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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당, 바이든 대체론 대두… 해리스와 미셸 오바마 주목
    미국 대선 첫 TV 토론 이후 민주당 내부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의 후보 교체론이 제기되고 있다. CNN과 여론조사기관 SSRS가 실시한 조사 결과, 바이든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양자 대결에서 43% 대 49%로 뒤졌다. 반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트럼프와의 가상 대결에서 45% 대 47%로 박빙을 보였다. 해리스는 특히 여성과 무당층에서 강세를 나타냈다. 조사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결할 경우 여성 응답자의 44%만이 바이든을 지지했지만, 해리스 부통령에게는 절반인 50%가 지지를 보냈다. 무당층에서도 바이든은 34%의 지지를 얻은 반면, 해리스는 43%의 지지를 받았다. 이는 해리스 부통령이 일부 유권자층에서 바이든보다 더 경쟁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트럼프 전 대통령의 가상 대결에서는 43% 대 48%로, 피트 부티지지 교통부 장관과의 대결에서는 43% 대 47%로 나타났다. 민주당의 또 다른 유력 후보인 그레첸 휘트머 미시간 주지사와의 대결에서는 42% 대 47%로 집계됐다. 한편, 로이터와 입소스가 실시한 조사에서는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이 각각 40%의 지지율로 동률을 기록했다. 해리스 부통령과 트럼프의 가상 대결에서는 해리스가 42%, 트럼프가 43%로 오차 범위 내에서 1%포인트 차이를 보였다. 일각에서 꾸준히 민주당의 대안 후보로 거론되는 미셸 오바마 여사는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가상 대결에서 50% 대 39%로 압도적인 지지율을 기록했다. 오바마 여사는 백악관을 떠난 이후에도 저서 집필 등을 통해 대중과 꾸준히 소통하며 높은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정치에는 참여할 뜻이 없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바이든 대통령의 '고령 리스크'가 드러난 첫 토론 이후, 바이든 측은 여론 조사 결과에 주목하며 위기론을 잠재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질 바이든 여사를 비롯해 아들 헌터 바이든 등 가족들은 바이든 대통령의 대선 완주를 강하게 설득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CNN을 포함한 여러 여론 조사 결과는 바이든 대통령의 '토론 후폭풍'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CNN 조사에서 민주당 및 민주당 지지자의 56%는 바이든 대통령 이외의 후보를 내세울 경우 대선 승리 가능성이 더 높다고 답했다. 바이든 대통령을 내세우는 것이 승리 확률이 높다는 답변은 43%에 불과했다. 이는 지난 1월 조사에서 바이든 대통령을 내세우는 것이 경쟁력이 높다는 답변이 53%였던 것과 대비된다.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율은 36%로 CNN 자체 조사 기준 최저치를 기록했다. 바이든 대통령을 강력하게 지지하지 않는다는 답변도 45%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호감도는 34%에 불과했으며, 비호감을 품은 비율은 58%에 달했다. 로이터 조사에서도 민주당 지지자의 32%는 바이든 대통령이 후보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밝혔다. 응답자의 59%는 바이든 대통령이 공직을 수행하기에는 너무 늙었다고 답변했다. 이와 같은 조사 결과는 민주당 내부에서 바이든 대통령의 후보 교체론이 더욱 힘을 얻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바이든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은 이러한 위기론을 잠재우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여론의 흐름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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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구촌
    2024-07-03
  • 인천남동구청장과 남동구미용협회 임원들이 만났다
    인천 남동구청장과 남동구미용협회 임원들이 만났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2024 남동 뷰티페스티벌> 등 논의 미용인들은 많은 사회 봉사 활동은 물론이고 지역 내의 나팔수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이는 지역의 수장들과 긴밀한 협력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인천 남동구청과 남동구미용협회의 간담회는 미용인이 어떻게 지역 사회에서 역할을 맡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날의 간담회 내용을 소개한다.<편집자주> 지난 5월 27일 인천 남동구의 구청장실에서는 의미 있는 간담회가 개최되었다. 이날 간담회에는 인천 남동구청에서는 박종효 구청장을 비롯, 이현구 홍보실장, 김경화 공중위생팀장이 참석했고, 남동구미용협회에서는 김미숙 회장을 필두로 안유진, 김경순(이상 부회장), 김채영, 남미정, 안정임(이상 이사), 조두진 사무국장 등이 참석했다. 뷰티라이프 이완근 편집국장이 간담회에 동석하여 취재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이날 간담회에서는 <2024 남동 뷰티페스티벌>의 개최 장소와 예산에 대한 전반적인 토론이 이어졌다. 간담회가 이루어지기 전, 박종효 구청장은 “남동구미용협회는 여러 단체들 중에서도 봉사활동을 많이 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이에 감사한 말씀을 드린다.”며 “앞으로도 구청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바란다.”고 말했다. 김미숙 남동구지회장은 “구청장님의 남동구의 발전에 대한 소신과 철학을 우리는 좋아한다. 우리 미용협회 회원들은 구청장님의 든든한 울타리가 될 것이다.”라고 화답했다. 이어진 간담회에서는 <제5회 남동 뷰티페스티벌>에 대한 전반적인 행사 개요와 주요 행사 내용, 소요 예산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뷰티페스티벌 장소에 대해서는 인천대공원 어울큰마당을 중심으로 예술회관, 소래축제 현장 등 더 좋은 장소가 나타나면 계속 논의해 나가기로 했다. 비용에 있어서 남동구미용협회 임원들은 자부담금의 최소화를 건의했고, 박종효 구청장은 사회복지기금 등을 지정기탁하는 방안 등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을 약속했다. 이외에도 남동 뷰티페스티벌에 대한 질적 향상 방안과 축제로서의 홍보 극대화 등에 대한 다양한 의견 개시가 있었다. 김미숙 지회장은 미용협회에서 운영 중인 <한마음봉사단>에 대해서 박종효 구청장에게 자세하게 설명했다. <한마음봉사단>은 한 달에 두 곳의 지역 독거노인 수급자나 장애인 시설 등을 방문하여 무료미용 봉사를 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이어서 김미숙 지회장은 우리나라 광역시 중 인천시만이 광역시가 주최하는 미용대회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박종효 구청장은 이상과 같은 이야기를 전해 듣고, 인천광역시에 의견을 전달하겠다는 답변을 했다. 또한 남동구미용협회의 <한마음봉사단>이 봉사 활동을 할 때 시간이 허락하는 한 참석하여 회원들을 격려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이밖에도 구청과 미용협회의 상호협력으로 윈-윈 전략이 되고도 남을 많은 이야기가 오고갔다. “구청이나 시, 도 등에는 많은 단체가 있지만 미용협회 만큼 고객충성도가 높은 단체는 없습니다. 더구나 미용협회는 사회 봉사적인 면에서 타 단체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오늘과 같은 간담회가 우리 미용인의 입장에서는 구청장님과 구청의 미용인에 대한 인식을 드높이고 그리하여 우리 미용인들이 사회 일원으로서 자부심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라고 간담회에 참석했던 한 임원은 말했다. 이날의 간담회는 구청의 입장에서는 구정(區政)의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어 구정 홍보와 대외 협력에서 빛을 발하게 되었고, 미용협회에서는 구청의 도움 아래 페스티벌과 봉사 활동 등의 미용인에 대한 지원 강화와 미용인 권익신장에 이바지했다고 할 수 있겠다. 한편, “이번 행사는 박종효 구청장님의 미용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 김미숙 지회장님의 구청장님에 대한 무한 신뢰와 믿음이 이런 간담회를 연 원동력이 되었고, 간담회를 통하여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협력을 굳건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확실하다.”고 구청 관계자는 말했다. “앞으로도 남동구청과 남동구미용협회의 이와 같은 사례가 전국적으로 퍼져서 지역 사회는 물론 대한민국 전체적으로 미용인의 활동이 더욱 빛을 발했으면 한다.”고 또 다른 참석자는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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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2
  • 이준석 의원, “국민의힘 당 대표는 김건희 여사만이 적임자” 주장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은 2일,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의힘 당을 주도적으로 통제할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BBS 라디오 '함인경의 아침저널'에 출연한 이 의원은, 국민의힘 전당대회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한 후보 중 누가 당선되더라도 수직적 당정관계를 해소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 의원은 여당 대표가 안정적으로 당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김건희 여사가 당 대표가 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은 이준석을 몰아내고, 김기현 대표도 본인이 세우고 몰아냈으며,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도 세우고 몰아내려고 했다. 굉장히 별난 분"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이 의원은 "당 대표 후보로 김 여사가 오지 않는 한 대통령이 가만히 안 둘 것"이라며 "여당 대표가 김 여사가 되지 않는 한 대통령이 가만히 안 둘 것으로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어서 그는 "굳이 화합형 지도자를 찾자면 윤상현 의원"이라며 "윤 의원은 윤 대통령이 대선에 출마할 때 끝까지 사람들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애썼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 의원은 국민의힘 전당대회 당 대표 경선을 '서울대 법대 반장선거'로 표현했다. 그는 "어떻게 한 당에 대통령, 비대위원장, 전직 비대위원장, 전당대회 후보, 전직 대표 전부 다 서울대 법대 출신이냐"라며 "이렇게 되면 유전적으로 이상이 생기고, 대한민국 정치 전반에서도 문제가 된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 의원은 "서울대 법대 출신들이 모여 있으니 결국에는 배신자 논란과 충성 논란만 생긴다"라고 했다. 그는 "과거에 윤 대통령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관계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이라며 "당이 바뀌려면 지금 위기 상황에서 비전이 나와야 하는데, 하나도 안 나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동훈 후보를 향한 비판도 이어졌다. 이 의원은 "한 100일 전까지만 하더라도 '여의도 사투리' 쓰지 않고 국민의 언어로 얘기하겠다더니, 지구당 부활을 전당대회 대표 공약으로 냈다는 것 자체가 여의도 사투리에 찌들어버린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대통령 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는데, 대통령 하고 싶은 것 하나밖에 없는 한 검사 출신 정치인 때문에 지금 대한민국이 이 지경이 됐다"라고 날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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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
    2024-07-02
  • SK온, 비상 경영 체제 선언, 임원 연봉 동결과 조직 효율화 추진
    SK온이 전기차 시장의 둔화 등 급변하는 대내외 환경에 대응하여 비상 경영 체제를 선언했다. 회사는 1일 오전 전체 임원 회의를 화상으로 개최하고, 조직 효율화 및 임원 연봉 동결 등 강도 높은 조치를 발표했다. 회의에서 SK온은 경영 환경 변화에 적응하고, 회사의 흑자 전환을 위해 필요한 모든 분야에서 과감한 변화를 추진하는 결정을 했다. 이는 업무 영역, 진행 절차, 자원 배분, 일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경영진은 위기 상황에 대한 책임을 강화하고 의지를 천명하기 위해 솔선수범하기로 했다. CEO를 포함한 C 레벨 임원의 거취는 이사회에 위임되었으며, 성과가 미흡한 일부 임원 직책은 폐지 또는 수시로 변경될 예정이다. 회사는 또한 올해 분기 흑자 전환에 실패의 경우 내년도 임원 연봉을 동결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임원의 복리후생 제도와 업무추진비도 대폭 축소할 계획이다. 현재 시행 중인 해외 출장 시 이코노미석 탑승 의무화와 오전 7시 출근 정책은 계속 유지된다. 그러나 SK온은 연구 및 개발 투자는 최대한 지원하여 핵심 경쟁력을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고객사에 대한 상시적 대응력을 높이기 위해 영업 조직을 권역별로 분리하고 강화할 방침이다. 전체 구성원들은 '기본'에 충실한 기업문화를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유연근무제는 유지하되, 근무 시간에는 업무에 집중하도록 하고, 효율적인 의사결정을 위해 재택보다는 사무실 근무를 원칙으로 설정했다. 이석희 CEO는 "현재의 위기를 내실을 다지는 기회로 삼아 진정한 글로벌 제조 기업으로 거듭날 것"이라며 모든 구성원이 '자강불식'의 정신으로 최선을 다해 더 큰 결과를 맺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결정들은 회사가 직면한 도전을 극복하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달성하기 위한 전략적 조치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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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
    2024-07-01
