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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엔 보고서, 아프리카 난민과 이주민의 유럽행 경로 폭력과 위험
    유엔 국제이주기구(IOM), 유엔난민기구(UNHCR), 그리고 혼합이주센터(MMC) 등 여러 기구가 공동으로 발행한 보고서에 따르면, 아프리카 난민과 이주민들이 유럽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겪는 극심한 폭력과 위협에 대한 심각한 실태가 드러났다. 이 연구는 2020년부터 2023년까지의 기간 동안 31,000명 이상의 아프리카 이주민을 대상으로 진행된 인터뷰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보고서는 이주민들이 성폭행, 고문, 성매매, 장기 적출 등의 극심한 범죄 행위에 노출되어 있다고 밝혔다. 특히 사하라 사막을 통과하는 과정에서의 사망률이 지중해를 통한 이주 시의 사망률보다 최소 두 배 이상 높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주로 극한의 탈수, 질병, 폭력에 의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보고서는 또한 이주민들이 겪는 신체적 폭력과 관련해, 특히 리비아, 알제리, 에티오피아가 가장 위험한 국가로 지목되었다고 언급했다. 이주민들은 자신들을 유럽으로 안내하는 중간업자들과 범죄 조직, 때로는 민병대에 의해 심각한 폭력을 경험했다고 증언했다. 여성 이주민들 경우 성폭력의 위험 노출이 특히 높았다. 약 90%가 성폭행을 당했다고 2020년 유엔 연구 결과에서 밝혔다. 일부 여성은 성매매를 강요당하거나 납치범과 강제로 결혼하도록 강요받는 등의 참혹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뉴욕타임스는 유럽 국가들이 이주민 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북아프리카 국가들에 자금을 지원하고 있지만, 이것이 오히려 이주민들을 더욱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럽의 지원을 받는 보안군은 이주민들을 무방비 상태로 사막으로 돌려보내며, 이로 인해 수많은 이주민이 생명을 잃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연구는 국제사회에 이주민들이 겪는 고통과 위험에 대해 더 깊은 관심과 적극적인 대응을 촉구하는 동시에, 이주민 보호와 안전한 이동을 위한 국제적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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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구촌
    2024-07-07
  • 인천광역시 교육청 주안도서관 맥주인문학 권경민대표 성황리에 개최
    6월28일 금요일 저녁7시 부터 시작된 인천 주안도서관에서 맥주로 떠나는 인문학여행 한국지식문화원의 권경민대표의 '맥주 인문학'강연이 성황리에 성료했다. 이 강연은 주안 도서관을 이용하는 성인 40명을 대상으로 기획 되었는데 빠른 속도로 예약이 완료된 인기 강좌이다. '맥주 인문학' 강연은 맥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역사 속 숨은 이야기를 스토리텔링형식으로 전달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는 단순한 강연을 넘어 벨기에 맥주를 시음하며 그 맛도 즐길 수 있는 오감 만족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연을 통해 참가자들은 지적 호기심을 자극 받고 쉽게 접하기 어려운 벨기에 맥주의 다양한 맛을 경험할 수 있다. 강연은 맥주의 기원과 발전 과정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권경민대표는 맥주의 발명과 이를 둘러싼 역사적 배경을 흥미로운 이야기로 풀어냈다. 고대 문명에서 중세 유럽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맥주는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함께 해왔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참가자들은 맥주가 단순한 음료가 아닌 인류 문화의 중요한 일부임을 깨닫게 되었다. 또 벨기에 맥주의 특이점을 설명하면서, 각 맥주의 특성과 이를 즐기는 방법에 대해서도 상세히 소개했다. 권대표는 벨기에 맥주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이유와 그 맛의 다양성 그리고 이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을 설명하며 참가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권경민 대표는 앞으로도 '맥주 인문학' 강연을 계속 이어갈 계획이다. 이미 많은 단체와 기관, 회사, 도서관에서 강연요청이 이어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이 맥주의 역사와 문화를 배울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또 다양한 주제와 프로그램을 통해 강연의 폭을 넓히고,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이번 '맥주 인문학' 강연은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소통과 문화를 즐기는 축제가 되었다. 앞으로도 권경민대표의 강연이 많은 사람에게 행복한 문화 충전이 되기를 바란다. 인천주안도서관 곽미혜관장(좌) 권경민대표(우) 인천주안도서관 백진샘주무관(좌) 권경민대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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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8
  • 권경민 대표의 '맥주 인문학' 강연, 부천에서 성황리에 개최
    지난 26일, 부천에서 한국지식문화원의 권경민 대표가 '맥주 인문학' 강연을 열었다. 이 강연은 CEO를 포함한 전 직원 1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소통의 리더십 문화와 니즈를 해결해주는 이색적인 주제로 진행되어 큰 호응을 얻었다. 권경민 대표의 강연은 여러 단체와 기관, 회사, 도서관에서 큰 관심을 받고 있으며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 '맥주 인문학' 강연은 맥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역사 속 숨은 이야기를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전달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는 단순한 강연을 넘어 벨기에 맥주를 시음하며 그 맛도 즐길 수 있는 오감 만족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연을 통해 참가자들은 지적 호기심을 자극받고 쉽게 접하기 어려운 벨기에 맥주의 다양한 맛을 경험할 수 있다. 강연은 맥주의 기원과 발전 과정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권경민 대표는 맥주의 발명과 이를 둘러싼 역사적 배경을 흥미로운 이야기로 풀어냈다. 고대 문명에서 중세 유럽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맥주는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함께 해왔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참가자들은 맥주가 단순한 음료가 아닌 인류 문화의 중요한 일부임을 깨닫게 되었다. 또 벨기에 맥주의 특이점을 설명하면서, 각 맥주의 특성과 이를 즐기는 방법에 대해서도 상세히 소개했다. 권 대표는 벨기에 맥주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이유와 그 맛의 다양성 그리고 이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을 설명하며 참가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번 강연은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소통의 리더십 문화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권경민 대표는 맥주라는 공통의 주제를 통해 직원들 간의 소통과 이해를 증진하고 이를 보다 효율적인 조직 문화를 형성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참가자들은 강연을 통해 얻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고 더욱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강연에 참석한 한 직원은 "평소 접하기 어려운 벨기에 맥주를 직접 시음하면서 배울 수 있어 매우 유익했다"라며, "맥주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고 동료들과도 더 가까워진 느낌"이라고 소감을 전했다. 또 다른 참가자는 "권경민 대표의 열정적인 강연 덕분에 맥주에 대한 지식이 많아졌고, 리더십과 소통의 중요성도 다시 깨닫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권경민 대표는 앞으로도 '맥주 인문학' 강연을 계속 이어갈 계획이다. 이미 많은 단체와 기관, 회사, 도서관에서 강연 요청이 이어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이 맥주의 역사와 문화를 배울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또 다양한 주제와 프로그램을 통해 강연의 폭을 넓히고,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이번 '맥주 인문학' 강연은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소통과 리더십을 증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앞으로도 권경민 대표의 강연이 많은 사람에게 유익한 경험을 제공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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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6
  • 금호2동작은도서관 7월 특화프로그램 '맥주로 떠나는 인문학 여행' 한국지식문화원 권경민대표
    오는 7월19일(금) 19:00 금호2동 작은도서관 7월 특화프로그램 '맥주로 떠나는 인문학 여행'이 금호2동 행정복지센터 3층 회의실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광주광역시 서구는 작은도서관을 지역공동체 공간으로 활성화 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추진 중이다. 7월에는 한국지식문화원 권경민 대표의 '맥주로 떠나는 인문학 여행' 프로그램이 예정되어 있다. 대한민국 주류대상 맥주부문 심사위원, 독일 되멘스 비어 소믈리에이며 <맥주소담>, <맥주 한 잔, 유럽여행>, <홉향기 가득 맥주인문학> 등의 맥주관련 저서를 집필한 권경민 대표의 맥주에 대한 재미있는 인문학 이야기와 다양한 스타일의 맥주를 시음하면서 맥주를 더 맛있게 즐길 수 있는 팁과 상식을 배울 수 있다. 일반성인을 대상으로 50명 선착순 접수이며 신청은 서구통합도서관 홈페이지에 하면 된다. 문의 : 서구청 도서관과 062-350-4585
    •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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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6
  • 한국어와 한국 문화, 네팔과 쿠바에서도 배운다. 세종학당 18곳 신규 개설
    문화체육관광부는 오늘 24일, 올해 열다섯 나라에 세종학당 18곳을 신규 개설했다고 발표했다. 이번 개설로 인해 세종학당은 전 세계 88개국 256곳으로 확대된다. 특히 네팔과 쿠바에 처음으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울 수 있는 교육기관이 마련된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와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세종학당이 새로이 문을 연다. 네팔은 고용허가제를 통해 많은 노동자가 한국으로 향하고 있어 한국어 학습의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기존의 학습 여건이 미흡한 상황이었다. 문체부는 카트만두에 세종학당이 지정됨에 따라 한국어 교육과 한국 문화 확산이 더욱 체계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쿠바 역시 한국과 지난 2월 수교를 맺어 다양한 문화와 인적 교류가 예상된다. 중남미 지역은 한국어 학습 열기가 높은 곳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종학당이 한국어를 통한 문화교류 거점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문체부 관계자는 "중남미는 한국어 학습 열기가 높은 권역"이라며 "세종학당이 한국어를 통한 문화교류의 거점 역할을 해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세종학당의 확장은 네팔과 쿠바뿐만 아니라 유럽, 아시아, 오세아니아 등 다양한 지역에 걸쳐 이루어졌다. 독일의 베를린과 뷔르츠부르크,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 스웨덴의 스톡홀름, 우즈베키스탄의 부하라와 지자흐, 이탈리아의 팔레르모, 인도의 벵갈루루, 중국의 청두, 카자흐스탄의 코스타나이, 크로아티아의 스플리트, 태국의 방콕, 폴란드의 카토비체, 필리핀의 일로일로와 케손시티, 호주의 퍼스에 세종학당이 신규 개설된다. 이번 개설로 세종학당은 전 세계 88개국에 256곳이다. 지난해 온·오프라인을 통해 한국어를 공부한 수강생은 21만 6,226명으로 전년 대비 20.8% 증가했다. 2020년과 비교하면 두 배 이상의 성장을 기록한 셈이다. 이러한 성과는 전 세계적으로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종학당재단 관계자는 "올해 세종학당 공모 경쟁률이 5.4대 1에 달할 만큼 각 나라의 한국어 학습 열기가 뜨겁다"라며 "내실 있게 운영되도록 관리·감독을 한층 강화하겠다"라고 밝혔다. 세종학당은 앞으로도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계속해 나갈 계획이다. 세종학당의 확장은 단순히 한국어 가르치는 교육기관의 증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한국 문화의 세계적인 확산과 교류의 거점으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각 나라의 세종학당은 한국어 교육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통문화, 현대 문화, 예술 등을 소개하며 한국과 해당 국가 간의 문화적 교류를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이번 세종학당의 신규 개설은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전 세계적으로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네팔과 쿠바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새로운 세종학당이 성공적으로 운영되어 많은 사람이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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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4
