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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은 초상휘장 공개, 본격화된 ‘김정은 우상화’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초상휘장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이는 북한에서 ‘김정은 우상화’가 본격적으로 표면화된 모습이다. 조선중앙통신과 노동신문이 30일 게재한 노동당 제8기 10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확대 회의 2일 차 보도에서 당 간부들 가슴에 김정은 초상휘장이 달린 모습의 사진이 포착됐다. 기존에는 김일성, 김정일 얼굴이 새겨진 쌍상 초상휘장이 사용됐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초상휘장을 당 전원회의에서 패용하고 사진으로 공개한 것과 관련해 “김정은 위원장이 김일성, 김정일 등 선대 수령의 반열에 들었음을 공식화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일성 주석은 58세 집권 25년인 1970년에 초상휘장이 처음 등장했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50세 후계자 공식화 12년인 1992년에 초상휘장이 처음 등장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40세 집권 12년 차인 2024년에 초상휘장이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는 정치, 경제, 군사, 외교, 사회문화 등 전 분야에서 최고 지도자로서 자신감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 주석은 초상휘장 등장 2년 후 1972년 사회주의 헌법 개정을 통해 수령 절대 독재를 강화했고, 김정일 위원장은 초상휘장 등장 1년 후 1993년 국방위원장에 등극하며 김일성-김정일 공동 정권에서 김정일 단독 정권으로의 계기를 마련했다. 김정은 위원장도 초상휘장 등장을 계기로 남북 관계 적대적 2개 국가론을 강화하고 주석제 부활, 핵 무력 고도화로 김정일 국가 제일주의로 나아갈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초상휘장 등장 후 북한은 민족 문제와 통일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나 김정은 위원장은 민족 통일 문제를 머리에서 삭제하고 핵 무력에 토대한 적대적 2개 국가론 강화에 매진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1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차기 최고인민회의에서 헌법 개정을 논의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조만간 당 규약과 헌법 개정을 통해 남한을 상대로 한 적대국, 전쟁 시 영토 평정과 전 사회를 김정은주의화 하자는 문구를 명시하는 등 수령 절대 독재를 강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양 교수는 “김정은 위원장이 초상휘장 등장을 통해 김일성, 김정일과 같은 반열에 올랐음을 보여줬다”라며 “이는 김정은 체제의 확립과 정통성 강화를 위한 행보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김정은 위원장이 앞으로 남북 관계에서 더욱 강경한 자세를 취할 가능성이 높으며, 핵 무력 고도화를 통해 북한의 군사적 위상을 강화하려는 의도를 드러낼 것”이라고 전망했다. 초상휘장은 북한 체제에서 수령의 절대적 권위를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로, 김정은 위원장의 초상휘장 등장은 그의 권력 강화와 체제 안정화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수령 우상화는 김일성 주석 시절부터 시작되어 김정일 위원장을 거쳐 김정은 위원장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이는 북한 내부의 권력 구조를 공고히 하고 체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 뉴스
    • 정치
    2024-06-30

칼럼 검색결과

  • 2년 전, 헝가리 총선, 빅토르 오르반 총리의 4연임 당선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가 2022년 총선에서 승리하며 4연임을 확정지었다. 헝가리 총선에서 여당인 오르반 피데스당이 71%의 득표율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페테르 마르키자이(Péter Márki-Zay), 야당 연합 총리 후보는 패배를 인정했다. 오르반은 이번 승리로 4연임에 성공했다. 오르반은 1998~2000년 총리를 지내고 2010년 총선 승리 이래 연속 3연임에 성공해 12년 연속 집권하면서 EU의 최장수 총리가 되었다. 그는 집권 이래 이슬람과 난민, 성소수자 등에 반대했고 사법부를 장악하는 등 EU의 규정들을 위반했다. 결국 EU 지도부는 헝가리에 대한 예산 지원 삭감을 경고했고 오르반은 지난 2월 연설에서 EU가 헝가리에 관용을 베풀지 않으면 공동의 길을 계속 갈 수 없다며 EU 탈퇴를 시사했다. 특히 오르반은 푸틴 대통령과의 오랜 친분을 강조해 왔다. 오르반은 승리 연설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을 선거 운동 기간 동안 극복해야 했던 반대자 중이자 그를 압박했던 인물 중 한 명이라고 지칭하기도 있다. 이와 같은 오르반의 배경으로 인해 헝가리는 러시아에 대한 EU 제재에 새로운 구멍이 생길수 있다는 이야기가 언급되고 있다. CNN에 따르면 오르반은 우리가 달에서도 볼 수 있는 커다란 승리를 거뒀고 이는 EU 본부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에서도 보일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승리 자축했다. 오르반은 거대한 규모의 적들과 싸워야 한다면서 헝가리 좌파와 EU 관료들, 국제 언론을 모두 적으로 꼽았다. 앞서 헝가리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EU 차원의 러시아 제재에 대부분 참여했다. 하지만 헝가리는 우크라이나에 직접 무기를 지원하는 방안은 거부하면서 EU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헝가리 외무부는 지난달 30일 헝가리 좌파가 우크라이나 정부와 협력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며 젤렌스키가 헝가리의 내정에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면서 이는 헝가리 좌파 세력들이 젤렌스키와 모종의 거래가 있지 않았냐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그렇다면 헝가리 극우 세력의 상징 빅토르 오르반은 어떠한 인물일까? 빅토르 오르반은 1963년 5월 31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태어났으며, 부다페스트의 외트뵈시 로란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는 청소년기와 대학생 때는 공산당원으로 활동했지만 군에서 제대한 이후로는 헝가리 내 공산 체제에 대해 회의감을 느꼈으며 이후 서방 세계를 동경하여 자유 노조 등에 대해 공부했다. 1988년 오르반은 공산주의 정권에 반대하는 단체인 청년민주동맹(Fiatal Demokraták Szövetsége, 줄여서 피데스 Fidesz)이 만들어질 때 창립 멤버가 되었다. 더불어 공산주의의 패망을 예측하고는 <세기의 종언(Szazadveg)>이란 잡지도 창간했다. 그 다음 해인 1989년 6월 16일 부다페스트에 있는 영웅 광장에서 열린 헝가리 혁명 당시 수상 너지 임레(Nagy Imre, 1896~1958)를 추모하는 자리에서 자유선거와 소련군의 철수를 공개적으로 촉구하는 연설을 했다. 이와 연설로 인해 그는 헝가리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으며 서구권에서도 주목받는 인사가 되었다. 이후 피데스가 헝가리 민주 정당이 되면서 오르반은 피데스 당의 당수가 되었다. 피데스는 1990년 치러진 총선에서 국회의 386석 중 21석을 차지했다. 이 시기까지 오르반 빅토르는 중도 성향의 정치인으로 선전했지만 1994년 총선에서 20석에 그치는 부진을 보이자 당의 노선을 중도파 자유주의에서 좀 더 보수주의적인 노선으로 탈바꿈했으며 이로 인해 상당수의 중도파 당원들이 탈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후 1998년 총선에서는 피데스가 돌풍을 일으키며 148석을 차지하면서 원내 제1당이 되는 데 성공했다. 오르반 빅토르는 만 35세의 나이로 총리직에 오르게 된다. 오르반 정부는 적극적으로 서구화를 추구하면서 내부 경제적으로 연 4%씩 상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외부에서는 나토나 EU 가입 등에 성공하여 최고의 외교적 성과를 올렸지만 급속한 경제성장에 따른 빈부격차가 확대되었기에 하층민의 불만이 증가했고 이로 인해 치안 또한 악화되면서 내적으로 혼란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국유 기업을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정치 부패가 만연함으로 인해 국민들의 큰 실망을 안겼고 좌파 세력이 아직 강성한 헝가리 내에 우익 세력이 부상할 가능성이 낮아짐에 따라 다음 선거에서 중도좌파인 사회당-자유민주연합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당시 헝가리 정부는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강도높은 긴축을 지속했으나 2008년 상반기에 피데스당이 주도한 국민투표에서 대학의 부분적 유료화와 무상 의료 서비스의 부분적 유료화 조치를 철폐하는 국민투표에서 패배하면서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직후에 금융 위기가 닥치면서 IMF 구제금융을 받기도 했고, 중도 좌파 정권의 개혁이 계속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여론 조사에서 피데스의 지지율이 순식간에 상승하여 60%대를 넘나들게 되었다. 게다가 친서방 자유보수주의 성향이었던 오르반 빅토르의 정치 성향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을때가 사회당 2기 집권기였을때인데 이 시기를 기점으로 친서방 자유주의 노선에서 극우 성향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오르반은 2009년 연설에서 자유주의든 공산주의든 간에 엘리트들의 사상이라고 비난하는 연설을 하면서 그와 피데스당의 정치노선에 큰 변화가 있었음을 입증했다. 2010년 총선에서 피데스당은 긴축 대신 경제 성장을 내세우는 공약을 통해 기존 사회민주당 지지층을 대거 흡수하며 52.7% 득표율로 압승을 거두었고 오르반이 다시 총리가 됨에 따라 이 때부터 그의 4연임이 성공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이를 규탄하고 EU의 대러시아 제재를 적극 지지하며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를 타국에서 무기 지원 할 경우 헝가리 국경을 경유하는 부분에 대해 헝가리 영토와 국민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하기도 했다. 심지어 그는 난민을 거부하기로 악명이 높은 인물이었고 실제로 2016년 시리아 난민이 생겼을 때, 세르비아 국경에 긴 장벽을 쌓고 시리아 난민이 들어오면 적극 구타하는 등 인권 탄압을 했을 정도의 인물이었지만 이번에는 어려움에 빠진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조건 없이 받아주고 있다. 그러나 오르반은 젤렌스키 대통령의 무기 지원과 대러 에너지 제재 동참 요구를 거절하면서 EU 간에 형성된 대러 제재가 균열이 생길 위기에 놓였다. 특히 헝가리가 가스의 85%, 원유의 60% 이상을 러시아에서 수입하고 있다. 따라서 국가 차원에서 대러 제재는 거의 국가 경제를 파탄시킬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에 대러 에너지 제재 동참 요구를 거절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EU 제재에서 헝가리가 빠져 나가게 되면서 향후 대러 제재의 귀추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주목된다.
