복구 사업의 지원을 위해 국제 금융기관들과 약 23억 8,000만 유로 상당의 투자 협정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23억 중, 18억 유로는 대출 보증 형태로, 5억 8천만 유로는 무상 원조 형태로 우크라이나에 제공했다. EU는 앞으로 규모를 최대 100억 유로로 키울 작정인데 EU는 나토 분납금인 국가 GDP의 5%를 맞춰야 하고 각 국의 분담금 지급 시기도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EU 분담 지원금을 만약 축소하기라도 한다면 국가 GDP의 상당 부분을 EU 분담 지원금에 의지하고 있는 GDP 낮은 동유럽의 국가들이 가장 먼저 반발할 것이다. 그리고 자국 운영 자금에 세금도 그만큼 부과해야 하니 부담되는 것은 EU 시민들이다. 시민들의 불만도 그만큼 심해질 것이고, EU 각 국은 이러한 시민들의 불만들을 달래야 한다. 즉, EU는 우크라이나로 인해 서서히 자금난에 시달릴 가능성도 생각해봐야 한다. 한편 네덜란드는 우크라이나 피해 복구를 위해 3억 유로를 내놓기로 하는 등, EU 국가들도 개별적으로 우크라이나 지원 방안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이번 회의에서 나타난 우크라이나 복구 지원금 23억, 그리고 앞서 언급한 5억, 3억 유로와 같은 금액은 실제로 우크라이나가 필요한 자금들, 초창기인 2022년과 비교해 보면 현저히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회의에 참석한 우크라이나의 데니스 슈미갈 총리는 "앞으로 14년 동안 우크라이나의 재건 및 현대화에 필요한 재원은 1조 달러(Сума, необхідна для відбудови та модернізації України протягом наступних 14 років, становить 1 трильйон доларів)."로 추산했다. 그러면서 2개의 기금 조성을 제안했다. 하나는 서방 측에 의해 동결된 러시아 해외 자산과 러시아 원자재 수출에 대한 특별세 부과로 5,400억 달러 규모의 기금을 부과하고, 또 다른 하나는 유럽의 민간 투자로 4,600억 달러 규모의 기금을 만들자는 것이다. 전자는 완전히 날강도 짓이고, 후자는 민간 투자를 열어 EU 시민들의 피같은 돈을 빨아 먹겠다는 것이다. 이에 독일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는 피해 규모를 추산하는 것에서부터 우크라이나 측에 이의를 제기했다. 메르츠는 우크라이나의 전쟁 피해를 약 5,000억 유로로 추산한다고 주장했으며 슈미갈 총리의 1조 달러 주장을 부인했다. 그리고 러시아가 피해 보상을 하기 전까지, 러시아 자산 동결을 해제해서는 안 된다며 비교적인 정상적인 주장을 했다. 그러니 우크라이나가 주장한 2개의 기금 조성 주장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은 셈이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전후 복구를 위해 민간 투자 부문을 맡아 온 미국의 대형 투자업체 블랙록(Black Rock)이 로마 회의 전날, 우크라이나 복구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따라서 미국 투자기업 블랙록 주도의 민간 투자 유치 건은 전후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한 마셜 플랜의 핵심으로 보여졌다는 것을 착안한다면 자금이 급한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래리 핑크(Larry Fink) 블랙록 CEO는 지난 2023년 젤렌스키와 회동한 이후, 민간 투자를 끌어 내고, 우크라이나 정부의 투자 전략 수립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따라서 그는 이번 로마 회의에서 그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블랙록은 포기한 이유를 키예프에게 불리한 조건으로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대 우크라이나 정책을 핑계로 들었다. 블랙록이 우크라이나 복구를 위한 투자 유치를 중단했다는 사실은 지난 7월 6일 미국 블룸버그 통신에 의해 처음으로 알려졌다. 블랙록은 당초 독일과 이탈리아, 폴란드 등 유럽 주요국 기관 투자자들의 초기 지원으로 수십억 달러의 유치 목표 달성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기관 투자자들이 협상을 일부 중단했기 때문에 자금 조달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당초 블랙록의 민간 투자 유치 목표는 최소 150억 달러였는데 프랑스 업체가 블랙록의 역할을 이어 받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미국의 참여가 불투명한 상태에 있어 최소 150억 달러라는 목표가 불가능해졌다. 그나마 우크라이나에게 있어 다행한 점은 미국이 복구 회의에 처음으로 참석했다는 사실에 있다. 미국 키스 켈로그 대통령 특사는 이날 로마 회의에서 미국과 유럽이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한 새로운 '마셜 플랜'을 주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트럼프가 광물 자원 거래로 조성된 특별 기금으로 우크라이나 복구 지원에 앞장 설 것이라 언급했다. 이번 로마 회의에서는 2026~2027년 우크라이나에 대한 재정 지원 문제까지 논의되었다. 슈미갈 총리는 내년인 2026년 예산 편성에서 190억 달러의 적자가 예상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키예프는 2025년 러시아에게 입은 피해 복구 사업에 할당된 자금 지원을 절반도 받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11일 로마에서는 전날 복구 회의에 이어 우크라이나 지원 의지를 지닌 유럽 30개 국으로 구성된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은 우크라이나 지원 체제에서 트럼프의 미국이 제외된 공백을 메꾸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의 주도로 결성된 국가 연합체라 볼 수 있다. 여기에 키스 켈로그 미 대통령 특사와 대러 강경파인 린지 그레이엄(Lindsey Graham, 공화당), 리처드 블루멘탈(Richard Blumenthal, 민주당) 미 상원의원이 이 회의에 처음으로 참석해 주목을 받았다. 이번 로마 정상회의의 성과를 말한다며 우크라이나의 휴전 감시를 위한 평화유지군을 파견하는 것으로 윤곽을 잡있다는 것에 있다. 마크롱 과 스타머 총리는 비록 정상회의에 직접 참석하지 않았지만, 런던에서 화상 연결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의 우크라이나 파견군 규모를 50,000명으로 늘릴 수 있다며 허풍을 늘어 놓았다. 또한 이처럼 런던에서 합의했다며 그 합의 사항을 공개했다. 또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 작전 본부를 우산 파리에 두고 12개월 후에는 런던으로 이전, 순환하는 방식으로 운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물론 키예프에도 지부가 설립된다고 했다. 마크롱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휴전 직후 몇 시간 이내에 바로 작전을 시작할 수 있도록 평화 유지군의 운영 계획을 마련한 것이라 의미를 부여했다. 이처럼 평화 유지군에게는 우크라이나 지상군의 역량을 키워주면서, 우크라이나 영공 및 해상 안보를 지원한다는 역할도 부여되었다. 이를 위해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은 훈련 교관들과 군수 물자 공급 및 병참 전문 요원들을 우크라이나로 파견할 것으로 보여 진다. 물론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우크라이나에 투입될 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물론 우크라이나로 파견될 평화 유지군에 대한 미국의 안전 보장 약속이 큰 관건으로 보인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지난 4월 미국이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에 정보 및 물류 지원을 약속했다고 보도했지만, 공식적으로 지원 발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10일 미국의 구체적인 약속은 공개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회의에 참석한 린지 그레이엄과 리처드 블루멘탈 미 상원의원들도 우크라이나에 미군을 배치할 계획이 없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했다.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은 로마 정상회의 이후, 공동 성명을 통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추가 평화 협상인 제3차 이스탄불 협상을 지지한다면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우크라이나에 군사 및 재정 지원을 우선적으로 제공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성명은 또한 나토가 2024년 약속한 대로 올해 최소 400억 유로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휴전이 성사되기 전까지는 우크라이나에게 군사 지원을 제공하고, 휴전이 발효되면 평화 유지군을 파견하겠다는 의지인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인즉, 휴전이 되면 곧바로 평화유지군을 가장한 나토군을 투입하겠다는 얘긴데 러시아의 휴전 협상 요구 내용과 완전히 배치되는 얘기다. 결국 유럽은 러시아와 휴전 없이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쯤되면 휴전과 평화를 원하지 않는 것은 유럽과 우크라이나이지 러시아는 아니다. 그리고 트럼프는 휴전을 요구해도 EU와 우크라이나는 결코 휴전을 원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올해 "로마 회의"의 결과가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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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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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0, 11일 양일 간에 걸친 "로마 회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EU의 지원 또한 지지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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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악연은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카프카스 지역으로 남하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란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란 카자르 왕조와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카자르 왕조의 근거지였던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정복하였다. 1828년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이란 카자르 왕조는 투르크멘차이 조약(Treaty of Turkmenchay)을 통해 국경선을 확정하였는데,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독립 이후, 오늘날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으로 거의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시아파 무슬림들이 이란과 내통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반란을 획책할 것을 깊게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시아파 무슬림 종무청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사용을 제한하고 대신 아제르바이잔어 사용을 장려하여 시아파 무슬림들의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정책이, 아제르바이잔어가 현재 아제르바이잔에 정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조지아의 티플리스(Typlis, 트빌리시)와 보르조미(Borjomi) 등이 러시아인들의 온천 휴양지로 개발된 것과 달리, 아제르바이잔으로 러시아인들이 이민한 계기는 19세기 중반 바쿠에서 유전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부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통치하던 카자르 왕조가 심각한 부패와 기근 문제가 최악의 참사로 일어났고, 이를 "페르시아 대기근(Persian Great Famine)"이라 불리는데 당시 대기근으로 무려 150만 명이 아사했다.