  • 윤석열 대통령 탄핵 소추안 국민청원, 10만 명 이상 동의로 국회 심사 예정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 소추안 발의를 촉구하는 국민청원이 10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 국회 절차에 따라 소관 상임위원회에서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25일 오전 6시 이후 국회 국민동의청원 게시판에 의하면,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즉각 발의 요청에 관한 청원'은 이날 오후 기준으로 14만 9천여 명 이상의 동의를 얻은 것으로 집계되었다. 청원을 올린 권모 씨는 게시글에서 윤 대통령 취임 이후 경제, 안보, 외교, 민생, 민주 등 대한민국의 모든 분야가 총파산하고 있다며, "이미 탄핵 사유는 차고 넘친다"라고 주장했다. 권 씨는 "총선에서 민심의 준엄한 심판을 받은 윤 대통령은 국정 기조를 전환할 의지가 없다"러고 지적하며 22대 국회가 즉각 탄핵안을 발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권 씨가 주장하는 윤 대통령의 탄핵 사유는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주요 사유는 외교·안보 분야에 집중되어 있으며, △한반도 전쟁 위기 조장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사건의 친일적인 해법 강행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의 해양투기 방조 등이 포함된다. 국내 현안으로는 △해병대 채 상병 순직 사건 수사 과정에서 외압 행사 △김건희 여사의 명품 수수 등 부정 비리 등이 제기되었다. 헌법 26조에 따라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기관에 문서로 청원할 권리를 가진다. 이에 따라 국회는 홈페이지에서 30일간 5만 명 이상의 국민 동의를 얻은 사안을 소관 상임위에 회부하는 국민동의청원 제도를 운영 중이다. 이번 청원은 이러한 기준을 충족하여 23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접수되어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헌법상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는 국회 재적 의원 과반수의 발의와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탄핵안이 국회 문턱을 넘으면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결과에 따라 탄핵 여부가 최종 결정된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국회에서 탄핵안이 발의되어 가결된 사례는 노무현(2004년), 박근혜(2016년) 전 대통령 두 명이 있다. 청원인 권 씨의 주장은 민주당이 여권을 상대로 공세를 펼치는 지점과 일치한다. 이날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당 지도부는 채 상병 사건의 수사 외압 의혹과 관련해 "지난 법사위 청문회를 통해 수사 외압의 실체가 양파 껍질 벗겨지듯 드러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21일 청문회에서는 국방부가 경찰로부터 채 상병의 사건 기록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실이 관여했다는 취지의 증언이 나왔다. 이에 대해 장경태 민주당 최고위원은 "대통령이 전방위적으로 사건에 외압을 행사한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사실이라면 탄핵 사유"라고 주장했다. 국민청원이 국회 상임위에 회부 된 만큼 국회는 해당 청원을 심사하고 이를 통해 탄핵 소추안 발의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하지만 탄핵 소추가 실제로 이루어지려면 국회 내에서 충분한 찬성을 얻어야 하며 이후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을 거쳐야 한다. 따라서 실제 탄핵이 성사될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불확실하다. 이번 청원은 대통령 탄핵 소추라는 중대한 문제를 국민이 직접 제기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국민의 목소리가 국회에서 어떻게 반영될지 주목되며 이를 통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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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
    2024-06-25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사임 후 연임 도전 공식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6월 24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 이후 대표직 사임 의사를 밝히고 연임 도전을 공식화했다. 이 대표는 이날 오전 기자들과의 만남에서 "조금 전 회의를 마지막으로 민주당 당대표직을 사임한다"라고 밝혔다. 이는 그가 지난 임기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는 중요한 전환점을 의미한다. 이재명 대표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최고위원들의 협조와 당직자들의 헌신 덕분에 우여곡절 많았지만 임기를 계속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대표직을 수행하는 동안 겪었던 어려움과 함께 협력자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또한, 현재 대한민국이 직면한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언급하며, "민생도 경제도 어렵고, 비무장지대에서의 경고 사격 등 한반도 안보 역시 매우 불안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정치를 책임지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깊은 책임감과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국민과 나라가 당면한 거대한 위기 앞에서 민주당과 자신이 어떤 길을 가야 할지 깊이 고민하겠다고 강조했다. 이재명 대표는 민주당 전당대회에 대한 기대와 의지를 밝혔다. 그는 "민주당 전당대회는 의례적인 당원들의 축제가 아니라, 희망을 잃어버린 많은 국민께 새로운 희망을 만들고, 새로운 미래를 여는 중요한 모멘텀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또한 "험난한 현실에서 오늘도 힘겨운 하루를 감내하고 있는 국민과 함께 대한민국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자신의 거취에 대해 "길지 않게 고민해서 결정하겠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동안 도와준 많은 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재명 대표는 당 대표 연임을 염두에 두고 사퇴 의사를 밝힌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지금으로서는 당이 자유롭게 상황을 정리하고, 판단하고, 전당대회를 준비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 생각해 일단 대표를 사퇴하고 지켜볼 것"이라고 답했다. 이재명 대표의 사임과 연임 도전은 더불어민주당 내에서 중요한 정치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그의 리더십 아래 민주당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지만 동시에 많은 성과를 이루었다. 이 대표는 특히 경제와 민생 문제에 집중하며, 국민의 삶을 개선하는 데 주력해왔다. 그의 연임 도전은 당내 지지자들과 반대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반응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재명 대표의 강력한 리더십과 정책 추진력은 당내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의 스타일과 일부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도 존재한다. 이재명 대표의 사임과 연임 도전 공식화는 더불어민주당의 향후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순간이다. 그는 대한민국이 직면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정치적 책임감으로 국민과 함께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의 연임 도전 성공 여부는 앞으로 전당대회와 당내 정치적 상황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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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4
  • 국민의힘 대표 경선, 나경원·한동훈·원희룡의 치열한 경쟁
    국민의힘 대표 경선이 초반부터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나경원 의원,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 등이 출마 의사를 밝히며 서로 다른 입장과 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나경원 의원은 6월 23일 페이스북을 통해 한동훈 후보의 출마 선언문에 대해 강한 비판을 제기했다. 나 의원은 한동훈 후보가 "특검 수용 입장을 밝혔다"라며 "민주당의 특검은 진실 규명용이 아니라 정권 붕괴용"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한 후보의 특검 수용론을 "순진한 발상이고 위험한 균열"이라고 규정하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한동훈 후보는 당 대표 도전장을 내며 자신이 차기 대표가 될 경우,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수사 종결 여부와 무관하게 채 상병 특검법을 발의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국민이 가진 의구심을 풀어드려야 한다"라며 "이 시점에서 국민의힘은 특검을 반대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진실 규명을 위한 특검을 국민의힘이 나서서 추진해야 한다"라며 "이것이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을 진정으로 살리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나경원 의원의 글이 올라온 이후, 제주 출신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도 페이스북에 자기 입장을 밝혔다. 원 전 장관은 "이러다가 다 죽습니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당내 분열을 우려했다. 그는 "불안하다. 서로 싸우다 공멸할지도 모른다. 지금은 위기 상황이다. 무도하기 짝이 없는 세력을 앞에 둔 분열은 공멸을 불러올 뿐"이라고 경고했다. 원 전 장관은 차기 당 대표가 당정이 한마음 한뜻으로 단단히 뭉칠 수 있도록 접착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정이 한마음 한뜻으로 민심을 받들어 나갈 때, 윤석열 정부는 성공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국민의힘 당 대표 경선은 나경원 의원과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의 치열한 경쟁 구도로 전개되고 있다. 각 후보는 자신만의 전략과 비전을 내세우며 당원과 국민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특검 추진을 통해 진실 규명을 강조하며 중도층과 젊은 층의 지지를 얻으려 하고 있다. 나경원 의원은 강력한 반대 입장을 통해 보수층의 결집을 도모하고 있으며, 원희룡 전 장관은 당내 분열을 경계하며 화합과 단결을 촉구하고 있다. 각 후보의 전략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작용할지, 그리고 국민의힘 당원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앞으로의 경선 과정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향후 경선 과정에서 후보 간의 논쟁과 정책 대결이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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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
    2024-06-24
  • 테슬라, 일론 머스크에 막대한 성과 보상금 재승인…법적 논란 속 주주 지지 확보
    테슬라가 일론 머스크 최고경영자(CEO)에게 막대한 성과 보상금을 주기로 결정했다. 13일(현지시간)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 본사에서 열린 주주총회에서 머스크에게 경영 성과에 따라 주식매수청구권(스톡옵션)을 지급하는 보상안이 재승인되었다. 이번에 재승인된 보상안은 머스크가 테슬라의 매출과 시가총액 등 단계별 성과를 달성하면 12회에 걸쳐 총 3억 300만 주의 스톡옵션을 지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재 이 스톡옵션의 가치는 약 480억 달러(한화 약 66조 1,000억 원)에 달한다. 이는 머스크가 테슬라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회사의 가치를 높인 데 대한 보상으로 마련된 것이다. 이 보상안은 처음 2018년 테슬라 이사회와 주주총회를 통해 승인되었다. 이후 머스크는 계약상의 경영 성과를 모두 달성하며 스톡옵션을 전부 수령했다. 그러나 소액주주 리처드 토네타가 이를 무효로 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하면서 머스크는 받은 스톡옵션을 모두 반납해야 할 위기에 처했다. 올해 1월 토네타가 잠정 승소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이번 주주총회에서 테슬라 이사회는 주주들이 머스크에 대한 보상안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보상안 재승인 안건을 상정했다. 이는 항소심에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으로 분석된다. 실제로 테슬라 이사회는 보상안 무효 소송의 1심 판결이 오는 7월 확정되면 주 대법원에 항소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법원은 테슬라의 보상안 승인 과정에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머스크가 테슬라 이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이사회가 보상안의 내용을 주주들에게 충분히 공개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이번 주주총회에서 테슬라 이사회는 보상안의 자세한 내용을 공개하고 주주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주주총회는 테슬라 이사회가 주주들에게 머스크의 성과와 그에 대한 보상이 정당하다는 점을 설득하는 자리였다. 테슬라는 보상안의 각 항목과 머스크가 달성한 성과를 자세히 설명하며, 주주들의 이해와 지지를 끌어냈다. 주주들은 머스크가 테슬라를 혁신적, 성공적인 회사로 성장시킨 점을 높이 평가하며 그에 대한 보상이 적절하다는 의견을 나타냈다. 앞으로 법원에서 판결이 어떻게 나올지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테슬라가 주주총회를 통해 보상안을 재승인받음으로써 주주들의 지지를 확보한 점은 항소심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테슬라 이사회는 향후 법적 절차에서 주주들의 지지와 보상안의 투명성을 강조하며 머스크의 성과 보상이 정당하다는 점을 입증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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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4
  • 국민의힘 7월 전당대회 주요 당권 주자들 전망
    국민의힘이 7월 23일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 대표 선출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번 선출 방식은 당원 투표 70%와 일반 여론조사 30%의 비율로 결정됐다. 이와 동시에 당권 경쟁에 뛰어든 주요 인사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과 나경원 의원이 중심인물로 부상하고 있다. 또 친윤계 의원들의 참여 여부가 당내 권력 구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한동훈 전 위원장은 최근 이재명 대표 사법리스크를 공격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 활동으로 눈길을 끌고 있다. 특히 쌍방울 대북 송금 의혹을 집중해서 비판하며 자신의 당권주자로 존재감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공식 석상에서는 드문 모습을 보이지만 정책과 정치 현안에 대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하고 있다. 이에 따라 당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차기 전당대회 출마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나경원 의원은 인구 위기 대응과 인공지능 산업 육성을 주제로 1호 법안을 발의하는 등 정책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또한 각종 세미나 개최를 통해 당내에서 존재감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이 외에도 안철수 의원과 윤상현 의원 같은 수도권 중진들도 유력 후보군으로 거론되며 각자 방식으로 당내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다. 한편, 유승민 전 의원은 대학 강연과 언론 인터뷰를 통해 현 정부와 여당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며 비주류 주자로 독립적으로 행보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당 내부의 다양성과 폭넓은 의견을 반영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당권주자 윤곽은 친윤계 중진 의원들의 출마 선언과 함께 더욱 명확해질 전망이다. 국민의힘 초대 통일부 장관이었던 권영세 의원과 원내대표를 역임한 권성동 의원 등이 후보군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들의 정치적 결정과 움직임은 전당대회의 주요 변수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전당대회는 국민의힘 미래 방향성과 내년 총선 전략에 핵심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당 대표 선출 과정은 당의 내부 결속을 강화하고 새로운 리더십을 통해 전반적인 당의 체질 개선을 도모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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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1

과학 검색결과

  • 알뜰폰 업계 비상, 통신사 가격 인하...