  • 글로벌 웹툰 전시로 K-콘텐츠 확장, 필리핀부터 유럽까지 전략 진출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동남아시아와 유럽을 대상으로 한국 만화·웹툰 전시를 개최하면서 K-콘텐츠의 글로벌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는 BTS와 블랙핑크 같은 K-팝 아티스트들이 해외에서 성공적으로 영향력을 넓혀온 방식을 웹툰에 적용하려는 전략의 일환이다. 웹툰 인구를 확장하고 국내 기업의 해외 시장 진출을 촉진하기 위함이다. 2022년 세계 시장에서 동남아시아 만화·웹툰 시장의 비중은 5%로 비교적 작지만, 한류에 대한 높은 관심 덕분에 이 지역에서의 수요 창출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평가된다. 또한, 유럽에서는 이미 확립된 일본 망가 소비층이 웹툰으로 이동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여주고 있다. 전시는 필리핀에서 시작하여 베트남, 인도네시아, 벨기에, 이탈리아, 싱가포르 등으로 순차적으로 이어진다. 각 국에서의 전시는 현지에서 인기 있는 K-콘텐츠 성격을 반영하여 선호도가 높은 웹툰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필리핀에서는 특히 로맨틱 코미디와 드라마 장르가 인기가 높다는 점을 고려하여, '김 비서가 왜 그럴까'와 '옷소매 붉은 끝동'을 중심으로 전시가 진행된다. '김 비서가 왜 그럴까'는 이미 현지에서 드라마로 리메이크되어 큰 성공을 거둔 바 있으며, OTT 플랫폼 Viu에서 3주 연속 정상에 오르는 등 흥행을 기록했다. 이에 따라 전시장은 웹툰 속 부회장실과 비서실 등을 실제와 같이 재현하여 방문객들의 흥미를 끌 계획이다. '옷소매 붉은 끝동'의 경우, 작화를 맡은 조혜승 작가가 직접 현지에서 홍보 활동을 벌이며, 이야기 콘서트와 만화 그리기 연수회 등을 통해 웹툰에 관심을 촉발시킨다. 이 외에도 각 나라에서 재외 한국문화원을 통해 웹툰 공모, 이야기 콘서트, 사업 교류회, 웹툰 연수회 등 다양한 부대 행사가 마련될 예정이다. 이번 웹툰 전시는 한국 웹툰의 다양성과 매력을 세계에 알리고, 국제적으로 한국 문화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는 이번 전시가 국내 웹툰 기업들의 해외 시장 진출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전시를 통해 새로운 글로벌 팬층을 형성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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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0
  • 2024 광주 월광이슈포럼 '맥주로 떠나는 세계 인문학' 한국지식문화원 권경민대표
    오는 6월27일(목) 16:00~17:30 2024 광주 월광이슈포럼 '맥주로 떠나는 세계 인문학' 강연이 광주관광기업지원센터 라운지에서 진행된다. 한국관광공사, 광주광역시, 광주광역시 관광공사, 광주관광기업지원센터 주최/주관으로 진행되는 2024 광주 월광이슈포럼은 대학생, 시민등 일반인을 대상으로 관광및 마케팅 지식함양을 위해 매달 개최되고 있다. 6월에는 한국지식문화원 권경민대표의 '맥주로 떠나는 세계 인문학' 강연이 예정되어 있다. 권경민 대표는 대한민국주류대상 맥주부문 심사위원, 한국비어소믈리에협회 상임고문,독일 되멘스 비어소믈리에로 저서로는 <맥주소담>, <맥주 한 잔, 유럽여행>, <홉 향기 가득 맥주 인문학 강의>, <지식창업 실전 가이드>, <여행작가 되는 법> 등이 있다. 2024 광주 월광이슈포럼 '맥주로 떠나는 세계 인문학' 참가비는 무료이며, 신청은 광주관광기업지원센터 홈페이지(tourbiz.gjto.or.kr)를 참조하여 네이버폼으로 접수하면 된다. 문의: 광주관광기업지원센터(062-367-0642)
    • 뉴스
    • 문화/행사
    2024-06-19

과학 검색결과

  • 전주 중학교에서 발생한 딥페이크 음란물 사건, 경찰 조사 중
    전북 전주의 한 중학교에서 남학생들이 교사와 동급생의 얼굴을 나체 사진과 합성한 사건이 발생해 사회적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들 학생은 인공지능(AI) 딥페이크 기술을 이용해 음란물을 제작하고 유포했으며, 현재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딥페이크는 AI 기술을 활용해 생성된 가짜 이미지나 오디오, 비디오를 말한다. 이 사건은 딥페이크 범죄가 점점 사회문제로 부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 딥페이크를 악용한 가짜 동영상 및 뉴스 유포 사례가 증가하고 있으며, 이를 근절할 명확한 대책은 아직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가해자를 특정하고 혐의를 입증해 처벌하기 어려운 점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서울대 딥페이크 성범죄 사건에서 보듯, 해외 서버를 이용한 딥페이크 음란물 유포 시 가해자 추적이 어렵고, 혐의 입증 역시 까다로운 상황이다. 심지어 유포 목적이 없이 개인 보관용이라고 주장할 경우 실질적인 처벌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성형 AI의 발전은 딥페이크 범죄 외에도 지식재산권 분야에서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AI가 인간의 최소한 개입만으로 창작물을 생성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면서, 저작권 침해와 같은 이슈가 발생하고 있다. 생성형 AI 기술은 2022년 11월 Open AI에 의해 개발된 챗GPT의 등장으로 급부상했다. 현재 주요국에서는 AI 규제 법령을 시행 중이다. 유럽의회는 3월에 AI 기술의 안전성과 기본권 준수를 보장하는 인공지능 법(AI Act)을 승인했다. 미국에서는 바이든 대통령이 ‘안전성·보안성·신뢰성을 갖는 AI의 개발과 활용에 관한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AI 규제를 강화했다. 중국도 생성형 AI 서비스 관련 법률을 제정해 시행 중이다. 전문가들은 생성형 AI 기술의 부작용이 증가함에 따라, 서비스 제공자의 책임 한계를 명확히 하고, 규제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를 통해 AI 기술의 발전과 사회적 문제 해결 사이의 균형을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 과학
    • 정보통신
    2024-07-01

칼럼 검색결과

  • 2011년 그리스 정부의 유로존 탈퇴 및 디폴트 선언을 무기로 한 그리스 2차 구제 금융 요구 사건
    2011년 7월부터 그리스 정부와 유로그룹은 2차 구제금융 지원 논의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2011년 10월 유로그룹은 채무탕감과 1,300억 유로의 2차 구제금융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다. EU 정상들은 유럽 은행들을 비롯한 민간 채권자들과 10시간에 걸친 마라톤 협상 끝에 그리스 부채 탕감률을 50%로 올리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그리스가 갚아야 할 총 채무 3500억유로 중 민간부문 1000억유로가량이 줄어들게 됐다. 대신 민간 채권자들이 보유한 나머지 그리스 채권이 디폴트에 빠지지 않도록 EU는 300억유로의 보증을 제공한다. 또한 EU 정상들은 EFSF를 4400억유로에서 1조유로 수준으로 대폭 확대했다. 재정위기국이 채권을 발행할 때 EFSF가 발행금액의 20~30% 정도 보증을 서는 것과 EFSF 산하에 특수목적기구(SPV)를 설치해 IMF와 중국 등 국부펀드 자금을 끌어들이자는 방안이 제안되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에게도 전화를 걸어 EFSF에 대한 투자를 요청하기도 했다. 위기에 대비해 역내 은행들이 자본을 내년 6월 말까지 1060억유로 정도 늘리는 은행 자본 확충방안도 나왔다. 은행들이 스스로 자금을 조달해보고 여의치 않을 경우 해당국 정부가 지원해 주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마저도 어려울 경우 유럽재정안정기금인 EFSF가 돕기로 했다. 이와 함께 유로존과 IMF는 그리스의 재정위기 타개를 위해 그리스에 1000억 유로 규모의 추가 지원자금을 공급하기로 했다. 이날 사르코지 대통령은 그리스 민간 부채 중 50%를 탕감하며 올해 160%로 추정되는 그리스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비율을 2020년까지 120%로 낮출 수 있게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EU 정상들은 이탈리아가 의향서 제출을 통해 각종 개혁조치를 실행하겠다고 발표한 것에 대해 환영의 뜻을 밝히면서도 스스로 정한 시한과 목표를 지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번 합의에 따른 관련 규정 변경에는 최소 2~3개월이 소요된다. EFSF 확충 등 이번 합의 사항은 모든 유로존 국가 의회의 동의를 얻아야 한다. 2012년 3월까지 그리스 332억 유로, 이탈리아 1980억 유로, 스페인 840억 유로 등 국채 만기가 도래하게 된다. EFSF가 빨리 운용 가능한 기금 규모를 확충해야 하는 이유다. 결국에는 2011년 10월 EU가 부채의 50%를 탕감해주고 2차 금융 지원을 하기로 결정되었지만, 그리스 국민들은 EU의 수장인 독일의 메르켈 총리를 나치라 비난하는 등, 거세게 반발했다. 이는 금융 지원에 있어 필연적으로 따라 붙게 되는 긴축 요구 때문이다. 당시 데일리 메일에 따르면 그리스 시내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공공의 골칫거리'라는 문구와 더불어 과거 히틀러 정권을 연상시키는 나치 SS 친위대원의 옷차림을 한 포스터가 등장했다. 메르켈 총리는 EU를 상징하는 별과 나치 상징 문양이 함께 그려진 완장도 차고 있다. 그리스 현지 신문 만평도 독일 관리들이 나치 복장을 하거나 긴축정책에 동의한 그리스 정부 관리들이 나치식 인사를 하는 모습으로 그렸다. 시민들은 정부의 임금과 연금 삭감, 증세 등 계속된 긴축정책에 반발하며 연일 시위를 벌이고 있다. 화가 난 일부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고대 유적지를 방문한 독일 관광객에게 적대적으로 대할 정도다. 그리스 언론은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 독일 정부의 간섭이 약 65년 전 히틀러 정권이 그리스에 악행을 저질렀던 경험을 연상시키며 독일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고 분석했다. 우여곡절 끝에 합의된 2차 그리스 구제금융 패키지에 대해 그리스 국민 과반수가 되려 반대 의사를 표했다. 패키지에 포함된 그리스 국채 상각(헤어컷) 프로그램이 자국에 이득이 되지 않을 것이란 이유에서다. 그리스인의 58%는 이 긴축안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고 있으며 대통령과 관료들은 반역자라고 불리고 있다고 한다. 유럽의 지원에 대해서도 50.1%는 필요하다고 답했지만 48.8%는 자주권 훼손을 우려하는 등 그리스 국민들 사이에서는 외부 지원에 대한 의견이 크게 엇갈리고 있다. 다만 그리스가 유로존(유로 사용 17개국)에 남길 원한다고 답한 이는 72.5%에 달했다. 이에 따른 증세불복 시민운동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이 운동 일부 공무원까지 참가하고 있다. 이에 대한 시민 운동의 시작은 그리스 제2의 도시 테살로니키에서 열린 국경일 기념행사의 거리행진에서 드러났다. 매년 주요 정치인들이 참여하는 이 행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0년 이탈리아군의 침공을 저지한 것을 기념해 열리는 이벤트다. 그러나 2011년의 행사는 시위대의 반발로 차질을 빚었다. 시위대는 낮부터 행진을 막고 카를로스 파풀리아스 대통령, 파노스 베글리티스 국방장관 등을 향해 “반역자”라고 외쳤다. 10월 26일에도 베글리티스 장관과 일부 국회의원들은 이 지역 한 교회를 방문했다가 호된 욕설을 들어야만 했다. EU 정상회의가 10월 27일 내놓은 그리스 채권 손실률 상향 등 위기 해법에도 비판은 더 커졌다. 그리스의 지방 자치 단체들도 반발했다. 주민 수가 7만 명인 아테네 광역도의 네아 이오니아 구에서는 전기 요금 고지서에 함께 부과된 신설 재산세를 내지 말도록 촉구했다. 당시 이라클리스 고트시스 구청장은 신설된 세금이 불법이라고 생각한다. 본질적으로는 구민들이 세금 낼 돈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로 심각했다. 재정난으로 인한 국가부도 위기를 타개하려는 정부의 증세정책에 반발한 그리스 국민의 불복종 움직임이 산발적이지만 표면화되고 있는 것이다. 증세에 대한 거부감이 확산되면서 일부 지방 공무원들마저 증세 거부운동에 가담하고 나설 정도였다. 앞서 언급한 네아 이오니아구 의회도 웹사이트에 세금은 내지 않고 전기요금만 내는 방법을 공지하면서 증세 거부를 부추겼다. 물론 이런 움직임은 네아 이오니아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부 변호사들과 노조, 사회운동가들도 정부의 신설 세금 징수와 수만 명의 공무원을 급료 일부만 지급하면서 정직시키는 계획을 좌절시키기 위해 운동에 가담하고 있다. 이로 인해 정부기관 건물들이 점거되는가 하면 파업 중인 노조원들의 복귀를 지시하는 긴급 통지문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고 국영기업들은 일시휴직 대상이 될 수 있는 공무원 명단 제출을 거부했다. 이와 같은 거부운동은 쓰레기 수거 작업원, 제빵사, 택시운전사, 치과의사, 항공관제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산발적인 파업이 계속되는 가운데 확산되었다. 당시 그리스 국민들은 정부의 재정 지출 삭감과 이로인한 가계소득 감소, 16%를 넘어선 실업률로 가계의 지출 여력이 한계에 도달했다. 그리스 국민들의 분노를 자극한 것은 특히 신설된 재산세였다. 2011년 9월 발표된 이 재산세는 올해 말까지 20억 유로를 징수할 것이 계획되어 있다. 그리스 정부는 이 세금을 쉽게 걷기 위해 전기 요금 고지서에 포함시켜 함께 부과했다. 세금을 안 내면 단전될 수 있다는 경고가 포함된 셈이다. 이와 같은 정부의 의도에 국영 전력회사 근로자들까지 분노하고 나섰다. 이들은 단전을 막겠다고 공언하고 단전된 경우에도 노인이나 실업자 등 취약계층에게는 다시 전기 공급을 재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들은 고지서 인쇄를 막기 위해 관련부서를 점거에까지 나서기도 했다. 