    • 칼럼
    • Nova Topos
    2024-07-07
  • 조지아 서부를 장악하고 있는 아자리야인들의 역사와 아자리야 자치공화국 - 中편
    아르메니아 행정부는 1920년 7월 20일에 아자리야 지역을 조지아에게 양도했다. 그러나 당시 볼셰비키와 러시아의 요원들이 조지아에 들어와 주요 행정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일련의 사보타주와 테러 결사대를 조직하면서 오스만 제국과 관련 있는 인사들과 아르메니아 소속의 주로 소비에트에 대한 반감을 가진 자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민주주의 조지아 집행부는 소비에트 통치 하에 있었지만 아자리야인들과 자치주를 통제하기 어려웠다. 이들은 아자리야 자치주에게 소비에트로 합류를 종용했다.조지아를 소비에트가 장악하고 있는 기간 동안에, 오스만 제국의 군대가 터키 동부 지역의 아르메나아 군을 밀어내면서 1921년 3월 11일 바투미에 출현했고 15일에는 볼셰비키 조지아 군을 이끌도 기오르기 마즈냐슈빌리(Giorgi Maznyashvili) 장군이 아자리야의 군대를 이끌고 오스만 군과 3일 동안 교전을 벌였다. 바투미 지역을 잘 알고 있는 아지리야 군대는 오스만 군과 시가전을 벌이며 중심 시가지들을 완전히 장악했다. 결국 오스만 군은 흑해 해안대를 따라 사르프로 철수했다. 그리고 바투미에서는 소비에트의 직접적인 통치가 19일에 공표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19일에 소비에트-오스만 제국이 카르스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지아 서부 지역은 일명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일명 그루지야 SSR)의 관할에 들어갔고 아자리야인이 장악한 바투미도 그루지아 SSR의 일부 지역으로 합병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지도부에서는 아자리야와 기타 조지아 지역의 종교가 달라 아자리야 지역에 자치권을 줘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때 아자리야에 자치권을 내주고 조지아에게서 독립하게 한 인물이 아이러니하게도 조지아가 고향인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당시에 민족 인민위원이었고 실제로 민족 문제 관련하여 일을 많이 했던 때였다. 스탈린은 조지아 내에서 아자리야인들에 대해 특별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고 이에 상당수의 아자리야 자치정부의 인사들이 스탈린의 측근이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스탈린은 소수민족 출신의 공산주의자들을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포섭할 수 있었으며 이는 공산당의 조직 기강을 내세우기 위해서 신설된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 서기장에 선출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스탈린과 소비에트 정부는 1921년 7월 16일에 아자리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을 공표하면서 조지아와 드디어 완전히 분리시켰다. 그리고 기존의 조지아는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변모한다. 이로 인해 아자리야는 현재까지도 친러 성향이 강한 지역으로 손꼽히고 있다. 한편 국운이 완전히 쇠진한 오스만 제국은 아자리야의 혼혈 인구에서 무슬림들의 이익을 위해 아자리야에게 자치권이 부여되는 조건으로 현 터키 영내 아자리야 지역을 볼셰비키에게 양도했다. . 그와 같은 영토 양도는 소련으로 하여금 모스크바에서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흑해 항구 도시인 바투미를 자카프카스에게 완전하게 통제권이 주어지는 것을 방지하려는 목적이 있었고, 오스만 제국에서 생활하는 조지아계 무슬림들에게 공산주의 성향을 북돋아 오스만 영내에서 볼셰비키의 지령을 받아 각종 사보타주와 첩보활동을 재개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 통치 하에,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교도 공산주의 무신론 사상에 대척된다 여겨 철저히 억제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1929년 4월, 아자리야와 카프카스 산악 무슬림 마을에 거주하는 라즈인들은 강제적인 집산주의화와 종교 박해에 대항하여 여러차례 봉기했다. 이에 소련의 부대들이 동원되어 반란 진압에 나섰고 반란은 곧바로 평정되었다. 그러자 수천명의 아자리야인들은 자국 공화국 밖으로 추방되거나 소련 영내로 강제 이주되어 산산히 흩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때 메흐메트 아바시제(Мехмет Абашидзе)는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지만 스탈린의 사후, 카자흐스탄의 아자리야 공동체들의 지도자 가문으로 아바시제(Абашидзе) 가문이 선정되었다. 이후 흐루시초프 당시 해빙기를 맞이하면서 수많은 민족들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때, 아바시제(Абашидзе) 가문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고향인 조지아 서부 지역으로 돌아온다. 당시 메흐메트 아바시제가 1937년 스탈린의 명령으로 총살된 이후, 지도층이 거의 와해된 상황이었는데 메흐메트 아바시제의 아들인 아슬란 아바시제(Aslan Abashidze)가 아자리야 공동체를 이끌게 되었다. 그는 바투미 대학에서 역사와 철학 학위를, 트빌리시 주립 대학에서 경제학 학위를 취득하면서 소비에트 체제에서 아자리야인들의 희망이 되어갔다. 이후 소련이 해체되면서 아자리야는 형식적으로 조지아에 속했으나 사실상 독립국이나 다름없었던 미승인국가가 되어 있었다. 이에 조지아에서 첫 번째 민주주의 의회가 생성되고 대통령 선거가 치뤄지며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Zviad Gamsakhurdia)가 조지아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감사후르디아는 당선되자마자 아자리야 공화국 지도자인 아슬란 아바시제(Aslan Abashidze)를 초청해 오찬을 함께 했다 한다. 이 때 감사후르디아가 아바시제에게 바랬던 것은 지역 자치의 지위를 포기하여 조지아의 영향 하에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1991년 3월 15일에 감사후르디아는 아바시제를 아자리야 최고 의회 의장으로 임명했다. 이어 감사후르디아는 손수 바투미로 날아가 아바시제를 만나 아자리야 자치권의 폐지를 제안했다. 이에 아바시제는 아바시제는 항변하여 자치권 폐지를 거부했고 감사후르디아는 트빌리시로 돌아가 아자리야인을 특히 지역 무슬림이라 부르면서 이들에 대한 탄압과 강제 진압하기 위해 전군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중앙의 조지아 당국과의 긴장이 형성되며 조지아 내전으로 촉발될 가능성이 커졌다. 감사후르디아는 조지아 민족에게 있어 좋은 지도자였을지 몰라도 압하지야, 남오세티야와 아자리야, 라즈인들에게 있어 그는 흉폭한 폭군이었다. 압하지야, 남오세티야는 감사후르디아의 조치에 즉각 반발했고 당시 체첸과 전쟁에 여념이 없던 러시아를 이 분쟁에 끌어들였다. 특히 아자리야의 아슬란 아바시제는 직접 모스크바로 날아가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을 만났다. 이 때 모스크바에서 옐친의 지원을 확약받고 러시아의 도움을 받게 되니 당시 카바르디노-발카르와 쿠반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군 700여 명이 바투미에 입항하면서 아자리야의 민병대와 합류했다. 1991년 4월 22일, 아바시제 민병대들은 조지아의 공무원들과 친조지아 의회 의원들의 즉각적인 사퇴를 요구하며 바투미 의회로 쇄도했다. 이들은 친조지아 세력들과 관료들을 아자리야 지역에서 추방했으며 감사후르디아의 조지아 군을 격파해 아자리야에서 몰아냈다. 이로써 아바시제는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아자리야를 독립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지아는 당시 심각한 내부 분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수도인 트빌리시에서는 오세티야와 압하지야의 민족 분리 운동으로 인해 소요 사태가 심각했다. 1991년 1월 5일 조지아의 국가 요인 경호대는 남오세티야의 수도 츠힌발리로 진입해서 도시를 포위하면서 중대한 위기 상황을 맞이한다. 그러자 트빌리시에서는 오세티야인과 압하지아인들의 분리 독립 시위가 발생했고 감사후르디아는 여기에 발포를 허가하자 이 시위는 폭동으로 변질되었다. 중요한 국가의 준군사 세력인 조지아 국가 요인 경비대는 친, 반 감사쿠르디아로 분열되었으며 이는 심각한 조지아의 내전(Georgian Civil War, 1991~1993)으로 촉발된다. 상황이 이쯤되니 감사후르디아는 아자리야의 사건들에 간섭할 수 없었다. 게다가 최고 소비에트 의장 대리이며 아자리야에서 조지아 정부의 최고위층 지지자인 보다르 임나제(Bodar Imnaze)가 살해됐다. 아바시제 측의 주장에 의하면, 임나제의 손에 총이 들려있었고 아바시제의 집무실에서 테러를 시도하다가 경호원의 총에 맞았다고 했다. 이를 트빌리시의 대중매체들은 임나제의 사망이 사유불명으로 간략하게 보도했을 뿐이다. 그러나 내부의 주장들에 의하면 임나제가 집무실에서 아바시제와 논쟁하던 중에 아바시제가 격분해 그를 사살했다고 한다. 결국 이는 아자리야가 조지아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독립했음 시사하게 되는 사건임이 틀림없었다. 아자리야는 바투미 항구를 끼고 조지아의 대외무역을 사실상 독점하는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조지아 내전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조지아는 아자리야의 사실상 독립을 막을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아자리야는 표면상으로는 조지아에 속해있었지만 사실상 조지아의 지배를 전혀 받지않는 독립적인 위치에 있게 되었다. 아자리야 공화국은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1997년 10월 24일에, 아자리야는 유럽 지역 의회(AER)의 완전환 회원이 되면서 정식 국가로 서서히 발돋움하기 시작한다. 아자리야 지도부는 조지아 중앙 당국의 예산 확충을 위해 세금 내는 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아바시제에게는 문화, 바투비 해항, 다른 전략적인 대상들에 전체적인 통제권을 갖고 있었고 게다가 그 배후에는 러시아가 있었기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바시제는 자신을 위한 무장 부대를 만들어 아자리야 국방부를 따로 설립했고 조지아 국방부 소속의 바투미 해군기지 25번째 여단의 모든 통제권을 장악했다. 이에 조지아 정부는 바투미 기지의 러시아 군대의 부대가 아바시제의 독재를 위한 세력 기반이라 주장했고 아바시제의 친러시아 행보를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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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7-04
  • 조지아 서부를 장악하고 있는 아자리야인들의 역사와 아자리야 자치공화국 - 上편
    조지아 서부 지역과 가장 큰 도시인 바투미를 장악하고 있는 아자리야 자치공화국의 주민 중 대부분이 아자리야인이다. 조지아 서부 지역에 대해 고고학자들이 말하길 서부 지역에서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다 하였다. 이 지역을 과거에 모스흐(Moskh)라 불렸는데 이 지역운 고대 조지아 부족이 출현함으로써 B.C 7~3세기에 아자리야의 땅은 고대 콜키스의 지방이 되었다. 그 지역의 일부는 B.C 4세기 후반에 이베리아 왕국에 속하는 나라를 형성했다. B.C 5, 4세기에는 그리스인에 의해 식민지화되어, 해안의 아자리야는 후일에 로마가 통치하게 된다. 바투미와 고니오는 그 당시에 주요 도시들이었고 요새들이었다. 이 두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은 오늘날 코불레티 마을 근처에 있는 피츠바리 마을의 부유했던 흔적을 드러냈다. 서기 2세기에, 바투미는 카프카스 남쪽을 방어하는 로마군의 중요한 군사 기지였다. 11세기 초에, 아자리야는 통일 조지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고 11세기 말에는 셀주크투르크 제귝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13세기에는 몽골에 의해 파괴되었다. 1547년에,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아자리야를 공격했고 바투미를 점령했다. 당시 아자리야인의 일부는 다른 조지아 지역들로 피신했다. 남아있던 사람들은 강제적으로 이슬람교로 개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까지, 대부분의 아자리야의 소작농들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 상당히 안정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1853~1856년에 크림 전쟁과 1877~1878년에 러시아-오스만의 전쟁 기간동안에, 수천 명의 아자리야인들이 오스만 제국의 군대에 의해 징병되면서 러시아와 맞서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에게 전쟁에서 패하면서 아자리야를 러시아 제국에 양도했다. 아자리야 지역은 러시아 통치 하에 들어가면서 정교 중심의 러시아인들은 이슬람교를 압박했고, 수천명의 무슬림인들이 피난처를 찾아서 카프카스 지역 각지에 흩어졌으며 남은 아자리야 무슬림들은 적법한 이주 절차를 통해 바투미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으로 피신했다. 오스만 제국은 아자리야인들에게 자금을 조달하고 복수자들이라고 알려진 테러 조직을 이용해 러시아 장교와 공무원 뿐만아니라 제국 주둔에 동참했던 아자리야인들까지도 테러를 가해 죽이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아자리야인들은 지배자들인 러시아에 충성했고 그럼으로 인해 그들은 다른 조지아들과 재통합 될 수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1878년 베를린 의회는 바투미 지역의 수도를 포르투 프랑코 또는 자유 무역항으로 공표했다. 