    알뜰폰 시장이 위기에 처해 있다. 통신 3사의 저렴한 요금제 출시로 인해 알뜰폰의 가격 경쟁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최근 네 달간 통신 3사에서 알뜰폰으로의 순증 가입자 수가 급격히 감소했으며, 알뜰폰 가입자 순증 인원도 80% 넘게 줄었다. 지난달에는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 등 통신 3사에서 알뜰폰으로 이동한 사용자 수가 7만 3,727명에 불과했다. 이는 지난 1월의 12만332명에 비해 38.7% 감소한 수치이다. 반면, 알뜰폰에서 통신 3사로 옮겨간 이용자는 같은 기간 40.2% 증가했다. 정부의 가격 인하 압박에 따라 통신 3사가 출시한 2만 원대 5세대(5G) 이동통신 요금제는 알뜰폰 업계에 큰 타격을 입혔다. 특히, SK텔레콤은 2만 7,000원, LG유플러스는 2만 6,000원에 6GB 5G 요금제를 선보였고, KT는 월 3만 원에 5GB를 제공하는 요금제를 내놓았다. 통신사 간 번호이동 시 최대 50만 원의 전환지원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한 이동통신 단말기 유통구조개선법 시행령 개정도 알뜰폰 업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통신 3사는 지난 3월부터 전환지원금을 지급하기 시작했고, 이는 알뜰폰 업계에 추가적인 압박을 가했다. 이와 별도로, 제4 이동통신사인 스테이지 엑스의 등장도 알뜰폰 업계의 불안을 증폭시키고 있다. 스테이지 엑스는 내년 상반기 통신 서비스 상용화를 목표하고 있으며 "파격적인 요금제 출시"를 예고하고 있다. 이는 알뜰폰 업계와 직접적인 경쟁을 예고하는 것으로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한 알뜰폰과의 치열한 고객 유치 경쟁이 예상된다. 금융권의 움직임도 알뜰폰 업계에 도전이 되고 있다. 예를 들어, 국민은행의 알뜰폰 브랜드인 KB 리브 모바일은 보이스피싱 예방에 특화된 요금제를 출시했다. 이 요금제는 등록한 번호가 통화 중일 때 국민은행 ATM 거래를 자동으로 제한하는 기능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독창적인 서비스는 기존 알뜰폰업체에서는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알뜰폰 업계는 이런 도전적인 환경 속에서도 창의적인 제휴 상품을 개발하여 시장에서 존재감을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다. LG유플러스의 알뜰폰 자회사 미디어 로그가 출시한 ‘빽다방 100잔 요금제’는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구독자에게 매달 빽다방 아메리카노 쿠폰을 제공하는 제품이다. 그러나 업계 관계자는 이러한 제품이 시장의 분위기를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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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칼럼 검색결과

  • 2년 전, 헝가리 총선, 빅토르 오르반 총리의 4연임 당선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가 2022년 총선에서 승리하며 4연임을 확정지었다. 헝가리 총선에서 여당인 오르반 피데스당이 71%의 득표율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페테르 마르키자이(Péter Márki-Zay), 야당 연합 총리 후보는 패배를 인정했다. 오르반은 이번 승리로 4연임에 성공했다. 오르반은 1998~2000년 총리를 지내고 2010년 총선 승리 이래 연속 3연임에 성공해 12년 연속 집권하면서 EU의 최장수 총리가 되었다. 그는 집권 이래 이슬람과 난민, 성소수자 등에 반대했고 사법부를 장악하는 등 EU의 규정들을 위반했다. 결국 EU 지도부는 헝가리에 대한 예산 지원 삭감을 경고했고 오르반은 지난 2월 연설에서 EU가 헝가리에 관용을 베풀지 않으면 공동의 길을 계속 갈 수 없다며 EU 탈퇴를 시사했다. 특히 오르반은 푸틴 대통령과의 오랜 친분을 강조해 왔다. 오르반은 승리 연설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을 선거 운동 기간 동안 극복해야 했던 반대자 중이자 그를 압박했던 인물 중 한 명이라고 지칭하기도 있다. 이와 같은 오르반의 배경으로 인해 헝가리는 러시아에 대한 EU 제재에 새로운 구멍이 생길수 있다는 이야기가 언급되고 있다. CNN에 따르면 오르반은 우리가 달에서도 볼 수 있는 커다란 승리를 거뒀고 이는 EU 본부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에서도 보일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승리 자축했다. 오르반은 거대한 규모의 적들과 싸워야 한다면서 헝가리 좌파와 EU 관료들, 국제 언론을 모두 적으로 꼽았다. 앞서 헝가리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EU 차원의 러시아 제재에 대부분 참여했다. 하지만 헝가리는 우크라이나에 직접 무기를 지원하는 방안은 거부하면서 EU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헝가리 외무부는 지난달 30일 헝가리 좌파가 우크라이나 정부와 협력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며 젤렌스키가 헝가리의 내정에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면서 이는 헝가리 좌파 세력들이 젤렌스키와 모종의 거래가 있지 않았냐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그렇다면 헝가리 극우 세력의 상징 빅토르 오르반은 어떠한 인물일까? 빅토르 오르반은 1963년 5월 31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태어났으며, 부다페스트의 외트뵈시 로란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는 청소년기와 대학생 때는 공산당원으로 활동했지만 군에서 제대한 이후로는 헝가리 내 공산 체제에 대해 회의감을 느꼈으며 이후 서방 세계를 동경하여 자유 노조 등에 대해 공부했다. 1988년 오르반은 공산주의 정권에 반대하는 단체인 청년민주동맹(Fiatal Demokraták Szövetsége, 줄여서 피데스 Fidesz)이 만들어질 때 창립 멤버가 되었다. 더불어 공산주의의 패망을 예측하고는 <세기의 종언(Szazadveg)>이란 잡지도 창간했다. 그 다음 해인 1989년 6월 16일 부다페스트에 있는 영웅 광장에서 열린 헝가리 혁명 당시 수상 너지 임레(Nagy Imre, 1896~1958)를 추모하는 자리에서 자유선거와 소련군의 철수를 공개적으로 촉구하는 연설을 했다. 이와 연설로 인해 그는 헝가리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으며 서구권에서도 주목받는 인사가 되었다. 이후 피데스가 헝가리 민주 정당이 되면서 오르반은 피데스 당의 당수가 되었다. 피데스는 1990년 치러진 총선에서 국회의 386석 중 21석을 차지했다. 이 시기까지 오르반 빅토르는 중도 성향의 정치인으로 선전했지만 1994년 총선에서 20석에 그치는 부진을 보이자 당의 노선을 중도파 자유주의에서 좀 더 보수주의적인 노선으로 탈바꿈했으며 이로 인해 상당수의 중도파 당원들이 탈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후 1998년 총선에서는 피데스가 돌풍을 일으키며 148석을 차지하면서 원내 제1당이 되는 데 성공했다. 오르반 빅토르는 만 35세의 나이로 총리직에 오르게 된다. 오르반 정부는 적극적으로 서구화를 추구하면서 내부 경제적으로 연 4%씩 상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외부에서는 나토나 EU 가입 등에 성공하여 최고의 외교적 성과를 올렸지만 급속한 경제성장에 따른 빈부격차가 확대되었기에 하층민의 불만이 증가했고 이로 인해 치안 또한 악화되면서 내적으로 혼란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국유 기업을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정치 부패가 만연함으로 인해 국민들의 큰 실망을 안겼고 좌파 세력이 아직 강성한 헝가리 내에 우익 세력이 부상할 가능성이 낮아짐에 따라 다음 선거에서 중도좌파인 사회당-자유민주연합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당시 헝가리 정부는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강도높은 긴축을 지속했으나 2008년 상반기에 피데스당이 주도한 국민투표에서 대학의 부분적 유료화와 무상 의료 서비스의 부분적 유료화 조치를 철폐하는 국민투표에서 패배하면서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직후에 금융 위기가 닥치면서 IMF 구제금융을 받기도 했고, 중도 좌파 정권의 개혁이 계속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여론 조사에서 피데스의 지지율이 순식간에 상승하여 60%대를 넘나들게 되었다. 게다가 친서방 자유보수주의 성향이었던 오르반 빅토르의 정치 성향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을때가 사회당 2기 집권기였을때인데 이 시기를 기점으로 친서방 자유주의 노선에서 극우 성향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오르반은 2009년 연설에서 자유주의든 공산주의든 간에 엘리트들의 사상이라고 비난하는 연설을 하면서 그와 피데스당의 정치노선에 큰 변화가 있었음을 입증했다. 2010년 총선에서 피데스당은 긴축 대신 경제 성장을 내세우는 공약을 통해 기존 사회민주당 지지층을 대거 흡수하며 52.7% 득표율로 압승을 거두었고 오르반이 다시 총리가 됨에 따라 이 때부터 그의 4연임이 성공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이를 규탄하고 EU의 대러시아 제재를 적극 지지하며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를 타국에서 무기 지원 할 경우 헝가리 국경을 경유하는 부분에 대해 헝가리 영토와 국민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하기도 했다. 심지어 그는 난민을 거부하기로 악명이 높은 인물이었고 실제로 2016년 시리아 난민이 생겼을 때, 세르비아 국경에 긴 장벽을 쌓고 시리아 난민이 들어오면 적극 구타하는 등 인권 탄압을 했을 정도의 인물이었지만 이번에는 어려움에 빠진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조건 없이 받아주고 있다. 그러나 오르반은 젤렌스키 대통령의 무기 지원과 대러 에너지 제재 동참 요구를 거절하면서 EU 간에 형성된 대러 제재가 균열이 생길 위기에 놓였다. 특히 헝가리가 가스의 85%, 원유의 60% 이상을 러시아에서 수입하고 있다. 따라서 국가 차원에서 대러 제재는 거의 국가 경제를 파탄시킬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에 대러 에너지 제재 동참 요구를 거절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EU 제재에서 헝가리가 빠져 나가게 되면서 향후 대러 제재의 귀추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주목된다.
    • 칼럼
    • Nova Topos
    2024-07-07
  • 조지아 서부를 장악하고 있는 아자리야인들의 역사와 아자리야 자치공화국 - 下편
    사실상 조지아에게서 독립한 아자리야와 아바시제는 1992년 감사후르디아가 실각하고 대권을 이어받은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Eduard Shevardnadze)와 비교적 잘 지냈다. 셰바르드나제는 제1차 조지아 내전으로 얼룩진 국내에서 정식 대통령이 되는 1995년까지 약 3년 동안 서방과 러시아에서 중립 행보를 보였으며 내전은 러시아의 개입과 중재, 그리고 셰바르드나제 측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그러나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아는 사실상 독립해버렸고 이는 2008년의 남오세티야 전쟁의 불씨를 낳아버렸다. 이같은 상황을 목도한 아슬란 아바시제는 공식적으로 선포하지는 않았지만 독립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내전이 끝났어도 조지아는 독립해버린 3국으로 인해 또 다른 혼란에 직면하게 된다. 조지아에게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내전에서 셰바르드나제의 공식 군대로 활약한 마피아 군단이었다. 이들 마피아들 중 므헤드리오니(Mhedrioni)는 조지아인 뿐 아니라 러시아인, 터키인,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소수민족으로는 라즈인과 아자리야인의 상당수가 합류한 준 군사조직이었다. 재밌는 것은 이들 준 군사화된 깡패 무리들의 무기들이 어디서 흘러왔는지 모르지만 상당수가 미제 무기를 장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침 1991년에는 미국을 비롯한 다국적군이 이라크를 상대로 한 달여 동안 걸프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당시 미국의 무기고에 재고 떨이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조지아 내전을 연구하던 미헤일 아르바쉬빌리(Mikheil Arbashvili) 교수는 걸프전을 종결한 미군이 므헤드리오니(Mhedrioni)에 상당한 양의 무기를 제공하면서 내전을 부채질했고 초대 대통령인 감사후르디아에 대한 쿠데타를 조장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내전 당시, 러시아제 무기로 무장한 압하지야, 남오세티아 군대를 약체화된 조지아군은 이를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분쟁 지역에 상당수를 민병대와 준군사조직에 위임했는데 문제는 이를 지휘하는 자들이 모두 조지아 마피아와 연결된 부패한 인물들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므헤드리오니는 조지아 마피아의 두목이었던 자바 이오셀리아니(Jaba Ioseliani)가 설립했다. 여기에 많은 범죄자들이 다수 가입해 있었으며 앞서 언급한 것처럼 러시아인, 터키인,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소수민족으로는 라즈인과 아자리야인까지 다국적 깡패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약 1,000명의 정조직원과 10,000명의 준회원들이 있었으며 어디에서 입수되었는지 불분명한 미제 무기로 무장한 이들은 불법 휘발유 공급과 마약 거래, 강도, 보호비 갈취로 자금을 마련했다. 결국 이 깡패들로 구성된 준 군사조직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감사후르디아를 자살당하게 만들고 셰바르드나제는 대통령이 된다. 자바 이오셀리아니의 므헤드리오니는 석유 산업 이권을 얻었지만 해당 지역이 포티를 비롯한 흑해 연안 지역이었던데다 아지리야 국경까지 넘어 세력 판도를 넓히기까지 하니 아바시제는 이들과 전쟁을 시도했다. 그러자 자바 이오셀리아니의 므헤드리오니 같은 마피아 조직들이 조지아 정치권에서 위세를 부렸다. 하지만 대통령인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까지 보이자 이들을 숙청하기로 결심하고 바투미로 날아가 아바시제를 만난다. 아바시제와 화해하면서 조지아 마피아 일당을 함께 토벌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아자리야가 더 큰 자치권의 지위를 인정하고 아자리야에서 아바시제의 권력 유지를 허락했다. 그러나 아바시제가 조지아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는 것은 거부했다. 그러자 아바시제는 트빌리시의 조지아 의회에 신당 창당을 건의하면서 셰바르드나제의 조지아 시민 연합(Georgia Citizens' Coalition)과 연정을 요청했고 셰바르드나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하여 조지아 민주주의 재건 연합(Georgia Coalition for Democracy Reconstruction) 당이 창당된다. 그리고 감사후르디아 때와 다르게 여당의 세가 약한 상태였기에 이들은 서로가 연정했고 결국 1995년 말, 조지아 의회 선거에서도 절대다수의 여당이 된다. 