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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슬라브 문자 체계의 시작, 키릴문자 이야기
    슬라브 문자 체계의 시작은 고대 불가리아어 문자에게서 시작된다. 비록 불가리아의 통치자들이 독립적 교회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여전히 고위 성직자는 그리스 인이었고 신학 책들은 그리스어로 되어 있었으며 이는 대중들을 새로운 종교로 개종하는 것을 지연시켰다. 당시에 900년과 950년 사이 비잔틴 제국의 사제들이 키예프 공국의 선교를 목적으로 파견되었으나 이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이후 비잔틴 제국은 끊임없이 사제들과 수도사들을 키예프 공국에 파견한다. 비잔틴 제국은 블라디미르 등이 개종의 뜻을 밝히는 즉시 바실리우스 2세의 딸과 결혼을 요청했고 결국 바실리우스 2세의 딸과 결혼하여 두 나라는 사돈의 국가가 된다. 이에 주변 국가들이 자신들의 종교를 숭배하게 하기 위하여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여러 사절들을 보냈으나 대부분 추방했다. 키예프 공국은 슬라브 인들을 개종시키기 위하여 불가리아에 사절을 파견했다. 이는 당시 문맹인 슬라브 인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성경을 가르치기 위하여 학자들과 사제들을 보내달라고 부탁하자 불가리아 왕이었던 사무엘은 이들을 환영하였다. 키예프 성직자들은 불가리아 남서부의 오흐리드로 보내져서 그곳에서 991년과 995년 사이에 3,500명의 제자를 가르쳤다. 키예프 성직자들의 일부는 키예프로 돌아와 문예 학교를 설립하였고 이는 후에 노브고로드로 옮겨졌다. 998년 민스크 공의회를 통해 키예프 공국은 글라골 문자와 고대 교회 슬라브어를 교회와 국가의 공식 언어로 채택하였고 이후 비잔틴 제국의 수도사들을 추방하였다. 11세기 초반 키릴 문자가 키예프의 문예 학교에서 고안되었다. 서양 언어에서 라틴계 알파벳에 익숙한 유럽에서는 N자를 거꾸로 써놓은 듯한 글자나 그리스 대문자의 델타(Δ)나 파이(Π) 비슷하게 생긴 글자를 사용하는 러시아 문자를 처음 보면 당혹스럽게 되어 있다. 그 이색적인 러시아어 자모는 9세기 말에 만들어진 키릴 자모를 개량한 것으로, 오늘날과 같은 글자꼴을 갖춘 것은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 때이다. 이러한 키예프 공국에 키릴 문자가 들어온 것은 기독교의 전래와 관계가 깊다.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그 전례 언어를 기록하는 문자로서 키릴 문자가 함께 들어온 것이다. 키릴로스는 형인 메토디우스와 함께 슬라브족에 대한 선교 사업에 나서 슬라브족을 기독교화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때 스베티나움 수도원에서 만들어진 것이 글라골 문자인데 키릴 문자의 원조격이 되는 문자다. 글라골 문자는 가장 오래된 슬라브 알파벳으로 고대 슬라브어 '글라골(Глаголица)'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Глаголица의 고대 슬라브어의 뜻은 "발음 글자, 말하는 글자"라고 한다. 실제 현 키릴 문자를 만든 사람은 키릴로스의 제자인 나움과 클레멘트가 글라골 문자를 변형시켜 키릴 문자를 만들었다. 즉, 키릴로스가 869년 2월 14일에 사망했는데 현재까지 전해지는 키릴 문자는 적어도 870년 이후 생성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키릴로스는 869년 2월 14일에 로마에서 사망했다. 그래서 키릴로스의 성인 축일은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로 북마케도니아 공화국에서는 2월 14일이 공식 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마치 러시아에서 12월 6일인 성 니콜라스 축일이 휴일인 것과 같은 의미이다. 키예프 공국의 키릴 문자는 불가리아에서 가져 온 것으로 다수의 슬라브 인들에 문맹을 개선하기 위한 방책으로 적극 도입하였다. 9세기 말부터 10세기에 걸쳐 슬라브인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힘을 쏟은 사제들 가운데에 그리스인 키릴로스가 있었다. 키릴로스는 860년대에 형 메토디우스와 함께 지금의 체코인 모라비아의 슬라브인들에게 선교를 시작했다. 