포르투 프랑코는 1880년대 말, 무렵에 중요한 항구 및 공업 도시가 되었으며 20세기에 들어서, 포르투 프랑코는 바투미로 이름이 바뀌고 바쿠의 석유 생산지와 최초의 송유관 중에 하나인 바쿠-바투미 송유관과 철도로 연결되었다. 이로써 바투미는 유럽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 중에 한 곳이 되었다. 이는 1892년 6월 22일에 거대한 유조선 "마루크스"가 바투미를 떠나 태국의 방콕으로 갔고, 이 유조선이 수에즈 운하를 항해한 최초의 유조선이 되었다. 이 지역에서 카프카스와 카스피해를 이어주는 회랑은 러시아 통치 하에서 무수한 파업들과 유혈 탄압이 자행되었다. 이는 차르가 노동자들을 착취한다 생각했고 공산주의자들이 차르의 탄압을 피해 카프카스 일대로 숨어 들어오면서 아자리야 일대는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암약해 유전에 취업한 현지 노동자들을 선동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차르의 탄압을 받은 아자리야 노동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 상당수의 무하지르(Muhazir)들은 오스만 군 소속 부대에 들어가면서 러시아와 싸우게 된다.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도중,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전쟁 과정에서, 러시아 행정부는 반항적이며 후일 통제가 불가능할 가능성이 높은 무슬림들을 바투미 지역에서 내부 러시아로의 강제 이주 절차를 시작했고, 이에 조지아의 지성인들은 그러한 강제 이주에 대하 항의를 표시했다. 러시아 두마에서 조지아 지역을 담당하는 의원들은 아자리야인들이 이슬람교에도 불구하고 민족적으로는 조지아인들이다. 그러므로 러시아에 충의가 있는 무슬림들은 러시아 내부가 아니라 아자리야 지역에 그대로 잔존해야 한다고 공언했다. 조지아 소속 두마 의원들의 항변에 대한 결과로 인해 러시아의 게오르게 미하일로비치 대공은 무슬림에 대한 인구조사를 주재했고 그 아자리야인들은 러시아 정치 제도에 적의가 없다는 수많은 보고들로 결말을 지었다. 아자리야인들의 불충을 탄원한 코사크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은 크게 비난을 받았고 지방 무슬림들은 폭력적인 대결을 부추기는 그들을 고발했다. 러시아의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아자리야 지도자들과 회담하자고 설득했고, 회담을 하는 도중 그들에게 충성심이 있다고 판결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이 1918년 1월에 끝나기 전까지는 아자리야인들의 반역을 의심하는 인구조사는 종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면서 러시아 군대가 철수함에 따라 1917년 12월 18일의 휴전에 이어졌고, 1918년 4월 14일에는 오스만 제국의 제37기 카프카스 부대가 바투미에 입성하면서 아지리야의 영토는 다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오스만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자 1919년 1월 12일에 영국에서 원정군이 오스만 제국의 병력들을 대신하여 바투미에 상륙했다. 그러면서 러시아 제국 의회의 입헌민주당 페트르 마스로프(Петро Масров)가 의장을 맡은 바툼 지역 의회에서는 1918년 12월 21일부터 1919년 4월 28일까지 아자리야에 대한 통치 권한이 일시적으로 주어지게 된다. 1918~1919년에 메흐메트 아바시제(Мехмет Абашидзе)가 회장으로 있는 이슬람 조지아인 해방 위원회(Исламский комитет освобождения Грузии)는 조지아 국경 내부에 있는 종교적 방침에 있어서 자치권이 성립 되었음을 반복적으로 증명했다. 이들 이슬람 조지아인 해방 위원회는 대부분이 아자리야 무슬림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여기에 라즈인들도 합류했다. 이슬람 조지아인 해방 위원회는 1919년 9월 13일 러시아 지방 자치단체의 기본형 의회로 알려진 매질리스(Mezilis)를 바투미에서 소집시키고 타 조지아 지역은 영국군이 주둔하면서 실질적 지배는 아르메니아인들이 하게 되고 아자리야 지역만은 조지아계 무슬림들이 지배할 수 있게 허가했다. 이와 같은 아바시제의 당파는 아자리야의 자치권만이 문제가 아닌, 완전한 독립에 대해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지아 민족과 친한 아자리야인들, 특히 조지아 정교회 소속의 아자리야인들이 먼저 자리잡고 있을지라도 이들은 조지아와의 통합을 옹호했다. 사실 오스만 제국과의 통합이 불투명한 이상, 그래도 러시아가 지지하는 조지아인들이 영국이나 아르메니아보다 더 낫다는 아바시제의 생각이었다. 그 이유는 아르메니아가 터키계 무슬림들을 학살하고 다녔기 때문에 이는 아자리야 입장에서 최선의 선택이기도 했다. 이들 중 실제 터키계 아자리야인들은 세다이 밀레스(Sedai Miles)라는 단체를 설립해 범투르크 민족주의를 주창하며 영국이나 아르메니아를 상대로 게릴라 전을 펼치기도 했다. 세다이 밀레스(Sedai Miles)는 터키어로 "사람들의 목소리(Insanların sesleri)" 라는 뜻이다. 이들의 게릴라 전과 더불어 오스만 군대와 아제르바이잔인들도 세다이 밀레스를 지원하자 수세에 몰린 영국군 1919년 8월 15일에, 카프카스 일대에서 철군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바투미의 분할된 본부는 바투미의 군사 지배권을 쿠키 콜리스(Kuky Colis)라는 자에게 넘겨주고 콘스탄티노플로 떠났다. 1920년 3월 4일에 총독이자 군사령관에 임명된 쿠키 콜리스는 바투미에서 아자리야 군대를 포함한 조지아 전 군대의 내부 동맹을 명령했다. 그러나 아자리야 내에서 반발이 거세자 1920년 7월 14일에 그 군대는 바투미에서 완전히 해체되었고 쿠키 콜리스는 바투미를 떠나 트빌리시로 이동했다. 이어 아르메니아 행정부는 7월 20일에 아자리야 지역을 조지아에게 양도하면서 이 지역에 대해 완전히 손을 땠다. 이어 러시아의 적백내전에 카프카스 지역이 휘말리게 되면서 볼셰비키 일원들이 조지아에 들어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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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4
  • 조지아 내 내제된 사회 갈등과 양극화
    최근 조지아 의회가 언론과 시민 사회 억압에 대한 국내, 국외의 우려와 반발에도 ‘외국 대리인 법안’을 최종적으로 통과시켰다. 반러 감정을 가진 시민들은 대리인 법안 통과에 반발해 대규모 시위를 열었고, 이에 미국 등 국제사회는 여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제재를 가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법안에 따르면 해외에서 전체 예산의 20% 이상 자금 지원을 받는 언론 매체나 비정부기구인 NGO 단체들은 외국의 영향을 받는 대행기관으로 등록해야 한다. 이에 등록하지 않은 단체나 개인은 벌금과 최대 5년 이하 징역에 처해질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조지아라는 나라 자체가 다수의 NGO들이 결집해 세워진 국가이기 때문이다. 조지아의 언론 및 NGO 시민 사회 단체의 상당수는 미국과 유럽 등의 자금 지원을 받는 단체들이 많다. 이에 시민단체가 조지아 정부의 엄격한 규제에 노출되어 민주주의가 훼손될 것을 우려하여 강하게 반대해왔다. 특히 이와 같은 법안은 2012년에 제정되어 언론과 NGO, 반정부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엄격하게 규제된 러시아의 외국 대리인 법과 비슷하다 여겨 이를 ‘러시아법’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와 러시아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럼에도 이 법 자체가 러시아와 비슷하다 하여 '러시아 법'이라 이름 짓고 이를 비난한 것이다. 특히 조지아의 야당 의원들은 조지아를 친러시아 국가로 만들려는 시도라고 비판하고 있다. 조지아는 그 동안 EU와 나토 가입을 추진해왔으나, 친서방 대 친러시아 노선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과 사회적 갈등이 지속되어 왔다. 여당인 "조지아의 꿈" 정당이 집권하기 이전까지 조지아는 친서방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미국과 나토, 그리고 EU의 영향력을 러시아 국경과 인접된 남부 카프카스 지역으로 확장시켰다. 이에 안보 위협을 느낀 러시아가 남부 카프카스 지역의 갈등 문제에 개입하면서 자신들의 세력권을 구축했다. 러시아 입장에서 소련이 해체된 이후, 카프카스 지역의 저항 세력들은 큰 문제가 되었었기 때문이다. 나토와 EU가 카프카스에 진출하면 90년대 체첸 전쟁과 같은 내전이 또 다시 촉발될 가능성이 높았고 그로 인해 러시아의 안보가 매우 위태로울 수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의 지정학적 전략은 조지아 북부지역인 남오세티아와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 및 돈바스 일대에 대한 통제가 진행되면서 어느 정도 일단락되긴 했다. 조지아와 우크라이나는 지난 2017년 7월 18일 페트로 포로센코(Петр Порошенко)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조지아를 공식 방문함을 계기로 양국 관계를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한 바 있다. 그러나 기오르기 크비리카슈빌리(Giorgi Kvirikashvili) 총리 이후, 이라클리 가리바슈빌리(Irakli Garibashvili)가 2021년에 정권을 이양 받은 이후, 갑작스럽게 친러성향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 때 가리바슈빌리를 지원하고 지지한 세력은 이미 조지아에서 상당수의 재력을 확보한 친러계열의 유태계와 친러 성향의 지지자들, 그리고 바투미를 기반으로한 아자리야계 조지아인들이었다. 이들은 친러 성향을 갖고 있으며 특히 아자리야인들은 바투미를 중심으로 자치공화국을 형성하고 있을 정도로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이 아자리야인들은 조지아계 무슬림들을 대표하는 민족으로 오스만 제국 지배 시기인 16세기부터 17세기 무렵 사이 대부분 이슬람교 하나피파로 개종한 자들이다. 20세기 초 아제르바이잔 바쿠의 유전이 개발되고 생산될 석유를 운반할 송유시설 및 철도가 바투미를 거쳐 건설되면서 아자리야 지역의 중요성이 증대되었다. 게다가 흑해 연안을 쥐고 있는 아자리야인들의 영향력은 무시 못할 수준인 것이 조지아의 유일한 항구이자 바다로의 출구가 아자리야 자치공화국의 수도인 바투미 때문이다. 그래서 조지아의 사회적 갈등은 친러, 반러의 갈등이 곧 동부와 서부라는 지역적 갈등이 내포되어 있다. 조지아 서부는 아자리야인들을 중심으로 압하지야까지 흑해 일대가 연결되어 있고 아자리야인과 압하지야인들은 상호 연대까지 하고 있다. 반면 조지아 동부 지역은 수도인 트빌리시를 중심으로 반러시아의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사진에 나와 있는 온갖 욕설의 러시아 비난과 푸틴에 대한 비난 등의 그레피티가 쓰여 있는 것은 반러 성향의 시민들의 목소리, 그리고 이를 독려하는 친우크라이나 성향의 시민 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난민들, 이어 우크라이나 네오나치인 아조프 연대와 연합한 조지아의 네오나치들이 중심이 되고 있다. 이들은 나치 독일의 제2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의 깃발과 유사한 아조프 연대의 깃발 표식을 그레피티로 새겨 놓고 대놓고 나치와 연대하고 있음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들은 대놓고 서부 지역의 아자리야인과 친러 성향을 조지아인들을 상대로 테러를 저질렀지만 친러 성향의 조지아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총선에서 이라클리 가리바슈빌리(Irakli Garibashvili)를 당선시키면서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리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인 2022년 2월 25일 이라클리 가리바쉬빌리(Irakli Garibashvili) 조지아 총리는 조지아가 서방의 대(對)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가리비쉬빌리 총리는 2023년 5월 24일 카타르 경제 포럼(Qatar Economic Forum)에서 이와 같은 조지아 정부의 입장을 재확인하게 된다. 이어 2023년 8월 23일 러시아 국가안보위원회 부의장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Дмитрий Медведев)는 조지아가 나토 가입을 추진한다면 러시아는 조지아 내 미승인국인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South Ossetia)를 합병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10월 5일에는 아슬란 브자니아(Аслан Бжания) 압하지야 대통령이 러시아와 압하지야의 방어 역량 증대를 목적으로 압하지야 영토 내에 해군 기지를 건설한다는 내용의 합의서에 서명했다. 이후 우크라이나 정부 2023년 7월 5일 재임 당시 권력 남용 혐의로 조지아에 수감 중인 전 조지아 대통령이자 우크라이나 오데사(Odesa) 주지사인 미헤일 사카슈빌리(Mikheil Saakashvili)의 건강 상태가 악화된 것을 두고 인권 탄압이라 비판하면서 우크라이나와의 관계도 멀어지게 되었다. 결국 친러어와 반러의 단순한 대립구도가 지역 대립, 민족 대립으로까지 촉발되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다. 조지아 서부 지역에는 아자리야인 말고도 라즈(Laz)인이 살고 있다. 이들 또한 아자리야인과 같은 무슬림들이고 친러 성향을 갖고 있다. 게다가 이들이 터키에 살고 있으면 조지아계 터키인이고 조지아에 살고 있으면 터키계 조지아인이라 볼 수 있다. 현 터키 대통령인 레제프 에르도안이 라즈인 혈통으로 조지아계 터키인이다. 실제로 에르도안은 인터뷰로 자신의 가문이 조상대에 조지아 바투미에서 터키 리제로 건너온 조지아인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 영향으로 인해 라즈인들은 터키 정부의 상당한 지원까지 받고 있다. 라즈인과 아자리야인으로 대표되는 조지아 서부인들은 리버럴적이 성격을 갖고 있는 조지아 동부 정교회인들과 문화적 차이도 크다. 바투미를 중심으로 한 아자리야 자치공화국도 무슬림과 정교회라는 종교적 차이 때문에 인정해준 것이다. 이처럼 조지아에는 민족계파만 해도 94개가 자리 잡고 있는 나라다. 