그러나 셰바르드나제는 조지아 민주주의 재건 연합(Georgia Coalition for Democracy Reconstruction)와의 연정을 깨면서 아바시제와의 약속을 어겼고 2003년까지 약 8년 동안 독재정권을 이끌게 된다. 이어 셰바르드나제가 트빌리시 의회 청사에서 폭탄 테러를 당해 암살 위기를 겪게 되자 이를 마피아들의 테러로 몰아 이들을 숙청했고 때에 맞춰 아바시제는 아자리야 땅에서 마피아들을 축출해버렸다. 셰바르드나제에 대한 트빌리시 의회 청사에서의 폭탄 테러 암살 미수 사건은 정말로 마피아들이 그 같은 테러 행위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일부 조지아의 현대 역사가들은 셰바르드나제의 자작극을 의심하고 있다. 마피아들로부터 정치적 위협을 깨고 선제 타격하여 정적을 제거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셰바르드나제와의 관계 악화에도 아바시제가 창건한 조지아 민주주의 재건 연합(Georgia Coalition for Democracy Reconstruction)은 최대 30개 의석까지 확보하고 있었다. 이들은 트빌리시 중앙 당국에 대한 온건한 반대 세력이었지만 의석 수를 더 늘리면 언제든 아바시제를 조지아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할 수가 있다. 그러나 2003년 부정선거로 인해 장미 혁명(Revolution of Roses)이 발발했고 여기에 미헤일 사카슈빌리(Mikheil Saakashvili)가 등장하면서 아바시제와 조지아 민주주의 재건 연합(Georgia Coalition for Democracy Reconstruction)의 계획은 틀어지기 시작한다. 장미 혁명과 같은 색깔혁명이 발발하면서 2003년 11월 23년에, 아슬란 아바시제는 아자리야에 비상 태세를 발령했다. 이어 아바시제는 조지아 민주주의 재건 연합(Georgia Coalition for Democracy Reconstruction)의 추천으로 2004년 1월 4일 조지아 대통령 선거에 참여했다. 그러나 색깔혁명의 여파는 뒤집을 수 없었고 그는 미헤일 사카슈빌리에게 패배했다. 패배의 결과는 결국 사카슈빌리의 최후통첩으로 연결된다. 이는 모든 아자리야의 지도자에게 조지아 헌법에 따를 것과 군대의 해산을 명령한 것이다. 그러면서 아바시제를 마피아 및 셰바르드나제와 내통 및 각종 불법물 관련 밀매 혐의로 조지아 대법원에 기소했다. 그러자 아바시제는 조지아 군대가 침입을 준비한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아자리야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러면서 아자리야의 군대는 아자리야와 조지아의 각 지역들을 연결하는 다리들을 폭파하고 혹시나 모를 조지아 군의 진입을 차단했다. 이와 같은 아자리야 지역의 비상 사태는 같은 해, 5월 4일까지 이어지면서 타 조지아 지역에 사카슈빌리에 대한 반대 집회까지 독촉하는 등, 제2차 조지아 내전이 촉발될 위기에 몰린다. 그러나 이러한 계엄령은 오히려 아자리야 내에서 역풍을 맞았다. 바투미에서는 조지아와의 평화적 공존을 위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고 이는 아바시제의 권력 구도가 축소되는 촉매 역할을 하게 된다. 아자리야에서 전체적으로 수만 명이 아바시제의 사임을 요구하기 위해 바투미로 향하면서 아바시제의 권력은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다. 아자리야 전 지방의 시위대들이 중심 바투비에 입성한 5월 6일, 아바시제의 권력은 붕괴되었다. 이를 기회로 조지아의 특수부대가 바투미와 아바시제의 공관으로 진입하여 친 아바시제 단체들을 무장 해제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에 푸틴 대통령의 전갈을 받은 러시아 대사 이고리 이바노프(Игорь Иванов)와 밤새도록 대화했고 이바노프는 아바시제를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아바시제는 다음 날, 7일 아침 퇴진을 발표했다. 그리고 8일 새벽 아바시제는 모스크바로 망명하면서 제2차 조지아 내전의 위기는 겨우 무마되었다. 아바시제의 실각과 망명 이후, 바투미에서는 새로운 지방 선거가 발표된다. 자치공화국의 발족을 위해 20인의 가협정 의회가 구성되었으며 레반 바르샬로미제(Levan Barshalomize)가 가협정 의회의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아자리야 지역 의회들의 선거는 6월 20일에 열렸고 사카슈빌리 대통령의 지지를 받은 정당은 30석 중 28석을 획득하며 아자리야 지역 의회에서 압승을 거둔다. 나머지 2석은 사카슈빌리의 이전 협력자들인 공화당원들이 장악하면서 아바시제의 세력들은 완전히 축출되었다. 그리고 7월 20일, 아자리야 최고 의회는 레반 바르샬로미제를 자치 공화국 정부의 의장으로 임명하면서 아자리야 독립 공화국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아자리야 지역 의회와 조지아 중앙 정권, 아자리야인과 조지아인은 문화적, 종교적으로 달랐으며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2008년 남오세티아 전쟁 때는 아자리야인들이 러시아를 지지했다. 사카슈빌리가 실각할 때, 아자리야인들은 러시아 국가를 부르며 사카슈빌리의 퇴진을 축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지아 입장에서 바투미는 흑해와 같은 바다로 나갈 유일한 창구다. 바투미를 잃는다는 것은 조지아에게 있어 어머어마한 타격이다. 기본적으로 아자리야 자치공화국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적극적으로 러시아를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반대로 조지아 정부와 국민들은 친서방, 친우크라이나를 선택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조지아의 여당인 "조지아의 꿈"이 친러가 되면서 아자리야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조지아 동부와 아자리야인들의 사이도 그다지 좋지 않아 제3차 조지아 내전의 불씨가 서서히 피어 오르고 있는 중이다. 이같은 국내 문제로 인해 조지아는 다시 위기 일발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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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7-07
  • 2011년 그리스 정부의 유로존 탈퇴 및 디폴트 선언을 무기로 한 그리스 2차 구제 금융 요구 사건
    2011년 7월부터 그리스 정부와 유로그룹은 2차 구제금융 지원 논의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2011년 10월 유로그룹은 채무탕감과 1,300억 유로의 2차 구제금융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다. EU 정상들은 유럽 은행들을 비롯한 민간 채권자들과 10시간에 걸친 마라톤 협상 끝에 그리스 부채 탕감률을 50%로 올리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그리스가 갚아야 할 총 채무 3500억유로 중 민간부문 1000억유로가량이 줄어들게 됐다. 대신 민간 채권자들이 보유한 나머지 그리스 채권이 디폴트에 빠지지 않도록 EU는 300억유로의 보증을 제공한다. 또한 EU 정상들은 EFSF를 4400억유로에서 1조유로 수준으로 대폭 확대했다. 재정위기국이 채권을 발행할 때 EFSF가 발행금액의 20~30% 정도 보증을 서는 것과 EFSF 산하에 특수목적기구(SPV)를 설치해 IMF와 중국 등 국부펀드 자금을 끌어들이자는 방안이 제안되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에게도 전화를 걸어 EFSF에 대한 투자를 요청하기도 했다. 위기에 대비해 역내 은행들이 자본을 내년 6월 말까지 1060억유로 정도 늘리는 은행 자본 확충방안도 나왔다. 은행들이 스스로 자금을 조달해보고 여의치 않을 경우 해당국 정부가 지원해 주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마저도 어려울 경우 유럽재정안정기금인 EFSF가 돕기로 했다. 이와 함께 유로존과 IMF는 그리스의 재정위기 타개를 위해 그리스에 1000억 유로 규모의 추가 지원자금을 공급하기로 했다. 이날 사르코지 대통령은 그리스 민간 부채 중 50%를 탕감하며 올해 160%로 추정되는 그리스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비율을 2020년까지 120%로 낮출 수 있게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EU 정상들은 이탈리아가 의향서 제출을 통해 각종 개혁조치를 실행하겠다고 발표한 것에 대해 환영의 뜻을 밝히면서도 스스로 정한 시한과 목표를 지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번 합의에 따른 관련 규정 변경에는 최소 2~3개월이 소요된다. EFSF 확충 등 이번 합의 사항은 모든 유로존 국가 의회의 동의를 얻아야 한다. 2012년 3월까지 그리스 332억 유로, 이탈리아 1980억 유로, 스페인 840억 유로 등 국채 만기가 도래하게 된다. EFSF가 빨리 운용 가능한 기금 규모를 확충해야 하는 이유다. 결국에는 2011년 10월 EU가 부채의 50%를 탕감해주고 2차 금융 지원을 하기로 결정되었지만, 그리스 국민들은 EU의 수장인 독일의 메르켈 총리를 나치라 비난하는 등, 거세게 반발했다. 이는 금융 지원에 있어 필연적으로 따라 붙게 되는 긴축 요구 때문이다. 당시 데일리 메일에 따르면 그리스 시내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공공의 골칫거리'라는 문구와 더불어 과거 히틀러 정권을 연상시키는 나치 SS 친위대원의 옷차림을 한 포스터가 등장했다. 메르켈 총리는 EU를 상징하는 별과 나치 상징 문양이 함께 그려진 완장도 차고 있다. 그리스 현지 신문 만평도 독일 관리들이 나치 복장을 하거나 긴축정책에 동의한 그리스 정부 관리들이 나치식 인사를 하는 모습으로 그렸다. 시민들은 정부의 임금과 연금 삭감, 증세 등 계속된 긴축정책에 반발하며 연일 시위를 벌이고 있다. 화가 난 일부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고대 유적지를 방문한 독일 관광객에게 적대적으로 대할 정도다. 그리스 언론은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 독일 정부의 간섭이 약 65년 전 히틀러 정권이 그리스에 악행을 저질렀던 경험을 연상시키며 독일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고 분석했다. 우여곡절 끝에 합의된 2차 그리스 구제금융 패키지에 대해 그리스 국민 과반수가 되려 반대 의사를 표했다. 패키지에 포함된 그리스 국채 상각(헤어컷) 프로그램이 자국에 이득이 되지 않을 것이란 이유에서다. 그리스인의 58%는 이 긴축안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고 있으며 대통령과 관료들은 반역자라고 불리고 있다고 한다. 유럽의 지원에 대해서도 50.1%는 필요하다고 답했지만 48.8%는 자주권 훼손을 우려하는 등 그리스 국민들 사이에서는 외부 지원에 대한 의견이 크게 엇갈리고 있다. 다만 그리스가 유로존(유로 사용 17개국)에 남길 원한다고 답한 이는 72.5%에 달했다. 이에 따른 증세불복 시민운동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이 운동 일부 공무원까지 참가하고 있다. 이에 대한 시민 운동의 시작은 그리스 제2의 도시 테살로니키에서 열린 국경일 기념행사의 거리행진에서 드러났다. 매년 주요 정치인들이 참여하는 이 행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0년 이탈리아군의 침공을 저지한 것을 기념해 열리는 이벤트다. 그러나 2011년의 행사는 시위대의 반발로 차질을 빚었다. 시위대는 낮부터 행진을 막고 카를로스 파풀리아스 대통령, 파노스 베글리티스 국방장관 등을 향해 “반역자”라고 외쳤다. 10월 26일에도 베글리티스 장관과 일부 국회의원들은 이 지역 한 교회를 방문했다가 호된 욕설을 들어야만 했다. EU 정상회의가 10월 27일 내놓은 그리스 채권 손실률 상향 등 위기 해법에도 비판은 더 커졌다. 그리스의 지방 자치 단체들도 반발했다. 주민 수가 7만 명인 아테네 광역도의 네아 이오니아 구에서는 전기 요금 고지서에 함께 부과된 신설 재산세를 내지 말도록 촉구했다. 당시 이라클리스 고트시스 구청장은 신설된 세금이 불법이라고 생각한다. 본질적으로는 구민들이 세금 낼 돈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로 심각했다. 재정난으로 인한 국가부도 위기를 타개하려는 정부의 증세정책에 반발한 그리스 국민의 불복종 움직임이 산발적이지만 표면화되고 있는 것이다. 증세에 대한 거부감이 확산되면서 일부 지방 공무원들마저 증세 거부운동에 가담하고 나설 정도였다. 앞서 언급한 네아 이오니아구 의회도 웹사이트에 세금은 내지 않고 전기요금만 내는 방법을 공지하면서 증세 거부를 부추겼다. 물론 이런 움직임은 네아 이오니아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부 변호사들과 노조, 사회운동가들도 정부의 신설 세금 징수와 수만 명의 공무원을 급료 일부만 지급하면서 정직시키는 계획을 좌절시키기 위해 운동에 가담하고 있다. 이로 인해 정부기관 건물들이 점거되는가 하면 파업 중인 노조원들의 복귀를 지시하는 긴급 통지문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고 국영기업들은 일시휴직 대상이 될 수 있는 공무원 명단 제출을 거부했다. 이와 같은 거부운동은 쓰레기 수거 작업원, 제빵사, 택시운전사, 치과의사, 항공관제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산발적인 파업이 계속되는 가운데 확산되었다. 당시 그리스 국민들은 정부의 재정 지출 삭감과 이로인한 가계소득 감소, 16%를 넘어선 실업률로 가계의 지출 여력이 한계에 도달했다. 그리스 국민들의 분노를 자극한 것은 특히 신설된 재산세였다. 2011년 9월 발표된 이 재산세는 올해 말까지 20억 유로를 징수할 것이 계획되어 있다. 그리스 정부는 이 세금을 쉽게 걷기 위해 전기 요금 고지서에 포함시켜 함께 부과했다. 세금을 안 내면 단전될 수 있다는 경고가 포함된 셈이다. 이와 같은 정부의 의도에 국영 전력회사 근로자들까지 분노하고 나섰다. 이들은 단전을 막겠다고 공언하고 단전된 경우에도 노인이나 실업자 등 취약계층에게는 다시 전기 공급을 재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들은 고지서 인쇄를 막기 위해 관련부서를 점거에까지 나서기도 했다. 변호사들도 가세해 아테네 변호사협회는 이번주 이 법의 폐기를 당국에 요구했다. 2011년 11월에 들어서자마자 그리스 정부는 유로존 탈퇴 및 디폴트 선언에 대한 국민투표를 진행하겠다고 나섰다. 그리스가 EU 2차 구제금융안에 대한 국민투표에 유로존 탈퇴안도 포함시키기로 결정했다. 사실상 유로존 탈퇴 여부까지 고려하고 있다는 강경한 의지로 풀이된다. 파판드레우 3새 총리는 11월 2일 EU의 구제금융에 대한 국민투표와 관련하여 그리스가 EU와 유로존 회원국임을 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파판드레우 3세 총리는 각의에서 국민투표의 딜레마는 구제금융과 유로, 유럽에 대해 찬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라며, 현 내각의 불신임 여부와 관련 없다라고 했다. 그리스가 갑자기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치킨 게임에 나서게 된 셈이다. 이에 따라 주가와 유로화 가치가 급락하는 등 금융시장이 다시 불안에 빠지고 있었다. 유로존 국가들이 철회를 요구하고 있지만 다시 한 번 국민투표 강행 의지를 표출한 것이다. 그리스 총리 관저의 툴카스 대변인도 신임투표에서 다시 한 번 승리를 거둬 정부의 계획을 밀고 나갈 것이라며 정부는 국가를 구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에게서 뒤돌아서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특히 4일 일 밤 의회에서 파판드레우 총리에 대한 신임투표를 앞두고 있었다. 여당에서도 반발하는 1명이 탈당해 여당인 범 그리스 사회주의 운동 당의 의석은 과반에서 2석 많은 152석으로 떨어졌다. 제1 야당인 신민주주의 당의 안토니오 사마라스 당수는 조기총선을 요구하면서 총리가 자신을 위해 그리스의 미래와 유럽 내 그리스의 입지를 위험에 빠뜨리는 왜곡된 딜레마를 안겼다고 비난하는 등 야당의 반발도 거세지고 있다. 