그 때 선교의 필요에 의해 슬라브어 발음을 토대로 하여 글자를 만들었다. 그것이 글라골 문자이고 그 문자체계에 상응하여 형성된 언어체계가 고대 교회 슬라브어다. 그는 그리고 정교의 성서와 전례를 교회 슬라브어와 글라골 문자로 번역했다. 이어 키릴로스와 메토디우스의 제자들이 9세기 말에 불가리아에서 글라골 문자를 발전시켜 키릴 문자를 고안해냈다. 그들은 사람들이 익히고 쓰기 쉽도록 비교적 단순한 그리스 알파벳 대문자를 많이 활용했다. 사제 키릴로스의 슬라브 명칭인 '키릴' 을 차용하여 ‘키릴 문자’ 로 이름 지어진 이 문자는 점차 슬라브 권의 동부에 퍼지면서 러시아어, 불가리아어, 세르비아어, 마케도니아어를 기록하는 문자로 정착한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28
  • 오늘이 빅토르 최 탄생 62주년 되는 날, 그를 기억해 본다
    빅토르 최는 1962년 6월 21일 소련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아버지 로베르트 막시모비치 초이(최동열)와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외아들로 출생했다. 따지고 보면 비록 모계지만 빅토르 최도 차이코프스키와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의 피가 섞여 있는 셈이다. 짜이꼽스끼와 똘스또이를 역사교과서에서 삭제하고 있는 현재 우크라이나가 설마 빅토르 최에 대한 노래나 흔적 등을 지우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는 1980년대 중반 소련 사회의 급진적 개혁의 시기였던 뻬레스뜨로이까 시절에 청년 대중 문화의 아이콘이었다. 구소련 국가에서 그만한 인기를 가진 스타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던 전무후무한 최고의 락 가수이자 그룹 키노(Кино)는 최고의 락 그룹이다. 당시 소련 정부가 락 음악을 허가함으로 인해 신문들은 락 콘서트에 대한 기사를 쓸 수 있게 되면서 빅토르 최와 그의 그룹인 키노(Кино)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게 된다. 그리고 그 시절 빅토르 최와 그의 그룹 키노(Кино)는 그 노래가 지금 러시아, 러시아 뿐만아니라 소련에 속해 있었다가 독립한 구소련 국가 가요계에서도 끝없이 리메이크 될 정도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키노의 노래들에는 당시 청년층의 세계관과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공산주의 보수적 관료주의 물들어 있는 기성 세대와 다른 공산주의의 시대적인 일탈을 꿈꿔온 자유를 갈망한 젊은이들의 언어로 쓰여진 키노의 노래는 젊은이들이 쉽게 공감하는 깊이와 시적 울림을 갖고 있었다. 뻬레스뜨로이까 시기의 락 음악에서 키노의 라이벌이자 또 다른 그룹인 ‘아크바리움(Аквариум)’의 리더 보리스 그레벤시코프(Борис Гребенщиков)는 키노와 빅토르 최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빅토르는 단순, 명료, 진실 그 자체다. 그와 같은 가사를 쓴 사람은 러시아에서 아무도 없었다. 그가 데뷔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내가 그에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이제 뒤로 물러나고 자네들이 러시아를 대표하는 그룹이 될거야’ 라고했다. 그러자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웃었다. 내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빅토르 최의 노래 대부분이 한 개인이 겪고 있는 감정에 대한 것이 많았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징이었던 히트곡 ‘변화(Перемен)!’도 그가 직접 작사한 노래였다. 사람들은 이 노래 속에서 소련식 생활방식의 급진적 개혁을 요구하는 정치적인 메시지로 합리화했다. ‘변화(Перемен)!’가 수록된 엘범이 처음 공개된 것은 1986년이었지만 다음 해 개봉한 뻬레스뜨로이까 시기의 전설적인 영화 <아싸(Асса)>로 인해 대중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순식간에 사람들 사이에서 변화(Перемен)는 ‘뻬레스뜨로이까를 상징하는 노래’로 각인되었다. 