대한민국의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합친 크기에 불과한 작은 나라지만 이 작은 나라에 90개가 넘는 민족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민족 간의 통합은 조지아의 또 다른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어쩌고 보면 무슬림과 정교회, 유태교까지 이어지는 종교적 대립도 한 몫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 입장에서 조지아를 굳이 군사적으로 공격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지아가 반러 성향의 인물이 총리로 당선되어 반러 세력이 세력의 주동이 된다면 바투미를 중심으로 아자리야 자치공화국을 정식 독립국가로 승인하면 된다. 러시아가 아자리야와 라즈인을 지원하고 조지아 동부의 반러 세력이 라즈인을 학대한다면 터키가 이 문제에 개입할 여지가 생기게 된다. 러시아 하나 막는 것도 버거운데 터키마저 개입을 한다면 조지아는 공중분해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앞서 말한 것처럼 조지아의 사회 갈등은 곧 친러 vs 반러, 동부 vs 서부의 지역갈등, 이슬람 vs 정교 & 유태의 종교갈등, 아자리야 & 라즈 vs 조지아의 민족갈등까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 미국과 집단서방이 장미혁명처럼 색깔혁명을 조장한다면 우크라이나와는 전혀 다른 제2차 조지아 내전이 발발할 가능성이 크다. 2023년 9월 18일 전(前) 조지아 내무부 차관으로 현재 우크라이나군 SBU 부국장인 기오르기 로르키파니제(Giorgi Lorkipanidze) 등이 조지아 내에서 반정부 시위를 조직, 현 정부를 전복하려는 계획이 탄로나면서 제2차 조지아 내전은 언제든 발생 가능한 상황에 있다. 그리고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사뭇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여진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도 연결되어 있기에, 조지아 내 사회갈등을 유심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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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4
  • 라틴아메리카에서 포클랜드 섬만큼 영토 분쟁이 치열한 섬 사우스조지아(South Georgia) & 사우스샌드위치(South Sandwich) 제도
    라틴아메리카에서 유럽과 영토 분쟁 지역은 영국과 아르헨티나 가 맞서고 있는 포클랜드 제도이다. 그러나 포클랜드 제도 못지 않게 대립이 첨예한 곳이 있다. 그곳은 남대서양에 위치한 사우스조지아 섬과 사우스조지아 동쪽의 작은 섬들인 사우스샌드위치 제도이다. 이 섬들은 현재 영국의 해외 영토이자 속령으로 이 섬들은 남대서양 본 바다와 스코샤 해의 경계가 되고 사우스샌드위치 제도 남쪽은 웨델 해가 된다. 사우스조지아 섬의 면적은 3,756㎢ 정도고 섬의 최고봉인 파제 산의 높이는 거의 3,000m에 가까울 정도로 높다. 사우스조지아 섬의 산악 지대는 빙하로 덮여 있고 사우스샌드위치 제도에는 활화산이 상당수 존재하고 있다. 사우스샌드위치 제도는 무인도이지만 사우스조지아 섬에는 현재 주민이 살고 있다. 이 섬들은 영국이 실효 지배되고 있는 섬들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다. 남극을 제외하면 지구상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지역이라 볼 수 있다. 이 섬들은 모두 남극 수렴선 남쪽에 위치해 있다. 수렴선 남쪽이 일반적으로는 남극 권역으로 간주되고 있다. 남극의 차가운 바닷물과 북쪽의 따뜻한 바닷물이 경계를 이루는 선이 바로 수렴선인데 한 때 같은 행정 구역으로 묶여졌던 근처의 포클랜드 제도의 경우, 위도는 비슷하나 지형의 영향으로 남극 수렴선 북쪽에 있다. 특히 사우스조지아 섬은 수렴선 남쪽에 위치한 육지들 가운데는 가장 먼저 발견된 섬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1502년 남대서양을 항해하던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가 목격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베스푸치의 항해일지 등을 분석한 결과 베스푸치가 이 섬을 목격했을 가능성은 부정되었다. 1675년에 런던의 상인 안토니오 라 데 로치(Antonio La De Rochi)가 항해 중에 이 섬을 발견한 것으로 여겨지고 1775년 영국의 제임스 쿡 탐험대가 남극을 탐사하는 도중 사우스조지아 섬에 상륙하여 영국령임을 선언하고 당시 영국의 왕이었던 조지 3세의 이름을 차용하여 조지아 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우스조지아 남동쪽에 위치한 사우스샌드위치 열도 가운데 남쪽 8개의 섬들은 역시 1775년에 제임스 쿡이 발견했고 북쪽 3개의 섬들은 러시아의 탐험가 파비안 고틀리프 폰 벨링스하우젠(Фаддей Фаддеевич Беллинсгаузен)이 1819년에 발견했다. 그러다가 1904년 카를 안톤 라르센(Carl Anton Larsen, 1860~1924)이라는 탐험가 겸 포경업자가 이곳에 포경을 위한 시설을 만들고 첫 정착이 시작되면서 그리트비켄(Gritvican)이 만들어졌다. 참고로 1913년 10월 8일에 남극에서 최초로 탄생한 인물로 알려진 솔베이 군비에르그 야콥센(Solveig Gunbjørg Jacobsen, 1913~1996)이라는 인물이 이 섬에서 태어났다. 야콥센은 노르웨이와 영국 이민자들을 위한 교회도 세웠는데 영국의 유명한 탐험가인 어니스트 섀클턴(Ernest Shackleton, 1874~1922)도 이곳 교회에 묻혀 있다. 섀클턴은 남극을 탐험하는 도중 사우스조지아 섬에 상륙하고 곧바로 구조선을 수배했지만, 세 차례나 이어진 시도에도 불구하고 엘리펀트 섬에 상륙하지는 못했다. 남반구는 이 시기가 한겨울이었고, 남빙양의 얼음과 풍랑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첫 번째 구조선은 얼음에 막혀 되돌아왔고, 두 번째 구조선은 심하게 망가졌으며, 세 번째 구조선은 침몰 직전까지 가고 말았다. 영국 역시 전쟁 중이라 배를 구하기가 힘들었다. 이 과정에서 무려 4개월의 시간이 흘러가고 말았고, 극한의 상황에서도 침착했던 섀클턴은 건강이 매우 나빠졌다. 결국 섀클턴은 심근경색으로 사망했고 사우스조지아 섬에 묻혔다. 이후 두 제도는 영국이 장악하게 되었고 포클랜드 제도와 하나로 묶여 관리되어 왔지만, 1985년에 별도의 속령(Dependent Territory)이 되었다. 현재는 용어가 바뀌어 영국의 해외 영토(Overseas Territory)로 구분되어 있다. 한 때는 고래 잡는 계절이면 인구가 1,000명을 넘어가기도 했지만 포경 산업이 쇠퇴하면서 인구가 크게 줄어들었고 현재는 공무원이나 남극 관련 연구원 등만이 남아 인구수는 30여명 정도 존재한다. 이곳은 현재 영국의 해외 영토지만, 지리상으로 가장 가까운 나라는 아르헨티나이다. 영국과 아르헨티나는 20세기 초부터 지금까지 이 제도를 두고 영유권 다툼을 벌여왔다.1908년 영국 정부는 사우스조지아와 사우스샌드위치 제도를 합병해 근방 포클랜드 제도로 편입시켰으며 당시 영국은 아르헨티나와 칠레 정부에 서한을 보내 이와 같은 사실을 알렸으나 두 정부는 별다른 항의를 표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1927년 사우스조지아 섬, 1938년 사우스샌드위치 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1904년 노르웨이 포경업자들이 아르헨티나 본토에 포경회사 ’콤파베라 아르헨티나 데 페스카(CAP)’를 세운 뒤 사우스조지아에 처음으로 정착지를 설립하고 영업을 한 전력, 그리고 1905년 아르헨티나 정부가 기상 관측소를 세운 사실이 그 근거로 제시되었다. 섬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영국인이지만, 이 섬에 최초로 거주한 사람은 아르헨티나인이라는 주장인 것이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영국과 법적 분쟁으로까지 번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1940~50년대에 들어 이 섬을 둘러싼 분쟁은 네 차례나 국제사법재판소(ICJ) 문턱까지 갔지만 재판 회부에는 실패했다. 아르헨티나의 반대 때문이었다. 양국이 분쟁을 벌이는 이유는 결국 해양 자원 때문이었다. 인근 해상에 매장되어 있는 석유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이 제도가 남극 대륙으로 향하는 전진 기지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도 분쟁의 또 다른 이유이다. 현재 사우스조지아 섬에는 영국의 남극 해양 기지가 세워져 있다. 물론 양국의 영유권 분쟁은 1980년대 포클랜드 전쟁에 휘말리며 무력 충돌로까지 이어졌다. 1976년 아르헨티나 정부가 사우스샌드위치 제도에 군대를 파견한 데 이어 1982년 4월 아르헨티나가 영국령 포클랜드를 무력으로 점령하자 양국은 교전을 개시했다. 75일간의 전쟁 끝에 6월 14일 아르헨티나의 항복으로 전쟁은 종결되었지만 아르헨티나는 아직도 영국에게 패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양국의 분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현재까지 합의를 보지 못한 상황이다. 다만 국제사회에서는 이 제도들을 영국의 영유권으로 더 인정하는 분위기에 있다. 2009년 4월 두 나라는 사우스조지아 & 사우스샌드위치 인근 해역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자료를 유엔 대륙붕한계위원회(CLCS)에 제출했다. 그러나 2016년 CLCS는 영국의 영유권을 인정하면서 아르헨티나가 다시 항소하고 있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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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1
  • 조지아, 아르메니아의 유태인 아스그나스(Ashkenaz)
    노아의 장손이자 야벳의 장남인 고멜이 시메리안(Simerian)이라는 이름과 큰 영향력을 성경 및 토라와 역사에 남겼다. 야벳의 후예들이 노아의 축복을 받아 이는 아르메니아와 조지아까지 확대되었다. 그리고 노아의 증손이자 고멜의 장남인 아스그나스(Ashkenaz)는 카프카스 지역으로 진출한 가문의 조상이 된다. 성경 및 토라와 카프카스 고대 역사에 등장하는 아스그나스의 흔적들은 많지 않으나 아직도 명확하게 규명되지 못하고 있으며 신화적인 부분에 있어서 무궁무진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의 조상으로 알려진 아스그나스(Ashkenaz)는 터키 땅 전역과 카프카스 일대를 지배했으며 야벳 계통 후예들의 대표자들처럼 인식되었다. 아스그나스의 후예들은 노아의 둘째 아들인 함(Ham), 함의 막내인 가나안(Cannan), 가나안의 둘째 아들인 헷(The Hittites) 종족의 세력들이 후일 큰 제국을 건국한 히타이트 제국과 견줄 정도로 강성해졌다. 그들은 히타이트 제국 이후에 등장한 아시리아 제국과 신바빌로니아 제국 등과도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경쟁하게 된다. 물론 이들 제국들이 워낙 강대하고 파죽지세로 확장해 가는 과정에서 아스그나스의 후예들이 일시적으로 위축되었으며 그들의 영토는 축소된다. 그러나 아스그나스의 후예들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했던 제국들에게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로 각인되어 왔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다가 고대 근동을 호령하던 강대국들의 틈새를 헤집고 들어가 대제국을 건설키도 하였다. 후일 로마 제국의 확장과 신생 페르시아 제국의 대립 속에서 지금의 카프카스 지역과 아르메니아 하이랜드라 불리는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으로 경계가 정해지면서 끝없는 고중세 시대의 지정학적 요충지로 부상했다. 중세 시대 중반부인 서기 1200년을 전후하여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를 통치했던 바그라티드 왕조가 상당 기간 동안 카프카스를 통과하는 실크로드를 장악했고 카프카스 일대의 중계 무역으로 인한 부와 명예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아스그나스의 후예들은 매우 용맹했으며 유럽 러시아와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로 연결되는 지역에 있어 지정학적으로 그 명성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의 지정학적 영토가 이전보다 위축되었기 때문에 아스그나스라는 이름이 잊혀지는 듯했다. 이 당시 아스그나스라는 이름보다 아르메니아나 조지아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더 많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열국들의 뇌리에서 자취를 감춘 듯 보였던 아스그나스(Ashkenaz)가 어느새 유럽 전체를 대표하는 명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지역에 정교회가 자리 잡았고, 산악 유태인들이 자리 잡으면서 야벳의 자손들을 언급했던 것처럼 이들이 유럽의 각 지역들에 흔적을 남겼던 기록들이 적지 않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들 정교 기독교인들과 유태인들에 의해 유럽의 주요 지역들을 망라한 유럽 자체를 가르키는 명칭으로 ‘아스그나스’가 재등장한 것이다. 아르메니아와 조지아의 대명사처럼 불렸던 아스그나스(Ashkenaz)는 유럽 전체를 지칭하는 명칭이 되었던 이유는 노아가 야벳에게 베풀었던 성경 창세기에 나타난 예언적인 축복을 이루어가는 상황에서 점차적으로 동유럽과 러시아를 거쳐서 유럽의 곳곳으로 지경을 넓혀 갔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는 고중세 당대의 역사가들도 아스그나스의 확장에 대해 조심스럽게 언급했다. 중세 시기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고 유럽에서 성지를 탈환하려고 몰려드는 십자군들을 가르켜 아스그나스(Ashkenaz)라고 불렀던 기록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를 두고 어느 정도아스그나스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이는 유태교의 역사와 관련 지을 수 있는데 중세 시대의 중반 이후로 아스그나스 유대인(Ashkenazi Jews)들이 유럽 전체를 대표하는 유태교 추종자들로 알려졌다. 