이와 같은 그리스의 도박에 대해 EU 지도부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유로그룹 의장인 장 클로드 융커 룩셈부르크 총리는 그리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리스가 국민투표를 통해 구제금융안을 거부할 경우 국가부도 상황에 놓일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이어 이미 불안할 대로 불안해진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특히 로버트 졸릭 세계은행 총재는 그리스의 국민투표 결정은 재정위기를 해소하려는 유럽의 노력에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헤르만 반 롬푀이 EU 정상회의 상임의장과 호세 마누엘 바호주 EU 집행위원장도 이날 공동 성명을 통해 그리스가 유로존과 국제사회에 진 의무를 존중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반발이 거센 상황에서 프랑스와 독일, 그리스 정상들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앞서 긴급 회동했다. 이번 회담은 그리스의 국민투표 시행에 따른 금융시장 혼란 등에 대처하기 위한 것으로 IMF 총재, EU 관계자, 그리스 대표 등도 배석한다. 회의에서는 유로존 해법의 열쇠를 쥐고 있는 독일과 프랑스 정상이 그리스의 국민 투표안 철회를 강하게 압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독일과 프랑스 정상은 이날 발표한 성명에서 EU 정상회의 결정을 수행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수적이라면서 그리스 부채를 줄이는 EU 합의안 실행을 촉구했다. 그러나 그리스 국민 대다수의 여론은 디폴트 선언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렇게 될 경우 유로존은 엄청난 위기에 휩싸일 공산이 커지고 그리스는 말 그대로 파르테논 신전 같은 돌덩어리를 제외고는 국내외 자산이 모두 압류된다. 다만 그리스 국내 자산은 그리스의 사법 당국이 허가해야 해외 채권자들이 처분할 수 있다. 당시의 유럽 증시는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운 상황에 있으며 미국이나 아시아 증시의 하락세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와 같은 돌발 상황으로 인해 전 세계 주식이나 금융 쪽에 관련된 투자자나 종사자는 그리스에 대한 원망이 극에 달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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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6
  • 조지아 서부를 장악하고 있는 아자리야인들의 역사와 아자리야 자치공화국 - 中편
    아르메니아 행정부는 1920년 7월 20일에 아자리야 지역을 조지아에게 양도했다. 그러나 당시 볼셰비키와 러시아의 요원들이 조지아에 들어와 주요 행정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일련의 사보타주와 테러 결사대를 조직하면서 오스만 제국과 관련 있는 인사들과 아르메니아 소속의 주로 소비에트에 대한 반감을 가진 자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민주주의 조지아 집행부는 소비에트 통치 하에 있었지만 아자리야인들과 자치주를 통제하기 어려웠다. 이들은 아자리야 자치주에게 소비에트로 합류를 종용했다.조지아를 소비에트가 장악하고 있는 기간 동안에, 오스만 제국의 군대가 터키 동부 지역의 아르메나아 군을 밀어내면서 1921년 3월 11일 바투미에 출현했고 15일에는 볼셰비키 조지아 군을 이끌도 기오르기 마즈냐슈빌리(Giorgi Maznyashvili) 장군이 아자리야의 군대를 이끌고 오스만 군과 3일 동안 교전을 벌였다. 바투미 지역을 잘 알고 있는 아지리야 군대는 오스만 군과 시가전을 벌이며 중심 시가지들을 완전히 장악했다. 결국 오스만 군은 흑해 해안대를 따라 사르프로 철수했다. 그리고 바투미에서는 소비에트의 직접적인 통치가 19일에 공표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19일에 소비에트-오스만 제국이 카르스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지아 서부 지역은 일명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일명 그루지야 SSR)의 관할에 들어갔고 아자리야인이 장악한 바투미도 그루지아 SSR의 일부 지역으로 합병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지도부에서는 아자리야와 기타 조지아 지역의 종교가 달라 아자리야 지역에 자치권을 줘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때 아자리야에 자치권을 내주고 조지아에게서 독립하게 한 인물이 아이러니하게도 조지아가 고향인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당시에 민족 인민위원이었고 실제로 민족 문제 관련하여 일을 많이 했던 때였다. 스탈린은 조지아 내에서 아자리야인들에 대해 특별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고 이에 상당수의 아자리야 자치정부의 인사들이 스탈린의 측근이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스탈린은 소수민족 출신의 공산주의자들을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포섭할 수 있었으며 이는 공산당의 조직 기강을 내세우기 위해서 신설된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 서기장에 선출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스탈린과 소비에트 정부는 1921년 7월 16일에 아자리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을 공표하면서 조지아와 드디어 완전히 분리시켰다. 그리고 기존의 조지아는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변모한다. 이로 인해 아자리야는 현재까지도 친러 성향이 강한 지역으로 손꼽히고 있다. 한편 국운이 완전히 쇠진한 오스만 제국은 아자리야의 혼혈 인구에서 무슬림들의 이익을 위해 아자리야에게 자치권이 부여되는 조건으로 현 터키 영내 아자리야 지역을 볼셰비키에게 양도했다. . 그와 같은 영토 양도는 소련으로 하여금 모스크바에서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흑해 항구 도시인 바투미를 자카프카스에게 완전하게 통제권이 주어지는 것을 방지하려는 목적이 있었고, 오스만 제국에서 생활하는 조지아계 무슬림들에게 공산주의 성향을 북돋아 오스만 영내에서 볼셰비키의 지령을 받아 각종 사보타주와 첩보활동을 재개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 통치 하에,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교도 공산주의 무신론 사상에 대척된다 여겨 철저히 억제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1929년 4월, 아자리야와 카프카스 산악 무슬림 마을에 거주하는 라즈인들은 강제적인 집산주의화와 종교 박해에 대항하여 여러차례 봉기했다. 이에 소련의 부대들이 동원되어 반란 진압에 나섰고 반란은 곧바로 평정되었다. 그러자 수천명의 아자리야인들은 자국 공화국 밖으로 추방되거나 소련 영내로 강제 이주되어 산산히 흩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때 메흐메트 아바시제(Мехмет Абашидзе)는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지만 스탈린의 사후, 카자흐스탄의 아자리야 공동체들의 지도자 가문으로 아바시제(Абашидзе) 가문이 선정되었다. 이후 흐루시초프 당시 해빙기를 맞이하면서 수많은 민족들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때, 아바시제(Абашидзе) 가문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고향인 조지아 서부 지역으로 돌아온다. 당시 메흐메트 아바시제가 1937년 스탈린의 명령으로 총살된 이후, 지도층이 거의 와해된 상황이었는데 메흐메트 아바시제의 아들인 아슬란 아바시제(Aslan Abashidze)가 아자리야 공동체를 이끌게 되었다. 그는 바투미 대학에서 역사와 철학 학위를, 트빌리시 주립 대학에서 경제학 학위를 취득하면서 소비에트 체제에서 아자리야인들의 희망이 되어갔다. 이후 소련이 해체되면서 아자리야는 형식적으로 조지아에 속했으나 사실상 독립국이나 다름없었던 미승인국가가 되어 있었다. 이에 조지아에서 첫 번째 민주주의 의회가 생성되고 대통령 선거가 치뤄지며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Zviad Gamsakhurdia)가 조지아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감사후르디아는 당선되자마자 아자리야 공화국 지도자인 아슬란 아바시제(Aslan Abashidze)를 초청해 오찬을 함께 했다 한다. 이 때 감사후르디아가 아바시제에게 바랬던 것은 지역 자치의 지위를 포기하여 조지아의 영향 하에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1991년 3월 15일에 감사후르디아는 아바시제를 아자리야 최고 의회 의장으로 임명했다. 이어 감사후르디아는 손수 바투미로 날아가 아바시제를 만나 아자리야 자치권의 폐지를 제안했다. 이에 아바시제는 아바시제는 항변하여 자치권 폐지를 거부했고 감사후르디아는 트빌리시로 돌아가 아자리야인을 특히 지역 무슬림이라 부르면서 이들에 대한 탄압과 강제 진압하기 위해 전군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중앙의 조지아 당국과의 긴장이 형성되며 조지아 내전으로 촉발될 가능성이 커졌다. 감사후르디아는 조지아 민족에게 있어 좋은 지도자였을지 몰라도 압하지야, 남오세티야와 아자리야, 라즈인들에게 있어 그는 흉폭한 폭군이었다. 압하지야, 남오세티야는 감사후르디아의 조치에 즉각 반발했고 당시 체첸과 전쟁에 여념이 없던 러시아를 이 분쟁에 끌어들였다. 특히 아자리야의 아슬란 아바시제는 직접 모스크바로 날아가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을 만났다. 이 때 모스크바에서 옐친의 지원을 확약받고 러시아의 도움을 받게 되니 당시 카바르디노-발카르와 쿠반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군 700여 명이 바투미에 입항하면서 아자리야의 민병대와 합류했다. 1991년 4월 22일, 아바시제 민병대들은 조지아의 공무원들과 친조지아 의회 의원들의 즉각적인 사퇴를 요구하며 바투미 의회로 쇄도했다. 이들은 친조지아 세력들과 관료들을 아자리야 지역에서 추방했으며 감사후르디아의 조지아 군을 격파해 아자리야에서 몰아냈다. 이로써 아바시제는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아자리야를 독립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지아는 당시 심각한 내부 분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수도인 트빌리시에서는 오세티야와 압하지야의 민족 분리 운동으로 인해 소요 사태가 심각했다. 1991년 1월 5일 조지아의 국가 요인 경호대는 남오세티야의 수도 츠힌발리로 진입해서 도시를 포위하면서 중대한 위기 상황을 맞이한다. 그러자 트빌리시에서는 오세티야인과 압하지아인들의 분리 독립 시위가 발생했고 감사후르디아는 여기에 발포를 허가하자 이 시위는 폭동으로 변질되었다. 중요한 국가의 준군사 세력인 조지아 국가 요인 경비대는 친, 반 감사쿠르디아로 분열되었으며 이는 심각한 조지아의 내전(Georgian Civil War, 1991~1993)으로 촉발된다. 상황이 이쯤되니 감사후르디아는 아자리야의 사건들에 간섭할 수 없었다. 게다가 최고 소비에트 의장 대리이며 아자리야에서 조지아 정부의 최고위층 지지자인 보다르 임나제(Bodar Imnaze)가 살해됐다. 아바시제 측의 주장에 의하면, 임나제의 손에 총이 들려있었고 아바시제의 집무실에서 테러를 시도하다가 경호원의 총에 맞았다고 했다. 이를 트빌리시의 대중매체들은 임나제의 사망이 사유불명으로 간략하게 보도했을 뿐이다. 그러나 내부의 주장들에 의하면 임나제가 집무실에서 아바시제와 논쟁하던 중에 아바시제가 격분해 그를 사살했다고 한다. 결국 이는 아자리야가 조지아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독립했음 시사하게 되는 사건임이 틀림없었다. 아자리야는 바투미 항구를 끼고 조지아의 대외무역을 사실상 독점하는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조지아 내전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조지아는 아자리야의 사실상 독립을 막을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아자리야는 표면상으로는 조지아에 속해있었지만 사실상 조지아의 지배를 전혀 받지않는 독립적인 위치에 있게 되었다. 아자리야 공화국은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1997년 10월 24일에, 아자리야는 유럽 지역 의회(AER)의 완전환 회원이 되면서 정식 국가로 서서히 발돋움하기 시작한다. 아자리야 지도부는 조지아 중앙 당국의 예산 확충을 위해 세금 내는 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아바시제에게는 문화, 바투비 해항, 다른 전략적인 대상들에 전체적인 통제권을 갖고 있었고 게다가 그 배후에는 러시아가 있었기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바시제는 자신을 위한 무장 부대를 만들어 아자리야 국방부를 따로 설립했고 조지아 국방부 소속의 바투미 해군기지 25번째 여단의 모든 통제권을 장악했다. 이에 조지아 정부는 바투미 기지의 러시아 군대의 부대가 아바시제의 독재를 위한 세력 기반이라 주장했고 아바시제의 친러시아 행보를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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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4
  • 조지아 내 내제된 사회 갈등과 양극화