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 상당수가 국경을 몰래 넘어 바쿠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섞여 살게 되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농촌 지역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이단으로 박해받던 몰로칸파(Mолокан) 신도들이 여타 러시아 정교회 신도들과의 갈등을 피해 아제르바이잔 일대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슬람과 몰로칸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당시 카스피해에서 석유가 본격적으로 산업에 차용되던 20세기 초반, 바쿠에서 기적적으로 생겨난 검은 황금인 석유는 러시아제국에게 있어 산업 경제에 큰 이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석유가 채굴이 된다 하더라도 이 막대한 석유를 옮길 방법이 없으면, 혹은 석유 시추에 대한 기술이 없다면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당시 기술로 본다면 석유를 이송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수의 노새를 이용해 실어 옮기는 것이었는데, 이는 발굴한 노력에 비해 옮길 수 있는 양에 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스웨덴의 노벨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스웨덴의 노벨 가문은 여러 생각을 한 끝에 러시아 제국의 풍부한 수원의 흐름을 이용하여 편리하게 실어 나르기만 한다면 바쿠 유전이 막대한 이익으로 돌아올 것임을 확신했고, 이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개시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사업이 바로 카스피해로 연결되는 볼가 강 하구인 아스트라한 습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때 볼가 강 각 곳에 카스피해에서 채굴되는 석유가 운반되기 시작하는데 이를 기준으로 볼가 강 각 지역에 운하가 만들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러시아 볼가 강 유역의 운하들은 카스피해의 막대한 석유를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시초가 된 셈이다. 당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은 석유 산업에 이렇게 발을 담구게 된다. 그는 서유럽에서 막대한 돈을 벌고 있었는데, 루드비히 노벨과 로베르트 노벨이 알프레드를 설득하여 석유 회사에 자금을 대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취득한 막대한 부는 노벨이 사망한 이후 제정된 막대한 노벨상 초창기 상금의 원금이 된다. 이후 노벨 가문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의 스탠다드 제국보다 약간 빠른 시기에 운하를 통한 운송 다음으로 빠르게 운송할 수 있는 송유관을 개발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노벨가문은 거의 세계 최초의 유조선인 조로아스터(Zoroaster) 호를 만들어 출항시켰다. 그러나 바쿠 유전이 가진 막대한 가능성과 그 효용성을 알아 본 사람들과 국가, 가문들은 스웨덴의 노벨 가문 뿐이 아니었다. 세계 석유 시장을 지배하면서 장악하고 있던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과 당시 세계 금융가를 장악하고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후원하는 로얄 더치 쉘(Royal Dutch Shell), 러시아와 라이벌이면서 그레이트 게임 등을 통해 러시아와 대적해왔던 영국의 부유한 상인들이 엄청난 투자를 했으며 미국과 독일 제국마저 바쿠를 노렸다. 로스차일드는 그동안 노벨 가문에게 돈을 지원해주면서 많은 이익을 보고 있었다. 이 때 스탠다드 오일이 바쿠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전 세계 금융가에 퍼지게 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당시 세계 최대의 석유 제국이라 불리는 스탠다드는 미국 석유의 90%이상을 장악한 거대 기업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즉각 태도를 바꾸어 스탠다드와 동맹을 맺고 노벨 가문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거기에 아제리아 바투미 석유 회사까지 인수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석유사업에 뛰어들었다. 노벨 가문의 브라노벨은 1879~1883년에 이르는 4년 여 기간 동안 2,000% 생산량 증대를 노렸다. 그러면서 러시아 시장을 50%까지 장악하면서 카프카스의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를 위협했다. 그러자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는 바쿠를 과감히 포기하고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Ploiești)로 옮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이 꾸준히 바쿠에 유입하게 되는데 이 때 바쿠에 유입된 러시아인들은 대개 포그롬 사태로 인해 카스피해 일대에 이주해 온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이후, 바쿠의 인구 30%가 러시아계 유태인들로 자리 잡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과 남다른 유대감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이들 러시아계 유태인들이 아제르바이잔에 상당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시대부터 남아있던 아제르바이잔 투르크인들이 유태인과 섞여 살게 되었는데 이들은 서로의 종교를 박해하지 않고 나름 평화롭게 잘 지냈다. 그러나 1905년이 되면서 크림 타타르족 출신 이슬람 모더니즘 사상가인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의 영향을 받은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바쿠를 중심으로 들어서게 되면서 투르크-타타르 민족주의의 광풍이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카스피해 일대에 불어 닥치게 된다.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는 범투르크주의를 기반으로 이슬람의 현대화를 주장하던 인물로, 부하라의 전통적인 이슬람 마드라사들을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무슬림 사회를 대표하고 있는 적폐로 묘사했다. 이와 동시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존재하는 립카 타타르 그룹들을 무슬림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사례로 내세웠다. 시아파 이슬람 세계에 속해 있었던 바쿠의 지식인들은 같은 시아파인 이란의 전통적인 농촌 마드라사들을 낙후한 무슬림 사회의 전형으로 보게 되면서 이란 문화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그 대신 러시아를 통해 수입된 서구식 민족주의 및 범투르크주의에 대단히 열광하게 되었다. 이는 후일 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이란과 거리를 두고 수니파 이슬람이 우세한 터키와 친교 관계를 강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이슬람 칸국들은 종파 문제 때문에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잦은 전쟁을 치르던 적대 관계였지만 이란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친(親) 오스만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918년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붕괴되면서 소련이 출범한 이후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자카프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에 완전히 병합되었으며 당시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자치 형태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 이미 바쿠에는 1904년부터 볼셰비키 조직이 자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찍이 바쿠 유전에서 근로하는 산업 노동자 계급들이 형성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들 노동자 계급들 대부분이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1926년 바쿠에서 개최된 투르크어학 대회에서 아제르바이잔어에서 페르시아 문자 사용을 금지하고, 라틴 문자로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해당 조치들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들이 터키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며 러시아어 습득에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게 되니 다시 소비에트 정권은 1939년부터 아제르바이잔어를 키릴 문자로 표기하도록 방침을 변경하게 된다. 모든 소비에트 자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아제르바이잔에도 스탈린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당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다. 소련의 일부가 된 이후, 스탈린 시절에는 50,000명이 넘는 아제리인들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는데 그중에는 이슬람 성직자인 이맘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도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소련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하면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도 잠시 소련의 위성국으로 알려진 길란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웠지만, 이후에 이 지역을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시켰다. 레닌 시기에 발생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는 스탈린이 아제르바이잔의 편을 들어주면서 나히체반과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귀속시키면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지역을 두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1988년 2월 27일에는 아제르바이잔계 무슬림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와 아파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공격하고 살해하는 숨가이트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게 된다. 