예나 지금이나 유태인은 대개 아스그나스 유태인일 정도로 이들은 전체 유태교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아스그나스 유태인 그룹과 더불어 가장 많은 계파를 이루고 있는 세파라드 유태인(Sepharadic Jews)들은 전체 유태인의 20% 전후를 차지하는데, 이들 세파라드는 스페인을 지칭하는 단어로써 스페인 지역에서 유래한 유태인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성경이나 토라에서도 스페인이 세라파드로 불렸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부분은 스페인에서도 세라파드 내지는 아스그나스(Ashkenaz)로 나라 이름을 지칭했다는 것이다. 1939년경 유럽에는 약 1,200만 명 정도의 아스그나스 유태인(Ashkenazi Jews)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한다.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아스그나스 유태인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는 유태인이라 지칭하면 모두 아스그나스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 아스그나스라는 명칭을 유태인들이 대명사처럼 사용하는 것으로 볼 때, 고대 시기 이스라엘의 북왕조를 구성했던 10개 지파들이 역사에서 사라졌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들 중 상당수가 아르메니아와 조지아의 아스그나스로 유입되었다. 남왕조 유태 왕국의 2개 지파에 속한 유태인들 중 다수도 아스그나스로 속하여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로 이동해 토착화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황과 여건에 따라 유럽의 각 지역으로 분파, 이동했다고 본다. 아스그나스의 본 고장인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에 남아 있던 유태인들 중에 12 사도들의 선교로 인해 기독교인으로 개종된 경우가 많았을 것이고, 아스그나스 유태인들의 숫자만큼이나 아스그나스 기독교인(Ashkenazi Christians)들도 적지 않은 숫자로 존재했을 것이다. 비록 많은 수의 아스그나스 유태인이나 세파라드 유태인들이 유럽 곳곳에 계속 남아 있지만, 아스그나스의 본토인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에 남은 유태인들을 포함하여 그들의 후예들이 주축이 되었고 각각 세계 최초 및 역사상 두 번째로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유럽의 다른 이름인 아스그나스(Ashkenaz)도 대륙 전체가 기독교를 수용하였고 16세기 종교 개혁을 통해 그들의 후예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가 그 지경을 넓혔다고 본다. 조지아나 아르메니아로부터 시작된 아스그나스 유태인 중심의 선민사상은 아스그나스로 불리는 유럽 등에서 백인 우월주의, 혹은 백인 보수 우성향, 백인 리버럴(The White Liberals), 그리고 근본주의적인 백인 기독교인들의 성경적, 사상적 근거로 악용되고 왜곡되어 왔다. 따라서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의 유태인들은 바빌론 유수에서 이스라엘이 로마에 정복된 이후까지 가장 먼저 해외에 진출해 뿌리 박은 자들이고 이들로 인해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가게 된 근원적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과 아쉬케나지 유태인은 조합은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악마적인 유태인 조합으로 재탄생했다. 만약 중동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소멸되면 유태인들이 자리 잡을 곳은 조지아, 아르메니아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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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1
  • 러시아는 한 때 현재 미국 켈리포니아까지 정복한 적 있다
    러시아 출신의 슬라브 인의 최초의 알래스카 정착 기록은 1648년 세묘나 데쥐뇨바(Семёна Дежнёва)가 콜리마 강에서 출발하여 북극해를 가로질러 아나디리 강의 하구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로마노프 연대기(Хроника Романов)>에서 전해진다. 시베리아에서 건너온 아시아-아메리카 토착민들의 혼혈과 더불어 러시아-슬라브 인들의 후손들은 러시아가 알레스카를 팔기 전까지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최초 시민이 되었다. 세묘나 데쥐뇨바(Семёна Дежнёва)의 탐험대 중 일부는 알래스카에 먼저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었으나, 그들이 알래스카에 정착했다는 기록은 현재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데쥐뇨바의 탐험은 러시아 중앙 정부로부터 시작되어 연결된 것이 아닌 시베리아의 끝 지역이 어디인지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고 시베리아가 다른 대륙과 연결되어 있는지에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상륙만 했던 것 뿐이다. 그로 인하여 1725년에 표트르 1세가 탐험을 한번 더 부탁했으나 데쥐뇨바가 1721년에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결국은 무산되었다. 1733~1743의 제2차 캄차카 지역의 탐험 일부로 1741년 6월에 덴마크 탐험가인 비투스 베링(Vitus Berin)이 이끄는 페트르 탐험대와 러시아인 알렉세이 치리코프(Алексей Чириков)가 이끄는 파벨 탐험대가 캄차카 반도의 항구 뻬뜨로빠블로쁘스끄 깜쨔츠끼(Петропавловск-Камчатский)에서 원정을 시작했다. 두 탐험대는 후에 따로 분리되었지만 동쪽으로 항해를 계속하면서 6월 15일에 치리코프(Чириков) 일행이 알레스카 남단의 프린스오브웨일스(Prince of Wales Island) 섬 서부 해안의 땅을 발견하고 북아메리카 북서부 해안가에서 최초로 유럽인들을 정착시키게 된다. 6월 16일경에 베링과 페트르 탐험대는 알레스카 본토의 세인트 엘리아스(Saint Elias) 산을 발견하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에 동시에 파벨 탐험대의 치리코프는 10월달에 새로운 땅인 알류산 열도 중 한 곳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러나 11월에 베링의 배는 러시아로 돌아오는 도중 베링 섬에 난파되었고 그곳에서 베링은 풍토병에 걸려 사망했다. 이어 출항한 페트르 탐험대는 돌풍을 만나 갈라지게 되면서 각 섬 지역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곳이 알류산 열도에 속한 군도들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선원들은 엄청난 추위가 닥치는 알류산 군도에서 겨울을 버틴 후에 1742년 8월에 난파선의 조각으로 배를 만들어 러시아로 떠나게 된다. 그 이후 시베리아와 알레스카 사이의 협수로를 덴마크 탐험가인 비투스 베링(Vitus Berin)의 이름을 붙여 베링 해협이라 불리게 되었다. 베링의 선원들은 1742년에 캄차카 반도의 해안에 도달했고 탐험에 대한 이야기들을 저술로 남겼다. 이때 그들이 가져온 고급 해달 가죽은 러시아 인들이 아메리카 정착을 본격적으로 노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때 이후로 알류산 열도와 알레스카가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었고, 19세기 초에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있던 북아메리카 서부 지역 인디언들 지역들을 뚫고 오늘날의 미국 오리건주(州)와 캘리포니아 주(州), 캐나다의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州)까지 진출하면서 식민지로 삼았다. 19세기 초반에 러시아령 아메리카는 남쪽으로 스페인령이던 멕시코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총책임자였던 니콜라이 레자노프(Николай Резанов)는 알렉산드르 1세의 명으로 러시아령 아메리카 총독으로 파견되어 스페인 측과 협상을 하도록 했다. 레자노프는 스페인령 지역과의 국경 지대에 러시아 인들을 진출하는 것에 대해 러시아 정부가 직접적으로 후원하려는 방편으로 요새의 건립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본국인 이베리아 반도와 지리적으로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세력도 한창 활발했던 16~17세기 같지 않았던 스페인은 역사적으로도 러시아와 인연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잘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이러한 요구를 흔쾌히 들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켈리포니아 지역에 러시아 요새가 건립이 되는데 러시아 아메리카 총독인 니콜라이 레자노프는 요새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807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지 5년이 지난 1812년에 비로소 요새가 건립되었고, 그 요새가 바로 로스 요새(Fort Ross)이다. 만약에 러시아가 오리건이나 켈리포니아, 브리티시 콜롬비아까지 모두 장악하고 유지했었다면 그거야 말로 역사상 유래가 없었던 세계 최대 제국이자 영토였을 것이다. 아마 미국도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비슷한 예로 몽골 제국이 있지만 당시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는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을 정복했고 우즈베키스탄의 3개의 칸국에게서 조공을 받아 정복 전 단계에 놓여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캐나다 서부와 미국 서부의 영토를 가졌다면 그만한 대제국은 전에도, 후에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캘리포니아는 러시아 본국에서 너무 멀었기 때문에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들었고, 설상가상으로 알레스카 지역으로 미국 상인들이 진출하면서 알레스카 지역에서의 미국에 대한 경제적인 의존도가 심해지자, 결국 러시아는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켈리포니아와 오리건, 브리티시 콜롬비아를 포기하고, 경제적 중심지인 알레스카 지역에 집중하기로 하면서 로스 요새는 거의 버려지다시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에 러시아와 영국 간에 벌어진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이라고 불리는 대치전 때문에 러시아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경영은 더욱 어렵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영국령이던 캐나다의 산하 회사인 허드슨 만 회사에 알레스카를 통과하여 항해할 수 있는 권리를 넘겨줌으로써 알류산 열도가 영국의 위협을 받게 되자 러시아는 1867년에 알레스카를 미국에 팔아치우게 된다. 1에이커 당 2달러의 가격으로 미국이 알레스카를 거저 먹은 것이다. 따라서 로스 요새를 비롯한 미국 서부 지역은 자연히 미국 영토로 넘어가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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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30
  • 러시아와 중국, 표리부동의 상호관계 속에 실익 추구
    러시아와 중국은 과연 상호 협력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가? 이에 관한 답변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 두 국가는 겉보기와 달리 현안별로, 상황에 따라 의외로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기도 하고, 때론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협력관계를 추구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중국이 가깝게 된 것은 헤이룽(러시아명으로 아무르)강과 우수리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타라바로프(중국명 인룽) 섬, 볼쇼이우수리스키(중국명 헤이샤즈) 섬, 밍위에 섬이라는 3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푸위안 삼각주(혹은 이 삼각주 전체를 헤이샤즈 삼각주라고 부른다)를 둘러싼 국경분쟁이 서로 타결된 이후일 것이다. 1969년 3월 2일부터 9월 11일까지 일어난 양쪽 국경분쟁은 2005년 6월 2일에 비로소 완전히 타결되었다. 이때 타결된 내용은 타라바로프 섬을 중국으로 완전히 반환하고, 볼쇼이우수리스키 삼각주를 동·서로 양분하는 것이었다. 이때 중국에 반환된 삼각주의 면적은 총 약 327제곱 킬로미터 중 약 174제곱 킬로미터로 사실상 중국영토의 가장 동쪽 끝이 되는 셈이다. 이에 러시아와 중국은 약 4354 킬로미터에 이르는 국경선을 육상 국경선과 해상 경계선으로 획정했다. 그런데 이 지역은 강물의 높이가 일정하지 않고, 3개의 섬이라고 하지만, 작은 섬들도 그 삼각주 주변에 많이 흩어져 있어서 엄밀하게 국경선을 획정하기가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하여튼 이 타결로 인해 영토 문제로 인해 러시아와 중국은 영토분쟁에 관한 한 서로 별다른 문제가 없고, 현재 이 지역은 서로 왕래를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와 중국 양국은 영토 문제에 매우 민감한데, 러시아는 중국으로부터 할당받는 영토를 일부 돌려줌으로써, 이를 통해 대중국 관계를 개선할 수 있었다. 