변호사들도 가세해 아테네 변호사협회는 이번주 이 법의 폐기를 당국에 요구했다. 2011년 11월에 들어서자마자 그리스 정부는 유로존 탈퇴 및 디폴트 선언에 대한 국민투표를 진행하겠다고 나섰다. 그리스가 EU 2차 구제금융안에 대한 국민투표에 유로존 탈퇴안도 포함시키기로 결정했다. 사실상 유로존 탈퇴 여부까지 고려하고 있다는 강경한 의지로 풀이된다. 파판드레우 3새 총리는 11월 2일 EU의 구제금융에 대한 국민투표와 관련하여 그리스가 EU와 유로존 회원국임을 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파판드레우 3세 총리는 각의에서 국민투표의 딜레마는 구제금융과 유로, 유럽에 대해 찬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라며, 현 내각의 불신임 여부와 관련 없다라고 했다. 그리스가 갑자기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치킨 게임에 나서게 된 셈이다. 이에 따라 주가와 유로화 가치가 급락하는 등 금융시장이 다시 불안에 빠지고 있었다. 유로존 국가들이 철회를 요구하고 있지만 다시 한 번 국민투표 강행 의지를 표출한 것이다. 그리스 총리 관저의 툴카스 대변인도 신임투표에서 다시 한 번 승리를 거둬 정부의 계획을 밀고 나갈 것이라며 정부는 국가를 구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에게서 뒤돌아서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특히 4일 일 밤 의회에서 파판드레우 총리에 대한 신임투표를 앞두고 있었다. 여당에서도 반발하는 1명이 탈당해 여당인 범 그리스 사회주의 운동 당의 의석은 과반에서 2석 많은 152석으로 떨어졌다. 제1 야당인 신민주주의 당의 안토니오 사마라스 당수는 조기총선을 요구하면서 총리가 자신을 위해 그리스의 미래와 유럽 내 그리스의 입지를 위험에 빠뜨리는 왜곡된 딜레마를 안겼다고 비난하는 등 야당의 반발도 거세지고 있다. 이와 같은 그리스의 도박에 대해 EU 지도부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유로그룹 의장인 장 클로드 융커 룩셈부르크 총리는 그리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리스가 국민투표를 통해 구제금융안을 거부할 경우 국가부도 상황에 놓일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이어 이미 불안할 대로 불안해진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특히 로버트 졸릭 세계은행 총재는 그리스의 국민투표 결정은 재정위기를 해소하려는 유럽의 노력에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헤르만 반 롬푀이 EU 정상회의 상임의장과 호세 마누엘 바호주 EU 집행위원장도 이날 공동 성명을 통해 그리스가 유로존과 국제사회에 진 의무를 존중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반발이 거센 상황에서 프랑스와 독일, 그리스 정상들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앞서 긴급 회동했다. 이번 회담은 그리스의 국민투표 시행에 따른 금융시장 혼란 등에 대처하기 위한 것으로 IMF 총재, EU 관계자, 그리스 대표 등도 배석한다. 회의에서는 유로존 해법의 열쇠를 쥐고 있는 독일과 프랑스 정상이 그리스의 국민 투표안 철회를 강하게 압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독일과 프랑스 정상은 이날 발표한 성명에서 EU 정상회의 결정을 수행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수적이라면서 그리스 부채를 줄이는 EU 합의안 실행을 촉구했다. 그러나 그리스 국민 대다수의 여론은 디폴트 선언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렇게 될 경우 유로존은 엄청난 위기에 휩싸일 공산이 커지고 그리스는 말 그대로 파르테논 신전 같은 돌덩어리를 제외고는 국내외 자산이 모두 압류된다. 다만 그리스 국내 자산은 그리스의 사법 당국이 허가해야 해외 채권자들이 처분할 수 있다. 당시의 유럽 증시는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운 상황에 있으며 미국이나 아시아 증시의 하락세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와 같은 돌발 상황으로 인해 전 세계 주식이나 금융 쪽에 관련된 투자자나 종사자는 그리스에 대한 원망이 극에 달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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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7-06
  • 홍차무역, 동인도회사와 보스턴 차 사건, 홍차의 수장이 도화선이 된 미국독립전쟁
    현재 홍차를 생산하며 판매하고 있는 동인도회사는 1978년 영국 문장원에서 문장 사용 허가를 받아서 운영하고 있는 회사로 회사의 설립시기를 1978년이 아니라 동인도회사가 설립된 1600년으로 보고 그 연혁을 계승하고는 있다. 그러나 영업 분야가 홍차의 생산 및 판매에 한정되고 있는 만큼 사실상 다른 회사로 보는 것이 맞다. 이 회사에서 판매하는 제품 중에는 보스턴 티 파티(Boston Tea Party)라는 홍차의 제품이 있다. 이 홍차 제품의 경우, 보스턴 차 사건에서 차용한 이름이다. 그래서 제품의 라벨에 당시 보스턴 차 사건을 묘사한 삽화를 삽입했다. 그럼 동인도회사에서도 권장하는 홍차 제품에 나타난 보스턴 티 파티(Boston Tea Party), 거기에서 유래한 보스턴 차 사건은 어떤 사건을 말하는 것일까? 1755년에 시작된 프랑스-인디언 전쟁은 1763년 영국이 강력한 무력을 앞세워 압도적인 승리로 종결되었다. 이 전쟁의 승리를 통해 영국은 북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할 수 있었지만 그와 함께 막대한 빚더미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식민지인 입장에서는 프랑스나 아메리카 원주민 등 경쟁자들을 모두 제압하면서 본국에게 따로 의회와 자치를 요구할 수 있는 환경을 갖게 되었으며 결국 식민지 아메리카에 의회가 설립되었다. 당시 영국 정부의 부채는 세수 총액의 절반이었던 1억 3,000만 파운드로 엄청났다. 이에 1764년부터 설탕세와 1765년에는 인지세를 내게 하면서 아메리카 식민지 인들이 대거 반발했다. 그리고 대규모의 폭력 사태를 일으켰고 결국 영국은 1766년 이러한 큰 세금부과 정책을 철회했다. 아메리카 13개 주(州) 식민지들은 이 때 자신들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늘리기 위해 식민지 의회가 영국 의회에서 대표자로 입회하기를 희망했다. 또한 1770년 2월 22일에는 크리스토퍼 세이더라는 버지니아 주 출신의 소년이 세관 직원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서 같은 해, 3월 5일 보스턴에서 대규모 학살 사건이 발생하는 등 민심도 좋지 않은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한 반발을 강하게 억누르며 세금을 부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수가 부족하자 1773년 봄, 영국 의회에서는 세수를 확대하는 차원에서 홍차법을 제정하여 이를 아메리카 13개 주 식민지에도 적용하게 된다. 당시 홍차는 중국에서 네덜란드에 밀수로 팔고 영국 및 영국 식민지들에 유통되어 네덜란드의 밀수업자들이 대단한 이득을 보는 구조였다. 영국은 자국으로 수입되는 홍차에 대해 관세를 부과한 반면 네덜란드 정부는 홍차에 대한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홍차가 같은 가격에 수입된다면 관세를 물지 않는 측이 저렴해지기 때문에 식민지 밀수업자들은 네덜란드에서 홍차를 사는 것을 선호했던 것이다.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유럽의 홍차 무역에서 본국의 세금 징수를 부담하는 도중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홍차 무역에 밀리게 되면서 그로 인해 적자가 누적되고 있었다. 자국 동인도 회사가 어려움을 겪게 되자 영국 정부가 제시한 홍차법은 중국과 동인도회사, 영국 및 영국 식민지로 유통망을 형성하려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영국은 세수를 확보했고 영국시민들과 아메리카 식민지 13개 주민들은 완전히 거품이 빠진 정가에 홍차를 구매할 수 있게 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이로써 영국법을 통해 동인도 회사가 직접 아메리카 식민지에 홍차를 납품하게 되었고, 이러한 덕택에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은 기존 홍차 가격의 절반으로 홍차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그로 인해 당시 아메리카 식민지 인들은 이 법안에 큰 불만이 없었다. 그런데 정작 불만을 가진 이들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홍차 소비자들이 아니라 아메리카 식민지의 홍차를 네덜란드를 통해 밀수하던 상인들이었다. 당시 홍차 밀수꾼들은 밀수입을 통해 세금을 내지 않았고 이를 통한 부를 지속적으로 축적하고 있었다. 그런데 홍차법이 통과가 되어 자신들의 수입이 끊어지게 되자 이들의 불만이 폭발했고 홍차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영국 정부에 불만을 품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지식인들과 결탁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아메리카 대륙의 여러 영국 식민지들에는 각각의 총독들이 파견되었고 각 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들은 독자적인 정부와 의회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들 아메리카 식민지들을 통솔할 영국 정부는 대서양 건너편 멀리 있었기 때문에 각각의 식민지들은 서로 다른 나라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영국령 아메리카 13개 주의 경우, 영국의 다른 식민지들보다 자율성을 더욱 부여받았다. 그 이유는 청교도들이 중심이 된 메이플라워호의 출항 이후, 아메리카 대륙은 영국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에 의해 개척되었고 그들 중에서 후발주자로 들어온 이민자들 중, 귀족이나 의회 상, 하원 의원급 되는 상류층들도 대거 들어왔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입장에 있었기에 영국에서 정책을 제정하고 실행할 때 각 식민지 총독들과 협의 끝에 결정되었는데, 아메리카 13개 주 식민지만큼은 달랐다. 이들은 총독이 아닌 영국의회로 직접 건너가 대표단이 참가해서 의사결정을 했을 정도였고 의회에서의 결정문을 직접 가지고 13개 주에 돌아와 포고문을 발표했다. 게다가 13개 주의 영국 총독은 13개 주의 의회에서 투표로 선출했고 영국의회의 재가까지 받아 임명되는 다른 영국 식민지들과 엄청난 차이점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아메리카 13개 주의 식민지에 설탕세부터 시작한 세수 확대 법안이 아메리카 대표단의 의견을 무시하고 모두 영국 의회 독단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독단적인 사건은 직접세를 부과한다는 것에 큰 불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 자체가 아메리카 13개 주 식민지에서 그들에 부여된 자치에 대해 영국의회에서 이를 무시한 행위로 간주했기 때문에 이들과 홍차 밀무역꾼들이 서로 결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 때 등장한 인물이 훗날 미국의 2대 대통령 존 애덤스의 6촌 형이었던 사뮤엘 애덤였다. 사뮤엘은 자유의 아들들(Sons of Liberty)이라는 집단을 이끌고 행동에 나서게 되는데 이들은 1773년 12월 16일 저녁 7시. 미국 보스턴 항구에 등장하게 된다. 이 자유의 아들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이었던 모호크족 복장을 하고 있었고 홍차가 가득 실린 동인도 회사 소유의 무역선을 습격했다. 이들 자유의 아들 집단은 100여 명이 총 3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3척의 배에 탑승했고 이들은 선장과 선원을 협박해 화물칸 열쇠를 얻어냈다. 그리고 화물칸에 쌓인 342개에 달하는 상자들을 부수고 그 안에 있던 중국 홍차들을 모두 바다에 던져 버렸다. 이렇게 바다에 뿌려진 홍차의 총 가치는 9,000파운드로, 현재 원화 가치로 환산하면 16억원에 달하는 수준의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에 분노한 영국은 1774년 함대를 파견해 보스턴 항을 폐쇄하고 매사추세츠 자치정부를 해산시켰으며 자치통치에서 직접통치로 식민지배의 방향을 바꾸려는 생각을 갖게 되자 여기에 불만을 품은 아메리카 13개 주 식민지인들이 영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벌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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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6
  • 조지아 서부를 장악하고 있는 아자리야인들의 역사와 아자리야 자치공화국 - 中편