    최근 조지아 의회가 언론과 시민 사회 억압에 대한 국내, 국외의 우려와 반발에도 ‘외국 대리인 법안’을 최종적으로 통과시켰다. 반러 감정을 가진 시민들은 대리인 법안 통과에 반발해 대규모 시위를 열었고, 이에 미국 등 국제사회는 여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제재를 가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법안에 따르면 해외에서 전체 예산의 20% 이상 자금 지원을 받는 언론 매체나 비정부기구인 NGO 단체들은 외국의 영향을 받는 대행기관으로 등록해야 한다. 이에 등록하지 않은 단체나 개인은 벌금과 최대 5년 이하 징역에 처해질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조지아라는 나라 자체가 다수의 NGO들이 결집해 세워진 국가이기 때문이다. 조지아의 언론 및 NGO 시민 사회 단체의 상당수는 미국과 유럽 등의 자금 지원을 받는 단체들이 많다. 이에 시민단체가 조지아 정부의 엄격한 규제에 노출되어 민주주의가 훼손될 것을 우려하여 강하게 반대해왔다. 특히 이와 같은 법안은 2012년에 제정되어 언론과 NGO, 반정부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엄격하게 규제된 러시아의 외국 대리인 법과 비슷하다 여겨 이를 ‘러시아법’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와 러시아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럼에도 이 법 자체가 러시아와 비슷하다 하여 '러시아 법'이라 이름 짓고 이를 비난한 것이다. 특히 조지아의 야당 의원들은 조지아를 친러시아 국가로 만들려는 시도라고 비판하고 있다. 조지아는 그 동안 EU와 나토 가입을 추진해왔으나, 친서방 대 친러시아 노선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과 사회적 갈등이 지속되어 왔다. 여당인 "조지아의 꿈" 정당이 집권하기 이전까지 조지아는 친서방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미국과 나토, 그리고 EU의 영향력을 러시아 국경과 인접된 남부 카프카스 지역으로 확장시켰다. 이에 안보 위협을 느낀 러시아가 남부 카프카스 지역의 갈등 문제에 개입하면서 자신들의 세력권을 구축했다. 러시아 입장에서 소련이 해체된 이후, 카프카스 지역의 저항 세력들은 큰 문제가 되었었기 때문이다. 나토와 EU가 카프카스에 진출하면 90년대 체첸 전쟁과 같은 내전이 또 다시 촉발될 가능성이 높았고 그로 인해 러시아의 안보가 매우 위태로울 수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의 지정학적 전략은 조지아 북부지역인 남오세티아와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 및 돈바스 일대에 대한 통제가 진행되면서 어느 정도 일단락되긴 했다. 조지아와 우크라이나는 지난 2017년 7월 18일 페트로 포로센코(Петр Порошенко)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조지아를 공식 방문함을 계기로 양국 관계를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한 바 있다. 그러나 기오르기 크비리카슈빌리(Giorgi Kvirikashvili) 총리 이후, 이라클리 가리바슈빌리(Irakli Garibashvili)가 2021년에 정권을 이양 받은 이후, 갑작스럽게 친러성향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 때 가리바슈빌리를 지원하고 지지한 세력은 이미 조지아에서 상당수의 재력을 확보한 친러계열의 유태계와 친러 성향의 지지자들, 그리고 바투미를 기반으로한 아자리야계 조지아인들이었다. 이들은 친러 성향을 갖고 있으며 특히 아자리야인들은 바투미를 중심으로 자치공화국을 형성하고 있을 정도로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이 아자리야인들은 조지아계 무슬림들을 대표하는 민족으로 오스만 제국 지배 시기인 16세기부터 17세기 무렵 사이 대부분 이슬람교 하나피파로 개종한 자들이다. 20세기 초 아제르바이잔 바쿠의 유전이 개발되고 생산될 석유를 운반할 송유시설 및 철도가 바투미를 거쳐 건설되면서 아자리야 지역의 중요성이 증대되었다. 게다가 흑해 연안을 쥐고 있는 아자리야인들의 영향력은 무시 못할 수준인 것이 조지아의 유일한 항구이자 바다로의 출구가 아자리야 자치공화국의 수도인 바투미 때문이다. 그래서 조지아의 사회적 갈등은 친러, 반러의 갈등이 곧 동부와 서부라는 지역적 갈등이 내포되어 있다. 조지아 서부는 아자리야인들을 중심으로 압하지야까지 흑해 일대가 연결되어 있고 아자리야인과 압하지야인들은 상호 연대까지 하고 있다. 반면 조지아 동부 지역은 수도인 트빌리시를 중심으로 반러시아의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사진에 나와 있는 온갖 욕설의 러시아 비난과 푸틴에 대한 비난 등의 그레피티가 쓰여 있는 것은 반러 성향의 시민들의 목소리, 그리고 이를 독려하는 친우크라이나 성향의 시민 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난민들, 이어 우크라이나 네오나치인 아조프 연대와 연합한 조지아의 네오나치들이 중심이 되고 있다. 이들은 나치 독일의 제2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의 깃발과 유사한 아조프 연대의 깃발 표식을 그레피티로 새겨 놓고 대놓고 나치와 연대하고 있음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들은 대놓고 서부 지역의 아자리야인과 친러 성향을 조지아인들을 상대로 테러를 저질렀지만 친러 성향의 조지아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총선에서 이라클리 가리바슈빌리(Irakli Garibashvili)를 당선시키면서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리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인 2022년 2월 25일 이라클리 가리바쉬빌리(Irakli Garibashvili) 조지아 총리는 조지아가 서방의 대(對)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가리비쉬빌리 총리는 2023년 5월 24일 카타르 경제 포럼(Qatar Economic Forum)에서 이와 같은 조지아 정부의 입장을 재확인하게 된다. 이어 2023년 8월 23일 러시아 국가안보위원회 부의장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Дмитрий Медведев)는 조지아가 나토 가입을 추진한다면 러시아는 조지아 내 미승인국인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South Ossetia)를 합병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10월 5일에는 아슬란 브자니아(Аслан Бжания) 압하지야 대통령이 러시아와 압하지야의 방어 역량 증대를 목적으로 압하지야 영토 내에 해군 기지를 건설한다는 내용의 합의서에 서명했다. 이후 우크라이나 정부 2023년 7월 5일 재임 당시 권력 남용 혐의로 조지아에 수감 중인 전 조지아 대통령이자 우크라이나 오데사(Odesa) 주지사인 미헤일 사카슈빌리(Mikheil Saakashvili)의 건강 상태가 악화된 것을 두고 인권 탄압이라 비판하면서 우크라이나와의 관계도 멀어지게 되었다. 결국 친러어와 반러의 단순한 대립구도가 지역 대립, 민족 대립으로까지 촉발되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다. 조지아 서부 지역에는 아자리야인 말고도 라즈(Laz)인이 살고 있다. 이들 또한 아자리야인과 같은 무슬림들이고 친러 성향을 갖고 있다. 게다가 이들이 터키에 살고 있으면 조지아계 터키인이고 조지아에 살고 있으면 터키계 조지아인이라 볼 수 있다. 현 터키 대통령인 레제프 에르도안이 라즈인 혈통으로 조지아계 터키인이다. 실제로 에르도안은 인터뷰로 자신의 가문이 조상대에 조지아 바투미에서 터키 리제로 건너온 조지아인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 영향으로 인해 라즈인들은 터키 정부의 상당한 지원까지 받고 있다. 라즈인과 아자리야인으로 대표되는 조지아 서부인들은 리버럴적이 성격을 갖고 있는 조지아 동부 정교회인들과 문화적 차이도 크다. 바투미를 중심으로 한 아자리야 자치공화국도 무슬림과 정교회라는 종교적 차이 때문에 인정해준 것이다. 이처럼 조지아에는 민족계파만 해도 94개가 자리 잡고 있는 나라다. 대한민국의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합친 크기에 불과한 작은 나라지만 이 작은 나라에 90개가 넘는 민족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민족 간의 통합은 조지아의 또 다른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어쩌고 보면 무슬림과 정교회, 유태교까지 이어지는 종교적 대립도 한 몫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 입장에서 조지아를 굳이 군사적으로 공격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지아가 반러 성향의 인물이 총리로 당선되어 반러 세력이 세력의 주동이 된다면 바투미를 중심으로 아자리야 자치공화국을 정식 독립국가로 승인하면 된다. 러시아가 아자리야와 라즈인을 지원하고 조지아 동부의 반러 세력이 라즈인을 학대한다면 터키가 이 문제에 개입할 여지가 생기게 된다. 러시아 하나 막는 것도 버거운데 터키마저 개입을 한다면 조지아는 공중분해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앞서 말한 것처럼 조지아의 사회 갈등은 곧 친러 vs 반러, 동부 vs 서부의 지역갈등, 이슬람 vs 정교 & 유태의 종교갈등, 아자리야 & 라즈 vs 조지아의 민족갈등까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 미국과 집단서방이 장미혁명처럼 색깔혁명을 조장한다면 우크라이나와는 전혀 다른 제2차 조지아 내전이 발발할 가능성이 크다. 2023년 9월 18일 전(前) 조지아 내무부 차관으로 현재 우크라이나군 SBU 부국장인 기오르기 로르키파니제(Giorgi Lorkipanidze) 등이 조지아 내에서 반정부 시위를 조직, 현 정부를 전복하려는 계획이 탄로나면서 제2차 조지아 내전은 언제든 발생 가능한 상황에 있다. 그리고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사뭇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여진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도 연결되어 있기에, 조지아 내 사회갈등을 유심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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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4
  • 라틴아메리카에서 포클랜드 섬만큼 영토 분쟁이 치열한 섬 사우스조지아(South Georgia) & 사우스샌드위치(South Sandwich) 제도
    라틴아메리카에서 유럽과 영토 분쟁 지역은 영국과 아르헨티나 가 맞서고 있는 포클랜드 제도이다. 그러나 포클랜드 제도 못지 않게 대립이 첨예한 곳이 있다. 그곳은 남대서양에 위치한 사우스조지아 섬과 사우스조지아 동쪽의 작은 섬들인 사우스샌드위치 제도이다. 이 섬들은 현재 영국의 해외 영토이자 속령으로 이 섬들은 남대서양 본 바다와 스코샤 해의 경계가 되고 사우스샌드위치 제도 남쪽은 웨델 해가 된다. 사우스조지아 섬의 면적은 3,756㎢ 정도고 섬의 최고봉인 파제 산의 높이는 거의 3,000m에 가까울 정도로 높다. 사우스조지아 섬의 산악 지대는 빙하로 덮여 있고 사우스샌드위치 제도에는 활화산이 상당수 존재하고 있다. 사우스샌드위치 제도는 무인도이지만 사우스조지아 섬에는 현재 주민이 살고 있다. 이 섬들은 영국이 실효 지배되고 있는 섬들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다. 남극을 제외하면 지구상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지역이라 볼 수 있다. 이 섬들은 모두 남극 수렴선 남쪽에 위치해 있다. 수렴선 남쪽이 일반적으로는 남극 권역으로 간주되고 있다. 남극의 차가운 바닷물과 북쪽의 따뜻한 바닷물이 경계를 이루는 선이 바로 수렴선인데 한 때 같은 행정 구역으로 묶여졌던 근처의 포클랜드 제도의 경우, 위도는 비슷하나 지형의 영향으로 남극 수렴선 북쪽에 있다. 특히 사우스조지아 섬은 수렴선 남쪽에 위치한 육지들 가운데는 가장 먼저 발견된 섬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1502년 남대서양을 항해하던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가 목격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베스푸치의 항해일지 등을 분석한 결과 베스푸치가 이 섬을 목격했을 가능성은 부정되었다. 1675년에 런던의 상인 안토니오 라 데 로치(Antonio La De Rochi)가 항해 중에 이 섬을 발견한 것으로 여겨지고 1775년 영국의 제임스 쿡 탐험대가 남극을 탐사하는 도중 사우스조지아 섬에 상륙하여 영국령임을 선언하고 당시 영국의 왕이었던 조지 3세의 이름을 차용하여 조지아 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우스조지아 남동쪽에 위치한 사우스샌드위치 열도 가운데 남쪽 8개의 섬들은 역시 1775년에 제임스 쿡이 발견했고 북쪽 3개의 섬들은 러시아의 탐험가 파비안 고틀리프 폰 벨링스하우젠(Фаддей Фаддеевич Беллинсгаузен)이 1819년에 발견했다. 그러다가 1904년 카를 안톤 라르센(Carl Anton Larsen, 1860~1924)이라는 탐험가 겸 포경업자가 이곳에 포경을 위한 시설을 만들고 첫 정착이 시작되면서 그리트비켄(Gritvican)이 만들어졌다. 참고로 1913년 10월 8일에 남극에서 최초로 탄생한 인물로 알려진 솔베이 군비에르그 야콥센(Solveig Gunbjørg Jacobsen, 1913~1996)이라는 인물이 이 섬에서 태어났다. 야콥센은 노르웨이와 영국 이민자들을 위한 교회도 세웠는데 영국의 유명한 탐험가인 어니스트 섀클턴(Ernest Shackleton, 1874~1922)도 이곳 교회에 묻혀 있다. 섀클턴은 남극을 탐험하는 도중 사우스조지아 섬에 상륙하고 곧바로 구조선을 수배했지만, 세 차례나 이어진 시도에도 불구하고 엘리펀트 섬에 상륙하지는 못했다. 남반구는 이 시기가 한겨울이었고, 남빙양의 얼음과 풍랑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첫 번째 구조선은 얼음에 막혀 되돌아왔고, 두 번째 구조선은 심하게 망가졌으며, 세 번째 구조선은 침몰 직전까지 가고 말았다. 영국 역시 전쟁 중이라 배를 구하기가 힘들었다. 이 과정에서 무려 4개월의 시간이 흘러가고 말았고, 극한의 상황에서도 침착했던 섀클턴은 건강이 매우 나빠졌다. 결국 섀클턴은 심근경색으로 사망했고 사우스조지아 섬에 묻혔다. 이후 두 제도는 영국이 장악하게 되었고 포클랜드 제도와 하나로 묶여 관리되어 왔지만, 1985년에 별도의 속령(Dependent Territory)이 되었다. 현재는 용어가 바뀌어 영국의 해외 영토(Overseas Territory)로 구분되어 있다. 한 때는 고래 잡는 계절이면 인구가 1,000명을 넘어가기도 했지만 포경 산업이 쇠퇴하면서 인구가 크게 줄어들었고 현재는 공무원이나 남극 관련 연구원 등만이 남아 인구수는 30여명 정도 존재한다. 이곳은 현재 영국의 해외 영토지만, 지리상으로 가장 가까운 나라는 아르헨티나이다. 영국과 아르헨티나는 20세기 초부터 지금까지 이 제도를 두고 영유권 다툼을 벌여왔다.1908년 영국 정부는 사우스조지아와 사우스샌드위치 제도를 합병해 근방 포클랜드 제도로 편입시켰으며 당시 영국은 아르헨티나와 칠레 정부에 서한을 보내 이와 같은 사실을 알렸으나 두 정부는 별다른 항의를 표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1927년 사우스조지아 섬, 1938년 사우스샌드위치 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1904년 노르웨이 포경업자들이 아르헨티나 본토에 포경회사 ’콤파베라 아르헨티나 데 페스카(CAP)’를 세운 뒤 사우스조지아에 처음으로 정착지를 설립하고 영업을 한 전력, 그리고 1905년 아르헨티나 정부가 기상 관측소를 세운 사실이 그 근거로 제시되었다. 섬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영국인이지만, 이 섬에 최초로 거주한 사람은 아르헨티나인이라는 주장인 것이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영국과 법적 분쟁으로까지 번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1940~50년대에 들어 이 섬을 둘러싼 분쟁은 네 차례나 국제사법재판소(ICJ) 문턱까지 갔지만 재판 회부에는 실패했다. 아르헨티나의 반대 때문이었다. 양국이 분쟁을 벌이는 이유는 결국 해양 자원 때문이었다. 인근 해상에 매장되어 있는 석유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이 제도가 남극 대륙으로 향하는 전진 기지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도 분쟁의 또 다른 이유이다. 현재 사우스조지아 섬에는 영국의 남극 해양 기지가 세워져 있다. 물론 양국의 영유권 분쟁은 1980년대 포클랜드 전쟁에 휘말리며 무력 충돌로까지 이어졌다. 1976년 아르헨티나 정부가 사우스샌드위치 제도에 군대를 파견한 데 이어 1982년 4월 아르헨티나가 영국령 포클랜드를 무력으로 점령하자 양국은 교전을 개시했다. 75일간의 전쟁 끝에 6월 14일 아르헨티나의 항복으로 전쟁은 종결되었지만 아르헨티나는 아직도 영국에게 패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양국의 분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현재까지 합의를 보지 못한 상황이다. 다만 국제사회에서는 이 제도들을 영국의 영유권으로 더 인정하는 분위기에 있다. 2009년 4월 두 나라는 사우스조지아 & 사우스샌드위치 인근 해역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자료를 유엔 대륙붕한계위원회(CLCS)에 제출했다. 그러나 2016년 CLCS는 영국의 영유권을 인정하면서 아르헨티나가 다시 항소하고 있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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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1
  • 러시아와 스페인이 맺은 세기의 로맨스