중국은 러시아보다 더 많은 영토를 반환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러시아는 일종의 경제적-외교적 관계에서 거래에 초점을 맞추었던 반면, 중국은 정치적 관계에 의한 국익에 방점을 두었을 것이다. 만일 중국이든 러시아든 전부 반환이냐 전부 보전이냐의 문제로만 협상이 진행되었더라면, 이 협상은 결코 타결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협상 기간이 길었던 것은 러시아와 중국 각각의 내부 사정과 국제질서의 급변이 동시적으로 발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 이 두 국가는 미국에 맞서는 국가이기는 하지만, 서로의 계산법은 현안별로 다르다. 미국에 맞선다는 점에서 러시아와 중국은 서로 같은 지점에 서 있지만, 러시아와 중국은 표리부동(表裏不同)의 행보를 보인다. 서로 정상회담도 했지만, 가시적 성과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러시아는 유라시아 지역의 정치·문화 안전보장에 관한 국제협력 기구인 상하이협력기구(CSO)와 구소련연방에서 독립된 국가들의 연합체인 독립국가연합(CIS)을 통해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러시아가 천연가스와 석유 그리고 군사적 협력을 지속화하는 경향이 보인다. 또 러시아는 최근 이른바 아프리카의 사헬 지대(서쪽 세네갈에서부터 동쪽의 수단에 이르는 사하라 사막 남쪽 지역) 국가들에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중국은 이른바 일대일로 정책을 추진하면서 육상 실크로드인 경제벨트와 21세기 해상 실크로드를 추구하는 것은 경제적 측면에서 중국식 자유 경제 지대를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중국의 경제침체와 미국의 대중국 제재 그리고 일대일로에 일부 참여국들이 빚더미로 몰리는 상황은 우려를 낳는다. 더욱이 중국은 최근 러시아의 천연가스관 공사 문제로 마찰을 빚고 있다. 중국의 터무니 없는 후려치기에 러시아가 난색을 표명하면서 이 공사가 현재 지연되는 것이다. 사실 러시아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치르고 있어서 천연가스 수출로 막대한 전비를 충당하고 있다. 특히 러시아는 중국에 관해 유럽보다 할인가격으로 천연가스를 팔았는데, 이것은 러시아가 유럽과 중국의 가격 차별화를 통해 자원을 한편으로 무기화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지속적인 미래 성장시장으로 중국을 염두에 둔 것이다. 러시아의 원래 계획은 천연가스의 유럽 시장이 축소되면, 이를 만회하기 위해 중국의 시장을 돌려서 안정된 수출공급망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러시아는 천연가스를 파이프라인을 통해 중국에 공급하려고 했고, 이른바 ‘시베리아의 힘-2’는 몽골을 걸쳐 중국의 동북아 지역과 시베리아를 연결하는 ‘시베리아 힘-1’의 수송량을 늘리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중국의 터무니없는 가격 인하 요구로 진전이 없고, 몽골에서도 별로 진전된 바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이 내세운 그럴듯한 명분은 중국이 향후 그린에너지로 전환하게 되면, 천연가스의 의존도를 낮추어야 하는데, 굳이 현재 시점에서 천연가스의 공급을 수요보다 더 많이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굳이 러시아가 공급하겠다면 기존보다 훨씬 낮은 가격이라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느긋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러시아로는 그런 가격이면 그동안에 싼 가격으로 중국에 천연가스를 공급해 왔는데, 천연가스의 가격을 훨씬 더 낮추라고 하니, 그러면 러시아도 안 하겠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러시아는 그렇지 않아도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중국의 소극적 태도가 불만이었다. 정치적으로 외교적으로 아무리 관계가 친밀해도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발생하면 오월동주(吳越同舟)와 같은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그 때문에 국제관계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러시아와 중국이 중앙아시아에서도 한쪽은 영향력 유지를, 다른 한쪽은 영향력 확대를 희망한다. 또 중국은 아프리카에 투자하면서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아프리카 국가들의 참여들 독려하면서 국가 영향력을 키우려고 한다. 이때 중국은 경제적 투자를 통해 아프리카의 자원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이와 달리 러시아는 이른바 과거 서방의 식민지, 특히 옛 프랑스 식민국가를 중심으로 바그너그룹을 통해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이것은 군사적-경제적 측면이 강한데, 과거에 서방의 식민지 각축장이었던 아프리카는 이제 러시아가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아프리카는 서구 식민지에 해방되었고, 서방의 지원도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나아진 것이 별로 없으며, 오히려 정정(政情) 불안과 정변, 종족 분쟁과 영토분쟁으로 피로 얼룩져 있다. 아프리카 각국의 국민은 그동안 서구화가 일부 진행되었지만, 여전히 가난과 빈곤을 벗어나지 못한 까닭에 잦은 분쟁과 전쟁의 씨앗으로 절망과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 이 틈을 군벌들이 활개를 치고 들어가고, 러시아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러시아는 반서방 동맹 세력을 구축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서방의 책임이 크다고 하겠다. 그 핵심은 경제적 지원이고, 각종 치안 불안과 정권 안정을 위해 이제는 서방보다 오히려 러시아가 더 낮다고 보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아프리카 각국의 정치적-경제적 상황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지는 매우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러시아의 최근 행보를 보면 중국과 다소 껄끄러운 관계에 있는 북한과 베트남과 적극적인 관계를 모색하고 있다. 중국은 북한의 핵 문제로 다소 소원하고, 베트남과는 이른바 사사(파라셀)군도와 난사(스프레틀리)군도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다. 러시아는 이 두 국가에 관해 후원국 역할을 자처한 것처럼 보인다. 베트남은 전통적으로 이른바 ‘대나무 외교’라는 외교술로 유연하면서도 균형 외교를 중시하면서 강대국들 사이에서 실익을 많이 챙겼다. 러시아는 베트남과의 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아마도 유라시아연합과 동남아시아연합을 하나로 묶으면서 미국- 대만-필리핀으로 이어지는 남중국해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을 견제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러시아는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분산시키는 효과를 기대할 것이다. 중국은 한편으로 베트남과의 남중국해 분쟁에서 러시아가 개입을 내심 우려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미국의 대중국 정책의 영향력을 희석화시키는데 러시아와 베트남의 밀착 관계를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구도는 현재 중국의 경제 상황과 러시아의 우크라니아 전쟁으로 인해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에 러시아와 중국이 어떤 행보로 서로의 관계를 모색할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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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9
  • 터키-아르메니아 대학살 사건은 국제적으로 매우 복잡한 문제 - 번외편, 아제르바이잔 대학살
    오스만투르크의 아르메니아 학살이 벌어진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제1, 2차 발칸 전쟁 당시에 벌어졌던 포마크(Pomaks)인 및 발칸 투르크인 학살에서 살아나온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이 크게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타난 포마크(Pomaks)인들은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불가리아계 무슬림의 후손들로 오스만 제국이 발칸과 불가리아를 떠나면서 불가리아인들에게 대량 학살을 당한 비극이 있는 민족이다. 결국 오스만 정부, 청년 투르크당이 동방에 있는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이주를 승인함으로써 시리아와 동남부 지역 이주되었고 그로 인해 다수의 사망자들이 발생했다. 이를 아르메니아 대학살이라고 하는데 앞에 上, 中, 下에서 언급한 것처럼 학살에 대한 조사가 전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사망자의 수를 알 수 없다. 그런데 그로 인해 터키에 대한 복수를 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이번에는 같은 투르크계 민족인 아제르바이잔인에게 옮겨갔다. 본래 현재의 아르메니아 영토는 중세 시대 이후 아제르바이잔인과 타트인, 페르시아인들이 절대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시대 이후 러시아의 인위적인 이주 정책이 벌어지면서 아르메니아인 인구가 늘어났다. 따라서 투르크를 견제하던 러시아 입장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인 인구를 의도적으로 줄였고 그러한 와중에 대략 35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예레반을 중심으로 한 현재의 아르메니아 지역으로 이주했다. 러시아는 나라가 멸망하고 디아스포라 형태로 떠돌아 다니고 있던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살 길을 열어준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또 다른 비극의 원인이 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살던 터전에 갑자기 아르메니아인들이 들어오고 자신들은 러시아 내부로 들어가거나 이란 서부 지역, 터키 동부 지역 등으로 강제 추방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오스만 제국 같은 경우, 형제 민족이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환영했지만 오랜 기간 동안 투르크계를 극도로 혐오했던 페르시아인들은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들어오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따라서 그로 인해 제5차 러시아-페르시아 전쟁(1826~1828)이 일어난다. 약 2년동안 벌어진 이 전쟁에서 페르시아는 참패하고 러시아와 투르크만차이(Treaty of Turkmenchay) 조약을 맺는다. 이 조약으로 이란은 러시아에 광대한 카프카스의 영토를 할양하고, 약 300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지불했으며, 또한 러시아에 대해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등 매우 굴욕적인 조약을 맺게 된다. 이 때부터 카프카스 지역이 러시아의 영향권에 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카프카스 지역을 경작하기 위해 아르메니아인들을 자신들의 고향 땅으로 이주시킨 것이고 지속적으로 러시아와 마찰을 빚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다수의 아제르바이잔인들을 강제적인 디아스포라로 만들어 버렸다. 지금도 이란 서부 지역에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이 시기에 러시아의 이주 정책에 쫓겨 들어온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많다고 한다. 이들을 줄여 아제리인들이라 부르기도 한다. 게다가 러시아는 이주시킨 아제르바이잔인들을 지렛대로 삼아 이란 서부 지역을 통제하고자 하는 목적도 갖고 있었다. 나중에 이 아제리인들은 러시아 국적을 포기하고 이란 국적을 얻었지만 당시의 이란으로 이주한 아제리인들은 상당수가 러시아인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1878년 러시아-오스만 12차 전쟁이 발발하여 러시아가 승리함으로써 오늘날 터키 동부 지역을 식민지 삼아버렸다. 현재 필자가 머물고 있는 카르스가 당시 러시아의 영토로 넘어가 40년 넘게 러시아의 지배를 받아야 했었다. 그리고 이 지역으로 아제리인들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와 거주하니 이 지역의 터키인들은 형제인 아제리인들을 환영할 지 몰라도 이미 터키 동부 지역에 터 잡고 살고 있던 아르메니아인 입장에서는 매우 불쾌한 일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오스만투르크가 발칸 전쟁에서 패배하고 발칸 지방을 상실하면서 급격히 쇠퇴하자 러시아의 지배 하에 있던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 또한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 때 터키 동부 지역은 신분계층이 4단계로 나뉘었는데 가장 위에는 러시아 지배층, 두번째 계층이 바로 아르메니아인이다. 세번째 계층이 아제리인이고 마지막 최하계층이 터키인이다. 이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 지배층들의 비호를 받으며 투르크계 민족의 재물을 강탈하고 살인을 저질러도 처벌 받지 않았다. 터키 동부 지역의 40년 러시아 식민 지배 기간 동안 러시아인들이 투르크계 민족들을 괴롭히기보다는 아르메니아인들이 투르크계 민족을 괴롭히는데 있어 방관했고 사실상 방치하다시피 했다. 