    아르메니아 행정부는 1920년 7월 20일에 아자리야 지역을 조지아에게 양도했다. 그러나 당시 볼셰비키와 러시아의 요원들이 조지아에 들어와 주요 행정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일련의 사보타주와 테러 결사대를 조직하면서 오스만 제국과 관련 있는 인사들과 아르메니아 소속의 주로 소비에트에 대한 반감을 가진 자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민주주의 조지아 집행부는 소비에트 통치 하에 있었지만 아자리야인들과 자치주를 통제하기 어려웠다. 이들은 아자리야 자치주에게 소비에트로 합류를 종용했다.조지아를 소비에트가 장악하고 있는 기간 동안에, 오스만 제국의 군대가 터키 동부 지역의 아르메나아 군을 밀어내면서 1921년 3월 11일 바투미에 출현했고 15일에는 볼셰비키 조지아 군을 이끌도 기오르기 마즈냐슈빌리(Giorgi Maznyashvili) 장군이 아자리야의 군대를 이끌고 오스만 군과 3일 동안 교전을 벌였다. 바투미 지역을 잘 알고 있는 아지리야 군대는 오스만 군과 시가전을 벌이며 중심 시가지들을 완전히 장악했다. 결국 오스만 군은 흑해 해안대를 따라 사르프로 철수했다. 그리고 바투미에서는 소비에트의 직접적인 통치가 19일에 공표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19일에 소비에트-오스만 제국이 카르스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지아 서부 지역은 일명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일명 그루지야 SSR)의 관할에 들어갔고 아자리야인이 장악한 바투미도 그루지아 SSR의 일부 지역으로 합병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지도부에서는 아자리야와 기타 조지아 지역의 종교가 달라 아자리야 지역에 자치권을 줘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때 아자리야에 자치권을 내주고 조지아에게서 독립하게 한 인물이 아이러니하게도 조지아가 고향인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당시에 민족 인민위원이었고 실제로 민족 문제 관련하여 일을 많이 했던 때였다. 스탈린은 조지아 내에서 아자리야인들에 대해 특별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고 이에 상당수의 아자리야 자치정부의 인사들이 스탈린의 측근이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스탈린은 소수민족 출신의 공산주의자들을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포섭할 수 있었으며 이는 공산당의 조직 기강을 내세우기 위해서 신설된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 서기장에 선출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스탈린과 소비에트 정부는 1921년 7월 16일에 아자리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을 공표하면서 조지아와 드디어 완전히 분리시켰다. 그리고 기존의 조지아는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변모한다. 이로 인해 아자리야는 현재까지도 친러 성향이 강한 지역으로 손꼽히고 있다. 한편 국운이 완전히 쇠진한 오스만 제국은 아자리야의 혼혈 인구에서 무슬림들의 이익을 위해 아자리야에게 자치권이 부여되는 조건으로 현 터키 영내 아자리야 지역을 볼셰비키에게 양도했다. . 그와 같은 영토 양도는 소련으로 하여금 모스크바에서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흑해 항구 도시인 바투미를 자카프카스에게 완전하게 통제권이 주어지는 것을 방지하려는 목적이 있었고, 오스만 제국에서 생활하는 조지아계 무슬림들에게 공산주의 성향을 북돋아 오스만 영내에서 볼셰비키의 지령을 받아 각종 사보타주와 첩보활동을 재개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 통치 하에,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교도 공산주의 무신론 사상에 대척된다 여겨 철저히 억제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1929년 4월, 아자리야와 카프카스 산악 무슬림 마을에 거주하는 라즈인들은 강제적인 집산주의화와 종교 박해에 대항하여 여러차례 봉기했다. 이에 소련의 부대들이 동원되어 반란 진압에 나섰고 반란은 곧바로 평정되었다. 그러자 수천명의 아자리야인들은 자국 공화국 밖으로 추방되거나 소련 영내로 강제 이주되어 산산히 흩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때 메흐메트 아바시제(Мехмет Абашидзе)는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지만 스탈린의 사후, 카자흐스탄의 아자리야 공동체들의 지도자 가문으로 아바시제(Абашидзе) 가문이 선정되었다. 이후 흐루시초프 당시 해빙기를 맞이하면서 수많은 민족들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때, 아바시제(Абашидзе) 가문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고향인 조지아 서부 지역으로 돌아온다. 당시 메흐메트 아바시제가 1937년 스탈린의 명령으로 총살된 이후, 지도층이 거의 와해된 상황이었는데 메흐메트 아바시제의 아들인 아슬란 아바시제(Aslan Abashidze)가 아자리야 공동체를 이끌게 되었다. 그는 바투미 대학에서 역사와 철학 학위를, 트빌리시 주립 대학에서 경제학 학위를 취득하면서 소비에트 체제에서 아자리야인들의 희망이 되어갔다. 이후 소련이 해체되면서 아자리야는 형식적으로 조지아에 속했으나 사실상 독립국이나 다름없었던 미승인국가가 되어 있었다. 이에 조지아에서 첫 번째 민주주의 의회가 생성되고 대통령 선거가 치뤄지며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Zviad Gamsakhurdia)가 조지아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감사후르디아는 당선되자마자 아자리야 공화국 지도자인 아슬란 아바시제(Aslan Abashidze)를 초청해 오찬을 함께 했다 한다. 이 때 감사후르디아가 아바시제에게 바랬던 것은 지역 자치의 지위를 포기하여 조지아의 영향 하에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1991년 3월 15일에 감사후르디아는 아바시제를 아자리야 최고 의회 의장으로 임명했다. 이어 감사후르디아는 손수 바투미로 날아가 아바시제를 만나 아자리야 자치권의 폐지를 제안했다. 이에 아바시제는 아바시제는 항변하여 자치권 폐지를 거부했고 감사후르디아는 트빌리시로 돌아가 아자리야인을 특히 지역 무슬림이라 부르면서 이들에 대한 탄압과 강제 진압하기 위해 전군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중앙의 조지아 당국과의 긴장이 형성되며 조지아 내전으로 촉발될 가능성이 커졌다. 감사후르디아는 조지아 민족에게 있어 좋은 지도자였을지 몰라도 압하지야, 남오세티야와 아자리야, 라즈인들에게 있어 그는 흉폭한 폭군이었다. 압하지야, 남오세티야는 감사후르디아의 조치에 즉각 반발했고 당시 체첸과 전쟁에 여념이 없던 러시아를 이 분쟁에 끌어들였다. 특히 아자리야의 아슬란 아바시제는 직접 모스크바로 날아가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을 만났다. 이 때 모스크바에서 옐친의 지원을 확약받고 러시아의 도움을 받게 되니 당시 카바르디노-발카르와 쿠반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군 700여 명이 바투미에 입항하면서 아자리야의 민병대와 합류했다. 1991년 4월 22일, 아바시제 민병대들은 조지아의 공무원들과 친조지아 의회 의원들의 즉각적인 사퇴를 요구하며 바투미 의회로 쇄도했다. 이들은 친조지아 세력들과 관료들을 아자리야 지역에서 추방했으며 감사후르디아의 조지아 군을 격파해 아자리야에서 몰아냈다. 이로써 아바시제는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아자리야를 독립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지아는 당시 심각한 내부 분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수도인 트빌리시에서는 오세티야와 압하지야의 민족 분리 운동으로 인해 소요 사태가 심각했다. 1991년 1월 5일 조지아의 국가 요인 경호대는 남오세티야의 수도 츠힌발리로 진입해서 도시를 포위하면서 중대한 위기 상황을 맞이한다. 그러자 트빌리시에서는 오세티야인과 압하지아인들의 분리 독립 시위가 발생했고 감사후르디아는 여기에 발포를 허가하자 이 시위는 폭동으로 변질되었다. 중요한 국가의 준군사 세력인 조지아 국가 요인 경비대는 친, 반 감사쿠르디아로 분열되었으며 이는 심각한 조지아의 내전(Georgian Civil War, 1991~1993)으로 촉발된다. 상황이 이쯤되니 감사후르디아는 아자리야의 사건들에 간섭할 수 없었다. 게다가 최고 소비에트 의장 대리이며 아자리야에서 조지아 정부의 최고위층 지지자인 보다르 임나제(Bodar Imnaze)가 살해됐다. 아바시제 측의 주장에 의하면, 임나제의 손에 총이 들려있었고 아바시제의 집무실에서 테러를 시도하다가 경호원의 총에 맞았다고 했다. 이를 트빌리시의 대중매체들은 임나제의 사망이 사유불명으로 간략하게 보도했을 뿐이다. 그러나 내부의 주장들에 의하면 임나제가 집무실에서 아바시제와 논쟁하던 중에 아바시제가 격분해 그를 사살했다고 한다. 결국 이는 아자리야가 조지아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독립했음 시사하게 되는 사건임이 틀림없었다. 아자리야는 바투미 항구를 끼고 조지아의 대외무역을 사실상 독점하는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조지아 내전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조지아는 아자리야의 사실상 독립을 막을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아자리야는 표면상으로는 조지아에 속해있었지만 사실상 조지아의 지배를 전혀 받지않는 독립적인 위치에 있게 되었다. 아자리야 공화국은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1997년 10월 24일에, 아자리야는 유럽 지역 의회(AER)의 완전환 회원이 되면서 정식 국가로 서서히 발돋움하기 시작한다. 아자리야 지도부는 조지아 중앙 당국의 예산 확충을 위해 세금 내는 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아바시제에게는 문화, 바투비 해항, 다른 전략적인 대상들에 전체적인 통제권을 갖고 있었고 게다가 그 배후에는 러시아가 있었기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바시제는 자신을 위한 무장 부대를 만들어 아자리야 국방부를 따로 설립했고 조지아 국방부 소속의 바투미 해군기지 25번째 여단의 모든 통제권을 장악했다. 이에 조지아 정부는 바투미 기지의 러시아 군대의 부대가 아바시제의 독재를 위한 세력 기반이라 주장했고 아바시제의 친러시아 행보를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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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4
  • 조지아 서부를 장악하고 있는 아자리야인들의 역사와 아자리야 자치공화국 - 上편
    조지아 서부 지역과 가장 큰 도시인 바투미를 장악하고 있는 아자리야 자치공화국의 주민 중 대부분이 아자리야인이다. 조지아 서부 지역에 대해 고고학자들이 말하길 서부 지역에서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다 하였다. 이 지역을 과거에 모스흐(Moskh)라 불렸는데 이 지역운 고대 조지아 부족이 출현함으로써 B.C 7~3세기에 아자리야의 땅은 고대 콜키스의 지방이 되었다. 그 지역의 일부는 B.C 4세기 후반에 이베리아 왕국에 속하는 나라를 형성했다. B.C 5, 4세기에는 그리스인에 의해 식민지화되어, 해안의 아자리야는 후일에 로마가 통치하게 된다. 바투미와 고니오는 그 당시에 주요 도시들이었고 요새들이었다. 이 두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은 오늘날 코불레티 마을 근처에 있는 피츠바리 마을의 부유했던 흔적을 드러냈다. 서기 2세기에, 바투미는 카프카스 남쪽을 방어하는 로마군의 중요한 군사 기지였다. 11세기 초에, 아자리야는 통일 조지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고 11세기 말에는 셀주크투르크 제귝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13세기에는 몽골에 의해 파괴되었다. 1547년에,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아자리야를 공격했고 바투미를 점령했다. 당시 아자리야인의 일부는 다른 조지아 지역들로 피신했다. 남아있던 사람들은 강제적으로 이슬람교로 개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까지, 대부분의 아자리야의 소작농들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 상당히 안정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1853~1856년에 크림 전쟁과 1877~1878년에 러시아-오스만의 전쟁 기간동안에, 수천 명의 아자리야인들이 오스만 제국의 군대에 의해 징병되면서 러시아와 맞서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에게 전쟁에서 패하면서 아자리야를 러시아 제국에 양도했다. 아자리야 지역은 러시아 통치 하에 들어가면서 정교 중심의 러시아인들은 이슬람교를 압박했고, 수천명의 무슬림인들이 피난처를 찾아서 카프카스 지역 각지에 흩어졌으며 남은 아자리야 무슬림들은 적법한 이주 절차를 통해 바투미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으로 피신했다. 오스만 제국은 아자리야인들에게 자금을 조달하고 복수자들이라고 알려진 테러 조직을 이용해 러시아 장교와 공무원 뿐만아니라 제국 주둔에 동참했던 아자리야인들까지도 테러를 가해 죽이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아자리야인들은 지배자들인 러시아에 충성했고 그럼으로 인해 그들은 다른 조지아들과 재통합 될 수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1878년 베를린 의회는 바투미 지역의 수도를 포르투 프랑코 또는 자유 무역항으로 공표했다. 포르투 프랑코는 1880년대 말, 무렵에 중요한 항구 및 공업 도시가 되었으며 20세기에 들어서, 포르투 프랑코는 바투미로 이름이 바뀌고 바쿠의 석유 생산지와 최초의 송유관 중에 하나인 바쿠-바투미 송유관과 철도로 연결되었다. 이로써 바투미는 유럽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 중에 한 곳이 되었다. 이는 1892년 6월 22일에 거대한 유조선 "마루크스"가 바투미를 떠나 태국의 방콕으로 갔고, 이 유조선이 수에즈 운하를 항해한 최초의 유조선이 되었다. 이 지역에서 카프카스와 카스피해를 이어주는 회랑은 러시아 통치 하에서 무수한 파업들과 유혈 탄압이 자행되었다. 이는 차르가 노동자들을 착취한다 생각했고 공산주의자들이 차르의 탄압을 피해 카프카스 일대로 숨어 들어오면서 아자리야 일대는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암약해 유전에 취업한 현지 노동자들을 선동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차르의 탄압을 받은 아자리야 노동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 상당수의 무하지르(Muhazir)들은 오스만 군 소속 부대에 들어가면서 러시아와 싸우게 된다.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도중,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전쟁 과정에서, 러시아 행정부는 반항적이며 후일 통제가 불가능할 가능성이 높은 무슬림들을 바투미 지역에서 내부 러시아로의 강제 이주 절차를 시작했고, 이에 조지아의 지성인들은 그러한 강제 이주에 대하 항의를 표시했다. 러시아 두마에서 조지아 지역을 담당하는 의원들은 아자리야인들이 이슬람교에도 불구하고 민족적으로는 조지아인들이다. 그러므로 러시아에 충의가 있는 무슬림들은 러시아 내부가 아니라 아자리야 지역에 그대로 잔존해야 한다고 공언했다. 조지아 소속 두마 의원들의 항변에 대한 결과로 인해 러시아의 게오르게 미하일로비치 대공은 무슬림에 대한 인구조사를 주재했고 그 아자리야인들은 러시아 정치 제도에 적의가 없다는 수많은 보고들로 결말을 지었다. 