    18세기 초인 1724년, 러시아인들은 아시아와 북미 대륙을 바다로 갈라놓는 베링 해협까지 탐험했으며 1741년에는 러시아인 선장 알렉세이 치리코프가 베링 해협을 건너 알래스카에 상륙했다. 알래스카의 원주민인 틀링깃족들이 종종 러시아인들을 습격하기도 했으나, 러시아의 군사력에 의해 모두 진압되었다. 러시아인들은 알래스카 남부에 시트카라는 도시를 건설하고, 이곳을 러시아령 알래스카 식민지의 수도로 삼았다. 러시아인들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드넓은 시베리아를 정복해 나갔던 이유는 바로 여우와 수달과 담비 같은 동물들의 모피를 얻기 위해서였다. 겨울이 길어 추운 날이 많았던 러시아에서 담비나 여우 가죽으로 만든 모피는 추위를 막을 수 있는 고급 상품으로 여겨졌다. 한 예로 1582년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의 코사크 군이 시비르 칸국을 정복했고 수많은 모피들을 노획하여 당시 차르였던 이반 4세에게 담비와 여우의 모피들 수만 장을 바쳤다. 수많은 모피들을 보고 감탄한 이반 4세는 시비르 칸국을 정복한 러시아군 사령관인 예르마크가 예전에 저질렀던 약탈죄를 비롯해 코사크 군 전원를 사면했다. 이렇게 시베리아 원주민들을 정복해가면서 얻은 모피들은 러시아의 국가 경제에서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1623년 시베리아의 러시아 인 관리들이 모스크바에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검은 여우 모피 두 장의 가격은 110루블인데, 그 돈으로는 말 10마리와 암소 20마리 및 100에이커의 땅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1650년대에 이르면 러시아는 국가 수익의 최대 30% 가량을 모피 무역으로 충당할 정도였으니 그 가치는 실로 막대했다. 그래서 시베리아 정복에 나섰던 러시아 인들은 모피를 가리켜, “털이 달린 황금”이라고 불렀다. 1598년에서 1613년 동안, 러시아는 제위 계승을 놓고 러시아 동란 시대라는 최악의 내전을 맞이할 때 시베리아에서 얻은 모피로 인한 막대한 수익으로 인해 정부가 파산하지 않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아울러 모피는 러시아와 그 외의 유럽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에서 중요한 선물이 되기도 했을 정도였다. 1595년 러시아는 신성로마제국에 다람쥐 모피 33만 장과 담비 모피 6만 장을 선물로 보냈고, 1635년 오스만투르크에는 1만 루블의 모피를 휴전 협상에 사용할 용도의 선물로 보냈다. 그러나 러시아 인들이 시베리아의 과도한 모피 확보를 위해 야생동물들의 개체수가 줄어들자 알래스카와 북미 대륙에까지 진출했는데 그러한 이유는 바로 모피를 얻기 위해서였다. 알래스카가 아시아가 아닌 북미 대륙에 속한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러시아 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1799년 러시아의 무역 상인인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레자노프(Nikolay Petrovich Rezanov : 1764~1807)는 북미 대륙에 러시아의 식민지 개척을 목적으로 한 사업체인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를 설립했다. 같은 해, 레자노프는 러시아 차르인 파벨 1세로부터 앞으로 20년 동안 러시아-아메리카 회사가 북미 대륙에 진출하는 모든 거점에서 운영과 사업을 독점적으로 할 수 있는 승인을 담은 면허장을 받았다. 이로써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는 러시아 정부를 대신하여 알래스카를 포함한 북미 대륙을 식민지로 삼을 수 있는 모든 자격을 얻은 셈이 되었다. 레자노프와 그의 심복인 알렉산드르 안드레이비치 바라노프(Alexander Andreyevich Baranov : 1746~1819) 등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고위급 간부들은 알래스카를 식민지로 삼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북미 대륙의 더 남쪽까지 진출하려 하였다. 우선 모피 상인들이 탐내던 모피를 더 많이 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서야 했다. 또한 알래스카 식민지에 차츰 러시아에서 유입한 인구들이 늘어나면서 사냥이나 고기잡이만으로는 식량을 충분히 공급하기가 어려워지자 풍부한 농업 생산력을 지닌 따뜻한 남쪽의 땅이 필요했다. 레자노프는 배를 타고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한 끝에 1806년 4월,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 레자노프는 캘리포니아를 다스리는 스페인 장관인 호세 다리오 아르게우엘로를 만나서, 캘리포니아에서 알래스카의 러시아 인들에게 식량을 제공하면, 그 대가로 모피를 주겠다는 무역을 제안했다. 당시 스페인령 캘리포니아에서는 외부로 식량을 유출하는 일이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호세 장관은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레자노프는 고민을 하다가 호세 장관이 주선하는 연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호세 장관의 딸인 마리아 콘셉시온 아르게우엘로(Maria Concepcion Arguello: 1791~1857)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호세 장관의 외동딸로 당시 캘리포니아 제일의 미녀로 칭송받던 여인이었다. 15세의 소녀였던 마리아는 42세의 중년 남성인 레자노프와 만나자 사랑에 빠졌고, 이윽고 그와의 결혼까지 결심하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호세는 크게 놀랐다. 당시 스페인 인들이 그렇듯이 호세 장관과 마리아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그런데 레자노프는 러시아 인이었기에 러시아 정교회를 믿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의 카톨릭에서는 원칙적으로 키톨릭 신자끼리만 결혼하도록 허용하는데, 다른 종파인 러시아 정교회 신자와 결혼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호세는 마리아에게 교회법상 레자노프와의 혼인은 허락할 수 없다고 여러차례 설득했으나, 사랑에 빠진 마리아는 무슨 일이 있어도 레자노프와 결혼을 해야겠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에 결국은 호세는 딸에게 굴복하게 된다. 6주일 후, 레자노프는 마리아와 일단 약혼식을 올렸다. 딸을 아끼던 호세는 사위가 된 레자노프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빵과 말린 고기 등 식량이 가득 실린 수송선을 알래스카로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이리하여 약혼식이 이루어졌지만, 레자노프는 캘리포니아에 계속 있을 수가 없었다. 러시아 차르인 알렉산드르 1세에게, 앞으로 북미 대륙에서의 식민지 운영에 필요한 지원을 더 많이 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러시아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나야했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는 북미 대륙에 정착할 대규모의 러시아 이민자들을 보내달라는 제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레자노프는 마리아에게 2년만 기다리면 꼭 돌아와서 정식으로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알래스카를 거쳐 캄차카 반도에 상륙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시베리아 대륙을 통과해야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던 도중인 1807년 3월 8일, 레자노프는 시베리아 중부 도시인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사망했다. 대륙과 대양을 넘나들며 정신없이 사업을 벌이느라 피로해진 레자노프의 사인은 과로사였다. 지금도 크라스노야르스크에 남아 있는 레자노프의 무덤에는 마리아를 그리워하며 남긴 유언인 “나는 당신을 다시는 볼 수 없다오. 하지만 나는 결코 당신을 잊을 수 없소.”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한편 캘리포니아에서 하염없이 레자노프를 기다리고 있던 마리아는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무척 상심하여 몬테레이에 수녀원을 만들고 수녀원에 들어가 평생 동안 수녀가 되어 결혼하지 않고 살다가 1857년에 죽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연인이었지만, 마리아는 레자노프를 진심으로 사랑했던것 같다. 2개 대륙과 대륙, 종교와 나이를 초월한 사랑은 현재까지도 세기를 초월한 로맨스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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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9
  • 국제관계는 철저히 실익, 국제 간의 실익보다 감정이 우선인 일부 한국인들
    새벽 단상으로 불편한 비판을 할까 한다. 나는 한국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국제관계는 철저히 실익으로 따지는 것인데 한국 사람들은 국제 간의 실익보다 감정이 우선이고 익숙하던 것들만 하려고 한다. 공연히 모험하다가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했던 것, 익숙한 것만 할려고 하니 거기에서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는데도 다른 것을 찾을 생각 자체를 안 한다. 그러니 각종 근거와 지표를 갖다 줘도 무시하거나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그러면서 친중, 친미에만 무게를 두고 앵무새처럼 주장하며 그들이 마치 우리의 모든 면을 풍성하게 해줄 것처럼 믿는다. 나라가 잘 살고 실질적인 이익을 얻어야 한다는데 그걸 그렇게 싫다고 하는 나라와 사람들을 한국에서 처음 봤다. 오히려 실익적인 부분을 배격하고 이익을 얻고 있는 나라를 밀어내고 그들을 욕하기까지 한다. 다른 나라들은 하나라도 얻을려고 난리를 치는데 한국 사람들은 뭘 얻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다. 정말 특이하다고 느끼고 있다. 그 이유를 유추해 본다면 중근세 역사에서 한국은 실리외교 및 국가 간의 이해득실을 따지며 실익을 챙기는 역사적 경험이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벽란도에 공관을 두고 동북아시아로 들어오는 물목들을 중국 송나라 및 금나라, 원나라와 일본 등으로 가볍게 중개해주고 그로 인한 실익까지 계산했었다. 나는 한국사에 있어 진정한 "동북아시아의 팍스 코리아나"를 실현한 나라를 고려로 본다. 북방의 패권을 두고 다투는 거란 요나라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북방의 패권을 쥐다시피 했다. 고려와의 전쟁에서 패한 이후, 발해를 무너뜨리고 북방의 패자를 자처했던 거란 요나라는 서서히 북방에서 힘을 잃어갔다. 승자인 고려는 송나라로부터 막대한 물목을 벌어들였고 여진과 일본에게서 조공을 받았으며 동남아, 멀리 중동의 상인들도 고려까지와서 진정한 해상 실크로드를 실현하여 동북아시아 해상 교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1010년부터 여진이 세력을 확장한 1110년에 이르는 약 100년의 기간동안 고려는 동북아시아의 실질적인 주인이었다. 우리가 동북아시아 해상 교역 및 세력을 잃게 된 때는 조선 시대 부터다. 이성계가 위화도 반란에 이은 불법 쿠데타로 고려를 뒤엎고 중국 명나라에 사대하는 동안 우리는 고려가 갖고 있던 해상 패권을 고스란히 명나라에게 넘겼다. 이 때부터 조선은 국가 간의 국제 정치에서의 실리 및 이해득실을 따지는 부분에서 멀어졌던 것이고 상공업을 천시하면서 오로지 중국을 섬기는 사대주의를 대의(大義)로 여겼다.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농업과 상공업자들을 개차반으로 생각하니 국가의 근간이 약해지기 시작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었어도 이와 같은 행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세상은 변화했고 서양이 대항해시대를 열면서 식민지를 확보했다. 그리고 산업혁명이 성공가도를 달리게 되면서 동북아시아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그런 가운데 가장 빨리 그와 같은 변화를 감지한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은 비록 미국에 의해 1853년에 강제 개항을 했지만 이를 수치로 받아들이지 않고 서양의 문물을 흡수해 빠르게 낙후된 것을 개선해 나갔다. 상공업의 발달이 부국강병을 갖고 온다는 이치를 일본이 먼저 깨달은 것이다. 그렇게 세상이 변했는데도 조선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상공업을 천시했기에 실리와 국익을 따지는 것도 천한 장사치가 하는 행위라 생각하여 배격했고 국가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것도 천하게 여겼다. 조선은 오로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와 공자님의 나라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한심한 체제였던 것이다. 그 결과 먼저 깨달아 열강의 위치에 올라선 일본의 목표가 되었고 결국 우리는 일제 치하에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모험심은 줄어들고 실패하면 남탓만 하고 있다. 최근에는 국익이 밥먹여 주냐는 한심한 자들도 보았다. 상공업을 천시하며 실리와 국익을 따지는 것이 천한 장사치가 한다 생각했던 조선과 작금 대한민국은 하나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국과 중공, 러시아, 일본 사이에서 고도의 국제정치적 계산으로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실리를 찾아야 하는데 이 얘기는 여전히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있다. 오로지 감정에만 취해서 기분 좋으면 우방이고 기분 나쁘면 적국이라 욕 쳐대고 있는 꼴들을 보면 딱 그러하다. 한국 사람들은 개개인적으로 실익을 따지고 이해득실 따지는 것을 월등히 좋아하지만 국익을 따지는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국익이라는 것이 개인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익이라는 것은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 것이고 국가가 힘을 갖는 것이다. 국가가 힘을 가지면 개인의 이익을 적극적으로 보호할 수 있다. 국가가 없는 국민은 존재할 수 없고 국가가 힘이 없으면 개인의 이익을 남에게 털리더라도 보호를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국가의 이익은 곧 국민 개인의 이익을 서로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존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게 해준다. 우리 기업이 러시아에게 외화를 많이 벌고 있고 러시아 또한 자국의 이익되니까 한국의 투자를 받아들이는건데 이번 전쟁이 아니면 어디 붙어있을지도 모르는 나라인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대체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나? 그렇게 물어보면 생각없이 우크라이나에 투자하면 되지라는 사람도 셀 수 없이 많다. 어떠한 실익과 이유 때문에 투자하냐 물어보면 거의 99.99%가 강대국 러시아의 침공을 받아 불쌍하니까라고 대답한다. 러시아는 우리와 비행기 타면 2시간 거리고, 우크라이나는 9,000km나 떨어져 있어 직접적인 투자관계 설립 및 국제 관계상으로 가까이 지내는게 쉽지 않다고 얘기해도 귀를 막고 고집을 부린다. 왜 이런 근성이 나오는지 참 이해불가에 알 수 없는 노릇이라 이제는 기이하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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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8