당시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고 아르메니아인들의 보복으로 발생한 카살리 학살을 적극 지지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급격한 반러시아 시위들이 일어나 오히려 서방 세계와 미국을 지지하는 여론이 커졌다. 그러나 미국과 서방 세계는 더욱 노골적으로 아르메니아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친서구 정책을 취하던 민주 정부가 붕괴되면서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ar Aliyev)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고 아제르바이잔은 친러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용어는 러시아어 민족 자치어는 아제르바이잔어였고, 공교육은 러시아어와 아제르바이잔어로 이루어졌다.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대를 거치며 아제르바이잔 내 타트족 및 탈리시족과 같은 소수민족 집단이 모어인 타트어 등으로 글을 읽고 쓸 줄은 모르지만 러시아어로는 글을 자유자재로 읽고 쓰게 되면서 이들 소수민족의 글과 말은 완전히 사장되었다. 그리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사한 이후에 러시아어만 사용하게 되었고 같은 이유로 세대가 지나면서 점차 모어를 잊어버려 아제르바이잔인으로 완전히 동화되기 이른다.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던 영향으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이 소련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계 유태인들인 석유 화학 기술자들이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하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대부분 러시아 등으로 돌아가 버리고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한 러시아 인들은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와 유태인들의 후손들이기에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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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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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헝가리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탈스탈린주의를 실행하는 루마니아와 공산정권 치하에서의 국제 외교
- 1956년 2월, 모스크바 크레믈린에서 열린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게오르기우데지와 함께 출석한 바 있던 당 정치국원인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Iosif Chișinevschi)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Miron Constantinescu)는 3월에 루마니아 노동자당 중앙 위원회에서 급격한 공업화와 집단 농업화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게오르기우데지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어 부쿠레슈티와 클루지나포카에서는 지식인 작가와 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헝가리 봉기가 터진 직후였기 때문에 그 영향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게오르기우데지의 정책에 대한 반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부쿠레슈티와 많은 헝가리 인이 거주하는 트란실바니아의 주도(州都) 클루지나포카, 티미쇼아라 등지에서 헝가리에서 발생한 민주화 운동에서 사망한 봉기자들을 동정하며, 생활 수준 향상, 러시아어의 필수 교육 폐지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루마니아 공산 정부는 한편에서는 시위 지도자를 엄격하게 탄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최저 임금을 인상시켰다. 그리고 시위대의 요구에 따라 콘스탄티네스쿠를 교육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민주화 시위에 대한 무마 정책을 실시했다. 루마니아에서 헝가리 봉기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와 같은 부분적인 양보 정책 이 외에도 전통적으로 좌익 지식인층이 소수였다는 점, 과거의 숙청 규모가 헝가리에서만큼 크지 않았다는 점, 경제 면에서의 완화 정책이 부분적으로 지속되었다는 점, 그리고 정치적인 면에서 당의 통제망이 보다 철저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그 이상의 동요 가능성으로부터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을 구해낸 것은 당시 동유럽 전체에 강하게 묶여 있던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된 국가들이 자국의 정권이 붕괴되지 않기 위해 서로 연대를 취하고 있었던 분위기 때문이었다. 1956년 6월, 공산당 중앙 위원회에서는 이나 파우케르와 바실레 루카가 루마니아의 개인을 숭배하는 풍조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나왔으며, 그와 같은 비판을 조장했다고 하는 이유에서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가 해임되었기 때문에 극단적인 자유화 운동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1958년 11월의 당 중앙 위원회는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최종 연한을 마무리 하고, 1960년부터 새로운 6개년 계획에 착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이후 1960년 6월의 제6차 당 대회에서 계획을 채택했다. 이와 같은 새로운 6개년 계획은 도나우 강 삼각주와 연결되는 갈라치 지역에 제철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연간 성장 목표 13%, 도나우 일대에서 가장 생산성이 극대화 된 철강이라는 대규모의 공업화를 노렸다. 당시만 해도 동유럽에서 자원 부국이었던 루마니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야심적인 부분이 되었으며 동유럽에서 비교적 넓은 국토를 가졌기에 경제를 이와 같이 급속도로 신장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본 것이다. 역시 1958년 5월에는 루마니아에서 소련군이 철수하는 계획들이 발표되면서 어느 정도 소련으로 부터 자유화 된 현상을 맞이하게 된다. 원래 소련군은 헝가리와 루마니아에 관해서 1947년 파리 강화 조약에 의해 오스트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소련군의 병참선 확보를 위해서 주둔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루마니아에 대한 점령군으로써 행사하기 위해 들어온 것은 아니었지만 헝가리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루마니아의 소련군은 루마니아 내 민주화 운동 발생을 염려하여 진압군으로 그 목적이 변경되어 있었다. 더불어 1955년 오스트리아와 국가 조약을 체결한 후 그 주둔의 구실은 소멸되었기에 이들은 오스트리아를 떠나 헝가리와 루마니아로 철군을 완료한 상태였었다. 헝가리 민주화 봉기 후 소련은 1956년 12월의 폴란드, 1957년 3월의 동독, 1957년 4월의 루마니아, 1957년 5월의 헝가리와 주둔군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루마니아만이 크레믈린 당 중앙회의 때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끈질기게 언급한 끝에 대대적인 교섭이 시작되었다. 이는 소련군의 철수를 실현시켰고, 그 이후 루마니아의 대외 관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즉, 루마니아는 동유럽에서 유고슬라비아 다음으로 그 어느 나라보다 더 소련으로부터 벗어났던 독자적인 외교, 경제적 노선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1958년 이후 루마니아의 독자적 공업화 노선은 앞서 언급한 대로 1960년대에 들어 코메콘(COMECON)의 통합 계획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코메콘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미국은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재건과 원조 기획인 마셜 플랜을 발표하였는데 소련은 여기에 자극을 받아 같은 해에 동구권 국가들의 경제 협력 강화를 도모하는 몰로토프 플랜을 입안하였고, 이것이 1949년 코메콘 창설로 이어졌다. 코메콘은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제상호원조회의를 의미하며 국제경제협력기구로 알려졌다. 이에 대한 통합 논의는 1961년 소련의 제22차 볼셰비키 당 대회 후에 논의되어 조금씩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당 대회 이후,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은 흐루시초프 노선으로 갈아타면서 스탈린에 대한 개인 숭배에 대해 비판을 행하고, 모든 도로, 공원에서 스탈린의 이름을 철폐했다. 1962년 3월에 부쿠레슈티에 있던 거대한 스탈린 상을 철거하면서 개인숭배 자체가 반동이라는 사상을 주입시켰다. 동시에 게오르기우데지는 1963년에 러시아어 필수 교육을 폐지했으며 러시아 언어 · 문학 대학을 격하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소련에게 조금씩 벗어나기 위한 정책들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마니아가 나치 독일에게 해방되는 것에 있어 소련군의 역할을 강조한 역사서를 수정했으며 루마니아 공산당이 소련 볼셰비키를 도와 어떻게 나치 독일을 격파했는지 그 역할에 대해 강조하는 등 교묘하게 탈소련화를 실시했다. 이와 같은 활동들을 배경으로 하여 1963년 3월의 당 확대 중앙 위원회는 코메콘의 공동 경제 국가 기관을 창설하는 계획에 대해 반대하는 결정을 했고, 각지에서는 이 결정을 지지하는 당 집회가 소집되었다. 1964년 4월에는 공산당에 의해 국제 공산주의 운동 및 노동 운동의 문제에 관한 루마니아 노동자당의 입장에 관한 성명이 발표되자, 루마니아인들은 각국의 주권을 초국가적 기관에 이양하려는 것에 크게 반발하였는데, 결국 이는 사회주의 국가 간의 관계를 기초하는 제원칙에 따르면 완전한 평등된, 국가적 주권과 이익의 존중, 상호 이익 및 동지적 협조라는 루마니아 만의 정치, 사회적 입장이단독으로 표명되었다. 루마니아 지도부는 야심적인 공업화를 수행하는 무기로써 과거의 전통에서 민족주의를 이용하는 방법을 선택하면서 소련을 점차 멀리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 1963년에는 유명한 공개 논쟁에서 새로이 나타난 중국과 소련의 대립에 대해서도 1964년 3월에 대표단을 중국에 파견시키는 등 중국과 소련 간의 화해와 논쟁 중지를 위해 적극 중재했다. 1963년 4월에 중국과 통상 협정을 맺음으로써 루마니아는 알바니아를 제외한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 그 해에 대 중국 무역이 증가한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이후에 알바니아와 관계가 개선되어, 1962년 초에 소련을 모방해 한 때 철수한 주 티라나 루마니아 대사가 1963년 3월에 다시 부임하게 됨에 따라 루마니아와 알바니아의 양국 간에 통상 협정이 맺어지게 된다. 한편 1964년 5월에 게오르게 가스톤마린(Gheorghe Gaston-Marin)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의 루마니아 사절단이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게 되고, 7월에 이온 게오르게 마우레르(Ion Gheorghe Maurer) 총리가 프랑스를 방문했다. 이후 외교 통상면에서 서방과 단절했던 루마니아는 무려 30년 만에 서방 자유 진영 국가들과의 관계도 급속히 긴밀화되었다. 이를 통하여 서서히 루마니아의 다각 외교가 개시되었고 이는 차우셰스쿠라는 세기적 독재자가 나타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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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헝가리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탈스탈린주의를 실행하는 루마니아와 공산정권 치하에서의 국제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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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의 전자화와 헝가리에 진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전기 자동차 공장
