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7-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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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투르크의 아르메니아 학살이 벌어진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제1, 2차 발칸 전쟁 당시에 벌어졌던 포마크(Pomaks)인 및 발칸 투르크인 학살에서 살아나온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이 크게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타난 포마크(Pomaks)인들은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불가리아계 무슬림의 후손들로 오스만 제국이 발칸과 불가리아를 떠나면서 불가리아인들에게 대량 학살을 당한 비극이 있는 민족이다. 

 

결국 오스만 정부, 청년 투르크당이 동방에 있는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이주를 승인함으로써 시리아와 동남부 지역 이주되었고 그로 인해 다수의 사망자들이 발생했다. 이를 아르메니아 대학살이라고 하는데 앞에 上, 中, 下에서 언급한 것처럼 학살에 대한 조사가 전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사망자의 수를 알 수 없다. 그런데 그로 인해 터키에 대한 복수를 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이번에는 같은 투르크계 민족인 아제르바이잔인에게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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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3월 31일 아제르바이잔인 대학살의 날(Azərbaycanlıların Soyqırımı Günü) 기념 팜플랫,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본래 현재의 아르메니아 영토는 중세 시대 이후 아제르바이잔인과 타트인, 페르시아인들이 절대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시대 이후 러시아의 인위적인 이주 정책이 벌어지면서 아르메니아인 인구가 늘어났다. 따라서 투르크를 견제하던 러시아 입장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인 인구를 의도적으로 줄였고 그러한 와중에 대략 35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예레반을 중심으로 한 현재의 아르메니아 지역으로 이주했다. 러시아는 나라가 멸망하고 디아스포라 형태로 떠돌아 다니고 있던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살 길을 열어준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또 다른 비극의 원인이 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살던 터전에 갑자기 아르메니아인들이 들어오고 자신들은 러시아 내부로 들어가거나 이란 서부 지역, 터키 동부 지역 등으로 강제 추방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오스만 제국 같은 경우, 형제 민족이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환영했지만 오랜 기간 동안 투르크계를 극도로 혐오했던 페르시아인들은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들어오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따라서 그로 인해 제5차 러시아-페르시아 전쟁(1826~1828)이 일어난다. 약 2년동안 벌어진 이 전쟁에서 페르시아는 참패하고 러시아와 투르크만차이(Treaty of Turkmenchay) 조약을 맺는다.  이 조약으로 이란은 러시아에 광대한 카프카스의 영토를 할양하고, 약 300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지불했으며, 또한 러시아에 대해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등 매우 굴욕적인 조약을 맺게 된다. 이 때부터 카프카스 지역이 러시아의 영향권에 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카프카스 지역을 경작하기 위해 아르메니아인들을 자신들의 고향 땅으로 이주시킨 것이고 지속적으로 러시아와 마찰을 빚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다수의 아제르바이잔인들을 강제적인 디아스포라로 만들어 버렸다. 지금도 이란 서부 지역에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이 시기에 러시아의 이주 정책에 쫓겨 들어온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많다고 한다. 이들을 줄여 아제리인들이라 부르기도 한다. 게다가 러시아는 이주시킨 아제르바이잔인들을 지렛대로 삼아 이란 서부 지역을 통제하고자 하는 목적도 갖고 있었다. 


나중에 이 아제리인들은 러시아 국적을 포기하고 이란 국적을 얻었지만 당시의 이란으로 이주한 아제리인들은 상당수가 러시아인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1878년 러시아-오스만 12차 전쟁이 발발하여 러시아가 승리함으로써 오늘날 터키 동부 지역을 식민지 삼아버렸다. 현재 필자가 머물고 있는 카르스가 당시 러시아의 영토로 넘어가 40년 넘게 러시아의 지배를 받아야 했었다. 그리고 이 지역으로 아제리인들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와 거주하니 이 지역의 터키인들은 형제인 아제리인들을 환영할 지 몰라도 이미 터키 동부 지역에 터 잡고 살고 있던 아르메니아인 입장에서는 매우 불쾌한 일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오스만투르크가 발칸 전쟁에서 패배하고 발칸 지방을 상실하면서 급격히 쇠퇴하자 러시아의 지배 하에 있던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 또한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 때 터키 동부 지역은 신분계층이 4단계로 나뉘었는데 가장 위에는 러시아 지배층, 두번째 계층이 바로 아르메니아인이다. 세번째 계층이 아제리인이고 마지막 최하계층이 터키인이다. 이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 지배층들의 비호를 받으며 투르크계 민족의 재물을 강탈하고 살인을 저질러도 처벌 받지 않았다. 


터키 동부 지역의 40년 러시아 식민 지배 기간 동안 러시아인들이 투르크계 민족들을 괴롭히기보다는 아르메니아인들이 투르크계 민족을 괴롭히는데 있어 방관했고 사실상 방치하다시피 했다. 이러한 러시아의 방치는 후일 생겨난 큰 비극적인 사건들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카르스의 러시아 총독부의 딩시 문서들을 보면 아르메니아인들의 행위들은 패악질에 가까웠고 투르크계 민족들에게 있어 뿌리 깊은 원한을 갖게 만들었다. 물론 개중에도 아르메니아인과 투르크계 민족 사이에 서로 간에 정을 쌓고 잘 지냈던 사람들도 있었다. 