아자리야인들의 불충을 탄원한 코사크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은 크게 비난을 받았고 지방 무슬림들은 폭력적인 대결을 부추기는 그들을 고발했다. 러시아의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아자리야 지도자들과 회담하자고 설득했고, 회담을 하는 도중 그들에게 충성심이 있다고 판결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이 1918년 1월에 끝나기 전까지는 아자리야인들의 반역을 의심하는 인구조사는 종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면서 러시아 군대가 철수함에 따라 1917년 12월 18일의 휴전에 이어졌고, 1918년 4월 14일에는 오스만 제국의 제37기 카프카스 부대가 바투미에 입성하면서 아지리야의 영토는 다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오스만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자 1919년 1월 12일에 영국에서 원정군이 오스만 제국의 병력들을 대신하여 바투미에 상륙했다. 그러면서 러시아 제국 의회의 입헌민주당 페트르 마스로프(Петро Масров)가 의장을 맡은 바툼 지역 의회에서는 1918년 12월 21일부터 1919년 4월 28일까지 아자리야에 대한 통치 권한이 일시적으로 주어지게 된다. 1918~1919년에 메흐메트 아바시제(Мехмет Абашидзе)가 회장으로 있는 이슬람 조지아인 해방 위원회(Исламский комитет освобождения Грузии)는 조지아 국경 내부에 있는 종교적 방침에 있어서 자치권이 성립 되었음을 반복적으로 증명했다. 이들 이슬람 조지아인 해방 위원회는 대부분이 아자리야 무슬림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여기에 라즈인들도 합류했다. 이슬람 조지아인 해방 위원회는 1919년 9월 13일 러시아 지방 자치단체의 기본형 의회로 알려진 매질리스(Mezilis)를 바투미에서 소집시키고 타 조지아 지역은 영국군이 주둔하면서 실질적 지배는 아르메니아인들이 하게 되고 아자리야 지역만은 조지아계 무슬림들이 지배할 수 있게 허가했다. 이와 같은 아바시제의 당파는 아자리야의 자치권만이 문제가 아닌, 완전한 독립에 대해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지아 민족과 친한 아자리야인들, 특히 조지아 정교회 소속의 아자리야인들이 먼저 자리잡고 있을지라도 이들은 조지아와의 통합을 옹호했다. 사실 오스만 제국과의 통합이 불투명한 이상, 그래도 러시아가 지지하는 조지아인들이 영국이나 아르메니아보다 더 낫다는 아바시제의 생각이었다. 그 이유는 아르메니아가 터키계 무슬림들을 학살하고 다녔기 때문에 이는 아자리야 입장에서 최선의 선택이기도 했다. 이들 중 실제 터키계 아자리야인들은 세다이 밀레스(Sedai Miles)라는 단체를 설립해 범투르크 민족주의를 주창하며 영국이나 아르메니아를 상대로 게릴라 전을 펼치기도 했다. 세다이 밀레스(Sedai Miles)는 터키어로 "사람들의 목소리(Insanların sesleri)" 라는 뜻이다. 이들의 게릴라 전과 더불어 오스만 군대와 아제르바이잔인들도 세다이 밀레스를 지원하자 수세에 몰린 영국군 1919년 8월 15일에, 카프카스 일대에서 철군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바투미의 분할된 본부는 바투미의 군사 지배권을 쿠키 콜리스(Kuky Colis)라는 자에게 넘겨주고 콘스탄티노플로 떠났다. 1920년 3월 4일에 총독이자 군사령관에 임명된 쿠키 콜리스는 바투미에서 아자리야 군대를 포함한 조지아 전 군대의 내부 동맹을 명령했다. 그러나 아자리야 내에서 반발이 거세자 1920년 7월 14일에 그 군대는 바투미에서 완전히 해체되었고 쿠키 콜리스는 바투미를 떠나 트빌리시로 이동했다. 이어 아르메니아 행정부는 7월 20일에 아자리야 지역을 조지아에게 양도하면서 이 지역에 대해 완전히 손을 땠다. 이어 러시아의 적백내전에 카프카스 지역이 휘말리게 되면서 볼셰비키 일원들이 조지아에 들어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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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4
  • 조지아 내 내제된 사회 갈등과 양극화
    최근 조지아 의회가 언론과 시민 사회 억압에 대한 국내, 국외의 우려와 반발에도 ‘외국 대리인 법안’을 최종적으로 통과시켰다. 반러 감정을 가진 시민들은 대리인 법안 통과에 반발해 대규모 시위를 열었고, 이에 미국 등 국제사회는 여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제재를 가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법안에 따르면 해외에서 전체 예산의 20% 이상 자금 지원을 받는 언론 매체나 비정부기구인 NGO 단체들은 외국의 영향을 받는 대행기관으로 등록해야 한다. 이에 등록하지 않은 단체나 개인은 벌금과 최대 5년 이하 징역에 처해질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조지아라는 나라 자체가 다수의 NGO들이 결집해 세워진 국가이기 때문이다. 조지아의 언론 및 NGO 시민 사회 단체의 상당수는 미국과 유럽 등의 자금 지원을 받는 단체들이 많다. 이에 시민단체가 조지아 정부의 엄격한 규제에 노출되어 민주주의가 훼손될 것을 우려하여 강하게 반대해왔다. 특히 이와 같은 법안은 2012년에 제정되어 언론과 NGO, 반정부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엄격하게 규제된 러시아의 외국 대리인 법과 비슷하다 여겨 이를 ‘러시아법’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와 러시아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럼에도 이 법 자체가 러시아와 비슷하다 하여 '러시아 법'이라 이름 짓고 이를 비난한 것이다. 특히 조지아의 야당 의원들은 조지아를 친러시아 국가로 만들려는 시도라고 비판하고 있다. 조지아는 그 동안 EU와 나토 가입을 추진해왔으나, 친서방 대 친러시아 노선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과 사회적 갈등이 지속되어 왔다. 여당인 "조지아의 꿈" 정당이 집권하기 이전까지 조지아는 친서방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미국과 나토, 그리고 EU의 영향력을 러시아 국경과 인접된 남부 카프카스 지역으로 확장시켰다. 이에 안보 위협을 느낀 러시아가 남부 카프카스 지역의 갈등 문제에 개입하면서 자신들의 세력권을 구축했다. 러시아 입장에서 소련이 해체된 이후, 카프카스 지역의 저항 세력들은 큰 문제가 되었었기 때문이다. 나토와 EU가 카프카스에 진출하면 90년대 체첸 전쟁과 같은 내전이 또 다시 촉발될 가능성이 높았고 그로 인해 러시아의 안보가 매우 위태로울 수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의 지정학적 전략은 조지아 북부지역인 남오세티아와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 및 돈바스 일대에 대한 통제가 진행되면서 어느 정도 일단락되긴 했다. 조지아와 우크라이나는 지난 2017년 7월 18일 페트로 포로센코(Петр Порошенко)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조지아를 공식 방문함을 계기로 양국 관계를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한 바 있다. 그러나 기오르기 크비리카슈빌리(Giorgi Kvirikashvili) 총리 이후, 이라클리 가리바슈빌리(Irakli Garibashvili)가 2021년에 정권을 이양 받은 이후, 갑작스럽게 친러성향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 때 가리바슈빌리를 지원하고 지지한 세력은 이미 조지아에서 상당수의 재력을 확보한 친러계열의 유태계와 친러 성향의 지지자들, 그리고 바투미를 기반으로한 아자리야계 조지아인들이었다. 이들은 친러 성향을 갖고 있으며 특히 아자리야인들은 바투미를 중심으로 자치공화국을 형성하고 있을 정도로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이 아자리야인들은 조지아계 무슬림들을 대표하는 민족으로 오스만 제국 지배 시기인 16세기부터 17세기 무렵 사이 대부분 이슬람교 하나피파로 개종한 자들이다. 20세기 초 아제르바이잔 바쿠의 유전이 개발되고 생산될 석유를 운반할 송유시설 및 철도가 바투미를 거쳐 건설되면서 아자리야 지역의 중요성이 증대되었다. 게다가 흑해 연안을 쥐고 있는 아자리야인들의 영향력은 무시 못할 수준인 것이 조지아의 유일한 항구이자 바다로의 출구가 아자리야 자치공화국의 수도인 바투미 때문이다. 그래서 조지아의 사회적 갈등은 친러, 반러의 갈등이 곧 동부와 서부라는 지역적 갈등이 내포되어 있다. 조지아 서부는 아자리야인들을 중심으로 압하지야까지 흑해 일대가 연결되어 있고 아자리야인과 압하지야인들은 상호 연대까지 하고 있다. 반면 조지아 동부 지역은 수도인 트빌리시를 중심으로 반러시아의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사진에 나와 있는 온갖 욕설의 러시아 비난과 푸틴에 대한 비난 등의 그레피티가 쓰여 있는 것은 반러 성향의 시민들의 목소리, 그리고 이를 독려하는 친우크라이나 성향의 시민 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난민들, 이어 우크라이나 네오나치인 아조프 연대와 연합한 조지아의 네오나치들이 중심이 되고 있다. 이들은 나치 독일의 제2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의 깃발과 유사한 아조프 연대의 깃발 표식을 그레피티로 새겨 놓고 대놓고 나치와 연대하고 있음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들은 대놓고 서부 지역의 아자리야인과 친러 성향을 조지아인들을 상대로 테러를 저질렀지만 친러 성향의 조지아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총선에서 이라클리 가리바슈빌리(Irakli Garibashvili)를 당선시키면서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리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인 2022년 2월 25일 이라클리 가리바쉬빌리(Irakli Garibashvili) 조지아 총리는 조지아가 서방의 대(對)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가리비쉬빌리 총리는 2023년 5월 24일 카타르 경제 포럼(Qatar Economic Forum)에서 이와 같은 조지아 정부의 입장을 재확인하게 된다. 이어 2023년 8월 23일 러시아 국가안보위원회 부의장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Дмитрий Медведев)는 조지아가 나토 가입을 추진한다면 러시아는 조지아 내 미승인국인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South Ossetia)를 합병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10월 5일에는 아슬란 브자니아(Аслан Бжания) 압하지야 대통령이 러시아와 압하지야의 방어 역량 증대를 목적으로 압하지야 영토 내에 해군 기지를 건설한다는 내용의 합의서에 서명했다. 이후 우크라이나 정부 2023년 7월 5일 재임 당시 권력 남용 혐의로 조지아에 수감 중인 전 조지아 대통령이자 우크라이나 오데사(Odesa) 주지사인 미헤일 사카슈빌리(Mikheil Saakashvili)의 건강 상태가 악화된 것을 두고 인권 탄압이라 비판하면서 우크라이나와의 관계도 멀어지게 되었다. 결국 친러어와 반러의 단순한 대립구도가 지역 대립, 민족 대립으로까지 촉발되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다. 조지아 서부 지역에는 아자리야인 말고도 라즈(Laz)인이 살고 있다. 이들 또한 아자리야인과 같은 무슬림들이고 친러 성향을 갖고 있다. 게다가 이들이 터키에 살고 있으면 조지아계 터키인이고 조지아에 살고 있으면 터키계 조지아인이라 볼 수 있다. 현 터키 대통령인 레제프 에르도안이 라즈인 혈통으로 조지아계 터키인이다. 실제로 에르도안은 인터뷰로 자신의 가문이 조상대에 조지아 바투미에서 터키 리제로 건너온 조지아인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 영향으로 인해 라즈인들은 터키 정부의 상당한 지원까지 받고 있다. 라즈인과 아자리야인으로 대표되는 조지아 서부인들은 리버럴적이 성격을 갖고 있는 조지아 동부 정교회인들과 문화적 차이도 크다. 바투미를 중심으로 한 아자리야 자치공화국도 무슬림과 정교회라는 종교적 차이 때문에 인정해준 것이다. 이처럼 조지아에는 민족계파만 해도 94개가 자리 잡고 있는 나라다. 대한민국의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합친 크기에 불과한 작은 나라지만 이 작은 나라에 90개가 넘는 민족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민족 간의 통합은 조지아의 또 다른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어쩌고 보면 무슬림과 정교회, 유태교까지 이어지는 종교적 대립도 한 몫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 입장에서 조지아를 굳이 군사적으로 공격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지아가 반러 성향의 인물이 총리로 당선되어 반러 세력이 세력의 주동이 된다면 바투미를 중심으로 아자리야 자치공화국을 정식 독립국가로 승인하면 된다. 러시아가 아자리야와 라즈인을 지원하고 조지아 동부의 반러 세력이 라즈인을 학대한다면 터키가 이 문제에 개입할 여지가 생기게 된다. 러시아 하나 막는 것도 버거운데 터키마저 개입을 한다면 조지아는 공중분해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앞서 말한 것처럼 조지아의 사회 갈등은 곧 친러 vs 반러, 동부 vs 서부의 지역갈등, 이슬람 vs 정교 & 유태의 종교갈등, 아자리야 & 라즈 vs 조지아의 민족갈등까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 미국과 집단서방이 장미혁명처럼 색깔혁명을 조장한다면 우크라이나와는 전혀 다른 제2차 조지아 내전이 발발할 가능성이 크다. 2023년 9월 18일 전(前) 조지아 내무부 차관으로 현재 우크라이나군 SBU 부국장인 기오르기 로르키파니제(Giorgi Lorkipanidze) 등이 조지아 내에서 반정부 시위를 조직, 현 정부를 전복하려는 계획이 탄로나면서 제2차 조지아 내전은 언제든 발생 가능한 상황에 있다. 그리고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사뭇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여진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도 연결되어 있기에, 조지아 내 사회갈등을 유심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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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4
  • 포스트 우크라이나 전쟁 다음으로 카프카스와 카스피 해의 에너지 전쟁?