- 우리 대한민국 기업의 헝가리 진출은 수교하자마자 존재했지만 그 시작이 미미했었고 굵직한 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비교적 적었다. 우크라이나에 대기업 13개가 들어가 키예프 일대에 산업단지를 형성하고 삼성이 대규모 공단을 지어 유럽 진출의 교두보를 튼것과는 달리 헝가리는 생각보다 미미했던 것이다. 그러나 2019년 두산중공업이 전기차용 배터리의 핵심 부품인 전지박을 만드는 헝가리 생산공장을 착공하게 되면서 이때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두산은 전지박 생산을 위해 2018년부터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 14만4천㎡ 부지에 공장 건설을 준비했으며 2020년 초에 완공할 예정인데 코로나 때문에 조금씩 미뤄지다 하반기에 완공했다고 한다. 헝가리 전지박 공장은 연간 5만t을 생산할 수 있으며 이는 전기차 220만대에 공급할 수 있는 규모로 알려져 있다. 두산은 헝가리의 공장이 유럽의 유일한 전지박 공장으로 헝가리 현지 전기차 배터리 업체들과 가까워 물류비가 절감됨은 물론 이에 따른 가격 경쟁력과 품질 안정성 측면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전지박은 전기차 배터리의 음극재 부분에 씌우는 얇은 구리막으로 열을 외부로 방출하고 형상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는 핵심 부품이다. 앞서 두산은 2014년 룩셈부르크의 동박 제조업체 서킷포일 인수로 전지박 원천기술을 확보해 전지박 시장에 진출한 바 있다. 전기차 배터리용 전지박 시장이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전략적으로 투자한 것이 결실을 보았고 고품질이면서 가격 경쟁력을 갖춘 유럽 시장 최고의 전지박 생산 거점으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두산중공업에 이어 2020년에는 롯데알미늄이 1,100억원을 투자해 친환경 전기차에 사용하는 2차 전지용 양극박 생산 공장을 헝가리에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양극박은 충전과 방전을 반복할 수 있는 2차 전지의 용량과 전압을 결정하는 양극집 전체에 사용되는 알루미늄박으로 알려져 있다. 전기화학 반응으로 생성된 전자를 모아 방전될 시 필요한 전자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공장은 친환경 자동차 인프라가 구축된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에 6만㎡ 규모로 들어선다고 발표했다. 2020년 4월 착공해 2021년 상반기 완공 예정이라 하는데 아직까지 완공되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롯데알미늄은 헝가리의 공장에서 매년 18,000t에 이르는 2차 전지용 양극박을 생산해 유럽 지역 수요 업체에 공급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롯데알미늄의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의 공장 건설이 들려오지 않는데다 같은 지역에 위치한 삼성전자가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가 2주 후부터 다시 가동되고 있다고 한다. 삼성전자의 유럽 내 공장은 헝가리를 비롯해 슬로바키아와 폴란드에 있으며 특히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공장은 두 곳 모두 TV를 생산하는 곳이라 삼성전자의 유럽 내 TV 제조라인이 멈추었던 전무후부한 사건이다. 그 이유는 바로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무사히 잘 돌아가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SK이노베이션이 헝가리 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현지 전기차 배터리 증설을 위한 기술인력 300여명을 급파했다. 당시 코로나 때문에 헝가리의 국경폐쇄 조치가 감행됨에 따라 코마롬 제2공장 건설에 차질을 빚으면서 이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조사되었다. SK이노베이션은 헝가리 제2공장 준공, 시운전 등을 거쳐 2022년 초 제품을 본격 양산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데 아직 가동되었다는 소식은 없다. 아마 올해 안에는 가동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처럼 헝가리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전자, 전기차, 베터리 등의 산업에 집중되어 있다. 헝가리에 이같은 산업이 집중된 이유는 무엇일까? 유럽의 대기 오염은 공중 보건에 있어 가장 큰 환경적 위험 요소에 속해 있다. 하지만 각 EU에 속해있는 정부는 이 위기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유독성 공기로 매년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있는 실정이다. 유럽의 대기 오염 한계는 WHO 지침 보다 훨씬 약하고 ,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는다고 EU 환경 감사 보고서에서 밝혀왔다. 따라서 이같은 원인이 석유와 석탄으로 인해 생성된 이산화탄소가 과다 배출된 것을 원인으로 삼고 있으며 이를 줄이고 가격도 훨씬 저렴한 천연가스를 대체 연료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천연가스가 가장 풍부하고 저렴한 값으로 매입이 가능한 러시아에게 가스를 의존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스의 의존은 러시아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로 점차 치중되어졌고 유럽 각국은 러시아로부터 가스를 사들이면서 러시아의 국력 신장과 그로 인한 위협에 경계심을 갖기 시작한다. 유럽이 갖고 있는 에너지 시장의 탈러시아화는 바로 전기의 생산량을 극대화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그러한 차원에서 EU 국가들이 전기차 보급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가운데 헝가리가 유럽의 전기차 및 배터리 공장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 배터리 회사들이 헝가리에 속속 생산기지를 갖추고 있으며, 독일과 중국의 자동차 회사들도 공장 설립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인구 980만 명의 동유럽 국가 헝가리가 전기차 시대의 제조 허브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자원 하나 없는 헝가리가 전기차 시장의 허브가 된 이유는 헝가리 정부의 적극 지원 때문이다. 헝가리 정부는 전기차 구매에 따른 보조금 지원, 초록색 번호판 제공, 무료 주차 허용, 등록세 및 기타 비용 면제, 충전소 설치 및 운영 기준 완화 등을 제시했고 EU의 환경보호 정책에 발맞춰 전기차 구매에 대해 보조금 지급 정책까지 발표했다. 구체적으로 1천만 포린트 (한화 약 3,500만원) 미만 전기차에 대해서는 최대 250만 포린트 (한화 약 880만원) 지원, 1천만 포린트 이상 1,500만 포린트 (한화 약 5,300만원) 이하 전기차에 대해서는 50만 포린트 (한화 약 176만원)을 지급하도록 정했다. 환경오염도 방지하고 러시아에 대한 자원 의존도를 낮추고 에너지 자원의 탈러시아화를 꿈꾸는 유럽 시장에 있어 전기차 사업이나 이를 받쳐주는 차 베터리, 전기차 충전소 설치 사업은 꽤나 매력적인 산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려면 헝가리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발전소도 필요하다. 그래서 생각해낸게 원자력발전소의 추가 건립이다. 헝가리 원전 증설은 현재 가동 중인 퍼크스 원전을 대체할 1천200㎿급 원자로 2기를 새로 짓는 사업인데 이에 대한 전반적인 지원은 러시아가 해주기로 했다. 헝가리는 2014년 러시아 국영 원전기업 로자톰과 계약하면서 건설 비용 100억 유로의 80%를 러시아에서 차관하여 들여오기로 했다. 빅토르 오르반은 첫 번째 원자로는 2018년에 착공해 2023년 가동을 시작한다는 계획으로 현재 공사 중에 있다. 여기에 당시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기후 변화 회의가 끝난 후, 탄소중립이 가능하려면 원전이 필요하다는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의 의견에 공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원전 중심의 발전 정책을 폐기한다”는 5년 전 탈(脫) 원전 선언을 하셨던 대통령이라 헝가리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헝가리 원전 정책은 왜 공감했는지 모르겠다. 우선 그 이야기가 주된 이야기가 아니기에 넘어간다. 러시아가 헝가리의 원전 건설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은 서유럽을 향해 핵을 생산할 수 있는 기지를 두겠다는 일종의 안보 위협과 같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유럽 자체가 탄소 중립에 공감하고 그로 인해 전기차, 전기의 증설과 더불어 전력으로 할 수 있는 산업들을 추진하여 더 이상 지하의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춤에 따라 이와 같은 정책을 되돌리기란 어렵다. 유럽은 에너지 문제에 대해 최악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어떻게든 환경 문제의 해결과 에너지 자원 의존도를 낮추며 탈러시아화를 추구하려 하지만 전기, 전자화 될 때까지 당분간 러시아의 지하 에너지를 써야 하는 유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문인 것은 과연 전자화가 지하 에너지들을 대체하는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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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의 전자화와 헝가리에 진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전기 자동차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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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폴란드의 대립 삼각관계