이러한 러시아의 방치는 후일 생겨난 큰 비극적인 사건들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카르스의 러시아 총독부의 딩시 문서들을 보면 아르메니아인들의 행위들은 패악질에 가까웠고 투르크계 민족들에게 있어 뿌리 깊은 원한을 갖게 만들었다. 물론 개중에도 아르메니아인과 투르크계 민족 사이에 서로 간에 정을 쌓고 잘 지냈던 사람들도 있었다. 이는 마치 일제 시대 때, 조선인과 일본인들 사이에 정을 쌓고 잘 지냈던 일반 서민들도 있었던 것처럼 제 아무리 식민지배라도 예외는 있기 마련이다. 이후 이런 인연들은 반기를 든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토벌 작전으로 인해 곤경에 빠지던 아르메니아인들을 터키 일반 서민들 중 몰래 숨겨주면서 참화를 면하게 하는 등의 일들도 생기곤 했었다. 1917~18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카프카스 지방의 러시아 군이 카르스 조약을 체결하고 터키 동부 땅을 오스만 정부에 돌려주며 철수함에 따라 터키인들의 보복을 두려워한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이 아르메니아 현지인들을 선동하여 아제르바이잔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끔찍한 학살은 아직 오스만 정부가 터키 동부 일대를 접수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안보 공백을 틈타 벌어진 비극이었다. 특히 이와 같은 학살을 선동한 자는 스테판 샤후먄(Ստեփան Շահումյան, 1878~1918)이라는 자였다. 샤후먄은 공산화된 러시아의 적극적인 지원을 원했고 코민테른에도 참가해 레닌으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면서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반제국주의 운동을 전개하면서 볼셰비키에 가담했다. 반동뷴자들을 처단한다는 미명 하에 1918년 3월부터 4월 사이에 아제르바이잔 땅의 바쿠를 포함, 나고르노 카라바흐, 장게주르, 나흐츠반, 예레반, 아르다한, 카르스, 반 일대에서 최소 3만 명 이상의 아제르바이잔인을 학살했다. 특히 구바 지역에서 122개, 나고르노 카라바흐에서 150개, 장게주르에서 115개, 예레반 근교에서 115개, 카르스에서 92개의 마을을 파괴하면서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는데 최소 3만이라는 희생자로 보고 되었을 뿐이지 크게는 10만에 이를 수도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한 근거로 예레반에서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발행하던 1919년 11월 2일자 아슈하다보르(Aşxadavor, 노동자) 신문에 의하면 예레반 인근에서 순식간에 88개의 마을이 파괴되고, 1,920채의 집이 방화로 인해 전소되었으며, 130,970명의 아제르바이잔인이 남녀 노소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살해되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학살을 주도했던 샤후먄은 1918년에 반볼셰비키파에게 잡혀 공개 총살로 사망하면서 일방적인 학살의 비극은 종식되었다. 물론 아제르바이잔이 주장하는 구바 학살의 경우, 수만 정도에 이르며 바쿠에서는 3,000명에서 12,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예레반에서의 13만 정도의 대량학살은 영문 자료, 러시아어 자료, 아르메니아어 자료에서도 확인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이는 교차검증이 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즉, 아제르바이잔의 선전이거나 과장, 혹은 오보일 수 있다는 것인데 예레반 현지에서의 보도에 의한 것이기에 아제르바이잔 측의 프로파간다나 오보일 가능성은 매우 적다. 이후 이러한 사건에 분개한 오스만 제국군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은 바쿠에서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보복 학살로 이어졌다. 1918년 9월 누리 킬리길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 군대는 바쿠 전투에서 바쿠를 함락시킨 뒤 1~3만에 달하는 아르메니아 민간인을 아제리인에 대한 3월 학살의 보복으로 학살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시기 자행된 대규모 학살이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상호 학살이 이어졌으며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간의 오래 묵은 적대관계의 원인이기도 하다. 한편 아르메니아에서는 이 학살을 지시한 스테판 샤후먄(Ստեփան Շահումյան)의 동상을 수도 예레반에 세우고 국가 영웅의 칭호까지 내렸다. 이후 아르차흐 공화국이 세워지면서 아르차흐 지역 곳곳애 샤후먄 동상을 세웠지만 2020년 아제르바이잔이 전쟁으로 회복한 아르차흐의 영토에서는 샤후먄 동상이 철거되었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학살자를 영웅시하는 아르메니아를 비난하고 스스로를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피해자를 주장하는 것은 매우 뻔뻔한 이중 인식이라 규탄하고 있다.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 대학살에 대해 철저히 외면하게 됐고 아르메니아는 이같은 학살에 철저히 침묵했다. 따라서 자신들의 책임을 부정하고 서로의 학살만을 부각시키면서 비난을 이어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에서는 1998년 3월 31일부터 아제르바이잔인 대학살의 날(Azərbaycanlıların Soyqırımı Günü)이라 부르며 국가적인 차원에서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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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9
  • 현 러시아의 최동단 섬 사할린의 중요성
    사할린은 현재 지하 자원 창고로서의 가치가 높지만, 20세기 초중반까지만 해도 일본이나 러시아도 크게 가치를 두지 않던 땅이었던 곳이다. 워낙 기후가 험한데다가 땅 자체도 경작이 거의 불가능한 불모지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부터 일본에서는 이 땅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러시아가 남하하기 전까지 별로 개발하지 않았었다. 사실 당시의 일본으로서는 홋카이도, 쿠릴 열도도 사실상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전통적으로 더위를 피하기 위한 구조로 짜여진 일본식의 가옥과 의복은 사할린에서는 불필요했고, 지금처럼 교통과 운송이 발달한 때도 아니기 때문에 멀리 떨어진 사할린까지의 물자의 보급에도 어려움이 컸다. 실제로 일본이 남부 사할린을 얻어낸 것에 대해서도 쓸모없는 땅을 얻었다는 부정적인 여론도 다수 존재했을 정도였다. 물론 영토가 넓을수록 좋았기에 북부 사할린 전체까지 차지하려고 했지만 러시아도 마찬가지로 사할린보다는 훨씬 더 이점이 많은 연해주나 만주 지역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도시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나 나홋카 같은 도시들과는 달리 현재도 사할린은 코르사코프, 유즈노사할린스크 등 섬 내 주요 도시들이 종전 당시의 인구나 인프라가 크게 변하지 않은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사할린은 석유와 가스가 공업 생산량의 80%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될 정도로 비중이 높다. 석유와 가스 덕택에 실업률이 2%에 불과할 정도로 경제는 계속 활황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할린스트임-2 송유관 사업 지분 구성은 러시아 국영 가스프롬 50%, 영국 석유기업 셸 27.5%, 일본 미쯔이 물산 12.5%, 미츠비시 상사 10%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할린스트림-2 사업에서는 2009년 LNG 출하가 시작됐으며 연간 LNG 생산능력은 약 1천만t 정도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풍부한 가스와 석유생산량을 갖고 있다. 미국과 더불어 서방과 함께 러시아를 제재하고 있던 일본은 역으로 러시아에게 맞제재를 당해 곤혹을 겪고 있다. 러시아는 현 상황에서 일본과 평화조약 체결 협상을 지속할 의사가 없고 일본이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취한 일방적 대러 제재의 명백히 비우호적인 성격을 고려한 것이라고 밝히면서 일본과는 더이상 대화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러시아 외교부는 이와 더불어 러시아 남쿠릴열도와 일본 사이의 무비자 방문에 관한 1991년 협정과 남쿠릴열도 거주 일본인들의 고향 방문 간소화에 관한 1999년 협정에 근거한 일본인들의 무비자 왕래를 중단하겠다고 밝히면서 일본이 그동안 구축해온 자원 외교도 위협을 받고 있다. 일본은 가스와 석유 수급이 어려워지면서 물가가 전체적으로 폭등하고 있다. 이에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지난 3월 31일에 러시아 극동 사할린에서 석유와 천연가스를 생산하는 사할린스트림-2 사업에서 철수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밝히면서 러시아의 가스와 석유로 위기를 타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일본 정부는 과거 석유 위기를 교훈 삼아 에너지의 중동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공급원 다원화를 추진했으며 그중 하나가 러시아 자원 개발이다. 아사히 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일본은 LNG 수입의 약 8.8%, 원유 수입의 약 3.6%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사할린스트림-2 사업에서 생산되는 LNG의 약 60%는 일본의 전력회사나 가스 회사용도로 쓰이고 있다. 문제는 이와 같은 문제도 한국 또한 비우호국가로 찍힌 상태이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에 있다. 한국은 현재 사할린스트림-2에서 생산된 LNG를 연 150만t(약 20억㎥) 수입하고 있다. 러시아는 사할린스트림-2 LNG 공장의 생산 능력을 증대하는 한편 또 다른 가스전 사할린스트림-1에도 LNG 공장을 세워 수출을 늘리는 프로젝트를 추진 중에 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러시아는 한국이 사할린 LNG 신규 프로젝트에 투자하고 이곳에서 생산된 LNG를 추가로 구매해주길 희망하고 있었다. 한국은 러시아-중국-몽골 등과의 경제협력을 전담할 북방경제협력위원회까지 신설하고 러시아와의 경제협력 확대에 막대한 공을 들였다. 그러나 한국은 북핵 위기 악화로 인해 러시아산 PNG 수입을 위한 북한 경유 가스관 건설 사업이 난관에 놓인 상황에서 러시아 측의 LNG 사업 제안을 신중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사할린 LNG 수입량 확대도 LNG 공장 증설 및 신규 건설 등에 상당한 시간이 걸려 향후 5~6년 뒤에나 실제로 수입량을 늘릴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이와 같은 프로젝트가 무르익어 갈 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생한 것이다. 한국은 전체 가스와 석유의 5% 정도지만 중국, 일본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이 러시아 사할린스트림-2에서 가스와 석유를 수입하고 있다. 중동에서 들여오는 것보다 러시아 사할린산 가스와 석유는 매우저렴한 가격에 사올 수 있는데다 인건비와 운송비까지 중동보다 모두 저렴했다. 그래서 러시아 가스와 석유의 수입을 점차 늘려가고 있는 중에 이번 전쟁으로 인해 서방 세력과 함께 대러제재에 동참함에 따라 러시아로부터 "비우호국가"로 찍히게 된다. 러시아로부터 가스와 석유 운송이 쉽지 않게 된데다가 이번엔 러시아 정부의 조치로 가스와 석유를 루블화로 지급해야 한다. 이런 사태들로 인해 물가는 수직 상승하기 시작했고 유가와 가스 값 또한 연일 고공행진 중에 있다. 러시아와 같이 자원이 풍부하고 영토가 넓어 식량 생산도 높은 국가는 그럭저럭 버틸 수 있지만 한국 같이 자원도 없고 원자재를 들여와 제작해 수출하는 형태의 국가는 물가 지옥과 더불어 식량 위기까지 헬게이트가 봉인 해제된 셈이다. 앞으로 이 부분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이 높은 상황인데 국내에는 아직도 위기 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태평가를 부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말 그대로 한국은 지금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다 돌아가는 전기톱날 앞에 서 있는 상황이다. 이와 같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위기의 동북아시아 국제 정세 속에 국회는 젤렌스키에게 연설시키는 것을 조율하는 뻘짓을 하고 있고 우크라이나가 6.25 전쟁 당시 한국을 도와줬다는 잘못된 역사관을 믿으며 우크라이나에 성금 및 모금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조금만 눈을 떠보면 뭐가 위기인지가 보이는데 아직도 인지를 못하고 헛짓거리 하는 것 보면 놀랍다 못해 기이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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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6

포토뉴스 검색결과

  • 러시아는 한 때 현재 미국 켈리포니아까지 정복한 적 있다