    포스트 우크라이나 다음으로 카프카스와 카스피 해에서 에너지 전쟁이 격발될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에 일본과 중국도 끼어들었다. 일본은 지난 2006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 방문을 계기로 카프카스와 카스피 해 지역의 자원 개발에 나서고 있으며 인도 역시 중앙아시아로 가는 송유관 건설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현재 인도는 중앙아시아를 통해 카슈미르를 통과하여 펀자브 암리차르로 들어오는 가스관에 의지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 대한민국도 석유공사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 컨소시엄을 통해 추정 매장량 10억 배럴의 잠빌 광구 지분을 27%나 확보해 개발에 적극 나서고 있었는데 현재는 이 또한 지지부진하다. 카스피 해는 남한의 3.7배, 한반도의 1.7배에 이르는 거대한 석유 창고로 풍부한 원유를 품고 있는 곳이다. 세계 메이저 석유회사들이 유망광구를 거의 차지했지만 아직 개발되지 않은 기회가 많은 곳이고 BTC와 CTC 라인의 시작점이 열렸어도 인근에 말라가고 있는 아랄 해까지 에너지 전쟁에 있어 매우 가치가 높은 땅이다. 여기에 중국도 같이 빨대를 꼽고 있다. 중국은 21세기 실크로드를 부활시키기 위해 일대일로의 실크로드 재편 작업을 해왔다. 이와 같은 자원전쟁에 있어 중국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이는 자원전쟁에 있어 가장 중점적인 역할을 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중국 일대일로의 육로 사업은 카스피 해 역시 마찬가지로 그 범주에 들어가 있다. 중국은 유전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으며 뭉칫돈을 들고 거대 유전을 송두리째 사들이는 블랙홀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중국 국영석유회사인 CNPC는 지난 2009년 카자흐스탄 최대 석유생산회사인 만기스타우무나이가즈(MMG) 지분 50%를 매입했다. 또 국영 석유회사인 KMG에 50억 달러를 제공하고 개발 사업권을 확보했다. 이에 따라 CNPC는 카자흐스탄 내 총 36개 석유와 가스자산을 확보했으며 이 가운데 15개 자산은 개발에 돌입한 상태에 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매입량을 점차 늘려가며 카스피 해의 큰 손으로 떠오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다가 우리가 애써 개발한 잠빌 광구 지분 또한 중국에게 인수되어 넘어가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왜냐하면 문재인 정부의 관심은 사할린스트림-2에서 추출한 원유와 가스에 관심이 있었던데다 운송비가 저렴하면서 안정적으로 수급이 가능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대러제재로 인한 비우호국가로 찍혀 사할린스트림-2의 가스와 석유값을 루블로 주고 사와야 하는 처지에 몰렸고 결국 관심은 다시 잠빌 광구로 향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거의 중국에게 밀리고 있는 형국이라 잠빌에서 채굴하는 것 또한 만만치 않다. 중국의 CNPC는 2005년에 페트로 카자흐스탄을 42억 달러에 인수하고 3개월 후 카자흐스탄 아타수와 중국의 두산쯔를 연결하는 길이 1,000㎞의 송유관을 완공했다. 카스피 해 인근 켄키약-카샤간-악다우 광구에서 생산된 원유를 내수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구축한 파이프 라인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은 지난 2006년 4월부터 카자흐스탄에서 생산된 원유를 이미 풍족하게 들여오고 있기 때문에 러시아산 가스와 석유는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가스와 석유는 많이 축적할수록 좋은 것이기에 러시아산을 계속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번에 중국은 러시아와 가스 & 석유 계약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해 에너지 전쟁에 있어 최강국으로 떠오를 기세다. 중국의 이와 같은 풍요로움과 흥함은 우리에게 있어 결코 좋은 일은 아니다. 게다가 중국은 우즈베키스탄 미르지요예프 현 정부와도 계약을 맺어 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티베트 파이프 라인을 통해 중국으로 들여오는 에너지 자원의 안전성을 확보했으며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에 반 테러 지역센터를 설치하여 적극 송유관들을 보호했다. 중국의 이와 같은 전방위 원유확보 공세가 커지자 카자흐스탄 정부가 뒤늦게 경계심을 높이고 있다. 1990년대 중반까지 카스피 해 원유 개발에 느긋한 태도를 보이며 여유를 잃지 않던 카자흐스탄이 중국에 대한 원유개발과 M&A를 쉽게 허가해 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는 M&A로 자국 내 외화가 들어오지만 실질적으로 카자흐스탄 정부에 큰 도움이 안 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등 주요 원유 개발 국가와 달리 중국은 M&A 이후 자국 원자재와 인력을 대거 끌어오면서 지역 경제에 큰 도움이 안 되고 있는 것도 한 몫하고 있다. 카자흐스탄 석유가스부는 중국과의 자원외교 협력이 다른 협력국가와 비교해 자재수급, 일자리 창출 등 지역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와 같은 중국과 벌어진 틈새를 이용해 카자흐스탄에 진출하려는 국가들에게 있어 많은 기회 요소가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유럽 국가 중 카스피 해의 BTC 및 투르크스트림을 통해 자원을 거의 거저먹다시피하고 있는 이탈리아와 그리스는 오히려 암묵적으로 카자흐스탄과 파이프 라인이 통과하고 있는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있다. 이는 아제르바이잔을 통해 각자 자국 땅을 거쳐가는 파이프 라인에 대한 임대비를 비롯한 많은 이득이 걸려있던 이유 때문이다. 게다가 조지아와 알바니아는 오래 전부터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분쟁에서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있었기에 BTC 라인을 통한 특혜를 톡톡히 받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와 같은 에너지 수급이 러시아에서 수급받는 것보다 낫다고 하지만 프랑스를 주축으로 기독교 국가로써 아르메니아를 지지하는 유럽 국가들에게 고민이 되고있다. 또한 바다 건너 미국도 2000년대 초반에서 201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구소련 국가들의 문제들에서 관심을 거의 접고 있다. 게다가 이와 같은 문제들을 방관하고 있었기에 오히려 분쟁들이 발생하고 있는 셈이다. 미국은 2010년대 이후부터는 사실상 석유, 가스 수출이 국가 최고의 수익 산업이다 보니 셰일가스 수출선 확보를 위해서라도 유럽이 미국 가스를 사도록 공급을 조정하려고 유럽과 중동의 가스 이동선에 개입하고 있기 때문에 당분간은 중앙아시아나 카프카스, 카스피 해 일대에 대해서는 일단 관심을 접어둘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그러나 포스트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에는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중동을 제외한 국가들이 에너지 수급에 난항을 겪을 가능성이 높기에 다시 이곳에 미국이 관심을 급선회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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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4
  • 삼성전자가 우크라이나에서 판매되는 폴더블 스마트폰 갤럭시Z 제품명에서 'Z'를 삭제한 사건
    삼성전자가 우크라이나에서 판매되는 폴더블 스마트폰 갤럭시Z 제품명에서 'Z'를 삭제했다 한다. 앞서 반(反) 러시아 성향이 강한 발트3국에 이어 우크라이나까지 해당 조치를 확대했다. 삼성전자는 이날 우크라이나 홈페이지에서 판매되는 '갤럭시Z' 시리즈 제품명을 수정했다. '갤럭시Z폴드3'는 '갤럭시폴드3'로, '갤럭시Z플립3'는 '갤럭시플립3'로 변경됐다. 러시아 국방부는 일일 브리핑과 더불어 Z를 매개로 한 사진과 영상을 몇 개씩 선보이고 있다. 진격 명령을 내린 푸틴 대통령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상징하기도 한다. 반대로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발트해 연안, 동유럽 일대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히틀러 시대의 나치 문양인 '하켄크로이츠'와 유사하게 '공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50년 역사를 지닌 스위스의 '취리히 보험회사'가 그동안 사용해온 Z로고 사용을 포기했다. 파란색 바탕에 흰색 Z를 로고로 사용해온 스위스 취리히 보험은 SNS를 통해 Z로고를 사용할 경우 오해의 소지가 있어 당분간 사용을 금지하기로 했다고 언급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지난 3월 초 러시아 군사 장비에 Z와 V자를 쓴 이유를 공식 인스타그램을 통해 설명했다. Z는 '승리를 위해'라는 의미로, 또 다른 문자 V는 '진실의 힘' (Сила в правде)과 '과업 완수'(Задача будет выполнена)를 뜻한다는 것이다. Z는 러시아어로 '승리를 위해', V는 영어로 '승리'(Victory)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Z문양은 금기시된 '나치' 문양과 유사하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특히 독일과 그 주변에서 예민하게 반응했다. 독일은 영화와 고증 등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나치즘을 선전하거나 광고하기 위해 나치 문양인 하켄크로이츠를 사용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독일의 북부 니더작센 주와 남부 바이에른 주는 Z표시를 자동차나 건물에 사용할 경우 최고 징역형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발트해 에스토니아 정부도 Z표시 사용을 경범죄로 분류하고 있다. 체코도 Z를 공개적인 장소에서 사용할 때 법적 처벌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우크라이나에서는 프라비섹토르나 아조프 대대가 나치 문양을 하고 다니는 사진들이나 영상에는 조용히 있으면서 Z문양에만 유독 나치와 똑같이 반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욱일기도 올림픽이나 월드컵에 들고 나왔어도 비판 한 마디도 못하는 자들이 Z표시를 가지고 PTSD 발작을 하고 있다. 그럴꺼면 영어 알파벳에서 Z를 아예 빼버리던가. Z가 전범의 상징이고 러시아 군사작전의 상징이니 영미권 국가들도 Z들어가는 용어를 쓰지 않으면 된다. 라틴 문자에서 Z가 들어가는 단어가 적어도 수천만개? 수억개? 정도 될텐데 그게 트리거가 될 정도면 Z들어가는 문구 모두 바꾸는 글자혁명을 해야 할 판이다. 그리고 Z 문자가 들어가는 나라 또한 14개가 있는데 이들도 나라 이름 바꿔야 할 판이다. 특히 체코는 Z를 공개적인 장소에서 사용할 때 법적 처벌 방안을 검토한다 했으니 그럼 체코 공화국 영문 이름인 Czechia 이거의 Z를 없애던지 영문을 바꾸고 그런 검토를 해야 이치에 맞지 않을까? Z 표시가 들어가 있는 모든 브랜드와 옷도 바꾸고 도시 이름도 Z가 들어가 있으면 바꿔야할듯 하다. 나치만큼 제2차 세계대전의 대학살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현재도 진행 중인 전쟁을 두고 아주 별의 별 짓을 다하고 있다. 그럼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파괴한 전범국 미국 USA의 U도 못 쓰도록 바꿔버리자고 하면 거기에는 침묵하는 자들이다. 이제는 어이 없는 것도 모자라 유치하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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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3
  • 라틴아메리카에서 포클랜드 섬만큼 영토 분쟁이 치열한 섬 사우스조지아(South Georgia) & 사우스샌드위치(South Sandwich) 제도
    라틴아메리카에서 유럽과 영토 분쟁 지역은 영국과 아르헨티나 가 맞서고 있는 포클랜드 제도이다. 그러나 포클랜드 제도 못지 않게 대립이 첨예한 곳이 있다. 그곳은 남대서양에 위치한 사우스조지아 섬과 사우스조지아 동쪽의 작은 섬들인 사우스샌드위치 제도이다. 이 섬들은 현재 영국의 해외 영토이자 속령으로 이 섬들은 남대서양 본 바다와 스코샤 해의 경계가 되고 사우스샌드위치 제도 남쪽은 웨델 해가 된다. 사우스조지아 섬의 면적은 3,756㎢ 정도고 섬의 최고봉인 파제 산의 높이는 거의 3,000m에 가까울 정도로 높다. 사우스조지아 섬의 산악 지대는 빙하로 덮여 있고 사우스샌드위치 제도에는 활화산이 상당수 존재하고 있다. 사우스샌드위치 제도는 무인도이지만 사우스조지아 섬에는 현재 주민이 살고 있다. 이 섬들은 영국이 실효 지배되고 있는 섬들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다. 남극을 제외하면 지구상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지역이라 볼 수 있다. 이 섬들은 모두 남극 수렴선 남쪽에 위치해 있다. 수렴선 남쪽이 일반적으로는 남극 권역으로 간주되고 있다. 남극의 차가운 바닷물과 북쪽의 따뜻한 바닷물이 경계를 이루는 선이 바로 수렴선인데 한 때 같은 행정 구역으로 묶여졌던 근처의 포클랜드 제도의 경우, 위도는 비슷하나 지형의 영향으로 남극 수렴선 북쪽에 있다. 특히 사우스조지아 섬은 수렴선 남쪽에 위치한 육지들 가운데는 가장 먼저 발견된 섬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1502년 남대서양을 항해하던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가 목격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베스푸치의 항해일지 등을 분석한 결과 베스푸치가 이 섬을 목격했을 가능성은 부정되었다. 1675년에 런던의 상인 안토니오 라 데 로치(Antonio La De Rochi)가 항해 중에 이 섬을 발견한 것으로 여겨지고 1775년 영국의 제임스 쿡 탐험대가 남극을 탐사하는 도중 사우스조지아 섬에 상륙하여 영국령임을 선언하고 당시 영국의 왕이었던 조지 3세의 이름을 차용하여 조지아 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우스조지아 남동쪽에 위치한 사우스샌드위치 열도 가운데 남쪽 8개의 섬들은 역시 1775년에 제임스 쿡이 발견했고 북쪽 3개의 섬들은 러시아의 탐험가 파비안 고틀리프 폰 벨링스하우젠(Фаддей Фаддеевич Беллинсгаузен)이 1819년에 발견했다. 그러다가 1904년 카를 안톤 라르센(Carl Anton Larsen, 1860~1924)이라는 탐험가 겸 포경업자가 이곳에 포경을 위한 시설을 만들고 첫 정착이 시작되면서 그리트비켄(Gritvican)이 만들어졌다. 참고로 1913년 10월 8일에 남극에서 최초로 탄생한 인물로 알려진 솔베이 군비에르그 야콥센(Solveig Gunbjørg Jacobsen, 1913~1996)이라는 인물이 이 섬에서 태어났다. 야콥센은 노르웨이와 영국 이민자들을 위한 교회도 세웠는데 영국의 유명한 탐험가인 어니스트 섀클턴(Ernest Shackleton, 1874~1922)도 이곳 교회에 묻혀 있다. 섀클턴은 남극을 탐험하는 도중 사우스조지아 섬에 상륙하고 곧바로 구조선을 수배했지만, 세 차례나 이어진 시도에도 불구하고 엘리펀트 섬에 상륙하지는 못했다. 남반구는 이 시기가 한겨울이었고, 남빙양의 얼음과 풍랑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첫 번째 구조선은 얼음에 막혀 되돌아왔고, 두 번째 구조선은 심하게 망가졌으며, 세 번째 구조선은 침몰 직전까지 가고 말았다. 영국 역시 전쟁 중이라 배를 구하기가 힘들었다. 이 과정에서 무려 4개월의 시간이 흘러가고 말았고, 극한의 상황에서도 침착했던 섀클턴은 건강이 매우 나빠졌다. 결국 섀클턴은 심근경색으로 사망했고 사우스조지아 섬에 묻혔다. 이후 두 제도는 영국이 장악하게 되었고 포클랜드 제도와 하나로 묶여 관리되어 왔지만, 1985년에 별도의 속령(Dependent Territory)이 되었다. 현재는 용어가 바뀌어 영국의 해외 영토(Overseas Territory)로 구분되어 있다. 한 때는 고래 잡는 계절이면 인구가 1,000명을 넘어가기도 했지만 포경 산업이 쇠퇴하면서 인구가 크게 줄어들었고 현재는 공무원이나 남극 관련 연구원 등만이 남아 인구수는 30여명 정도 존재한다. 이곳은 현재 영국의 해외 영토지만, 지리상으로 가장 가까운 나라는 아르헨티나이다. 