-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함께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폴란드를 삼국 분할을 하며 폴란드 동부를 지배했다. 폴란드가 이전에 러시아에서 악랄하게 대했던지라 러시아도 폴란드에 보복을 하게 되었다. 두 나라는 숙적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였다. 동구권 블록 및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는 폴란드의 제1가상 적국이다. 그래서 폴란드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나토에 가입했으며 미군 주둔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면서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있다. 언어와 혈통에서 러시아와 폴란드는 같은 슬라브 계통에 속하기는 하지만, 서슬라브 계통인 폴란드가 일찍이 카톨릭을 받아들이고 서방권으로 편입된 반면 동슬라브 계통인 러시아는 정교회를 받아들여 문화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소련 시대에는 소련인 인구 상당수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계였던 영향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이 사악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봉건 지주의 대명사로 묘사되곤 했다. 그렇다면 내내 폴란드가 우위였던 두 나라의 관계는 언제 역전이 되었을까? 러시아가 폴란드 강점기에서 해방된 직후, 17세기에 일어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코사크족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와 폴란드 정부에 봉기를 일으키게 되고 이를 기점으로 두 나라의 세력 관계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를 받으면서 정교회를 믿던 동슬라브계 주민 루테니아인들은 우크라이나 그리스 카톨릭을 비롯한 동방 카톨릭 교회로 개종을 강요 받게 되자 자신들을 보호할 수호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에 러시아는 대대적으로 개입을 시작하여 폴란드군에게 연이어 승리하고 스웨덴과 함께 국토의 95% 이상을 점령하여 폴란드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결과적으로 신성로마제국과 헝가리의 개입으로 폴란드를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했지만 국경이 드네프르 강으로 서쪽으로 변경되면서 키예프 장악 이후 폴란드 국토 전역이 황폐화되었다. 이 때부터 두 나라의 관계는 러시아의 일방적 우세로 전환된 것이다. 또한 20년에 걸친 전란으로 인해 폴란드의 교역 인프라가 완전히 파괴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어 회복되지 못하게 되었다. 폴란드가 범국가적 혼란에 직면하는 동안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라는 명군에 의해 유럽 진출을 시도하게 되고 서유럽과 더불어 해상을 주도하는 강국으로 탈바꿈 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폴란드와 이웃한 프로이센 등도 인구가 급증하며 국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반면 폴란드는 대북방전쟁, 폴란드 왕위계승전쟁 등에서 잇달아 패배하여 국력은 더욱 약해져 갔다. 그리고 사실상 예카테리나 대제 당시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179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여 지배했다. 이처럼 폴란드 동북부 영토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를 받고 동시에 러시아의 처절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포란든는 러시아에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특히 카톨릭과 폴란드어, 라틴 문자 사용이 금지되면서 인종 자체를 멸절시키려 했다. 러시아령 폴란드의 영토는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로 불리며 차르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시기 농노 해방 때는 모든 러시아의 농노들이 해방되었어도 폴란드만은 예외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폴란드를 지배하는 제주 계층에게 특별히 불리한 형태로 보상이 이루어지게 된다. 러시아 귀족들의 가장 노른자 땅이던 토질이 비옥한 우크라이나 일대에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대한 불려서 계산한 반면, 벨라루스 및 폴란드 일대에서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소로 축소시켜 폴란드 지식 계층을 몰락시키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러자 당시의 폴란드의 지식인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많은 수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으로 이주했다. 여기에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도 포함되었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퀴리 부인은 프랑스에서 방사성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여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가 설치되었을 때는 1832년 11월 봉기가 발생하고 1863년 1월 봉기로 인해 폴란드의 입헌 왕국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부터 부여 받은 자치권을 상실하고 급속도로 러시아에 편입되었던 시기로 나타난다. 특히 1870년대부터는 사실상 러시아의 장군들이 통치하는 군정이 되었고 1880년대에는 폴란드어가 러시아어와의 공용어 지위를 박탈당하고 사용이 금지되었다. 당시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학교 수업 중에 수시로 러시아군 장교가 들어와 폴란드인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을 테스트하고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이 서투르거나 하면 교사들을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가혹한 폴란드 민족 말살 정책의 실상은 이브 퀴리가 저술한 퀴리 부인의 본명인 마리 퀴리의 전기 <마담 퀴리>에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민족 말살 정책은 당연히 폴란드인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 마리 퀴리의 친구 오빠는 폴란드의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가 러시아군에게 체포되어 공개 총살당했고, 이에 분노한 마리와 그녀의 친구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승전비를 볼 때마다 비석에 침을 뱉기도 했으며,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을 때는 매우 기뻐했다 한다. 그로 인한 원한으로 인해 후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후신인 소련을 상대로 소련-폴란드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폴란드군은 잡혀온 소련군 포로들을 가혹하게 구타하면서 고문과 학대를 일삼았다. 그러한 구타와 학살로 인해 2만 명 가량의 러시아인들이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폴란드 동화 정책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독일 제국이 폴란드 지역을 점령, 폴란드 섭정왕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세우면서 종료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본토를 떠나 러시아령 폴란드로 이주해 거주하던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이 러시아령 폴란드를 점령하자 대부부 이를 피해 러시아 본토로 돌아갔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 및 독일 제국 편에 붙은 토착 폴란드인들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오늘날 폴란드 내 정교회 신자들 및 러시아령 폴란드의 러시아인 실향민 후손들은 폴란드에 남아있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내 문화유산들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소련-폴란드 전쟁도 1920년 10월 12일 정전을 합의했고, 이후 협상에서 벨로루시를 절반으로 분할하여 서쪽은 폴란드에게, 민스크를 비롯한 나머지는 러시아가 영유하는 강화 조약을 맺게 된다. 이것이 1921년 3월에 체결되었던 리가 조약이다. 민스크를 폴란드가 러시아한테 양도하는 것은 합의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당시 협상에 나섰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는 민스크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까지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가 조약의 체결로 인해 폴란드-러시아 간 국경선이 합의됨에 따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멸망이 확정되었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는 국외로 망명하면서 질긴 투쟁을 이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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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폴란드의 대립 삼각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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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앞잡이로 자국에서 환영받지 못한 폴란드의 영웅 콘스탄틴 로코소브스끼(Константин Рокоссовский, 1896~1968) 이야기
