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7-03(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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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에서 유럽과 영토 분쟁 지역은 영국과 아르헨티나 가 맞서고 있는 포클랜드 제도이다. 그러나 포클랜드 제도 못지 않게 대립이 첨예한 곳이 있다. 그곳은 남대서양에 위치한 사우스조지아 섬과 사우스조지아 동쪽의 작은 섬들인 사우스샌드위치 제도이다. 이 섬들은 현재 영국의 해외 영토이자 속령으로 이 섬들은 남대서양 본 바다와 스코샤 해의 경계가 되고 사우스샌드위치 제도 남쪽은 웨델 해가 된다. 

 

사우스조지아 섬의 면적은 3,756㎢ 정도고 섬의 최고봉인 파제 산의 높이는 거의 3,000m에 가까울 정도로 높다. 사우스조지아 섬의 산악 지대는 빙하로 덮여 있고 사우스샌드위치 제도에는 활화산이 상당수 존재하고 있다. 사우스샌드위치 제도는 무인도이지만 사우스조지아 섬에는 현재 주민이 살고 있다. 이 섬들은 영국이 실효 지배되고 있는 섬들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다. 남극을 제외하면 지구상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지역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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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사우스조지아(South Georgia) & 사우스샌드위치(South Sandwich) 제도, 출처 : South Georgia & The South Sandwich Islands MPA Enhancements

 

이 섬들은 모두 남극 수렴선 남쪽에 위치해 있다. 수렴선 남쪽이 일반적으로는 남극 권역으로 간주되고 있다. 남극의 차가운 바닷물과 북쪽의 따뜻한 바닷물이 경계를 이루는 선이 바로 수렴선인데 한 때 같은 행정 구역으로 묶여졌던 근처의 포클랜드 제도의 경우, 위도는 비슷하나 지형의 영향으로 남극 수렴선 북쪽에 있다. 특히 사우스조지아 섬은 수렴선 남쪽에 위치한 육지들 가운데는 가장 먼저 발견된 섬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1502년 남대서양을 항해하던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가 목격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베스푸치의 항해일지 등을 분석한 결과 베스푸치가 이 섬을 목격했을 가능성은 부정되었다. 1675년에 런던의 상인 안토니오 라 데 로치(Antonio La De Rochi)가 항해 중에 이 섬을 발견한 것으로 여겨지고 1775년 영국의 제임스 쿡 탐험대가 남극을 탐사하는 도중 사우스조지아 섬에 상륙하여 영국령임을 선언하고 당시 영국의 왕이었던 조지 3세의 이름을 차용하여 조지아 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우스조지아 남동쪽에 위치한 사우스샌드위치 열도 가운데 남쪽 8개의 섬들은 역시 1775년에 제임스 쿡이 발견했고 북쪽 3개의 섬들은 러시아의 탐험가 파비안 고틀리프 폰 벨링스하우젠(Фаддей Фаддеевич Беллинсгаузен)이 1819년에 발견했다. 그러다가 1904년 카를 안톤 라르센(Carl Anton Larsen, 1860~1924)이라는 탐험가 겸 포경업자가 이곳에 포경을 위한 시설을 만들고 첫 정착이 시작되면서 그리트비켄(Gritvican)이 만들어졌다. 

 

참고로 1913년 10월 8일에 남극에서 최초로 탄생한 인물로 알려진 솔베이 군비에르그 야콥센(Solveig Gunbjørg Jacobsen, 1913~1996)이라는 인물이 이 섬에서 태어났다. 야콥센은 노르웨이와 영국 이민자들을 위한 교회도 세웠는데 영국의 유명한 탐험가인 어니스트 섀클턴(Ernest Shackleton, 1874~1922)도 이곳 교회에 묻혀 있다. 섀클턴은 남극을 탐험하는 도중 사우스조지아 섬에 상륙하고 곧바로 구조선을 수배했지만, 세 차례나 이어진 시도에도 불구하고 엘리펀트 섬에 상륙하지는 못했다.