영국과 아르헨티나는 20세기 초부터 지금까지 이 제도를 두고 영유권 다툼을 벌여왔다.1908년 영국 정부는 사우스조지아와 사우스샌드위치 제도를 합병해 근방 포클랜드 제도로 편입시켰으며 당시 영국은 아르헨티나와 칠레 정부에 서한을 보내 이와 같은 사실을 알렸으나 두 정부는 별다른 항의를 표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1927년 사우스조지아 섬, 1938년 사우스샌드위치 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1904년 노르웨이 포경업자들이 아르헨티나 본토에 포경회사 ’콤파베라 아르헨티나 데 페스카(CAP)’를 세운 뒤 사우스조지아에 처음으로 정착지를 설립하고 영업을 한 전력, 그리고 1905년 아르헨티나 정부가 기상 관측소를 세운 사실이 그 근거로 제시되었다. 섬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영국인이지만, 이 섬에 최초로 거주한 사람은 아르헨티나인이라는 주장인 것이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영국과 법적 분쟁으로까지 번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1940~50년대에 들어 이 섬을 둘러싼 분쟁은 네 차례나 국제사법재판소(ICJ) 문턱까지 갔지만 재판 회부에는 실패했다. 아르헨티나의 반대 때문이었다. 양국이 분쟁을 벌이는 이유는 결국 해양 자원 때문이었다. 인근 해상에 매장되어 있는 석유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이 제도가 남극 대륙으로 향하는 전진 기지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도 분쟁의 또 다른 이유이다. 현재 사우스조지아 섬에는 영국의 남극 해양 기지가 세워져 있다. 물론 양국의 영유권 분쟁은 1980년대 포클랜드 전쟁에 휘말리며 무력 충돌로까지 이어졌다. 1976년 아르헨티나 정부가 사우스샌드위치 제도에 군대를 파견한 데 이어 1982년 4월 아르헨티나가 영국령 포클랜드를 무력으로 점령하자 양국은 교전을 개시했다. 75일간의 전쟁 끝에 6월 14일 아르헨티나의 항복으로 전쟁은 종결되었지만 아르헨티나는 아직도 영국에게 패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양국의 분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현재까지 합의를 보지 못한 상황이다. 다만 국제사회에서는 이 제도들을 영국의 영유권으로 더 인정하는 분위기에 있다. 2009년 4월 두 나라는 사우스조지아 & 사우스샌드위치 인근 해역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자료를 유엔 대륙붕한계위원회(CLCS)에 제출했다. 그러나 2016년 CLCS는 영국의 영유권을 인정하면서 아르헨티나가 다시 항소하고 있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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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1
  • 조지아, 아르메니아의 유태인 아스그나스(Ashkenaz)
    노아의 장손이자 야벳의 장남인 고멜이 시메리안(Simerian)이라는 이름과 큰 영향력을 성경 및 토라와 역사에 남겼다. 야벳의 후예들이 노아의 축복을 받아 이는 아르메니아와 조지아까지 확대되었다. 그리고 노아의 증손이자 고멜의 장남인 아스그나스(Ashkenaz)는 카프카스 지역으로 진출한 가문의 조상이 된다. 성경 및 토라와 카프카스 고대 역사에 등장하는 아스그나스의 흔적들은 많지 않으나 아직도 명확하게 규명되지 못하고 있으며 신화적인 부분에 있어서 무궁무진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의 조상으로 알려진 아스그나스(Ashkenaz)는 터키 땅 전역과 카프카스 일대를 지배했으며 야벳 계통 후예들의 대표자들처럼 인식되었다. 아스그나스의 후예들은 노아의 둘째 아들인 함(Ham), 함의 막내인 가나안(Cannan), 가나안의 둘째 아들인 헷(The Hittites) 종족의 세력들이 후일 큰 제국을 건국한 히타이트 제국과 견줄 정도로 강성해졌다. 그들은 히타이트 제국 이후에 등장한 아시리아 제국과 신바빌로니아 제국 등과도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경쟁하게 된다. 물론 이들 제국들이 워낙 강대하고 파죽지세로 확장해 가는 과정에서 아스그나스의 후예들이 일시적으로 위축되었으며 그들의 영토는 축소된다. 그러나 아스그나스의 후예들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했던 제국들에게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로 각인되어 왔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다가 고대 근동을 호령하던 강대국들의 틈새를 헤집고 들어가 대제국을 건설키도 하였다. 후일 로마 제국의 확장과 신생 페르시아 제국의 대립 속에서 지금의 카프카스 지역과 아르메니아 하이랜드라 불리는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으로 경계가 정해지면서 끝없는 고중세 시대의 지정학적 요충지로 부상했다. 중세 시대 중반부인 서기 1200년을 전후하여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를 통치했던 바그라티드 왕조가 상당 기간 동안 카프카스를 통과하는 실크로드를 장악했고 카프카스 일대의 중계 무역으로 인한 부와 명예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아스그나스의 후예들은 매우 용맹했으며 유럽 러시아와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로 연결되는 지역에 있어 지정학적으로 그 명성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의 지정학적 영토가 이전보다 위축되었기 때문에 아스그나스라는 이름이 잊혀지는 듯했다. 이 당시 아스그나스라는 이름보다 아르메니아나 조지아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더 많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열국들의 뇌리에서 자취를 감춘 듯 보였던 아스그나스(Ashkenaz)가 어느새 유럽 전체를 대표하는 명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지역에 정교회가 자리 잡았고, 산악 유태인들이 자리 잡으면서 야벳의 자손들을 언급했던 것처럼 이들이 유럽의 각 지역들에 흔적을 남겼던 기록들이 적지 않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들 정교 기독교인들과 유태인들에 의해 유럽의 주요 지역들을 망라한 유럽 자체를 가르키는 명칭으로 ‘아스그나스’가 재등장한 것이다. 아르메니아와 조지아의 대명사처럼 불렸던 아스그나스(Ashkenaz)는 유럽 전체를 지칭하는 명칭이 되었던 이유는 노아가 야벳에게 베풀었던 성경 창세기에 나타난 예언적인 축복을 이루어가는 상황에서 점차적으로 동유럽과 러시아를 거쳐서 유럽의 곳곳으로 지경을 넓혀 갔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는 고중세 당대의 역사가들도 아스그나스의 확장에 대해 조심스럽게 언급했다. 중세 시기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고 유럽에서 성지를 탈환하려고 몰려드는 십자군들을 가르켜 아스그나스(Ashkenaz)라고 불렀던 기록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를 두고 어느 정도아스그나스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이는 유태교의 역사와 관련 지을 수 있는데 중세 시대의 중반 이후로 아스그나스 유대인(Ashkenazi Jews)들이 유럽 전체를 대표하는 유태교 추종자들로 알려졌다. 예나 지금이나 유태인은 대개 아스그나스 유태인일 정도로 이들은 전체 유태교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아스그나스 유태인 그룹과 더불어 가장 많은 계파를 이루고 있는 세파라드 유태인(Sepharadic Jews)들은 전체 유태인의 20% 전후를 차지하는데, 이들 세파라드는 스페인을 지칭하는 단어로써 스페인 지역에서 유래한 유태인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성경이나 토라에서도 스페인이 세라파드로 불렸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부분은 스페인에서도 세라파드 내지는 아스그나스(Ashkenaz)로 나라 이름을 지칭했다는 것이다. 1939년경 유럽에는 약 1,200만 명 정도의 아스그나스 유태인(Ashkenazi Jews)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한다.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아스그나스 유태인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는 유태인이라 지칭하면 모두 아스그나스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 아스그나스라는 명칭을 유태인들이 대명사처럼 사용하는 것으로 볼 때, 고대 시기 이스라엘의 북왕조를 구성했던 10개 지파들이 역사에서 사라졌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들 중 상당수가 아르메니아와 조지아의 아스그나스로 유입되었다. 남왕조 유태 왕국의 2개 지파에 속한 유태인들 중 다수도 아스그나스로 속하여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로 이동해 토착화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황과 여건에 따라 유럽의 각 지역으로 분파, 이동했다고 본다. 아스그나스의 본 고장인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에 남아 있던 유태인들 중에 12 사도들의 선교로 인해 기독교인으로 개종된 경우가 많았을 것이고, 아스그나스 유태인들의 숫자만큼이나 아스그나스 기독교인(Ashkenazi Christians)들도 적지 않은 숫자로 존재했을 것이다. 비록 많은 수의 아스그나스 유태인이나 세파라드 유태인들이 유럽 곳곳에 계속 남아 있지만, 아스그나스의 본토인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에 남은 유태인들을 포함하여 그들의 후예들이 주축이 되었고 각각 세계 최초 및 역사상 두 번째로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유럽의 다른 이름인 아스그나스(Ashkenaz)도 대륙 전체가 기독교를 수용하였고 16세기 종교 개혁을 통해 그들의 후예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가 그 지경을 넓혔다고 본다. 조지아나 아르메니아로부터 시작된 아스그나스 유태인 중심의 선민사상은 아스그나스로 불리는 유럽 등에서 백인 우월주의, 혹은 백인 보수 우성향, 백인 리버럴(The White Liberals), 그리고 근본주의적인 백인 기독교인들의 성경적, 사상적 근거로 악용되고 왜곡되어 왔다. 따라서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의 유태인들은 바빌론 유수에서 이스라엘이 로마에 정복된 이후까지 가장 먼저 해외에 진출해 뿌리 박은 자들이고 이들로 인해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가게 된 근원적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과 아쉬케나지 유태인은 조합은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악마적인 유태인 조합으로 재탄생했다. 만약 중동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소멸되면 유태인들이 자리 잡을 곳은 조지아, 아르메니아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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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1
  • 러시아는 한 때 현재 미국 켈리포니아까지 정복한 적 있다
    러시아 출신의 슬라브 인의 최초의 알래스카 정착 기록은 1648년 세묘나 데쥐뇨바(Семёна Дежнёва)가 콜리마 강에서 출발하여 북극해를 가로질러 아나디리 강의 하구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로마노프 연대기(Хроника Романов)>에서 전해진다. 시베리아에서 건너온 아시아-아메리카 토착민들의 혼혈과 더불어 러시아-슬라브 인들의 후손들은 러시아가 알레스카를 팔기 전까지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최초 시민이 되었다. 세묘나 데쥐뇨바(Семёна Дежнёва)의 탐험대 중 일부는 알래스카에 먼저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었으나, 그들이 알래스카에 정착했다는 기록은 현재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데쥐뇨바의 탐험은 러시아 중앙 정부로부터 시작되어 연결된 것이 아닌 시베리아의 끝 지역이 어디인지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고 시베리아가 다른 대륙과 연결되어 있는지에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상륙만 했던 것 뿐이다. 그로 인하여 1725년에 표트르 1세가 탐험을 한번 더 부탁했으나 데쥐뇨바가 1721년에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결국은 무산되었다. 1733~1743의 제2차 캄차카 지역의 탐험 일부로 1741년 6월에 덴마크 탐험가인 비투스 베링(Vitus Berin)이 이끄는 페트르 탐험대와 러시아인 알렉세이 치리코프(Алексей Чириков)가 이끄는 파벨 탐험대가 캄차카 반도의 항구 뻬뜨로빠블로쁘스끄 깜쨔츠끼(Петропавловск-Камчатский)에서 원정을 시작했다. 두 탐험대는 후에 따로 분리되었지만 동쪽으로 항해를 계속하면서 6월 15일에 치리코프(Чириков) 일행이 알레스카 남단의 프린스오브웨일스(Prince of Wales Island) 섬 서부 해안의 땅을 발견하고 북아메리카 북서부 해안가에서 최초로 유럽인들을 정착시키게 된다. 6월 16일경에 베링과 페트르 탐험대는 알레스카 본토의 세인트 엘리아스(Saint Elias) 산을 발견하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에 동시에 파벨 탐험대의 치리코프는 10월달에 새로운 땅인 알류산 열도 중 한 곳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러나 11월에 베링의 배는 러시아로 돌아오는 도중 베링 섬에 난파되었고 그곳에서 베링은 풍토병에 걸려 사망했다. 이어 출항한 페트르 탐험대는 돌풍을 만나 갈라지게 되면서 각 섬 지역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곳이 알류산 열도에 속한 군도들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선원들은 엄청난 추위가 닥치는 알류산 군도에서 겨울을 버틴 후에 1742년 8월에 난파선의 조각으로 배를 만들어 러시아로 떠나게 된다. 그 이후 시베리아와 알레스카 사이의 협수로를 덴마크 탐험가인 비투스 베링(Vitus Berin)의 이름을 붙여 베링 해협이라 불리게 되었다. 베링의 선원들은 1742년에 캄차카 반도의 해안에 도달했고 탐험에 대한 이야기들을 저술로 남겼다. 이때 그들이 가져온 고급 해달 가죽은 러시아 인들이 아메리카 정착을 본격적으로 노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때 이후로 알류산 열도와 알레스카가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었고, 19세기 초에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있던 북아메리카 서부 지역 인디언들 지역들을 뚫고 오늘날의 미국 오리건주(州)와 캘리포니아 주(州), 캐나다의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州)까지 진출하면서 식민지로 삼았다. 19세기 초반에 러시아령 아메리카는 남쪽으로 스페인령이던 멕시코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총책임자였던 니콜라이 레자노프(Николай Резанов)는 알렉산드르 1세의 명으로 러시아령 아메리카 총독으로 파견되어 스페인 측과 협상을 하도록 했다. 레자노프는 스페인령 지역과의 국경 지대에 러시아 인들을 진출하는 것에 대해 러시아 정부가 직접적으로 후원하려는 방편으로 요새의 건립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본국인 이베리아 반도와 지리적으로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세력도 한창 활발했던 16~17세기 같지 않았던 스페인은 역사적으로도 러시아와 인연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잘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이러한 요구를 흔쾌히 들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켈리포니아 지역에 러시아 요새가 건립이 되는데 러시아 아메리카 총독인 니콜라이 레자노프는 요새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807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지 5년이 지난 1812년에 비로소 요새가 건립되었고, 그 요새가 바로 로스 요새(Fort Ross)이다. 만약에 러시아가 오리건이나 켈리포니아, 브리티시 콜롬비아까지 모두 장악하고 유지했었다면 그거야 말로 역사상 유래가 없었던 세계 최대 제국이자 영토였을 것이다. 아마 미국도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비슷한 예로 몽골 제국이 있지만 당시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는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을 정복했고 우즈베키스탄의 3개의 칸국에게서 조공을 받아 정복 전 단계에 놓여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캐나다 서부와 미국 서부의 영토를 가졌다면 그만한 대제국은 전에도, 후에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캘리포니아는 러시아 본국에서 너무 멀었기 때문에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들었고, 설상가상으로 알레스카 지역으로 미국 상인들이 진출하면서 알레스카 지역에서의 미국에 대한 경제적인 의존도가 심해지자, 결국 러시아는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켈리포니아와 오리건, 브리티시 콜롬비아를 포기하고, 경제적 중심지인 알레스카 지역에 집중하기로 하면서 로스 요새는 거의 버려지다시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에 러시아와 영국 간에 벌어진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이라고 불리는 대치전 때문에 러시아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경영은 더욱 어렵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영국령이던 캐나다의 산하 회사인 허드슨 만 회사에 알레스카를 통과하여 항해할 수 있는 권리를 넘겨줌으로써 알류산 열도가 영국의 위협을 받게 되자 러시아는 1867년에 알레스카를 미국에 팔아치우게 된다. 1에이커 당 2달러의 가격으로 미국이 알레스카를 거저 먹은 것이다. 따라서 로스 요새를 비롯한 미국 서부 지역은 자연히 미국 영토로 넘어가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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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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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는 한 때 현재 미국 켈리포니아까지 정복한 적 있다