- 콘스탄틴 로코소브스키(Константин Рокоссовский)는 폴란드계 러시아 귀족 계급의 아버지 크사베리 보이치에흐 로코소프스키(Ksawery Wojciech Rokossowski)와 러시아인 어머니 안토니나 옵샨니코바(Антонина Овсянникова)의 사이에 1896년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부친인 크사베리는 러일전쟁 때 장교로 복무하면서 발틱함대를 탑승했다가 현해탄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침몰하였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가문은 몰락하여 철도 노동자로 취업해 프스코프 주(州)의 벨리키예루키(Великие Луки)로 이주했다. 부친인 크사베리는 철도 노동자로써 삶이 순탄치 않았고 1907년에 갑작스러운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어머니인 옵샨니코바 역시 1911년에 세상을 떠나 로코소브스키는 15세라는 어린 나이부터 여동생과 함께 폴란드 방산 공장에서 노동을 해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이후 채석장과 직물 공장 등을 전전하여 힘들게 일하던 로코소브스키는 16세에 이르어 폴란드 반(反) 정부 노동자 시위에 휘말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의해 투옥 생활도 경험하게 된다.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로코소브스키는 러시아군에 입대하여 동부전선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는 부사관으로 훈련받은 후 제5기병연대에 입대하여 뛰어난 용맹성을 발휘했다. 이와 같은 용맹성을 인정받아 그는 4개의 게오르기 십자 훈장을 획득했다. 여기까지는 그의 라이벌이자 친구이기도 한 게오르기 주코프(Георгий Жуков)의 경력와 비슷하게 흘러간다.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로코소브스키는 소련 공산당과 신생 소련군에 입대하였고 폴란드인 출신 지원병들을 모집하여 소련군에 입대시켰으며, 적백내전이 발발하자 제30기병사단 소속 연대를 이끌고 백군과 전투를 벌였다. 백군을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제압하는데 대활약을 한 로코소브스키는 프룬제 군사대학에 입학해 엘리트 장교가 되는 교육을 받았지만 소련군 내에서 암암리에 벌어진 폴란드 출신에 대한 차별로 인해서 승진이 어려운데다 몰락한 로마노프 제국 시절 귀족집안, 부르주아로 찍혀 장교들 사이에서도 집단 따돌림을 당해야 했다. 그런데 1919년에 소련-폴란드 전쟁이 터지자 제27기병 연대장인 로코소브스키는 자신의 연대를 이끌고 참전하여 동족인 폴란드 인과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이 전쟁에서의 활약으로 로코소브스키의 충성심이 인정되어 그는 군부 내에서 입지를 강하게 만들 수 있었다. 1937년에 스탈린은 군부 내에도 대숙청을 감행했고 로코소브스키는 스탈린의 숙청의 대상자가 되고 말았다. 그는 폴란드계 소련인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었으며 그의 공무와 처사에 매번 간섭하는 정치 장교들과 자주 갈등을 일으켜 당성에 의심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핀란드와의 겨울전쟁에서 대숙청으로 인해 유능한 장교들이 부족하여 소련군의 패착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자 1940년에 총참모장으로 임명된 게오르기 주코프는 스탈린에게 숙청되어 수용소에 갇힌 지휘관들을 전선에 복귀시키자고 강력히 주장했고 스탈린은 마지못해 이를 승인했다. 시베리아에 유형되어 있던 로코소브스키는 자신이 왜 숙청되었는지를 포함해 일체의 해명없이 곧바로 석방되었다. 로코소브스끼는 크림 반도에서 잠시 요양한 후 스탈린과의 면담한 뒤, 제9기계화 군단장으로 현역에 복귀하였다. 이후 대조국전쟁이 발발하자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 제6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항복을 직접 받아 명성을 떨쳤고 이후 중부전선군과 브랸스크 전선군을 통합한 벨라루스 전선군의 사령관에 취임해 바그라티온 작전의 최선봉에 서서 민스크를 포위해 9군을 섬멸했다. 그리고 독일 제4군과 제1기갑군을 궤멸시켜 우크라이나를 장악한 다음 폴란드의 바르샤바 근처 비스와 강까지 진격하는 바그라티온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기도 했다. 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폴란드는 소련의 위성국인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되었는데, 로코소브스키는 스탈린의 명령을 받아 신생 폴란드 정부의 국방장관이자 폴란드군 원수에 취임했고 뒤이어 내각 수반인 각료 의회 의장 자리까지 차지했다. 로코소브스키는 사실상 소련의 대리인이며 볼셰비키의 지령을 받는 폴란드의 감시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나름 폴란드군을 제대로 정예화시키는데 기여했다. 로코소브스키 뿐만 아니라 소련군에 있던 여러 폴란드계 소련인들이 폴란드군에 돌아와 지휘관이나 부사관을 역임하면서 현재 폴란드군의 기반을 만들었다. 로코소브스키는 오랫동안 러시아에서 살았기 때문에 폴란드어가 무척 어눌했으며 기본적인 단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이에 폴란드 국민들은 소련-폴란드 전쟁과 바르샤바 봉기에서 로코소브스키가 한 기행과 악행으로 인해 로코소브스키를 소련의 하수인이자 러시아에서 온 이방인으로 생각하여 매우 싫어하고 불신했다. 이에 로코소브스키는 러시아에서 자신을 폴란드인이라고 했는데, 폴란드에서는 자신을 러시아인이라 한다며 나름 불편한 감정을 내비치기도 했다.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집권하자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폴란드를 비롯해 동유럽 국가들에서는 반소 자유화 운동이 발생하게 된다. 로코소브스키는 이를 잔인하게 탄압하는 것에 앞장섰고 비밀경찰, 고문과 강제 수용소를 동원해 소련에 반대하는 수많은 인사들을 체포했다. 이는 로코소브스키 자신이 소련에서 대숙청 당시 당했던 것과 같은 방법이었다. 더불어 1956년 포즈난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에는 약 1만 명의 병력과 300대의 전차를 동원해 동족인 폴란드 군중들에게 발포까지 하며 시위대를 해산시켰고 그로 인해 74명의 사상자를 냈다. 로코소브스키의 이와 같은 잔혹한 방법은 큰 비난을 받았고 폴란드 내에서의 로코소브스키의 입지는 크게 좁아졌다. 같은 년도에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집권하자 로코소브스키는 해임되어 소련으로 추방되었다. 로코소브스키는 흐루시초프에게 폴란드를 무력으로 침공하여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흐루시초프는 로코소브스키의 주장을 받아주지 않았고 대신 폴란드의 지도자였던 고무우카와 협상을 개시했다. 흐루시초프는 고무우카와의 협상에서 로코소브스키를 다시 폴란드로 돌려보내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반면 로코소브스키에게는 폴란드 귀화 이전의 소련 직위를 다시 내리며 달래기도 했다. 학자들은 로코소브스키가 대조국전쟁의 분수령에서 항상 선봉을 자처하여 승리를 이끌어 낸 전형적인 명장이자 소련 승리의 큰 공신으로 평가하고 있다. 로코소브스키는 소련군 내에서도 대조국 전쟁에 활약한 일선 야전 사령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지휘관 중 한 명으로 불린다. 군인으로서의 로코소브스키는 최고의 능력을 갖춘 인물로 그의 수하들은 그를 정직하며 겸손하다고 높이 평가했다. 로코소브스키의 제2 벨라루스 전선 군대는 동유럽 점령지에서 최대한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 했다는 사실까지 그의 치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도 러시아에서는 로코소브스키를 영웅으로 숭배하며 모스크바에는 로코소브스키 거리가 있다. 반면 로코소브스키의 고향인 폴란드에서는 소련에 부역한 인물로 매국노 취급을 받고 있다. 폴란드의 역사에서는 로코소브스키의 개입 기간을 폴란드 인민공화국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로 여기고 있다. 사실 이는 스스로 폴란드인이라는 생각이 전혀 없던 로코소브스키를 폴란드계라는 이유로 폴란드에 주둔시킨 스탈린의 잘못된 인사행정으로 빚어진 일이다. 민주화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1950년대 후반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등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자가 집권했을 때부터 이미 이 기간은 최악의 역사로 여겨졌다. 소련의 눈치를 봐야 했던 공산주의 통치자들에게도 비난받을 정도로 로코소브스키는 폴란드에서 행동과 정책은 최악이었다. 그는 군인으로 훌륭했었던 인물이지만 행정은 최악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로코소브스키는 러시아계 폴란드인들에게는 입지전적의 인물로 좋은 평가를 듣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도 토착 폴란드인들이 워낙 좋지 않게 보기 때문에 로코소브스키를 영웅으로 찬양하지는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벨라루스의 경우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정권으로 대표되는 친러 진영에서는 소련 계승의식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콘스탄틴 로코소브스키를 구국의 영웅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벨라루스 민족주의 세력으로 대표되는 반러 진영에서는 그냥 외국인 러시아의 위인 정도로만 여기고 있다. 반러 진영은 로코소브스키가 나치 독일을 격퇴한 명장이라는 것 자체는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그러한 그의 업적을 그저 소련 군인으로서의 업적으로만 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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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앞잡이로 자국에서 환영받지 못한 폴란드의 영웅 콘스탄틴 로코소브스끼(Константин Рокоссовский, 1896~1968)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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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의 혈통들, 루마니아 로얄 패밀리들의 집단 정체성
- 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의 혈통에 대해서는 루마니아 학계에서 많은 의견들과 각종 견해들이 나타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바사라브 왕가의 기원이 트란실바니아에 정착한 슬라브 계통이라고 하기도 하고, 일부 학자는 아시아에서 건너온 쿠만 종족의 일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민족주의 학자들은 고대 다키아 지배층의 후손이라는 주장이 강하다. 2012년에는 루마니아 문화부에서 바사라브 왕가의 인종적 기원을 찾기 위해 쿠르테아 데 아르제쉬(Curtea de Argeș) 수도원에 안치되었던 블라디슬라브 1세(Vladislav I) 왕의 시신에서 DNA를 추출하여 검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바사라브 왕가의 기원에 대해서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바사라브 왕가의 왕들 중 많은 수의 왕은 생을 마감한 후에 쿠르테아 데 아르제쉬의 수도원이나 코지아의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의 시조는 지금의 루마니아 남동부 지역 문테니아(Muntania)와 남서부 지역 올테니아(Oltenia)를 다스렸다. 바사라브 1세(재위 : 1310~1352)는 발라히아(Balahia, 영어로는 왈라키아) 또는 짜라 로므네아스커라고 불리는 공국을 건설한 후, 당시 헝가리의 지배하에 있던 루마니아 남동부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다가 점차 헝가리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이 다스리는 영토를 독립된 공국의 지위로 올려 놓았다. 바사라브 1세는 1330년 정확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포사다(Posada) 지역에서 헝가리의 왕 카를로 로베르트 1세의 침략군을 대파하고, 발라히아를 독립된 공국의 지위로 격상시켰다. 바사라브 1세의 지략이 크게 각광받았던 포사다 전투 이후에 루마니아 남부의 발라히아 뿐만 아니라 루마니아 동북쪽의 형제 공국인 몰도바도 헝가리의 간섭에서 점차 벗어나 독립된 공국의 기틀을 닦을 수 있게 되었다. 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는 바사라브 1세의 뒤를 이어 1600년대까지 발라히아 공국의 수많은 왕들을 배출했다. 몰도바 공국의 무샤트(Mushat) 왕가와는 잦은 정략 결혼을 통해 혈연 관계를 맺어 왔으며, 이를 통해 두 공국은 국가의 위기 때마다 서로 협력하면서 국난을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바사라브 1세의 딸 테오도라(Theodora)는 불가리아의 이반 알렉산데르 왕과 결혼하여 제2 불가리아 제국의 외척 혈통이 되었다. 바사라브 1세의 아들인 니콜라에 알렉산드루(Nicolae Alexandru)의 장녀 엘리자베타(Elizabeta) 공주는 폴란드 야기에우워 왕조의 오폴레(Opole)의 블라디슬라우스(Vladislaus) 왕과 결혼하였고, 작은 딸 안카(Anka)는 세르비아의 스테판 우로쉬 5세 왕과 결혼하였다. 