    러시아 출신의 슬라브 인의 최초의 알래스카 정착 기록은 1648년 세묘나 데쥐뇨바(Семёна Дежнёва)가 콜리마 강에서 출발하여 북극해를 가로질러 아나디리 강의 하구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로마노프 연대기(Хроника Романов)>에서 전해진다. 시베리아에서 건너온 아시아-아메리카 토착민들의 혼혈과 더불어 러시아-슬라브 인들의 후손들은 러시아가 알레스카를 팔기 전까지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최초 시민이 되었다. 세묘나 데쥐뇨바(Семёна Дежнёва)의 탐험대 중 일부는 알래스카에 먼저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었으나, 그들이 알래스카에 정착했다는 기록은 현재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데쥐뇨바의 탐험은 러시아 중앙 정부로부터 시작되어 연결된 것이 아닌 시베리아의 끝 지역이 어디인지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고 시베리아가 다른 대륙과 연결되어 있는지에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상륙만 했던 것 뿐이다. 그로 인하여 1725년에 표트르 1세가 탐험을 한번 더 부탁했으나 데쥐뇨바가 1721년에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결국은 무산되었다. 1733~1743의 제2차 캄차카 지역의 탐험 일부로 1741년 6월에 덴마크 탐험가인 비투스 베링(Vitus Berin)이 이끄는 페트르 탐험대와 러시아인 알렉세이 치리코프(Алексей Чириков)가 이끄는 파벨 탐험대가 캄차카 반도의 항구 뻬뜨로빠블로쁘스끄 깜쨔츠끼(Петропавловск-Камчатский)에서 원정을 시작했다. 두 탐험대는 후에 따로 분리되었지만 동쪽으로 항해를 계속하면서 6월 15일에 치리코프(Чириков) 일행이 알레스카 남단의 프린스오브웨일스(Prince of Wales Island) 섬 서부 해안의 땅을 발견하고 북아메리카 북서부 해안가에서 최초로 유럽인들을 정착시키게 된다. 6월 16일경에 베링과 페트르 탐험대는 알레스카 본토의 세인트 엘리아스(Saint Elias) 산을 발견하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에 동시에 파벨 탐험대의 치리코프는 10월달에 새로운 땅인 알류산 열도 중 한 곳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러나 11월에 베링의 배는 러시아로 돌아오는 도중 베링 섬에 난파되었고 그곳에서 베링은 풍토병에 걸려 사망했다. 이어 출항한 페트르 탐험대는 돌풍을 만나 갈라지게 되면서 각 섬 지역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곳이 알류산 열도에 속한 군도들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선원들은 엄청난 추위가 닥치는 알류산 군도에서 겨울을 버틴 후에 1742년 8월에 난파선의 조각으로 배를 만들어 러시아로 떠나게 된다. 그 이후 시베리아와 알레스카 사이의 협수로를 덴마크 탐험가인 비투스 베링(Vitus Berin)의 이름을 붙여 베링 해협이라 불리게 되었다. 베링의 선원들은 1742년에 캄차카 반도의 해안에 도달했고 탐험에 대한 이야기들을 저술로 남겼다. 이때 그들이 가져온 고급 해달 가죽은 러시아 인들이 아메리카 정착을 본격적으로 노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때 이후로 알류산 열도와 알레스카가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었고, 19세기 초에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있던 북아메리카 서부 지역 인디언들 지역들을 뚫고 오늘날의 미국 오리건주(州)와 캘리포니아 주(州), 캐나다의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州)까지 진출하면서 식민지로 삼았다. 19세기 초반에 러시아령 아메리카는 남쪽으로 스페인령이던 멕시코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총책임자였던 니콜라이 레자노프(Николай Резанов)는 알렉산드르 1세의 명으로 러시아령 아메리카 총독으로 파견되어 스페인 측과 협상을 하도록 했다. 레자노프는 스페인령 지역과의 국경 지대에 러시아 인들을 진출하는 것에 대해 러시아 정부가 직접적으로 후원하려는 방편으로 요새의 건립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본국인 이베리아 반도와 지리적으로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세력도 한창 활발했던 16~17세기 같지 않았던 스페인은 역사적으로도 러시아와 인연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잘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이러한 요구를 흔쾌히 들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켈리포니아 지역에 러시아 요새가 건립이 되는데 러시아 아메리카 총독인 니콜라이 레자노프는 요새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807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지 5년이 지난 1812년에 비로소 요새가 건립되었고, 그 요새가 바로 로스 요새(Fort Ross)이다. 만약에 러시아가 오리건이나 켈리포니아, 브리티시 콜롬비아까지 모두 장악하고 유지했었다면 그거야 말로 역사상 유래가 없었던 세계 최대 제국이자 영토였을 것이다. 아마 미국도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비슷한 예로 몽골 제국이 있지만 당시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는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을 정복했고 우즈베키스탄의 3개의 칸국에게서 조공을 받아 정복 전 단계에 놓여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캐나다 서부와 미국 서부의 영토를 가졌다면 그만한 대제국은 전에도, 후에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캘리포니아는 러시아 본국에서 너무 멀었기 때문에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들었고, 설상가상으로 알레스카 지역으로 미국 상인들이 진출하면서 알레스카 지역에서의 미국에 대한 경제적인 의존도가 심해지자, 결국 러시아는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켈리포니아와 오리건, 브리티시 콜롬비아를 포기하고, 경제적 중심지인 알레스카 지역에 집중하기로 하면서 로스 요새는 거의 버려지다시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에 러시아와 영국 간에 벌어진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이라고 불리는 대치전 때문에 러시아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경영은 더욱 어렵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영국령이던 캐나다의 산하 회사인 허드슨 만 회사에 알레스카를 통과하여 항해할 수 있는 권리를 넘겨줌으로써 알류산 열도가 영국의 위협을 받게 되자 러시아는 1867년에 알레스카를 미국에 팔아치우게 된다. 1에이커 당 2달러의 가격으로 미국이 알레스카를 거저 먹은 것이다. 따라서 로스 요새를 비롯한 미국 서부 지역은 자연히 미국 영토로 넘어가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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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30
  • 영국 동인도회사의 설립과 역사
    1595년 네덜란드가 인도 항로로 진출하여 향료 무역을 본격적으로 개시하자, 여기에 자극받은 영국 런던의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1600년에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었다. 이 회사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으로부터 특허를 얻어 동인도 지역 무역의 독점권을 얻었다. 처음에는 일항해(一航海)마다의 개별적 기업제(企業制)였는데, 점차 그 폐해가 나타나 1613년 합자(合資) 기업 제도를 채택함과 동시에 영속적인 조직이 되었다. 1656년의 올리버 크롬웰의 항해 조례 개정 이후 있은 뒤에 찰스 2세 시대에 근대식 주식회사로서 확립되었다. 이와 같은 동인도 회사의 활동 범위는 17세기에는 아프리카에서 일본에까지 미쳤는데, 주요 사업은 향료 무역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격렬한 투쟁을 벌인 결과 이에 패배하여 17세기말까지는 인도로 후퇴하게 되었다. 영국은 봄베이로부터 캘커타에 이르는 서부 인도의 해안선을 지배하에 두었다. 물론 이와 관련된 내용은 영국의 작가 가일스 밀턴(Gails Milton)의 저서인 <향료전쟁>에 자세히 나타나고 있다. 영국 동인도 회사(British East India Company) 또는 동인도 회사(East India Company, EIC)는 17세기 영국에서 동양 무역의 독점과 인도의 식민지 경영을 위해 설립된 회사로, 당대 영국 재계를 대표하는 기업이었으며 영국이 장기적으로 인도를 지배, 중국에 진출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일명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던 대영제국을 존재하게 한 회사라 볼 수 있다. 물론 경칭으로 위대한 동인도 회사(Honourable East India Company, HEIC)라 불리기도 했다. 가장 처음 설립된 동인도 사는 일명 동인도 제도에서 무역하는 정부와 런던 상인의 회사(Governor and Company of Merchants of London Trading into the East Indies)라는 긴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이 회사는 엘리자베스 1세가 1600년에 설립 허가를 내주었다. 이후 이에 대항하는 동인도 제도에서 무역하는 잉글랜드 상인의 연합 회사(United Company of Merchants of England Trading to the East Indies)가 1708년 설립되었다. 보통 전자를 런던 회사, 후자를 영국 회사라고 부르며 모두 영국 동인도회사라 불리고 있다. 그로부터 회사는 인도의 면직물 수입을 주력 사업으로 삼았고, 원료를 확보하기 위하여 원주민 생산자에게 경제 이 외 강제적인 행위를 가하였다. 회사는 단순한 기업에 그치지 않고, 내륙 지방에 대한 토지와 주민의 지배를 확대하였으며 1765년 토지세로 대표되는 벵골 지방의 조세 징수권을 무굴 제국 황제로부터 양도받으면서 벵골의 토지 소유자가 되었다. 그로 인해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의 정치 권력자 및 영토 지배자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초창기 영국 동인도회사는 전쟁보다 무역 자체에서 이윤을 창출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1600년 설립된 이후 1세기 동안 이사회는 동인도회사의 사업은 전쟁이 아닌 무역임을 강조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인도와의 무역에 주력했는데, 특히 인도에서 가장 세력이 약하고 유럽의 경쟁국들이 가장 적었던 벵골과 마드라스가 주요한 활동 지역이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프랑스가 인근 지역에 요새를 구축하면서 그들은 전략을 바꾸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한창 전쟁을 벌이던 영국과 프랑스는 인도에서도 무력으로 충돌했다. 프랑스는 세포이로 알려진 인도 병사들을 정규군으로 수용하여 전투 능력을 증대하면서 영국보다 우위를 점했다. 1750년대 영국 동인도회사도 세포이를 수용했고 7년 전쟁이 벌어지기 전날 두 나라는 각각 10,000명에 달하는 무장한 병력들 중 대부분 인도인들을 인도 해안에 배치했다. 청나라에 관심을 가지던 영국은 본격적으로 중국에 진출하기 위해 1759년 영국 동인도회사는 직원을 북경으로 보내 개항을 요구하였고 건륭제(乾隆帝, 재위 : 1735~1796)는 이를 허가하였으나 갑자기 이를 거절하고 대외 무역 규제를 대폭 강화하였다. 또한 영국인들이 주로 활동하고 있던 주산(舟山)과 하문(아모이)의 항을 폐항 하고 광주항만 개항을 허락하였다. 추가로 건륭제는 영국을 포함한 유럽 상인들은 반드시 공행(公行)과만 매매를 하도록 규정하고 그 시기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로 엄격하게 설정하였다. 1780년대부터 청나라와 영국 동인도회사는 본격적인 무역을 하게 된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광동 무역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여 중국으로부터 차, 도자기, 목면 등을 수입하고 영국의 모직물, 면직물 등을 수출했다. 그런데, 청나라 조정에서는 서양 물품을 취급하는 양행 상인들의 조직인 공행 관세를 자의적으로 부과하였고 외국 상인들의 무역을 제한했다. 또한 무역 기간이나 물품도 통제하여 유럽 상인들이 별다른 수입을 올리지 못하였다. 1680년대 찰스 2세가 회사에 대하여 징병 권, 사관임명권, 교전 권(交戰權) 등을 부여함으로써 권력이 보강되었다. 경쟁 상대인 신(新) 동인도회사를 합병하고, 로버트 클라이브(Robert Clive)가 1757년에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 동인도회사에 승리하면서 18세기 중엽에는 인도에 대한 독자적인 지위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본국에서는 회사의 전제와 독점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 인도의 행정은 점차 본국 의회의 감독 하에 들어갔다. 1814년의 인도 무역의 독점 폐지, 차(茶) 무역의 독점 폐지, 인도 회사령(會社領)의 국왕에 이양 등으로 그 사명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1832년 2월 26일, 동인도회사는 광주(廣州)에 와 있던 영국인 간첩 휴 해밀튼 린제이(Hugh Hamilton Lindsay)에게 염탐을 시켰다. 그는 로드 애머스트(Lord Amherst) 호의 선주를 사칭하고, 카를 귀츨라프(Karl Gützlaff)와 함께 광동 이북에서의 무역 확장을 타진하기 위해서라는 구실로, 남오(南澳), 하문(廈門), 복주(福州), 영파(寧波), 상해(上海), 위해(威海) 등 항구를 돌아다니며 지형을 측량 및 제도하고, 정치, 경제, 군사 정보를 수집하여 영국의 외무대신 헨리 존 템플(Henry John Temple)에게 넘겨주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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