이 노래의 배경은 당시 빅토르 최가 보일러공으로 일했을 때인데 더 많은 자유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고 그 자체가 별로 힘들지 않았으며, 교대 사이에 휴식 시간이 많은 교대 근무제로 조직되었다. 특히 집회, 행진, 기타 공적인 행사들에 참석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에 빅토르 최가 보일러공으로 일하면서 자신의 음악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일러실은 구역의 당시 소비에트 시스템에 의하면 중앙화된 난방 시스템에서 한 지역의 기술적 문제를 담당하는 곳이었다. 보일러실은 구역의 온수 파이프를 관리하는 제어장치와 밸브들이 있는 방이었고 기술자들이 하는 일은 파이프의 압력을 확인하고 온수와 냉수를 켜고 끄며, 어쩌다 문제가 생기면 수리공을 부르는 일 따위가 고작이었다. 보일러실 기술자들은 근무시간 내내 보일러실에 있어야 했지만, 그 안에서 그들이 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4일에 한 번씩 24시간 교대제로 일했다. 비록 한 달에 60~70루블로 공공기관 임금 중 가장 낮았지만 이 직업은 엄청나게 많은 자유시간을 제공했다. 당시 많은 아마추어 락커들이 이런 직업을 가졌고, 그들은 은어로 "보일러실 락커"라고 불렀다. 음악가로서의 전문적 지위가 없었기 때문에 음악으로 돈을 벌 수 없었던 그들은 얼마간의 돈을 벌면서 소비에트 의무고용법도 만족시키고 더불어 음악에 쓸 최대한 많은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직업이기도 했다. 현재 보일러실은 러시아 락 음악의 성전과 같은 대접을 받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변화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을 반영한 빅토르 최의 음악들이 자신이 소련의 개혁을 추진하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고 언급한 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러던 1990년 8월 15일, 라트비아 리가 인근 유르말라 슬로카-탈시(Jurmala Sloka-Talsi) 도로 35km 지점에서 오전 11시 28분 반대편 차선에서 마주오는 버스와 충돌해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이 때 건질 수 있었던 온전한 물건은 그의 유작으로 알려지게 된 앨범인 Кукушка (뻐꾸기) 하나 뿐이었다고 한다. 수많은 팬들은 KGB가 의도적으로 빅토르 최를 살해했다고 믿고 있다. 평소 반전과 평화 사상을 주장하던 빅토르 최가 당시 소련 권력자들의 눈 밖에 나서 버스가 고의로 충돌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죽음에 대해 의문스러운 것이 많긴 하다. 그가 졸거나 교통법을 위반하지 않았고 버스가 오히려 돌진했다는 것이고 버스 기사가 갑자기 사라졌으며 목격자들의 증언들이 재판에서 모두 기각되었다는 것, 시체가 부검 없이 서둘러 관에 담아 매장했다는 것 등 의문스러운 점이 많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현재도 러시아 경찰과 정부는 27년 동안 이 사건에 대해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는 것에 있다. 참 묘한 죽음이다. 아직 쓰여지지 않은 노래가 얼마나 되는지, 뻐꾸기야 말해봐, 노래해봐 (Песен ещё не написанных сколько? Скажи кукушка, пропой)로 시작되는 가사인 빅토르 최의 유작 Кукушка (뻐꾸기).. 원래 슬라브족 전설에 의하면 뻐꾸기에게 "내 수명이 얼마나 남았느냐" 라고 물으면 뻐꾸기는 남은 햇수만큼 울어서 알려준다고 한다. 이 뻐꾸기를 빅토르 최가 마지막으로 녹음했을 때 초이의 남은 생애의 날짜를 몇 번이나 예측하고 울었을까?.. 나도 엠게우 학위 과정 때 젤 좋아했던 노래가 Группа Крови (그루빠 끄로비, 혈액형)이었다. Кино (키노, 빅토르 최가 소속된 그룹)에 환장했던 나는 지금도 다운받아 듣고 다닌다. 그가 탄생한지 오늘이 62년째 되는 날, 빅토르 최를 기억하며 오늘도 그의 전곡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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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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