이후에도 발라히아의 바사라브 왕가는 유럽의 여러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어 왔기 때문에, 현재 유럽 주요 왕실의 혈통에는 바사라브 왕가의 혈통이 섞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의 전통적인 왕위 계승 방식은 장자 상속이 아니라 국가 평의회 귀족들의 합의에 의한 선출 방식이었다. 왕이 낳은 모든 아들들은 적자이든 서자이든 상관없이 모두 왕실 혈통으로 받아들여졌고, 언제든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잠재적인 자격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사실 발라히아 공국의 왕위 계승은 상황에 따라 매우 복잡한 양상을 보이게 된다. 어떤 때에는 군사력으로 왕권을 장악하기도 하였고, 어떤 때에는 외국 강대국에게 조공을 약속하고 재가를 얻어 왕위를 보장받기도 하였다. 특히 오스만투르크가 발칸 반도의 거의 대부분을 장악한 1500년대 이후에 등극한 바사라브 왕가의 발라히아 왕들 중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오스만투르크 황제의 허가를 받고 난 후에야 비로소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의 대다수 왕들은 왕권 투쟁 과정에서 왕위 등극과 하야를 여러 차례 반복하기도 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추방되었던 왕이 불과 몇 달 만에 다시 등극하는 일도 있었고, 잠시 왕좌를 아들이나 형제에게 맡겨 놓았다가 얼마 뒤에 다시 찾아가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사라브 왕가의 왕들은 가계 도상에서 재위 순서로 나열하면 비슷한 왕의 이름이 적게는 두세 차례, 많게는 여섯 차례까지 반복되어 등장하기도 한다. 바사라브 왕가는 1400년대 중반 이후에 도네쉬티(Doneshiti) 왕가와 드라쿨레쉬티(Draculeshiti) 왕가로 분류되어 져서 서로 오랜 기간 동안 권력 투쟁을 벌였다. 두 왕가는 서로 상대방을 암살하거나 상해를 입히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면서까지 서로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였다. 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는 헝가리, 오스만투르크, 폴란드, 러시아 등을 상대로 때로는 전쟁을 치르거나 화친을 하면서 중세 유럽 변방의 작은 공국인 발라히아를 수성해냈고, 지금의 루마니아가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된다. 루마니아 국민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미르체아 첼 버트른(Mircea cel Bătrân), 블라드 체페슈(Vlad Țepeș), 미하이 비테아줄(Mihai Viteazul) 등이 바사라브 왕가의 가장 대표적인 왕들이다. 바사라브 왕가의 마지막 왕은 미흐네아 3세(Mihnea III, 재위 : 1658~1659)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바사라브 왕가는 발라히아의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후손들은 유럽 여러 왕실과 혈통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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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의 혈통들, 루마니아 로얄 패밀리들의 집단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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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미국 : 이스라엘의 12일 전쟁 휴전이 우크라이나에게 미칠 영향과 나토 정상회의의 주 논제들에 대해
- 이란-미국 : 이스라엘의 12일 전쟁 휴전이 성사된 이후, 남은 것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선이다. 이란-이스라엘 전쟁을 끝낸 방법을 다시 사용하기에는 위험부담도 크고 이란-이스라엘과는 상황이 크게 다르다. 중동 전쟁에서 우선 우방인 이스라엘이 있고 확전을 원치 않는 걸프만의 수니파 왕정 국가들도 있으니 미국은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선 이란에 대해서는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지만 핵 시설이 파괴됐는지는 미지수고 목적이었던 우라늄 고농축물이 파괴되었다는 확인 또한 하지 못했다. 사실 트럼프식 "보여주기 위한 쇼"로 마무리 된 미국의 작전은 생각보다 그 성과가 미미했다. 만약 핵 시설의 복구가 완료 된다면 트럼프의 이 작전은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은 키예프에 압력을 가해 전면 휴전에 동의하도록 설득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아직까지 무조건적인 휴전에 동의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이란처럼 폭격 전략을 사용한다면 오히려 미국이 위험해질 공산이 크다. 그것은 바로 '핵 전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핵탄두 수는 러시아가 미국을 압도하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의 네오콘들은 트럼프에게 대(對)러시아에 대한 강경책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미 바이든 정권 때 대러 강경책은 실패로 돌아간 바 있어 이는 쉽지 않는 선택이다. 그렇다고 모스크바가 정한 휴전 조건을 모두 들어줄 수도 없다. 이럴 경우, 동맹국들의 신뢰를 모두 잃고 비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 입장에서는 고민에 빠질만 하다. 그나마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다행스러운 것은 트럼프가 중동 위기를 최단 시간 안에 종결지었다는 것이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는 사실에 있다. 이란 핵 협상에서 러시아가 어느 정도 역할에 참여할 경우를 생각한다면 모스크바와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 어렵다는 점은 무시하기 힘들다. 푸틴 대통령과의 개인적 친분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조기 종식을 이끌어 내려는 트럼프로서는 러시아에 대한 강경책보다는 러시아의 입장을 최대한 들어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 현재로서는 매우 유력한 상황이다.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이제 자신들에게 지원을 올인하게 됐다고 마냥 좋아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래도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중동 전쟁이 예상보다 빨리 끝난 것이 행운으로 여길만 하다. 하지만 군사적인 측면으로 볼 때 12일 동안의 중동 전쟁은 이미 우크라이나에 큰 내상을 안긴 셈이다. 미국이 앞으로 이스라엘과 중동 내 군사기지들의 방공망 강화에 집중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는 이란의 드론과 미사일 반격으로 이스라엘이 자랑하던 최강의 방공시스템들이 붕괴되어 버렸다. 이를 복구하고 새로운 방공시스템들을 강화하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비록 우크라이나가 돈을 주고 미제 무기를 산다고 해도, 우크라이나에 방공시스템 등 군사 장비를 제공할 여유가 없기 때문애 우크라이나의 향후 선택은 중동의 포화가 조기에 그쳤지만, 여전히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는 가운데 나토 정상회의가 24, 25일 양일간 열리고 있다. 가장 큰 안건은 방위비 분담이다.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은 미국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헤이그에서 열릴 회의의 내용을 이미 결정한 상태이기 때문에 "방위비 분담" 이야기는 확정된 사항이다. 나토 회원국들은 방위비를 증액하겠다고 약속을 했으며 이는 트럼프 원하는 바이기도 하고 이번 회의를 통해 이를 확정지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타협안과 임시 방편적인 부분들이 불가피하게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이번 정상회의는 무역과 러시아, 그리고 중동에서 심화하는 분쟁 문제를 둘러싼 여러 안건들로 인해 많은 나토 동맹국들 간의 의견 충돌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왜냐면 나토 회원국 중, 대러 강경책을 좋아하지 않는 헝가리, 슬로바키아, 터키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트럼프의 입장에 변수다. 여태까지 국제 문제에서 속 시원하게 해결된 일이 없는 상황이 트럼프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 이란-이스라엘의 휴전을 성사시켰지만 이 또한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다. 이스라엘이 휴전 약속을 깨고 가자지구를 선제 공격한 것처럼 이번에도 이스라엘이 먼저 깨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현재 부패 혐의 등으로 핀치에 몰려 있는 네타냐후 입장에서는 어쩌면 전쟁을 통한 내부 문제를 외부로 환기시키는 것 때문에 어떤 행위를 벌일 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트럼프는 나토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었다. 심지어 나토의 집단방위체제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트럼프가 첫 임기 중 처음으로 참석한 나토 정상회의에서 유럽 동맹국들이 나토군에 대해 충분한 지출을 하지 않고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며 질책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트럼프는 나토에 대해 매우 일관된 입장을 고수해왔다. 마르크 뤼터 사무총장은 트럼프와 절친인 인사다. 그는 나토에서 트럼프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전개할 수 있도록 조율하고 있는 인물이다. 따라서 뤼터는 나토 정상회의는 3시간 동안만 진행되며, 트럼프의 요구로 인해 정상회의 공동성명은 5개 문단으로 축소시키는 등 왠만하면 짧고 간결한 측으로 초점이 맞춰졌다. 이번 정상회의 시간이 짧아진 이유는 장시간의 긴 회의를 싫어하는 트럼프의 성향에 맞추고 그의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뤼터가 일부러 스캐줄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논의 주제가 적은데다가 짧은 정상회의가 오히려 나토 회원국들 간의 의견 분열을 숨기는 것에 도움이 된다. 나토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커트 폴커는 일부 유럽 국가들이 국내총생산(GDP)의 5%를 국방비로 지출하라고 요구하는 트럼프의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왜냐면 서유럽에 비해 경제력이 약한 동유럽 국가들에게 있어 그와 같은 비용들은 국가 예산에 큰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루마니아, 불가리아의 경우, 더더욱 쉽지 않다. 참고로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는 나토 회원국 중 가장 1인당 GDP가 낮은 국가로 EU에서도 가장 가난한 국가로 꼽힌다. 현재 유럽은 여전히 나토 전체 군사비 지출의 30%만을 부담하고 있다. 커트 폴커는 유럽 회원국들 중, 가난한 회원국들이 이처럼 노골적으로 강요를 받은 것은 유감이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한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일부 유럽 국가들은 이미 국방비를 GDP의 5%까지 늘리고 있다. 