  • 현 러시아의 최동단 섬 사할린의 중요성
    사할린은 현재 지하 자원 창고로서의 가치가 높지만, 20세기 초중반까지만 해도 일본이나 러시아도 크게 가치를 두지 않던 땅이었던 곳이다. 워낙 기후가 험한데다가 땅 자체도 경작이 거의 불가능한 불모지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부터 일본에서는 이 땅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러시아가 남하하기 전까지 별로 개발하지 않았었다. 사실 당시의 일본으로서는 홋카이도, 쿠릴 열도도 사실상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전통적으로 더위를 피하기 위한 구조로 짜여진 일본식의 가옥과 의복은 사할린에서는 불필요했고, 지금처럼 교통과 운송이 발달한 때도 아니기 때문에 멀리 떨어진 사할린까지의 물자의 보급에도 어려움이 컸다. 실제로 일본이 남부 사할린을 얻어낸 것에 대해서도 쓸모없는 땅을 얻었다는 부정적인 여론도 다수 존재했을 정도였다. 물론 영토가 넓을수록 좋았기에 북부 사할린 전체까지 차지하려고 했지만 러시아도 마찬가지로 사할린보다는 훨씬 더 이점이 많은 연해주나 만주 지역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도시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나 나홋카 같은 도시들과는 달리 현재도 사할린은 코르사코프, 유즈노사할린스크 등 섬 내 주요 도시들이 종전 당시의 인구나 인프라가 크게 변하지 않은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사할린은 석유와 가스가 공업 생산량의 80%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될 정도로 비중이 높다. 석유와 가스 덕택에 실업률이 2%에 불과할 정도로 경제는 계속 활황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할린스트임-2 송유관 사업 지분 구성은 러시아 국영 가스프롬 50%, 영국 석유기업 셸 27.5%, 일본 미쯔이 물산 12.5%, 미츠비시 상사 10%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할린스트림-2 사업에서는 2009년 LNG 출하가 시작됐으며 연간 LNG 생산능력은 약 1천만t 정도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풍부한 가스와 석유생산량을 갖고 있다. 미국과 더불어 서방과 함께 러시아를 제재하고 있던 일본은 역으로 러시아에게 맞제재를 당해 곤혹을 겪고 있다. 러시아는 현 상황에서 일본과 평화조약 체결 협상을 지속할 의사가 없고 일본이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취한 일방적 대러 제재의 명백히 비우호적인 성격을 고려한 것이라고 밝히면서 일본과는 더이상 대화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러시아 외교부는 이와 더불어 러시아 남쿠릴열도와 일본 사이의 무비자 방문에 관한 1991년 협정과 남쿠릴열도 거주 일본인들의 고향 방문 간소화에 관한 1999년 협정에 근거한 일본인들의 무비자 왕래를 중단하겠다고 밝히면서 일본이 그동안 구축해온 자원 외교도 위협을 받고 있다. 일본은 가스와 석유 수급이 어려워지면서 물가가 전체적으로 폭등하고 있다. 이에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지난 3월 31일에 러시아 극동 사할린에서 석유와 천연가스를 생산하는 사할린스트림-2 사업에서 철수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밝히면서 러시아의 가스와 석유로 위기를 타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일본 정부는 과거 석유 위기를 교훈 삼아 에너지의 중동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공급원 다원화를 추진했으며 그중 하나가 러시아 자원 개발이다. 아사히 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일본은 LNG 수입의 약 8.8%, 원유 수입의 약 3.6%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사할린스트림-2 사업에서 생산되는 LNG의 약 60%는 일본의 전력회사나 가스 회사용도로 쓰이고 있다. 문제는 이와 같은 문제도 한국 또한 비우호국가로 찍힌 상태이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에 있다. 한국은 현재 사할린스트림-2에서 생산된 LNG를 연 150만t(약 20억㎥) 수입하고 있다. 러시아는 사할린스트림-2 LNG 공장의 생산 능력을 증대하는 한편 또 다른 가스전 사할린스트림-1에도 LNG 공장을 세워 수출을 늘리는 프로젝트를 추진 중에 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러시아는 한국이 사할린 LNG 신규 프로젝트에 투자하고 이곳에서 생산된 LNG를 추가로 구매해주길 희망하고 있었다. 한국은 러시아-중국-몽골 등과의 경제협력을 전담할 북방경제협력위원회까지 신설하고 러시아와의 경제협력 확대에 막대한 공을 들였다. 그러나 한국은 북핵 위기 악화로 인해 러시아산 PNG 수입을 위한 북한 경유 가스관 건설 사업이 난관에 놓인 상황에서 러시아 측의 LNG 사업 제안을 신중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사할린 LNG 수입량 확대도 LNG 공장 증설 및 신규 건설 등에 상당한 시간이 걸려 향후 5~6년 뒤에나 실제로 수입량을 늘릴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이와 같은 프로젝트가 무르익어 갈 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생한 것이다. 한국은 전체 가스와 석유의 5% 정도지만 중국, 일본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이 러시아 사할린스트림-2에서 가스와 석유를 수입하고 있다. 중동에서 들여오는 것보다 러시아 사할린산 가스와 석유는 매우저렴한 가격에 사올 수 있는데다 인건비와 운송비까지 중동보다 모두 저렴했다. 그래서 러시아 가스와 석유의 수입을 점차 늘려가고 있는 중에 이번 전쟁으로 인해 서방 세력과 함께 대러제재에 동참함에 따라 러시아로부터 "비우호국가"로 찍히게 된다. 러시아로부터 가스와 석유 운송이 쉽지 않게 된데다가 이번엔 러시아 정부의 조치로 가스와 석유를 루블화로 지급해야 한다. 이런 사태들로 인해 물가는 수직 상승하기 시작했고 유가와 가스 값 또한 연일 고공행진 중에 있다. 러시아와 같이 자원이 풍부하고 영토가 넓어 식량 생산도 높은 국가는 그럭저럭 버틸 수 있지만 한국 같이 자원도 없고 원자재를 들여와 제작해 수출하는 형태의 국가는 물가 지옥과 더불어 식량 위기까지 헬게이트가 봉인 해제된 셈이다. 앞으로 이 부분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이 높은 상황인데 국내에는 아직도 위기 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태평가를 부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말 그대로 한국은 지금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다 돌아가는 전기톱날 앞에 서 있는 상황이다. 이와 같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위기의 동북아시아 국제 정세 속에 국회는 젤렌스키에게 연설시키는 것을 조율하는 뻘짓을 하고 있고 우크라이나가 6.25 전쟁 당시 한국을 도와줬다는 잘못된 역사관을 믿으며 우크라이나에 성금 및 모금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조금만 눈을 떠보면 뭐가 위기인지가 보이는데 아직도 인지를 못하고 헛짓거리 하는 것 보면 놀랍다 못해 기이하기까지 하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26
  • 오늘은 6.25, 한국전쟁 74주년을 기념하여
    터키-아르메니아 대학살 사건은 국제적으로 매우 복잡한 문제 - 下편은 내일로 미루고 중요한 얘기를 해볼까 한다. 나는 여태까지 누누히 주장해왔다.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게 되면 러시아는 북한을 지렛대 삼아 우리를 압박할 것이고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보낸다면 러시아 또한 북한에 살상무기를 보내 우리의 안보를 위협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하여 여러 고민을 해봐야 한다. 지금은 74년전의 6.25 전쟁 때와 입장이 다르다. 군의 전술과 전략, 국가 간의 정책 및 국제 정세는 시기에 따라 바뀔 수가 있다. 따라서 우리의 동맹국들과 미국 또한 기조 전략이 바뀌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미국은 오바마 시기부터 주한미군을 축소해오고 있는데 이는 미국의 국제 정세와 정책, 대 동북아 전략이 바뀌고 있음 의미한다. 주한미군을 뺀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우리는 이를 빠르게 감지하고 대책을 마련하고 있었어야 한다. 한국은 늘 안전불감증과 오랜 평화에 맛들여 전혀 긴장하지 않고 대책 또한 세우지 않고 있는데 지금부터 착실히 대책을 만들어 나가지 않으면 우리의 안보는 앞으로 보장할 수가 없다. 미국은 대 동북아 전략을 상황에 따라 수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미국이 영원히 지켜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기 바란다. 그리고 우리는 전쟁이 끝난게 아니다. 종전이 아니라 휴전 상태이고 사실상 전시나 다름없다. 휴전 협정을 조인한 지 71년째인 현재이고 그동안에 우리는 거의 긴장을 놓다시피 살고 있지만 사실 세계사에서 가장 기록적인 휴전 기간을 보내고 있는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인들은 74년 전, 6.25 때와 지금이 국제 정세적으로 같을 것이라 착각을 하고 있다. 한국인들 대다수 사람들의 특징은 세계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고 그대로 일 것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어 러시아군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처럼 무장이 허접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고 중동 국가들도 과거 6~70년대처럼 무장이 허접해 이스라엘이 상대해도 모두 이길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변했지만 그들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일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상식이라 착각하고 있다. 일본과 유럽은 여전히 선진국이고 미국은 세계 최강이며, 러시아와 중국은 가난하고 여전히 후진국이며 공산국가에 소달구지 끌고 다니는 나라로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착각과 안전불감, 그리고 변하지 않은 인식이 상식으로 굳어지는 현상은 매우 위 험한 적신호라 볼 수 있다. 74년 전 그 때는 냉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지 불과 5년 밖에 안됐던 때였다. 그때는 미국이 우리를 도와 줄 여력이 있었고 냉전 사상 첫 지상전이 6.25라는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74년 전과 지금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냉전 시대는 끝났고 미군도 예전 같지 않다. 미군은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고 한 때는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을 제압했지만 결국 패퇴하여 도망나왔다. 이를 패배로 인정하지 않고 미국의 전략적 철수라고 하는데 전략적 철수가 아니라 패배해서 도망나온 것이다. 미군의 첨단무기를 카불 공항에 그대로 두고 떠난 것을 보면 그만큼 미군이 급했다는 것을 시사해주는 것이다. 그 후로 미국이 지원하여 대리전을 수행하는 나라들은 상대들이 녹록치 않아 고전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도 그러하고 이스라엘도 가자를 쉽게 점령하고 하마스를 전멸시킬 줄 알았지만 개전한지 9개월이 넘어가는데 꽤 고전하고 있다. 게다가 레바논에서 헤즈볼라를 상대로 쉽지 않다는 보도들이 여기저기서 흘러 나온다. 이어 한 줌도 안 되는 예멘 후티군마저 이기지 못하고 있다. 이게 지금까지 냉철하게 판단한 미국의 현 주소다. 더불어 미국은 장기적인 지상전을 수행할 여력이 없고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대만을 지원하고 있는 판국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지면 미국은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주한미군도 이전에 비해 계속되는 축소로 인해 몇 없으며 이들조차도 침공해오는 적을 6.25 때처럼 목숨 걸고 상대할 수 있을지의 여부도 불투명하다. 이들은 여의치 않으면 부산에서 사이공의 프리퀀드 윈드 작전,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처럼, 그리고 중화민국이 중국 공산세력에 밀릴 때처럼 철수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그럴 확률이 굉장히 높아지고 있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한국인들이 있지만 그들과 우리가 구체적으로 뭐가 다른가? 남베트남과 아프가니스탄 민주정부도 미국의 동맹이었고 장개석의 국민당도 미국의 동맹이었다. 우리는 남베트남, 아프가니스탄 민정, 중화민국과 다르게 미국에게 있어 특별한 존재인가? 우리는 스스로 지킬 능력이 없는 채로 미국에 의지하면 결국 미국에게 배신을 당하게 될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남베트남, 아프가니스탄 민정, 중화민국처럼 말이다. 우리는 이전의 역사들을 상기하여 앞으로 미국을 대비해 러시아를 보험용으로 생각해 잘 지내야 한다. 그게 우리가 살 길이다. 러시아는 중국, 북한을 설득하거나 이들을 중재할 수 있는 힘이 있다. 미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과 믿음보다 우리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대안을 찾고, 외교적으로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과 동등한 입장에서 잘 지낼 수 있는 묘안을 내놓아야 할 때다. 러북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러시아를 안보의 보험용으로 들여놨듯이 우리도 우리 안보를 보험용으로 러시아를 설정해놓고 중국과 북한을 견제하며 일본,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6:4 정도로만 맞춰 놓는게 현 시점에 있어 최상의 전략이다. 우리는 다른 때보다 매우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 말 그대로 위기라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우리가 이전과 같이 안전불감에 이전과 같겠지라는 방심을 하고 긴장의 끈을 놓는다면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된다. 그 때 되면 후회해봤자 늦는다. 아직까지는 골든타임이 남아 있지만 얼마 되지 않는다. 이에 대한 경각심을 모두가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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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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