남반구는 이 시기가 한겨울이었고, 남빙양의 얼음과 풍랑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첫 번째 구조선은 얼음에 막혀 되돌아왔고, 두 번째 구조선은 심하게 망가졌으며, 세 번째 구조선은 침몰 직전까지 가고 말았다. 영국 역시 전쟁 중이라 배를 구하기가 힘들었다. 이 과정에서 무려 4개월의 시간이 흘러가고 말았고, 극한의 상황에서도 침착했던 섀클턴은 건강이 매우 나빠졌다. 결국 섀클턴은 심근경색으로 사망했고 사우스조지아 섬에 묻혔다. 

 

이후 두 제도는 영국이 장악하게 되었고 포클랜드 제도와 하나로 묶여 관리되어 왔지만, 1985년에 별도의 속령(Dependent Territory)이 되었다. 현재는 용어가 바뀌어 영국의 해외 영토(Overseas Territory)로 구분되어 있다. 한 때는 고래 잡는 계절이면 인구가 1,000명을 넘어가기도 했지만 포경 산업이 쇠퇴하면서 인구가 크게 줄어들었고 현재는 공무원이나 남극 관련 연구원 등만이 남아 인구수는 30여명 정도 존재한다. 


이곳은 현재 영국의 해외 영토지만, 지리상으로 가장 가까운 나라는 아르헨티나이다. 영국과 아르헨티나는 20세기 초부터 지금까지 이 제도를 두고 영유권 다툼을 벌여왔다.1908년 영국 정부는 사우스조지아와 사우스샌드위치 제도를 합병해 근방 포클랜드 제도로 편입시켰으며 당시 영국은 아르헨티나와 칠레 정부에 서한을 보내 이와 같은 사실을 알렸으나 두 정부는 별다른 항의를 표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1927년 사우스조지아 섬, 1938년 사우스샌드위치 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1904년 노르웨이 포경업자들이 아르헨티나 본토에 포경회사 ’콤파베라 아르헨티나 데 페스카(CAP)’를 세운 뒤 사우스조지아에 처음으로 정착지를 설립하고 영업을 한 전력, 그리고 1905년 아르헨티나 정부가 기상 관측소를 세운 사실이 그 근거로 제시되었다. 섬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영국인이지만, 이 섬에 최초로 거주한 사람은 아르헨티나인이라는 주장인 것이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영국과 법적 분쟁으로까지 번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1940~50년대에 들어 이 섬을 둘러싼 분쟁은 네 차례나 국제사법재판소(ICJ) 문턱까지 갔지만 재판 회부에는 실패했다. 아르헨티나의 반대 때문이었다. 양국이 분쟁을 벌이는 이유는 결국 해양 자원 때문이었다. 인근 해상에 매장되어 있는 석유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이 제도가 남극 대륙으로 향하는 전진 기지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도 분쟁의 또 다른 이유이다. 현재 사우스조지아 섬에는 영국의 남극 해양 기지가 세워져 있다. 

 

물론 양국의 영유권 분쟁은 1980년대 포클랜드 전쟁에 휘말리며 무력 충돌로까지 이어졌다. 1976년 아르헨티나 정부가 사우스샌드위치 제도에 군대를 파견한 데 이어 1982년 4월 아르헨티나가 영국령 포클랜드를 무력으로 점령하자 양국은 교전을 개시했다. 75일간의 전쟁 끝에 6월 14일 아르헨티나의 항복으로 전쟁은 종결되었지만 아르헨티나는 아직도 영국에게 패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양국의 분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현재까지 합의를 보지 못한 상황이다.


다만 국제사회에서는 이 제도들을 영국의 영유권으로 더 인정하는 분위기에 있다. 2009년 4월 두 나라는 사우스조지아 & 사우스샌드위치 인근 해역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자료를 유엔 대륙붕한계위원회(CLCS)에 제출했다. 그러나 2016년 CLCS는 영국의 영유권을 인정하면서 아르헨티나가 다시 항소하고 있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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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에서 포클랜드 섬만큼 영토 분쟁이 치열한 섬 사우스조지아(South Georgia) & 사우스샌드위치(South Sandwich)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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