대개 폴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러시아와 인접한 국가들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많은 나토 회원국들이 새로운 국방비를 목표치까지 달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발트 3국 중,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의 경우, 10년 전에 설정한 목표치의 2%도 채 달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설정한 뤼터의 타협 안은 동맹국들이 핵심 나토 국방비를 GDP의 3.5%까지 늘리고, 국방 관련 지출에 1.5%를 추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국방 관련 지출의 개념이 모호하기 때문에 이런 타협 안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뤼터는 여기에 교량과 도로, 철도 건설과 같은 인프라 산업 비용도 포함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 정도 금액 가지고 인프라 구축까지 담당하는 것은 무리다. 물론 새로운 지출 목표가 승인되더라도 일부 국가들, 아까 언급했던 루마니아나 불가리아의 경우, 2032년 또는 2035년까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의지가 거의 없을 수 있다. 물론 목표 달성 시기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대개 그동안 나토 회의에서 정해졌듯이 10년 단위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스페인 총리 페드로 산체스(Pedro Sánchez)는 이미 새로운 목표치가 불합리하고 비생산적이라고 언급하면서 불가하다는 입장을 비췄다. 영국 총리 키어 스타머는 영국이 언제까지 GDP의 3%를 국방비로 지출할지조차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말로는 언젠가 의회에서 이를 논할 것이라고 언급했을 뿐이다. 하지만 나토를 영국 국방 정책의 중심에 두겠다는 영국 정부 방침으로 볼 때, 스타머는 이와 같은 새로운 계획을 지지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새로운 계획은 러시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나토 자체 방위 계획의 일환이다. 뤼터는 러시아가 나토 회원국을 5년 이내에 공격할 수 있다고 발언한 적 있다. 그런데 나토의 방위 계획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내일 26일이면 그 또한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뤼터 는 이미 나토에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밝힌 바 있는데 나토가 현재 방공 및 미사일 방어 체계를 400% 이상 증강하기 위해 수천 대의 장갑차와 탱크, 그리고 수백만 발의 포탄을 더 확보해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무기를 우크라이나에게 퍼줬기 때문이다. 영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회원국은 아직 나토에서 약속한 역량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스웨덴은 군대 규모를 두 배로 늘리고, 독일은 병력을 6만 명 이상 증원할 계획이다. 그런데 나토는 러시아가 침공할 경우 동맹이 동쪽 측면 지역을 어떻게 방어할 것인지에 대해 상당한 딜레마에 빠져 있다. 유럽 주둔 미군 사령관인 크리스 도나휴(Chris Donahue)는 최근 연설에서 러시아 영토인 칼리닌그라드 인근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영토를 방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도나휴는 동맹의 기존 역량을 살펴본 결과 동맹들의 역량이 러시아를 상대로 지역 방어로 맡기는 것은 허상이었음을 빨리 깨달았다고 밝혔다. 그 전략대로 해야 하는데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군 능력이 해당 지역 방어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인 것이다. 그렇다고 미군을 투입할 수는 없다. 미군 투입은 오히려 러시아를 자극시켜 러시아군의 대규모 공격이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여기서도 자제될 것으로 보인다. 젤렌스키가 참여했지만 대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유럽 측의 소득만 있을 뿐, 미국의 지원은 가능성이 낮다고 본다. 특히 트럼프가 이미 푸틴 대통령과 대화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을 보류하고 있기 때문에 나토의 직접적인 지원보다 EU 차원의 개별적인 지원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이 문제는 현재 유럽과 미국을 분열시키는 가장 큰 쟁점이다. 커트 폴커는 트럼프 정권에서 미국이 우크라이나 안보를 유럽 안보에 필수적으로 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유럽 동맹국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한편 뤼터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는 이슈는 제외됐다고 하였다. 이는 트럼프와의 분열을 피하기 위해서다. 나토 정상들은 새로운 대러시아 전략을 논의할 예정이었지만 이번 의제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했다. 젤렌스키는 정상들의 만찬에 초대됐지만, 북대서양 이사회(North Atlantic Council) 주요 논의에는 참여하지 않을 예정에 있다. G7에 이어 이번에도 젤렌스키는 뭐 하나 성과를 얻어가기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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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미국 : 이스라엘의 12일 전쟁 휴전이 우크라이나에게 미칠 영향과 나토 정상회의의 주 논제들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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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냐민 네타냐후의 정체 : 폴란드 아쉬케나지와 본토 유태인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네타냐후 가문
- 네타냐후는 친영국, 친미국 인사로 당시 총리였던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1922~1995)의 정적이었다. 이츠하크 라빈이 꾸준히 살아있었다면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이러한 피비린내가 진동한 역사는 종식되고 양쪽이 모두 평화롭게 존속했을 것이다. 네타냐후의 이력을 보자면 그는 출생은 텔아비브에서 했지만 부친이 폴란드계 아슈케나지였다. 그의 부친인 벤치욘 네타냐후(Benzion Netanyahu)는 폴란드 바르샤바 출생이다. 본래 성씨는 폴란드어식인 밀레이코프스키(Milejkowski)였지만 베냐민 네타냐후의 어머니인 칠라 세갈(Tzila Segal)을 만나 결혼하고 나서 바꾼 성씨가 네타냐후이다. 네타냐후는 히브리어로 '신이 주신'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참고로 어머니인 세갈은 오스만투르크 제국령 팔레스타인 출신의 토착 유태인이다. 아마 유태인들이 모계사회이자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는 풍속으로 미루어 볼 때, 팔레스타인 전역의 영유화를 꿈꾸는 베냐민 네타냐후가 아마 어머니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베냐민은 1963년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6년 동안 이스라엘에서 군복무하면서 중동전쟁에 참가했고, 이후 1980년까지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MIT에서 학사, 석사를 마치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공부하는 등, 신종 미국의 딥스테이트와 네오콘의 엘리트 과정을 거쳤다. 그가 악랄해질 수 있었던 것의 배경은 이러합 딥스와 네오콘의 엘리트 과정을 모두 습득했기 때문이고, 이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1984년부터 1988년까지 주 UN 대사를 지내고 이스라엘로 돌아와 국회의원이 되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인 지역에 유태인들을 정착시키려는 프로젝트를 만들어 오슬로 협정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이를 비밀 회담이라는 약점을 이용해 "비공식적이 야합"으로 치부했다. 1993년 라빈 정부와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는 가자 지구와 요단강 서안 지역을 위한 자치적 정부 계획의 시작과 그 지역들로부터 이스라엘이 물러남을 포함한 동의서를 서명하여 양국은 또한 자신들의 분쟁들을 풀리는 데 노력하는 데 동의하게 되자 네타냐후는 라빈을 매우 비난했고, 라빈이 오슬로 협정을 맺어 중동의 평화를 이룬 공으로 1994년 10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와 외무장관 시몬 페레스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자 이를 "팔레스타인에게 나라를 판 댓가"라며 거세게 비난했다. 이후 이츠하크 라빈 총리는 1995년 11월 4일 텔아비브의 킹스 오브 이스라엘 광장에서 집회에 참석한 이후, 극우파 유대인 과격론자인 이갈 아미르(Yigal Amir)의 총에 맞아 암살을 당했는데 이 암살의 배후에 아랍과 전쟁을 원하고 팔레스타인의 인종청소를 원하는 딥스 & 네오콘, 그리고 네타냐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라빈 총리가 암살되기 직전 당시 극우파의 지도적인 정치인인 네타냐후가 평화 회담을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를 주도한 사실에 있기 때문이다. 네타냐후가 시위대의 선두에서 관을 들고 행진하는 등 정국분위기를 험악하게 끌고가 암살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무고한 타인을 죽이거나 해치려는 자에 대한 심판을 허용하는 유태교의 종교법인 할라카(Halakha)의 '추적자 원칙'(Din Rodef)을 적극 옹호하던 인물로, 유태인을 테러한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할라카의 심판을 주장하며 시위를 더욱 과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라빈 총리 암살 직후 47세의 나이로 총리에 당선되어 이스라엘 역사상 최연소 총리가 되었다. 난 개인적으로 라빈을 암살한 것은 네타냐후임을 의심하고 있다. 그런 인물이, 가자와 평화를 지키고 중동의 평화를 수호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그는 ICC (국제형사재판소)의 수배를 받고 있다. 미국의 비호만 아니었으면 벌써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있어야 하는 인물이다. 하마스의 공격과 침공을 비난하는 자들이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및 침공은 비난하지 않고 이란 따위가 핵을 가지는 것은 위험하다며 이스라엘의 공습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이처럼 대한민국에는 명예 유태인들과 이스라엘 2등 시민들이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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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냐민 네타냐후의 정체 : 폴란드 아쉬케나지와 본토 유태인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네타냐후 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