    러시아 출신의 슬라브 인의 최초의 알래스카 정착 기록은 1648년 세묘나 데쥐뇨바(Семёна Дежнёва)가 콜리마 강에서 출발하여 북극해를 가로질러 아나디리 강의 하구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로마노프 연대기(Хроника Романов)>에서 전해진다. 시베리아에서 건너온 아시아-아메리카 토착민들의 혼혈과 더불어 러시아-슬라브 인들의 후손들은 러시아가 알레스카를 팔기 전까지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최초 시민이 되었다. 세묘나 데쥐뇨바(Семёна Дежнёва)의 탐험대 중 일부는 알래스카에 먼저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었으나, 그들이 알래스카에 정착했다는 기록은 현재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데쥐뇨바의 탐험은 러시아 중앙 정부로부터 시작되어 연결된 것이 아닌 시베리아의 끝 지역이 어디인지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고 시베리아가 다른 대륙과 연결되어 있는지에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상륙만 했던 것 뿐이다. 그로 인하여 1725년에 표트르 1세가 탐험을 한번 더 부탁했으나 데쥐뇨바가 1721년에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결국은 무산되었다. 1733~1743의 제2차 캄차카 지역의 탐험 일부로 1741년 6월에 덴마크 탐험가인 비투스 베링(Vitus Berin)이 이끄는 페트르 탐험대와 러시아인 알렉세이 치리코프(Алексей Чириков)가 이끄는 파벨 탐험대가 캄차카 반도의 항구 뻬뜨로빠블로쁘스끄 깜쨔츠끼(Петропавловск-Камчатский)에서 원정을 시작했다. 두 탐험대는 후에 따로 분리되었지만 동쪽으로 항해를 계속하면서 6월 15일에 치리코프(Чириков) 일행이 알레스카 남단의 프린스오브웨일스(Prince of Wales Island) 섬 서부 해안의 땅을 발견하고 북아메리카 북서부 해안가에서 최초로 유럽인들을 정착시키게 된다. 6월 16일경에 베링과 페트르 탐험대는 알레스카 본토의 세인트 엘리아스(Saint Elias) 산을 발견하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에 동시에 파벨 탐험대의 치리코프는 10월달에 새로운 땅인 알류산 열도 중 한 곳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러나 11월에 베링의 배는 러시아로 돌아오는 도중 베링 섬에 난파되었고 그곳에서 베링은 풍토병에 걸려 사망했다. 이어 출항한 페트르 탐험대는 돌풍을 만나 갈라지게 되면서 각 섬 지역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곳이 알류산 열도에 속한 군도들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선원들은 엄청난 추위가 닥치는 알류산 군도에서 겨울을 버틴 후에 1742년 8월에 난파선의 조각으로 배를 만들어 러시아로 떠나게 된다. 그 이후 시베리아와 알레스카 사이의 협수로를 덴마크 탐험가인 비투스 베링(Vitus Berin)의 이름을 붙여 베링 해협이라 불리게 되었다. 베링의 선원들은 1742년에 캄차카 반도의 해안에 도달했고 탐험에 대한 이야기들을 저술로 남겼다. 이때 그들이 가져온 고급 해달 가죽은 러시아 인들이 아메리카 정착을 본격적으로 노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때 이후로 알류산 열도와 알레스카가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었고, 19세기 초에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있던 북아메리카 서부 지역 인디언들 지역들을 뚫고 오늘날의 미국 오리건주(州)와 캘리포니아 주(州), 캐나다의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州)까지 진출하면서 식민지로 삼았다. 19세기 초반에 러시아령 아메리카는 남쪽으로 스페인령이던 멕시코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총책임자였던 니콜라이 레자노프(Николай Резанов)는 알렉산드르 1세의 명으로 러시아령 아메리카 총독으로 파견되어 스페인 측과 협상을 하도록 했다. 레자노프는 스페인령 지역과의 국경 지대에 러시아 인들을 진출하는 것에 대해 러시아 정부가 직접적으로 후원하려는 방편으로 요새의 건립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본국인 이베리아 반도와 지리적으로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세력도 한창 활발했던 16~17세기 같지 않았던 스페인은 역사적으로도 러시아와 인연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잘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이러한 요구를 흔쾌히 들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켈리포니아 지역에 러시아 요새가 건립이 되는데 러시아 아메리카 총독인 니콜라이 레자노프는 요새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807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지 5년이 지난 1812년에 비로소 요새가 건립되었고, 그 요새가 바로 로스 요새(Fort Ross)이다. 만약에 러시아가 오리건이나 켈리포니아, 브리티시 콜롬비아까지 모두 장악하고 유지했었다면 그거야 말로 역사상 유래가 없었던 세계 최대 제국이자 영토였을 것이다. 아마 미국도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비슷한 예로 몽골 제국이 있지만 당시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는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을 정복했고 우즈베키스탄의 3개의 칸국에게서 조공을 받아 정복 전 단계에 놓여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캐나다 서부와 미국 서부의 영토를 가졌다면 그만한 대제국은 전에도, 후에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캘리포니아는 러시아 본국에서 너무 멀었기 때문에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들었고, 설상가상으로 알레스카 지역으로 미국 상인들이 진출하면서 알레스카 지역에서의 미국에 대한 경제적인 의존도가 심해지자, 결국 러시아는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켈리포니아와 오리건, 브리티시 콜롬비아를 포기하고, 경제적 중심지인 알레스카 지역에 집중하기로 하면서 로스 요새는 거의 버려지다시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에 러시아와 영국 간에 벌어진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이라고 불리는 대치전 때문에 러시아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경영은 더욱 어렵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영국령이던 캐나다의 산하 회사인 허드슨 만 회사에 알레스카를 통과하여 항해할 수 있는 권리를 넘겨줌으로써 알류산 열도가 영국의 위협을 받게 되자 러시아는 1867년에 알레스카를 미국에 팔아치우게 된다. 1에이커 당 2달러의 가격으로 미국이 알레스카를 거저 먹은 것이다. 따라서 로스 요새를 비롯한 미국 서부 지역은 자연히 미국 영토로 넘어가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30
  • 영국 동인도회사의 설립과 역사
    1595년 네덜란드가 인도 항로로 진출하여 향료 무역을 본격적으로 개시하자, 여기에 자극받은 영국 런던의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1600년에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었다. 이 회사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으로부터 특허를 얻어 동인도 지역 무역의 독점권을 얻었다. 처음에는 일항해(一航海)마다의 개별적 기업제(企業制)였는데, 점차 그 폐해가 나타나 1613년 합자(合資) 기업 제도를 채택함과 동시에 영속적인 조직이 되었다. 1656년의 올리버 크롬웰의 항해 조례 개정 이후 있은 뒤에 찰스 2세 시대에 근대식 주식회사로서 확립되었다. 이와 같은 동인도 회사의 활동 범위는 17세기에는 아프리카에서 일본에까지 미쳤는데, 주요 사업은 향료 무역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격렬한 투쟁을 벌인 결과 이에 패배하여 17세기말까지는 인도로 후퇴하게 되었다. 영국은 봄베이로부터 캘커타에 이르는 서부 인도의 해안선을 지배하에 두었다. 물론 이와 관련된 내용은 영국의 작가 가일스 밀턴(Gails Milton)의 저서인 <향료전쟁>에 자세히 나타나고 있다. 영국 동인도 회사(British East India Company) 또는 동인도 회사(East India Company, EIC)는 17세기 영국에서 동양 무역의 독점과 인도의 식민지 경영을 위해 설립된 회사로, 당대 영국 재계를 대표하는 기업이었으며 영국이 장기적으로 인도를 지배, 중국에 진출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일명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던 대영제국을 존재하게 한 회사라 볼 수 있다. 물론 경칭으로 위대한 동인도 회사(Honourable East India Company, HEIC)라 불리기도 했다. 가장 처음 설립된 동인도 사는 일명 동인도 제도에서 무역하는 정부와 런던 상인의 회사(Governor and Company of Merchants of London Trading into the East Indies)라는 긴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이 회사는 엘리자베스 1세가 1600년에 설립 허가를 내주었다. 이후 이에 대항하는 동인도 제도에서 무역하는 잉글랜드 상인의 연합 회사(United Company of Merchants of England Trading to the East Indies)가 1708년 설립되었다. 보통 전자를 런던 회사, 후자를 영국 회사라고 부르며 모두 영국 동인도회사라 불리고 있다. 그로부터 회사는 인도의 면직물 수입을 주력 사업으로 삼았고, 원료를 확보하기 위하여 원주민 생산자에게 경제 이 외 강제적인 행위를 가하였다. 회사는 단순한 기업에 그치지 않고, 내륙 지방에 대한 토지와 주민의 지배를 확대하였으며 1765년 토지세로 대표되는 벵골 지방의 조세 징수권을 무굴 제국 황제로부터 양도받으면서 벵골의 토지 소유자가 되었다. 그로 인해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의 정치 권력자 및 영토 지배자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초창기 영국 동인도회사는 전쟁보다 무역 자체에서 이윤을 창출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1600년 설립된 이후 1세기 동안 이사회는 동인도회사의 사업은 전쟁이 아닌 무역임을 강조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인도와의 무역에 주력했는데, 특히 인도에서 가장 세력이 약하고 유럽의 경쟁국들이 가장 적었던 벵골과 마드라스가 주요한 활동 지역이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프랑스가 인근 지역에 요새를 구축하면서 그들은 전략을 바꾸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한창 전쟁을 벌이던 영국과 프랑스는 인도에서도 무력으로 충돌했다. 프랑스는 세포이로 알려진 인도 병사들을 정규군으로 수용하여 전투 능력을 증대하면서 영국보다 우위를 점했다. 1750년대 영국 동인도회사도 세포이를 수용했고 7년 전쟁이 벌어지기 전날 두 나라는 각각 10,000명에 달하는 무장한 병력들 중 대부분 인도인들을 인도 해안에 배치했다. 청나라에 관심을 가지던 영국은 본격적으로 중국에 진출하기 위해 1759년 영국 동인도회사는 직원을 북경으로 보내 개항을 요구하였고 건륭제(乾隆帝, 재위 : 1735~1796)는 이를 허가하였으나 갑자기 이를 거절하고 대외 무역 규제를 대폭 강화하였다. 또한 영국인들이 주로 활동하고 있던 주산(舟山)과 하문(아모이)의 항을 폐항 하고 광주항만 개항을 허락하였다. 추가로 건륭제는 영국을 포함한 유럽 상인들은 반드시 공행(公行)과만 매매를 하도록 규정하고 그 시기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로 엄격하게 설정하였다. 1780년대부터 청나라와 영국 동인도회사는 본격적인 무역을 하게 된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광동 무역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여 중국으로부터 차, 도자기, 목면 등을 수입하고 영국의 모직물, 면직물 등을 수출했다. 그런데, 청나라 조정에서는 서양 물품을 취급하는 양행 상인들의 조직인 공행 관세를 자의적으로 부과하였고 외국 상인들의 무역을 제한했다. 또한 무역 기간이나 물품도 통제하여 유럽 상인들이 별다른 수입을 올리지 못하였다. 1680년대 찰스 2세가 회사에 대하여 징병 권, 사관임명권, 교전 권(交戰權) 등을 부여함으로써 권력이 보강되었다. 경쟁 상대인 신(新) 동인도회사를 합병하고, 로버트 클라이브(Robert Clive)가 1757년에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 동인도회사에 승리하면서 18세기 중엽에는 인도에 대한 독자적인 지위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본국에서는 회사의 전제와 독점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 인도의 행정은 점차 본국 의회의 감독 하에 들어갔다. 1814년의 인도 무역의 독점 폐지, 차(茶) 무역의 독점 폐지, 인도 회사령(會社領)의 국왕에 이양 등으로 그 사명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1832년 2월 26일, 동인도회사는 광주(廣州)에 와 있던 영국인 간첩 휴 해밀튼 린제이(Hugh Hamilton Lindsay)에게 염탐을 시켰다. 그는 로드 애머스트(Lord Amherst) 호의 선주를 사칭하고, 카를 귀츨라프(Karl Gützlaff)와 함께 광동 이북에서의 무역 확장을 타진하기 위해서라는 구실로, 남오(南澳), 하문(廈門), 복주(福州), 영파(寧波), 상해(上海), 위해(威海) 등 항구를 돌아다니며 지형을 측량 및 제도하고, 정치, 경제, 군사 정보를 수집하여 영국의 외무대신 헨리 존 템플(Henry John Temple)에게 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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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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