 

이는 마치 일제 시대 때, 조선인과 일본인들 사이에 정을 쌓고 잘 지냈던 일반 서민들도 있었던 것처럼 제 아무리 식민지배라도 예외는 있기 마련이다. 이후 이런 인연들은 반기를 든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토벌 작전으로 인해 곤경에 빠지던 아르메니아인들을 터키 일반 서민들 중 몰래 숨겨주면서 참화를 면하게 하는 등의 일들도 생기곤 했었다. 1917~18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카프카스 지방의 러시아 군이 카르스 조약을 체결하고 터키 동부 땅을 오스만 정부에 돌려주며 철수함에 따라 터키인들의 보복을 두려워한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이 아르메니아 현지인들을 선동하여 아제르바이잔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끔찍한 학살은 아직 오스만 정부가 터키 동부 일대를 접수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안보 공백을 틈타 벌어진 비극이었다. 특히 이와 같은 학살을 선동한 자는 스테판 샤후먄(Ստեփան Շահումյան, 1878~1918)이라는 자였다. 샤후먄은 공산화된 러시아의 적극적인 지원을 원했고 코민테른에도 참가해 레닌으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면서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반제국주의 운동을 전개하면서 볼셰비키에 가담했다.

 

반동뷴자들을 처단한다는 미명 하에 1918년 3월부터 4월 사이에 아제르바이잔 땅의 바쿠를 포함, 나고르노 카라바흐, 장게주르, 나흐츠반, 예레반, 아르다한, 카르스, 반 일대에서 최소 3만 명 이상의 아제르바이잔인을 학살했다. 특히 구바 지역에서 122개, 나고르노 카라바흐에서 150개, 장게주르에서 115개, 예레반 근교에서 115개, 카르스에서 92개의 마을을 파괴하면서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는데 최소 3만이라는 희생자로 보고 되었을 뿐이지 크게는 10만에 이를 수도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한 근거로 예레반에서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발행하던 1919년 11월 2일자 아슈하다보르(Aşxadavor, 노동자) 신문에 의하면 예레반 인근에서 순식간에 88개의 마을이 파괴되고, 1,920채의 집이 방화로 인해 전소되었으며, 130,970명의 아제르바이잔인이 남녀 노소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살해되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학살을 주도했던 샤후먄은 1918년에 반볼셰비키파에게 잡혀 공개 총살로 사망하면서 일방적인 학살의 비극은 종식되었다. 

 

물론 아제르바이잔이 주장하는 구바 학살의 경우, 수만 정도에 이르며 바쿠에서는 3,000명에서 12,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예레반에서의 13만 정도의 대량학살은 영문 자료, 러시아어 자료, 아르메니아어 자료에서도 확인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이는 교차검증이 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즉, 아제르바이잔의 선전이거나 과장, 혹은 오보일 수 있다는 것인데 예레반 현지에서의 보도에 의한 것이기에 아제르바이잔 측의 프로파간다나 오보일 가능성은 매우 적다. 이후 이러한 사건에 분개한 오스만 제국군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은 바쿠에서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보복 학살로 이어졌다. 


1918년 9월 누리 킬리길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 군대는 바쿠 전투에서 바쿠를 함락시킨 뒤 1~3만에 달하는 아르메니아 민간인을 아제리인에 대한 3월 학살의 보복으로 학살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시기 자행된 대규모 학살이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상호 학살이 이어졌으며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간의 오래 묵은 적대관계의 원인이기도 하다. 한편 아르메니아에서는 이 학살을 지시한 스테판 샤후먄(Ստեփան Շահումյան)의 동상을 수도 예레반에 세우고 국가 영웅의 칭호까지 내렸다. 

 

이후 아르차흐 공화국이 세워지면서 아르차흐 지역 곳곳애 샤후먄 동상을 세웠지만 2020년 아제르바이잔이 전쟁으로 회복한 아르차흐의 영토에서는 샤후먄 동상이 철거되었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학살자를 영웅시하는 아르메니아를 비난하고 스스로를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피해자를 주장하는 것은 매우 뻔뻔한 이중 인식이라 규탄하고 있다.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 대학살에 대해 철저히 외면하게 됐고 아르메니아는 이같은 학살에 철저히 침묵했다. 


따라서 자신들의 책임을 부정하고 서로의 학살만을 부각시키면서 비난을 이어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에서는 1998년 3월 31일부터 아제르바이잔인 대학살의 날(Azərbaycanlıların Soyqırımı Günü)이라 부르며 국가적인 차원에서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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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아르메니아 대학살 사건은 국제적으로 매우 복잡한 문제 - 번외편, 아제르바이잔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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